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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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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투명사회>가 출간되었을 때, 알라딘에서 <00사회>라는 제목의 책들을 픽업해서 소개했는데, 그 목록이 흥미로웠다. 한병철의 전작 <피로사회>를 비롯하여, <단속사회> <감시사회> <위험사회> <불안증폭사회> <분노사회> <잉여사회> <팔꿈치사회> 등등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의 명사수식어가 붙은 책들이 많았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현대 사회를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정확히 어떤 사회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사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투명사회"라는 키워드는 얼핏 보기에 위의 책들과 달리 긍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진다. 실제로 며칠 전 뉴스에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라는 이름의 NGO가 나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투명사회는 지향해야 할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투명사회"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제도적 투명성이 아니라 SNS를 통해서 개인의 사생활이 여과없이 전시되는 투명성을 가리킨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러한 투명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통념을 정반대로 역전시켰다는 점에 있다. 즉, 현대사회는 투명사회로 규정될 수 있는데, 투명사회야말로 감시와 통제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일단 저자는 스마트폰, 페이스북, 트위터 등 디지털 문명에 대해 부정적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디지털 매체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전시하고 폭로하는 데 열심이다. 즉,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의 관계에 생기기 마련인 불명확한 여지나 굴곡을 제거하여 투명하게 만든다. 현대의 투명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람들의 상호불신과 의심에 의해 요구된다. 저자는 자기규율의 내면화를 상징하는 벤담의 파놉티콘(원형감옥)을 원용하여, 투명사회를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명명한다. 이 책 전체의 요지는 다음 문단에 농축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중략)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101, 102. 강조는 원문)

 위 문단에서 드러나듯이, 저자가 비판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은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지향이 상호감시와 통제에 대한 자발적 참여로 전화되고, 결과적으로 감시와 통제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역설(irony)이다. 

 책을 읽으며 이상과 같은 저자의 논지에 대해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저자의 논리 전개에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니체, 하이데거, 벤야민, 아감벤 등의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포리즘을 가미한 철학 에세이이기 때문이다(역자해제에서 역자는 이 책이 에세이임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책이 체계적으로 쓰여있지 않았고, 두서없이 이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난해하다. 

 잘 와닿지 않는 독일어 언어유희 또한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저자는 한국 사람이지만, 원래는 독일어로 쓰여진 책이다). 그 대표적인 문단을 인용하겠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본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는zählen 손가락이다. 디지털 문화는 세는 손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Erzälung다. 역사는 세지 않는다. Zählen은 포스트역사적 범주다. 트윗도 정보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지 않는다. (164, 강조는 원문)

 이러한 스타일의 글에 익숙치 않은 나 같은 독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도하게 두드러지는 굵은 강조와 독일어 원문 병기를 보면 '셈'과 '이야기'의 독일어 스펠링을 두고 언어유희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말장난은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데, '주체(subjekt)에서 프로젝트(projekt)로'(176)나 '행동(handlen)에서 손가락질(fingern)로'(160)와 같은 슬로건들을 보면, 내가 독일어를 몰라서 그런지 상당히 썰렁하게 느껴진다. 말장난만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책 같은 인상이 들어 읽기 불편했다.

 결국 저자의 논지는 디지털 문명에 대한 구세대의 상투적인 거부감에 철학적 조미료를 쳐서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어닐까? 자유가 결과적으로는 압제를 낳는다는 역설 역시 자유(주의)에 대한 오래된 클리셰적 비판의 하나가 아닐까 싶은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푸코의 파놉티콘 이론을 현재에 적용하여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분석했다는 점은 저자의 독자적인 문제의식인 것 같다. 약간 난해하긴 하지만 현대사회의 단편을 잘 분석해 낸 책이라 할 수 있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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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객시대 - 인문.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총정리
노정태 지음 / 반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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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논객은 강준만, 진중권, 유시민, 박노자, 우석훈, 김규항, 김어준, 홍세화, 고종석, 이 아홉 명이다. 저자는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쉴 독자라면, 이 목록을 바라보며 착잡하고도 묘한 감회에 사로잡힐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8)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저자보다 6살 젊은 데다가 해외에서 생활한 기간이 긴 나로서는 위의 이름들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인터넷을 통해 접한 허지웅, 한윤형, 박가분, 그리고 노정태와 같은 이름들이 더 익숙하다.) 그나마 유명한 '디워논쟁'때 <백분토론>에 나온 진중권의 이름과 저작들이 가장 낯익다. 한때는 박노자의 글들도 좋아했지만,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를 천박한 자본주의 운운하며 비판하는 걸 보며 이 분이 주화입마에 걸려도 단단히 걸렸구나 싶었고, 우석훈에 대해서는 어느 블로그를 읽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1세도 구분 못하는 등 기초적인 지식도 없는 인간이라는 인상이 각인되었다. 고종석은 트위터에서 성희롱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모습을 보고 혐오하게 되었고, 나꼼수 광풍에 대한 진중권이나 허지웅의 비판에 공감하기에 김어준에 대해서도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학교 때,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김대중을 왜 죽여?"라는 사서 형의 핀잔을 듣고 10분만에 읽지도 않은 책(그때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책이었다)을 반납한 것을 제외하면, 강준만에 대해서는 별 기억이 없다.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이 논객들에 별다른 관심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을 굳이 읽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 책을 <사기 열전>에 비유하고 있는데, 나는 오자서나 한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마천에 대해서 알고 싶어 이 책을 읽었다. "청년논객" 노정태가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 뒷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예전에 아즈마 히로키는 트위터에서 "문예비평을 쓰는 건 사실 엄청 쉽다. OO는 XX의 문제에 대해서 전기에는 진지하게 다루었지만, 후기에는 회피했다. 혹은 그 반대."(워딩이 정확하진 않지만)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아즈마 히로키의 이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책의 몇몇 장은 그 말을 연상시킨다. 몇몇 논객들에 대해 저자는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며 평가하는데, 그 분기점은 노무현정부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논객시대"는 김대중정부에서 이명박정부에 이르는 기간을 다루고 있지만, 노무현정부야말로 이 책에서 다루는 시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강준만은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창당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일관성을 잃은 채 "김빠진 콜라처럼 맥없이 들"리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유시민은 노무현을 당선시키기 위해 논객으로서가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코스모폴리탄 개인주의자"였던 김어준은 노무현의 당선 이후 '우리 대통령'을 지키기 위한 "영원한 전쟁"에 돌입했고, 노무현 시대에 실망한 고종석은 새로운 글을 쓰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졌다. 2004년 "모든 게 내가 원하던 대로 된 셈"이라고 승리를 선언했던 진중권은 황우석과 디워라는 광풍으로 인해 다시 네티즌과의 싸움으로 돌아왔다. 물론 논객들의 사상적 변천에 노무현시대만이 꼭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다. 김규항이나 박노자의 경우에는 노무현시대가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시대의 좌절과 굴절이 논객시대에 크나큰 굴절과 좌절을 가져왔음은 분명해 보인다. 노무현의 당선은 진보진영의 찬란한 승리였고, 강준만, 유시민, 김어준, 진중권 등의 논객들은 이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되돌아왔고, 그 결과가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의 도래였다. 그 과정에서 논객들은 과거의 총기를 잃고, 네티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이것이 <논객시대>가 그리고 있는 서사다.

저자는 책에서 다루고 있는 논객들의 저작들을 해독해 가며 그 사상의 변천을 추적해 간다. 꼼꼼한 독해도 인상적이고, 문장도 재미있게 잘 읽힌다. 한물간 아저씨들의 책을 읽고 넋두리나 하기에는 저자의 나이가 너무 젊지 않나 싶기는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옛 시대의 막을 내리는 사람의 역할도 필요한지 모른다. 한 시대를 회고함에 있어서는 적절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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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노스코리아 - 좌와 우의 눈이 아닌 현실의 눈으로 보다
안드레이 란코프 지음, 김수빈 옮김 / 개마고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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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 종합시험에서 북한 관련 문제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북한에 대해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험에 북한에 대한 문제는 나오지 않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막막한 일이었다. 최악의 전체주의 국가이자 경제적으로 파탄난 국가, 핵보유국, 무엇보다 대한민국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으며 군사적 도발을 수십년에 걸쳐 거듭해온 나라. 과연 북한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니, 북한은 어떤 나라인가?

<리얼 노스 코리아>는 북한에 대한, 개관적이면서도 재미있고, 알기 쉬우면서도 깊이와 밀도에서 만족스러운 책이다. 번역이 위트있는 문장의 묘를 살리고 있어서 읽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건국부터 김정은의 등장, 그리고 북한의 미래에 대해 재미있게 쓰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북한 엘리트들이 수많은 주민들의 빈궁에도 불구하고,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며 한국과 미국에 대한 위협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북한 엘리트들에게 자신들의 안녕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소득격차가 15배 이상 나는 한국의 눈부신 발전이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진다면, 북한정권은 붕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북한 엘리트들은 그동안 행해 왔던 수용소와 사상통제에 대한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 엘리트들에게 중국식 개혁 개방과 자본주의의 도입은 파멸을 의미한다. 그래서 핵무기 개발과 군사적 도발을 통해, 한국,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 최대한의 원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현재로서는 북한 엘리트들의 가장 합리적인 전략이다. 저자는 "북한 정부에게 가장 이성적인 생존 전략은 개혁을 회피하고, 내부의 반항에 무자비한 정책을 계속하며, 자본주의 제도의 자발적인 성장을 최대한 억제하고 가능하다면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259)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비정상적인 체제가 앞으로 장기적으로 지속될 리가 없고, 북한은 언젠가는 붕괴할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한다.

그러나 당분간은 한국은 북한의 위험한 벼랑끝전술에 의해 휘둘릴 수밖에 없으며, 북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는 없다. 과거의 햇볕정책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의 지극히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양보만을 이끌어냈을 뿐, 본질적인 개혁과 비핵화를 유도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 인구의 절반정도가 사는 수도권이 휴전선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운데 전면전을 펴는 곳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고, 그 외의 국제적 제재 또한 여러 이유에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냥 북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방치해 두면, 북한은 도발수위를 높여갈 것이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한국으로서는 전쟁을 감수해야 하거나 중국의 북한 병합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북한에 관한 어떤 시나리오도, 어떤 해법도 불만족스럽다.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상황이다.

저자는 과거 임수경의 방북이 북한 당국자들이나 임수경 본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성을 증명했다는 사례를 예로 들며, 북한과의 인적 교류를 통해 북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체제에 균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다. 물론 그럴듯한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하지만,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해법이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북한에 대한 완전한 해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발언하여, 언론에 때아닌 통일열풍이 불었다. 그러나 가장 낙관적인 통일 시나리오조차도 그리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통일 당시 서독과 동독의 소득격차는3:1, 현재 한국과 북한의 소득격차는 15:1이라고 한다. 통일이 되면 막대한 통일비용(이 책에서는 2조~5조달러 정도를 그럴듯한 추산이라고 보고 있다)이 필요할 것이다. 북한 주민의 대부분은 전체주의적 사고가 뿌리박혀 있으며, 한국에 대한 적의와 고도의 살인기술을 몸에 익힌 3,40만 명의 북한군이 있다. 그들이 과연 통일한국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저자는 흡수통일 이후를 다음과 같이 예측한다.

많은 북한 사람들은 도시의 매혹적인 불빛을 따라 남한으로 옮겨올 것이다. (중략) 북한에서 온 노동 이민자들은 남한의 비숙련 노동자들을 위태롭게 하여, 임금은 떨어지고 남북 주민들 사이에 상호불신은 커질 것이다. (중략) 이 모든 일들은 예상할 수 있듯 남북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을 것이다. (324)

물론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 발언은 "(그 모든 부담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대박"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통일이 가져올 혼돈과 부작용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수십 년 동안 한반도의 사람들은 통일이 한번도에 전례 없는 행복과 화합 그리고 번영을 가져다주는 중대하고 후련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믿어왔다. 장기적으로 볼 때, 말하자면 2133년 즈음의 역사가들의 시점에서 볼 때는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나 통일 직후의 수십 년을 살아가야 하는 한반도 주민들에게 이 시기는 격변과 사회 분열 그리고 심대한 충격의 때가 될 것이다. (317)

흡수통일이라는 시나리오는 좋든 싫든 닥쳐올 지 모르는 미래의 사태다.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의미라면, 통일논의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여전히 답이 안 나오는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정권이 억압적인 세습 독재 정권이라면 강경책이 잘 팔린다. '우리는 악과 협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을 무찌른다'는 고매한 주장이 사실상 무책임한 허세일 뿐이고 투표소 바깥의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때에도, 그러한 주장은 정치인들의 자부심과 선거 결과 양쪽 모두에 매우좋다.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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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위기 - 국제관계연구 입문
E. H. 카 지음, 김태현 옮김 / 녹문당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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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의 진보를 확신하며, 오크셧이나 포퍼, 랑케 등 보수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국제정치에서는 (보수주의에 보다 가까운) 현실주의 이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었기에 당황스러웠다.

E.H.카의 현실주의 정치이론이 가장 잘 드러난 이 책 <20년의 위기>는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베르사유체제가 1919년부터 히틀러의 도발로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의 20년을 위기의 시대로 간주하며, 그 원인을 베르사유체제의 지나친 이상주의에서 찾는다. 그러한 이 책의 요지를 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919~39년간 위기의 특징은 첫 10년간에는 온갖 희망에 차 있다가 그 다음 10년간에는 엄청난 절망으로 급전직하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현실을 무시한 이상에서 이상을 잃은 현실로 급작스럽게 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1920년대 신기루는 그 이전 한 세기의 뒤늦은 회고라고 할 수 있다: 영토와 시장의 끊음없는 확장; 확고한 자신감과 큰 부담이 없는 영국 패권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세계; 상호간의 갈등은 공동의 개발과 착취의 영토로 점진적 팽창을 통해 해소되는 "서방문명"; 개인에게 좋은 것은 사회에게도 좋고 경제적으로 옳은 것은 도덕적으로도 옳다는 손쉬운 가정의 시대가 바로 그때였다. 이와 같은 유토피아에 그 내용을 부여하였던 현실은 19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따라서 1919년의 유토피아는 공허하고 내용이 없었다.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았던 그러한 유토피아는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265)

카는 이 책에서 각 국가들의 행동을 제약할 초월적 세계정부가 없다는 점, 즉 국제정치이론의 핵심이 되는 국제사회의 무정부성을 주장한다. 당연히 국제연맹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또한 몽상주의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독일의 슈데텐지방 병합을 영국과 프랑스가 인정한 뮌헨회담에 대해, 카는 "프랑스 외상 브리앙이 "평화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말했을 때, 혹은 영국 외상 이든이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은 없다"고 말했을 때, 그 속셈은 평화가 유지되는 한 프랑스나 영국에 불리한 현상변경은 없을 것이라는"(111) 뜻이라고 냉소적인 해석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카가 이상주의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카에 따르면, 철저한 현실주의는 "확고한 목표, 정서적 호소, 도덕적 판단, 행동의 기준"을 배제한다(117). 카는 이러한 현실주의적 전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단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사가 인간의 행동과 생각에 의해 지배되고 변화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것은 곧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현실주의자들도 그러한 명제를 부정한 적은 없다.(중략)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건전한 정치사상은 이상과 현실 모두에 기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상주의가 공허하고 특권층의 기득권을 대변하는, 참을 수 없는 겉치레가 되면 현실주의는 그 가면을 벗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순수한 현실주의는 적나라한 권력투쟁 외에는 대안적인 모습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제사회란 불가능해진다.
(122)

이 부분을 보면, 카의 국제정치이론을 단순히 현실주의로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카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건전한 대립과 상호보완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오히려 모종의 국제사회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상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한 이상주의적 성격이 <역사란 무엇인가>의 진보적 역사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균형과 중용이 필요하다는 카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보였던 카의 때로는 위트있고, 때로는 신랄한 문장은 이 책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다. 또한 70년 전에 쓰인 책인데, 현재에도 충분히 유의미한 통찰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카의 혜안이 돋보인다. 예를 들어 "민족자결은 분리주의 운동을 항상 열어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르 해체시키고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탄생시킨 운동은 곧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301)라는 카의 예언은 약 40년 뒤인 1990년대에 현실이 되었다. 국제정치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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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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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유행이 좀 지난 감이 있지만, 작년 한 해는 일베에 대한 화제로 대한민국이 들썩인 한 해였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비하논란, TV매체에 올라온 각종 합성사진, 할아버지 자살인증을 비롯한 패륜적 행위들. 나 또한 '일본의 일베'라고 불리는 재특회를 다룬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라는 책을 번역하고 나서, 일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일이 늘었다. 일본 잡지에 일베를 소개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일베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거나 쓰면서 불편함과 불쾌함을 느껴야만 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일베를 몇 주간 눈팅했을 때, 그곳의 게시물들을 보면 짜증을 느꼈다.

 아마 이 책의 저자 또한 그러한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베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사상을 발견해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썼다는 점에서는 의미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일본의 넷우익을 다룬 <거리로 나온 넷우익>만으로 일베를 설명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있다. 저자 또한 재특회와 일베를 동일한 선상에서 논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일베는 인종주의라든지 어떤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싶어 하는 네오나치와도 다르고, 결국은 현실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본의 혐한 시위대와도 다르다. (중략) 혐한 시위를 주도하는 일본 넷우익은 오히려 일베인들이 혐오하는 순진한 유형에 더 가깝다. (중략)
 물론 이러한 일본의 넷우익과 일베 이용자들 사이에 표면적인 유사성이 없지는 않다. (중략) 하지만 일베 유저들에게 자신의 자존감을 현실의 강한 국가에 의해 보증 받으려는 욕망 같은 것은 없다.
(221,222)

 조롱과 유희에만 관심이 있는 일베와 진지하게 시민운동을 지향하는 재특회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일베의 사상>이라는 제목에 대해 "일베에 사상 따위가 있느냐"라는 식의 비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목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암묵적으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을 참조했다. 그는 사상적 동기가 결여된 (것으로 여겨지는) 일본인들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사상적 의제가 있다고 말하며 이를 분석하고, 거기서 '일본의 사상'이라는 모티프를 가져온다. 사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사상성의 존재를 포착해야만, 비로소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그의 기본 관점에 이 책은 빚지고 있다. (18)

 <일본의 사상>의 문제의식을 수용해서 <일베의 사상>을 썼다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얼마 전, 저자는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이라는 책을 썼는데, 일본의 현대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해설한 책이다. <일베의 사상>에서도 가라타니 고진과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을 인용하여 일베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 현대사상에 대해서 저자는 상당한 조예가 있는 듯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베란 무엇인가에 대해 "일베 자체가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두가 동등하게 혐오할 권리를 나눠 갖는 평등한 형제애의 공간에 관한 유토피아에 기반을 두고 있"(149)다고 말한다. 일베는 진보좌파의 가치관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촛불시위와 같은 진보좌파의 움직임을 "감성팔이"로 몰아 비판한다. 따라서 일베는 "팩트"(실제로 팩트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하지만)를 중시하며, 감성의 영역에 속하는 이상에 대해서는 회의주의로 응대한다. 저자는 일베의 "위악적이고 공격적인 행태는 그들의 몰이상, 아니 몰이상의 이상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146)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일베가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비하하는 이유는 민주화운동이 이미 '성역화'된 것에 대한 가치전도를 의미한다. 원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민주화'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 또한 그러한 가치전도의 일종일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베의 행동원리를 "낭만적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마는, 감성적인 자기 자신을 메타레벨 위에서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초월론적 의식을 불러온다"(155)는 것이다. 일베 유저는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한심하고 찌질한 것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한 일종의 캐릭터를 연기함으로써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유희로서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회학자 기타다 아키히로(北田暁大)는 2005년, <조롱하는 일본의 내셔널리즘>이라는 책에서 당시 일본에서 넷우익의 2ch의 사상적 기반을 미디어에 대한 아이러니라고 분석한 바 있다(그러나 그러한 메타레벨의 아이러니를 즐기던 일본의 넷우익이 이후에 재특회와 같은 위험한 오프라인 조직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 기타다의 분석이 적절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일베의 사상"이라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는 3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일베의 사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촛불시위에서의 좌절 경험이라고 말한다. 일베의 문제로 지목되고 있는 배타성이나 조롱이 실은 인터넷에서 진보좌파진영의 전유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베가 "촛불시위의 쌍생아"라는 저자의 지적은 수긍할 만하다.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이 좌절되면서 그 환멸을 아이러니적 공동체로 수용하여 탄생한 것이 일베라는 것이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정상국가"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분단상태에 있기 때문에 통일된 국민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정상국가가 아니라는 의미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베(와 촛불시위)의 멘탈리티를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또 하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 것은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데이터베이스의 구체적 사례를 일베와 같은 커뮤니티를 통해 분명히 볼 수 있다. 일베에 저장된 각종 유머 자료들은 인터넷에 존재하는 온갖 정념적 무의식의 단편들을 보여준다. (중략)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일베와 같은 유머 커뮤니티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데이터베이스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아즈마의 논의 속에서 데이터베이스는 스스로 '말하는'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데이터베이스에 획기적인 의미를 부여해도 그것은 여전히 시민사회의 무의식적이고 단편적인 욕망과 정념들을 '기록'해서 보여주는 수동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베는 그 '스스로 말하는' 데이터베이스라고 할 수 있다. (218)

 내가 아즈마 히로키를 읽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데이터베이스가 기록만 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을까? 일베가 됐든 2ch이 됐든 블로그가 됐든 그곳에서 기록되는 것은 개개인의 주관적 발언들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일베라는 데이터베이스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스스로 말하는 주체는 일베의 유저들이지, 일베라는 데이터베이스 그 자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두고 일베가 데이터베이스로서 스스로 발화하는 주체라고 본다면, 역으로 모든 데이터베이스는 스스로 말하는 주체이며, 일베가 특수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해가 잘 안 된 것은 일베 등에 보이는 인정투쟁을 "국가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투쟁," 즉 맑스가 말하는 계급투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가 말하는 계급투쟁은 생산구조의 관계가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가? 저자는 "시민사회에 존재하는 계급 적대는 다양한 대중 분파와 지배세력 분파 사이의 갈등과 협력관계의 모습으로 '전치'되고 '응축'된다"(205)고 말하는데, 과연 일베가 그러한 계급투쟁의 사례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계급투쟁 아닌 게 없는데?

 그런 지엽적인 문제들이야 어쨌든 어쨌든 사상적 관점에서 일베에 대해 분석했다는 저자의 시도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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