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규칙 다시 쓰기 - 21세기를 위한 경제 정책 보고서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김홍식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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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먹고사는 일과 나라가 부유해지는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양에서 어디든지 중요하다. 관자에서 보는 사회복지, 화식열전이 자본주의의 맹아였다는 중국의 주장도 먹고사는 문제와 국부에 관련된다. ‘유럽의 공자격인 케네(경제표에서 경제학이란 용어를 만듦)가 중국을 모델로 스위스를 최빈국에서 지상낙원으로 만든 것을 근대 경제학을 창시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자본주의의 출발로 보는 관점이 케인스의 수요 중심 경제를 거쳐, 1970년대 이후 공급 경제학으로 방향을 바꾸고, 미국이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이는 21세기가 되었다.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적 불평등을 낳는 상황을 개선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공감한다.

하이예크는 노예의 길에서 계획경제의 종말을 예견하고,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극단적 자본주의를 말하고, 앤서니 기든스는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3의 길을 주장한다. 헤겔의 정반합이 경제사에서도 무관하지 않다. 노벨 경제학상을 탄 수많은 경제학자의 이야기를 들어 경제학사의 맥락과 얼개를 잡는다.

 

경제 불평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21세기 경제 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펼칠 것인가를 고민한 역작이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경제 규칙 다시 쓰기. 미국의 경제 상황이 이 책의 출간 배경이다. 2차대전 이후 중산층 사회를 일군 기회의 나라, 미국이 20세기 말부터 불평등이 급속도로 심화 되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주장은 단순하다. 부유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더 이롭게 작동하도록 경제의 규칙을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스티프글리츠가 말하는 규칙이란 경제가 작동하는 구조를 결정하는 모든 정부 규제와 법의 체계, 그리고 사회 규범을 포괄한다.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경제가 틀렸으니 몇 가지 경제 정책의 변화로는 어렵단다. 오늘날, 케인스주의 경제학과 대척점에 있는 공급 측면 경제학은 규제 완화와 최고 소득자에 대한 세율 인하와 정부의 사회복지와 공공 투자 삭감을 초래했다. 이런 경제 방향이 기대했던 낙수 효과(trickle down)는 없고 경제적 불평등만 심화 됐다는 관점이다. 나아가 경제 성장과 공동 번영,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거다. 불평등의 문제가 재분배의 문제 아니다. 경제규칙을 바꾸어 경제 성장과 모두의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제안한다.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것으로 본다. 시장에 맡겨두면 시장은 실패한다. 실물에 토대하지 않은 금융화에 따른 신용 공급의 증가가 이미 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흔히 돈이 돈을 번다. 종잣돈이 없다면 투자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개인이나 기업은 지대를 추구한다. 지대 추구란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통 착취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뽑아내 부를 획득하는 거다. 독점이나 시장 지배력을 키우는 목적이 지대 추구에 있다. 시장의 상호 의존성이 심화 되고 인터넷의 위력을 토대로 거대한 부가 형성되는 것을 보면 몇몇 신기술들은 소득과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1현재의 규칙을 나열한다.

 

2다시 쓴 규칙에서 경제 불평등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풀어간다. 접근 방향의 첫 번째는 지대 추구 행위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지대 추구 행위는 최상위층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보상해주고 나머지 사람들이 부담할 비용을 높이고 경제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떨어뜨린다. 특히, 정부가 후원하니 은행이 파산해도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대마불사를 종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은행 금융기관들의 증권 팔기 같은 그림자 금융과 역외 금융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불투명한 금융활동은 상위 1% 부유층이 높은 소득 점유율을 차지하니 금융을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 또한, 최고경영자의 보수, 주주가치의 이익을 고려한 단기적 이익을 중시하는 태도도 문제다. 지적 재산권의 보호가 이를 활용한 혁신을 제약하고, 추가적인 연구 개발의 막는다는 점을 알려 준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무역 협정(WTO)은 소수 기업에 유리하지 미국 내 모두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라는 목소리를 낸다. 정부 차원의 의료 서비스의 강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본다(한국은 해당 없으나, 과잉진료, 가짜 환자, 비정상적인 진료횟수 문제 등은 해결해야 한다) 미국 내 파산제도의 현안과 문제점을 다룬다.

둘째는 중산층의 안전과 중산층에 진입할 기회를 보장해 주는 규칙과 제도를 복원하는 것이다. 완전고용, 공적인 사회 간접 자본 투자, 임금이 생산성을 같은 속도로 따라갈 수 있도록 노동자를 보호하는 규칙 집행,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노동 참여를 막는 장애물 줄이기, 공교육과 의료, 육아 서비스, 금융서비스 등을 복구하거나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중산층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경제 불평을 해결하는 방법이란 제안은 완전고용으로 풀어간다. 이는 소득재분배보다 안전한 제도적 장치로 보인다. 이는 앤서니 기든스의 3의 길이 제안하는 것과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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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대화 - 1997년 하노이, 미국과 베트남의 3박 4일
히가시 다이사쿠 지음, 서각수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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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미국과 베트남은 20여 년만의 국교를 정상화한다. 이후 이 책의 토대가 되는 하노이 대화라는 34일간의 협상을 왜 하게 되었나를 밝히는 내용이다. 전쟁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와 북베트남군 최고사령관이자 부총리였던 보응우옌잡의 동의하에 베트남 외교차관이 대표로 참가한 회의다. 4가지 주제를 토대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21세기에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에 두 국가가 공감했기에 이루어진 대화다.

 

미국은 베트남을 몰랐고, 베트남도 미국을 몰랐다. 쉽게 종결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긴 전쟁으로 300만의 베트남인과 59천 명의 미군 사상자를 냈다. 한국군의 피해는 언급되지 않는다.

 

하노이 대화의 첫날은 미국과 베트남의 Mind Set(정세분석)에 밝힌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동남아가 도미노처럼 공산화될 것이며, 소련, 중국, 베트남은 한배를 탔다고 보고 있었다. 이에 베트남은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지 동남아를 공산화하려는 목표는 없었다. 중국과는 전쟁을 벌이는 역사를 갖고 있다. 미국은 베트남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관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 미국은 일개 지역 사령관이 제멋대로 공격하면 미국 군법회의에서 처벌받는다. 베트남 측에서 보자면, 게릴라 공격까지 하노이 정부가 일일이 지령하는 것은 완전히 상식 밖일지 모른다. 이는 미국의 관점에서 베트남 전쟁에 지상군을 대량 투입하여 직접 개입하게 된 계기로 삼은 쁠래이꾸미국 공군기지에 대한 베트남의 공격을 두고 확인된 각국의 관점이다.

역사상 한 번도 본토가 공습당한 경험이 없는 미국은 이쪽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공격을 계속하겠다라는 사상적 풍토를 갖고 있다. 베트남은 협상하려면 공격을 중단한 상태가 유지 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노이 대화의 결론은 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각국 지도자 간의 대화는 유지되는 것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라는 제안이다. 한반도에 적용해서 탈이 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비판 정신이 왕성한 사람은 어는 곳에서건 높은 자리에는 올라가지 못하는 법이지요.” 이는 베트남의 외교관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대사로 진급하지 못했던 외교관의 말이다. 베트남도 우리와 비슷한 문화적 토대를 갖고 있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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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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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에 유튜브를 통해 이민진 작가의 인터뷰를 보고 <파친코>를 읽고 싶었다. 문장이 짧아서 좋다. 원고 작성 기간만 생각한다면 700여 남은 쪽을 쓰는데 30년이라니. 아마도 소설을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 확인하는 과정을 철저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인다. 훈이와 양진이 낳은 선자를 거쳐 노아, 모자수의 솔로몬에게 이어지는 피에 고한수와 이삭의 피가 섞이고, 요셉과 경희의 도움이 이어진다. 니가카에서 북송선을 탄 김창호의 삶도 선자의 삶과 다르지 않겠지. 부산 영도를 떠나 오사카와 요코하마로 이어진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기록한다.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묻힐 사람에겐 남의 이야기로 여길 수 있을 테다. 미국의 독자들이 더욱 공감하는 까닭은 대다수가 이민의 역사를 공유하기에 이민자의 아픔을 공유하기 때문이리라.

작품 해설과 옮긴이의 말이다.

재일교포들의 슬픈 디아스포라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도박 같은 재일교포의 삶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기형적 삶의 상징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민자의 설움

재일교포들의 눈물과 희망 그리고 극복의 역사

이주를 넘어선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시대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

차별받는 자이니 세상에서도 빛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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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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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8코스와 9코스를 걷다가 숙소에 들어와 읽는다.

 

과학자가 쓴 소소한 에세이다. 천문학자가 천문학을 안내하기보다는 꾸려가는 삶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일을 텍스트로 바꾸었다.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삶을 풀어 놓은 행간에서 그의 성실함을 본다. 학위를 받고 긴 시간을 비정규직 행성 과학자로 살다가 교수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앎과 삶을 연결하여 그려 낸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관측보다 측정 자료의 분석과 해석이 천문학자의 주된 일임을 밝힌다고 본다. 1, 2, 4부에 마주하는 일상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풀어두었고, 3부의 천문학 수업만이 천문학에 관련 있고 공개된 명제적 지식을 몇 가지 소개한다.

 

내일도 출근하는 딸에게가 이렇게 살아왔고 여성으로 버텨왔으니,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일깨워주는 방식이라면,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계몽적인 삶의 방식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희귀한 여성 행성 과학자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성실함이 꾸준히 이어질 때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재확인할 뿐이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밝혔듯이, 소소한 이야기라서 지적이 호기심이 강한 독자가 밑줄 치며 읽을 내용은 찾기 힘들다. 천문학자를 꿈꾸거나, 천문학 입문서 격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적합도가 높지 않을 듯하다. 영화 ‘92년생 김지영을 보고, 공감하는 사람과 우리 때는 시집살이와 육아를 포함한 삶이 더 힘들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듯이, 책을 읽으며 느끼고 받아들이기는 독자 나름이다.

읽고 보니 20216월에 17쇄가 세상에 나왔다.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30, 40대 여성 독자층이 대다수라더니 저자나 출판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타겟팅은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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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기와 삶 읽기 1 -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바로 여기 교실에서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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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에 핀 백동백꽃

 

타임머신이 내려놓은 강의실에 앉아 있다.

남의 학교 강의실에서 청강하는 중이라 아는 사람 없이 수업에 집중한다.

실루엣만으로는 교수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어도 메시지는 잡음 없이 들린다.

때는 이 땅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들여오던 90년대 초다.

 

강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삶에서 식민지성을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식민지성이란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회, 자신을 보는 이론을 자생적으로 만들어가지 못한 사회를 식민지적이라 한다. 풀어보면 삶과 지식이 겉도는 현상을 더 만들지 말자는 목적에 동참하라 한다. 이론에 치우쳐 그 속에 담긴 자신의 삶에 대한 암시를 외면하기, 자신의 삶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글 읽기에 일생을 기꺼이 바치기, 책 읽기를 너무나 지겨워하는 것 등은 식민지성을 재생산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때때로 유학파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 외국은 이걸, 이렇게 한다. 우리는 이걸 못하니 따라 해야 한다는 방식의 전달에 그치는 경우가 있다. 간혹 우리의 형편과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고 무지개를 좇으라 한다. 이런 사례는 조혜정 교수 친구의 말을 빌리면 오퍼상 역할이다. 오래전에 오리엔탈리즘을 읽으며, 번역자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던 것은 그가 오퍼상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의 글로 받아들인다.

 

강좌는 문화이론이다. 문화이론이 말하는 이론과 개념은 서양 학자들이 그들의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직접 적용하기 쉽지 않다. 적확한 예로 든 것을 옮겨본다. “문화상대주의라는 개념은 긴 역사 속에서 이방 문화와 접촉하고 문화 간의 교류가 실제적 효과를 거두어온 서양 역사 제국주의 팽창 속에서 나온 개념이다. (중략) 이 개념을 부모와 자식 세대 간 문화적 단절을 극복하려는 방법론적 태도로 상대주의의 개념을 부각해 학생들이 감을 잡게 한다

주입식 교육 시스템에서, 받아 암기하는 수준은 명제적 지식에 중독됨으로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를 가진 사회에 팽배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미 세상은 일상적 삶이 식민화되어간다는 위기감, 중심과 주변, 타자화된 주체와 권위적 설명의 해체 등이 이 시대의 문제를 풀어가는 주요 개념으로 주목받고 있다.”라고 본다. 이 문장은 강의하는 교수가 배우던 시기에 풍미하던 네오마르크시즘이라는 학풍에 따라 연구한 스승으로부터 배운 인식이리라.

 

당신은 누구인가? 등으로 나에게 질문하지 말아 주십시오. 언제나 똑같은 채로 있으라는 식으로 질문하지 말아 달란 말입니다라는 미셸 푸코의 부탁으로 시작해 저자란 무엇인가 질문한다. 저자가 계몽주의적이지 않고 명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독자는 책을 읽을 때 국정교과서나 성경을 읽듯이 수동적으로 읽지 말고, 저자와 대화하듯 적극적인 행위로서 책을 읽자 한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담론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거다. 이런 맥락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텍스트란 사회화의 과정, 저자와 독자가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강조해왔음을 소개한다. 그러하기에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좋은 책이다.

 

글쓰기는 시대 변화에 따라 다시 쓰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례 이링 페쳐의 누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깨웠는가?를 들어 텍스트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적극적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는 명제를 풀어간다. 주체적 책 읽기는 시대의 특권이 아니라 짐이자 의무라는 소결론을 내리며.

 

문화 읽기의 어려움을 토론을 통해 느끼게 한다. 맑스와 푸코는 인간 해방에 관심을 두었고, 미셸 푸코는 난해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열어 두었다. 길들여진 사고 경향 탓으로 돌리며 경전읽기방식을 고수하지 말고, 성서에 적힌 것이라면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자근본주의적 습관을 깨야 한다고 강조한다.

번역서를 읽을 때 느끼는 감정을 멋지게 표현했기에 옮긴다 누구의 글은 소화불량기가 남아 있는 번역투가 아닌 우리 말로 매끄럽게 쓰여 있어 잘 읽힌다.”(p. 48)

 

30년 전에 이 강좌를 수강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은 현실에 돌아와 든 생각이다. 수강하며 메모한 것을 정리하니 글이 체계적이지 않지만, 결론은 뚜렷하다.

 

#글읽기와삶읽기<1> #조혜정 #도서출판또하나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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