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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고령화, 저출산, 핵가족화, 비혼 및 이혼의 증가, 간병, 고독사... 기존 가족 제도의 해체로 인해 한국사회와 일본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비슷하다. 아니, 일본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몇 년 뒤에 한국사회가 경험하게 된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80년대 일본 학계를 뒤흔들었던 페미니즘 논객 우에노 치즈코가 최근 '노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독신의 오후>는 노년을 맞이하는, 혹은 이미 노년을 맞이한 독신 남성들을 위한 책이다. 돈, 성, 건강, 가족, 인간관계, 그리고 죽음 등 독신 남성이 부닥치게 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솔직담백하게 적어내리고 있다. 문장이 술술 잘 읽혀내려가는 데다가, 실용적인 조언 또한 적혀 있어 재미있게 읽힌다. 예를 들어 저자는 "남자 홀로 나이듦의 10가지 방법"이라는 십계명을 열거한다.

 1. 의식주의 자립은 기본 중 기본
 2. 건강 관리는 본인 책임
 3. 술, 도박, 약물에 빠지는 것은 금물
 4.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지 말 것
 5.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6. 사람과의 만남에 이해관계를 따지지 말 것
 7. 이성 친구들에게 다른 마음을 품지 말 것
 8. 다른 세대 친구를 사귈 것
 9. 자산과 수입 관리는 확실하게
 10. 여차할 때를 대비해 안전망을 준비해둘 것
(210,211)

 조목조목 그 사례들을 들고 있는데, 모두 다 수긍이 가는 내용들이다. 한국의 독신 남성들이 이 책을 읽으면 아마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실 저자도 "인간이란 나이와 상관없이 적응하기 마련이구나 싶어 감탄했다"(66)고 이야기하고 있듯이, 노년을 맞이한 독신 남성들도 어떻게든 살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비혼이었던 독신은 물론, 이혼하게 된 독신 남성들도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적응해 갈 것이고,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을 배워가지 않겠는가.

 우리 세대의 남성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자는 일본의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성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고 있는데, 우리 세대 남성들은 기본적인 가사노동은 할 수 있고, 가정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아마 이 책에서 저자가 걱정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보다 젊은 세대의 남성들이 노년이 될 무렵에는 해당사항이 없어질 것 같다. (물론 경제적 측면에서는 더 심각한 문제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현재의 젊은 세대는 나이든 세대에 비해 평생 혜택이 더 적다고 하는 뉴스도 나왔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노년을 걱정하기에는 젊은 나이인지라 이 책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물론 20대 중반인데도 연애경험이 없는 소위 "모태솔로"라는 점에서 이대로 결혼을 할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결혼 말고 연애"가 더 시급한 문제다.ㅠㅠ

 사실 "혼자"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외롭기도 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혼자 있고 싶은 때도 있고,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은 때도 있지 않겠는가. 저자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함께해서 기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하면 불편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운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 또한 있다. '내 시간'이란 혼자 있고 싶을 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혼자 있고 싶지 않을 때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의 조합이다. (184)

 인생은 어차피 고독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연애하고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의 고정된 성관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독신 남성에 대해 쓴 책이라 어쩔 수 없는지 몰라도). 남성에 의한 간병 강간이나 간병 살인 사례가 많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라고 하니 그렇다치더라도(출처가 없긴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리라 믿는다), 다음과 같은 부분은 극히 한정된 사례에 저자의 개인적 편견을 덧씌운 것에 불과하지 아닌가 싶다.

 남자란 '죽지 않으면 결코 낫지 않는 병'과도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때가 있다. 다름 아닌 돈과 권력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여자란 여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남자에게 선택받아야 하지만,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 (중략) 남자가 남자가 되기 위해서 여자는 필요하지 않다. 남자는 남자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남자가 된다. 여자는 그다음 포상으로 딸려 온다.
 이런 남성 집단의 모습을 전문 용어로 '호모 소셜(homo-social)'이라 부른다. 호모 섹슈얼에 가까운 천황을 향한 무한한 지극정성과도 같은 사랑이 남자들 사이에 존재한다. 남자가 정말로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여자가 아닌 남자다. (중략)
 남자들을 보더라도 여자에게 선택받는 것보다는 동성인 남성에게 "너 꽤 쓸 만한데."라는 말을 듣는 것을 최고의 찬사로 여기는 면이 있다.
(125,126)

 물론 그러한 경우도 있겠지만, 지나친 일반화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나만 해도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데 말이다.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는 분이 쓴 글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웃긴다.


 P.S. 138페이지에 "가모메 죠메이의 <호조키>"라고 나오는데, 잘못되었다. "가모노 쵸메이(鴨長明)의 <호조키>(方丈記)"가 맞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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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마피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2014월드컵에서 한국은 졸전 끝에 예선 탈락했지만, 그래도 월드컵 시즌인지라 신간추천페이퍼에 월드컵 관련 서적들, <축구의 세계사>와 <피파 마피아>이 추천되었다. 그 중 <피파 마피아>가 선정되었다. 얼마 전 서점에 가서 실물을 보니 <축구의 세계사>가 선정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가 48000원 짜리 책을 공짜로 받는 것이 송구스럽기도 하거니와 1200페이지짜리 두께에 압도당했다. 만약 그 책이 선정되었더라면 한 달 내내 <축구의 세계사>만 읽고 있을 뻔 했다.

 

 6월 9일 출판된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 토마스 키스트너는 세월호 사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세월호 사고에 대해 외국인이 언급한 최초의 책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금권에만 눈이 먼 탐욕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경우, 어떤 참사가 빚어지는가 하는 점은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사고가 여실히 보여줍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침몰은 300여 명이 넘는 젊은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이 불행한 사고로 한국은 정체성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중략) 인간의 경제는, 건전한 사회는 도대체 경쟁을 어느 선까지 감당해야 할까요? 기업과 사조직의 이해관계가 인간 본연의 욕구를 짓누르는 어처구니없음을 언제까지 좌시해야만 할까요? 그리고 '세월호'의 비극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익추구 집단과 감독관청이 이처럼 밀접하게 맞물릴 때 참극은 피할 수 없습니다. 독립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족벌경영이 판을 치면서 이해당사자끼리 서로 이익만 키워주는 부패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규제가 줄어들수록 돈벌이라는 탐욕에 제동을 걸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중략) 바로 그래서 오락산업의 가장 통제받지 않는 부문인 프로축구 역시 인간의 인생을 지배하는 권력과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받아서는 안 됩니다. (중략) 축구는 그저 스포츠 경제, 스폰서 경제, 정치 그리고 미디어의 힘으로 부풀려진 가죽 공을 둘러싼 비즈니스일 따름입니다. 모두 저마다 여기서 이득을 얻어내려 혈안이 되는! (8, 9)

 규제받지 않은 경제권력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문제라는 점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피파의 부정부패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피파의 부패로 인해서 세월호참사처럼 직접적으로 사람이 죽지는 않으리라는 점에서 둘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다소 비약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세월호 참사의 원흉으로 소위 '관피아'가 지목되면서, 별안간 '철피아(철도마피아)' '해피아(해양마피아)' '언피아(언론마피아)' '학피아(학벌마피아)' 등 마피아 시리즈가 회자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이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마피아시리즈의 정점을 찍은 것이 '축피아(축협마피아)'다. 대한축구협회의 폐쇄적인 성격과 인맥주의가 한국 축구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축피아'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대한축구협회가 축피아라면, 보다 더 규모가 큰 국제축구연맹(FIFA) 또한 일종의 마피아라는 것이 저자의 비판이다.

 이 책에는 18년째 피파 회장 자리에 있는 블라터를 중심으로 한 피파 인물들의 스캔들이 서술되어 있다. 온갖 협잡과 음모,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피파의 모습을 읽다보면 피파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FIFA나 IOC 같은 조직들이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 순수하게 스포츠만을 추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아디다스의 호르스트 다슬러는 올림픽과 월드컵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IOC의 회장에 사마란치를, FIFA의 회장에 아벨란제를 앉히는 데 성공했다. 이후 스포츠 대회는 자본의 전시장이 되었는데, FIFA 회장에 블라터가 취임하면서부터 그러한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아무도 블라터의 연봉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라고 하니 FIFA의 불투명성은 알 만하다.

 사실 생소한 고유명사가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잘 모르는 여러 스캔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하여 잘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냥 막연하게 'FIFA도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이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최근 카타르의 월드컵 개최에 대한 뇌물 의혹이 뉴스에 올랐는데, 이 책에도 자세한 내막이 나와 있다.

 그런데 생소한 고유명사들 속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으니,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이다. 이 책에 따르면 정몽준은 블라터 FIFA 회장의 강력한 반대파라고 한다. 그런데 2002 한일월드컵 개최에 얽힌 정몽준 회장의 활약 또한 적혀 있다.

 2002년 월드컵이 한국과 일본에 주어진 것을 돌아보자. 축구라는 경로를 통해 자국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 일본과의 공동 개최를 위해 싸운 정몽준은 정말 많은 것을 월드컵에 투자했다. (중략) 피파 회장 아벨란제는 일본의 단독 개최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다행스럽게도 정몽준은 아벨란제의 사위를 공략할 수 있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테이셰이라를 이용해 아벨란제를 움직이려 했다. 이렇게 해서 테이셰이라는 1995년 상파울루 출신의 사업 친구 조제 아빌라와 함께 자동차업계에 진출했다. CBF 회장이 '현대'라는 자동차 브랜드의 브라질 영업권을 따냈다. (중략)
 한국과 일본은 서로 선물하는 일이 없다. 틈만 나면 서로 비난하고 매수를 일삼는다. 1999년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윌은 지원국 일본이 위원들에게 랩톱과 같은 값비싼 개인 선물들을 뿌렸다고 확인했다.
(274, 275)

 어?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 문제는 의혹이 개최만이 아니라 한국전 경기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2002년 8월 25일, 아시아월드컵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파는 이탈리아 검찰의 고소에 직면해야만 했다. 월드컵에서 심판을 맡았던 비론 모레노가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고의적으로 탈락시켰다는 게 고소장의 내용이었다. 주최국 한국과 맞섰던 이탈리아가 이 경기에서 1대 2로 패했기 때문이다. 모레노의 석연치 않은 판정을 보면 이 에콰도르 출신의 심판이 정말 개최국에 유리하게 휘슬을 불었다고 믿을 구석이 많다. (중략) 한국은 두 번이나 그런 모호한 심판 판정 덕을 보았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8강전에서 한국이 만난 상대는 스페인이다. 다시금 명백한 오심이 월드컵 개최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실제로 이런 오심이 의도적인 것인지 하는 물음에는 누구도 확실한 답을 할 수 없다. (210, 211)

 이런 얘기는 일본 넷우익들이 할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글은 피파를 오랜 세월 취재해 온 저널리스트가 제3자적인 입장에서 쓴 글이다. 물론 저자의 분석이 어느 정도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나는 그때 한국의 16강전, 8강전 경기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고, 저자의 의혹이 정당한 것인지 판단할 전문지식도 없다. 2006, 2010, 2014년 월드컵의 2승 3무 5패라는 한국의 성적을 보면, 히딩크 감독의 능력 외에 개최국 버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하긴, 정몽준 명예회장도 얼마 전 서울시장 선거에서 "세계축구연맹(FIFA) 책임자가 ‘한국이 준결승에 올라간 건 정몽준이란 사람이 월드컵 축구심판을 전부 매수해서 한 것 아니냐’라고 하는데 내 능력이 그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니냐"고 농담삼아 이야기했다고 하는 걸 보면(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603500044), 한국 외 나라들의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히 오가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 빨간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던 나로서는 한국의 4강신화가 이렇게 의혹으로서 논해지는 걸 보니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가 만들어낸 열광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서 냉정하게 본 월드컵은 어떤 모습일까? 책의 말미에는 월드컵 때문에 교육, 복지 예산이 삭감되는 데 반발하는 브라질 사람들의 월드컵 반대시위가 언급되어 있다. 비록 2002년의 한국에서는 월드컵에 대한 반성 대신 열광만이 있었지만, 12년이 지난 지금은 2002년 월드컵이 가진 의미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박지성 선수의 은퇴와 홍명보 감독의 사퇴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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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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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 에세이야말로 리뷰를 쓰기 어려운 장르가 아닐까? 이 책은 각기 다른 주제들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통일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에세이라서 잠시만 방심해도 읽다가 무슨 이야기인지 감을 못 잡게 된다. 무언가 사고의 끄트머리를 잡으려고 해도 대여섯 페이지만에 글이 끝나버리니 생각이 충분히 뻗어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하면서 읽어보았더니 평이한 문체와는 달리, 철학적으로 생각할 거리가 꽤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 속에서의 철학적 사유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목인 <철학자와 하녀>는 탈레스가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지자, 하녀가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이며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비웃은 일화에서 나온다. 형이상학적 차원을 추구하는 철학자들과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괴리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저자는 출발한다. 철학과 일상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다. 원자력발전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하이데거를 인용하고, 형제복지원의 인권침해를 푸코를 통해 비판하는 식이다.

 뜬구름 잡는 철학이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인 철학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공감할 수 있다. 평소에 철학책을 안 읽던 사람들, 철학을 생경하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철학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다가가기 쉽게 쓰여져 있고,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문제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평생 철학과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들도 읽기 쉽다는 점에서는 그 의미가 있는 책이다.

 다만 저자도 에필로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좋은 말씀"으로 끝나버린 느낌도 든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관점에 대해서는 납득을 했지만, 읽고 나서 깊이 있는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다루고 있는 넓이가 넓다보니 깊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저자는 "이 글들을 쓰며 내가 떠올린 수신인은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였다. '철학이 일상에게' 그리고 '일상이 철학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런 걸 떠올렸다"(10)고 말한다. 철학의 역할은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고방식을 제공해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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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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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즘이라는 사상을 만들어낸 철학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문제적이다. 학문적, 역사적, 정치적으로 말이다.

 "철학적 지도자"를 자처했던 히틀러는 칸트, 헤겔, 실러, 피히테, 쇼펜하우어, 니체, 바그너의 사상을 짬뽕하여 나치즘을 만들었다. 유서 깊은 독일의 철학과 문학은 히틀러가 자신의 추악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데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칸트, 헤겔, 피히테, 바그너의 저작들에는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드러나 있었다. 사회적 다윈주의를 수용한 헤켈, 귄터, 라가르데, 체임벌린 등은 노골적으로 게르만 인종의 우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히틀러와 나치 이론가들은 이들의 인종주의를 그대로 수용했다. 
 
 물론 히틀러 자신이 나치즘을 체계화할 만큼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로젠베르크, 보임러, 크리크와 같은 철학자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모두 반유대주의를 신봉했고, 히틀러가 집권하고 나서는 독일의 학계에서 유대인 철학자들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 1600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교수직에서 쫓겨났고, 그 빈 자리는 나치즘에 편승한 학자들이 차지했다. 나치에 동조한 철학자들 중에는 칼 슈미트와 마르틴 하이데거도 있었다. 슈미트와 하이데거는 보수적 사상은 가지고 있었지만, 원래는 나치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하고나자 나치당에 입당하고, 히틀러를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를 비롯해 많은 유대인 제자들과 친구들이 있었지만, 반유대주의자로 돌아섰다. 심지어 하이데거는 스승이었던 유대인 에드문드 후설이 교수직을 박탈당하자 절교를 선언했고, 대학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유대인 철학자들은 독일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배제되었다(정작 스피노자는 생전에 불신자라는 이유로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했는데 말이다).

 수많은 유대인 철학자들이 프랑스, 혹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발터 벤야민, 테어도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막스 호르크하이머 등은 유명하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벤야민을 비롯한 망명자들과 이민자들을 "히틀러의 제5열"로 간주하여 수용소에 가두었다. 벤야민은 곧 풀려 났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프랑스를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으로 향하다가 피레네산맥에서 권총자살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아렌트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채플린을 비롯한 헐리우드 배우들과 교류하던 아도르노는 미국에도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하는 파시즘과 반유대주의의 그림자에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대부분의 나치 철학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로젠베르크에게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주요 나치 철학자였던 보임러가 3년간 복역했을 뿐이었다. 한국에서는 독일의 과거청산을 일본의 과거청산과 비교하며 이상화하고 있는데, 적어도 나치 부역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하다.

 뉘른베르크 재판도 열렸고 연합국은 반나치 위원회를 설립해 노력도 했지만 독일인들이 직접 독일을 부흥시키는 작업을 넘겨받고 나서부터는 나치 부역자들의 과거 기록은 은폐되거나 세탁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표리부동한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부역 사실을 감추었고 부역 사실이 발각되더라도 지루하고 긴 법정 싸움으로 끌고 갔다. (341, 342)

 독일의 철학자들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한 게 아니라,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협력을 강요당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몇몇 유대인 학자 그룹이 반발했지만, 독일 사회의 망각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1950년대에 동독과 서독의 대학에서는 과거에 나치당원이었던 사람들을 재임용하기 시작했"(346)던 것이다. 많은 나치 철학자들이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나치 철학자들 중에서도 거물이었던 하이데거와 슈미트는 전후에도 그 명성을 유지했다. 

 다른 나치 부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슈미트는 자신의 역할과 나치 정권으로부터 받은 혜택을 실제보다 축소해서 얘기했다. 그는 법학자로서 제3제국을 위해 일해 달라는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가 쓴 나치 관련 출판물과 반유대주의적인 글의 양을 고려하면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348, 349)

 하이데거는 나치에 개입한 사실을 조작 축소했으며 유죄의 증거가 될 만한 저작과 강연을 정교하게 편집, 삭제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을 결백하고 관념적인 철학자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아렌트와 사르트르를 비롯해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은 하이데거의 변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그의 천재성을 찬양했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끼친 피해에 대해 사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히틀러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연민을 표명한 적도 없었다. (357)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철학자 개개인에 대한 일화나 전기들이 자세히 적혀 있어 흥미로웠다. 나치즘의 대두와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 상반된 선택을 한 철학자들, 예를 들어 하이데거와 아렌트, 슈미트와 후버의 일화를 보면,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유대인 학자들에게 망명과 잔류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말이다. 시대가 광기에 휩싸이고, 국가권력의 통제가 극단에 치달았을 때, 학자로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시류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비단 나치스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나 군부독재 시대 한국의 학자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하이데거와 슈미트, 프레게 같은 나치 부역 철학자들이 오늘날에도 철학계에서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영국과 유럽, 미국의 대학에서 슈미트와 하이데거의 사상이 전파되고 프레게가 교과목의 중심에 놓이는 상황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독일의 지적 유산에서 어두운 요소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많은 유대계 독일 철학자들이 주류 철학에서 소외받고 있는 것도 문제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이 배우고 있는 사상의 맥락을 감지하지 못하면서도 뭐가 문제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과거 나치 연루 사실을 알게 되면 학생들은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다. 철학은 '윤리학'에서 탄생했다. 그러한 이유로 철학자는 항상 철학의 불안한 궤적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376, 377)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작가와 작품은 구분해서 판단해야 한다"라는 오래된 문제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사에 깊은 이력을 남긴 레니 리펜슈탈은 나치 프로파간다 영화 <의지의 승리>를 만든 극성 나치당원이었고, 노벨 문학상 작가 귄터 그라스 또한 나치 친위대에서 복무했던 경력이 문제가 되었다. 좀더 비근한 예로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일본 만화 작가나 애니메이션 성우의 "혐한" "넷우익" 발언이 알려지면서, 하루아침에 평판을 땅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설득력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옹호했다. 루소는 방탕한 성적 편력 끝에 낳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다. 알튀세는 아내를 총으로 살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알튀세의 사상을 모두 거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가?

 과거 철학자들의 신념이나 행동에 윤리적 결함이 발견될 수는 있다. 이 책을 읽고 하이데거나 슈미트의 나치 경력을 옹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사상에 나치즘과 반유대주의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내용들도 있다.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행적을 근거로 하여 그들의 사상적 저작까지 단죄하는 것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저자가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행적뿐 아니라, 그들의 저작에 숨겨진 나치즘의 위험성을 지적했더라면 훨씬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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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지금은 과학과 담을 쌓고 살지만, 나도 한때는 공룡소년이었다. 초등학교 때, <쥬라기공원>을 본 후, 공룡 관련 책들을 읽으며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우고 다녔다. 공룡에 대해 읽으면서 고생물 전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하, 은, 주, 춘추전국시대, 진, 한, 위진남북조..."하고 중국 왕조들 이름을 외우면서, "선캄브리아대, 캄브리아기,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 데본기, 석탄기..." 하며 지질시대 이름을 외웠다.(삼국지와 쥬라기공원은 초등학교 때 내게 가장 핫한 컨텐츠였다.) 그 중에서도 캄브리아기의 할루키게니아라는 괴상한 생물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는데, 7개의 다리와 7개의 촉수만으로 이루어진 그 특이한 모양새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의 6장 "공룡 광풍"에서 개탄하듯이 공룡에 관한 관심이 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학교 올라가면서부터 생물 교과서에 공룡이 아니라 완두콩과 초파리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고생물학에 대한 감동으로 전율했다. 평소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던 과학 서가에서 우연히 그 책을 발견했던 것은 아마 이 책이 캄브리아기의 버제스동물군을 다루고 있었고, 초등학교 때 꽂혔던 할루키게니아를 떠올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캄브리아기, 갑작스럽게 탄생한 다세포생물들은 오늘날의 어떠한 생물들과도 유사하지 않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들이었다. 역사의 테이프를 다시 돌린다면, 어쩌면 인류를 비롯한 포유류, 파충류 대신, 할루키게니아나 오파비니아 같은 괴상한 생물들이 오늘날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책의 주장은 신선하게 다가왔고, 오늘날의 생태계가 현재와 같은 구성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라는 사실 그 자체가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과학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문과인 나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쓴 저자의 뛰어난 필력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과학글쓰기의 일인자로 불리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책의 저자였다.(<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 나오는 버제스동물군의 발견에 대해서는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의 16장 "미끄러운 경사로에서 나타난 문학적 편향"에도 간략하게 나온다.)

 굴드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한 35편의 에세이들을 모은 이 책 역시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쓰여져 있다. 왜 여자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젖꼭지가 달려 있는가? 야구는 잘 알려진 것처럼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탄생했는가? 히라코테륨이라는 말의 선조 동물의 크기를 묘사할 때, 왜 모든 미국의 과학교과서는 폭스테리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개의 일종과 비슷한 크기라고 말하는가? 오리너구리나 가시두더지 같은 단공류(알을 낳는 포유류)는 태반을 가진 다른 포유류들에 비해 진화가 덜 되거나 열등한 동물들인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이 다윈의 적자생존이론을 비판한 건 단순히 그의 이상주의적 경향이 빚어낸 잘못인가? 1941년의 다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매료되었다(masmerize)'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매스머의 최면요법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이 책에 나와 있다. 언뜻 보기에는 과학과 별 관련이 없어보이는 야구 이야기나 타자기 이야기로부터도 생물학의 심오한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풀어내는 저자의 글쓰기 능력은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하나하나가 보석 같은 이 에세이들은 두고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굴드는 생물학이 수치의 엄밀함, 예측, 실험을 다루는 견고한 물리과학과 달리, 역사 속의 복잡한 대상을 다루는 역사과학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나는 중국의 왕조 순서들 외우듯이 지질시대의 순서를 외웠다고 했다. 그런데 굴드 역시 의식적으로 인류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를 유비시키고 있다.

 야구의 기원에 대해 논한 3장 "쿠퍼스타운의 창조 신화들"은 인류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를 대비시키며 과학의 심오한 문제를 풀어낸 대표적인 에세이다. 1907년, 야구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위원회는 애브너 더블데이가 "1839년에 쿠퍼스타운의 양복점 뒤편에서 구슬치기를 하다가 그림을 그리고 경기 규칙을 설명했으며, 이 운동경기에 "베이스 볼"이라는 오늘날 사용되는 이름을 붙였다"(66,67)는 설을 채택했다.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다. 18세기 영국의 하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다양한 공놀이가 19세기 전반 미국으로 들어왔고, 19세기 후반 오늘날의 야구로 확립되었다는 것이 굴드가 제시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쿠퍼스타운 신화"가 탄생한 이유는 1907년 당시의 위원회가 야구의 기원이 미국에 있고, 그 창시자가 남북전쟁의 영웅인 애브너 더블데이라는 설명을 애국적 관점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굴드는 야구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역사 또한 연속적이며, 어떤 특정한 출발점과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굴드는 역사에 의미나 목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17장 "밝게 빛나는 커다란 땅반딧불 애벌레"에는 17년간을 애벌레로 산 끝에 몇 주간 나무에서 울다가 죽는 매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17년을 사는 매미는 어떤가? 매미의 애벌레가 영광스러운 며칠을 끈기 있게 기다리며 오랜 기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애벌레는 지하에서 활동적인 삶을 영위한다. 물론 그중에는 긴 수면기도 있지만, 여러 차례 허물을 벗으며 왕성하게 성장하는 기간도 포함된다. (365,366)

 우리는 흔히 매미를 완성된 형태로 보고, 애벌레는 그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애벌레도 매미 못지 않게 완성된 존재이며, 결코 매미가 되기 '위하여' 애벌레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가 우연의 연속이며, 의미나 목적이 없다는 굴드의 역사관은 영국의 보수주의 사상가인 마이클 오크셧의 역사관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 책에서 오크셧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표현은 다를지라도 역사의 목적이나 의미를 부정하는 둘의 역사관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오크셧은 "우리는 출발점도 없고 목적지도 없는 한도 끝도 없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며,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평평한 배 위에 계속 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선적 진보를 믿었던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러한 오크셧의 역사관을 비판했지만,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적 관점에서 보면, 오크셧의 관점에 일리가 있다.

 이러한 관점은 어찌 보면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굴드는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우연의 결과로 나타난 역사 그 자체에서 역설적인 경이로움을 발견한다. 충분히 다른 형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그 자체가 경이롭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다. 굴드는 "한 가지 방식으로 모든 답을 얻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흥미롭다"(745)라고 말하며, 특정한 하나의 원리에 역사를 환원시키려는 시도를 반대한다. 그리고 현존하는 모든 것들의 다양성을 긍정한다. 굴드가 제시하는 다양한 생명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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