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한국은 - 우리의 절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박성호 지음 / 로고폴리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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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GDP 대비 복지비 비율, OCED 최하위'

'아이들, 삶의 질 꼴찌'

'직장인 유급 휴가 한국이 꼴찌'

'한국 아동복지지출 OECD 최하위'

'성 평등 순위 136개국 중 111위'

'빈부 격차 최대, 한국 노인 빈곤율 1위'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 없어' 韓, OECD 중 꼴찌'

'한국 정규직, OECD 평균보다 해고 쉬워'

'男女 임금격차 OECD 3배'

'한국 사회자본지수 OECD 최하위권'

'교사 만족도 OCED 국가 중 꼴찌'

'아동 성범죄 절반 집행유예'

'서울 생활비 껑충, 도쿄 제치고 8위'

'최저임금, 두 자녀! 빈곤탈출에 주 62시간 노동'

'한국 '유리천장'지수 OECD 최하위'


이 책의 제목과 아주 자~알 어울리는 내용들이다. 뭔가 비꼬는 듯한 말투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게 된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긍정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생각하면서도 '헬조선'에 대한 뉴스를 보거나 이런 대한민국의 더러운 알몸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책들을 읽다보면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란 어려운걸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찾아오곤 한다. 내 마음을 다독여주기 위해 하고 있는 독서가 이런 책들을 읽을 땐 내 마음을 삐딱하게 만든다. 심지어 현실을 부정하고 나만의 세상 속에서 살고 싶단 생각이 수도 없이 찾아온다.


어쩌다 한국은 이렇게 절망적인 나라가 되었을까? 박성호 작가는 사회문제의 핵심은 노동문제에 있다고 말한다. 인류가 역사를 기록한 이래 기술은 항상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왔고, 이로인해 노동자들의 삶을 몹시 열악하게 만들고 극단적인 무력 충돌까지 빚어냈으며, 그의 단편적인 예가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이다. 기술 발전이 노동환경을 좋게 만들어야하는데 오히려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


얼마전,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의 생산라인에 견학을 간적이 있다. 정규 방송 마지막 애국가가 나올 때 TV 속의 자동차 생산라인을 본 것 말고는 직접적으로 본적이 없기에 자동차가 실제로 어떻게 조립되어지 궁금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자동차가 어떻게 조립되는지는 나의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나의 관심을 끈 건 공장 안의 분위기였다. 공장 안은 영화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킬 정도로 살벌했고 모든 것들이 자동화되어 있었기에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진격의 거인'에서 나오는 거인의 발소리처럼 무언가를 무섭게 찍어내고 있는 금형설비들, 인간들보다 빠르고 정확하다며 자신있게 일을 수행하는 듯한 로봇팔들, 그리고 이런 로봇들은 누가 더 빠른지 내기하듯이 불꽃 튀기며 서로 싸우고 있는 듯하다.

가끔씩 일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무인도에서 사람을 만난 것 같이 반갑다가도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생각없이 반복되는 일을 수행하는 이들과 로봇들이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관리자가 말하길 이제 자동차 공간은 100% 자동화가 가능하단다. 현재 공장에 남아있는 노동자들은 로봇이 수행하지 못하는 일들만 할뿐 사실상 로봇들이 하는 일보다 더 하찮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점점 로봇들로 인해 일할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기술은 왜 끊임없이 발전하려고 하는걸까? 박성호 작가는 공동체의 이익, 개인의 이익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쟁'이라 답한다.


'막상 일을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상황을 지배하는 것은 경쟁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고민하지만, 일에 뛰어드는 순간 공동체의 이익이고 개인의 이익이고 다 잊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선이 됩니다. 이 시스템이 적나라하게 작동한 것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인 동시에 개인적인 이익도 별로 없는 일이었지만, 핵무기 개발은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P 29)


자동차든, 핸드폰이든, 부동산이든, 이 세상은 이젠 수요보다 공급이 넘쳐나는 시대다. 자동차 중고차시장에는 온갖 종류의 자동차들로 빽빽히 들어서 있다. 저 많은 차들중에 내 차는 왜 한대밖에 없는 건지, 억지로라도 남는 차 한대만 달라고 싶을 정도로 이 세상에 자동차는 넘쳐난다. 그런데도 자동차회사들은 계속해서 하루에 수천대의 자동차를 찍어내고 있다. 팔지못해 남아있는 재고차량들도 많은데 계속 만든다. 무엇을, 누구를 위해 생산을 하는 걸까?  부동산 역시 아파트들이 계속해서 들어서고 있는 걸 보자면 인구는 계속 줄어든다 하는데 왜 짓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세상은 사람들의 이해보다는 돈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세상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역사책을 보면 전쟁은 왕들의 권력욕과 시기심, 그리고 경쟁심리로 인해 일어나지 않았던가? 나라를 위해서가 아닌 개인적인 욕심으로 인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무고한 희생을 당했다. 당시의 왕들은 누가 더 땅을 많이 차리했는가로 경쟁을 했다면 현재 21세기의 왕들, 즉, 대기업들의 회장들은 누가 더 돈이 많은가로 경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돈이 무한히 많은대도 탈세를 하는 걸 보면 공동체의 이익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하는 것 같고, 평생 쓰고 남을 돈이 현재 있는대도 더 벌고자 하는 걸 보면 개인의 이익을 바라는 것 같지도 않다. 대한민국은 돈으로 인해 권력까지 갖는 세상이지만, 아무튼 이들이 계속해서 생산을 하고 있는 이유는 공동체를 위해서도 아니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아니고 누가 더 돈이 많은지 경쟁을 위해서이지 않을까?


대한민국 근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을 뽑자면 박정희가 단연코 빠질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의 영향력이 그가 죽은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 자식으로 인해 행사되어지고 있으니 대한민국 50년 역사가 이 사람의 이름으로 인해 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국 역사까지 바꾸고자 하는걸 보면 박정희란 이름이 대한민국에 끼치는 영향력이 어느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기성세대와 박정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꼭 끝이 안 좋다. 나 역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우리나라 사회, 정치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하나둘씩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쯤 명절(추석이었던가?)에 어른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우리 집안이 경상도를 고향으로 두고 있었기에 예상대로 나와는 반대 의견들을 말씀하신다. 어른들은 무조건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한다. 무언가 그 사람에게 빚을 졌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그의 딸이 지금의 대통령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을 지상 과제로 생각했던 것도 솔직히 이해는 갑니다. 사람들이 봄마다 굶어 죽는데 역사적 모순이 뭔가 중요하겠습니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무슨 정치를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겠느냐, 경제개발이 급선무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까지는 크게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p 082)


돈이냐? 정의냐? 가난했을 당시에는 정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는게 중요하지, 정의 그 딴게 뭔가 중요하다고. 해방직구, 그리고 6/25 직후에 못 살았을 당시에는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배고팠던 이들에게 박정희는 이 부분을 해결해주었던 신과같은 존재였던 것이다.그래서 어른들은 박정희를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옹호하는 것이다. 무슨 돈이든, 먹고 살게 해줬으니 그걸로 됐다는 식으로...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모른다. 그때 현실을..' 나 역시 경제성장에 대한 그의 공로는 인정한다. 그런데 이젠 제대로 알고 판단해야 할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생각해야지 죽은 사람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정치에 임하면 어쩌잔 말인가? 언제까지 박씨 집안에 빚이 있다 생각하면서 후대 세대들을 힘들게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박정희는 오늘날 사회 각 분야, 집단간의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모순을 몇배로 증폭시켰어요. (...) 경제성장의 대가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기회를 놓쳐버렸고, 그 때문에 모순이 더욱 누적되면서 사회 각 계층 간의 불화가 심화되고 사고방식이 서로 다른 집단들이 아예 대립하는 형세가 돼버린 상황에서 범사회적인 규모의 총론적 대화를 나눌 장이 과연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 한 나라의 의사결정을 책임지고 있는 최고 책임자가 유권자들에게 1년에 한 번밖에 이야기하지 않는 다는 것, 심각한 소통 부족의 사회라는 반증입니다.' (p 88~91)


'우리 사회는 경제규모는 키웠을지 모르지만 삶의 질은 지극히 나빠졌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 사는게 왜 이렇게 팍팍해지는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거죠.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을 자꾸 당하다 보면 사람은 정신적으로 퇴행합니다.'(p 92)


우리나라는 아직도 경제 성장에 미쳐있다. '앞으로의 경기가 불확실하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라며 여전히 경제의 중요성만 강조한다. 경제가 우선시 되어야 모두가 잘살수 있다는 얘기를 아직도 믿고 있는 지금, 박정희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듯 싶다. 이제 이만큼 나라가 성장했으며, 먹고 살만해졌으면, 행복, 복지란 단어에도 신경 쓸때도 되지 않았나? 밥은 충분히 먹었으니,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걱정없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기성세대는 배가 고픈가 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 걸까? 요즘 사람들은 투표철만되면 SNS를 통해 투표했다며 인증샷을 남긴다. '나도 투표에 참여했다'라는 걸 의미하는 것 같은데 투표를 함으로써 '나는 민주주의에 기여했어'라는 참여 정신으로서의 의미인지, '남들 다 하니깐 나도 해야돼'라는 군중심리인지, '나도 성인으로써 투표하러 왔다'라는 성인식 같은 인사치례인지 헷갈린다. 투표가 재미삼아 혹은 남들 다하니깐 다 하는 그런 행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정확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서도 특정 정파와 정치인을 지지하기 마련이죠. 이런 사람들은 투표일에 놀러 가는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정치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 현재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렇게 중요한 선택을 하는데,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이유를 대지 못한다는 것은요. 이건 사실 선택이 아니라 찍는거죠. 우리는 최소한 여기서 한 걸음 정도는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독재자의 딸과 전직 대통령의 비서실장 중에서 상식적으로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해 보여요. 그런데 그러지 않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독재자의 딸을 선택했고, 또 그런 선택이라도 해주는 것을 고마워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는 정치에 무관심합니다.' (p 108)


'투표만이 민주주의가 아니잖아요. 우리 생활 속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아주 소소하게 수도 없이 벌어지는 의사결정 과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해본 사람만이 국가 차원의 의사결정도 민주적으로 잘할 수 있다, 연습 없이는 아무도 못한다, 라는 겁니다. 단순히 투표일이니까 가서 투표만 하자거나 투표했으니까 나는 민주주의에 기여했어, 라고 생각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민주주의가 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p. 121)


요즘은 뉴스나 네이버의 기사들을 보다보면 믿을 수 있는 것들인지 의심부터 든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뭐라도 보고 있긴 하지만, 머리속에서는 혼란이 시작된다. 혼란 속에서 뉴스를 보다보면 앵커나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의해 점점 내 귀는 솔깃해져가져 가는게 사실이다. 권력과 자본에 굴복당한 언론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신뢰란 말은 이젠 언론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되었고, 신뢰할 수 없으니 국민들은 대한민국이란 나라와 소통할 수 없단 느낌이 든다. 언론이 국민들과 소통을 위한 방법으로 예능, 드라마를 선택한 것을 보자면 전두환의 3S 정책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본다.


'이미 벌어진 사건, 결정된 사안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만 하는 것은 과거의 언론이다. 민주공화국에서, 그러니까 사회공동체의 의사결정권이 국민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 의사결정권을 정상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자 책임이다. 언론의 핵심 역할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회의 주인인 우리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필요한 내용을 전달해주는 것.'(P. 174)


그래도 손석희 기자의 JTBC 뉴스룸이 그나마 제일 신뢰하는 방송이라 자주 보고있다. 왜곡된 방송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지울 수 없지만, 타 방송사의 뉴스보다는 속시원하게 보도해주고 있는 편이라 앞으로도 기대가 되는 뉴스이다. 물론 그 배후에도 거대한 자본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볼만한 뉴스가 없는데... 누군가 힘 있고, 돈 많은 정의로운 인물이 나와서 방송사를 만들어주는 상상만 하게 되는게 현실이다.


주변에 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반면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대부분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어느 집단이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 꼭 있기에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다가는 싸움이라도 생길 걱정에 종교이야기를 나누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다. 일반인들조차 교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걸 보면 대한민국에서 교회의 막강한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어떻게해서 교회의 권력이 이렇게 커졌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부흥의 여파로 주류 교단은 신도 수가 늘고 점점 세력이 커집니다. 일제강점기 초에는 교회 호라동을 굉장히 많이 지원했어요. (...)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전시 상태로 들어갑니다. 전시 상황에서 교회라는 집단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일본은 주류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일본에 협력할 것을 요구합니다. (...) 개신교 역사나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는 신사참배 문제가 나옵니다.(...) 조선총독부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사참배를 요구하자 개신교 내부에 파란이 일어납니다. 그때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 그러나 주류 개신교는 일제의 요청에 일제히 굴복합니다. 장로회를 필두로 거의 모든 주류 개신교 집단이 다 신사참배에 응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개신교 집단이 권력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자기들이 믿는 종교적 신념을 위배할지라도 권력과는 타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거죠. (...) 신살참배에 응했던 개신교도들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개신교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들에게 권력에 대항할 필요가 없다는 강력한 교훈을 준 셈이죠.'(P 252~253)


'영락 교회 이외에도 주류 개신교 교단은 권력과 타협해야 한다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교훈과 더불어 자본을 끌어모으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 종교가 권력과 자본을 얻는 방법은 지금 실존하는 권력과 타협하는 것,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교인을 모으는 것. 이 방법을 모두 깨우쳤습니다. '(P 257)


'70년대 와서는 시회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자고 일어나면 건물 생기고, 자고 일어나면 벽돌 만들던 아저씨가 건설사 사장이 되기도 하고, 논에서 소끌던 아저씨가 땅이 개발되면서 벼락부자가 되기도 했고요. 경제 성장이라는 물질적인 가치에 치중한 사람들이 마음 둘 곳, 또는 경제성장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사회에서 부자들과의 네트워크를 유지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졌죠. 이런 모든 걸 제공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교회였던 겁니다.' (P259)


'우리나라 교회는 권력과 타협하고 자본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스스로 권력의 주인이 됩니다.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누가 출마하느데 그 사람 집안에 문제가 있는 것 같더라, 이러면 낙선인거죠. 엄청난 권력을 가진 겁니다. 요즘 사회에서 누가 겨울 말 한마디로 공직선거에 출마한 사람을 낙선시킬 수 있겠습니까? 대형교회 목사라면 가능합니다.' (P. 263)


개신교의 역사와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해온 온갖 악행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에 기독교에 대해 비판 글을 올렸던 기자가 기독교 신도들에 의해 칼 맞아서 죽었다는데, 이렇게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써도 되는지 심히 걱정스럽다.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에서 이만큼 권력과 자본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읽다보면 천주교인으로서 천주교는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안한 것에 대한 자부심도 느끼게 된다.

새누리당, 대형 교회 등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권력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머리가 비상하단 생각이 든다. 전쟁 후 돈 되는 곳이면 어느 분야든 그들의 이름이 없는 곳이 없으며,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법을 바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걸 보면 돈과 권력이 정말로 좋긴 한가보다. 문득 웹툰 '송곳'에서 나온 대사가 떠올랐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나 역시 이들의 위치에 있다면 변하지 않을거란 장담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반면 이들에 비해 변화를 원하는 이들은 왜 쉽게 지치는 걸까? 힘들어서?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해도 안되기 때문에? 이들의 힘이 너무나도 막상해서? 요즘 박근혜의 행동을 보자면 답이 없긴 하다. 국민들 모두가 들고 일어서 반대를 외치는데도 꿈쩍도 안하는 걸 보자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영화 내부자들 대사중 권력자인 이강희가 말한 말이다. '대중들은 개, 돼지들이다. 적당히 짓어대다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우리 대통령은 개, 돼지라고는 말 안했다. 단지 IS 테러집단이라는 말 정도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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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고 키보드를 두들기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 목적이 무엇인가? 시작은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낀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는데 언제부턴가 블로그에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존재하는 듯하다. 즉,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누군가 내가 쓴 글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서평을 쓰는 목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목적을 나쁘게만 보진 않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력의 결과물에 대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동물이고, 나 역시 인간이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또한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좋은 글, 문장들이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서평을 쓰는게 독서의 목적이 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오히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글쓰기라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냥 책 내용을 배끼는 정도인 것을....

`독자는 잘난 사람을 보려하기보다는 진솔한 사람을 보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한다.`(51p)

`아침마다 글쓰기 습관, 그 글들을 남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다. 내가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자신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이다.` (71p)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은 천천히 나아지면서 좀 더 좋은 서평이 되길 원하는 정도이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쓰고 싶다. 멋진 말들로 꾸며쓰는 것이 아닌, 내 속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좀 못 쓰더라도 진솔함이 묻어 있는 글... 아마도 지금 이 말을 쓸때 서민교수가 생각나는 이유는 그가 참 진솔하게 글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서민교수처럼 글을 쓰고 싶다.

`일상적인 모든 것을 `왜`라고 묻기 시작한다면 글감은 여기 저기 널려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늘 생각 없이 대하던 가족들도 모두 글감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이들처럼 어떤 것을 대하든 `왜`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일상이 깨어져 사건이 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 다음엔 무엇을 보든 그것을 살아 있는 것, 생각을 하는 존재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나누어 보는 것이다.` (89p)

`무엇을 보든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며, 어디에서 무엇을 보느냐, 어떤 분위기에서 무엇을 보느냐,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대상은 같아도 느낌은 다르다. 이는 눈은 같으나 마음의 눈은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 관념을 갖지 말고 그때그때 순간의 느낌을 소중히 하는 자세가 글 쓰는 이들에겐 필요하다.` (120p)

서평을 쓰다보면 똑같은 말이라고 해도 좀 다르게, 멋지게 쓰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총을 꺼내 들었다`를 쓰다보면 밋밋한 감이 들어 `차갑고 묵직한 총`으로 바꿨다가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무겁고 차디찬 총을 꺼내 들었다`로 바꾼다. 정식으로 글을 배웠거나 첨삭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어울리거나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이렇게 바꾸다보면 사무라, 대상에 대해서 유심히 관찰하고 느낌을 표현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즉,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살아있는 것, 생각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글의 형식도 모르면서 아프면 그 앞므을 글로 썼고, 외로우면 그 외로움을, 힘들면 그 힘든 일을, 때로는 시가 뭔지는 몰라도 시의 형식으로, 때로는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때로는 하나님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또는 수필 비슷하게 썼다. (...) 쓰다보면 이것저것 자신의 솔직한 마음들이 쏟아져 나온다. 처음엔 잘 안되지만 자꾸 쓰면 글이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쏟아 놓고 보면 그다지 창피한 일도, 숨길 일도 아니니까. 글을 풀어낼 수 있는, 끄집어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41p)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직장과 가정이라는 사회 울타리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왠지 모를 외로움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럴때면 이 넓은 세상 속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외로움을 달래고자 핸드폰을 뒤적거려 보지만 누구에게나 쉽게 전화를 걸 수가 없다. 술 한잔 놓고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시간도 상대도 점점 없어진다. 소주 한잔에 웃고 떠들던 친구들 역시 30대가 되어 가정이 생기고 직장 생활에 쫓기다 보니 `조만간`이라는 기약없는 대답만 반복할 뿐이다. 모인다 쳐도 대학생 때의 불타올랐던 옛날 분위기를 느끼기엔 고려해야할 사항들이 너무 많다. 누구 하나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 없을 때 이 마음을 글로 쓰면 저자의 말대로 약간은 위로가 되는 느낌이다. 요즘 자주 나오는 말로 표현하자면 힐링이 된다. 그리고 이 글을 누군가 봐줄것이다라고 믿으며 글을 쓰다보면(보는 사람은 내 와이프밖에 없지만) 누군가는 공감을 해주리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 글쓰기가 아닐까 하는 보람도 느낄 수 있어서 계속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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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 읽었으면 변했을 책들 - 책, 서른을 만나다! 서른을 위한 멘토 책 50
김병완 지음 / 북씽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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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이직을 했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점점 나태해져 가고 있던 나를 바꿔보고자 새로운 도전이라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마침 내가 가고 싶었던 회사에 합격도 되었고, 집에서도 가까운 곳이라 결정하기도 한결 쉬었다. 그런데 새로운 환경, 사람들, 사무실 속에서 경력으로 입사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내 성격상 적응하는 것이 쉬울 줄 알았건만, 모든 것들이 낯설고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럽다. 누구 하나 친한 사람 없고 말 상대할 동료조차 없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만 보고 있노라면 외로움은 더욱 커지고 전 직장 동료들, 동기들만 계속 생각난다. 경력으로 입사했다는 점에 대한 부담감도 떨쳐내기 쉽지 않다.

어느샌가 두려움과 후회가 밀려왔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이 두렵고 몸과 마음 모두 무겁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생각하면서도 이 놈의 시간은 좀처럼 빨리 가지 않는다. 주말만 오길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새로운 도전이란 말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꾸며낸 말일지도 모른다. 난 그저 이 회사의 겉모습과 돈과 잠깐 동안의 휴식을 위해 선택했을 수도 있다. 편한 부서라는 근거없는 주변 사람의 말에 현실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편한 회사생활을 꿈꾸며 이직을 결정한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 선택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다. 과연 이 힘든 시간을 이겨내면 한발 더 발전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해답을 찾고자 오랜만에 자기계발서를 찾았다. 특히, 이직과 함께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독서를 등한시했던 내 자신을 돌아보고자 독서를 주제로 한 책을 골랐다. 역시나 예상했던대로 자기계발서는 당연한 말들을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준다. 읽다보면 당연한 말들 뿐이고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재각기 나름대로의 노력과 열정으로 인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책 속에 끊임없이 거론된다.

`인생은 누구나 다 힘들고, 불공평하다. 다만 당신이 스스로 당신의 마음에 책임질 수 있게 되면, 조금은 더 쉬워지고, 조금은 더 공평해지게 된다.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만이 함께 설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서른이 넘으면 우리는 마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나를 발견해야 한다. 온전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27p)

그런데 요즘같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위로가 필요한 나에게는 이런 당연한 말들이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자세와 실천이라 말한다. 그 실천에는 먼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그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며, 지금 이 곳에 당신의 행복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이 곳에 당신의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123p)

내 자신에 대해서 뒤돌아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든 것은 일 때문이 아니다. 내가 힘든 이유는 내가 앞으로 해야할 일들에 대한 두려움, 부담감 때문이다. 출근 시간이 특히 힘든 이유는 내가 회사에서 해야 할 일들로 머리속이 가득차 있기에 몸도 마음도 무거운 것이다. 죽는 순간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옥상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더 무섭다는 말처럼 정작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면 생각보다는 쉽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가끔 과도한 업무와 사람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즉, 내 마음에서 일을 크게 부풀리고 미리 걱정하기 때문에 출근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무조건 행복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즐겁고 유쾌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큰소리로 웃어넘기고, 좋은 태도를 유지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결과에 연연해하지 말고, 열정의 시간을 만들고, 적당한 낭비를 즐기고, 욕망을 조절하고, 가끔 실없이 웃고, 가던 길을 벗어나 보고, 실패를 기뻐해보라고 조언해 준다.` (134p)

최근 이직을 핑계로 책을 손에서 놓았다. 퇴근 후 집에 오면 `힘들어 죽겠다`라는 푸념을 와이프에게 늘어놓고선 곧바로 리모컨을 집어든다. 내 자신에게 휴식을 줘야한다는 이유로 자기 전까지 tv를 본다. 그냥 생각없이 웃고 싶었다.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리리라 믿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태해질수록 불행해졌다. 전 회사 다닐 때는 5시 반이면 꼬박 일어나 지하철을 타서 책을 읽었다. 퇴근할 때도 역시 책을 읽으면서 왔으며, 집에 와서는 읽은 책에 대해서 서평을 쓴다. 2시간이나 되는 출퇴근 시간에 무척이나 힘들고 피곤했지만, 책을 읽고 글쓰는 즐거움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요 몇주 사이에 책을 안 읽고 글쓰는 것도 게을리 하며 나태해지다보니 행복이란 단어는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TV를 본다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즉, TV와 함께 한 웃음들은 진정한 행복의 웃음들이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틈틈이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휴식이며 그 속에서 행복이 찾아오는 걸 느꼈다. 나태해진 요즘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다시 책을 손에 잡으려 한다.

`인생은 정직한 것이다. 묵묵히 걸어가라. 결과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필자의 인생에서 아쉬웠던 점이자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 험난하더라도 바른 길을 가야 한다. 순간을 쉽게 모면하기 위해 타협하거나 우회하면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갇히게 된다. (...)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서 새로운 생각을 많이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88, 189p)

난 지금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이란 말을 사용했을지라도 난 지금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에게 닥쳐온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분명 지금보다 더 힘든 나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힘들 것이고, 험난한 여정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3배를 더 살아야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내 자신을 믿으며 한발 한발 천천히 걷다보면 발전된 내 모습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꿈꿔본다.

그러기 위해서 독서와 글쓰기는 계속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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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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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프랑스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희생당한 사람들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가족들이 모처럼 외식을 하기 위해, 혹은 커플이 설레는 마음으로 데이트를 하기 위해, 혹은 친구들과 오랜만에 기분 좋은 술자리를 가지기 위해, 등등 모두들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기분 좋은 마음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 그 식사시간은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행복을 시셈이라도 하듯 누군가 레스토랑에 들어와 낡은 가방에서 묵직하면서도 차가운 자동소총을 꺼내들었고 망설임없이 그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처음부터 프랑스 테러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 책의 주인공 모모가 방아쇠를 당긴 이들의 어린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서이다. 책의 중간에 모모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땅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죽는 연습을 해봤지만, 시멘트 바닥이 너무 차가워 병에 걸릴까봐 겁이 났다. 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법적으로 어른이 되면 나는 아마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비행기를 납치하고 인질극을 벌이고 무언가를 요구하겠지. 그게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쉽지 않은 걸 요구해야지. 진짜 그럴듯한 걸로. 당분간은 그 요구 조건이 무엇이 될지 나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그 직업에 대해 전문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20p)

어디서든지 버림받고 고통받는 아이들이라면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보다는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커서 총이란 무기가 쥐어진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테러밖에 없지 않을까? 성악설, 성선설 이런 이론들은 집어치우고 단지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일상을, 그리고 너희들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받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관심받고 했을지도 모른다. 테러리스트들을 옹호하거나 불쌍히 여기고자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인간이란 동물로서 똑같이 여자의 배속에서 울면서 태어났지만 분명 이들이 자란 환경은 비참했을 것이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되었다. 모모 역시 창녀의 아들로서 태어나 로사 아줌마의 손에서 커오면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였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에게는 행복, 가족, 포근함, 교육 이런 단어들이 낯설다.

`아무튼 나는 행복해지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게 더 좋다.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쓴다. 나는 아직 정치를 잘 모르지만, 그것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득이 되는 것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행복에 관해서는 그놈이 천치짓을 하지 못하게 막을 법이 필요하긴 할 것 같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리는 것뿐이다.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나는 행복해지자고 주사를 맞는 짓 따위는 안할 거다. 빌어먹을, 나는 이제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104p)

얼마전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봤다. 애니메이션인데, 한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그녀의 머리속에서 사람의 모습처럼 형상화되어 하나씩 튀어나온다. 처음에 있었던 감정은 기쁨이다. 그 다음은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 이렇게 5개의 감정들이 나와 한 아이의 인성을 만들고, 성장과정과 추억을 함께 공유한다. 하지만 모모에게는 위의 5가지 감정들과는 다른 감정들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모모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며, 정확한 나이도 모른다. 외로움과 공허감만 깊어지면서 집에 똥을 누고 도둑질을 하게 되었다. 관심받고 싶어했던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부족한것 없이 풍족하게 살아온 나오서는 이 아이의 머리속에는 어떠한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없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없이는 살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아이였다. 모모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생을 사랑했던 아이였으며, 마지막까지 로자 아줌마를 사랑하고 지켜주고자 했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모두가 같이 살자고 했음에도 자신은 갈 곳이 있다며 끝까지 로자 아줌마 옆을 지켜주었다. 어찌 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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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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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전쟁

`남자는 이성적으로, 여자는 감성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들이 감히 이해하려 해도 할 수 없는 남자들보다 상위 계층의 종족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무조건 여자 말을 듣는게 좋습니다. 그럼 중간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결혼도 안해본) 김제동이 한 말이다.

결혼한지 얼마 안되지만 나 역시 결혼하고선 남자와 여자의 생각이, 아니 생각하는 뇌 구조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결혼하고 느낀다. (내 와이프는 더 잘 느끼는 듯 싶다.) 예를 들어, 행복에 대해서 생각을 나누다보면 나는 내가 우선 행복해야지 가정이 행복할 수 있다는 주의다. 반면에 아내는 가정이 행복해야지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단다. 즉, 난 내가 우선이고 가정이 차선인 반면 와이프는 가정이 우선이다. 자기자신은 차선인 셈이다. 그리고 `잘 잤어?`, `밥 먹었어?` 라는 말을 한마디를 해도 아내는 그 안에 진심이 안담겨 있다고 한다. 의무감에 하는 말 같다나? 그런데 사실이다. 나 역시 의무감에 남편으로서 해야할 것 같으니깐... 이런 말들을 하는 것 같다. 진심을 담겨서 어떻게 말을 해야하는건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와이프는 섭섭하다 자주 말하는데 진짜 모르겠다. 이런 다툼의 원인이 성격차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김제동이 말한 것처럼 남자, 여자 성향이 달라서 그렇다는게 정답이다.

`여자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 여자들은 다른 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기억하는 방식도 다르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자들의 전쟁에는 냄새와 색깔과 소소한 일상이 함께 한다.`(p. 17/28)

이 책은 남자들의 세상인 전쟁을 여자들의 눈과 입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러시아와의 전투에 참전했던 여성들의 전쟁 속에 있었던 사연들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런데 남자들의 전쟁 영웅담과는 엄청 다르다. 이들의 전쟁스토리에는 사랑, 원피스가 있었고 잘린 머리카락과 자신의 옷에 맞지 않았던 군복과 군화가 있었으며, 여자의 몸으로서 전쟁에 임해야 했던 이들의 눈물이 있었다. 그래서 사연들이 모두 슬프다.

`또 무슨 일이 있었나...... 글쎄...... 전쟁이 몇 년 동안 있었지? 4년. 그래, 참 길기도 했네 그런데 그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어기 없어. 당연히 꽃도 피고 새도 울었을 텐데. 그래, 그래...... 참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전쟁영화에 색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은 모든게 검은색이야. 오로지 피만 다를 뿐, 피만 붉은색이지˝ (p. 83)

전쟁 영화 중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구하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너무 좋아해서 5번 이상은 봤을 거다. 내 기억에 이 영화는 전체적인 배경색이 거무스름했다. 흑백영화는 분명 아니었다. 이 책의 말 그대로 전쟁 속 무기나 군복, 땅, 숲, 탱크 등 모든 전쟁의 배경도구들이 검었다. 이 여자의 말대로 피만 빼고 모든 것이 검었다. 이 여자는 전쟁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느낀 것이다. 영화처럼...

그래서 모든 사연들이 영화처럼 느껴진다. 왜? 난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깐... 전쟁영화 속 전쟁 신의 장면들과 계속해서 겹치지만 이들의 당시 상황은 더 처참했을 것이고 이들의 기억 속 전쟁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정도로 끝날 수 없는 무어라 형헌할 수 없는 지옥과 같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건 그냥 영화 속에서 떠오르는 장면들로만 가능했다. 그리고 이들이 전쟁 중에 꿈꾸던 삶들, 평범한 삶을 난 지금 마음껏 누리고 있지만 항상 불행하다 느끼는 생각 자체가 참 부끄러울 따름이다.

`내가 동갑내기들보다 훨씬 나이든 것 같았고, 어떨 땐 늙은이가 된 것 같고 그랬지. 친구들은 춤추러 다니고 즐겁게들 사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 인생을 나이든 사람의 눈으로 바라봤으니까. 다른 세상의 시선으로..... 노파의 시선으로` (p. 266)

사람은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고통이 너무 치열했고 고난했기에 4년만에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몸은 아직 20대였지만 정신은 온갖 경험을 다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자신도 역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노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아름다움은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일상 속에서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임무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들려주었다. 스스로의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대부분의 사연들의 주인공들은 차출이 아닌 스스로 지원해서 전선으로 간 여자들이 많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남편, 친구들이 전장으로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도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여자이고 싶었지만 전쟁 동안만큼은 군인이었다. 남자들보다도 더 군인다웠다. 모두들 군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스스로 여자이길 포기하고 나라를 위해 스스로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름다움이라는 여자의 정체성에 대해서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머리도 짧게 깍고 치마도 입지 못하고 구두/하이힐 심지어 속옷도 남자들 것으로 입었으니 여자로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텐데도 아름다움은 포기하지 못하겠단다. 여자로서 신체리듬이 망가지는데도 불구하고...

`반년이 지나자...... 우리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었어...... 매달 하는 그것도 끊기고...... 여자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하다보니 생체리듬이 망가진 거야...... 이해가 돼?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 여자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하더라고......`(p. 356)

이 책에는 점 6개(......) 가 모든 사연 속에 수도 없이 찍혀있다. 분명 이 점 6개의 의미는 눈물이다. 책 속에서는 그냥 점 6개일 뿐이지만 앞 뒤 글과의 관계 속에서 인터뷰 당시의 눈물과 정적과 울부짖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충분히 용감했다. 나라에서 충분한 대접을 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했으며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전쟁 후에도 마지막까지 아픈 기억들을 안은채 훌륭하게 살아왔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나라에도 일제통치와 6/25 전쟁에 의해 이들과 같이 가슴 아픈 사연들이 너무나도 많은텐데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만 품은채 살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국가에서 먼저 이들을 찾아서 관심을 가져주고 세상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어야 하는데 점점 역사 속에 묻으려고만 하니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심지어 왜곡까지 하려고 하니 뭐라 할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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