냉소 사회 - 냉소주의는 어떻게 우리 사회를 망가뜨렸나
김민하 지음 / 현암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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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발발하여 엄청난 규모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미국산 소고기와 광우병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집회를 주도했던 이들의 주장을 지금 검증해 보면, 잘못된 정보가 적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오늘날, 일베를 비롯한 우파 네티즌들은 이 사건을 두고 "광우뻥"이라고 부르며 조롱하며, 좌파에 의해 선동된 전형적인 사례로 보고 있다. 일베를 통해 진실에 눈을 떴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당시 촛불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지만 이후에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괴담에 근거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고 일베로 전향하였다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미국산 소고기 촛불집회의 열정과 열광이 식고 난 2010년대에는 냉소주의(cynicism)가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다. 2012년의 대선과 일베의 등장은 그러한 풍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냉소는 열정과 열광의 대척점에 존재하며, 정의나 도덕을 비웃는다. 한국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와 남녀평등과 같은 가치를 상대화시키고 희화화함으로써 재미를 느꼈던 일베는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괴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진보좌파 진영은 촛불집회 이후, 무력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광장에서 울려퍼졌던 "MB OUT"이라는 구호는 정권에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타격만을 가했을 뿐이고, 2012년 대선에서도 정권교체는 실패하였다. 현실세계에서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해 "광우뻥" 괴담 논란으로 인해 정당성까지도 흔들렸다. 시위의 열기로부터 빠져나와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산 소고기가 수입되면 변종 프리온으로 인해 광우병이 공기로 감염된다는 소리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보기에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경우가 많아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광우병 촛불집회는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쉽게 긍정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생겨났다.

선동에 속았다는 느낌에 빠진 사람들은 어떤 가치나 대의도 의심부터 하고 보는 회의주의적, 상대주의적 외피(外皮)를 둘러싸게 된다. 냉소주의의 이면(裏面)에 있는 방어기제(防禦機制)는 무언가를 믿었지만 그것이 거짓이었을 경우에 받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냉소주의의 본질에 대해 김민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냉소주의자의 어법은 그래서 '진정한 무엇은 있다'와 '진정한 무엇은 없다'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고 간다. '진정한 무엇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지금 여기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무엇'을 찾을 때까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12)

이렇듯 무력감과 체념이 뒤섞인 채 뒤틀린 냉소주의는 2016년 10월부터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며 벌어진 촛불집회와 함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2008년 촛불집회의 전말(顚末)을 알고 있는 냉소주의자들은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피력했을 것이다. 아무리 촛불집회를 해 봐도 새누리당이 100석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탄핵안이 가결되기 어려울 것이고, 설사 가결이 된다 하더라도 헌재 재판관들의 성향으로 보건대 탄핵이 부결될 가능성이 크고, 촛불집회 자체도 시간이 갈수록 그 열기가 사그라들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이 냉소주의의 태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냉소주의가 틀렸다. 연인원 1500만 명 넘게 동원한 촛불집회는 불가능해 보였던 박근혜 탄핵을 성사시켰고, 이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진보좌파 진영의 염원이었던 정권교체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어차피 뭘 해도 안 돼"라고 말하던 냉소주의자들이 뻘쭘해질 차례였다. 물론 그렇게 탄생하게 된 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엇갈리겠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대통령마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이제는 정치에 대한 실망->체념->냉소->혐오의 사이클로부터 벗어나 냉소주의를 극복하고 무언가 새로운 꿈을 꿔 볼 수 있는 단계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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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불편러 일기 - 세상에 무시해도 되는 불편함은 없다
위근우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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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무렵부터 인터넷에서 이른바 "프로불편러"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라는 영어 단어와 "불편(不便)"이라는 한자 단어, 그리고 영어 접미사 "-er"을 조합한 말이다. 해석하자면 "매사에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문제될 것이 없는 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 있다.

한국 사회의 여러 문화적, 사회적 현상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해 온 위근우의 <프로불편러 일기>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프로불편러"를 자인하는 저자는 "지금 이곳에서 프로불편러는 불합리함과 부당함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에 대한 자기긍정의 표현이다"(4)라고 말한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불편과 불합리(不合理), 부당(不當)은 각각 다른 개념이 아닌가? 불합리함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지만, 불편함과 부당함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持論)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편함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의 문제고, 부당함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원칙의 문제다. 이른바 "프로불편러"의 문제는 불편함과 부당함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 같다. 즉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부당하다"고 말하고, "부당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불편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사례로 말하면, 가수 아이유의 노래 <제제>가 소아성애(pedophilia)를 연상시킨다고 느끼는 것은 불편함의 문제다. "아이유 노래는 소아성애 같아서 불편해"라는 개인의 감상에 대해서 "맞아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라고 공감을 살 수도 있고, "나는 안 그렇던데"라는 반론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관적 불편함을 사회적 원칙의 보편적 정의에 의거한 부당함으로 포장하여 음원 폐기까지 요구했던 사건은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 사회의 보편적 원칙으로서 통용되어야 한다는 유아(幼兒/唯我)적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사회적 논의를 통해 고쳐져야 할 부당함이 단순히 개인의 불편함으로 축소되는 문제 또한 발생하고 있다. 사회에서 차별이나 억압은 정의(正義)에 어긋나는 부당함의 문제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에는 불편함이라는 말로 토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예로 나온 몇몇 연예인들의 예능에서의 폭언과 '막말(妄發)'은 불편할 일이 아니라, 부당하다고 시정을 요구해야 할 일이다.

물론 불편함과 부당함의 구분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부당함의 기준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사람들이 부당함을 호소하는 대신에 불편함이라는 개인의 감정 문제로 후퇴하는 이유는 부당함의 근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작업이 그만큼 지난(至難)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함과 부당함을 같은 개념으로 퉁쳐서는 안 된다. 개인이 불편하게 느낌으로써 끝날 문제와 논쟁을 통해 부당함이라는 기준을 확립시켜야 할 문제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편함이라는 감정은 중요하다. 때로는 그것이 부당함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는 시발점(始發點)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내가 불편하다'는 주관적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불편함과 부당함을 구분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불편함"이라는 장막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논리를 통해 그 문제의식을 관철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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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7-30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편과 불합리(不合理), 부당(不當)은 각각 다른 개념이 아닌가? 불합리함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지만, 불편함과 부당함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持論)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편함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의 문제고, 부당함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원칙의 문제다. 이른바 ˝프로불편러˝의 문제는 불편함과 부당함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 같다. 즉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부당하다˝고 말하고, ˝부당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불편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불편함과 부당함(부당성)은 분명 서로 다른 개념이긴 합니다. 그 반대인 편함과 정당함(정당성)이 서로 다른 개념인 것처럼 말이죠. 헌데 따지고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만, 정당함 · 부당함 혹은 정당성 · 부당성 혹은 justice · injustice 혹은 righteousness · unrighteousness는 무엇보다도 먼저 윤리학적, 법적, 인식론적, 정치(철)학적, 사회학적 기원을 지닌 개념이죠. 반면에 편함 · 불편함이라는 개념은 쾌 · 불쾌와 연관된 것으로서 감정적 · 정동적 심리 유형에 속하고 심리학적, 신경학적 기원을 지닌 개념이라 할 수 있죠. 이런 기원적 개념 분석이 있어야 혼동과 오용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당함 · 부당함 혹은 정당성 · 부당성 혹은 justice · injustice 혹은 righteousness · unrighteousness 같은 것들이 과연 자연 세계의 본질적 요소로서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일까요? 또한 편함 · 불편함, 쾌 · 불쾌와 같은 감정적 요소들도 자연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한 요소들일까요?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위 개념들이 인간이라는 의식적 존재들이 구축한 인위적/인본적 체계의 일부라면, 본질적 의미에서 위 개념들은 명확하게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법합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서로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도 쌍방의 개념들은 기원적 단계부터 상호작용적 영향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위근우의 『프로불편러 일기』에서와 같은 일상생활적, 문화적, 사회적 논의 문맥에서는 (개념적 엄밀성이 비교적 느슨하다고 볼 수 있는 논의 문맥에서는) 쌍방의 개념들이 서로 분리돼 있기는커녕 떼려야 뗄 수 없는 혼합적 일체로서 논의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윗글에서 의정부짱짱맨 님께선 《불편함이라는 감정은 중요하다. 때로는 그것이 부당함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는 시발점(始發點)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반대로 부당한 행위를 하는 자들도 윤리학적, 법적, 인식론적, 정치적 정당성을 요구하는 자들한테 굉장한 불편함을 느끼죠. 이처럼 사회적, 당위적 차원의 정당함 · 부당함은 개인적, 주관적, 감정적 차원의 편함 · 불편함 혹은 쾌 · 불쾌와 기원적인 단계에서부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죠. 다만 의정부짱짱맨 님의 지적처럼 이런 모든 논의에서는 《단순히 ‘내가 불편하다‘는 주관적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보고요. 그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의정부짱짱맨 2017-07-30 19:04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몇년만에 달린 댓글인지 모르겠네요ㅠㅠ)
본문에서 깊이 다루지 못한 불편함, 부당함의 기원(자연적, 인위적)에 대해서 길고 진지한 문제의식을 제기해 주셔서 한층 더 깊이 있는 내용이 된 것 같습니다.
저는 공동체주의보다는 자유주의에 가까운 입장이라서 정의(justice)와 선(goodness)을 구분하는 전제에서 글을 쓴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불편함과 부당함이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주관적 감정의 문제 보편적 원칙으로 수용되어야 할 문제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시로 드신 것처럼 불편함에도 부당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느끼는 불편함이 있는 반면에 부당한 행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불편함도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봤을 때 불편함은 나는 불편하다/안 불편하다는 상대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프로불편러 일기>가 엄밀한 개념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에도 동의하고, 책의 그런 부분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쓴 글은 아닙니다.
책 내용을 토대로 확장된 이야기를 해 보자는 의도에서 쓴 글이에요.
다시 한 번 길고 유익한 댓글 감사합니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1
정희진 엮음, 정희진.권김현영.루인 외 지음 / 교양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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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원래 지향하던 가치와는 달리 한국에서 최근 페미니즘 논의는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청년을 조롱하거나 전태일 열사/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모욕하고, 게이나 트랜스젠더 등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양산하고, 인터넷 마녀사냥을 조장하는 워마드 같은 사이트가 페미니즘 세력으로 오인받으면서 건전한 페미니즘 논의조차 "메갈"이나 "워마드"로 몰리는 실정이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는 기존의 페미니즘 논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변화하고 이동하지 않는 주체, 운동, 언어는 '운동권/역'이라는 또 다른 기득권 집단과 '연줄' 집단을 만들 뿐이다. '서울, 중산층, 젊은, 이성애자, 고학력, 비장애인' 중심의 여성 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며 이들은 사회가 수용 가능한 '여성다운 여성'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11)

"남녀동권주의(男女同權主義)"로 번역되는 페미니즘의 사전적 정의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과 목표, 혹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이다. 즉,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전제로 하여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이념이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은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인터섹스(LGBTI) 등을 배제한다. 양성평등을 넘어 성평등을 추구하기 위해서 페미니즘 또한 포스트페미니즘(post-feminism)으로 업그레이드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이 책은 미성년자 의제강간, 동성애와 교회, 공연음란죄와 퀴어범죄학 등의 실천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메갈리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메갈리아로부터 파생된 워마드는 동성애자 및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발언으로 잘 알려진 시스젠더(cisgender, 지정성별) 헤테로 중심주의 사이트다. 물론 워마드의 전신인 메갈리아는 워마드와는 분리되어야 하지만, 메갈리아 시절에도 호모포비아적 혐오발언이 다수 있었다.

다섯 명의 필자들의 글을 모은 책이기 때문에 수록된 글들 사이에 논조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메갈리아에 관한 글에서는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남혐이 아닐뿐더러, 나아가 '여혐혐'에서 그치지도 않는다"(145)며 메갈리아가 이성애 중심주의 또한 극복하려 했다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은 "2001년 청소년 유해매체 검열 대상 지정에 반대하며 '팬픽도 문학이다'라고 외쳤다"(144)는 것인데, 2001년에 있었던 일이 메갈리아의 탄생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다. 더구나 이 글에서는 메갈리안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찬탄받던 '촛불소녀'들이기도 했다"(132)고 말한다. 단순히 세대로만 보자면 2008년 촛불시위에 참여한 촛불소녀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워마드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근거가 빈약하다고 느껴진다.

페미니즘이 양성평등의 패러다임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에 앞장서는 메갈리아/워마드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책에 수록된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는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 개신교의 정치세력화와 교세 유지를 위해 동성애 혐오가 이용되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 혐오가 한국 개신교에 국한된 현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 등의 서아시아 기원 일신교들은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 종교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동성애 혐오는 한국 개신교의 특수한 상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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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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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의 뒷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책 소개가 실려 있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1776년,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애덤스미스가 잊은게 한 가지 있다. 바로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저녁을 차려 준 그의 어머니다.

이 문장을 보고 딴지를 걸고 싶어졌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어머니는 왜 지나가던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아들에게 저녁을 차려줬을까? 그야 당연히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저녁을 차려주는 것이 아무런 사랑도 느끼지 못하는 타인에게 저녁을 차려주는 것보다 더 많은 기쁨과 만족감을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기심과 사랑은 이 책이 전제하는 것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 관계가 아니라, 사랑 역시 넓게 보면 이기심이라는 동기의 일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기심에 대해서 금전적 의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협소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예화(例話)에도 드러나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종종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복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말이다.
실제 사람들은 다시는 가지 않을 식당에도 팁을 남긴다. 경제적 인간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팁을 남기지 않아도 종업원이 자신의 수프에 파리를 넣는 등의 복수를 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팁을 다시 자기 주머니 속에 넣는다. (146)

팁(tip)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종업원의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고? 한국이나 일본 등의 팁 문화가 없는 나라 사람들이 미국 등 팁 문화가 있는 나라 사람들보다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면, 팁은 이기심/이타심의 문제가 아니라 관습의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들르지 않을 가게 종업원에게 팁을 주는 이유는 종업원의 복지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관습적인 생각을 벗어나서 팁을 안 주기로 결정할 경우에 발생하는 어색함이나 민망함, 스트레스보다는 팁을 주는 데 드는 금전과 시간 귀찮음이 비용이 덜 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경제학이 전제로 하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관념이 남성중심적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판을 가한다.

남성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제학에서도 그랬고 성 문제에서도 그랬다. 여성에게 이 자유는 금기 사항이었다. (중략)
여성에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여성은 출산과 생리라는 신체적 제약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합리적일 수가 없고, 이 때문에 그들은 합리성과 정반대의 개념이라고 규정되었다. (51)

이런 주장을 한 경제학자가 있단 말인가? 깜짝 놀라서 미주(尾註)를 확인해 보았다. 이 책의 미주는 인용하거나 참고한 문헌이 언급되는데, 해당 부분에 대한 미주는 없었다. 아마도 "여자는 남자보다 덜 합리적이다"라는 속설과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경제학의 전제를 혼동해서 허수아비 때리기를 한 것 같다. 이는 영어권에서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남자(man, men)가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던 것에 기인한 오해다. 물론 man이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비판 받아야 하겠지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經濟人)과는 관련이 없다. 적어도 여성이 남성보다 덜 합리적이라고 전제하는 경제학 이론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경제학의 경제적 인간이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다른 누구보다 저자 자신이 성별에 관한 고리타분한 이분법(남성=인공/여성=자연, 남성=합리적/여성=비합리적, 남성=이성적/여성=감성적, 남성=정신/여성=육체)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인간이 남성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관념이며, 경제학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리라. 그보다는 성별이나 인종, 문화, 연령,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이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적 의식으로 농축될 수 있다"(260)는 경제학적 설명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물론 이 책에서 드러나는 경제학에 대한 비판 중에는 생각해 볼 점이 적지 않다. 경제학이 이상적인 이념형(ideal type)만을 전제로 한 결과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하거나 정책적 실패를 야기했다는 지적, 여성들의 노동이 저평가받고 있다는 비판, 전세계의 여성들이 대부분 저임금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최고경영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지적 등은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런데 경제학은 인간은 합리적이라고 전제한다. 고로 경제학은 틀렸다. Q.E.D."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성급한 추론이 아닐까?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합리성 문제에 대해서 더욱더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경제학에서 사라진 여성의 경제활동을 논하면서 저자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1895)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 대해 긍정적으로든, 비판적으로든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신기하다.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의 <가부장제와 자본제>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를 다루고 있어 비교하며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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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마음산책X) 개봉열독 X시리즈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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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마음산책, 은행나무, 북스피어 세 출판사가 표지를 감추고 저자와 제목 등 어떠한 정보도 없이 책을 판매하는 '개봉열독'이라는 기획이 있었다. 그 중에서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복면도서'로서 판매한 소설은 로맹 가리의 <마법사들>이었다. 이러한 선택이 흥미로운 이유는 저자인 로맹 가리가 말 그대로 복면작가로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있던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한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의 필명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고, 덕분에 로맹 가리는 평생 한 번밖에 수상할 수 없는 공쿠르 상을 두 번(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 이름으로 각각 한 번씩) 수상한 인물이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로맹 가리가 1980년 권총으로 자살할 때 고백하면서 밝혀진다. 자신이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소설을 발표했던 로맹 가리의 소설이야말로 아무 정보 없이 책을 판매하는 개봉열독의 취지와 부합하는 것 같다(단, <마법사들> 자체는 로맹 가리 본인 명의로 발표된 소설이다). 


<마법사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포스코 자가라는 작가인데, 여러 면에서 저자 로맹 가리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소설의 배경은 1770년대,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의 제정 러시아다. 포스코 자가의 아버지 주세페 자가는 베네치아에서 온 광대(사실은 마법사)로 러시아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서 마법으로 밥벌이를 한다. 사춘기 소년인 포스코는 자신보다 몇 살 더 많은 새엄마 테레지나에게 첫사랑을 경험하고, 푸가초프의 반란이나 아버지의 몰락, 러시아 추방 등을 경험하며 성장한다는 소설이다. 포스코 또한 아버지의 혈통을 따라 마법사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마법사적 재능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형태로 발현되어, 훗날 작가가 된다. 여기서 마법사들의 '마법'은 예술을 상징하는 것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함께 이 소설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는 화자인 포스코 자가가 18세기부터 200년을 살았고, 20세기의 시점에서 200년 전을 회고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마법사 일족에게 주어진 불멸성 덕분이라는 것이 화자의 설명인데, 굳이 이러한 현실성 없는 설정이 필요했을지 처음에는 의문스러웠다. 사실 이러한 설정은 예술(소설에서는 마법으로 은유된다)의 불멸성을 상징하는 장치다.

또한 1770년대라는 배경은 프랑스혁명 직전의 계몽주의 시대, 즉 근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시대다. 이 소설은 1770년대 당시 러시아를 뒤흔든 농민반란, 푸가초프의 반란을 중요한 사건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야만성과 폭력성을 드러낸 푸가초프의 반란은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련의 억압과 중첩된다. 화자가 20세기 시점에서 18세기의 일을 회고하는 이유는 근대에 반복되는 그러한 폭력성의 문제를 의식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저자는 1914년 제정 러시아령이었던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혁명이 있고 난 1928년에 프랑스로 망명했고, 나치스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드골의 저항군에 합류하여 공군으로 참전했다. 저자가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던 소년 시절의 기억을 예카테리나 시절에 푸가초프의 반란 때문에 서유럽으로 이주해야 했던 화자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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