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안는다 - 오늘을 일상을 순간을 그리고 나를
심현보 지음 / 미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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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울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볍게 안는다>라는 책을 선택한 이유 중 80%는 이 구절 때문이다. 저자의 정보, 책이 가진 느낌, 글의 분위기 모든 것을 그냥 넘겨버려도 좋을 만큼, 어딜 보나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이 구절 때문이다. 왜 그럴 때 있지 않나.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글을 읽고 생각을 하던 와중에 덜컥, 마음에 뭔가 걸린 듯 책장을 넘길 수 없을 때. 특별할 것도 신기한 것도 아닌 아무래도 좋을 그런 평범한 문장(혹은 단어) 앞에서 무너져내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 내게는 "그냥 울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그랬다.

'울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라는 제목을 가진 글의 내용도 별 다른 내용은 없다. "한바탕 시원하게 울고 났다면 그걸로 됐다. 울 만하니 울었고 울어야 하니 울었다. 한 번쯤 꼭 울어야 비워질 만큼 정성껏 살아왔단 얘기니까." 잘 살펴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라서 그냥 스쳐 지나갈 법한 이야기들이지만, 어느 때 누군가에 닿게 되었을 때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공감'이라는 감정을 공유하는 책. <가볍게 안는다>는 그런 울림을 가진 책이다.

처음 책 선택의 이유도 공감이다 보니, 책에서 유독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저자의 노래들처럼.

* 가끔씩 외로움이란 건, 왠지 모르게 불편한 누군가의 얼굴 같다. 이유 없이 서먹하고 어색한 누군가의 얼굴. 이리 피하고 저리 외면하다 보면 점점 더 불편해지는 누군가의 얼굴.(87쪽)

*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과 그게 허물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같을 리 없다. 그러니 실망하지는 말기로 하자. 그건 원래부터 그런 거니까.(74쪽)

* 물 밖 일상에서도 가끔 잠수가 필요할 지 모르겠다. 심호흡을 하고 잠시 나 자신을 느끼고 다시 회복호흡을 하는 조용한 과정.(177쪽)

<가볍게 안는다>의 모든 글들은 조근조근 저자의 노래들을 닮았다. 본인은 날카롭고 예민하다 이야기하는데, 사람 살다보면 그정도의 예민함은 모두들 갖고 있는 지라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평범했다. 하루의 끝에서 맞는 외로움, 모든 것이 잘 안 풀리던 무력함, 복잡한 마음의 위로, 나 자신을 다독이는 안정, 모든 것이 평범해서 공감갔던. 어쩔 수 없이 글에는 글 쓴이의 성격이 묻어나오기 마련이라서, 온 몸의 가시를 뾰족하게 내세우고 한껏 날카로워져 있지만 실상은 누군가와 가볍게 안는 것 같은 포근함을 꿈꾸는 저자를 만나는 시간이 즐거웠다. 나쁜 말보다는 예쁜 말을 더 찾으려 노력할 것 같은 저자의 글들이 가진 착함은 읽는 내내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만도 않아서 읽기 참 좋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는 가장 확실한 준비는 지금 현재에 완전하게 몰입하는 것.(261쪽)

리우의 카니발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려 현실에 완전한 몰입을 꿈꾸는 유약함마저 공감할 수 있는, 기분 좋은 <가볍게 안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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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7일 완성 손글씨
유제이캘리(정유진) 지음 / 진서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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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뿐인데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하는 손글씨와 캘리그라피에 관심이 많았다. 손으로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끄적거리는 걸 잘 하는 특성상 나와 잘 맞아 보이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시중에 나와 있는 그 많은 책들을 아무리 잘 읽어봐도 내가 원했던 글씨체와 구도가 잘 잡히지 않았다. 쉬운 말로 풀어 설명해 놓았다지만 생초보들이 쉽게 따라쓰긴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 <왕초보 7일완성 손글씨>라는 책 제목을 봤을때 진짜?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말 초보들이 따라 할 수 있는 손글씨 팁들을 담은 책이라면 나처럼 헤맸던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무엇보다 '꺾임 없는 직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유제이 서체는 한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도 직선으로만 쓴 것에서 착안, 발랄하고 예쁜 느낌을 살려 왕초보에게 딱인 글씨체' 라고 저자가 자신의 글씨체를 자신있게 설명한 것을 보고 마음이 확 기울었다. 그동안의 책들과는 뭔가 다를지 몰라!

캘리그라피는 붓펜, 납작펜, 사인펜 등등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무궁무진하다.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이니 쓸 수 있는 게 뭐든 재료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책에선 초보들이 가장 사용하기 쉬운 것은 지그펜(납작펜의 한 종류)이라며 다른 것보다는 이 펜으로 연습할 것을 권했다. 일단 이 책은 캘리그라피 책이기도 하지만 악필 교정을 위해 선택했을 사람들도 있으니 뭔가 꾸밈 위주의 잔재주를 알려줄 느낌은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나. 선긋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였다. 그런 다음엔 자음과 모음을 각각 연습하는 시간을 가졌고, 저자는 특히나 ㅂ의 경쾌함을 위해 따로 페이지를 할애하기도 했다. ㅂ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글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작가의 말에 뭐가 그리 다른가? 싶다가도 경쾌함을 가진 ㅂ을 보고 나서부터는 이전의 ㅂ을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웠다.

뿐만 아니다. 자음과 모음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있어줘야 글씨가 예쁘게 표현된다는 것, 자음이 너무 크면 글씨가 어려보이기 때문에 글씨가 어려보인다면 의식적으로 자음의 크기를 줄이려고 해 나가야 한다는 것 등 초보자들이 쉽게 놓치는 부분들을 꼭꼭 짚어주고 있어 책을 읽어나감에 있어 더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왕초보 7일완성 손글씨>는 워크북 개념이다. 실제로 워크북이 따로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말이다. 직접 손으로 책에 따라 써 보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한글을 배우는 마음으로 시간을 들이고 노력한다면 적어도 악필이라 누구 앞에 내놓기 창피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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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쉬어가세요 - 행복한 나무늘보로 사는 법
톤 막 지음, 이병률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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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오늘도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앞다투어 빠름을 자랑하는 세상, 빠르지 않으면 도태된다 여기는 세상. 벌써 인터넷은 5G가 상용화되기 바로 직전이라 하니, 앞으로는 세상이 얼마나 더 빨라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따라갈 수는 있을까 조금은 걱정스럽기까지한 빠르기-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이유는 이 무시무시한 속도에 뒤처지면 안된다는 강박같은 것 때문일 거다. 뒤처지는 것은 패배한 것이라는 인식. 나는 그다지 시류에 편승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가끔씩은 뒤처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인식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뜻이다. 아등바등 따라가려 노력하는 것도 그 때문일 테고. 그런데 여기, 느리게 하루 하루를 채워가며 행복해하는 이가 있다. '나무늘보로 산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천천히 쉬어가세요> 속 나무늘보가 그 주인공이다.

사실, 나무늘보는 디즈니 영화 <주토피아>의 '플래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무늘보의 진짜 성향을 미국 교통국의 엄청 느린 일처리를 풍자하는데 사용해 많은 웃음을 줬었다. (물론 이건 영화로만은 알아채기 힘든 미국 문화이기에 나중에 리뷰들을 찾아보면서 알았던 내용이긴 하지만.) 딱히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책 속 동글동글한 나무늘보는 "천천히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운을 뗀다. "시간도 삶도 세상도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데, 해야할 일은 끝이 없고, 생각은 로켓처럼 질주를 한다"면서. 잘 보면 나무늘보의 걱정들 같은데, 세상이 너무 느리게 흘러간다는 이야기만 빼면 딱 내 이야기다. 할 일은 끝이 없고 생각은 많고 가끔은 만사가 귀찮고 짜증나고. 이럴 때 <천천히 쉬어가세요> 속 나무늘보가 내놓은 해결책이 바로 '순간에 집중하며 내버려두기'다.

햇빛을 받으며 걷고, 누군가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고, 먹을 때의 시간을 즐기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걸을 땐 걷는 것만 생각하고.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순간에 집중하세요. 잘 안 돼도 괜찮아요. 늘 좋은 결과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잠깐 쉬어가도 괜찮아요."
나무늘보는 평상시에도 쉽게 할 수 있는 명상법도 전해준다. 뭔가 거창하게 자세를 바로하고 경건해야 하는 명상법이 아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 호흡에만 집중하며 생각들을 흘려보내는 명상법이다. "한순간만이라도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네요. 그러니 그냥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어요. 결국 다 지나가버릴 테니."

그러니까 나무늘보의 명상법대로라면 복잡한 생각들을 기어코 정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간에 맡겨 두는 것이다. 생채기 난 마음을 억지로 추스려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치유될 수 있도록 조금은 천천히 지켜봐 주는 것이다. 수 많은 물음표들을 뒤로 하고 잠시 쉼표를 찍어 마음을 쉬게 하는 것, 나 자신을 잃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내는 것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나무늘보의 명상법이 쉽사리 와 닿지만은 않았는데, 책 속 짧은 구절들을 여러번 곱씹어 읽어봤더니 이런 결론이 나왔다. 이 책을 선택하게 만든 계기였던 옮긴이 이병률 시인은 '세상 모든 문제는 사람만이 열 수 있고, 사람이 가진 마음이란 건 세상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다'라는 말을 했다. 내 마음을 잘 지켜내는 것만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천천히 쉬어가세요>는 마음의 중요성을 나무늘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속도는 제각각 다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겠지만, 내가 그 변화를 무조건 쫓아가며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남들이 빨리 저만치 멀리 뛰어간다 해도, 나는 내 속도대로 조금은 천천히 쉬기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걸어가면 그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 속에 <천천히 쉬어가세요> 속 나무늘보를 들여 키워보기로 했다. "자신을 억누르지 않는다면 인생은 멋진 모험이 될 거예요."라고 말하는 나무늘보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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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음 Touch
양세은(Zipcy)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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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책에 대한 많은 정보도 필요없었다. 이 책을 선택해야 하는 구실 같은 건, 그저 표지에 있던 한 장의 그림 그거면 충분했다. 사실 나는 글 취향은 좀 까다로운 편이라, 재고 따지고 살펴보고 나서도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한 문장도 발견하지 못하는 책도 존재한다. 그에 반해 그림은 조금 덜 까다롭다. 나름대로 예쁘고 좋고의 기준이 있긴 하지만 글만큼은 아니란 소리다. 그렇다해도 그림 취향 쪽도 그리 눈이 낮은 게 아니었는데, <닿음>은 진짜 한 눈에 반했다. 인스타그램에서 그렇게나 핫하다던데 나는 왜 몰랐던가! 같은 생각을 할 정도로.

살면서 '닿다'를 이렇게나 오래 생각해본 적이 있나 싶다. 일상 속에서 즐겨 쓰던 단어인데 계속 곱씹다보니 낯설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무언가와 닿는다. 사람과도 동물과도 물건과도. 항상 무언가와 닿아 있는데 인식을 못할 때가 많다. 늘상 닿아 있으니까. 음악을 계속 듣는 나는 이어폰과 오래 닿아 있고, 손엔 많은 시간 키보드와 핸드폰이 닿아있다. 대체로 무생물이 닿아 있어서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닿는다는 건 좀 더 특별한 느낌을 준다. 따뜻한 온기를 전해받는 것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들이. <닿음>은 그런 온기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특별한 닿음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닿음>은 he story, her story 두 가지의 시선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여자와 남자의 시선. 그래서 <닿음>의 part.1에서는 하나의 장면을 두 개의 시선으로 연달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너의 팔'이라는 주제에서 남자는 '네가 만져주면 나도 몰랐던 곳들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고, 여자는 '꼬옥 끌어안은 너의 팔이 참 따뜻하고 듬직해서 문득 이 팔에 가득 안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라고 이야기한다. 비슷한 상황에서의 다른 생각. 남녀 서로의 입장을 모르고 있던 건 아니지만, 그림과 함께 이야기를 보다보면 좀 더 마음이 가는 느낌이다. 

"<닿음>은 연인과 살이 맞닿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직접 그린 이의 설명이니 당연한 얘기겠지만, <닿음>은 에필로그 속 작가가 정의한 이 한 문장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냥 보면 단번에 사로잡힐 것이다. 서로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며 눈에서 꿀을 뚝뚝 흘리는 남녀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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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 - 처음과 끝의 계절이 모두 지나도
동그라미(김동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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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극단적인 추위가 몰려온 12월.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읽기 좋은 책은, 아무래도 따뜻했던 어떤 날을 떠올리게 해주는 달달한 책이 아닐까. 그래서 <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란 제목을 가진 책을 선택했다. 아직 사랑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사랑을 하고 있다는 얘기 같아서 제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왜인지 표지가 달달함과는 거리가 있는 느낌이었지만, 선택을 바꾸진 않았다. (선택할 당시만 해도 작가가 어떤 성향인지 잘 몰랐거든.) 차가운 바람과 함께 책이 도착했고, 둘러보려 책을 펼친 내가 처음 맞닥뜨린 건 작가의 말 속 첫 단어 '미련'이었다.

어라? 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동그라미라는 작가를 검색했다. 동그라미를 검색하니 '동그라미 글귀'가 첫번째 연관 검색어로 뜬다. 연관 검색어인 '동그라미 글귀'를 눌러봤다. 수많은 블로그가 주르륵 뜬다. 사람들은 대체로 작가의 글에 공감, 상처, 위로, 감성 등의 단어들을 붙였다. 내 예상은 오늘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 이 작가는 위로 전문이었구나. 처음 계획을 조금 수정한다.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읽기 좋은 책은, 누군가를 혹은 나를 위로하기 위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손이 닿는 곳에 귤도 가져다 놓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이 책엔 마침표가 많이 없다. 정말 많이 없다. 처음엔 뭔가 잘못된 건줄 알았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물론 책을 읽어나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조금 낯설긴 하지만 한글을 주언어로 쓰고 있다면 마침표 없이 글이 주욱 적혀 있다해서 의미가 달라질리 없으니까. (띄어쓰기를 잘못한 게 아니고서야.) 적게는 1~2개, 많게는 15개까지 마침표가 존재하지 않는 글들이 이어진다. 한 호흡이 너무 길어 글을 조금 천천히 읽게 되지만, 이도 점차 익숙해졌다. 책을 다 읽고 작가의 말로 다시 돌아가고서야 알았다. "이 책 속 모든 문장에 마침표를 찍게 될 어느 날까지 사랑하고 아파하려 합니다."
처음 작가의 말을 읽을 때만 해도 이 문장을 그저 작가의 글로만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문장은 그냥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침표는 끝맺음이다. '모든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건 아마도 완전한 끝맺음. 더이상의 사랑은 없다 확신하고 완전한 정착을 이루기 전까지는 계속 사랑하려 한다는 일종의 다짐이자 선언이다. 아프더라도 그 아픔을 온전히 겪어내면서 말이다.

반점은 찍었지만, 온점은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문장이 완성되려면 아직 더 많은 종이가 필요하다.(91쪽)
마침표의 다른 말이 온점이다. 본문 속에서 작가의 말과 비슷한 문장을 찾았다.
(작가의 속 뜻이 내 예상과 비슷한 느낌을 받아 조금은 뿌듯하다.)


의미를 찾아서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해서라도.
의미가 없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24쪽)

낮과 밤, 공허와 우울의 경계는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90쪽)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는데 닿지 않는다 지나치게 고요했던 탓일까 조금만 훌쩍여도 내 세상은 전부 소란스럽다. (90쪽)

어떤 우울은 너무 가벼워서
나도 모르게 행복이라 착각하게, 사랑하게 돼. (215쪽)


<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는 처음 예상대로 일상 속 위로는 아니었다. 제목에 '사랑'이 괜히 들어간 게 아니었다. 여기에 적힌 글들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였고, 온전히 아픔을 겪어내며 적어낸 문장들이었다. 물론 부치지 못하고 서랍 속에 잠든 기억이고, 가 닿지 못하는 한숨들이긴 하지만. 너를 그리워하다 이별의 화살을 나에게 돌려버리는 아픈 나날들, 그 속에서 온마음을 다해 아파하는 화자를 보고 있노라면 달디 단 귤이 달지 않았다.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만 하던 화자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최저점에 발을 딛는다. '어쩌자고 당신을 사랑해서 어쩌자고 이렇게 많은 문장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잘가라고. 이 책 속 모든 이야기가 너였으며, 내가 너를 이렇게나 많이 사랑했노라고. 책 속에 적힌 수많은 아픔들과 그 아픔들이 지났을 시간들. "시간이라는 약이 언젠간 진통제가 되어 무뎌지게 해줄 때가 있겠죠 그때까진 잊을 수 없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이고 충분히 그리워하고 아파합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잊어도 봅시다. (237쪽)" 책 어딘가에 적어뒀던 다른이에게 다짐처럼 던지는 이 문장들이 결국 혼자 되뇌는 다짐이었다. 

어떻게 이별했는지보다는 이별후 맞닥뜨리게 되는 감정들을 가감없이 풀어낸 책. 최저점에 닿기까지의 지난한 마음들을 기록한 책. 문장으로 만들어진 아우성들이 여기저기 가득 들어찬 책. 이만큼 했으면 됐다라며 자신의 사랑에 납득할 수 있게끔 성실히 아파한 책. <아직 사랑이 남았으니까>는 아무래도 푸릇하게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보다는 이별의 상처에 아파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누군가의 최저점에서 동질감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 책 속 화자는 이제 최저점에 서 있다. 최고점으로 언제 올라간다 장담할 수 없지만, 다시 시작점에 서게 됐으니 준비는 이미 충분하다. 이제는 그만 아파했으면 좋겠으니 새로운 시작을 조용히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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