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그리고 당신을 씁니다 - 어린 만큼 통제할 수 없었던 사랑
주또 지음 / 더블유미디어(Wmedia)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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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보다 일러스트에 먼저 눈이 갔던 건 2018년 들어 처음이다. 막상 표지는 눈여겨 보지도 않았으면서, 글을 읽어나갈수록 자꾸 옆에서 눈길을 뺏는 일러스트에 결국 가던 길(책 읽기)을 멈췄다. 어두컴컴한 일러스트 속 눈 밑이 시뻘개진 남자. (얼핏 보면 잘 보이지도 않을만큼 일러스트가 어두워서 얼굴을 책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서야 그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취해 보이기도 하고, 울고 난 다음으로 보이기도 하고, 상기돼 보이기도 한 얼굴의 남자가 한 명만 덩그러니. 남자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무기력해 보였다. 매가리가 하나도 없어서는, 그저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워보이기도 했다. 작가는 얼굴만 크게 클로즈업하기도 했다가 배경까지 전부 그려넣기도 했는데, 책 속 그 많은 일러스트들은 겹치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근데 그 다양한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짠하다'라는 한 단어만 떠올랐다. 그리고 일러스트를 지나 글을 읽으니 그 짠함이 배가되었다.

차마 알지 못했다. 네가 빌미가 되어 나의 밤이 이다지도 소란스러워질 거라고는. (39쪽)
자꾸만 너의 얼굴이 보고 싶다. 똑바로 너의 두 눈을 마주할 자신도 없으면서. 사랑을 마셨나, 이 밤에 취했나. 머리는 어지럽고 시야가 분명하지 못한데 그 와중에 자꾸만 네가 선명하다. (61쪽)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끝내 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일은. 나의 몸의 수분을 다 내보내고 자처해서 말라가는 허튼짓과도 같다. (78쪽)

제 마음 하나 제대로 꺼내놓지 못하며 망설이는 화자여서다. 너의 다정함에 가슴 떨리고, 혼자만의 상상 속에 설레고, 용기 한 자락 낼 수 없어 수없이 망설이고, 그렇다고 마음을 접을 용기도 갖고 있지 않은 글 속 어떤 화자가 말이다. 그런데 작가가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러스트 속 그림이 남자여서인지 화자도 자꾸 남자로 읽혔다. 일러스트 속 묘한 짠함과 글 속의 짠함이 합쳐지니 최강 짠함이 탄생했다. 화자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울 것같은 표정으로 취해있는 일러스트 속 남자인걸까. 그나마 여기까지는 짝사랑이어서 이정도다. 이후엔 이별 후라 화자의 자존감이 땅바닥까지 떨어져 있음이 와 닿는다.

무얼 할까 하다가 / 그냥 잠만 잤던 거 같아 / 네가 없으니까 내가 없더라고 (172쪽)
네가 무책임하게 던지고 간 / 우리의 시간들에 엉킨 나는 / 여태 그걸 끊어내지 못하고 / 그렇다고 해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 참, 뭐가 이리도 아쉬워서는. / 참, 뭐가 이리도 소중해서는. 
(참, 남겨진 주제에 미련하기까지 해서는. 201쪽)

글을 읽으면서 작가가 글센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목이 본문과 이어진다거나 하는 발상이라든지, 마치 가사를 쓰듯 앞에 나온 문단을 다시 반복해 끝을 맺는다든지, 이것을 저것과 엮어 글을 쓴다든지 하는 것들이 말이다. 하지만 글의 센스같은 것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래도 글의 감성이다. 1부 짝사랑, 2부 이별 후, 3부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모습, 이렇게 세 파트로 나뉜 글들 속엔 짠한 화자가 끊임없이 속마음을 꺼내놓는다. 나는 이렇게 힘들어. 나한테 그때 왜 그랬어? 나는 왜 이렇게 못났니. 나는 왜 그때 그렇게 못했을까? 고독으로 걸어가는 우울을 본 것 같아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20대의 사랑이야기'라고 해서 가볍게 집어들었는데, 읽는 내내 무거웠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마음은 원래 무거운거였지. 사랑은 쉽지 않고, 아플 땐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지. 뭐 그런 생각들을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사랑은 계속 되었으면 한다. 사랑이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고, 되돌아보면 언젠가는 빛 바랜 추억으로 마주할 날이 오는 것을 이제 나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당신을 그리고 당신을 씁니다> 속 화자는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그도 곧 알 수 있을테다. 반짝거리는 마음이 어느 순간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싸늘해진 공기만큼 누군가가 그리운 밤, 나도 너의 행복이 소원이 되는 날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소원 안에는 너의 행복이 포함되어 있었다.(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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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진작 배울걸 그랬네 - 인문학적 통찰의 힘을 길러주는 일주일 간의 서양철학사 여행
장즈하오 지음, 오혜원 옮김 / 베이직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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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다닐 때 배운다. 윤리와 사상이라는 모호한 과목(개인적인 생각이다)에서 소크라테스가 어쩌고 플라톤이 어쩌고 칸트가 어쩌고. 사는 데엔 다 쓸모 없다고, 이런 거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고 꽤 투덜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에게 전혀 해 끼친 적 없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투덜거렸던 건 물론 시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시험때문이 아닌데 자발적으로 내가 철학 관련 교양책을 읽고 있을 줄.

여전히 대한민국엔 인문학 열풍이 분다. 쉽사리 식지 않는 이 열풍에 인문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라기보다는 뒤처지지 않으려 관심을 두고 찾아보게 되는 느낌이 든다.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또 다른 시험공부라는 느낌이 든다랄까. 사람은 참 안 변해서 "이제와서 보니 철학이 아주 재미있다!"라는 얘기는 쉽게라도 꺼내기 힘들다. 이런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초단기로 철학을 훑어볼 수 있는 책이 등장했다. (뚜둔!)

<철학 진작 배울걸 그랬네>는 서양철학 관련 인문교양 책이다. 철학의 'ㅊ'자도 모르는 생초보도 읽으면 대략의 개념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철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름하야 '1주일 1학과 시리즈' 중 1번 타자 되시겠다. 개념부터 발전과정, 인물과 이론, 철학이 영향을 끼친 학문까지 중요한 내용들을 간단하게나마 짚어뒀다. 중요한 모든 내용이 담겨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인 장즈하오가 생각하는 서양철학의 중요 부분들은 많이 담으려 노력한 듯 하다. 내용이 깊지 않아서 철학에 관심이 있다거나 한다면 다른 책을 봐야 할테지만, 철학이 마냥 어렵고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선택해서 볼 만하다. (본문 구성이 꼭 교과서처럼 생겨서 오랜만에 교과서를 편 느낌도 들고 그런다.) 책에 등장하는 내용 하나하나가 깊지 않지만, <철학 진작 배울걸 그랬네>는 서양철학의 과거부터 지금까지를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큰 덩어리들을 작게 작게 만들어 하나로 잘 꿰어놓은 느낌. 

요약하기 좋은 '화요일 : 기원과 발전' 부분을 잠깐 살펴보면, 이 부분은 서양철학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수많은 과정들을 함축시켜 담아 놓았다.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기 이전엔 그리스 신화가 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 우리가 이름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3명의 아테네 철학자가 서양철학의 기초를 닦았다 → 대표적으로 스토아학파가 유명한 헬레니즘 시기는 기쁨과 행복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했다 → 신학과 결합한 중세철학 시기는 그리스 철학이 몰락하고 교부철학에서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했다 →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된 근대철학은 과학과 결합을 하기도 하고 그리스 철학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 현대철학은 다양한 철학이 등장하던 시대로,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이란 낯익은 이름이 등장한다. 학창시절엔 한 부분 한 부분을 꽤나 공들여 여러가지를 곁들여 설명하기도 해서 그 분량들이 심히 방대했었는데, 그 큰 덩어리들을 작게 만들어놓으니 구분하기가 퍽 용이해졌다. 어렵다는 느낌도 많이 희석됐다. 점점 파고들어가면 어렵겠지만 <철학 진작 배울걸 그랬네>는 철학의 기초를 이야기하는 책이므로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글씨도 커다랗고, 주석을 달아놓아 설명을 덧붙여놓기도 하고, 올컬러로 되어 있어 첨부되어 있는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하기에도 좋고, 철학자들의 한마디들이 여기저기 등장하기도 한다. 소소한 재미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러니 어렵다고 지레 겁먹지만 않으면 된다. <철학 진작 배울걸 그랬네>를 손에 드는 단 한 가지 마음가짐은 철학을 좀 만만하게 보는 마음 정도다. 그리고 이만큼의 기초만 일주일에 훑어낸다면 퍽 괜찮다 할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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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고 더 깊게 십진분류 독서법 - 지식의 스케일이 달라진다!
장대은.임재성 지음 / 청림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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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창에 '독서법'이라 검색해 보면 <000 독서법>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 수십 권이 찾아진다. 오프라인 서점에 가더라도 쉽게 손 닿는 곳에서 독서법 관련 서적을 여러 종류 찾을 수 있다. '효율적으로 독서하는 법'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서다. 지식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과 욕심은 더해가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시간은 한정적이고 개개인이 가진 능력도 전문가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도 일단 <000 독서법>이란 제목이 눈에 띄면 일단 걸음을 멈추고(혹은 마우스를 쥔 손을 멈추고) 살펴보고는 한다. 뭐라도 내 독서생활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이번에 <십진분류 독서법>을 손에 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번엔 어떤 독서법이려나, 그동안의 독서법들과는 뭔가 다르려나. 호기심을 가졌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십진분류 독서법>은 책의 시작부터 기존의 독서법과는 접근방법이 달랐다. 왜냐?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책도 아닌데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부터 등장하기 때문이다. 1장인 '인공지능 시대에 왜 인간지능인가'에서 작가는 생활 곳곳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고 미래에는 많은 인간 노동력을 대신할 인공지능으로 인해 인류는 특이점의 시대를 맞았다 주장한다. 단순한 암기나 머릿속에 담긴 지식, 즉 '아는 것'만으로는 인공지능을 따라갈 수 없다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작가는 누군가 알아낸 지식을 주워 담는 학습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기반으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창출해 내는 원천 능력이 필요하다.(28쪽)고 이야기한다. 이는 그동안 읽었던 어떤 독서법에서 제시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이었다. 호기심을 꽉 붙잡아두는 인상적인 시작이었다.

<십진분류 독서법>은 그동안 수많은 독서법이 실패한 이유는 숲이 아닌 나무를 봤기 때문이라 주장했고, 취미독서(취미생활로 즐기는 독서)에서 성공독서(책에 '성공독서'를 콕 집어 정의를 하지 않으나, 읽으면서 생각해 본 바로는 '책을 읽고 과정이나 계획한 어떤 것을 이루는(진보시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로 나아가야 한다 주장했다. 그렇기에 여러가지 독서법을 일러준다. 책 읽는 동기를 부여하는 독서법 (동기부여 독서법) / 삶의 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독서법 (전인독서법) / 도서관의 책 분류법에서 착안, 여러가지 분야의 책을 10~2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엿보는 독서법 (십진분류 독서법) / 십진분류 독서법의 연장선, 수용된 지식과 정보를 글쓰기로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덧입혀 창조적인 산물을 만드는 훈련을 하는 독서법. 하나의 주제에 대해 질을 높여가며 배움 (박이정 독서법) / 박이정 독서법의 심화단계. 지식의 수용력을 키우는 문법, 지식의 관계성을 세우는 논리력, 지식의 수용과 이해를 말과 글로 표현해 재구성하는 표현력 3가지로 이루어진 독서법 (트리비움 독서법) 까지. <십진분류 독서법>은 총 5가지의 독서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 독서법들은 각각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로 점점 심화 독서법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든다. (물론 중간과정이 아니니 건너 뛰어도 상관은 없다.) 최종적으로 <십진분류 독서법>이 추구하는 독서는 책의 지식만 아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재구성해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는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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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 - 개화와 근대화의 격변 시대를 지나는 20세기 초 서울의 모습 표석 시리즈 2
전국역사지도사모임 지음 / 유씨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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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선택한 계기는 단순했다. 표지의 전차가 많이 낯익어서다. 내가 이걸 어디서 봤더라,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 이거 드라마에서 봤는데?" 요즘들어 가장 집중해서 봤던 드라마인 <미스터 션샤인>에서 매 회차마다 등장해 자주 봤었던 전차였다.(드라마에선 주인공의 유모격인 함안댁이 '쇠당나구'라고 불렀다.) 전차의 위쪽에 붙어 있는 '표호산'이란 단어가 낯설어서 유심히 봤던 기억이 남아 있는 터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의 작가진도 <미스터 션샤인>을 언급했다. 드라마 덕분에 많은 이들이 대한제국의 관심을 갖는 지금, 이 책이 대한제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면서 말이다.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는 말 그대로 '표석'이 주인공이다. 표석이 지니고 있는 장소성과 시간성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연구활동이 책으로 엮여 나온 것이고. 일단 책을 쭉 훑어보다 책의 맨 뒤쪽에 '표석 찾아보기'가 부록처럼 붙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책 속에 등장한 표석들이 사진으로 찍혀 쭈욱 첨부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00 터'의 형식으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현재는 그 자리에 있지 않지만 그곳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지표. 아마 광화문 근처 어디를 걸어다니다가 표석을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도 눈여겨 보지 않았기에 서울의 곳곳에 표석들이 자리잡고 있는 게 꽤나 신선했다. 

사실 하나의 표석이 이야기하는 것은 많지 않다. 적혀 있는 글자도 많지 않고, 역사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은 표석이 무얼 의미하는 지 알기도 쉽지 않다. 낱개의 표석만 본다면 그렇다. 하지만 이 표석들이 지닌 각자의 이야기를 잘 연결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면 말은 달라진다. <표석을 따라 한성을 거닐다>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표석들을 연결해 길을 만들었다. 조선 얼리어답터 고종의 전기, 전차, 전화와 관련된 표석들을 한데 묶는다거나(부강몽 길), 근대 신문들인 대한매일신보, 독립신문, 황성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창간 사옥 표석들을 한데 묶는다거나(신문사 길), 만해 한용운이 머물렀거나 몸 담았던 곳들의 표석들을 한데 묶는다거나(심우장 길) 하는 식으로. 각자 가지고 있던 이야기들을 큰 주제로 한데 모아 정리했다. 

사료에서 찾은 장소와 관련된 이야기, 문헌 속에서 찾은 당대의 분위기나 생각들, 장소의 번영과 몰락, 그 당시 장소가 가지던 의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해 가던 장소의 의미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보니 꼭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보자. '태화관 길'의 경우에는 현종 후궁의 처소인 순화궁이 이완용의 별장이 되었다가 다시 기생 요릿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장소는 같으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던 장소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던 길이다. '서양의학 길'은 길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한성에 서양의학이 뿌리내리던 과정을 그렸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운 근대식 국립병원 제중원부터 현재의 연세대학교병원이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등의 전신들에 관한 이야기, 현재에도 많이 먹는 부채표 까스활명수의 동화제약이 동화약방으로 시작해 판매금을 독립운동에 보탰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를 알 수 있다.

물론 이야기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다루는 것은 아니니 엄밀히 말하자면 제목은 틀렸다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표석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표석들로 그 당시의 사회상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 사진자료들과 미처 알지 못했던 신선한 내용들은 책읽기를 더 즐겁게 만들어준다. 모르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흥미롭고, 알고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혹시 내가 모르는 내용이 등장하진 않을까 흥미롭고.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라 권해보고 싶은 책이다. 왜 전작이 우수 콘텐츠로 선정되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후속작인 이 책도 우수 콘텐츠로 선정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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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 김제동의 헌법 독후감
김제동 지음 / 나무의마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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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이 단어를 들으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나는 작년, 아니 재작년에 참 많이도 들었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생각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도 세트로 떠오른다.) 대한민국이 제대로 나아가고 있지 않음에 분노했던 나날들, 그래서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주권이라는 것을 다시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2016년 10월을 지나왔음에도 나에게 헌법 1조 2항은 가깝고도 멀다. 헌법이라는 말 자체가 갖는 무게감과 묘한 거리감을 상쇄시킬 만한 그 무엇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여기, 대중에게 아주 친숙한 김제동이라는 방송인이 헌법 관련 에세이를 펴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라는 기다란 제목을 달고. (저자는 '말 잘하는 법'이란 제목을 내세웠지만출판사의 반대에 부딪혀 사라졌다는 비하인드가 책 속에 적혀있다)

서문에서 제동 씨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헌법 37조 1항이 마치 연애편지의 한 구절 같다 생각했다고. 헌법 37조 1항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인데 이게 마치 "내가 여기 안 적어놨다고 해서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처럼 보였다고 말이다. 마치 사랑을 가득 담아 쓴 연애편지의 마지막에 추신으로 또 덧붙이는 사랑고백 같은 느낌을 받았단다. 이 부분에서부터 나는 신선함을 느꼈다. 헌법을 딱딱한 법으로만 한정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앞으로 어떤 글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재미있겠다란 생각도 했다. 제동 씨는 이 책이 에세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무거울지도 모른다고 적어뒀지만, 서문에서 느낀 신선함이 본문에서 계속 이어진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본문을 읽어나갔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김제동이 느낀 헌법'이다.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헌법이 낯설기만 한 나같은 사람들에게 '헌법은 전혀 어렵지 않아요'라고 온 몸으로 설명하는 책이다. 물론 제동 씨가 이해하고 책 속에 적어둔 헌법 해석이 무조건 옳은 해석은 아니다. 제동 씨 나름대로 여기저기 물어보고 고민하며 적은 거겠지만, 원래 헌법이 의도했던 해석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약간의 물꼬만 터두어도 사람들이 헌법에 갖는 선입견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킬 수 있을 거다. 제동 씨의 말마따나 '누구나 헌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우리가 헌법의 진짜 주인이 될 수 있'는 거니까, 조금이라도 헌법을 아는 것이 나쁠 리 없다. 게다가 비타민, 빼빼로, 방탄, 판관포천천 등 헌법을 쉽게 기억하라고 닉네임도 붙여뒀으니 어느 정도는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지만 처음 예상과는 좀 다르게 헌법 해석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김제동식으로 해석된 헌법보다는 에세이스러운(?) 내용들도 많이 담겨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5:5 정도가 아닌가 싶다) 결국 헌법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거니까, 제동 씨가 살면서 겪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들 속에 헌법을 조금씩 녹여냈다. TV고려(..)를 보는 가게 할아버지와의 대화, 2016년부터 2017년까지 광장에서 겪었던 여러 이야기, 종북과 좌파와 우파와 정치 이야기, 민주주의, 정치참여 등등 김제동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들이 제동 씨의 말투로 적혀 있다. 읽고 있노라면 어느 방송에서 봤던 제동 씨의 목소리가 음성지원되는 듯이 따뜻하고 정중하고 위트있게. 헌법이란 낯설고 무거운 주제를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읽어내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간중간 곁들여진 일러스트들은 마치 이모티콘을 달아둔 것처럼 아기자기하고, 제동 씨의 위트와 만나 독자에게 즐거움을 준다. 또한 헌법 관련 조언을 얻기 위해 국내외의 헌법 전문가들과 인터뷰한 내용도 실어 너무 가볍지 않은 책을 만들려 노력한 모습도 보인다. 법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헌법 관련 에세이를 낸다면 이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꽉꽉 눌러 담은 느낌. 정성이 느껴져 또한 좋았다.

물론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다. 제동 씨와 내 견해가 다른 부분도 엄연히 존재하니까. 다른 것은 다른 대로, 동의하는 부분은 동의하는 대로. 어떤 이야기를 읽어 나가는데 헌법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면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를 권하고 싶다. 어렵지 않고, 소소한 위트로 재미도 있고, 잘 읽히고, 생각도 하고, 선입견을 타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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