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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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기 중에는 소설 읽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방학이 되자마자 최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화제작,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손에 들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배꼽이 빠진다는 소문과 달리 기대했던 것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물론 유머소설로서 그럭저럭 평타는 쳐 준다. 사실 100년이라는 시간과 전세계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완전히 재미가 없다면 이상한 일이다. 주인공 100세 노인 알란 칼손을 비롯한 캐릭터들의 개성도 강한 데다가, 다루고 있는 사건들도 황당무계 허무맹랑 기상천외한 지라, 다음 장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매력은 있다.

 '빵 터질 만큼' 웃기지는 않아도 꽤 쓸 만한 유머코드가 몇 개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다음 부분이 특히 재밌었다.

 헤르베르트의 운전 학원은 대성공을 거뒀다. (중략) 그는 교통 운전법을 직접 강의하면서 다른 차와 충돌하고 싶지 않다면 차를 너무 빨리 몰지 말아야 한다고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설명했다. 또 교통 체증을 유발하고 싶지 않다면 너무 천천히 몰아서도 안 된다고 덧붙였다.
 (중략) "헤르베르트, 난 자네가 몹시 자랑스러워. 자네가 운전 강사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 그것도 차들이 좌측통행을 하는 이곳에서......" 알란이 축하하며 말했다.
 "좌측통행?" 헤르베르트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차들이 좌측통행을 하나?"
(365)

 이렇듯 저자의 문장은 위트가 흘러 넘치고 재미있다.

 문제는 스토리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이다. 유머소설이다보니, 진지하게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너무 심했다. 모든 사건이 우연에 의존하고 있고, 주인공을 위해서 모든 인물들과 사건이 움직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100년동안 원자폭탄 개발을 하고, 프랑코 장군과 윈스턴 처칠을 생명의 위기에서부터 구하고, 미국의 스파이로 소련 붕괴에 일조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소설이라 하더라도 주인공을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듯한 작위적 느낌이 든다.

 주인공 알란이 이념에 대해 무관심, 아니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상기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트루먼 대통령과 프랑코 장군, 마오쩌둥과 친구가 될 수는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100세 노인을 역사적 사건마다 그 장면에 존재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재밌기는 하지만, 단순히 각국 정상들과 만난 적이 있다는 식의 허풍뿐이어서 아쉽다. 역사에 농락당하는 개인의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포레스트 검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책의 선전문구 또한 <포레스트 검프>를 의식하고 있다. 그런데 포레스트 검프는 바보라는 점에서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캐릭터로 설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소설과 영화가 다루고 있는 지점은 공민권 운동과 베트남전쟁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한 주제의식을 풀고 있다. 반면에 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그러한 문제의식 대신 허무맹랑한 사건들의 연속일 뿐이어서 황당할 뿐이다. 

 소설의 또 하나의 축이 되는 100세가 된 알란의 돈가방 쟁탈기는 그나마 좀 더 재미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갱단을 너무 쉽게 죽이는 데다가, 갱단 보스가 너무 쉽게 개과천선한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웃고 넘길 유머소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개연성은 필요하다. 소재만으로 보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는데 용두사미로 끝난 것 같아 아쉽다.
 학기 중에는 소설 읽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방학이 되자마자 최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화제작,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손에 들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배꼽이 빠진다는 소문과 달리 기대했던 것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물론 유머소설로서 그럭저럭 평타는 된다. 사실 100년이라는 시간과 전세계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완전히 재미가 없다면 이상한 일이다. 주인공 100세 노인 알란 칼손을 비롯한 캐릭터들의 개성도 강한 데다가, 다루고 있는 사건들도 황당무계 허무맹랑 기상천외한 지라, 다음 장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매력은 있다.

 '빵 터질 만큼' 웃기지는 않아도 꽤 쓸 만한 유머코드가 몇 개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다음 부분이 특히 재밌었다.

 헤르베르트의 운전 학원은 대성공을 거뒀다. (중략) 그는 교통 운전법을 직접 강의하면서 다른 차와 충돌하고 싶지 않다면 차를 너무 빨리 몰지 말아야 한다고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설명했다. 또 교통 체증을 유발하고 싶지 않다면 너무 천천히 몰아서도 안 된다고 덧붙였다.
 (중략) "헤르베르트, 난 자네가 몹시 자랑스러워. 자네가 운전 강사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 그것도 차들이 좌측통행을 하는 이곳에서......" 알란이 축하하며 말했다.
 "좌측통행?" 헤르베르트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차들이 좌측통행을 하나?"
(365)

 이렇듯 저자의 문장은 위트가 흘러 넘치고 재미있다.

 문제는 스토리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이다. 유머소설이다보니, 진지하게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너무 심했다. 모든 사건이 우연에 의존하고 있고, 주인공을 위해서 모든 인물들과 사건이 움직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100년동안 원자폭탄 개발을 하고, 프랑코 장군과 윈스턴 처칠을 생명의 위기에서부터 구하고, 미국의 스파이로 소련 붕괴에 일조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소설이라 하더라도 주인공을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듯한 작위적 느낌이 든다.

 주인공 알란이 이념에 대해 무관심, 아니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상기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트루먼 대통령과 프랑코 장군, 마오쩌둥과 친구가 될 수는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100세 노인을 역사적 사건마다 그 장면에 존재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재밌기는 하지만, 단순히 각국 정상들과 만난 적이 있다는 식의 허풍뿐이어서 아쉽다. 역사에 농락당하는 개인의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포레스트 검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책의 선전문구 또한 <포레스트 검프>를 의식하고 있다. 그런데 포레스트 검프는 바보라는 점에서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캐릭터로 설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소설과 영화가 다루고 있는 지점은 공민권 운동과 베트남전쟁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한 주제의식을 풀고 있다. 반면에 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그러한 문제의식 대신 허무맹랑한 사건들의 연속일 뿐이어서 황당할 뿐이다. 

 소설의 또 하나의 축이 되는 100세가 된 알란의 돈가방 쟁탈기는 그나마 좀 더 재미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갱단을 너무 쉽게 죽이는 데다가, 갱단 보스가 너무 쉽게 개과천선한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웃고 넘길 유머소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개연성은 필요하다. 소재만으로 보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는데 용두사미로 끝난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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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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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 에세이야말로 리뷰를 쓰기 어려운 장르가 아닐까? 이 책은 각기 다른 주제들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통일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에세이라서 잠시만 방심해도 읽다가 무슨 이야기인지 감을 못 잡게 된다. 무언가 사고의 끄트머리를 잡으려고 해도 대여섯 페이지만에 글이 끝나버리니 생각이 충분히 뻗어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하면서 읽어보았더니 평이한 문체와는 달리, 철학적으로 생각할 거리가 꽤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 속에서의 철학적 사유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목인 <철학자와 하녀>는 탈레스가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지자, 하녀가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이며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비웃은 일화에서 나온다. 형이상학적 차원을 추구하는 철학자들과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괴리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저자는 출발한다. 철학과 일상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다. 원자력발전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하이데거를 인용하고, 형제복지원의 인권침해를 푸코를 통해 비판하는 식이다.

 뜬구름 잡는 철학이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인 철학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공감할 수 있다. 평소에 철학책을 안 읽던 사람들, 철학을 생경하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철학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다가가기 쉽게 쓰여져 있고,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문제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평생 철학과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들도 읽기 쉽다는 점에서는 그 의미가 있는 책이다.

 다만 저자도 에필로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좋은 말씀"으로 끝나버린 느낌도 든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관점에 대해서는 납득을 했지만, 읽고 나서 깊이 있는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다루고 있는 넓이가 넓다보니 깊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저자는 "이 글들을 쓰며 내가 떠올린 수신인은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였다. '철학이 일상에게' 그리고 '일상이 철학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런 걸 떠올렸다"(10)고 말한다. 철학의 역할은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고방식을 제공해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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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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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즘이라는 사상을 만들어낸 철학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문제적이다. 학문적, 역사적, 정치적으로 말이다.

 "철학적 지도자"를 자처했던 히틀러는 칸트, 헤겔, 실러, 피히테, 쇼펜하우어, 니체, 바그너의 사상을 짬뽕하여 나치즘을 만들었다. 유서 깊은 독일의 철학과 문학은 히틀러가 자신의 추악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데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칸트, 헤겔, 피히테, 바그너의 저작들에는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드러나 있었다. 사회적 다윈주의를 수용한 헤켈, 귄터, 라가르데, 체임벌린 등은 노골적으로 게르만 인종의 우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히틀러와 나치 이론가들은 이들의 인종주의를 그대로 수용했다. 
 
 물론 히틀러 자신이 나치즘을 체계화할 만큼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로젠베르크, 보임러, 크리크와 같은 철학자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모두 반유대주의를 신봉했고, 히틀러가 집권하고 나서는 독일의 학계에서 유대인 철학자들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 1600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교수직에서 쫓겨났고, 그 빈 자리는 나치즘에 편승한 학자들이 차지했다. 나치에 동조한 철학자들 중에는 칼 슈미트와 마르틴 하이데거도 있었다. 슈미트와 하이데거는 보수적 사상은 가지고 있었지만, 원래는 나치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하고나자 나치당에 입당하고, 히틀러를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를 비롯해 많은 유대인 제자들과 친구들이 있었지만, 반유대주의자로 돌아섰다. 심지어 하이데거는 스승이었던 유대인 에드문드 후설이 교수직을 박탈당하자 절교를 선언했고, 대학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유대인 철학자들은 독일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배제되었다(정작 스피노자는 생전에 불신자라는 이유로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했는데 말이다).

 수많은 유대인 철학자들이 프랑스, 혹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발터 벤야민, 테어도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막스 호르크하이머 등은 유명하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벤야민을 비롯한 망명자들과 이민자들을 "히틀러의 제5열"로 간주하여 수용소에 가두었다. 벤야민은 곧 풀려 났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프랑스를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으로 향하다가 피레네산맥에서 권총자살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아렌트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채플린을 비롯한 헐리우드 배우들과 교류하던 아도르노는 미국에도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하는 파시즘과 반유대주의의 그림자에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대부분의 나치 철학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로젠베르크에게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주요 나치 철학자였던 보임러가 3년간 복역했을 뿐이었다. 한국에서는 독일의 과거청산을 일본의 과거청산과 비교하며 이상화하고 있는데, 적어도 나치 부역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하다.

 뉘른베르크 재판도 열렸고 연합국은 반나치 위원회를 설립해 노력도 했지만 독일인들이 직접 독일을 부흥시키는 작업을 넘겨받고 나서부터는 나치 부역자들의 과거 기록은 은폐되거나 세탁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표리부동한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부역 사실을 감추었고 부역 사실이 발각되더라도 지루하고 긴 법정 싸움으로 끌고 갔다. (341, 342)

 독일의 철학자들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한 게 아니라,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협력을 강요당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몇몇 유대인 학자 그룹이 반발했지만, 독일 사회의 망각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1950년대에 동독과 서독의 대학에서는 과거에 나치당원이었던 사람들을 재임용하기 시작했"(346)던 것이다. 많은 나치 철학자들이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나치 철학자들 중에서도 거물이었던 하이데거와 슈미트는 전후에도 그 명성을 유지했다. 

 다른 나치 부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슈미트는 자신의 역할과 나치 정권으로부터 받은 혜택을 실제보다 축소해서 얘기했다. 그는 법학자로서 제3제국을 위해 일해 달라는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가 쓴 나치 관련 출판물과 반유대주의적인 글의 양을 고려하면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348, 349)

 하이데거는 나치에 개입한 사실을 조작 축소했으며 유죄의 증거가 될 만한 저작과 강연을 정교하게 편집, 삭제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을 결백하고 관념적인 철학자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아렌트와 사르트르를 비롯해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은 하이데거의 변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그의 천재성을 찬양했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끼친 피해에 대해 사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히틀러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연민을 표명한 적도 없었다. (357)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철학자 개개인에 대한 일화나 전기들이 자세히 적혀 있어 흥미로웠다. 나치즘의 대두와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 상반된 선택을 한 철학자들, 예를 들어 하이데거와 아렌트, 슈미트와 후버의 일화를 보면,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유대인 학자들에게 망명과 잔류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말이다. 시대가 광기에 휩싸이고, 국가권력의 통제가 극단에 치달았을 때, 학자로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시류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비단 나치스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나 군부독재 시대 한국의 학자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하이데거와 슈미트, 프레게 같은 나치 부역 철학자들이 오늘날에도 철학계에서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영국과 유럽, 미국의 대학에서 슈미트와 하이데거의 사상이 전파되고 프레게가 교과목의 중심에 놓이는 상황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독일의 지적 유산에서 어두운 요소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많은 유대계 독일 철학자들이 주류 철학에서 소외받고 있는 것도 문제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이 배우고 있는 사상의 맥락을 감지하지 못하면서도 뭐가 문제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과거 나치 연루 사실을 알게 되면 학생들은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다. 철학은 '윤리학'에서 탄생했다. 그러한 이유로 철학자는 항상 철학의 불안한 궤적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376, 377)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작가와 작품은 구분해서 판단해야 한다"라는 오래된 문제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사에 깊은 이력을 남긴 레니 리펜슈탈은 나치 프로파간다 영화 <의지의 승리>를 만든 극성 나치당원이었고, 노벨 문학상 작가 귄터 그라스 또한 나치 친위대에서 복무했던 경력이 문제가 되었다. 좀더 비근한 예로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일본 만화 작가나 애니메이션 성우의 "혐한" "넷우익" 발언이 알려지면서, 하루아침에 평판을 땅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설득력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옹호했다. 루소는 방탕한 성적 편력 끝에 낳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다. 알튀세는 아내를 총으로 살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알튀세의 사상을 모두 거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가?

 과거 철학자들의 신념이나 행동에 윤리적 결함이 발견될 수는 있다. 이 책을 읽고 하이데거나 슈미트의 나치 경력을 옹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사상에 나치즘과 반유대주의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내용들도 있다.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행적을 근거로 하여 그들의 사상적 저작까지 단죄하는 것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저자가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행적뿐 아니라, 그들의 저작에 숨겨진 나치즘의 위험성을 지적했더라면 훨씬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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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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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럽게도 그 유명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일본편>이 나왔길래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게 되었다. 예전에 규슈를 여행했던 적도 있지만, 이 책을 보며 신선한 시각을 얻게 되었다. 규슈는 한국과 가까운 곳에 있다보니 곳곳에 한국과 연관된 문화유산들이 있었다. 한국인으로서의 뿌리의식을 가지지 않고 여행했기에, 그와 관련된 유적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특히 규슈에는 가라쓰, 아리타, 이마리, 가고시마 등 유명한 도자기의 고장들이 많이 있다 보니 책에서도 그 지방의 답사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의 도자기들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일본이 납치해 간 수천여 명의 도공들과 그 후손들이 만들어낸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저자는 단순히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비극과 일본에 핍박받은 도공들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선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라쓰야키의 이런 활력 넘치는 모습을 보면 나 자신부터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이 일어난다. 일본은 우리 도자기 기술을 가져다 세계시장을 제패하고 도자기왕국으로 발전했는데 우리는 그 원조 격이면서 왜 그러지 못했는가에 대한 한탄이다.
 혹자는 임진왜란 때 도공들이 다 일본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끌려온 조선 도공들의 고향을 보면 공주, 남원, 김해, 울산 등 삼남지방이지, 조선시대 관요(官窯)가 있었던 경기도 광주에서 온 진짜 뛰어난 도공은 현재까지 한 명도 알려진 바 없다. 일본에 끌려온 이들은 조선시대 지방 가마의 도공들이었다.
 (중략)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도자기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조선 분청사기가 뛰어나다는 주장만 했지 생활 속에서 그것을 즐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도자의 가치를 일본인들은 일찍이 알아챘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마냥 즐기고 있다. 우리는 고유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줄 몰랐고, 일본은 그 고유기술을 통째로 가져가 자신들의 위대한 도자기 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반성할 대상은 우리 자신에 있다.
(123)

 또한, 도공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색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막연히 생각하기를 일본에 온 도공들은 왜놈들에게 포로로 끌려가 이국땅에서 도자기를 굽는 고된 일에 노예처럼 사역되었고 고향이 그리워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고 깊은 동정을 보내곤 한다.
 그러나 그 실상엔 다른 면이 있었다. 조선에 살 때 이들은 지방가마의 도공으로 천민이었다. 이들은 도자기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농사도 지어야 했고, 각종 역(役)에 나가 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에 와서 이들은 도자기 기술자, 즉 장인으로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이 상대한 것은 번주라는 지방 최고통치자들이었다. (중략) 사쓰마 번주는 조선 도공에게 사농공상에서 사(士), 일본의 사무라이(侍)와 같은 신분을 제공했다. 국내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던 대접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아예 일본 성(姓)으로 바꾸고 일본인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그 후손들은 더이상 조선인이 아니다. 다만 '한국계 일본인'으로 대를 이어 살아가는 것이다.
(175)

 물론 저자는 조선의 산하와 닮은 마을에 정착한 일화나 일본인들의 텃세에 시달린 일화 등, 고향을 잃은 도공들의 애환에 대해서도 상세히 저술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일본이 도공들을 납치해 가 도자기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을 규탄한 데에 그치지 않고, 일본이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그 배경에는 도공들의 장인정신을 존중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저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일본 문화유산을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인용한 문단에서 드러나듯이 일본에 대해서도 균형잡힌 시각으로 칭찬할 만한 점은 칭찬하겠다는 공정한 관점이 드러나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도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해 문화적 교류를 강조하고 있는 책이었다.

 언젠가는 이 책을 들고 규슈를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나고야(名護屋, 사가현)성이나 가라쓰, 이마리 등에도 가 봐야겠다. 도자기를 살 경제적 여력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단순히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답사 과정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들도 책 곳곳에 드러나 있다. 답사에서 일본 가요인 "황성의 달"을 부른 이야기나, 차를 마시다 갈 곳을 못 간 이야기들 말이다. 이런 부분을 읽다 보면, '답사'도 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답사 중의 소소한 일화들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다른 시리즈를 읽어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좀 곁가지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본문이 아닌 부록이어서 저자가 신경을 덜 썼던 것일까? 동아시아의 조공질서에 대해 설명한 다음 문단에는 옥의 티가 있다.

 중국이 조공만으로 안심하지 못한 곳은 조선과 베트남이었다. 그래서 한때 한나라는 한반도와의 경계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고 광둥성과 베트남 지역에 한구군(漢九郡)을 설치했었다.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비슷한 시기인 679년에 하노이에는 안남도호부를 두었다. 동쪽과 남쪽만 안정시키면 나머지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과 베트남은 중국의 조공이라는 외교적 형식에 응하면서 독립국가로 나아갔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의 소수민족 중 모국을 갖고 있는 나라는 한국의 조선족과 베트남의 안남족밖에 없다.
(341, 342)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모국을 갖고 있는 민족은 몽골족, 카자흐족, 우즈벡족, 타지크족, 키르기스족, 러시아족이 있다(http://ko.wikipedia.org/wiki/%EC%A4%91%EA%B5%AD%EC%9D%98_%EB%AF%BC%EC%A1%B1#cite_ref-9). 저자가 "안남족"이라고 부르는 베트남인은 물론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데, 중국에서는 안남족 대신 경(京)족, 월(越)족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 듯하다(http://zh.wikipedia.org/wiki/%E4%BA%AC%E6%97%8F).
 또한 이 문단을 보면, 안동도호부와 안남도호부만 존재했던 듯한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당은 두 도호부 외에 안서도호부(타림분지), 안북도호부(외몽골), 선우도호부(돌궐), 북정도호부(준가르)를 설치하고 있었고, 모두 6도호부라 부른다(http://zh.wikipedia.org/wiki/%E9%83%BD%E8%AD%B7%E5%BA%9C). 저자는 중국이 한국과 베트남만을 특별히 경계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하여 다소 부정확한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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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 대논쟁 통섭원 총서 2
최재천 지음 / 이음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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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논의에 대한 비판적인 논고들만을 모은 책 <통섭과 지적 사기>와 달리 이 책은 사회생물학에 대한 찬반 양론을 전개하는 연구자들의 논고를 모으고 있다. 그래서 <통섭과 지적 사기>를 읽었을 때보다 사회생물학과 통섭에 대한 보다 총체적인 이해가 가능했다. 그런데 사회생물학적 통섭에 찬성하는 논자들의 글을 읽어도 반감만 생길 뿐, 환원주의가 아닌 다원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내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통섭>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장차 사회생물학의 한 분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사회생물학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왜 19세기 후반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반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나치즘은 독일철학을 어떻게 이용했는가? 중국 공산당 체제는 얼마나 지속가능한가? K-pop은 어떻게 국제적 컨텐츠가 되었나? 베버의 권력 개념과 푸코의 권력 개념은 어떻게 비교 가능한가? 1965년 한일수교에서 양국의 만주국 인맥이 한 역할은 무엇인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과정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 북유럽 모델의 고용정책은 한국사회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 유교민주주의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사회생물학이 적실성 있는 가설이나 논증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이 다른 생물들과 다를 바 없겠지만, 인간의식이 만든 제도, 사회, 역사는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한 인간 고유의 영역들에 대해서는 인간의식이 발전시켜온 개별 학문 분야의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이 타당하게 느껴진다. "인간 본성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회생물학의 전제에 동의한다 하더라도(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유전자가 개별 사회나 개인에게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대한 메커니즘을 해명할 방법을 사회생물학이 찾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으며, 가능하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를 탐구할 때, "인간의 본성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중요한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연구에 있어 불문에 부쳐도 좋을 문제로 보인다. "사실에서 당위를 도출할 수 없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사회생물학의 타학문에 대한 영향은 크게 제한될 것이다. 물론 여러 학문 분야들, 특히 인류학이나 심리학에 대해서는 사회생물학이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사회생물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실제 연구에서 사회생물학이 응용된 실제 연구의 축적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사회생물학 환원주의자들이 사회생물학을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적용한 연구를 충분히 축적하지 않는다면,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사회생물학을 배우라고 강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책에서 김환석은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사회학적 환원주의 양쪽 모두를 배격하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사회학의 한 분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회학자가 있는가? 그런데 왜 사회학적 환원주의를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같은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윌슨의 <통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통섭>의] 주장의 주된 문제는 그 저자가 상상하는 한층 통합된 문화가 어떤 것이 될지 이해하기 힘들고, 그런 문화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문화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어떤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 실재는 하나지만, 그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은 여럿이고 여럿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다른 수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250,251)

나는 로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 가지 방식으로 모든 답을 얻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흥미롭다"라고 말했던, 스티븐 제이 굴드는 사회생물학과 환원주의에 반대한 대표적 생물학자다. 그는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에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발견을 부적절한 영역으로 확장시키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적절히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그 해석에 신중을 기했다면 이러한 비난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겸손함이 없다면, 통섭은 사회생물학의 오만과 편견으로 끝날 것이고, 오히려 자연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의 바람직한 대화를 저해하는 악영향을 끼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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