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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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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느끼는건데,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듯 하다. 물론 돈이라는 것이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면 그것에 목 매달 일도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수단은 바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만 화폐일 때의 '돈'이다. 돈을 쫓는 것을 허상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돈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를 쫓는 것을 '나쁘다' 손가락질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상은 눈앞에 있으나 잡을 수 없는 존재를 허상이라 한다. 그렇다면, 눈앞에 잡을 수 있는 것을 잡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을 과연 허상을 쫓는 것이라 손가락질 하면서 나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 내게 '시스터 캐리를 세 단어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나쁜년과 도시와 욕망을 꼽겠다. (그래서 서평의 제목도 그렇게 지었다) 그 첫 번째인 나쁜년 이야기부터 해 볼까. <시스터 캐리>는 이미 100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다. 현재와는 많이 다른 가치관 속에서 태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읽어봐도 소설의 주인공인 '캐리'는 나쁜년이란 소리를 들어도 싼, 기회주의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면 더 나쁜년이겠지만 말이다.) 자신에게 더 나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인 기회주의자인 캐리. 이는 현재 사회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가 즐겨 보는 드라마에서는 (특히 막장드라마라 일컫는 드라마들에서는) 너무도 흔하게 쓰이는 스토리 기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겐 꽤나 익숙한 패턴이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자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옮겨가며 버려버리는, 나쁜 년의 전형적인 이야기.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쁜년이라고 매도하기엔 그녀의 행동들 모두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동거했던 드루에와는 결혼만 전제로 하지 않았을 뿐 애인 사이였기에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나쁠 것 없는 동거였고, (지금의 관점이라는 전제가 꼭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뉴욕으로 건너가 함께 했던 허스트우드는 그가 유부남인 걸 알고서는 나름 그 관계를 끊었었기 때문이다. (후에 허스트우드의 속임수로 함께 뉴욕에 건너가게 된 건 차치하고 말이다.) 나쁜년이 되는 건 배우로 성공하고 나서 허스트우드를 찾지 않은 것 정도랄까. 하지만 그와 결혼으로 묶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의적이 아닌 책임은 질 필요가 없으므로 이 또한 벗어날 수 있는 변명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캐리는 의도하지 않은 나쁜년이었던 것이다. 지나고 나니 나쁜년이 되어 있는 조금은 슬픈 인생.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현재 성공해서 자신의 인생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두번째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도시'이다. 우리나라의 경공업 붐이 일었을 당시가 그랬듯,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여자들의 가장 손쉬운 취업루트인 공장에 캐리 또한 취업해서 일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과는 다른 삶이란 것에 치를 떨며 좀 더 손쉽게 자신의 꿈을 이뤄줄 이를 찾는다. 이를테면 요즘말로 취집이라는 것으로. (취집이라기보다는 동거이지만 어찌됐든) 그 과정에서 막연한 동경만을 가지고 상경한 이들이 겪는 아픔들을 소설은 잘 보여준다. 환상과 현실과의 경계를 처절하게 무너뜨리면서도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이것이 1900년대의 미국의 참모습이다' 알려주고 있다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근무환경은 열악했고, 그에 비한 주급은 형편 없었고, 그럼에도 각자가 가진 꿈을 잊지 못해 현실에 얽매이고, 그렇게 스러지는 젊은이들을 말이다. 도시는 화려함으로 중무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모습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시스터 캐리>의 주목해야할 '도시'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자연주의 소설의 대표격으로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고 하니, 책에서 보여지는 뒷골목은 1900년대의 모습과 가장 비슷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욕망. 책 속에선 대표적으로 캐리의 욕망만을 집중 조명하지만, 그녀의 주변인들 또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능력이 없으면 자신이 꿀 수 있는 만큼의 꿈만 꿔야 하는데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캐리는 늘 큰 꿈을 꾸는 게 문제였다. 그 꿈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캐리를 짓눌렀고, 그녀는 철저히 그 욕망만을 쫓았다. 그런데 그 욕망을 좇은 결과가 나름 썩 괜찮았다. 그것이 반전이라면 반전. 권선징악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결말이 당시에는 찬반 논란이 극명히 일어났다고 하는데, 현실의 눈으로 보자면, '나쁜년이 더 잘되는 법이다'. 아주 슬프게도 이 말은 진리가 되어 가고 있는 듯 하고 말이다. 착하게 누군가에게 양보하고 뒤로 밀쳐지는 것에 소리지르지 않으면 누구든 '얘는 호구구나' 생각하고 짓밟기 일쑤인 세상에서는 나쁜년이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캐리는 원치 않게 나쁜년 소리를 들었고, 운빨에 의한 거지만 어찌됐든 욕망의 성취도 이뤄냈다. 더이상 주급에 어쩌지 못하는 위치가 아닌 게 되었고, 캐리는 결국 자신이 꿈꿨던 도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 한다. 그녀에게 손톱만큼의 도의적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은, 그녀가 지금껏 함께 해왔던 이들에게 그다지 애정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관심을 쏟을 시간이 없을만큼 자신의 위치에서 또다른 욕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욕망이 나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욕망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니까. 그 속에서 자신을 잃느냐 잃지 않느냐는 그 욕망을 따라가는 사람의 몫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손가락질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에 반해 떳떳하다면 손가락질 받는다 해도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캐리는 모든 선택에 있어 수동적이었을지언정, 직접적인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다. 후자 쪽인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휘둘렸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에게 떳떳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욕망을 이야기함에 있어 후회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하고 회상할때 나오는 후회. 그 후회 대신 <시스터 캐리>는 캐리의 또다른 몽상으로 마무리를 맺는다. 혼자가 된 그녀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고는 하나, 앞으로 그녀에게 펼쳐질 날들이 꽤나 분홍빛이기에 외려 그녀의 인생에 나쁠 것은 없어보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마 그녀는 후회라는 것조차 하지 않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듯 하다. 평평한 시대에 툭 던져진 예쁜 자갈돌같은 그녀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를 나쁜년이라 욕하는 사회만이 남을테지. 여전히 도시는 화려하다. 캐리처럼 큰 꿈을 가지고 상경하는 이들이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럼에도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건, 100년 전의 시대 상황으로 읽는 것보다 현재의 시대상황으로 읽는 것이 더 흥미롭게 읽히는 <시스터 캐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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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을 보고 조금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나쁜년이 도시에서 욕망하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저는 사실 마지막에 약간 배드 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는데, 캐리가 그냥 성공하고 끝나는 거더군요. 그래서 당대에는 나쁜X가 나오는 나쁜책으로 치부받았는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저도 캐리에게 모든 책임을 묻기에는 또 너무 가혹한 것 같기도 합니다. 허스트우드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요. 그래서 둘다에게 약간 연민이 느껴졌는지도...리뷰 잘 읽었습니다.

도토리냥 2016-04-02 04:03   좋아요 0 | URL
제목이 너무 직관적이죠?ㅋ 그런데 이런 저런 제목들을 다 갖다 붙여 봤자 제가 느낀 그대로 쓴 게 아닌, 뭔가 그럴듯하게 꾸민듯한 느낌이 자꾸 들어서 세 단어를 적었습니다.

저도 캐리가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당대에는 큰 이슈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나쁜년인데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성공하느냐, 허스트우드만 불쌍한 것 아니냐 등등의 이야기였겠죠. 하지만 지금은 2016년이고, 나쁜년이 되어 성공하라고 부추김을 당하는 시대이다 보니 캐리의 행동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서평의 포커스가 그쪽으로.. 서평은 제가 가장 중점적으로 느낀 부분들 위주로 쓰는 스타일이라서요~

댓글 감사합니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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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월 24일부터 시작한 SBS 수목 드라마 <돌아와요 아저씨>. 이민정의 출산 후 복귀작이라는 것과 정지훈, 오연서, 김수로, 김인권, 최원영, 이하늬, 라미란 등의 탄탄한 배우 라인업과 역송체험이라는 판타지를 들고 로코물 + 복수 + 휴먼이 적절하게 섞인 이야기를 풀어내 화제를 모았다. 물론 현재 시청률 면에서는 상대 드라마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완결이 기대되는 드라마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드라마의 원작이 바로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이라는 일본 소설이다.

 

 

 

드라마는 소설의 기본적인 틀(설정)만 가져갔을 뿐 전혀 다른 느낌으로 재해석 된 듯 하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에는 로맨틱 코미디스러운 부분은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드라마에는 생략된 주요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소설은 드라마보다 훨씬 진중한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역송체험'에 관한 이야기는 때때로 만들어지곤 했다. 산 자는 절대 알 수 없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곳의 존재, 죽음 이후의 세계 등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있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현세로 돌아온다는 설정은 꽤나 매력적인 듯 하다. 한동안 재미있게 봤던 미드 <드롭 데드 디바 Drop Dead Diva>도 마찬가지로 역송체험 관련 드라마였다. <드롭 데드 디바>에는 역송하게 된 인간을 케어하기 위해 수호천사가 등장했고, 최첨단 시스템의 저승이 등장했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에서도 최첨단 중유(저승)가 등장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아사다 지로의 상상력은 꽤나 발칙하고 즐겁다. '관공서'같은 느낌이 물씬 나는 망자들이 모이는 곳, 제복 차림의 직원의 친절한 안내, 그곳에서 자신이 직접 작성한 카드에 따라 분류된 후 할당된 강의실에 들어가 '강습'을 받는 것(자신의 인생을 납득하는 과정), 불교의 다섯가지 계율에 따른 강의실 분류법, 죽기 전에 어떤 죄를 지었든간에 책상 위 빨간색 반성버튼 하나만 누르면 모든 죄를 면제받아 모두 극락으로 갈 수 있는 것, 재심의를 요청하면 역송체험을 할 수 있는 것까지. 뭐하나 새롭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모든 시스템은 낯설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신선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이 계시는 이곳은 현세와 내세의 중간 단계, 흔히 저승이라고 하는 중유(사람이 죽은 후에 다음에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 중유의 기간은 칠칠일, 즉 49일이다.)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언젠간 극락왕생하시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생전의 행동을 제대로 심사해서 강습을 받고, 반성을 통해 중립적인 영혼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모든 사무와 실무 절차를 처리하는 곳이 바로 여기지요. 옛날에는 여기를 '중유청'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국제화 시대라서 '스피리츠 어라이벌센터(SpiritsnArrival Center, 영혼도착소)', 약칭 SAC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49쪽)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의 저승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곳이 아니다. 죽게 되면 SAC까지는 사라수 가로수길이 펼쳐져 있고, 도착하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면서 상쾌한 바람이 시원한 그런 곳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죽음을 인정하고 생전의 일을 반성하면 거의 모든 이들이 극락왕생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굉장히 유들유들한 곳이고 말이다. 하지만 쓰바키야마 과장은 당신들은 정말로 현세에 미련이 없는가? 그렇게 간단한 인생이었나? 자기만 그렇게 극락으로 가 버리면 끝이란 말인가! (69쪽) 라고 외친다. 생각해보면 버튼 하나를 눌러 자신의 삶의 모든 잘못이 리셋되어 극락왕생할 수 있다면 나같아도 버튼을 누르고 훌훌 털어버릴 것 같은데, 쓰바키야마 과장은 자신의 어린 아내와 이제 8살 된 아들, 치매에 걸린 늙은 아버지가 걱정되어 발길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리라이프 메이킹 룸(Relife Making Room)'에서 역송체험 가능 티켓을 받아 자신의 가족들 곁에 돌아가 그들이 살 길을 마련해 주려 한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의 또 다른 주인공인 다케다 이사무라는 야쿠자는 누군가의 대신 총을 맞아 억울하게 죽었다. 조촐하지만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꼬붕(부하)들이 걱정돼 역송체험을 하게 됐다. 마지막 주인공은 네기시 유타라는 어린 꼬마(고작 8살 정도밖에 안 되는)인데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지 꼭 역송체험을 해야 한다고 해 역송체험을 하게 됐다. 결국 세사람은 7일간(장례식을 제외하고 남은 4일간) 역송체험을 하게 됐는데, 가장 중요한 주의사항은 3가지다. 제한시간 엄수, 복수 금지, 정체의 비밀 유지. 정체가 탄로나면 안되기 때문에 죽을 당시의 본인과 정 반대되는 이미지의 몸을 받아 역송체험을 하게 되는데, 머리가 벗겨지고 퉁퉁한 쓰바키야마 과장은 39살의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 커리어우먼으로 변신했고, 몸집이 꽤 있던 야쿠자 다케다는 마르고 지적인 대학교수로, 남자아이 유타는 여자아이 렌코짱으로 변신했다. 이들에게는 역송기간동안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꺼낼 수 있는 환생가방이 하나씩 주어졌다. (역송체험에서 사실 가장 부러운 건 환생가방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들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컨트롤 하는 관리자이자 네이게이터 역할을 해주는 '마야'까지 배정받고 나면 본격적으로 역송체험이 시작된다. 셋은 각자가 원했던 일들을 4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고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삶에 남겨둔 '미련'에 관한 이야기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인가. 자신은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몸이 가루가 되도록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믿어왔다. 그리고 말 그대로 몸이 가루가 되고 나서 겨우 깨달았다. 일을 핑계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들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피와 살을 물려 받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피와 살을 물려준 자식의 고통도 눈치채지 못했다. 즉, 자신은 돈을 버는 기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174쪽)

"우린 모두 쓰바키야마 과장님을 존경했었지. 그분은 매장 과장의 거울 같은 사람이었어. 나는 물론이고 마카미 부장님과 여사원들, 파견직원들, 거래처의 담당자들까지 모두 쓰바키야마 과장님을 좋아했지. 그래서 과장님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매출목표를 무슨 일이 있어도 달성하고 싶었어. 우리가 과장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니까. 백화점맨의 공양은 그것밖에 없지 않을까?" (278쪽)

저승에서 역송체험을 권하지 않는 이유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쓰바키야마 과장은 역송체험을 통해 가족에 대한 자신의 피끓는 사랑을 느끼기도 했지만, 몰랐어도 좋을 법한 이야기도 알게됐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너무 일에만 미쳐 있었던 본인을 뒤돌아보게 됐다.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 이들의 마음도 듣게 됐고, 그렇지만 자신의 삶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됐으며, 완벽하게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게 됐다. 역송체험의 순기능이었다고나 할까. 미련을 완전히 털어버렸다. 그런데 다케다와 유타의 경우는 조금 복잡해진다.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있기에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두 사람도 역송체험을 통해 미련을 떨쳐냈다. 다케다는 자신의 부하들을 모두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고, 유타는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됐다. 그로 인해 무언가를 잃었지만 꽤 후련해 보였다.

 

비밀을 갖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괴롭다는 것이다. 아마 어른들은 다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사람의 인생에는 괴로운 일만 있는 게 아닐까? (253쪽) 

이 세상에 100가지 사랑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중 아흔아홉 가지는 가짜예요. 그것들은 모두 자신을 위한 사랑이니까요. 난 그 100가지 중에 하나밖에 없는 지짜 사랑을 했어요.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이에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필요 없어요. 돈도, 자존심도,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조차도 필요 없어요. (310쪽)

안녕이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안녕이란 말을 할 수 있는 이별은 정말로 슬픈 이별이 아니다. (421쪽)

 

주옥같은 문장들이 가득가득 들어 있는 책은, 역시 아사다 지로라는 말을 생각을 하게 했다. 그의 세심한 시선은 읽는 이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니까. 미련이라는 것은 죽어서까지도 따라가는 아주 몹쓸 것이긴 하지만, 그 미련들에게도 결국 끝이란 존재한다. 그렇기에 역송체험을 한 후 돌아온 이들은 꽤나 행복한 기억들을 안은 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정리가 곧 미련을 터는 것이니. 혹여 저승에 가더라도 굳이 역송체험을 선택해 마음의 정리를 하는 의지를 보이지는 말자. 아무리 생각해도 망자가 너무 적극적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설사 마음이 굉장히 편해지는 일이라도 말이다. 나는 미련을 터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련다. (역송체험 위험해 위험해..)

 

 

참, 쓰바키야마의 아빠로 나오는 '할아버지' 역할이 가장 좋았는데 쓰다보니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한 글자도 적지 않았더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정의롭고 남을 위하는 사람은 축복받아야 마땅하거늘, 인지상정이 되어 안타까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을 남긴다. 책의 '울컥'을 담당했던 할아버지가 등장인물들 중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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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툽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황중환 그림 / 자음과모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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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툽>이란 생소한 단어가 제목인 파울로 코엘료의 새 책이 출간됐다. 이렇게나 낯선 '마크툽'이란 단어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마크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다. (30쪽)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기록되어 있던, 이미 예전부터 내려오던 그런 이야기들이라고. 작가노트에서 파울로 코엘료는 '마크툽'에 대해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마크툽은 교훈집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책이다." ​굉장히 폭넓은 정의이지만, 둘의 이야기 모두 맞다. <마크툽>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두 삶의 벽 앞에서 답을 찾고 있을 누군가에게, 미리 그 벽을 다녀간 누군가가 전한 이야기를 알려주는 책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우리나라에서도 알아주는 인기작가이다. 그가 쓴 여러 책들은 베스트셀러이다 못해 스테디셀러 반열에도 올랐으니 말이다. 그의 대표작은 역시나 <연금술사>겠고 말이다. (<브리다>, <불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등 우리나라의 베스트셀러도 즐비하지만 다 설명하지는 않을테니 패스) 그는 유명한 소설가이지만, 가끔씩 우화집을 들고 오기도 한다. 2013년에 출간됐던 <마법의 순간>이 그렇고, 이번 <마크툽>이 그렇다.

<마크툽>은 브라질 신문 '일루스트라다 지 라 폴라 지 상파울루 Illustrada de la Folha de Sao Paulo'에 매일 연재한 글 중 선별하여 묶어서 출간된 책이다. 개인적으로 파울로 코엘료가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 그리고 친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인상 깊은 에피소드들을 담았다. '교훈집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책'이란 설명은 그렇기에 가능하다. 앤서니 멜로는 자신의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내가 하는 일은 직조공이 하는 일과 같다. 직조된 면과 아마포의 품질이 좋은 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 나도 동감이다. (저자노트, 13쪽) 책을 읽다보면 많이 익숙한 이야기들도 등장한다. 그 모든 것을 저자 본인이 직접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앤서니 멜로의 서문을 인용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마크툽> 속에 수록되어 있는 글들은 많은 부분 독자가 무릎을 탁 칠만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읽기 쉽게 한 작가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도 중간중간 많이 등장하기에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는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느끼게 된다. 본문에 등장하는 게 신이든 스승이든 그 깨달음을 얻는 데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진리만 추구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은 절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해만 계속 쳐다보는 사람이 결국엔 눈이 멀 듯이 말이다. (27쪽)

 

인생은 사이클 경주와 비슷하다. 이때 목표는 각자 개인의 전설을 완수하는 것이다. (중략) 각자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경주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 고독과 미지의 커브 길에서 튀어나오는 뜻밖의 사건들, 사이클이 유발하는 물리적 어려움과 맞서야 한다. 그러다보면 그렇게 수고하고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정말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렇다. 수고할 가치가 있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174쪽)

 

꿈을 좋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오래된 습관들을 버려야 하며, 어려움과 실망을 겪을 수도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대가는 개인의 전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치르게 되는 대가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218쪽)

 

위의 이야기들은​ 내가 무릎을 탁 쳤던 이야기들 중 몇 개만 추린 것이다. (아래의 이미지들을 찍은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책임을 회피하면 안된다는 것을 태양을 바라보면 눈이 부신 것에 비유하는 것은 되게 쉽고 새로웠다. 인생을 경주와 비교했던 글도 그렇다. 무엇보다 '그렇다. 수고할 가치가 있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유독 눈길이 갔다. 경주가 마음대로 가지 않는다고, 혹은 자신보다 앞서 달리는 이들이 있다고 의욕을 놓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수고할 가치가 있으니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말이다.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굉장히 높은 우리나라에겐 누군가가 꼭 해줬으면 하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골라봤다.

 

 

이야기 몇 개만 봤는데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지 않나?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해서 무엇 하겠느냐? 절대 걱정하지 마라. 걱정할 시간에 너의 운명과 네가 갈 길에 주의를 기울여라. 너에게 맡겨진 빛의 검을 잘 다루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배워라. 친구들, 스승들, 적들이 어떻게 분투하는지 잘 살펴보아라." (130쪽) "우리는 비웃음과 무관심 밑에 우리의 선한 행동들을 감춘다. 마치 사랑이 연약함과 동의어인 것처럼." (253쪽) 스승님이 이야기해주는 것들은 직접 말을 전해 듣는 느낌이 들고, 화가 파블로 피카소나 작가 쇼펜하우어, 작곡가 넬슨 모타 등의 유명인들의 일화를 소개받을 땐 옛날 이야기를 듣는 느낌도 든다. 중간 중간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오게끔 하는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훈계하거나 교훈들을 모아놓았다는 느낌보다는 누군가가 이미 겪은 그 많은 것들을 정리해서 적어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물론 신과 관련된 신실한 이야기들도 많이 등장하므로, 누군가를 믿고 있는 이들이 읽는다면 더없이 금상첨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크툽>의 표지에도 속지에도 '열쇠'가 그려져 있다. 그 의미가 아마도 잠겨 있는 자물쇠를 풀수 있는 열쇠를 이 책 속의 이야기들에서 찾으란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앞으로 나아가기 벅찰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당연한 결정임에도 고민하게 될 때 들춰보며 누군가의 경험들을 발판 삼아 자신만의 열쇠를 찾으라는. 가끔은 너무 당연한 것도 잊어버리거나 지나칠 때가 있으니 말이다. 결국 자신의 자물쇠에 맞는 열쇠는 자신만이 만들 수 없으므로, 열쇠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이 이야기들은 조금의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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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륙기 1 블랙 로맨스 클럽
은림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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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계는 늘 신비롭다. 현실과 묘하게 맞닿아 있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고, 그렇다고 현실과 다르다고 밀쳐버리기엔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흥미롭기 때문이다. '다름'에서 오는 '호기심'을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작품일 수록 글을 읽어가며 글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다. (글 속에 쉽게 빠져들 수 없는 판타지라면 읽는 게 고역일 테고 말이다.) 2권, 800쪽이 넘는 분량인 <나무대륙기>는 장편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를 읽어본 이들이라면 알고 있다시피, 작가가 구축한 상상의 세계 속 뼈대가 튼튼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엉망이 되어버리고 캐릭터들은 본래의 목적을 잃을 수 있다. 뼈대의 근본은 작가가 만든 상상력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얼마나 구현시킬 수 있느냐의 능력이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무대륙기>는 켜켜이 이야기를 쌓으면서 기본 뼈대를 끊임없이 다져놓는다. 뼈대를 덧대는 작업은 그것들이 익숙해지게끔 하는 하나의 장치이자 노력이고, 눈에 얼추 익을때쯤엔 완전히 그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조금은 낯선 이야기들 속에 풍덩 빠질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을 테다.


사실 황금가지의 '블랙로맨스 클럽' 시리즈로 <나무대륙기>가 출간됐다고 했을 때 기대를 했었다. '블랙로맨스 클럽'은 기존 로맨스 소설과는 다른 조금 특이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소설들을 소개하는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WAKE>도 그랬듯이 온전한 로맨스 이야기라고 하기엔 담고 있는 내용들이 참신하다고 할까. 그리고 역시나.

 

 

계급이 있는 '인간'이 사는 세계, 그 곳에 형태가 없는 채로 살고 있는 심연에서 태어난 '어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는 빛에서 태어난 '옥',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용'까지. 판타지적 요소들은 등장인물들에서부터 드러난다. 각 분류별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채 의도치 않게 서로가 얽혔다. 굉장히 많은 비밀들을 갖고 있고, 대체로 그 사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탐욕'과 '사랑'에 관한 것들이다. 이야기는 그들의 사연이 하나씩 밝혀질수록 생각지 못한 곳으로 흘러가고 알고 있던 것들이 깡그리 바꿔버리곤 한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설명하고 있으니, <나무대륙기>는 일종의 '운명'에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우연이란 건 없어. 아무데도. 그건 필연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야. 우리가 세상의 조각이듯이. 그러니까 만약에 우연이 일어났다면 인과를 찾아내야 해. (나무대륙기 1, 302쪽)


어쩌면 가장 궁금해 할지도 모르는 비밀에 대해 살짝 귀띔 하자면(일명 반전이라고 한다), <나무대륙기> 속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신분' 혹은 '모습'의 변화가 많다는 것! 그렇기에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자주 오간다. 어떤 인물의 시점이건 그건 변하지 않는다. 사실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다 갑작스럽게 과거를 소환하는 이야기 방식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진다. 과거라는 표시도 없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데 읽어보면 이건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몇 번 되돌아가 읽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다보면 그렇게 과거를 오가는 것이 오히려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과거를 보다 쉽게 분리할 수 있게 된다. (학습의 효과랄까) 작은 따옴표의 대화체가 있는 부분은 거의 과거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중일테니 참고하길.

 

 

 

<나무대륙기>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서 펼쳐진다. '서미'와 '무화'라는 두 소녀가 주인공이다. '서미'는 한 소녀는 녹옥공주의 딸이고, 한 소녀는 서민(혹은 천민)의 딸이다. 두 소녀는 생긴 것도 비슷하고 나이대도 비슷해 자매처럼 쌍둥이처럼 함께 자랐다. 유폐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녹옥공주를 대신해 유폐된 지역 바깥에서는 서민엄마가 두 소녀를 맡았고, 서민엄마가 일을 나갈 땐 녹옥공주가 돌보거나 둘이 들판으로 나가 놀거나 했다. 서미는 무화의 단 하나뿐인 친구다. 무화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나무대륙기 1, 324쪽)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둘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평화로웠던 소녀들의 인생은 서민쪽 소녀가 홍등가로 팔려가던 날 있었던 끔찍한 사건이 있은 후로 180도 변하였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 사건 이후 서로를 굉장히 의지하며 오히려 둘 사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 정도. '서미'는 녹옥공주의 딸이자 반공주로 살아가고, '무화'는 서민의 딸이자 서미의 그림자 무사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반전은 있고, "네가 나를 위해서 뭘 하건, 그건 모두 너 자신을 위한 거야. 무화."(나무대륙기 1, 211쪽) '너는 달이고 그 애는 별이다.' 서미는 오른손을 움켜줘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했다. 별이 내는 빛을 반사할 뿐. (나무대륙기 1, 214쪽) ​두 문장을 남기며 이들의 설명은 이쯤에서 마친다. (나무대륙기 1권의 표지는 무화, 2권의 표지는 서미이다)

 

무화의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인 어둔 '밤', 그리고 무화의 왼팔인 '어스름', 천재 연금술사 '아라킨'은 모두 '어둔'이다. 밤과 어스름은 무화와, 아라킨은 서미와 얽힌다. 적공자 '반하', 그와 함께 다니는 무사 '단풍'은 무화와 서미 모두와 얽히며, 일찍 죽는 단풍 대신 반하는 <나무대륙기>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무화와 서미 둘 모두와 깊은 연관이 있다. 해적 '야르스'와 '카르파'는 대체로 무화와 얽히며 그들의 보물인 '클로버'를 찾는다. 악공 '수련'은 '연제군'의 과거와 현재에 얽히며, '마노'는 잘 등장하지 않는 듯 하나 굉장히 중요한 축을 맡고 있으며 무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렇게 얽히지만, 이들 중에서는 동일인물이 몇 있다. 또한 자신의 본모습으로 변화하는 이들도 있다. 그건 책을 직접 읽으면서 찾아보는 걸로. (등장인물들을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조금씩이라도 하자니 너무 길어지고, 그렇다고 아예 안하자니 좀 뭔가 비는 것 같고. 이래저래 고민하다 누가 누구와 얽히나 정도만 정리했다. 더 복잡하게 얽히지만 그것은 서평에서는 차치하기로 한다.)

 

 

서미와 무화는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여자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여자들은 말하는 재산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나무대륙기 1, 34쪽) 같은 상황이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여자의 위치란 그저 종족보존과 혼인을 위한 재산 정도로밖에 치부되지 않던 목국에 살았다. 여자들이 목소리를 자주적으로 낼 수 없는 시대. 권력을 가지려면 자신이 하나의 수단이 돼 누군가에게 시집을 가 획득해야만 하는 시대. 그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소녀들의 발버둥은 작은 파장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내는 듯 했으나, 큰 물줄기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과거는 분석하고 증명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거예요. 인간은 시간을 존재케 하지만, 그런 순간은 아주 짧죠. 그러니까 과거는 과거인 채로 두고 오늘을 살아요. 그래야 내일이 오죠. 아니면 영영 어제에 갇힐 거예요. (나무대륙기 2, 124쪽) 이라 이야기하면서 희망이란 누군가에게 기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거다. 얼른 가. 너무 늦기 전에. (나무대륙기 2, 360쪽) ​다른 결과를 맞이하려 애썼던 노력들은 물거품이 되어 그렇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결국 예언자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예언을 지키고자 예언 실행을 막고자 하던 이들의 절박함도 끝을 맞이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나무대륙기> 속 '운명'과 현실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운명을 봤거든. 사람들은 운명을 기다려. 하지만 그걸 만나는 행운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고, 막상 코앞에 다다라도 감당할 용기를 내는 사람도 거의 없어. 나는 이미 한 번 운명을 놓쳤고 두 번 후회할 생각은 없어."

"운명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아?"

"마주치면, 알게 돼. 모른다면 운명이 아니지." (나무대륙기 1, 382쪽)

<나무대륙기>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우리는 정해진 운명으로 걸어간다. 과거에서 벗어나 어제에 갇히지 않기 위해 걷고 또 걸어도 결국 또 다른 길을 찾기보다는 정해진 길을 걸어간다'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온 힘을 다해 그 운명을 막아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얘기다. (무화와 서미가 그렇게 바꾸려 했으나 바꾸지 못했듯이.) 정녕 정해진 것을 막을 방법은 없는지 더 나은 결론은 없는지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전수전을 겪었다 이야기해도 좋을만큼 만신창이가 된 무화는 그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선택으로 더 나은 내일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생각해봤다. < 나무대륙기>에서 이야기하는 운명이라는 것은 그저 정해진 길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져 버릴 거라고 피지 않는 꽃은 없어. 죽을 거라고 삶을 멈추려는 생명은 없지. 맺어지지 못할 거라고 사랑이 멈춰지진 않아. (나무대륙기 2, 375쪽) 새로운 선택은 또 다른 운명을 낳고, 그 운명은 새로운 길로 인도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운명이란 녀석은 끝날 때까지 결코 안도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니 멈출 수 없다. 비록 막다른 벽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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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와 라라의 초콜릿 데이 - 숲 속의 꼬마 파티시에 루루와 라라 시리즈
안비루 야스코 글.그림, 정문주 옮김 / 소담주니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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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데이가 초콜릿과 함께 자신의 묻어뒀던 마음을 고백하는 날이라는 건 아마 아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날이 아니던가. 그런 이벤트날과 딱 어울리는 책이 나왔다. 바로 소담주니어에서 나온 <루루와 라라의 초콜릿데이>는 책이다. 책 속에서는 발렌타인데이라고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초콜릿 데이'라는 단어로 그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 책의 내용자체는 초콜릿처럼 달달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또한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하는 동물친구들을 등장시켜 아이들이 직접 읽으면서 상황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스토리 구조를 가졌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겨울이 막바지로 향해 갈 즈음 루루와 라라의 베이커리에서는 달콤한 초콜릿을 잔뜩 만들어 놓는다.

바로 '초콜릿 데이' 때문이다. 하지만 루루와 라라에게 쿠키를 사러 오는 동물 친구들은

그 '초콜릿 데이'가 굉장히 낯설다.

루루와 라라가 말한 대로 내일은 '초콜릿 데이'예요. 특별한 날이지요.

자신의 마음을 초콜릿에 담아 선물하니까요. 게다가 여자들만 초콜릿을 선물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겠지요. (14쪽)

 

이 설명을 들은 하얀토끼 밀리는 자신의 숲에도 초콜릿 데이가 생겼으면 좋겠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잿빛토끼 피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초콜릿데이에 대한 설명을 듣자마자 '자신의 숲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고

루루가 재빨리 밀리가 좋아하는 토끼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 밀리와 피터는 네 잎 클로버를 교환하고 함께 먹었다고 했다.

그것은 약혼식을 올린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동생 알리는 둘이 약혼한 거라 확신했다.)

그때 이후로도 밀리는 피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루루는 또 금방 알아챘다.

그래서 지금부터 초콜릿 데이가 숲에 생겼음을 알리고 초콜릿 만들기에 들어갔다.

 

 

 

초콜릿 만들기 테마에서는 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여러가지 초콜릿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보며 만들어 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듯 한데, 실제로 만드는 방법이 너무 어렵지 않으니 함께 만들어 보면 좋을 듯 하다.

 

본래대로라면 초콜릿 녹이는 것을 중탕으로 해야 해 불도 써야 하고,

쿠키도 함께 구워내려면 오븐 사용법도 알아야 하지만,

아무래도 책의 대상이 아이들이다보니 전자레인지 몇 번이면 뚝딱 초콜릿을 녹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또한 쿠키 대신 과일이나 초콜릿 장식 등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써 놓음으로써 더 복잡한 과정도 생략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초콜릿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어른의 입장일 뿐, 책 속의 과정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재미를 느낄 것이다.)

 

 

알고보니 티피는 숲 속 토끼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은 인기남이었다.

그래서 티피가 가장 원하는 초콜릿이 어떤 것인지 알아봤더니 '직접 만든 수제 초콜릿'이라고 대답했다 했다.

그래서 결국 밀리가 생전 처음 초콜릿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열심히 만들어 봤지만 가게에서 파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난감했다.

그때 루루와 라라의 스승님인 슈가 아줌마의 아이디어로 인해 색다른 초콜릿이 탄생할 수 있었다.

 

"모양이 안 예뻐도 직접 만든 정성만큼은 전해질 거야." (50쪽)

(슈가 아줌마가 남긴 이 문장은 아이들에게 쿵 가 닿을 수 있는 문장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조금 더 쉬운 방법으로, 독특한 느낌의 초콜릿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더불어 예전의 약혼식을 떠올리게 하는 네 잎 클로버의 모양으로 포장을 하는 방법 또한 보여줬다.

꽤 많은 과정을 거쳐 밀리가 직접 만든, 누군가만을 위해 만든 초콜릿.

밀리의 마음을 담뿍 담은 초콜릿은 티피에게 잘 전달되었을까?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는 책을 직접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이미지가 꽤 행복해 보이는 것을 보면 대충 짐작도 가능하다는 것?

 

 

받는 사람도 해옥해지는 달콤한 디저트의 세계,라는 문장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을 직접 읽을 아이들에게는 '누군가와 나눈다' 혹은 '선물한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를테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함께' 무언가를 먹거나 나눈다는 것에 대한 기쁨, 이 책을 통해 아이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디저트를 먹는 것만 좋아할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을 즐겼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렇게 숲속 친구들까지 짝이 있는 마당에, 나는 뭐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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