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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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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이라는 한 단어, 덩그러니 환하게 불을 밝힌 집 한 채가 그려져 있는 표지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이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나락으로 떨어진 -눈을 떠보니 온 몸을 움직일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채 '기적적으로' 깨어난- 이야기가 진행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홀>은 '오기'라는 남자 주인공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이다. 인은 증발한 채 덜렁 과부터 등장해 당황스럽긴 하지만, 찬찬히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장 어떻게 삶은 한 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을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 (28쪽) 을 잘 기억해 둬야만 한다.

 

일단, 주인공 오기는 아내와 함께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강원도의 어느 여행지로 가는 비 내리는 심야의 고속도로, 앞차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추락한 교통사고로 오기는 '스스로 신체 통제권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40대 후반의 안정적인 '정교수' 라는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던 그의 인생인 완전히 뒤바뀌었다. 간병인이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몸을 돌려줘야 했으며, 유동식을 호스로 몸 안에 밀어 넣으며, '그저 살아있기만 할' 뿐이다. 주인공은 깨어나자마자 자신만 살아남았음을 괴로워했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았던, 그래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모든지 하기를 동의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혼자 살아남았으니 얼른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그래서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주인공 부부 둘 사이의 문제는 전혀 없었던 거라 생각했다. 오기의 기억 속 이야기로만 보자면 둘은 대학원생활을 하던 때 서로 사랑을 했고, 각자 원하는 진로를 따라 길이 갈라졌지만 서로의 앞날을 위해서 조금은 불편해도 참고, 결혼 생활 중에도 많은 결정을 아내가 하도록 양보하는 모습을 회상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이 둘에게 문제가 있었을거야."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오기가 기억하는 것은 기억의 전부가 아닌 파편이었다. 아내와 함께 지냈던 20년 간의 시간들 중 극히 일부의 좋았던 기억들. 오기는 사고로 인해 뇌에도 손상을 입었고 그렇기에 기억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기에게는 여러 기억들이 돌아왔다. 특히나 부부가 심혈을 기울여 사들였던 집(타운 하우스)에 돌아와서는 더 많은 기억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죽은 아내의 어머니, 장모와의 기묘한 동거까지. 이야기는 점점 숨이 꽉 막히는 상자 안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듯 했다.

 

장모는 결혼생활 내내 오기와는 불편한 관계였다. 하지만 딱히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불편함이었던지라 살면서도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터였다. 하지만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오기에게는 동아줄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장모의 행동이 좀 수상하다. 자신을 돌봐주러 오는 입주 간병인, 물리치료사, 자신의 옛 동료들이 입을 모아 '집 앞 마당에 큰 구덩이가 있다'는 것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위, 큰 구덩이를 파고 있는 장모, 사위와 함께 여행가다 죽은 딸. 이런 관계 내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란 아주 심플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기의 입장에서만 묘사되는 행동들은 제약이 많다. 병원과 집. 공간은 이 둘 밖에 등장하지 않고, 회상씬들에 '공간'은 중요하게 차지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들만 오기의 머릿속에서 회상될 뿐이다. 제약이 많은 주인공의 상황은 독자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끔하고, 실제로 위협을 당하지 않음에도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이야기가 진행된다. 주인공의 회상장면이 많아질수록 더없이 좋은 사이처럼 보였던 주인공 부부의 모습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파국까지.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탄력을 받아 속도감이 붙기 때문에 술술 읽힌다. 술술 읽히는 데 반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감은 여전하니, 다음에 어떤 내용이 등장할지 갈수록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래야죠. 죽어버렸으니까요. 다 죽었지요, 전부 다…… 다 죽었어요. 기껏 애지중지 키워놨는데, 그만 어이없게 죽어버렸어요."

잠시 쉬었다가 장모가 말을 이었다.

"살려야지요, 내가. 내가 다 살려야죠."

(중략)

"연못이요? 정원에요?"

"산 걸 풀어놔야죠. 살아서 꼬리도 치고 숨도 쉬고 헤엄도 치고 그러는 걸 둬야지요."

"잉어 같은 거요? 근사하겠네요."

"산 게 근사합니까? 추접하죠. 악착같이 그 좁은 구멍에서 살려고 해댈 텐데…" (149쪽)

 

내가 불안감을 느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부터다. 묘하게 어긋한 것 같은 장모의 행동이 거슬리기 시작했을 찰라, 집에 병문안을 온 동료들과 장모가 나눈 대화에서 그 '연못'이라는 것에 들어갈 '잉어 같은 거'는 잉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사십대란 모든 죄가 잘 어울리는 나이'(77쪽) 라는 구절이 담긴 시라든가, '인간이 어떻게 속물이 되는지, 그 관찰기라고도 할 수 있어'(182쪽) 라고 이야기하는 회상 장면 속 아내의 말이라든가. 불안한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양 모든 것을 털어놓는 오기의 모습 속에서, 처음에 언급했던 구절 "어떻게 삶은 한 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라는 구절은 이미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한 순간에 뒤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고. 아마 작가가 의도한 제목 <홀>이라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그동안 파두었던 공간들이고, 그 공간들이 모여 커다란 홀을 만들었을 때 자신이 만든 그 홀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

 

열린 결말이다. 오기가 어찌되었는지까지는 친절히 알려주지 않는 소설이지만 생각해 볼 점은 많은 것 같다. 사십대라는 나이에 저지를 수 있는 많은 죄들이라는 것, 그리고 <홀>이라는 제목 자체와 집 앞 마당의 '홀'의 상관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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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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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되게 뭔가 있을 것 같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처음 보는 소설인데 되게 낯이 익었다. 그런데 그럴 수 밖에 없다. 이런 내용들은 그동안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많이 다뤄졌던 이야기들이니까. 아침드라마나 TV소설 드라마 등등에서 막장 설정을 소거하면 딱 이런 내용들이 넘치고 차일만큼일테다. 그런데 또, 자수성가해서 번듯한 기업을 이루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도 들을 수 있다. 현재는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의 위치에서 빠진 지 꽤 된 우리나라지만,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우리도 저 위치에서 지금으로 올라왔으니 이런 이야기가 낯선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책을 읽으면 자연히 알게 된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국가가 작가가 태어난 파키스탄인지 인도 어디쯤인지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작가는 나라 이름을 굳이 지명하지 않음으로써 '국가' 속에 여러 국가를 소환하게끔 만들어뒀다. 그래서 우리나라, 지난 시간들 속의 대한민국을 소환해도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 

 

조금은 특이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책이 바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이다. 자기계발서의 형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인데, 작가인 모신 하마드는 처음부터 이렇게 이야기한다. "혹시 지금 자기계발서를 쓰고 있는 사람이 들으면 섭섭한 얘기겠지만, 자기계발서라는 말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11쪽) 라고. 그러니까 자기계발서의 형태를 빌려 소설이 진행되는 이 책은 처음부터 자기계발서를 향한 디스의 시작인 것이다. 물론 뒤에 자기계발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며 자신은 '자기'라는 말의 모호함이 어떨 땐 즐겁다며 이 책을 시작하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이 책은 자기계발서처럼 '어떻게 하면 된다'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공식은 각 챕터의 제목으로 달려 있다.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은 총 12가지다. 도시로 이사가고, 교육을 받고, 사랑에 빠지지 않고, 이상주의자를 멀리하고, 고수에게 배우고, 스스로를 위해 일하고, 폭력사용을 마다하지 않고, 관료와 친구가 되고, 전쟁 기술자들을 후원하고,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고, 출구 전략을 마련하면 된다고 말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제목이 의미하는대로 소설 속 주인공인 '당신'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행동해 나가면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뒷받침한다. 특이하게 이 책은 '당신'이라는 존재만이 등장하며,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현실의 각박한 이야기들은 꽤 상세히 그러나 덤덤히 언급하고, 주인공 '당신'이 저지르는 조금은 잔인한 일들 또한 꽤나 사무적으로 전달한다. 이런 방법은 독자로에게 이 소설이 소설이라고 느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예시로 느껴지게끔 한다. 이걸 2인칭 소설이라고 이야기하던데, 꽤 신선한 소설 진행방법이었다. 

 

나는 책들 중에서 '당신'이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1장 분량 정도의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의 글들에 눈이 더 많이 갔다. 사실을 잘 표현해낸 이야기들은 묘한 공감이 아닌 격한 공감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따금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자기계발서의 애매모호함이 좋다던 첫번째 챕터의 이야기도 그랬고, 상상한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105쪽)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던 6번 챕터도,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로부터 망명을 떠나온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야기를 쓰고, 또 그 이야기를 읽는 것은, 망명자 신분으로부터의 망명자가 된다는 뜻이다. (221쪽)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던 12번 챕터도.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는 방법이란 건, 일생을 열심히 앞을 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결론이 등장한다. 일평생 열심히 살다보면 더럽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정도다. 그것도 떠오르는 아시아, 그러니까 개발도상국의 한정이라는 조건이 붙고 말이다. 그래서 이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은 자기계발서라는 것들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무슨 법칙인 양 설명해 놓기도 할 때가 있을 때처럼 조금은 허무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가 이렇게나 담백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면서 덧붙인다. 부자가 되는 것은 이제는 생존이라고 말이다. 충분히 부자였음에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버리며 생존에 위협을 받았던 '당신'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 삶이 무의미하거나 가치 없는 건 아니고, 충분히 아름답고 값진 인생을 살아낼 것(책 뒷표지)이라는 위안 또한 함께 전해준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잘 살고 있다. 비록 앞만 보며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면서 힘들게 걸어가고 있더라도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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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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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은 내가 추천한 책은 아니었지만 신작들을 훑어볼때 한 번 보기는 했었다. (다만 내가 추천하지는 않았을 뿐.) 그러니 내게는 낯설 이유까지는 없었지만 또 그렇게 친근할 이유도 없는 책이었다. 그런데 <지극히 내성적인>이라는 이 책 제목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지? 어디서 들었지?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기억을 더듬어가다가 생각났다. 아, '빨간 책방'. 코너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김중혁 소설가가 진행하던 그 코너에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 코너는 아무래도 내가 빨간책방을 듣지 않은 이후 새로 생긴 코너 같은데, (간단하게 코너 소개를 하자면) 책을 쓴 작가가 직접 자신의 글을 육성으로 읽어주는 코너다. 늘 빨간책방은 라디오처럼 흘려들어버릇 해서 질문이 어떤 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거 하나는 기억난다. 제목이 <지극히 내성적인>인 이유는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라는 단편소설의 제목에서 가져온 것인데, '살인의 경우'라는 단어가 소설집의 성격을 부여해버리는 것 같아 뺐다는 이야기. 제대로 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이야기했던,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소설 제목의 이유는 그랬다.

 

이 책 <지극히 내성적인>은 최정화 소설가의 단편 모음집이다. 호흡이 짧지만 그 속에서 하고픈 이야기를 묘하게 쏟아내는 재주가 있는 최정화 작가의 글들을 한데 모아 볼 수 있는 소설집. 창비의 신인소설상으로 데뷔해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는 그녀는 내게 낯선 작가임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의 글들은 섬세했고, 일상 생활과 밀접해 있는 글들을 썼다. 누군가는 쉽게 지나쳤을, 일상적이지만 그 속에 있는 규칙적인 것들에서 벗어난 것들. 이를테면 닳은 구두라든지, 틀니를 빼놓은 남편의 보기 흉한 얼굴이라든지, 소설가가 두고 간 종이칼이라든지. 각각의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물건(혹은 상황)이 존재하고 그것들을 긴밀하게 상상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책의 첫인상을 판단하는, <지극히 내성적인>의 첫 번째 단편 '구두'는 읽고 나서 소름이 끼쳤다. 모든 것은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고 그저 주인공이 상상으로 그려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상상을 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상상이 돼서였다. 그저 도우미를 구했을 뿐이고, 구두를 잘못 신고 간 간단한 줄거리였음에도 그 이야기 속에서 시종일관 흐르는 불안한 상상들은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야기했다. 더군다나 마지막 문단, 그 여자가 내 구두를 탐낸 거라면, 그래서 바꿔 신고 간 것 뿐이라면 그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중략) 하지만 전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고 말이에요. (26쪽) 부분을 읽다보면,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장으로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예민도 이만하면 병이고, 망상도 이런 망상이 없겠지만, 덩그러니 현관에 남은 그 여자의 신발을 보면서 했던 불안한 상상은 읽는 이에게 소름을 돋게 하기 충분했으니까. 이런 불안하고 묘하게 어긋난 이야기들이 계속 등장한다. '홍로'라는 소설은 책 속에서 유일하게 귀여운 듯한 느낌의 소설이었고, '오가닉 코튼 베이브'는 세상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주인공이 안쓰럽게 보이면서도 위태로워 보였다.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구두'와는 또 다른 망상으로 인해 일어날 일에 관한 결말로 이 또한 묘하게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민하고 망상적인 태도들이 10가지의 이야기들 속에 녹아 들어가 있다. 읽는 내내 소름끼쳤던. 작가는 이 <지극히 내성적인>을 읽고 일상생활 속 작은 것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달라지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기왕이면 작은 것들 하나에도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는 예민함을 가질 수 있기를 말이다. 나같은 경우는 귀찮아서라도 세세한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인데, 왜인지 이런 세세함들에서도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신 그것이 불안한 상상이 아닌 즐거운 상상 쪽으로 말이다. 일상이 불안한 울림이 가득한 상상이라면 힘들 것 같으니까.

 

사람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울림을 가져다주는 불안을 이렇게나 섬세하게 이야기로 엮어낸 작가의 다음 글이 기대가 되는 바이다. 적어도 이런 불안들을 잘 엮어 내는 작가라면 다른 느낌의 글들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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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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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이번에도 알게 됐다. 나는 문학의 깊이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사실 많은 작가군을 아는 것도 아니고, 작가를 생각해서 찾아보는 스타일도 아니고, 책을 읽는 스타일 같은 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보니 신간평가단을 해 오면서 만난 책 속 작가들은 낯선 이름들 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번 <오에 겐자부로>도 마찬가지다. 이땐 내가 주목신간 추천을 건너 뛴 바람에 어떤 종류의 새책들이 있는지도 전혀 살펴보지도 못했던지라, 만남부터 당황스러웠다. 700쪽 되는 책이 두 권이나 배달이 됐으니 말이다. (시스터 캐리도 오에 겐자부로도 첫인상은 '겁나 두껍다'부터 시작했다.) 문학상을 받았다고 챙겨보는 편도 아니고, 고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오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을 모르는 게 어찌보면 당연했다. 알고보니 굉장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60년동안이나 꾸준하게 글을 써왔고,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일본 내에서 우익들의 지나친 활동에 반대하고, 자신의 개인적 경험들을 녹여낸 작품들을 썼으며, 굉장히 깊이가 느껴지는 소설들을 많이 쓰신 분이라고 한다. 깊이라고 이야기해 봤자 나는 그 분의 최신작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 어떤 느낌일지는 감이 잡히지는 않지만, 철학과 시를 좋아하며 굉장히 관념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쉽게 읽히고 생각하면 상상할 수 있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점점 곱씹을거리들이 많아지는 소설인 듯 하다. 하지만 이 <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초기작품부터 모아져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관념적이라기보다는 주제가 쉽게 드러나 잘 읽히는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건 소설들의 주제들보다는 그 소설들이 언제 등장했느냐의 이야기였다. 대학생때 썼던 글이 상을 받게 되면서 대학생때 이미 진로가 결정됐던 오에 겐자부로. 별 뜻 없이 쓴 소설이었다고 본인이 회고했으니, 그렇게 대단한 소설은 아니겠지?란 생각을 하면서 읽어봤는데 이게 웬걸. 참신했다.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소설인데 등장인물의 개백정이라는 직업도 그랬고, 대학병원에서 실험용으로 기르던 개를 죽이려고 개백정을 고용했다는 설정도 그랬다. 개 150마리를 죽이는 '기능적인 비열함'도, 개백정이 '독극물을 쓰지 않고 몽둥이로 때려잡는 것에 대한 자부심' 같은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으면서 그 아르바이트에 비관적인 느낌을 쏟아내는 대학원생의 캐릭터도, 그로인한 소설 속 잔인함들도. "우린 개를 죽일 생각이었지. 그런데 도리어 우리 쪽이 살해 당한 셈이네." 같은 이야기들은 꽤나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저자 후기에서 저자는 이 이야기는 본인이 초등학교 3학년때 겪었던 일과 친구가 해 줬던 이야기를 이중구조로 써보고 싶었으나 잘되지 않아서 <사자의 잘난 척>이 나오게 됐다는 얘기도 전했다.

 

한 남자가 거의 50년이라는 세월동안 글을 썼다면 처음과 끝의 글이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구분해 놓은 후기 파트는 내게는 어려운 소설들이었다. 글 속에 내포하고 있는 뜻이 있는 것 같은, 한국말을 보고 있는데도 한국말 같지 않은 글이었달까. 예를 들면 이런 것. "개체를 초월한 그리고 개체를 품은 [나의 영혼]의 빛의 군집을 향하여 하 마리의 반딧불이로서 빛을 발하면서 날아간다. 이를 위해 지금부터 나의 삶이 있는 거다. 이런 건 벌써 아주 이전부터 [나의 영혼]에 연결되는 자신이 알고 있었고, 그 이상의 것은 [나의 영혼]의 외부 개체로서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같은. '[나의 영혼]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네 / 그러나 [나의 영혼]은 기억한다' 라는 시를 이렇게 해석하는 소설이라니. <불을 두른 새>라는 단편은 기본적으로 두줄의 시구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한다. 에세이 형식같기도,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 같기도 한 이 이야기는,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과 자신의 교감이 이야기도 다루기 위해 이 시구를 꺼내든 듯 했다. 이야기가 어렵다기 보다는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의 수준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듯 싶었다. 후기의 소설들은 대체로 그러했다. 초기의 슉슉 잘 읽히며 스피드하던 글들은, 나이가 들고 (역자의 후기로 짐작하건대) 굉장히 많은 책을 읽은 후 바뀌었다. 그리고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조금 힘든 글들이었다.

 

<오에 겐자부로> 단편집은 바로 이 점이 흥미롭다. 80이 넘은, 글솜씨와 명성을 모두 가진 노작가가 이제 그만 글을 그만 쓰고 싶다면서 자신의 문학인생을 정리하면서 만든 책이기 때문이다. 직접 자신이 여기 저기에 실었던 원고들을 복사해서 쌓아두고, 그 많은 단편 소설들 속에서 본인이 가장 괜찮다 생각하는 작품들을 추려내서, 다시 검토하고 필요하다면 다시 쓰는(거의 내용들을 줄이는 것이라고 했지만) 번거로움까지 마다하면서 만든 책. 더불어 그때 그 작품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혹은 어떻게 쓰고 싶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도 간혹 등장한다. 저자의 후기가 일종의 비하인드 스토리인 셈이다. 원래 작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늘 재미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좀 더 소설이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에 나는 이런 후기들을 환영하는데, 여기 그 후기가 있어 이건 이것대로 내 취향저격 포인트.

 

어려운 글들이라 느끼는 것들은 그 후기들로나마 친근하게 다가오니 이 책은 오에 겐자부로를 모르는 이들이 처음 보기에 딱 좋은 책 같다. 선입견을 없앨 수도 있고, 작가의 처음과 끝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 점차 난도를 올려가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왔다갔다 하며 읽고 싶은 제목들을 골라 읽었던 내가 처음부터 읽어내려갔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그렇다. 더군다나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작가가 직접 선별했다는 것이 의의가 있는 듯 하다. 그 많은 단편들 중 23편만 추려내는 작업이 어디 쉬웠겠는가. 이 책은 '작가 인증 단편'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테니. 최근의 글보다는 초장기의 글들이 다가가기 편한 것을 보니, 나의 소설보는 안목은 아직 멀었나보다..싶다. 하지만 계속 읽다보면 언젠가는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두꺼운만큼 책의 할 도리를 다하는 아주 야무진 책 같다, <오에 겐자부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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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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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느끼는건데,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듯 하다. 물론 돈이라는 것이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면 그것에 목 매달 일도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수단은 바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만 화폐일 때의 '돈'이다. 돈을 쫓는 것을 허상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돈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를 쫓는 것을 '나쁘다' 손가락질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상은 눈앞에 있으나 잡을 수 없는 존재를 허상이라 한다. 그렇다면, 눈앞에 잡을 수 있는 것을 잡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을 과연 허상을 쫓는 것이라 손가락질 하면서 나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 내게 '시스터 캐리를 세 단어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나쁜년과 도시와 욕망을 꼽겠다. (그래서 서평의 제목도 그렇게 지었다) 그 첫 번째인 나쁜년 이야기부터 해 볼까. <시스터 캐리>는 이미 100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다. 현재와는 많이 다른 가치관 속에서 태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읽어봐도 소설의 주인공인 '캐리'는 나쁜년이란 소리를 들어도 싼, 기회주의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면 더 나쁜년이겠지만 말이다.) 자신에게 더 나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인 기회주의자인 캐리. 이는 현재 사회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가 즐겨 보는 드라마에서는 (특히 막장드라마라 일컫는 드라마들에서는) 너무도 흔하게 쓰이는 스토리 기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겐 꽤나 익숙한 패턴이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자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옮겨가며 버려버리는, 나쁜 년의 전형적인 이야기.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쁜년이라고 매도하기엔 그녀의 행동들 모두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동거했던 드루에와는 결혼만 전제로 하지 않았을 뿐 애인 사이였기에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나쁠 것 없는 동거였고, (지금의 관점이라는 전제가 꼭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뉴욕으로 건너가 함께 했던 허스트우드는 그가 유부남인 걸 알고서는 나름 그 관계를 끊었었기 때문이다. (후에 허스트우드의 속임수로 함께 뉴욕에 건너가게 된 건 차치하고 말이다.) 나쁜년이 되는 건 배우로 성공하고 나서 허스트우드를 찾지 않은 것 정도랄까. 하지만 그와 결혼으로 묶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의적이 아닌 책임은 질 필요가 없으므로 이 또한 벗어날 수 있는 변명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캐리는 의도하지 않은 나쁜년이었던 것이다. 지나고 나니 나쁜년이 되어 있는 조금은 슬픈 인생.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현재 성공해서 자신의 인생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두번째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도시'이다. 우리나라의 경공업 붐이 일었을 당시가 그랬듯,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여자들의 가장 손쉬운 취업루트인 공장에 캐리 또한 취업해서 일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과는 다른 삶이란 것에 치를 떨며 좀 더 손쉽게 자신의 꿈을 이뤄줄 이를 찾는다. 이를테면 요즘말로 취집이라는 것으로. (취집이라기보다는 동거이지만 어찌됐든) 그 과정에서 막연한 동경만을 가지고 상경한 이들이 겪는 아픔들을 소설은 잘 보여준다. 환상과 현실과의 경계를 처절하게 무너뜨리면서도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그려져서 '이것이 1900년대의 미국의 참모습이다' 알려주고 있다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근무환경은 열악했고, 그에 비한 주급은 형편 없었고, 그럼에도 각자가 가진 꿈을 잊지 못해 현실에 얽매이고, 그렇게 스러지는 젊은이들을 말이다. 도시는 화려함으로 중무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모습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시스터 캐리>의 주목해야할 '도시'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자연주의 소설의 대표격으로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고 하니, 책에서 보여지는 뒷골목은 1900년대의 모습과 가장 비슷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욕망. 책 속에선 대표적으로 캐리의 욕망만을 집중 조명하지만, 그녀의 주변인들 또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능력이 없으면 자신이 꿀 수 있는 만큼의 꿈만 꿔야 하는데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캐리는 늘 큰 꿈을 꾸는 게 문제였다. 그 꿈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캐리를 짓눌렀고, 그녀는 철저히 그 욕망만을 쫓았다. 그런데 그 욕망을 좇은 결과가 나름 썩 괜찮았다. 그것이 반전이라면 반전. 권선징악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결말이 당시에는 찬반 논란이 극명히 일어났다고 하는데, 현실의 눈으로 보자면, '나쁜년이 더 잘되는 법이다'. 아주 슬프게도 이 말은 진리가 되어 가고 있는 듯 하고 말이다. 착하게 누군가에게 양보하고 뒤로 밀쳐지는 것에 소리지르지 않으면 누구든 '얘는 호구구나' 생각하고 짓밟기 일쑤인 세상에서는 나쁜년이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캐리는 원치 않게 나쁜년 소리를 들었고, 운빨에 의한 거지만 어찌됐든 욕망의 성취도 이뤄냈다. 더이상 주급에 어쩌지 못하는 위치가 아닌 게 되었고, 캐리는 결국 자신이 꿈꿨던 도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 한다. 그녀에게 손톱만큼의 도의적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은, 그녀가 지금껏 함께 해왔던 이들에게 그다지 애정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관심을 쏟을 시간이 없을만큼 자신의 위치에서 또다른 욕망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욕망이 나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욕망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니까. 그 속에서 자신을 잃느냐 잃지 않느냐는 그 욕망을 따라가는 사람의 몫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손가락질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에 반해 떳떳하다면 손가락질 받는다 해도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캐리는 모든 선택에 있어 수동적이었을지언정, 직접적인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다. 후자 쪽인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휘둘렸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에게 떳떳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욕망을 이야기함에 있어 후회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하고 회상할때 나오는 후회. 그 후회 대신 <시스터 캐리>는 캐리의 또다른 몽상으로 마무리를 맺는다. 혼자가 된 그녀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고는 하나, 앞으로 그녀에게 펼쳐질 날들이 꽤나 분홍빛이기에 외려 그녀의 인생에 나쁠 것은 없어보인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마 그녀는 후회라는 것조차 하지 않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듯 하다. 평평한 시대에 툭 던져진 예쁜 자갈돌같은 그녀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를 나쁜년이라 욕하는 사회만이 남을테지. 여전히 도시는 화려하다. 캐리처럼 큰 꿈을 가지고 상경하는 이들이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럼에도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건, 100년 전의 시대 상황으로 읽는 것보다 현재의 시대상황으로 읽는 것이 더 흥미롭게 읽히는 <시스터 캐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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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을 보고 조금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나쁜년이 도시에서 욕망하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저는 사실 마지막에 약간 배드 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는데, 캐리가 그냥 성공하고 끝나는 거더군요. 그래서 당대에는 나쁜X가 나오는 나쁜책으로 치부받았는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저도 캐리에게 모든 책임을 묻기에는 또 너무 가혹한 것 같기도 합니다. 허스트우드도 어느 정도는 그렇고요. 그래서 둘다에게 약간 연민이 느껴졌는지도...리뷰 잘 읽었습니다.

도토리냥 2016-04-02 04:03   좋아요 0 | URL
제목이 너무 직관적이죠?ㅋ 그런데 이런 저런 제목들을 다 갖다 붙여 봤자 제가 느낀 그대로 쓴 게 아닌, 뭔가 그럴듯하게 꾸민듯한 느낌이 자꾸 들어서 세 단어를 적었습니다.

저도 캐리가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당대에는 큰 이슈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나쁜년인데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성공하느냐, 허스트우드만 불쌍한 것 아니냐 등등의 이야기였겠죠. 하지만 지금은 2016년이고, 나쁜년이 되어 성공하라고 부추김을 당하는 시대이다 보니 캐리의 행동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서평의 포커스가 그쪽으로.. 서평은 제가 가장 중점적으로 느낀 부분들 위주로 쓰는 스타일이라서요~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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