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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 - 처음과 끝의 계절이 모두 지나도
동그라미(김동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평점 :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극단적인 추위가 몰려온 12월.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읽기 좋은 책은, 아무래도 따뜻했던 어떤 날을 떠올리게 해주는 달달한 책이 아닐까. 그래서 <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란 제목을 가진 책을 선택했다. 아직 사랑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사랑을 하고 있다는 얘기 같아서 제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왜인지 표지가 달달함과는 거리가 있는 느낌이었지만, 선택을 바꾸진 않았다. (선택할 당시만 해도 작가가 어떤 성향인지 잘 몰랐거든.) 차가운 바람과 함께 책이 도착했고, 둘러보려 책을 펼친 내가 처음 맞닥뜨린 건 작가의 말 속 첫 단어 '미련'이었다.
어라? 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동그라미라는 작가를 검색했다. 동그라미를 검색하니 '동그라미 글귀'가 첫번째 연관 검색어로 뜬다. 연관 검색어인 '동그라미 글귀'를 눌러봤다. 수많은 블로그가 주르륵 뜬다. 사람들은 대체로 작가의 글에 공감, 상처, 위로, 감성 등의 단어들을 붙였다. 내 예상은 오늘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 이 작가는 위로 전문이었구나. 처음 계획을 조금 수정한다.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읽기 좋은 책은, 누군가를 혹은 나를 위로하기 위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손이 닿는 곳에 귤도 가져다 놓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이 책엔 마침표가 많이 없다. 정말 많이 없다. 처음엔 뭔가 잘못된 건줄 알았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물론 책을 읽어나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조금 낯설긴 하지만 한글을 주언어로 쓰고 있다면 마침표 없이 글이 주욱 적혀 있다해서 의미가 달라질리 없으니까. (띄어쓰기를 잘못한 게 아니고서야.) 적게는 1~2개, 많게는 15개까지 마침표가 존재하지 않는 글들이 이어진다. 한 호흡이 너무 길어 글을 조금 천천히 읽게 되지만, 이도 점차 익숙해졌다. 책을 다 읽고 작가의 말로 다시 돌아가고서야 알았다. "이 책 속 모든 문장에 마침표를 찍게 될 어느 날까지 사랑하고 아파하려 합니다."
처음 작가의 말을 읽을 때만 해도 이 문장을 그저 작가의 글로만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문장은 그냥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침표는 끝맺음이다. '모든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건 아마도 완전한 끝맺음. 더이상의 사랑은 없다 확신하고 완전한 정착을 이루기 전까지는 계속 사랑하려 한다는 일종의 다짐이자 선언이다. 아프더라도 그 아픔을 온전히 겪어내면서 말이다.
반점은 찍었지만, 온점은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문장이 완성되려면 아직 더 많은 종이가 필요하다.(91쪽)
마침표의 다른 말이 온점이다. 본문 속에서 작가의 말과 비슷한 문장을 찾았다.
(작가의 속 뜻이 내 예상과 비슷한 느낌을 받아 조금은 뿌듯하다.)
의미를 찾아서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해서라도.
의미가 없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24쪽)
낮과 밤, 공허와 우울의 경계는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90쪽)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는데 닿지 않는다 지나치게 고요했던 탓일까 조금만 훌쩍여도 내 세상은 전부 소란스럽다. (90쪽)
어떤 우울은 너무 가벼워서
나도 모르게 행복이라 착각하게, 사랑하게 돼. (215쪽)
<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는 처음 예상대로 일상 속 위로는 아니었다. 제목에 '사랑'이 괜히 들어간 게 아니었다. 여기에 적힌 글들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였고, 온전히 아픔을 겪어내며 적어낸 문장들이었다. 물론 부치지 못하고 서랍 속에 잠든 기억이고, 가 닿지 못하는 한숨들이긴 하지만. 너를 그리워하다 이별의 화살을 나에게 돌려버리는 아픈 나날들, 그 속에서 온마음을 다해 아파하는 화자를 보고 있노라면 달디 단 귤이 달지 않았다.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만 하던 화자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최저점에 발을 딛는다. '어쩌자고 당신을 사랑해서 어쩌자고 이렇게 많은 문장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잘가라고. 이 책 속 모든 이야기가 너였으며, 내가 너를 이렇게나 많이 사랑했노라고. 책 속에 적힌 수많은 아픔들과 그 아픔들이 지났을 시간들. "시간이라는 약이 언젠간 진통제가 되어 무뎌지게 해줄 때가 있겠죠 그때까진 잊을 수 없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이고 충분히 그리워하고 아파합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잊어도 봅시다. (237쪽)" 책 어딘가에 적어뒀던 다른이에게 다짐처럼 던지는 이 문장들이 결국 혼자 되뇌는 다짐이었다.
어떻게 이별했는지보다는 이별후 맞닥뜨리게 되는 감정들을 가감없이 풀어낸 책. 최저점에 닿기까지의 지난한 마음들을 기록한 책. 문장으로 만들어진 아우성들이 여기저기 가득 들어찬 책. 이만큼 했으면 됐다라며 자신의 사랑에 납득할 수 있게끔 성실히 아파한 책. <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는 아무래도 푸릇하게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보다는 이별의 상처에 아파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누군가의 최저점에서 동질감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 책 속 화자는 이제 최저점에 서 있다. 최고점으로 언제 올라간다 장담할 수 없지만, 다시 시작점에 서게 됐으니 준비는 이미 충분하다. 이제는 그만 아파했으면 좋겠으니 새로운 시작을 조용히 응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