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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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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엄청나게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다. 신간평가단 16기로 받아본 책 중에 두툼한 볼륨으로 따지자면 넘버2가 될 정도로. 물론 볼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들 또한 방대하고 말이다. 처음 책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낯섦'이었다. 작가도 낯설고 책도 두껍고. 내가 많은 작가나 책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책들이 '낯섦'이긴 하지만, <그들>은 한층 더해 두께에 대한 두려움도 존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책의 페이지가 100 단위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어느정도 소설에 대한 기본 뼈대가 서면서부터는 술술 더 잘 읽히는 책이기도 하고 말이다. 앞으로 이야기 할테지만, 어두운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글의 템포가 빨라 지루하지 않다. (물론 굉장히 긴 장편 소설이기 때문에 읽어내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알고보니 작가는 꾸준히 많은 책을 내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한다. 지금까지 쓴 글이 단편은 1000여편 이상, 장편은 50여편 이상. <그들>은 작가가 초창기에 썼던 작품으로, 현재까지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고, 전미문학상까지 받았다. 겨우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써 낸 소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소설에는 담고 있는 내용들도, 주인공들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도 어느 하나 순탄치 않다.

 

<그들>은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다. 내가 과거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 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런 답답함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이라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너무도 당연하게 일어나면서 나를 당황시키니까. 어찌됐든, <그들>은 1930년대 디트로이트 빈민가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여성의 인권이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시대에서 거의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남편이 자주 바뀌긴 했지만 남편은 존재했었다) 엄마 로레타, 그녀에게서 태어난 줄스와 모린 남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많은 이야기들이 줄기를 뻗는다. 30년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만큼 많은 등장인물과 에피소드들이 여러 방면에서 드러나는데, 그것들은 낱개로 떼어내어 보더라도 매력적인 소재들이다. 에피소드 집합소라 해도 무방할 정도. 물론 막장이라 불릴 수 있을만큼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차 있지만, 그것들 또한 잘 배치되어 있고, 극적인 소재가 많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 산전수전을 다 겪은 주인공들을 보고 있노라면 읽고 있는 독자 자신까지도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또한 마지막 장을 다 넘겼을 때 후련함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데, 아무래도 그 긴 페이지동안 주인공들에게 동화되어서인 듯 하다.

 

“여자는 꿈 같아. 여자의 일생은 기다림의 꿈이지. 그러니까,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면서 꿈속에서 산다는 뜻이야. 굴욕적이지만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어. 어떤 여자도 도망치지 못해. 여자의 일생은 남자에 대한 기다림이야. 그뿐이야. 이 꿈에는 문이 하나 있는데, 여자는 그 문을 통과해야 돼. 선택의 여지가 없어. 늦든 빠르든 그 문을 열고 통과해서 어떤 남자, 한 명의 남자에게 도달해야 돼.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 결혼 상대는 누구든 상관없지만, 이 길에서는 벗어날 수 없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507쪽)

 

특히나 이런 생각을 하는 모린에게서 깊은 안쓰러움을 느꼈는데, 결혼이 삶의 만족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는 도구로써 사용되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가난함은 폭력이 아니지만, <그들> 속에 등장하는 가난함은 폭력을 동반한다.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다면 당연히 폭력이 일상이 되는 시대 속에서 모린이 선택해야만 하는 그 상황이라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 (이런 상황들이 계속 이어지다보니 책의 마지막에서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면서.)

 

<그들>은 서문부터 발문까지 빼놓지 않고 읽기를 권한다. 서문에서 작가가 밝혔던, '이 책은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다'라는 문장이 책을 읽는 내내 '사실'이라는 이야기라는 것 때문에 고통스럽게 했었는데, 발문에서 '하지만 모린은 내가 만들어낸 인물이며'라는 문장을 통해 이 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고, 나는 안도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라 사실이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이런 일을 직접 겪은 누군가가 있지는 않을까 불안했던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워낙 고증을 잘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깜빡 속아넘어 갈 수도 있었고 말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실제인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치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비현실적으로 현실적이었던 그때의 디트로이트를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러했다는 일련의 기억일 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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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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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라는 단어 자체가 낯선 나는 '무신론자'이다. 종교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편견이 없을 수 있으나, 외려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대로의 예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편견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런 내게 온 <카인>은 얇은데도 불구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책이라고 해야 맞겠다. 그래서 일단 책을 읽기 전에 검색부터 해 봤다. 아무것도 모르고 책을 만나는 것도 좋겠지만, 적어도 작가는 독자들이 '어느정도' 내용을 알고 읽을 거라 생각했을 것 같아서.

 

알아보니 구약성서라는 건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한다. 9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책.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들 뿐만 아니라 인물들도 많아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알려하지는 않았다. (모르는 내용을 새로 알아봐야 하는 거라서 시간도 많이 걸릴 뿐더러.) 그렇기에 책의 제목이 <카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봤다. 카인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인물이다. '카인과 아벨'의 그 카인 아니던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기억이 있는데 즐겨보던 드라마는 아니었기에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형인 카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인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가 간혹 등장하기는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작가의 상상력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중간중간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긴 하지만 그 과정이 몽땅 생략되어 있던 부분들을 이어붙이는 것. 인과관계와 인물 설정들을 자세히 해 그 일들이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 책은 그 카인과 아벨의 탄생부터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니 그 이전의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탄생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의 탄생, 카인이 아벨을 죽이게 되는 과정 등을 단 3, 4 페이지에 마무리 해버린다. <카인>의 내용은 카인이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놋에 도착하면서부터 이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 봤던 '카인과 아벨'의 지식백과 이야기는 꽤 단편적이었다. 카인은 어떻게 아내와 결혼했는가, 카인이 남을 죽이지도 또한 자신이 죽지도 않는 면죄부를 받는 것에 대해 카인을 죽이려 하려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등의 의문점만을 남긴 채 말이다. 실상 카인이 여호와의 저주를 받아 방랑을 하게 된 이후에는 어떤 자세한 내용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인> 속의 아벨은 우리가 익히 알던 착하고 순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고, 아벨의 그런 행동이 신이 의도한 시험이었으며, 그렇기에 카인은 자신이 동생을 죽였으나 그것은 여호와가 의도한 죽음이라는 새로운 시각의 주장을 펼쳤다. 단편적이었던 사건들이 입체적으로 되살아나 카인은 주인공으로서 책을 활보했다. 인간이기에 (물론 영원을 갖고 있긴 하지만) 불완전하지만, 또 주어진 저주로 인해 보호받을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서 말이다.

 

기존의 컨텐츠에 새로운 상상력을 더해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능력은 놀랍다. 또한 마지막 노아의 방주에서 홀로 내리는 카인의 모습은 여호와에게 전면적으로 대들었다는 느낌 또한 강하게 받았다. 글쎄, 이 책을 어떻게 설명해내야 할까 참 난감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오래된 컨텐츠도 다시보자'라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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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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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열강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던 시절을 지나 아프리카는 식민지화 되었다. '노예'라는 개념으로 흑인들을 마구 잡아가는 백인들을 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런 날들 중 하나인 1904년부터 1905년까지의 이야기. 비정상이 정상인 양 자리잡고 있는 그 한 가운데에 여주인공 '한나'가 있다.

 

'우월하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판별이 가능한 걸까? 서구열강이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화 할 때 내밀었던 기준은 '우리가 너희보다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월하다는 기준은 한없이 상대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기준을 어느곳에 두느냐에 따라 답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뚱뚱한 사람과 삐쩍 마른 사람을 두고 '어느 사람이 더 우월한가?'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아마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따라 한 사람을 고를 것이다. 뚱뚱한 사람을 고른다고, 혹은 삐쩍 마른 사람을 고른다고 그게 잘못된 선택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100여년 전의 서구열강들은 그렇게 애매모호한 기준을 들이밀고는 그 곳에 사는 이들에게 총칼로 목숨을 위협하며 영토를 빼앗았다.

 

여주인공 한나는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배에 오르게 되는 인물이다. 집에서는 다 큰 자식의 입이라도 덜어야겠다며 내쫓듯 외삼촌네로 보내버렸고, 찾아간 외삼촌 집은 이사를 가 버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에 올라타 요리사로서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거기서 남편을 만났으니까. 하지만 남편이 열사병으로 죽은 후, 한나는 계속 배에 타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남편의 장례를 치르려 잠시 들른 아프리카에 아무도 모르게 남게 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책의 중심은 '불안한 낙원'에 있던 한나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불안한 낙원'이라는 단어는 철저히 백인의 입장에서 기록된 단어이다. 자신들이 도착해 지배하고 있는 이 땅의 원주민들, 즉 흑인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본 적 없는 인종이기 때문에 굉장히 낯설다. 그들이 어떤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신발도 신고 다니지 않는 '미개한' 인종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들은 많이 불안해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열사병에 걸리고, 독사에 물리면서까지 아프리카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나라로 싣고 돌아가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광물 자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돈이 되는 것들이 가득한 낙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에게는 불안한 곳이다.

 

한나는 그들, 흑인들의 무리 속에 들어가보려 노력을 했다. '불완전한 존재'라 칭해지는 흑인들이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하나의 인격체였음을 자신을 치료해주던 여인들로부터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인들은 한나가 자신들에게 다가올 수록 다른 백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그녀를 멀리했으므로, 그녀는 그들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 결국은 포기함에 이르렀다. 원체 가난한 곳에서 살았던 주인공 한나는, 왜인지 모르게 흑인들에게서 자신을 보는 듯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가난한 백인들이었다면 한나가 내민 손을 잡았을 테다. 하지만 상대는 흑인, 백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존재. 그들은 자신들의 입을 닫음으로서 자신을 지키는 것을 택했다. 한나가 들어갈 수 없는 견고한 벽이 있었던 것은 그 탓이었다.

 

이 책은 자신들을 위해 애를 쓰는 한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흑인들을 질책하는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백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 잔혹한 행동들에 대한 죄를 묻기 위한 책도 아닌 것 같다. 그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느 공간에서 일어났던 혹은 일어났음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풀어냈을 뿐이다. 사람위에 사람이 설 수 있던 것이 너무도 당연한 시기의 기록으로써 말이다. 작가는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담담히 전할 뿐이다. 비록 책 속의 사실이란 것은 한 스푼 남짓한 작은 양일 지라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배우는 현재에도 인종차별은 일어난다.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그러니 그때라면 오죽했을까. 사람 위에 사람이 설 수 있는 시기는 지났지만, 아직도 그들은 불안한 낙원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지금은 낙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는 절대로 아니니 그저 불안하기만 한 것일지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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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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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생활만큼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의 생활이다. 그래서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저런 생활을 했구나,를 간접체험으로 느끼고 있는 내게는 그 시대상이 너무도 낯설다. 보면서 계속 엄마한테 저게 뭐야? 저런 것도 있었어? 라고 묻는다거나, 익숙하게 들어왔으나 정확하게 어떤 가수가 불렀는지는 몰랐던 노래의 자료화면이 되게 새삼스럽게 다가온다거나. 그리고는 내가 겪지 않은 그 시대라는 것은 당황스러울 만큼 조용하면서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던 것 같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사실 내게는 그리고 내 또래들에게는 인터넷 공간이 너무도 익숙한 공간이고, 삶의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주로 머물렀던 공간들이 트렌드에 따라 유행에 따라 바뀌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유행에 따라 공간을 옮기면서도 그 어느 공간에서건 많은 것을 남기고 보고 듣고 즐기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생활만큼의 비중을 두기도 하고, 오히려 가상생활인 인터넷 공간에서 더 열심히 생활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주변에는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무언가를 막고 바꾸기가 참 쉬웠던 예전과는 다르게 요즘엔 인터넷과 연결되어 모든 것이 공개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막고 바꾸기가 참 어렵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닐 뿐더러, 어딘가에서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충분히 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간에 말이다.

 

하지만 이 책 <댓글부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은 너무도 쉽게 깨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 내가 믿고 있었던, 완전무결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어느정도 그 투명성이 존재한다 생각했던 인터넷 세상에서도 통제와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 말이다. 내가 보고 들어왔던 것이 진실은 맞는걸까라는 생각부터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 새삼스러워졌다. 책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흥미로우면서도, 진짜와 가짜는 도대체 뭘로 구분해야 하는거지라는 막연한 생각부터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고 할까. 작가는 이 이야기가 모두 자신의 상상력이라고, 실제의 사건들을 어느정도 가져오기는 했지만 여기에 쓰인 모든 것들은 진실은 아니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하지만 작가의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도 왠지 여기의 모든 것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됐다. 굉장히 소름끼치게-

 

<댓글부대>는 작가가 이 분야, 인터넷 여론 조작에 관한 부분에 대한 것들을 꽤나 열심히 조사했다는 것이 티가 난다. 1장부터 그랬다. "대체로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이 운영한 댓글부대를 1세대로 본다."는 첫 문장부터 굉장히 세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 팀-알렙을 비롯한 회사들이 어떤 방식을 통해 회사를 운영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짧은 4장 분량의 이야기부터가 굉장히 전문적으로 보였다. (실제로 모두 수긍이 가는 내용이기도 했고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요즘 블로그에는 홍보용으로 올라오는 글들이 너무 많다'면서 '오빠랑 00'이라고 검색하면 된다던 이야기가 한동안 떠돌곤 했다. 검색으로 홍보와 직접 체험을 걸러낼 방법이 남자친구와 맛집을 다녀온 여자들의 글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남자친구를 통해 직접 소비'했다는 이미지가 있으며, 꽤나 자세한 이미지들이 올라오기 때문이었다. 사실 한동안 떠돈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검색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 홍보용 블로그들에 '오빠랑 00'이 이미 포화상태로 넘쳐나서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걸러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 등장하는 단어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자세히 기억은 안난다만- 사람들은 일단 인터넷에 게시되는 모든 정보들이 '참'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그 정보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당신이 생각하는 진실이 진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명확히 드러낸다. 작전을 짜는 무리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이 진행하는 일들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일의 진상을 밝히는 팀-알렙의 찻탓캇과 임상진이라는 기자의 대담이 이루어진다. 책은 이렇게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거기에 숨겨진 의도는 무엇인지를 2가지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것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글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확 와 닿았던 것은 이 구절이다.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이라고.'라는 찻탓캇의 말. 그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 전, 그럴듯한 거짓을 만들어 놓은 것을 진실이라 착각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종. 거기에 현재 대한민국의 인터넷을 바라보는 '이철수'라는 사람의 말들엔 공감하는 구석이 무척이나 많았다. 위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인터넷이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권위를 타파해서 민주화를 이끌 거라고도 믿었어. 거대 언론이 외면하는 문제를 작은 인터넷신문들이 취재하고, 인터넷신문조차 미처 못 보고 넘어간 어두운 틈새를 전문 지식과 양식을 갖춘 블로거들이 파고들어갈 줄 알았어. 독재 국가에서는 지금도 인터넷이 그런 고발자, 감시자 역할을 해.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런가? 인터넷신문이나 블로거들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하냐고. 아니지. (중략) 이것도 민주화라면 민주화지. 협박, 공갈, 갈취의 민주화.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민주화. (55쪽)

 

논리 싸움은 두 사람이 아주 좁은 화제를 가지고 붙을 때, 그것도 그 두사람이 좀 양식 있는 사람들일 때에나 가능한 거예요. 인터넷 싸움은 정력과 멘탈로 하는 겁니다. (82쪽)

 

 

 

결국 책을 읽으면서 믿을 건 나밖에 없는 생각과 세상 참 뭐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돈 있으면 다 인가. 자기가 움직이고 싶은대로 세상을 움직이면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반전이었던 내용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정말로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아니 그보다 '사람'을 '믿을 수는 있는 건지'에 대한 것부터가 굉장히 생각이 많아졌다. 판을 짜두고 그 위에 우리들을 올려 놓는 누군가들에게 우리 자체는 얼마나 가짢게 느껴질까라는 생각도 하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댓글부대>는 픽션이어야만 한다. 절대로 픽션이어야만 한다. 결국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쌓은 신뢰가 아닌 이상은 쉽게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어이없게 누군가의 손 안에서 놀아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가라앉는 특성을 제대로 짚어낸 이 소설. 섬뜩하지만 정말 흥미로웠다. 아마도 인터넷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흥미롭게 읽을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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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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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괴이한 느낌의 소설이었다. 뭔가 어긋나는 것들의 연속. 읽으면 읽어나갈수록 이상한 것 투성이인, 여기의 시대적 배경이 영국이라고 했는데 토끼굴이라니 이건 뭐지? 도대체 이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무언가 뚜렷하지 않고 계속 '안개' 속에 쌓인 느낌의 소설. 1장을 지나갈 때까지도 이 소설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럴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꽁꽁 숨겨 놓은 채, 답답함만을 가득 안은 채. 수수께끼들을 풀기 위해서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는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읽히지 않아도 읽어내야만 했다.

 

만약 내가 직접 구입한 책이었다면 안 읽고 중간에 포기했을 가능성이 많았던 책- 그나마 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누른채 읽어나가다 보니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 이 책은 처음부터 어떤 것을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니 말이다. 용이 등장하고, 원탁의 기사가 등장하고, 도깨비와 전사가 등장하는 비현실적 소설. 그러니 처음에 시대적 배경을 제대로 유추할 수 없었던 것이다.(실제에서 찾으려 했으니) 소설이 진행되는 방식이 낯설어서 자꾸 덮고 싶었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친절하지는 않아도 보여줘야 할 것들은 보여준다. 의문을 잔뜩 일으킬만한 복선 비슷한 것들을 깔아두고 그것을 나중에 해결하는 식으로 말이다. 의문들이 하나씩 풀려나가지만 그럼에도 의문은 일어난다. 도대체 왜?라는 근본적인 의문. 바로 어제의 기억도 없는 사람들, 섬으로 가기 위해 뱃사공에게 부부의 좋은 기억을 똑같이 말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에서 공통되는 '기억'이라는 단어 말이다.

 

"사라져서 좋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소중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잔인한 일이오."(50쪽)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71쪽)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가끔씩 흘러나왔다. 어제의 기억, 아니 방금 전의 기억도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들과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과거는 기억하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것이 잘못됐다 믿는 주인공 부부와 같은 사람들도 분명 있었으나 여전히 많은 이들은 금방 오늘의 일도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그렇기에 '파묻힌 거인'이라는 단어는 '파묻힌 기억'의 다른 말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과거를 잃어버리는 게 두려운 이들에게 이는 보이지 않는 거인과 싸우는 것과 진배 없는 일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액슬, 우린 그 시절을 기억조차 못 하잖아요. 그 후의 시간도요. 우리 사이에 격력했던 싸움도, 함께 소중히 즐겼던 순간들도 기억하지 못해요. 우리 아들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애가 어쩌다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지내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그 모든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요, 공주. 게다가 내가 기억을 하든 잊어버리든 내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감정은 늘 똑같이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 당신은 늘 같은 감정 아닌가요, 공주?"

"나도 그래요, 액슬. 하지만 지금 다시 드는 생각은요, 오늘 우리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감정이 마치 비를 머금은 잎에서 떨어지는 이 빗방울과 같은 건 아닐까 하는 거예요, 사실 하늘은 오래전에 비가 그쳤는데 말이에요.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면 우리의 사랑도 점점 빛이 바래져 완전히 사라져버릴 뿐, 거기에 다른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71-72쪽)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사실, 과거의 기억따위 없어도 앞으로 나아가는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마을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허나, 이것은 사람의 '감정'의 문제다. 과거를 잊는 일은 지나온 모든 것을 잊는 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롯이 나 한 사람을 이루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지나온 시간 속의 내가 있기에 현재의 내가 존재하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나'를 잃어버리면 과연 그건 '나'라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소설 속의 사람들의 감정은 흐르는 것 같았다. 분노와 증오, 사랑등의 감정은 여전히 생겨나고 흘러간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에서 흘러나오지 않기 때문에 쉽게 분노하고 쉽게 증오했다. 다른 이들에게 우르르 동조하고 자신의 줏대는 없어져 버리는 것.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보다 대세를 따라가는 것. 기억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좋은 일인걸까.

 

"하지만 안개는 좋은 기억뿐만 아니라 나쁜 기억까지 모두 덮고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부인?"

"우리에게 나쁜 기억도 되살아나겠지요. 그 기억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로 몸을 떨기도 할 거고요. 그래도 그건 우리가 함께했던 삶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럼, 나쁜 기억이 두렵지 않은가요, 부인?"

"뭐가 두려워요, 신부님? 아무리 이 안개가 위험을 숨기고 있더라도 기억을 되찾는 길이 우리에게는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건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예요. 그건 우리에게 소중한 거니까요." (235쪽)

 

어떤 것도 받아들이는 기억이야 말로 '나'를 만드는 가장 큰 본질. 기억은 거인처럼 커다랗다. 그리고 어쩌면 그 거인이 나를 밟아 죽이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파묻힌 거인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거인을 마주하는 편이 좀 더 현명한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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