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 - 내 아이를 변화시키는 기술
이보연 지음 / 작은씨앗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 - 특별한 아이들을 다루는 특별한 방법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적잖이 당황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들마다 성격이 제각각이니 누구 말을 참조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와 성격이 비슷한 아이를 가진 부모를 찾기도 힘들거니와, 두 아이도 성격이 완전히 다르니 고집 부릴 때 어떻게 해야할이지 난감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지극히 정상인데도 우리 아이만 문제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는 다루기 힘든 아이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도움이 많이 돼었지만 둘째 셋째 쳅터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둘째 쳅터는 떼쓰는 아이, 셋째 쳅더는 낯선 것을 불안해 하는 아이에 대해 다루고있는데, 둘째 아이가 특별히 떼를 잘 쓰고 낯선 것에 대해 많이 불안해합니다. 병적일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아이보다 특별히 많이 불안해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음식도 절대로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편식으로 이어집니다. 첫째 아이는 낯선 것에 오히려 강한 호기심을 발휘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지 참 놀랍기도 합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만큼 증세가 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대처하다 보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합니다. 우리 아이보다 훨씬 더 심한 아이들도 치유가 되는데, 우리 아이는 더욱 쉽게 치유가 되겠지요.
책을 읽다보니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라는 제목은 참 잘 지은 것 같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이겠지만, 자녀가 달라지려면 부모가 먼저 달라져야겠지요.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를 고쳐야 되는데 라는 생각은 늘상 하지만, ‘내가 달라져야 하는데’ 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아이를 다루기 힘들게 된 데에는 영,유아기 때의 부모의 책임도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부모가 원인을 제공했으니 부모가 해결하는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케이스는 아이의 증세가 좀 심한 경우입니다. 내 아아들은 비록 그렇지 않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케이스들을 어느 정도는 다 가지고 있으며, 또 그런 아이들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움으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조금씩 생각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눈 높이 맞추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참을성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을 대하는 내 태도를 가만히 보니, 아이들을 나무랄 것도 못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대할 때 조금 더 인내하고 이해햐려고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모 면허증
코르넬리아 니취 지음, 한윤진 옮김 / 사피엔스21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했는가? 자녀를 대하는 내 모습을 이보다 더 적절히 묘사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아이의 눈 높이에 맞추어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항상 내 시각에서 바라보았던 점을 반성하게 된다. 아마도 아내와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인 것 같다. 엄마에게는 이야기를 잘 하면서 나에게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아마도 아주 어렸을 적에 나에게는 ‘받아들여짐’보다 ‘거부’에 대한 기억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부모 면허증’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나는 실기에서 거의 낙제점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론을 잘아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론은 간신히 턱걸이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전에서는 완전 꽝이다.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 사실을 절감하고 내 자신을 반성한다. 아는 이야기 같은데 왜 실전에서는 전혀 반영이 되지 않을까? 역시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린 개구리라서 그런가보다.
 
‘부모 면허증’이라는 말은 참으로 적절한 것 같다. ‘면허’는 ‘숙달’된 사람, 그 일을 하기에 최소한의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 숙달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반복해서 연습해야 한다. 아쉽게도 ‘부모’는 연습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먼저 충분히 이론을 배워야 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채 부모가 되었던 것 같다.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때, 비로소 먼가 잘못되었구나를 느꼈다. 그래서 육아 서적을 몇권 읽어 보았다. 참 부모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많이 했구나 느꼈다. 이 책도 그 연장선상에서 읽고 있다. 읽을수록 나의 무지만 폭로될 뿐이다. 그동안 무면허로 자녀를 키우고 있었구나..... 하나 하나의 예화가 꼭 내 삶을 들여다보고 적은 것 같다. 누군가가 점수를 매긴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으면 ‘부모’라는 너무나 무거운 직책을 떠 맡아야 하는데, 그 무거움과 어려움에 비해 아는 것이 너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학교에서는 이것을 가르치지 않을까?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면 의무적으로 ‘부모 교육’을 받게 하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
 
가끔씩 자녀를 학대하는 뉴스를 본다. 준비되지 못하고 무지하고 무책임한 상태에서 자녀를 맡게 되었으니, 기쁨보다는 짐이요 걸림돌이었으리라. 그래서 그 스트레스를 학대로 푸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록 학대는 하지 않지만,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그들에게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어쨌거나 자녀 교육은 힘들다. 기계가 아니라 인격체이기 때문에 표준 매뉴얼이 있을리 만무하다. 얼마나 원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잘 적용하느냐가 요체일 것이다. 자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조금 더 익히고 숙달시키기 위해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힘들지만 오늘도 부딪히거 시행착오를 겪으며 면허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본다.


 좋은 부모가 되길 원하고, 자녀를 잘 양육하길 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의 자연사 -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섹스와 구애에 관한 에세이
애드리언 포사이스 지음, 진선미 옮김 / 양문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의 자연사 - 동물과 인간의 섹스의 유사성 혹은 이질성
 
성의 자연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동물들의 교미 형태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면서 그 종만이 가지는 특이한 교미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이 종을 번식시킨다는 의미에서 식물도 교미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식물에 대한 언급은 적을 뿐 아니라, 식물을 과연 교미(섹스)로 볼 수 있는지는 조금 의문스럽다. 동물과 식물은 너무나 큰 계의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참으로 신비롭다. 어느 하나 획일적인 것이 없고 제각각 다르다. 생식 방법조차 동물마다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저자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각 개체의 다양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저자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섹스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은
한가지 흥미롭고도 의문스러운 점은 시종일관 암, 수를 대립관계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종을 퍼트리는 것은 암, 수가 서로 협력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며, 또한 실제로 유전자도 절반씩 공유한다. 그런데 저자는 교미를 암, 수의 치열한 생존게임의 결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면 상당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한 켠에서 비껴보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번식일까하는 의문이 든다. 저자 주장에는 은연중에 섹스는 수컷이 자신의 종족을 퍼트린다는 행위라는 생각이 배여있는 것 같은데, 이는 다분히 남성우월론적인 시각처럼 비춰질 수 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저자는 인간의 섹스행위와 동물의 다양한 교미행위를 유관해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부일처, 일부다처와 같은 용어들은 다른 동물계에도 적용시키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일부일처나 일부다처제와 같은 것은 문화나 윤리적 개념으로 주로 사용하는 반면, 저자는 이것을 동물계와 유비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낙태와 영아 살해같은 현상들도 동물계에서 실마리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조금 지나치다는 느낌이 있다. 인류역사를 들여다보면 일부일처 혹은 다부다처와 같은 제도는 진화론적 선택의 결과라기보다는 한 문화권의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제도들은 일관성있는 방향으로 발전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대, 다양한 문화권에서 선택적으로 발견된다. 낙태와 영아 살해도, 실제로는 윤리적인 타락에서 찾는 것이 훨씬 쉽다. 언제나 도덕/윤리 의식이 현저히 부패한 사회일수록 영아살해와 낙태가 빈번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자가 이러한 논리를 펼치는 것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전혀 없다는 시각에서 바라 보았기 때문일 것인데 논리적 일관성의 측면에서는 설득력이 있을지라도, 인간의 특수성을 생각지 않는 것은 조금은 지나치지 않는가 생각된다.(저자도 물론 이러한 비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리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저자는 비록 자연계의 여러 생식형태를 설명하고 있지만 주된 관심사는 인간에게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섹스와 번식에 관련된 인간의 여러 행위들의 이유를 동물들의 습성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다소 무리하게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인간의 행위의 이유를 또 다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유익한 지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진중권의 이매진 - 진중권의 놀이터에 들어 온 영화
 
진부한 얘기지만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어쩌면 예술 이상인지도 모른다. 영화에는 한 시대의 철학, 사상, 문화 등 거의 모든 시대상이 담겨져 있다. 물론 그 시대상은 감독의 눈에 비춰진 것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대중성을 지향하기에 (물론 독립영화가 있기는 하지만), 비록 일부라 할지라도 당시의 대중들의 공감대와 시대흐름이 담겨져 있다. 영화 분석은 영화에 담겨져 있는 이러한 시각들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을 얼마나 예술적으로 혹은 교묘하게 그려내고 있는가를 평가하고 있다. 영화분석은 영화 속에 숨겨진 코드들(감독이 의도했을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을수도 있다)을 알아맞히는 게임이라고 할까? 그래서 보는 사람에 따라 분석은 제각각이다. 감독의 의도와 분석가의 의도가 맞물리고 어우러지고 때로 비틀어져 때때로 영화분석은 영화를 넘어가기도 한다.
모든 것은 해석의 문제다.
저자는 스스로 이 책이 영화분석이 아니라 담론의 놀이터라고 못박고 있다. 담론의 놀이터라는 말이 재미있다. 좀 시니컬하게 보자면 ‘담론의 놀이터’라는 말은 ‘말장난’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장난"이다. 영화에 투영된 수만가지의 문화 현상들 속에서 하나의 시각을 끄집어내어 논리적으로 전개시키는 저자의 능력은 탁월하다.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기본이고 철학과 과학과 전문기술영역에 대한 지식까지 화려하게 넘나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과학적 엄밀성을 전제하고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은 소위 ‘지식인’의 맹점이다. 진중권의 분석이 그럴 듯 해 보이는 언설에 불과한지 아니면 담론적 가치가 있는지는 독자의 몫인데, 안타갑게도 진중권이 쏟아내는 수 많은 철학, 과학의 전문 용어들을 모두 다 이해하는 독자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중권의 놀이터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 책에서 진중권의 멋들어진 영화분석을 만나게 된다. 영화자체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진중권의 시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한 사물을 바라볼 때, 그것에 연관된 다양한 끈을 볼 수 있고, 그 끈을 통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진중권은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문화와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 책을 꽤나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이 책은 알 수 없는 암호덩어리로 다가올 수도 있다.
적어도 진중권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실망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서의 기술 - 심리학자의 용서 프로젝트
딕 티비츠 지음, 한미영 옮김 / 알마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어쩌면 저주 가운데 태어났는지 모른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이 세상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투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기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결코 녹녹치 않다. 안타깝게도 인생에는 연습이란 없고 곧 바로 실전이기 때문이다. 알몸으로 세상에 던져져 시행착오를 거쳐서 길을 찾아간다. 그나마 끊임없는 시행착오만을 반복할 뿐 정도를 찾기에 너무나 요원하다. 오죽하면 공자가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던가?
너나할 것 없이 무지의 상태에서 세상을 헤쳐나가다 보니 서로에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입히는 일들이 다반사가 된다. 인생은 고뇌의 연속이고 행복은 단속적으로 찾아온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용감하게 살아간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그래서 선대들이 범했던 실수를 후대들도 반복한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어떤 이들은 자신이 겪은 혹은 선대들이 걸었던 무한한 시행착오를 통해 어떤 해답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들은 그 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시행착오들을 줄여나갈 수 있다. 

용서의 기술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나 쉽게 범하는 잘못들, 인생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그 무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훌륭한 수단을 제공해주고 있다.
에히리 포름은 ‘사랑의 기술’을 통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고 ‘배우고 익혀야 할 기술’임을 강조했다. 참으로 탁월한 식견이다. 사랑을 배워야할 기술이라면 용서 또한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히 배워야할 기술이다.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분노로 자신의 삶을 태워버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복수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맹복적으로 상대방의 파괴만을 원하는 감정이다. 상대를 파괴한다면 내 자신도 파괴되도 상관없다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이들이 복수의 이 어리석은 면면을 보지 못한다. 

용서의 기술의 원제는 ‘살기 위해 용서하라(forgive to live)'이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미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수는 나와 상대방을 모두 죽인다. 그러나 용서는 나와 상대방 모두를 살린다. 그래서 용서하는 법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 책을 통해서 놀랍게 발견한 나의 모습 중에 하나는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이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분노와 원한은 마음 속에 감추고 표현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불쑥 불쑥 내 삶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살기 위해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용서하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용서는 배우고 익혀야할 기술이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인생의 숙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