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kecologist님의 서재 (kecologist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9376210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25 Sep 2026 05:43:32 +0900</lastBuildDate><image><title>kecologist</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9376210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kecologist</description></image><item><author>kecologist</author><category>Kecologist</category><title>‘공정한 정의(Fair Justice)’를 넘어 ‘공의로운 정의(Righteous Justice)’로 - [복권 사회의 정의 - 공정을 넘어 공의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93762103/17525255</link><pubDate>Sat, 19 Sep 2026 10: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93762103/1752525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52130255&TPaperId=1752525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97/99/coveroff/k2521302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52130255&TPaperId=1752525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복권 사회의 정의 - 공정을 넘어 공의로</a><br/>윤정구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6년 08월<br/></td></tr></table><br/>‘공정한 정의(Fair Justice)’를 넘어 ‘공의로운 정의(Righteous Justice)’로:《복권 사회의 정의: 공정을 넘어 공의로》를 읽고  &nbsp;  윤정구 교수의 《복권 사회의 정의》(Justice in a Lottery Society)에서 지금까지의 정의에 대한 논쟁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하고, 그 원인을 사회에서의 성공이 유전자 복권과 복권판에 기대는 복권 사회로의 퇴행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이 책에서는 정의(正義, Justice)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해결책을 모색한다. 하나는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난 미시적, 단기적, 제도적 관점의 공정성(Fairness)과 또 다른 정의는 빙산 밑둥으로 가려져 드러나지 않은 장기적, 거시적, 직관적 관점의 공의(公義)(Righteousness)로 구분합니다. 공정성이 겉으로 보이는 열매라면 공의는 보이지 않는 뿌리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nbsp;  공정한 정의(Fair Justice)를 넘어 공의로운 정의(Righteous Justice)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 빙산 모형을 제안합니다. “빙산의 상부가 개인들이 모여 만든 이익결사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파생한 공정성의 문제를 다룬다면 빙산의 잠긴 부분은 같이 나누며 살아야 하는 구성원들이 만든 운명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원리인 공의 문제”라고 구분합니다. 정의에 대한 논의가 길을 잃은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빙산의 밑동에 해당하는 보이지 않는 공의의 영향력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빙산의 윗동에 해당하는 공정성 문제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nbsp;  “과일 나무가 썩은 과일을 맺고 있을 때 썩은 과일을 제거하는 것이 과일나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아니다. 혁신적 처방을 원한다면 결과론적 처방을 넘어 원인인 뿌리의 수준에서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59-60)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빙산의 밑동에 해당하는 뿌리 수준이 근원적인 해결책을 무시하고 윗동에 해당하는 썩은 과일만 제거하는 노력에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공의는 길을 잃게 마련인 정의를 위한 나침반”(16)이기 때문에 “공의가 앞장서서 끌개가 되고, 공정성이 밀개가 되어 따라오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가 유지되는 해법만이 정의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16)고 저자가 믿는 까닭입니다.  &nbsp;  윤정구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진정한 의미의 공의로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목적, 긍휼, 대의를 중심으로 이들의 논리적 관계를 보여주는 다이어그램을 제시합니다.  이 다이어그램에서 목적, 긍휼, 대의는 서로 독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핵심적인 축입니다. 목적(Purpose)은 우리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동기이자 방향성입니다. 모든 행위의 출발점이 되는 지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긍휼(Compassion)은 타인의 고통과 상황에 공감하고 보이지 않는 고통을 치유하려는 결단이자 결행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단순한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의(Cause)는 우리의 목적과 긍휼이 결합되어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나 더 큰 명분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는 공적인 사명감을 의미합니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1), 타인에 대한 깊은 긍휼의 마음을 담아(2),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대의를 위해(3)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br><br><br><br>이 다이어그램의 흥미로운 점은 두 개념이 만나는 교차점에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이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핵심 요소들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첫째, 목적과 긍휼이 만나면 영성(Spirituality)이 됩니다. 개인의 본질적인 목적과 타인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만날 때, 우리는 내면의 더 깊은 곳과 연결되고 삶의 의미를 깨닫는 영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삶의 근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둘째, 목적과 대의가 만나면 소명(Calling)이 됩니다. 나의 개인적인 목적이 사회를 위한 더 큰 대의와 맞닿아 있을 때, 우리는 이를 단순한 직업이 아닌 하늘이 부여한 '소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는 삶에 대한 더 큰 책임감과 추진력을 부여합니다. 마지막으로 긍휼과 대의가 만나면 사명(Mission)이 됩니다. 타인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실제적인 대의를 위해 실천으로 옮겨질 때, 그것은 구체적인 사명이 됩니다. 사명은 긍휼한 마음을 실제적인 변화로 만들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와 실행 계획을 포함합니다.  &nbsp;  이 모든 요소(목적, 긍휼, 대의, 영성, 소명, 사명)가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가장 핵심적인 중앙 공간에 바로 이 책의 핵심 문제의식이자 지향점인 공의(Righteousness)가 위치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올바른 목적과 따뜻한 긍휼의 마음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대의를 추구하는 삶.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성, 소명, 사명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공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역동적 모습은 오른쪽 화살표가 가리키듯, 지속가능성을 염원하는 운명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즉, 이러한 개인의 공의로운 삶은 개인의 성장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nbsp;    &nbsp;  윤정구 교수의 정의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깊어가는 가을 어느날 인사동 카페에서 정의에 관한 세계적인 학자를 초빙하기로 했습니다.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혁명의 주동자는 다름 아닌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정의란 무엇인지, 정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상 토론을 전개하는 사회자로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가 이날 초대한 학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nbsp;  ①《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정의는 미덕과 좋은 삶(Good Life)을 논하는 텔로스(목적)에서 출발하며, 능력주의의 오만을 경계하는 비판적 사상가, 마이클 샌덜(Michael J. Sandel) 교수②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며 공리주의적 정의론을 펼치는 밀(John Stuart Mill)과 벤담(Jeremy Bentham)➂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을 통해 운의 임의성을 교정하고 최소수혜자를 배려하는 절차적 정의론자, 존 롤스(John Rawls) ④롤스가 커튼 속에 감추었던 유전자 복권의 영향력을 실제 데이터로 측정하는 연구 수행, 유전적 불리함을 가진 사람을 돕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이며 사회적 형평성을 달성하기 위한 도덕적 의무라고 주장하는 텍사스 오스틴 대학의 행동유전학자 하든(Kathryn Paige Harden) 교수 ⑤조건과 결과를 초월하여 순수 실천이성과 양심의 도덕법칙(정언명령)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 믿는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➅수면 위의 제도적 ‘공정성(fairness)’을 넘어 수면 아래 거시적·근원적 뿌리인 ‘공의(公義, righteousness)’를 정의의 나침반으로 세우는 조직생태학자, 윤정구 교수   &nbsp;  [오프닝: 인사동의 가을, 정의의 밭을 일구다]  &nbsp;  사회자 유영만입니다. 짙은 단풍이 물든 늦가을 오후, 옛것의 숨결과 현대의 고민이 만나는 인사동 한옥 카페에 찾아주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저는 오늘, 공의로운 정의의 숲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고 건설적인 방향을 모색하려는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입니다.  &nbsp;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뜨겁고도 혼란스러웠던 단어, 바로 ‘정의’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온갖 논쟁과 경쟁이 일상이 됐습니다. 시험의 규칙이 올바른지, 줄을 제대로 섰는지, 배분이 공평하게 이루어졌는지 등을 두고 치열한 다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공정해 보이는 제도와 규칙들 아래서도, 많은 이들이 극심한 절망과 피로, 분노에 빠져 있습니다.  &nbsp;  오늘 이 자리에 모신 윤정구 교수님께서는 최근 쓰신 《복권 사회의 정의》에서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눈앞에 드러난, 일상 속에서 적용되는 단기적이고 작은 차원의 규칙을 ‘공정성’이라고 본다면, 그 아래 깊숙이 숨어 있는, 더 크고 오래가는 가치의 근원은 ‘공의’라는 점을 강조하셨죠.  &nbsp;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도 인상 깊었습니다. 썩은 과일만 골라서 따내는 것은 공정성이라는 임시처방에 불과하지만, 땅을 일구고 나무 뿌리를 살리는 ‘공의’가 바로 서지 못한다면 결국 숲 전체가 시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저에게도 지식생태학자로서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nbsp;  공의가 앞에서 길을 이끄는 ‘끌개’가 되고, 공정성이 뒤에서 밀어주는 ‘밀개’가 되어야만 진짜 정의가 제대로 설 수 있다는 오늘의 명제를 중심으로, 우리는 네 가지 질문을 깊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nbsp;  첫째, 여러분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둘째,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조건인 ‘유전자 복권’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셋째, 현재 사회에서 팽배한 ‘능력주의’를 어떻게 평가하고, 또 비판할 수 있을까요?  넷째, 길을 잃고 표류 중인 현대 사회에서, 정의를 회복할 진짜 열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nbsp;  그럼 먼저, 정의를 현실적 효용으로 바꾼 공리주의의 대표, 밀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시작해주시면 좋겠습니다.  &nbsp;  [제1막: 정의(正義)에 대한 저마다의 정의(定義)]  &nbsp;  존 스튜어트 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 교수님. 공리주의는 흔히 단순히 쾌락의 양을 계산하는 것이라고 오해받지만, 저와 벤담이 주장한 정의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정의란 사회적 공리, 즉 사회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가 각 구성원에게 반드시 보장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구속력 있는 도덕적 요구입니다. 인간의 권리나 정의감이 어디에서 갑자기 등장한 형이상학적 환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런 원칙이 지켜질 때,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고통이 줄고, 결국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되기에 절대적인 가치가 생깁니다. 정의는 결국 가장 유용하기에 가장 정의로운 것입니다.  &nbsp;  이마누엘 칸트: (고개를 단호히 저으며) 밀 선생, 시작부터 매우 위험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를 효용이나 결과의 유용성에 종속시키는 순간,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단순한 계산의 도구, 즉 수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정의란 그런 계산이나 편리함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오직 순수 실천이성이 명령하는 정언명령에 따라,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무, 바로 그것이 정의입니다. 양심이 가리키는 도덕법 앞에서 아무런 사심 없이 무릎을 꿇고, 조건이나 결과를 따지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 그 의무만이 오직 진정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nbsp;  존 롤스: 칸트 선생님의 철학이 지닌 숭고함에는 동의하지만, 현실 사회는 훨씬 더 복잡한 제도와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도덕적 의무만으로 제도의 정당성을 설명하긴 어렵죠. 저는 정의를 공정으로서의 정의라고 부릅니다. 사회의 기본 제도에 있어 정의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계급, 어떤 재능, 어떤 성별로 태어날지 전혀 모르는 가상의 상태, 이른바 무지의 베일을 쓴 채 합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을 찾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 자유가 고르게 보장되고(제1원칙),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불가피하다면 최소수혜자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가야 하며(차등의 원칙), 공정한 기회 균등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점(제2원칙)이 바로 그런 원칙입니다. 이런 조건에서만 사회는 진정으로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nbsp;  마이클 샌델: 롤스 교수님 말씀에서 바로 현대 자유주의의 한계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정의 문제를 중립적인 절차와 권리에만 머무르게 하려 하지만, 정의는 결코 좋은 삶에 대한 도덕적이고 목적론적인 질문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 최고의 플루트가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연주를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플루트의 목적, 즉 아름다운 음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란 단순히 자유나 분배의 기계적인 규칙을 정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과 미덕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그에 걸맞은 명예와 보상을 어떻게 나눌지 숙의하는 과정입니다.  &nbsp;  하든: 철학자들의 심오한 논의가 아름답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자연과학자의 눈에는 정작 방 한구석에 커다란 코끼리를 숨겨두고 말장난만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정의의 출발점은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과 조건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데이터를 통해 보여주듯, 인간의 삶은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자 복권에 의해 이미 크게 불평등하게 출발합니다. 인지 능력, 실행력, 충동 조절, 학업 지속성과 같은 특성들은 대부분 유전적 변이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정의란 이런 가혹한 생물학적 우연성을 외면하지 않고, 불리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제도적 사다리를 마련해주는 '사회적 형평성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선을 넘어, 구조적 불평등을 교정하는 과학적 정의의 시작점입니다.  &nbsp;  윤정구: 여섯 분 석학의 말씀을 듣고 보니, 오늘날 정의가 왜 수많은 논쟁 끝에 여전히 미로 속을 헤매는지 조금 더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공리주의가 말하는 효용, 칸트의 의무, 롤스의 절차, 샌델의 공동체적 미덕 모두 귀중한 통찰을 담고 있지만, 표면에 드러난 공정성과 그 이면의 깊은 공의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논의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nbsp;  제가 생각하는 정의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정의란 수면 위에 드러난 10%의 공정성이라는 제도적 규칙과, 수면 아래에 숨어 있는 90%의 공의라는 깊은 근거와 방향성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도 같습니다. 공의는 우리가 왜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 사회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지를 묻는 뿌리와도 같습니다. 만약 이 뿌리가 메말라 썩어간다면, 가지 끝에 달린 사과를 아무리 공평하게 나눈다 해도 그 나무가 건강해질 수는 없습니다. 규칙에 따라 썩은 과일을 잘라냈다고 해서 새싹이 돋는 것도 아니지요. 정의의 방향을 잡아주는 커다란 끌개인 공의가 없다면, 공정성은 가진 자들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냉혹한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nbsp;  [제2막: 유전자 복권(Genetic Lottery)과 타고난 운의 문제]  &nbsp;  사회자(유영만): 여섯 분이 가진 정의에 대한 생각이 확실히 드러난 것 같습니다. 특히 윤 교수님께서 핵심 쟁점에 불을 붙여주셨는데요. 과일나무에 빗댄 말씀처럼, 우리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각자 다른 토양과 씨앗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제 가장 뜨거운 논점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바로 유전자 복권과 능력주의의 문제입니다. 뛰어난 지능, 매력적인 외모, 부유한 부모님, 건강한 신체는 모두 개인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연과 우연이 정한 결과입니다. 흔히 우리 사회는 공정한 시험을 봐서 능력대로 보상을 받는 게 정의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지능이나 부모의 경제력, 환경적 지원까지 더해진 유전자 복권의 당첨자들이 자신의 성공을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 덕분으로만 여기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nbsp;  롤스: 제가 《정의론》에서 강조했던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기회의 균등만을 주장한 사람으로 오해하시지만, 저는 자연이 무작위로 나눠준 천부적 재능과 유전적 자산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우연(임의적)하다고 했습니다. 머리가 좋게 태어났거나, 부유하고 화목한 집에서 집중력을 기를 수 있었던 건, 본인이 특별히 도덕적으로 자격을 갖춰서 받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일 뿐, 우주 복권에 당첨된 셈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재능을 발휘해서 거둔 성과를 100% 다 내 것처럼 가져갈 도덕적 권리는 사실 없습니다. 자연의 분배 결과 자체가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부정의한 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사실이죠. 진짜 정의는 사회 제도가 이 우연성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타고난 재능을 공동의 자산으로 여기고, 그 재능으로 얻은 이익이 반드시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이들의 이익을 높이는 데 쓰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른바 차등의 원칙이죠.  &nbsp;  캐스린 페이지 하든: (손을 들며 롤스의 말을 막는다)  롤스 교수님, 저는 그 부분이 교수님 이론이 지난 수십 년간 현실에서 힘을 쓰지 못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유전적 차이를 그냥 ‘블랙박스’ 안에 넣어두고, 사후적으로 분배만 다시 하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최근 유전체학 연구를 보면 훨씬 더 명확하고 불편한 진실이 드러납니다. 다인자 점수라는 분석 결과, 교육 성취나 인지 능력뿐만 아니라 끈기, 자기통제력 같은 성격 특성까지도 수많은 DNA 변이와 얽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nbsp;  더 놀라운 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유전 점수가 낮은 아이가, 가난한 집의 유전 점수가 높은 아이보다 대학 졸업률이 더 높다는 결과입니다. 유전자 복권과 환경 복권이 서로 얽혀서 불평등이 세대를 건너 그대로 이어진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절차가 공정했으니 시험 결과대로 뽑자라고 하는 건, 아주 냉혹한 사회적 폭력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적으로 어려운 조건을 가진 사람을 돕는 건 시혜나 동정의 자선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이름의 불평등을 사회적으로 바로잡으려는 도덕적 의무입니다. 이건 곧 정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nbsp;  존 스튜어트 밀: 하든 교수님의 실증 데이터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공리주의 관점에서도 유전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외면하면, 결국 사회 전체의 효용이 크게 떨어집니다. 범죄가 늘고, 갈등이 커지면서 사회적 비용이 폭증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여기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유전적 차이를 해결하려고 막대한 사회적 자원을 쏟아붓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오히려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행복이 감소한다면, 그 역시 다른 형태의 낭비일 수 있지 않을까요?  &nbsp;  이마누엘 칸트: 밀 선생, 또다시 손익 계산입니까? 인간의 가치를 유전자의 우열이나 사회적 비용으로만 따지는 생각 자체가 이미 모욕적입니다. 누가 어떤 유전적 복권을 받았든, 그 자체로 절대적인 내적 가치, 즉 존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전적으로 불리하게 태어난 이웃을 돕는 건 사회 전체에 이익이 돼서가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나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도덕적 주체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양심의 명령에 따라 돕는 것이지, 계산기 두드려가며 계산한 뒤에 돕는 것이 아닙니다.  &nbsp;  마이클 샌델: 저도 칸트 선생님의 엄중한 지적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롤스와 하든, 두 분께 한 가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롤스는 유전자 복권을 공동 자산으로, 하든 교수는 교정해야 할 결함처럼 설명하지요. 하지만 정작 본질적인 질문이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가 타고난 재능이 순전히 내 노력이 아니라 우연히 받은 선물임을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nbsp;  제가 뛰어난 농구 실력이나 수학적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고 해도, 그것이 내 덕은 아닙니다. 더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왜 하필이면 이런 능력에 천문학적인 보상을 주는지도 결국은 우연이고, 행운일 뿐입니다. 만약 제가 농구공을 잘 다룰 줄 아는 유전자가 있는데, 제가 태어난 시대가 농구를 인기 있는 스포츠로 대접하는 미디어 자본주의가 아니었다면, 그 재능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겠죠. 반대로, 사냥이나 기사가 중요한 시대였다면 오히려 무능력자로 여겨졌을 겁니다. 결국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자와 능력을 온전히 자신의 공로라고 믿는 오만을 내려놓지 않으면, 유전자 복권 논쟁은 밥그릇 챙기기 다툼에서 끝나고 맙니다.  &nbsp;  윤정구: 여러 분의 치열한 논쟁을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전자 복권을 두고 왜 늘 ‘분배의 기술’이나 ‘도덕적 겸손’에 머무를까요? 그건 아마 문제를 항상 ‘공정함’이라는 한 가지 기준에서만 재단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nbsp;  공정함의 관점에서는 유전자 복권이 곧 불공평한 출발선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가산점을 주거나, 세금으로 재분배하는 대책만 거론되곤 하죠. 하지만 공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유전자 복권으로 받은 탁월한 재능은 단순히 개인에게 주어진 행운이 아니라, 공동체의 발전과 진화를 위해 맡겨진 신탁 자본입니다.  &nbsp;  자연에서 나무를 보면, 한쪽 가지에는 꽃이 피고, 다른 쪽에는 단단한 줄기가 만들어집니다. 만약 꽃이 줄기를 향해 “나는 아름다운 유전자를 가졌으니 꿀은 내가 독차지하겠다”고 하거나, 줄기가 꽃을 향해 “너의 화려함을 억지로 깎아 평등하게 만들겠다”고 싸운다면, 결국 나무 전체가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공의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재능의 목적은 약자를 향한 시혜가 아닙니다. 그 능력을 사회에 헌신하고, 모두가 더 높은 생명력과 진실을 경험할 수 있도록 소명을 완수하는 데 있는 것이죠. 공의 없이 유전자 복권 문제를 논하면, 결국 강자는 시혜적 우월감에 빠지고, 약자는 패배자의 굴욕감을 느끼는 적대적 복권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nbsp;  우리가 정말로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공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원과 재능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 “우리 사회라는 배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처럼 큰 흐름과 목적에 대해 묻지 않는 공정성은, 결국 기득권이 자신들의 지위를 당연하게 물려받도록 도와주는 잔인한 방패에 불과합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가 이미 썩어버렸는데, 가지 끝에서 잣대를 들고 열매 크기만 재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죠.  &nbsp;  제3막: 능력주의(Meritocracy)의 허상과 기회 선점의 비극   &nbsp;  사회자(유영만): 윤 교수님이 말씀하신 ‘신탁 자본’이라는 비유가 정말 뼈아프게 와닿습니다. 이제 우리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능력주의’, 오늘은 그 속을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입니다. 요즘 사회는 이렇게 말하죠. “부모의 배경이나 신분 같은 건 따지지 않는다. 오직 시험 성적, 실력, 그리고 노력만으로 기회를 선점하고 보상을 독식하라. 이게 바로 완전히 공정한 규칙 아니냐!” 샌델 교수님, 선생님께서는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이 능력주의의 본질을 날카롭게 비판하셨지요?  &nbsp;  마이클 샌델: 네, 맞습니다. 저는 능력주의가 지금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독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성공한 사람은 마땅히 그 대가를 누려야 한다”는 능력주의의 구호만 들으면, 겉으론 참 공정해 보이죠.  &nbsp;  하지만 실제로 능력주의는 일종의 사회적 사기극입니다. 현실에서는 부유한 부모들이 막대한 사교육과 인맥을 동원해 자녀에게 합법적으로 능력과 스펙을 물려줍니다. 더 문제는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점입니다. 예전처럼 신분제 사회였을 때는 가난한 농노도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며 자신을 위로할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저히 공정해 보이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탈락한 이들이 “내가 노력하지 않았고,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이구나”라며 스스로를 원망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공한 사람들은 “내가 정말 열심히 해서 이 자리에 올라왔다”며 점점 더 엘리트 의식에 빠지고요. 공정하다는 이름의 시험이 오히려 불평등을 감추는 도구, 또는 도덕적 면죄부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nbsp;  존 롤스: 샌델 교수님의 의견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강조해왔는데요, 사실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나 특성, 더 나아가 노력할 수 있는 의지조차도 대부분은 풍요롭고 안정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얻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회의 평등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형식적인 평등에 머물러선 안 되고, 실질적인 공정한 기회균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계급적 배경과 무관하게, 같은 재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도전할 수 있어야 공정하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걸러진 능력이라 해도, 그 결과로 얻은 이익은 사회의 최소수혜자들에게 이득이 돌아가도록 해야만 정의라 할 수 있습니다.  &nbsp;  존 스튜어트 밀: 그런데 두 분께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능력주의를 이토록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사회적 자리와 기회를 나눠야 할까요? 다시 가문이나 신분, 정치적 연줄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객관적으로 능력을 평가해서, 가장 능력 있는 이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것만큼 사회 전체의 효율성과 행복을 높이는 방법이 또 있을까요? 진짜 문제는 능력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능력을 키울 기회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만약 교육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려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동등한 성장의 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서로 경쟁할 수 있게 된다면, 저는 여전히 능력주의가 최대 다수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nbsp;  이마누엘 칸트: 밀 선생은 아직도 공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인간의 존엄을 시장 가격으로 바꿔버렸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스펙이나 시험 점수, 경제적 생산성과 전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목적이자, 절대적인 내재적 존엄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사람을 기능적 도구로 줄 세우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 인간을 쓸모없는 잉여 취급합니다. 이는 도덕 법칙에 대한 근본적인 모욕입니다. 양심의 법정에서 인간은 시험 점수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오직 선의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 했는가가 유일한 기준입니다.  &nbsp;  캐스린 페이지 하든: 실제 입시와 채용 데이터를 살펴보면, 밀 교수가 그리는 공정한 능력주의는 현실에서 그냥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납니다. 미국의 SAT나 한국의 수능 성적은 학생 개개인의 순수한 학업 잠재력보다도 부모의 소득, 살고 있는 지역의 우편번호와 거의 완벽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유전자와 부모의 배경이 이미 80% 이상의 삶을 미리 끌고 가는데, 마지막 100미터 트랙에서 공정하게 경주했다고 그 결과를 실력에 따라 정당하게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공정이 아니라 그저 속임수입니다. 현대의 능력주의는 유전과 환경이 만든 귀족제를 세련되게 감춘 채, 새로운 카스트 제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nbsp;  윤정구: 이 논쟁은 공정성이라는 수면 위의 잣대와 공의라는 깊은 심연의 나침반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nbsp;  오늘날 능력주의 열풍 속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공정이란, 한마디로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시시비비만 따지는 모습입니다. 시험의 출제 오류나, 단 1분이라도 시간 낭비는 없었는지, 부모 찬스가 동원된 건 아닌지, 이런 것만 현미경 들여다보듯 쪼개가며 다루는 룰의 정치입니다. 하지만 윤정구의 공의론 시각에서 보자면, 능력주의는 결국 빙산의 윗부분에서 벌어지는 절차적 게임에 불과합니다.  &nbsp;  능력주의가 왜 이렇게 잔인한 복권 사회의 괴물이 되었을까요? 능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공의의 목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내가 시험을 통과했으니, 이 자리를 움켜쥐고 내 이익을 챙기는 건 당연한 권리다”라는 탐욕의 카르텔이 되었죠. 썩어가는 나무를 보십시오. 아무리 공정한 저울로 썩은 열매의 무게를 재 나눠준 들, 그 숲에 진짜 생명과 평화가 깃들 수 있겠습니까? 능력은 타인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무기가 아니라, 공동체의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다른 이들도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돕는 책무여야 합니다. 공의의 뿌리가 잘려 나간 능력주의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또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nbsp;  제4막: 길 잃은 정의를 회복하는 열쇠, 공의와 공정성의 선순환  &nbsp;  사회자(유영만): 이제 토론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벤담과 밀의 효용, 칸트가 말하는 의무와 인간 존엄성, 롤스의 무지의 베일과 차등의 원칙, 샌델이 강조한 공동체의 미덕과 텔로스, 하든 교수가 비판한 능력에 따른 정당한 획득론, 그리고 윤정구 교수의 ‘공의라는 뿌리와 나침반’까지—각자의 목소리가 뜨겁게 오갔지요.  &nbsp;  이제는 결론을 내릴 때입니다. 제도를 아무리 바꿔도 청년들의 절망은 가시지 않고, 부는 대물림되며, 혐오와 분열이 극에 달한 이 ‘복권 사회’의 난파선에서, 우리는 어떻게 길 잃은 정의를 다시 세울 수 있을까요? 정말로 정의로운 사회가 현실에 뿌리내리기 위한 구체적 해법, 대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nbsp;  이마누엘 칸트: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눈 아래 땅의 진흙탕이 아니라, 저 머나먼 밤하늘의 북극성을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경탄과 경외감을 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로 반짝이는 별이 가득한 하늘이고, 또 하나는 내 마음속에 울리는 도덕법칙”이라는 문구가 제 묘비명에 새겨져 있지요.  &nbsp;  정의를 되찾는 열쇠는 제도 개혁이나 외적 변화 이전에, 먼저 우리 내면의 양심의 법정을 다시 세우는 데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손익을 따지고 계산하는 영악한 지성을 잠시 멈추십시오. 타인을 결코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정언명령을 우리 사회의 입법 원리로 삼고, 시민 하나하나가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의 원칙이 보편적 법칙에 맞는지 자문하며 살아간다면—그때 비로소 사회는 도덕적 공동체로 다시 숨을 쉬게 될 것입니다.  &nbsp;  존 롤스: 칸트 선생의 고결함에 경의를 표하지만, 도덕법칙 하나만으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뚫을 수는 없습니다. 정의를 다시 세우려면 결국 모든 것은 제도의 재설계로 귀결됩니다.  &nbsp;  우리는 다시 원점, 원초적 입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일 내가 불의의 사고로 한순간에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 그 두려움과 상상력을 사회적 합의의 토대로 삼아야 합니다. 복지 제도는 자선이 아니라 기본권이라는 인식을 확립하고, 자산과 교육의 대물림을 막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상속세와 공교육 혁신이 필수입니다. 무엇보다 최소 수혜자의 현실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리는 차등의 원칙을 헌법적 가치로 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정의가 제도의 옷을 입게 됩니다.  &nbsp;  존 스튜어트 밀: 제도와 양심 모두 필요하겠지만, 결국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더 나은 삶의 질과 효용 아닐까요? 저는 질적 공리주의 입장에서 공동체적 연대, 협동조합, 만인을 위한 고등교육의 확대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천박한 부의 축적을 최고의 쾌락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결코 정의가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온 사회가 지적, 도덕적, 예술적 가치를 누릴 높은 단계의 쾌락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문화를 위한 저변을 다져야 합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일이 내게도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공감의 시스템을 만들 때, 정의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에너지로 사회를 움직일 것입니다.  &nbsp;  마이클 샌델: 밀의 공감이나 롤스의 제도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실제로 힘을 가지려면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정치와 시민사회의 도덕적 부활이 절실하다는 점입니다.  &nbsp;  롤스조차 분배라는 경제적 기준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습니다. 단지 돈을 조금 더 준다고, 이미 무너진 자존감이 회복될까요? 노동자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소득 격차만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박탈감 때문입니다.  &nbsp;  이제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사회적 인정을 재분배하는 공동선의 정치학입니다. 헤지펀드 매니저가 청소 노동자나 배달 노동자에 비해 수천 배의 임금을 받는 것이 정말로 공동선에 비례하는 기여일까요?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공론장에서 함께 물어보고 토론할 때입니다. 시장의 가격표만 맹신하지 말고, 우리 공동체에 진짜로 보탬이 되는 노동의 도덕적 가치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누구나 드나드는 공공장소, 북적이는 도서관, 숨 쉴 수 있는 공원, 느리게 움직이는 대중교통—이런 시민의 생활 인프라를 아름답게 가꿔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부자든 가난하든 세상 한가운데에서 함께 살아 숨 쉬는, 공감과 연대의 민주적 공간이 비로소 복원될 것입니다.  &nbsp;  스린 페이지 하든: 샌델 교수의 공동선 담론에 유전학적인 정밀함을 보태고 싶습니다. 저는 반우생학적 유전체 맞춤형 복지라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아이에게 안경을 씌워주는 일을 두고 누군가 특혜라고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안경은 시력의 문제를 보완해 모든 아이가 칠판을 똑같이 볼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nbsp;  이와 마찬가지로, 난독증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충동 조절이 힘든 아이처럼 유전적인 취약성을 안고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그 특성을 정확히 반영한 맞춤형 조기 공교육이나 심리·의료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해야 합니다. 유전적 차이를 외면하며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학 데이터를 솔직하게 마주하고 생물학적 불리함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강력한 공적 보정 장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과학과 정의가 만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nbsp;  사회자(유영만): 여섯 분의 제안이 마치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하나하나 맞물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윤정구 교수님께서 이 거대한 지적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실 차례입니다. 《복권 사회의 정의》에서 말씀하셨던 ‘선순환의 해법’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nbsp;  윤정구: 여섯 분 석학의 깊은 고민이 담긴 제안에 진심으로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칸트의 양심, 롤스가 말한 공정한 제도, 밀의 높은 수준의 효용, 샌델의 공동체적 미덕과 논의, 이 모두는 정의라는 거대한 교향곡을 이끄는 소중한 악기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대안들이 실제 세상에서 헛돌지 않으려면 ‘공의’와 ‘공정성’의 관계와 순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책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했듯, 공의가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끌개가 되고, 공정성은 뒤에서 힘을 보태는 밀개의 역할을 하며 선순환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nbsp;  우리의 비극은 무엇일까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방향을 잡아주는 ‘공의’라는 나침반은 잃어버린 채,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노를 젓는 ‘공정성’이라는 규칙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썩어버린 과일이 달린 나무 아래에서, 과일을 얼마나 평등하게 자를 것인지만 두고 머리를 맞대고 논쟁하는 셈입니다.  &nbsp;  흔들림 없이 북극성을 가리키는 공의의 나침반이 있을 때 비로소 공정성이라는 노가 힘 있게 물살을 헤칠 수 있습니다. 뿌리가 맑고 깊은 흙을 만났을 때야 비로소 가지 끝에 향기롭고 건강한 정의의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말이죠.  &nbsp;  지금의 한국 사회와 세계는 ‘공의’라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채, 각자가 미시적인 공정성이라는 쳇바퀴에 갇혀 서로를 옥죄고 있습니다. 썩은 과일만 골라내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토양과 뿌리를 바꾸어야 제대로 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nbsp;  첫째, 공의의 우선성 회복이 필요합니다. 제도적 공정성은 결국 공의라는 존재 이유를 뒷받침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공동체가 왜 존재하는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목표와 가치가 무엇보다 앞서야 합니다. 이러한 합의와 비전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nbsp;  둘째, 초연결적 나눔의 플랫폼 구축입니다. 유전자든, 부모의 배경이든, 먼저 얻은 탁월함은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면역력을 높이는 데 쓰여야 하는 공공의 자산입니다. 기업과 개인 모두 자신의 성공 일부를 사회 곳곳으로 나눌 수 있는 ‘상생의 순환 구조’를 제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nbsp;  셋째, 속도의 토끼에서 방향의 급진거북이로의 전환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남을 밟고 달리는 경쟁 대신, 각자 자신의 길과 존재 이유를 찾아 조금 더디더라도 꿋꿋하게 걸어가는 거북이들이 모여 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급진 거북이는 “공의로운 미래가 올 것이라는 믿음에서는 누구보다 급진적이지만, 그 미래에 다가가는 과정에서는 거북이처럼 끈기 있게 자기만의 안티프래질리티(Aitifragility), 즉 쉽게 꺾이지 않는 내적 근력을 키워가는 전략”(203)을 뜻합니다.  &nbsp;  공의가 앞에서 든든하게 방향을 이끌고, 공정성이 뒤에서 빈틈없이 받쳐줄 때, 정의라는 나무는 병든 뿌리를 털어내고 마침내 생명력 넘치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nbsp;  [에필로그] 지식생태학자의 사유: 공의의 뿌리에서 자라나는 생명의 숲  &nbsp;  깊어가는 가을밤, 창밖을 바라보니 인사동 골목길에는 어느새 어스름이 내려앉고, 한옥 처마 끝으로 조용히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섯 분의 뜨겁고 깊은 성찰이 제 가슴 속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오늘, 세계 철학의 거인들과 함께 ‘정의’라는 험준한 산맥을 넘나들었습니다.  &nbsp;  지식생태학자의 눈으로 보면, 자연의 숲에는 쓸모없는 나무도, 실패한 잡초도 따로 없습니다. 바위틈 사이에 웅크린 이끼는 자기 자리에서 바위를 살살 파내어 흙을 만들고, 우람한 참나무는 자신이 드리운 그늘 속에 작은 생명을 한아름 품어냅니다. 숲에서의 정의란 모든 나무에게 똑같이 자라라고 요구하는 기계적인 공정에 있지 않습니다. 숲의 정의란 저마다 다른 생명들이 각자의 고유한 존재 이유, 즉 ‘코나투스’를 맘껏 드러내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생태적 공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nbsp;  오늘 우리는 눈으로 보았습니다. 공의라는 뿌리가 메마른 사회에서 공정성이라는 열매는 차가운 능력주의의 흉기가 되어 약자의 가슴을 서슴없이 찔렀습니다. 제도의 표면만을 매끄럽게 다듬는 공정성의 환상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정의는 저울눈금 하나하나를 엄밀하게 읽어내는 냉철한 산술이 아닙니다. 정의란 길을 잃은 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주저앉은 이의 손을 다시 잡아 일으켜 세우며, ‘우리는 왜 이곳에서 서로 숨 쉬고 있나’라고 가슴으로 묻게 하는, 뜨겁고 생생한 생명의 윤리학입니다.  &nbsp;  썩은 과일을 잘라내려고 칼을 휘두르기 전에, 우린 먼저 무릎을 꿇고 메마른 뿌리에 생명수를 붓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공의가 나침반이 되어 앞장서고, 공정성이 그 뒤에서 조용히 밀어줄 때 비로소 정의는 메마른 사막을 지나 푸른 생명의 숲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nbsp;  우리는 그동안 ‘공정’이라는 차가운 얼음 조각만을 들여다보며, 시험지의 동그라미 개수로 사람의 존엄을 가늠하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와 배경의 복권에 눈감은 채, 약자에게 “노력이 부족했다”며 냉혹한 목소리로 나무랐습니다. 그렇게 잔혹한 능력주의를 그럴싸하게 ‘공정’이라 포장해왔죠. 하지만 그것은 썩은 과일 위에 살충제만 뿌려대는, 한없이 비겁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nbsp;  오늘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열매를 바꾸고 싶다면, 보이지 않는 땅속 뿌리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요. 겉으로 드러나는 열매는 결국 공정성의 산물이고, 흙 속에서 모든 것을 지탱하는 뿌리는 제가 이 책에서 거듭 말해온 ‘공의’—거대한 빙산의 밑동에 해당하죠.  &nbsp;  칸트의 양심, 순수 실천이성, 롤스가 말한 무지의 장막 너머의 정의와 약자를 향한 배려, 샌델의 공동선과 탁월함에 관한 이야기, 하든 교수가 과학으로 증명한 유전적 불평등 앞의 도덕적 책무, 밀의 보편적 복리, 사회적 안전망까지,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아울러 “공의가 끌개, 공정성이 밀개가 되어야 한다”고 웅변한 윤정구 교수의 사자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의 소중한 진실 앞에 다다랐습니다.  &nbsp;  정의는 멈춘 명사가 아닙니다. 정의란 끊임없이 타인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썩어버린 흙을 갈아엎는 역동적인 ‘동사’입니다. 내가 누리는 건강, 지능, 성공이 결코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님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 바로 거기에서 정의의 첫 싹이 터져 나옵니다.  &nbsp;  오늘의 토론을 지식생태학자의 시선으로 한 문장에 담자면, 정의란 ‘공의’라는 맑은 뿌리에서 굵고 단단한 ‘공정성’의 줄기와 잎을 뻗어 올려 피워내는, 생명의 꽃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줄기와 잎, 즉 제도와 룰이란 닿을 듯 말 듯한 부분에만 매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뿌리가 썩어가고 메마른데 잎만 닦는다고 숲이 되살아나지는 않죠. 신이 던진 유전자 복권의 불평등 앞에서 좌절하거나 오만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에너지를 공동체라는 토양에 듬뿍 뿌려주는 ‘거름’으로 바꿔내는 용기, 이것이야말로 공의의 참된 정신일 것입니다.  &nbsp;  공의가 영혼의 나침반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고(끌개), 공정성이 제도와 법의 바퀴가 되어 든든하게 뒤에서 밀어줄 때(밀개), 우리 사회는 각자도생이라는 차가운 ‘복권 사회’의 늪을 벗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비옥한 토양이 되어주는 ‘울창한 공의 생태계, 정의의 숲’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오늘 뜨거운 지혜의 불꽃을 피워주신 마이클 샌델, 벤담과 밀, 롤스와 하든 교수 그리고 칸트와 윤정구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길을 잃은 시대, 정의라는 나침반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늘 밤이 여러분 모두에게 의미 있게 남기를 소망합니다. 오랜 시간 사유의 심연을 열어주신 다섯 분 석학과, 귀 기울여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97/99/cover150/k2521302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979977</link></image></item><item><author>kecologist</author><category>Kecologist</category><title>‘죽음이 죽어버린 시대’, 죽기 전에 죽음의 의미를 재음미하다 - [죽음 낯설게 보기 - 우리는 어떻게 죽고,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93762103/17506661</link><pubDate>Thu, 10 Sep 2026 09: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93762103/175066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0740&TPaperId=175066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37/57/coveroff/k38213074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0740&TPaperId=175066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죽음 낯설게 보기 - 우리는 어떻게 죽고,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a><br/>박혜윤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6년 08월<br/></td></tr></table><br/>죽음 낯설게 보기:‘죽음이 죽어버린 시대’, 죽기 전에 죽음의 의미를 재음미하다  &nbsp;  《죽음 낯설게 보기》를 읽고 나서   &nbsp;  “죽음을 바라보는 일은 곧, 오늘의 삶을 바라보고 질문하는 것”(6쪽)이고, “죽음 낯설게 보기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모험”(9쪽)이지만 현실은 “죽음이라는 숫자 속에는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서사는 사라지고 오로지 숫자 1로만 기억”(40쪽)되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이런 절망 앞에서 죽음이 맞이하는 저마다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습니다. 스탈린이 말한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 명의 죽음은 통계”라는 말의 뒤안길을 파묻고 싶었고, 죽음이라는 “고정관념은 나의 전두엽에 박제된 도덕률”(116쪽)임을 벗겨내고 싶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 나의 지극한 유한한 본질을 목격하며 느끼는 근원적인 고통”(118쪽)을 곁에서 느끼는 고통의 한계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극한적 한계로 내 몰아 “ 결말이 명확하게 정해져있음에도, 그 종착지에 닿기까지 환자와 주변인들의 삶이 어떻게 불탄 재처럼 바스러지는지 몸서리치게 겪어”(118쪽)보고 싶었습니다.   &nbsp;  하지만 여전히 한계는 불보듯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는 실험·계량·관찰을 통해 검증된 결론을 진리로 보지만, 이 잣대를 적용하면 돌봄은 데이터와 수치로 축소되고,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온기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밀려”(235쪽)나는 현실 앞에 죽음을 목숨걸고 돌보려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에 작은 돌봄을 얹어보고 싶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삶과 유리된 추상의 언어가 아니라, 나의 삶을 지탱하고 추동하는 구체적인 지렛대”(64쪽)임을 확인하고 함께 공감하는 공명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죽음을 낯설게 바라보는 세기적 철학자들을 한국에 초대했습니다.   &nbsp;  늦가을의 정취가 내려앉은 삼청동 호젓한 북카페. 통창 너머로 붉게 물든 플라타너스 낙엽이 흩날립니다. 묵직한 원목 테이블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에스프레소 잔들이 놓여 있고, 아서 프랭크, 자크 데리다, 장 폴 사르트르, 마르틴 하이데거, 질 들뢰즈,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모리스 메를로-퐁티, 스피노자, 푸코, 그리고 미야노 마키코와 이소노 마호가 마주 앉아 있습니다.  &nbsp;  사회석에 앉은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특유의 직관적이고 생동감 있는 어조로 좌중을 둘러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침대”라고 말하는 마크 트웨인의 명언이 떠오르는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가을의 ‘머리’를 살갑게 붙잡고 죽음의 그림자 곁에서 죽기 전에 죽음을 진지하게 고뇌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nbsp;    &nbsp;  유영만: 바깥의 낙엽이 나무와의 관계를 정리하며 바닥으로 하강하고 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은 끝이 아니라 다음 계절의 거름이 되는 또 다른 접속의 시작이지요. 엽락(葉落)이 분본(糞本)이 된다는 신영복 교수님의 나무에게 배우는 소중한 교훈도 떠오릅니다. 엽락분본(葉落糞本)은 낙엽이 떨어져 썩어 뿌리의 거름이 되듯, 겉멋과 허식을 버리고 삶의 근본을 충실히 다지는 희망의 과정을 바라보는 시선의 따듯함입니다.  &nbsp;  오늘 우리는 ‘책상머리의 죽음학’이 아니라, 생생한 육체의 숨결과 존재의 가장 뜨거운 가장자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연명’, ‘임종’, ‘고독사’, ‘안락사’와 ‘조력사’, 그리고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날카로운 물음표를 던지고 죽음 관련 담론 속에서도 색다른 깨우침의 느낌표를 건져 올려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육신의 쇠함을 병리학적 관점에서만 보는 시선 앞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담긴 사회문화적 함의와 개인의 특수한 상황은 실제 현장에서 고려되기 어렵(77쪽)”기 때문입니다.  &nbsp;  첫 번째 화두는 기계 장치와 생체 반응 사이에 얽힌 ‘연명(Life-Sustaining Treatment)’입니다. 호흡기와 튜브로 연장되는 이 생명의 시간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스피노자 선생님, 존재를 지속하려는 ‘코나투스(Conatus)’의 관점에서 기계에 의존한 생명 연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nbsp;  스피노자: 제가 《에티카》에서 말한 코나투스는 단순히 물리적인 심장 박동을 1분 더 지속시키는 기계적 연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본질적 역량을 보존하고, 신체와 정신의 활동 능력을 확장하려는 내재적 힘입니다. 인위적인 호흡기와 투약으로 인해 타인의 처분에 전적으로 종속되고, 자신의 능동적 힘(변용 능력)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는 코나투스의 실현이라기보다 외부 원인에 의해 압도당한 무력한 상태에 불과합니다. 삶의 양보다 중요한 것은 신체가 세계와 교감하며 능동적으로 변용할 수 있는 잠재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한 자기 존재를 지속하려는 본능적 욕망의 발현이 어제와 다름을 반복하는 원동력입니다.  &nbsp;  아서 프랭크: 저는 스피노자 선생님과 조금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연명 치료의 현장에서 환자의 몸은 의료 체계의 식민지가 되기 쉽습니다. 병원은 연명을 통해 신체적 기능의 유지를 승리(Remission) 서사로 포장하려 하지만, 침상에 누운 이에게 고통은 단지 수치나 그래프가 아닙니다. 몸이 기계에 포섭되는 순간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증언의 서사는 질식당하고 맙니다. 연명이란 기계가 유지하는 생체 신호가 아니라, 그 몸이 끝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회복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nbsp;  모리스 메를로-퐁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한 몸은 외부에서 조작하는 대상(Object)이 아니라 세계를 지각하는 영점(Zero point), 즉 ‘체화된 주체(Corps propre)’입니다. 연명 기계가 환자의 고유한 몸틀(Schéma corporel)을 대체해 버릴 때, 그 몸은 더 이상 세계를 향해 지각을 열지 못하고 기계적 부품으로 전락합니다. 침상 위의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온기와 미세한 전율, 타인과 세계를 향한 지각의 지평이 열려 있는가—그것이 연명의 진정한 분기점이어야 합니다. 비록 몸은 기계적 도움으로 연명을 유지하지만 내 몸의 어딘가 감각은 살이 고스란히 느끼는 죽음의 순간을 감지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nbsp;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저는 퐁티 박사님과 조금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임상 현장에서 제가 만난 수많은 환자들에게 연명 치료는 종종 가족과 의료진의 부정(Denial)에서 비롯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공포가 환자의 육체에 호흡관을 꽂아 넣는 것이지요. 환자가 분노와 타협, 우울을 거쳐 마침내 평온한 수용(Acceptance)의 단계로 나아가려 할 때, 기계의 소음이 환자의 영혼이 겪어야 할 가장 거룩한 내적 화해를 방해하고 맙니다.  &nbsp;  푸코: (안경을 벗어 만지작거리며 잠시 침묵한다) 연명… ‘삶을 연장한다’는 말 자체가 현대 생명정치(biopolitique)의 가장 전형적인 문법을 드러냅니다. 근대 권력은 더 이상 군주처럼 ‘죽게 만들고 살려 두는’ 것이 아니라, 인구를 ‘살게 만들고 죽도록 내버려 두는’ 권력입니다.병원 침대에 묶여 기계 장치가 산소를 불어넣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그 연장의 시간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은 주체가 스스로의 실존을 가꾸는 시간이 아니라, 의학적 규율과 제도적 지식이 신체를 완전히 점유하는 시간입니다. 고대의 스토아학파에게 삶은 물리적 지속의 길이가 아니라, 한 편의 비극처럼 완성된 완결성이었습니다. 생체 신호가 유지된다는 이유만으로 신체를 국가와 병원의 관리망 안에 인질로 잡아두는 연명은, 자기 배려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생물학적 감금’에 가깝다는 고뇌를 지울 수 없습니다.  &nbsp;    &nbsp;  유영만: 기계적 연결이 영혼의 접속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뼈아픕니다. 하지만 연명은 “화려한 의료기술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삶을 날 것 그대로 직시하도록 요구하는 반사판”(78쪽)이라는 깨달음은 연명의 무의미함의 의미성을 다시금 성찰하게 만드는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적 무의미함이 개인의 의미로 자리 잡기까지는 무의미가 의미로 전환되는 회색지대를 견디는 내공이 필요”(79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숨이 멎어가는 바로 그 찰나, '임종(Deathbed)'의 순간으로 넘어가 보지요. 임종은 생의 단절일까요, 아니면 존재가 완성을 향해 던져지는 사건일까요?  &nbsp;  마르틴 하이데거: 사람들은 흔히 임종을 단순히 물리적 시계가 멈추는 생물학적 종말(Verenden)로 봅니다. 하지만 제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간(Dasein, 현존재)에게 죽음은 생의 끄트머리에 붙은 부록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Sein-zum-Tode)입니다. 임종은 존재가 세상의 잡담과 비본래적인 세인(Das Man)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과 직면하는 가장 실존적인 결단의 순간입니다. 타인이 대신 죽어줄 수는 없습니다. 임종은 오롯이 나의 존재 전체를 회수하는 계기입니다. 비록 그 가능성이 최후의 죽음으로 흐르는 어쩔 수 없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해도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름입니다.  &nbsp;  장 폴 사르트르: 하이데거 선생, 나는 당신의 그 장엄한 존재론에 결코 동의할 수 없소. 죽음은 내 존재의 완성이 아니라, 나를 철저한 ‘타자의 시선’ 속에 던져버리는 파렴치한 한계일 뿐이오. 내가 《존재와 무》에서 말했던 것처럼 살아있는 한 나는 대자존재(Being-for-itself)로서 끊임없이 미래를 기투(企投)하고 자유를 실천합니다. 그러나 임종의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딱딱한 즉자존재(Being-in-itself)로 굳어버립니다. 즉자존재는 의식 없이 그 자체로 꽉 차 있는 사물의 존재 방식이며, 대자존재는 의식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임종은 내 모든 주체적 가능성이 무화(Néantisation)되고, 타인들이 나를 하나의 박제된 사실성으로 판정해 버리는 난폭한 사건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nbsp;  아서 프랭크: 고독사는 한 인간의 육체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서사적 유폐(Narrative Abandonment)이자 침묵의 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책 《아픈 몸을 살다》에서 줄곧 강조했듯, 고통받는 몸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그 고통의 증인이 되어줄 타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몸이 무너져 내릴 때 인간은 “내가 지금 겪는 이 아픔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타인의 눈빛과 귀를 통해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병든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증언이자, 타인의 응답을 기다리는 부름입니다. 그러나 고독사 현장의 몸은 철저히 침묵 속에 방치됩니다. 그는 신음하고, 두려워하고, 도움을 청하려 하지만, 그 소리를 받아 안아줄 '경청하는 타자'가 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서사는 화자와 청자가 마주 앉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관계적 사건인데, 고독사는 서사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 버립니다.  &nbsp;  현대 사회는 고독사를 겪은 사람을 사후에 발견하여 특수 청소의 대상, 치워야 할 오염된 물질, 혹은 쓸쓸한 복지 통계의 숫자로 환원해 버립니다. 이는 죽어가는 자의 서사적 권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박탈하는 일입니다. 고독사는 단순히 혼자 숨을 거두었다는 물리적 고립을 넘어, 한 인간이 평생 몸으로 써 내려온 고유한 삶의 서사가 단 한 사람의 증인도 만나지 못한 채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 비극입니다.  &nbsp;  스피노자: 프랭크 교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저는 이를 코나투스(Conatus)의 전면적 질식과 신체 연대의 파탄이라는 관점에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에티카》에서 제가 논증했듯, 인간의 본질인 코나투스는 진공 상태에서 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립된 섬이 아니며, 외부의 다른 신체들과 마주치고(연합하고)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 역량과 활동 능력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바로 인간 자신’입니다. 좋은 타자와의 마주침은 기쁨(Lætitia)을 낳고 우리의 코나투스를 증대시키지만, 파괴적인 마주침이나 철저한 고립은 슬픔(Tristitia)을 낳고 존재 역량을 급격히 떨어뜨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고독사는 결코 개인의 선택이나 단순한 불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신체가 타인의 신체와 맺을 수 있는 모든 유익한 마주침의 통로가 차단되어, 외부의 파괴적인 정동과 질병에 대항할 역량의 연합(Co-operative Power)을 상실한 채 서서히 말라 죽어간 상태입니다.  &nbsp;  인간의 신체가 극심한 고립에 처하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내재적 힘인 코나투스는 무력한 수동성(Passivity)의 극치로 내몰립니다. 신체는 더 이상 외부와 긍정적인 변용을 주고받지 못하고, 오직 결핍과 공포, 고립감이라는 슬픈 정동의 파도에 온전히 압도당합니다. 따라서 고독사는 개인이 생명력을 잃은 사건이라기보다,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특정 신체를 외딴곳에 방치하여 마땅히 순환해야 할 연대와 공통 개념(Notiones Communes)의 연결망을 끊어버린 생태적 괴사에 가깝습니다.  &nbsp;  유영만 (사회자):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더욱 먹먹해집니다. 프랭크 교수님은 고독사를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 명의 청자도 만나지 못한 서사의 압살로 짚어주셨고, 스피노자 선생님은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생명력을 북돋아야 할 코나투스가 사회적 고립 속에서 완전히 질식당한 참사로 정의해 주셨습니다. 결국 고독사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고 연결을 포기한 우리 사회의 관계 생태계가 빚어낸 참혹한 거울인 셈입니다.  &nbsp;  미야노 마키코: 사르트르 선생님의 말씀처럼 임종은 폭력적일 만큼 불확실합니다. 제가 암 투병을 하며 이소노 마호 씨와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 뼈저리게 느낀 것은, 질병과 죽음은 논리적인 필연이 아니라 완전한 우연의 침입이라는 점이었습니다.  &nbsp;  이소노 마호: 맞습니다. 미야노 씨와의 대화를 기록한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에서 우리는 임종을 모든 것이 예견된 결말로 가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임종은 고립된 주체가 홀로 감당하는 비극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우연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타인과 마지막으로 말을 주고받는(Response-ability) 상호적인 만남이어야 합니다. 닥쳐올 우연을 함께 견디는 것, 그것이 임종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nbsp;  푸코: 고대인들은 죽음의 훈련(melete thanatou)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세네카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마치며 죽음을 시뮬레이션했습니다. 그들에게 임종은 어느 날 닥쳐오는 갑작스러운 재앙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훈련(askēsis)해 온 주체화 작업의 마지막 방점이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임종은 사유화되기는커녕 완벽하게 탈(脫)주체화되었습니다. 차가운 병실 스크린의 심박수 그래프가 멎는 순간 의사가 선언하는 기술적 절차가 되었죠. 진정한 임종이란 자신의 삶 전체를 돌이켜보며, 죽음이라는 최종 한계선 앞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완성하는 진실의 순간(parrhesia)이어야 합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규범적 위로에 기대지 않고, 자신이 직조해 온 삶의 윤리를 온전히 끌어안는 내적 평정의 순간 말입니다.  &nbsp;  유영만: 우연의 파도 속에서도 타인과의 대화를 놓지 않는 것이 임종의 본질이라는 말씀이 가슴을 울립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 대화조차 허락하지 않는 비극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바로 세 번째 주제, '고독사(Dying Alone)'입니다. 관계의 생태계가 파괴된 곳에서 홀로 식어가는 이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nbsp;  질 들뢰즈: 고독사는 관계망이 단절되어 생명의 변용 능력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입니다. 생명은 본래 고정된 단일체가 아니라 수많은 타자, 사물, 공기와 뒤섞여 새로운 배치를 짓는 '아장스망(Agencement, 배치)'이자 '다중체(Multiplicity)'입니다. 고독사는 한 개인이 사회적 장치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기존의 영토에서 벗어나 탈영토화(Détérritorialisation)된 뒤, 새로운 삶의 영토를 재배치하지 못한 채 고립된 홈패인 공간(Espace strié)에 갇혀 접속을 잃어버린 잠재력의 영도(Zero degree)입니다. 고독사야 말로 신체와 신체가 부딪히며 생명력을 증폭시키는 에피쿠로스적 마주침이 차단된 가장 비극적 배치(아장스망)입니다. 이 배치를 스스로 재배치할 수 있는 역량을 고독사에 직면한 한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이 과연 마땅한 조치이자 배려라고 할 수 있을까요?  &nbsp;  푸코: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쉰다) 이 지점에서 저는 가장 뼈아픈 분열을 느낍니다. 고대 철학에서 고독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영혼을 단련하는 숭고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고독사는 자기 선택에 의한 은둔이나 자율적 고독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생산성 논리에 쓸모없어진 주체들을 사회가 조용히 버려두는(laisser mourir) 생명정치적 유기입니다. 제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말한 자기 배려가 가능하려면 자신을 돌아볼 최소한의 물질적·관계적 거점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관계망에서 철저히 파편화되어 고립된 채 맞이하는 죽음을 자율적 실존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배려의 완성이 아니라, 근대 사회 안전망의 실패가 개인에게 덮어씌운 잔혹한 고립입니다. 이 소외된 이들의 고통 앞에서 이론적 미학만을 말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 폭력일 테지요.  &nbsp;  자크 데리다: 고독사는 환대(Hospitalité)의 절대적 불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조건 없는 환대란 낯선 타자가 문을 두드릴 때 계산 없이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화된 세계는 모든 관계를 조건화하고 계산 속에 가둡니다. 고독사 현장에 남겨진 굳게 닫힌 문은, 현대 사회가 타자의 타자성을 견디지 못하고 환대의 문을 걸어 잠갔다는 증거입니다. 고독사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회적 시스템의 파산 선고입니다.  &nbsp;  아서 프랭크: 고독사는 한 인간의 육체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서사적 유폐(Narrative Abandonment)이자 침묵의 형벌입니다. 제 책 《아픈 몸을 살다》에서 줄곧 강조했듯, 고통받는 몸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그 고통의 증인이 되어줄 타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몸이 무너져 내릴 때 인간은 “내가 지금 겪는 이 아픔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타인의 눈빛과 귀를 통해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병든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증언이자, 타인의 응답을 기다리는 부름입니다.  &nbsp;  그러나 고독사 현장의 몸은 철저히 침묵 속에 방치됩니다. 그는 신음하고, 두려워하고, 도움을 청하려 하지만, 그 소리를 받아 안아줄 경청하는 타자가 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서사는 화자와 청자가 마주 앉을 때 비로소 생성되는 관계적 사건인데, 고독사는 서사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 버립니다. 현대 사회는 고독사를 겪은 사람을 사후에 발견하여 특수 청소'의 대상, 치워야 할 오염된 물질, 혹은 쓸쓸한 복지 통계의 숫자로 환원해 버립니다. 이는 죽어가는 자의 서사적 권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박탈하는 일입니다. 고독사는 단순히 혼자 숨을 거두었다는 물리적 고립을 넘어, 한 인간이 평생 몸으로 써 내려온 고유한 삶의 서사가 단 한 사람의 증인도 만나지 못한 채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 비극입니다.  &nbsp;  스피노자: 프랭크 교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저는 이를 코나투스(Conatus)의 전면적 질식과 신체 연대의 파탄이라는 관점에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유영만 교수의 《코나투스》와 제가 《에티카》에서 제가 논증했듯, 인간의 본질인 코나투스는 진공 상태에서 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립된 섬이 아니며, 외부의 다른 신체들과 마주치고(연합하고)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 역량과 활동 능력을 보존하고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바로 인간 자신”입니다. 좋은 타자와의 마주침은 기쁨(Lætitia)을 낳고 우리의 코나투스를 증대시키지만, 파괴적인 마주침이나 철저한 고립은 슬픔(Tristitia)을 낳고 존재 역량을 급격히 떨어뜨립니다.  &nbsp;  그런 맥락에서 고독사는 결코 개인의 선택이나 단순한 불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신체가 타인의 신체와 맺을 수 있는 모든 유익한 마주침의 통로가 차단되어, 외부의 파괴적인 정동과 질병에 대항할 역량의 연합(Co-operative Power)을 상실한 채 서서히 말라 죽어간 상태입니다. 인간의 신체가 극심한 고립에 처하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내재적 힘인 코나투스는 무력한 수동성(Passivity)의 극치로 내몰립니다. 신체는 더 이상 외부와 긍정적인 변용을 주고받지 못하고, 오직 결핍과 공포, 고립감이라는 슬픈 정동의 파도에 온전히 압도당합니다. 따라서 고독사는 개인이 생명력을 잃은 사건이라기보다,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특정 신체를 외딴곳에 방치하여 마땅히 순환해야 할 연대와 공통 개념(Notiones Communes)의 연결망을 끊어버린 생태적 괴사에 가깝습니다.  &nbsp;  유영만 (사회자):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더욱 먹먹해집니다. 프랭크 교수님은 고독사를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 명의 청자도 만나지 못한 서사의 압살로 짚어주셨고, 스피노자 선생님은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생명력을 북돋아야 할 코나투스가 사회적 고립 속에서 완전히 질식당한 참사로 정의해 주셨습니다. 결국 고독사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고 연결을 포기한 우리 사회의 관계 생태계가 빚어낸 참혹한 거울인 셈입니다.  &nbsp;  유영만: 접속이 차단된 고립, 환대가 거세된 사회적 파산이라는 분석에 전율이 입니다.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 주체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욕망, 즉 네 번째 화두인 '안락사와 조력사(Euthanasia and Assisted Dying)'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시겠습니까? 존엄한 자기결정권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기만일까요?  &nbsp;  장 폴 사르트르: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진 존재입니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의 방식까지도 스스로 선택해야 마땅합니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 앞에서 무기력하게 타자의 손에 내던져지느니, 죽음의 순간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조력사는 불합리한 세계에 맞서는 인간의 마지막 실존적 자유의 투쟁일 수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스스로 규정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마지막 결단조차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실존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으로 마감하겠다는 판단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nbsp;  스피노자: 저는 사르트르의 의견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욕망은 결코 인간의 본성, 즉 코나투스로부터 나올 수 없습니다. 어떤 존재도 자기 자신의 본질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살이나 조력사에 대한 충동은 자유의 발현이 아니라, 감당하기 힘든 외부의 거대한 고통과 수동적 정동(Sloth, 비탄)에 온전히 압도당해 내면의 역량이 바닥났을 때 일어나는 외부적 강요의 결과일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고통에 굴복해 생을 끊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인식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 존재 역량을 최대한 긍정하는 데 있습니다. 역량으로 능력이 증대될 때, 인간의 코나투스는 폭등합니다.  &nbsp;  아서 프랭크: 사르트르 선생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은 아픈 몸의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일 수 있습니다. 환자가 안락사를 원한다고 말할 때, 그 목소리는 순수한 자율적 이성의 산물입니까? “내가 가족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죄책감, 통증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의료 환경에 대한 절망이 만든 목소리는 아닙니까? 환자의 몸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혼돈(Chaos)의 서사 속에 있습니다. 취약한 몸의 절규를 성급하게 합리적 자기결정으로 환원하여 죽음의 절벽으로 떠밀어서야 되겠습니까?  &nbsp;  자크 데리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와 의미의 구조를 해체해야 합니다. 존엄한 죽음이라는 말에서 존엄(Dignity)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의미의 차이가 발생, 즉 차연(Différance, 데페랑스)됩니다. 과연 무엇이 존엄입니까? 고통 없는 빠른 소멸이 존엄입니까, 아니면 끝까지 취약함을 견뎌내는 것이 존엄입니까? 법률이나 제도가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죽음의 자격을 단정하려 할 때, 그것은 존엄의 의미를 폭력적으로 봉합하는 것입니다. 안락사는 명쾌한 해결책이 아니라, 결코 결정할 수 없는 아포리아(Aporia)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사용하는 안락사와 조력사도 누가 만든 개념어인지, 그 의미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미끄러지면 이전과 다른 의미를 재생산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nbsp;  미야노 마키코: 데리다 선생님의 지적처럼, 삶의 의미는 결코 하나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불치병 선고를 받았을 때 저 역시 절망했지만, 그 취약한 몸 상태에서도 새로운 인연과 우연한 대화들이 피어났습니다. 조력사를 완벽한 통제로 여기는 것은 삶에 불쑥 찾아오는 우연한 기쁨과 만남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은 끔찍하지만,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우연의 틈새가 존재합니다. 우연은 지금 여기서 생산할 수 없는 마주침의 산물입니다. 미지의 죽음과 우발적으로 마주칠 때 죽기 전에 생각했던 여타의 관념도 하나의 명백한 신념으로 뒤바뀔지 모르는 일입니다.  &nbsp;  푸코: 고대 로마인들에게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때로 지혜자의 가장 고귀한 권리이자 자유의 완성이었습니다. 삶이 더 이상 품위를 유지할 수 없을 때 문을 열고 나가는 행위는 예속에 저항하는 마지막 방편이었죠. 이런 측면에서 죽음의 시기와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하려는 삶의 미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바로 여기서 저는 깊은 의구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안락사와 조력사가 법제화되고 제도화되는 순간, 그것은 또다시 의학적 평가와 법적 승인이라는 권력 메커니즘 안으로 포섭됩니다. “당신의 삶은 더 이상 지속할 가치가 없는가?”를 판정하는 의사의 진단서, 보험과 복지 비용을 계산하는 국가의 계산법… 죽음마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효용성의 언어로 재단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제도로서 공인된 안락사가 자칫 쓸모없어진 자들에게 은밀히 가해지는 죽음의 압박으로 변질될 위험, 저는 이 양날의 칼날 위에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nbsp;  유영만: 통제하려는 이성의 오만과 취약한 몸의 진실이 날카롭게 부딪히는군요. 이제 마지막 화두로 향해 봅시다. 생명이 떠나고 남은 빈자리를 매만지는 의례, 바로 '장례식(Funeral)'입니다. 장례식은 떠난 자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남겨진 자들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까? 과연 “빈소는 일상과 구별된 채, 산 자와 죽은 자를 마지막으로 연결해주는 기억의 성소”(209쪽)로 자리매김하고 있을까요?  &nbsp;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장례식은 남겨진 이들이 비로소 애도(Grieving)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치료적 공간입니다. 시신을 마주하고 이별을 고하는 의식을 거치지 않으면 인간은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 속에 갇힙니다. 눈물을 흘리고, 고인의 삶을 회고하며 슬픔을 밖으로 쏟아내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비로소 남겨진 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으로 복귀할 준비를 마칩니다. 그래서 장례는 “고인이 머물 ‘기억의 공간’이라는 마지막 거처를 짓는 숭고한 제의”(211쪽)가 되는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nbsp;  질 들뢰즈: 장례식은 고정된 자아를 추모하는 자리가 아니라, 고인이 맺었던 생명의 에너지가 남겨진 자들의 신체 속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는 '되기(Devenir)'의 시공간입니다. 죽음은 무(Nothing)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분자적 흩어짐입니다. 고인의 언어, 체온, 기억의 파편들이 산 자들의 신경망과 접속하여 새로운 생명적 변용을 일으키는 장(場), 그것이 장례식의 진정한 잠재력입니다. 그 장(場)안에서 또 다른 장과의 다중 접속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변신을 거듭할 것입니다.  &nbsp;  마르틴 하이데거: 장례식에 참석하는 산 자들은 관 속의 시신을 보며 자신의 가장 확실한 미래, 즉 자신 역시 언젠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엄습하듯 자각합니다. 타인의 장례식은 나태한 일상에 빠져 있던 세인들에게 “너는 너의 죽음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불안(Angst)의 거울입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나의 본래적 실존이 각성되는 것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쓰는 존재, 즉 “내 삶에 마음을 쓰고 주의를 기울이며 보살피는 모든 방식이 인간이 이 땅에서 존재하는 실존의 방식”(247-248쪽)과 마지막 작별의 시간이 바로 존재 장례식입니다.  &nbsp;  모리스 메를로-퐁티: 관 속에 누운 육체는 지각을 멈추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물질로서 존재합니다. 남겨진 이들이 차가워진 고인의 손을 어루만지고 이마에 입을 맞출 때 일어나는 ‘상호 신체성(Intersubjectivité corporelle)’의 마지막 교감—장례식은 추상적인 관념의 행사가 아니라 살(Chair)과 살이 나누는 마지막 작별 인사입니다. 그 감각적 흔적은 남겨진 자들의 근육과 기억 속에 오래도록 각인되어 지각의 연속성을 이어갑니다. 결국 산자의 기억은 살과 살이 맞닿은 감각적 접촉이 남긴 지각의 현상학적 산물입니다.  &nbsp;  푸코: (부드럽지만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장례식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떠난 자의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이 사회적 규범을 재생산하는 장치입니다. 자본주의적 상조 시스템과 규격화된 애도 절차는 고인이 평생 일구어 온 고유한 주체성을 상품논리로 순식간에 지워버리고, 평범하고 순종적인 사회적 신분으로 환원시키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nbsp;  그러나 자기 배려의 관점에서 본다면, 장례식은 ‘기억의 테크놀로지’여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권력과 규율에 저항하며 자기 삶을 직조해 왔는지, 그가 남긴 궤적을 나누는 자리여야 하죠. 획일적인 종교적·국가적 의례의 틀을 깨고, 한 인간이 시도했던 ‘다르게 살기(se conduire autrement)’의 실천을 증언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nbsp;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해 낸 마지막 형태입니다. 장례식 역시 거대한 상업적 규범에 저항하여, 고인이 스스로에게 바쳤던 그 배려의 깊이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작은 해방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bsp;    &nbsp;  유영만: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열띤 논쟁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 삶의 반대편에 있는 적이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가장 솔직한 거울임을 확인했습니다.  &nbsp;  죽음은 기계적 생명 연장(연명)의 숫자에 있지 않고, 서사를 품은 몸의 존엄한 완성(임종)에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배치가 끊어진 벼랑 끝의 쓸쓸한 소멸(고독사)을 막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한 닻이 되어주어야 하며, 안락사와 조력사를 둘러싼 논쟁 이전에 고통을 함께 견뎌내는 환대의 생태계를 먼저 구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례식은 부재를 확인하는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떠난 자의 정동과 흔적을 남은 자들의 살과 호흡 속에 잇대어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순환이어야 할 것입니다.  &nbsp;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순간, 장기기증과 이식으로 연결되는 이 순간”(101쪽), 자살자가 다른 이를 살리는 아이러니 사이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와 관계를 엄숙히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 과연 그 사이에는 어떤 깊은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요? “삶과 죽음 사이(between)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만 같은 강”(104쪽)이 있다고 하지만 건너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강을 건너본 사람에게 물을 수 없는 아이러니가 산자의 삶을 지배합니다.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귀머거리가 되고 갑자기 불편하게 가까워지면 욕지거리가 나오듯, “사이가 너무 좁아 살이 부대끼면 상처가 나고, 지나치게 멀면 고립이라는 심연이 생긴다. ‘촘촘한 행정’이 개개인의 ‘느슨한 연결’과 만날 때 비로소 생명력이 생긴다. 오가며 건네는 별것 가인 참견과 옅은 안부는, 절망과 고립에 빠진 이웃이 기운을 내 따듯한 밥을 짓도록 하것이다”(258쪽). 오늘도 ‘병원 응급실과 장례식장 사이’에서 “누군가는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삶을 연장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병실에 있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장례식장으로 향”(226쪽)는 사이에서 또 하루의 깊은 고단함을 뒤로 한 채 노을을 맞이합니다.  &nbsp;  연명이 기계의 유지가 아닌 지각과 서사의 회복이어야 하듯, 임종은 고립된 종말이 아니라 우연 속에서 건네는 마지막 대화여야 합니다. 고독사가 고발하는 환대의 부재를 부수고 새로운 접속의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 안락사의 결정 불가능성 앞에서 쉽게 답을 내리기보다 타자의 고통을 끝까지 껴안는 것, 그리고 장례식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새로운 살의 기억으로 얽히는 것. 결국 죽음을 응시하는 일은 “오늘 나는 이 몸으로 타인과 어떻게 뜨겁게 접속하고 환대하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가장 치열한 삶의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차가워진 커피잔 위로 창밖의 낙엽들이 다시 바람을 타고 날아오릅니다. 우리의 토론은 여기서 멈추지만, 삶을 긍정하는 여러분의 실존적 발걸음은 저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nbsp;  차가운 가을바람 속에서도 여러분의 언어가 남긴 체온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오늘 밤, 우리 각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텃밭을 다시 한 번 깊이 갈아엎게 될 것 같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nbsp;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37/57/cover150/k3821307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375798</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