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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의미 있는가 -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1월
평점 :
속물이란 무엇인가?
'돈이 많다면, 외모가 뛰어나다면, 사회적 지위가 높다면, 권력이 강하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더 나은 삶이다. 반대로 돈이 적다면, 외모가 못나다면, 사회적 지위가 낮다면 권력이 약하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볼품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그려낸 위계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래에 놓이는 것이 꿈이요, 포부가 된다. 타인의 권리와 복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타적인 인간이라고 인정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깍아내리는 일이 주된 충동이 된다' (p 16)
'현실에서 사람들은 삶의 지배적 속성에 스포츠 경기 모델을 도입하고, 위계에서 위치가 삶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기계적으로 발화하고, 자신도 타인의 발화에 안절부절못한다. 여기에 짜증이 난 사람들은 지배적 속성이 아닌 것 중에 자신에게 맞는 속성을 골라 그 속성의 위계로 사람들을 줄세우고, 뿌듯해하고, 안달한다.'(p. 24)
사람들은 남과 비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남들보다 위에 서고 싶어하는 욕심, 뒤쳐지지 않으려는 마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이면서 의식적인 자극들 속에서 우리는 매일 타인과 마주한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말했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이 과연 행복인걸까? 그렇다면, 상대적 박탈감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불행인걸까? 이 말이 맞다면, 어쩌면 타인과의 비교는 인간의 본능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빠진다.
현대의 우리들은 속물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연봉, 학벌, 직업, 직장, 외모, 아파트, 지역, 자동차, 의류 등 남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넘쳐난다. 아마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남과 비교하지 말란 말은 머리 밀고 절로 들어가 스님이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미션이다. 특히, 경쟁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고 상대방을 밟고 올라가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남을 의식하게 되는 듯 하다.
(TV속 광고만 봐도 비교 권장 광고들로 넘쳐난다. 옆집 남편, 처남이 차를 바꿨냐며 부러운 표정을 짓는 남자들의 소곤거림 속에서 새차에서 나오는 당당한 남자의 포스를 보여주는 자동차 광고는 단연 최고의 속물 광고다. (이 광고의 자동차가 최근 큰 문제를 일으켜 국제적 이슈를 일으켰는데 어찌나 쌤통이던지...) 그리고 둥그런 테이블에 앉아 피자를 기다리는 여러명의 아이들 중 자신이 쏘겠다며 엄마 카드를 꺼내는 아이의 표정을 보여주는 광고 역시 속물 of 속물광고다)
'사실 비관의 전제에 더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남들보다 더 잘나거나,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있어야 인생에 의미가 있다'는 이상한 명제이다. 즉, 타인의 인생이 보다 가치 업시는 것, 의미 없는 것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인생이 의미있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p. 47)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 중에 자진해서 자신이 속물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쩌면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만큼 박탈감을 가지는 것 역시 속물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남들보다 앞서야지만 인생에 의미가 있다는 착각속에 빠져서 산다. 과정보다는 결과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고 매일 남들의 칭찬을 갈망하며 산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마주칠 때면 자기 자신이 초라해보이기에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약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살다 보면 너무 지나친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이들은 바로 '이상한 사람들'이다. 이상한 사람들은 인간의 약점 중 몇가지를 도드라져 타인과 양립가능한 통상적인 생활이 쉽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상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타고나거나 학습하는 어떤 성향이 부족하다. 그 성향은 바로 강제적인 압박이 없어도 타인의 권리와 이익, 평가를 고려하여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는 성향이다. (...) 예(禮)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의미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도 낮은 사람에게도,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적은 사람에게도, 가장 가깝게 부대끼는 사람에게도 한번 보고 말 사람에게도 언제나 예를 지켜야 한다. 한결같은 예는 바로 상대방이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나오는 기본적 존중의 행위다.'
얼마전 내가 이 회사에 경력으로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상한 메일을 하나 받았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내가 메일을 보냈었고, 그 메일의 내용은 같은 회사의 다른 팀에게 샘플 제작을 요청하는 메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하고 그 팀에게 보내는 첫 메일이었다. 내가 보낸 메일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안녕하십니까 ... 업무로 인해서 샘플 제작을 요청드립니다. ... 용도로 요청드리오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청한 팀의 과장으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았다.
'... 님 메일을 보내는데 있어서 조금 무례하신 것 같습니다. 전화 한통 없이 메일로 이렇게 요청하시는 것은 무례하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필요하시면 직접 제작합시요. 전에도 그렇게 하셨으면서... '
난 내 인생에 있어서 무례하다는 말을 이 때 처음 들어봤다. 무례하다니... 특히나 이 메일은 내가 그 팀으로부터 받은 첫 메일이었고, 솔직히 이 업무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도 못했다. 단지 우리팀의 과장님이 메일을 보내라고 해서 보냈을 뿐, 우리팀과 그 팀간의 업무 관계나 혹여나 사전에 불쾌한 일이 있었다는 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업무라는게 메일을 먼저 보내고, 전화를 걸어서 요청을 할 수도 있는것이고, 전화를 먼저 하고 메일을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군대에서 쓰는 선 보고, 후 조치 같이 선 전화, 후 메일 같은 이런 공식이 업무 메뉴얼 상에 있지도 않을 뿐더러,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니다.
혹시나 내가 먼저 보낸 메일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건 아닌지, 내가 진짜로 무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예의 없게 메일을 보낸 건지, 회사 문화 자체가 틀린건지 확인하고 싶어 주위 사람에게도 물어봤다. 하지만 아무도 내 메일에는 문제가 없단다. 그렇다면, 나에게 메일을 보낸 그 과장이 우리 팀과 업무를 하면서 뭔가 얹잖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말 한번 한 적도 없는 나에게 처음부터 무례하다는 표현을 보낸 건 잘못된 것이다.
메일을 받고 바로 그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작은 불씨라도 감추고 싶은 마음에 '메일 보내기 전에 전화를 생략해서 죄송하다며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갔다.' 화가 나도 어쩔 수 없다. '이런 것이 회사 생활이고 인생인 것을 어쩌겠는가.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하나하나 모두 반응하며 싸우다보면 나만 피곤해진다.' 이렇게 내 자신을 위로하며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몇일 동안, 아니 몇주동안 출근하기 전 머리 드라이하면서 그 메일 내용이 계속해서 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무례'라는 단어가...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 타인이 없을 때도 타인의 시선을 상상하고 감시받으며 살아간다. 그 결과 그의 인생은 무엇을 하더라도 만족스러지 않다. 자신의 신념에 따른 충동과 의무감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은 기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마지막으로 감각적 쾌락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방해한다. (...) 우리가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때 문제가 생긴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꿈꾸며 살고 있다. 나 역시 행복을 목표로 살고 있다. 인간이기에 행복해야 한다는 공식 속에서 최종적인 꿈인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주문 속에서 억지로라도 웃는 연습을 한다. (눈은 그대로이고 입꼬리만 올라가가기에 입만 웃는 것 같다며 와이프는 가끔씩 비웃는다.) 그런데 가끔씩 이런 내가 부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아닌 것 같고 어색하고 여전히 남들 시선에서 벗어나질 못하며,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충동을 자주 느낀다. 돈과 행복과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말하면서도 반대로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느슨하게 정의된 '행복'은 허공의 충동과 의무감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어떤 행위이든 행복을 위한다는 번드르르한 목적으로 쉽게 포장된다. 현실에서 '행복'이라는 포장지는 지배적 속성의 위계를 강화한다. 더 높은 곳을 향하거나 욕구를 줄이고 현재에 만족하라고 조언한다.(...) 행복이라는 포장지는 가치와 절연된 채 위계 안에서 자신을 비하하는 비극적인 삶을 대량으로 낳는다.'
''행복'이 가치와 문법과 연결되어 있을 때면 행복한 삶은 긍정적인 내용을 가진다. 그 때 행복은 가치를 경험하고 의미를 채우는 삶에 수반되는 기분 좋은 현상이 된다.(...)행복을 말하지 않고도 우리는 인생에 관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고통을 완화하고 쾌락을 경험하며, 진리와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나누고, 다른 사람들과 애착과 유대를 형성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p. 116)
행복이란 단어에 묶여 행복이 삶의 의무인 듯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만족, 성취, 기쁨, 희열, 쾌락 등의 단어들을 매개체로 스스로를 최면 속 환각 상태로 몰어놓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자신을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속으로 밀어넣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 행복하려는 의식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는 않은가? 행복이 의무인건가? 등등.. 행복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해 보았다. 행복하고 싶다. 그런데 너무 행복하려 애쓰지 말자. 행복이 꼭 인생의 목적일 필요는 없다. 어렵다....
어려운 내용을 쉽고 잘 읽히도록 글을 쓴 책이 잘 쓴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면 이 책은 결코 잘 쓴책이라 보기 어렵다. 모든 문장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 읽는 내내 너무 고통스러웠다. 중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고 집중하지 못해서 이유없이 핸드폰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하지만 부담을 많이 느낄수록 얻는 것도 많아진다 했듯이, 집중, 이해의 어려움 등으로 정독의 부담을 느낄 수록 얻는 일깨움을 주는 내용도 많았다. 그래서 쉽게 이 책을 덮기 어려웠다. 밑줄 그은 문장이 하도 많기에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책은 다 읽었으니 정리하는 건 이정도로 포기하고 말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