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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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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여행이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가이드북에서 본 사진, TV나 인터넷에서 본 동영상을 현장에 가서 확인하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곳을 가든 "여기가 타지마할이군" "여기가 그랜드캐니언이군"이라고 별다른 감흥 없이 중얼거리고 돌아온다면 그보다 더 허무한 행위는 없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실재하는 것 그 자체(the real)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가상을 미리 경험하고, 가상으로서의 사진이나 동영상이 실재하는 것 그 자체보다 더 큰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저자는 몽골의 관광지 테렐지 국립공원을 방문한 소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진과 똑같군,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빠르게 스쳤다. 마치 그림엽서 같아.(중략)
그림엽서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비전 중에서도 가장 초라하고 빈약한 비전에 속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불행이며, 당황스러운 기분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곳은 분명 의심 없이 아름다운데, 놀랍게도 아무런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45,46)

잘 꾸며진 관광지로서의 테렐지 국립공원은 이윽고 저자가 방문하게 되는 유목민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초원 알타이-투바와 대비를 이룬다. 저자, 그리고 그녀와 함께 알타이 투어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우연히 마주친 오스트리아 관광객들을 보고 "아,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가 저런 일행에 속한 채 알타이에 오지 않은 것이"(138)라고 생각한다. 즉,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가상과는 다른 실체(the real)를 저자는 경험한 것이다.

몽골, 그 중에서도 알타이는 한국인에게 가장 낯선 여행지다. 저자는 한국에서 미리 알타이에 대한 여행기를 알아보려고 했었다.

몽골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 종류의 책-여행기 혹은 여행 안내서를 한 권 사려고 했다. 몽골 여행기 물이다. (중략)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네팔, 인도, 중국, 실크로드 등 전 세계 여행자들의 마음을 빼앗는 매혹적인 관광지에 비해서 일단 몽골 관련 여행기는 출판물 자체의 종류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이었다. 몽골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책은 한두 권 찾아낸 것이 전부인데, 그나마도 홉스굴이나 고비 사막 등 이름이 알려진 관광지를 중심으로 편집이 되어 있으며, 몽골이란 나라 전체를 다룬 책을 처음붜 끝까지 샅샅이 살펴봐도 알타이 지역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내가 가게 될 서북부 지역은 지도조차도 생략되었으며, 몽골 소수민족에 관한 내용에서도 '투바'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35)

그렇기에 투바의 족장 갈잔은 저자에게 "환영한다, 너는 이곳 알타이-투바 땅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이다"(72)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알타이라는 지명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랄 알타이어족. 오래 전,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우랄 알타이어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으며, 한국어가 알타이어족 계통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학설이 대다수인 모양이지만, 어쨌든 내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배웠다.

한국인이 몽고반점이 있는 몽골로이드 인종인 점을 강조하며 허경영처럼 몽골과 통일하자고 주장하거나 황석영처럼 몽골+2코리아연합론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라는 민족이 아니라 한국어라는 언어가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몽골을 방문한 저자가 독일에 거주하며 독일어로 글을 쓰며 독일어로 말하는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알타이 투어에 동반한 사람들은 일곱 명의 스위스인과 두 명의 오스트리아인, 열 두 명의 독일인들이었고, 저자와 친하게 지냈던 이들은 마리아와 한스였다.(독일에서 만든 투어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저자는 그들과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나누었다. 번역가 노승영이 "이방인의 이방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때문이다. 생김새는 현지의 유목민들과 비슷하지만,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은 함께 온 유럽인들과 더 비슷했을 저자의 경험은 알타이 생활의 특이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저자가 운명처럼 이끌리듯 알타이로 가게 된 것은 투바 부족의 족장이자 독일어로 글을 쓰는 작가 갈잔 치낙의 소설 <귀향>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그리고 알타이에 직접 가서 갈잔을 만난 저자는 독일어로 의사소통한다. 그렇다면 "환영한다, 너는 이곳 알타이-투바 땅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이다"는 말은 저자가 모국어인 한국어의 고향인 알타이로 귀향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갈잔의 소설 제목이 <귀향>이듯이 말이다.

저자가 알타이 초원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발견한 실체(the real)는 언어의 고향에서 부유하는 자기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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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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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언컨대, 14기 알라딘 신간평가단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의 선정도서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책이다. 랑시에르, 아렌트, 벤야민, 리오타르, 부르디외 등 사상가들을 도처에서 인용하는 이 책은 읽기만 해도 어지러워진다. 어떤 부분은 원론적, 추상적이고, 다른 어떤 부분은 논하고 있는 작품을 읽지 않아 이해가 어렵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의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겠다.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학원에서 정치사상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는 충분히 흥미롭다. 그렇지만 저자가 지향하고 있는 "정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예술이 곧 정치다'라고 선언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나 또한 예술과 정치의 만남이라는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그 구체적 실천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거니와, 정치학(혹은 정치사상)에 어떠한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아직 공부가 부족한 탓이 크겠지만, 이 책이 가진 의의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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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y 2015-11-06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종이가 아까운글입니다 지적 저렴한 허영이 뚝뚝 인 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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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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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대두된 이슬람국가(ISIS)의 위협부터 이스라엘-팔레스타인분쟁, 이라크전쟁, 알카에다와 9.11테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나치의 유대인학살과 십자군전쟁까지, 세계사의 현장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한국 또한 아시아에서는 드물게 카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고, 동네마다 교회가 있는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공공장소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극성스러운 분들의 모습을 거의 매일 같이 볼 수 있고, 여기에 반발하는 반 기독교 정서 또한 인터넷 등지에서(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등)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도대체 사랑을 설파하는 종교가 왜 이렇게 갈등과 반목의 근원이 되었을까?

 <세 종교 이야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해설한 책이다.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꺼운 책이지만,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개괄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라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간혹 유대교나 이슬람교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책의 대부분이 역사를 기술하고 있어, 저자의 관점은 맺음말에 짤막하게 제시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만이 '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종교든 모두 진리를 탐구해 왔다. 이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종교적 평화는 다른 종교들과의 융합 또는 화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 세 종교는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그리고 그간의 잘못에 대해 서로 사죄해야 한다.
(475)

 나 역시 이러한 저자의 견해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너무 상식적인 주장이라 반론의 여지조차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종교-특히 일신교-는 자신의 종교를 절대시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 정신적, 물리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한 종교적 신념체계를 그 종교 외부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그에 따라 갈등이 촉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의 주장과 같은 종교 간의 이해와 화해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어떤 종교의 역사에 대해 서술할 때, 그 종교의 경전의 내용에 따라 설명하는 내재적 접근과 경전의 외부에서 그 종교의 역사를 분석하는 외재적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전자는 신학적 접근, 후자는 역사학적 접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내재적 접근과 외재적 접근을 둘 다 사용하고 있는데, 모세의 엑소더스에 대해 해설할 때는 내재적 접근을 취한다. 모세가 이집트에 저주를 불러 모든 맏아들을 죽이고, 홍해를 갈라 바다를 건넜다는 성경의 내용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과학적 해설이 있을 터인데, 그러한 해설 없이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적어 놓으면, 유대-기독-이슬람의 신념체계 밖에 있는 독자들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불교 신자지만, 고등학교 대학교를 기독교계 학교를 나오면서 <성경>도 읽었고,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아랍어를 공부했을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전문적인 수준까지 공부한 것은 아니라 이 책에 나온 신학적 해석이 타당한지에 대해서 제대로 검증을 할 역량은 되지 않지만, 지엽적인 오류를 두 군데 발견했다. 

 이삭이 살던 시기에 남부 해안에 바다의 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이 사람들이 현 팔레스타인인들이다. (중략) 이들이 이집트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인들과 비슷한 시기에 남부에서 올라와 가나안 지방에 정착했다. (중략) 이때부터 두 민족 간에 충돌과 영토 분쟁이 시작되었다. (95)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이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필리스틴)인들로부터 유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인들과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 직접적 연관은 없다고 한다.(http://ko.wikipedia.org/wiki/%ED%8C%94%EB%A0%88%EC%8A%A4%ED%83%80%EC%9D%B8%EC%9D%B8
) 현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민족적으로는 아랍인에 가깝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660~583년 때의 사람이다. 영어식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다. (129)

 이 문장은 사실과 정반대다. 고대 페르시아어 발음이 차라투스트라, 영어식 발음이 조로아스터다.(http://en.wikipedia.org/wiki/Zoroaster)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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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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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한 조각에
받아쓰기 100점의 행복,
결승골의 짜릿함,
야근을 즐기게 하는 기적까지
모두 담을 수 있을까요?


어느 프랜차이즈 치킨의 TV 광고다.

이를 패러디해서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누가 이 한 조각에
프랜차이즈의 횡포,
양계농가의 곤경,
맥주회사의 과점,
치킨집 사장님의 애환까지,
모두 담을 수 있을까요?

정답은 바로 이 책, <대한민국 치킨전>이다.

저자가 한 조각의 치킨에서 맛깔나게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하다. 1960년대 전기통닭구이부터 '후라이드 치킨'의 등장과 진화, 프랜차이즈 치킨의 닭 공급량 조절과 가격 인상, 배달앱의 등장으로 인한 압박, 조류독감과 불경기, 치킨에 맥주가 필수인 이유, 맥주회사들과 대형 육계회사들의 과점... 저자가 자유자재로 풀어낸 글은 술술 읽힐 뿐만 아니라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대한민국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가 치킨에 농축된 느낌이다. 치킨을 보면 대한민국이 보인다고나 할까?

우리가 기억하는 '월급날 아버지가 사 오시는 통닭'은 그리 넉넉하진 않아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80년대 한국에 상륙한 KFC는 더이상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게 되었고, 세련된 젊은 세대의 문화적 상징이었다. 그리고 IMF 이후 회사에서 잘린 자영업자들이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던 사업이 치킨집이었다. 현재 불고 있는 치맥의 전국민적 인기는 더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갑갑한 사회의 상징일 것이다.

지난 십년간 개업한 7만 4천여 개의 치킨집 중 5만 개 이상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남아있는 치킨집들도 그만두지 못해 마지못해 영업하고 있을 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황. 닭을 기르는 인생도, 닭을 튀기는 인생도, 닭을 배달하는 인생도, 그리고 보통 사람 대부분이 해당하는 닭을 뜯는 인생도 결코 이러한 생지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치킨과 함께 먹는 맥주의 탄산이 그렇게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쩌면 치킨을 먹는 우리의 인생이 갑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녀노소 누구나가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는 국민 음식 치킨. 그 안에 담긴 희노애락을 엿볼 수 있는 명저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는 분들께는 읽기 전에 가까운 치킨집에 전화를 걸어 미리 치킨을 주문해 두기를 권한다. 이 책을 맛있게 읽을 수 있는 팁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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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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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어머니가 DMB로 뉴스를 듣는 소리에 깬다. 그리고 전날 저녁 뉴스와 토시 하나 다르지 않은 뉴스를 들으며 아침식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주부인 어머니는 하루 종일 DMB로 뉴스를 보시겠지만, 학생인 나도 뉴스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종이신문을 보지는 않지만,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흥미를 끄는 뉴스, 특히 연예 뉴스가 있으면 꼭 클릭하게 되고, 뉴스에 달린 댓글을 보고 킥킥거린다. SNS에서도 쉴 새 없이 새로운 뉴스를 읽게 된다. 저녁에는 집에 와서부터 쭉 TV 뉴스를 틀어놓게 된다. 특히 스포츠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나 기상캐스터가 오늘 무슨 옷을 입고 나오는지에 이목이 집중된다. 밤에 자기 전에 채널을 돌리다가 심야뉴스를 잠시 보고 잠자리에 든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뉴스에 중독된 시대, 바야흐로 '뉴스의 시대'다.

 온갖 이례적인 사건들을 이처럼 단호히 추적함에도 불구하고 뉴스가 교묘히 눈길을 회피하는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뉴스 자신, 그리고 뉴스가 우리 삶에서 점하고 있는 지배적인 위치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없는 헤드라인이다. (10, 11)

 도대체 우리에게 뉴스란 무엇이길래, 뉴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저자는 뉴스가 공포, 불안, 분노, 질시, 그리고 쾌락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뉴스는 끊임없는 재난과 범죄를 보도함으로써 공포와 불안을 야기하고, 극악무도한 범죄자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성공한 유명인사들에 대한 질시를 야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 없는 뉴스들을 보며 모종의 쾌락을 느낀다. 뉴스를 일종의 오락(entertainment)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뉴스는 우리에게 각기 할당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거나 흥미진진한 문제들을 찾아냄으로써, 그리고 이 더 큰 관심사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불안과 의심을 삼켜버리도록 용인함으로써 우리를 사로잡은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기근, 침수된 마을, 잡히지 않은 연쇄살인범, 내각의 사퇴, 내년 최저생계비에 대한 경제학자의 예측 같은 외부의 혼란이야말로 우리를 내면의 평온이라는 감각으로 인도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15)

 저자는 이러한 범죄와 사건사고, 부정부패만을 보도하는 뉴스의 부정적인 보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동전의 훨씬 유쾌한 쪽은 결코 뉴스가 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다. "87세 할머니가 일면식도 없는 15세 행인의 도움으로 철도역 층계를 세 계단 오르다"(50)와 같은 일상의 작은 기적들은 살인이나 강간 같은 극히 일어나기 드문 사건들에 밀려 뉴스가 되지 못한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지만,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뉴스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것"이다. 요컨대 뉴스는 우리가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우리는 뉴스란 기본적으로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한 묶음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국가가 그저 절단된 손, 불구가 된 할머니, 지하실에 죽어 있는 소녀 셋, 당혹스러워하는 수상, 수조 파운드에 달하는 부채, 기차역에서의 동반자살, 그리고 해안 지대에서 벌어진 치명적인 오중추돌 사고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중략)
 뉴스가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소식들이 국가 그 자체는 아니다.
(52)

 어떤 의미에서는 저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치나 사회에 대한 비판 대신 온갖 "미담"들만이 뉴스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어용뉴스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매체비평이나 언론 관련 서적들과 비교했을 때, 이 책이 원론적이고 추상적이다 못해 나이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은, 아마 저자가 뉴스의 배후에 있는 권력이나 자본의 문제는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한국의 언론이 서양의 언론과 비교했을 때 심각하게 절망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싶지는 않다). 저자는 뉴스가 권력이나 자본과는 별개로 존재하며, 뉴스의 문제를 뉴스라는 대상과 그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문제로만 보고 있다. 

 그렇게 저자가 내놓은 결론은 다소 황당하다.

 우리는 전쟁, 부채, 폭동, 실종된 아이들, 시사회 뒤풀이, 신규 상장, 불한당 같은 미사일 등이 전례 없는 중요성을 갖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뉴스가 부추긴 인상에서 놓여날 필요가 있다.(중략)
 뉴스가 더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때 우리는 타자와 상상 속에서만 연결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타자를 정복하고 망가뜨리고 만들거나 없애는 일을 그만둘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할당된 짧은 시간 속에서 견지해야 할 자신만의 목적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291, 292)

 저자의 주장은 뉴스를 잠시 끄자는 것이다. 어차피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사고들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으니, 우리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주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뉴스를 보는 시간을 할애하자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사적인 문제에만 얽매여 공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한 태도가 바람직한 것일까? 국회에서 어떤 정책들이 결정되고, 어떤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무관심해도 괜찮을 만큼, 사회를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만약 뉴스를 보지 않고 지내다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의료민영화로 의료비 폭탄을 맞게 된다면? 만약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해 있는 줄 모르고 어떤 나라에 여행을 가게 된다면?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뉴스를 안 보고 타인과 대화가 되는가?

 그렇지만 이러한 불안을 가지게 되는 것 자체가 뉴스에 단단히 중독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뉴스는 우리의 실생활과 별다른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물론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관심을 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쓸데없는 뉴스는 과감하게 끊을 수 있는 뉴스다이어트가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뉴스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알고, 주체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찾아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정치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진을 빼는 데 검열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이 힘은 사람들 대다수를 혼산스럽고, 따분하고, 정신 사납게 만들어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에 관여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중요한 사안의 맥락을 대다수 대중이 단 한순간도 붙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단속적인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도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36)

 '뉴스의 시대'란 뉴스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그 뉴스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뉴스과잉의 시대'인 것이다. 뉴스과잉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게 되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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