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벗겨라! 시공 청소년 문학 35
조앤 바우어 지음, 이주희 옮김 / 시공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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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을 벗겨야 하는 것은 비단 앞표지 그림의 사과와 같은 과일이나 각종 제품을 싼 포장지뿐만은 아닐 것이다.

'껍질을 벗겨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진짜로 허울의 껍질을 벗겨야 할 것은 각종 대중전달매체가 아닐까 싶다. 특히, 생생한 진실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어야 하는 뉴스와 신문들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뉴스와 대중신문들은 그 신뢰도와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과거의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종이매체가 아닌 인터넷과 같은 거대한 통신망으로 전달되는 온갖 뉴스는 일일이 확인하고 따라잡기에도 벅찬 시대이다. 

하루에도 무수히 쏟아져 각 포털의 첫머리를 장식하기도 하고 수많은 네티즌들을 끌어들이는 뉴스며 화제거리들에 가끔은 회의가 들기도 한다. 사실 뉴스같지도 않은 뉴스, 기사같지도 않은 기사들에 아까운 시간을 빼앗기기도 한다. 한마디로 쓰레기같은 기사거리들. 참, 요즘엔 쓰레기도 잘만 활용하면 자원이 되고 에너지도 된다고 하는데...허섭쓰레기같은 기사며 뉴스들은 아까운 시간만 훔쳐가는 도둑과 다를 바없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소설가인 리턴(Edward George Earle Bulwer-Lytton)이 남긴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언은 언론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우리들에게 인식시켜 주지 않았던가. 바로 껍질을 벗기라는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뉴욕 주의 배인스빌. 사과를 생계 수단이며 생활의 중심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과수원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우리는 진정으로 강한 펜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다. 한마디로 펜도 펜 나름인 것이다. 어떤 펜은 진실을 왜곡시키고 사실을 덮으려하지만 어떤 펜은 최후의 진실까지도 밝혀내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칼보다 강한 진정한 펜일 것이다. 

주인공 힐디는 배인스빌 고등학교의 신문 <핵심>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사람들이 '힐디 비들, 너는 꼭 네 아버지 같구나.'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녀가 아버지처럼 끈질기고 불의에 굴하지 않으며 늘 진실을 찾는다는 뜻이라 생각하며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인다. 기자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3년 전에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지만 그녀의 가슴에 문득문득 살아있음을 느끼는 힐디. 

30년 전 원인을 알 수 없는 두 건의 죽음과 5년 전 샐리 마이어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폐허가 된 러들로 옛집이 뉴욕 주 북부의 10대 유령의 집으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어느 날부터 러들로 옛집 앞문에 나붙기 시작한 무시무시한 문구들때문에 러들로의 집은 유령의 집이 되어, 2,3년 동안 힘든 해를 보낸 동네사람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때맞춰 러들로 옛집 침입 기도 사건이 발생하고 연이어 어떤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비로소 사과나무 과수원 마을은 '살인'을 둘러싼 새로운 공포로 휩싸이고, 유일한 지역신문 <꿀벌>은 날마다 새로운 소식을 전하며 마을에 긴장을 고조시킨다. 

작은 과수원 마을 배인스빌의 사람들에게 <꿀벌>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작은 사건사고는 물론 사과 꽃 축제와 같은 마을의 행사도 전달하는 매체일뿐만 아니라 때로는 마을 사람들간의 결속력을 다지는 소식지의 역할도 톡톡히 할 것이다. 

그러나, 러들로 옛집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한 <꿀벌>의 뉴스는 힐디를 비롯한 <핵심>의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사건과 관련한 마을 안팎의 소식을 <꿀벌>이 정확하고 진실한 소식을 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주인공 힐디는 <핵심>에 새로운 고문이 된 전직 기자출신인 베이커 폴턴의 주문(?)을 통해 진실을 담는 기사를 얻어내고 만들어내는 기자와 신문(언론)의 역할을 서서히 깨우치게 된다. 물론, 이미 하늘나라도 가버린 그녀의 아버지도 가슴 속 깊이에서 그녀를 이끌고 있지만.... 

마을에 닥친 아니 고의적인 음모를 둘러싼 지역 신문 <꿀벌>에 맞선 <껍질>의 승리는 '정보 과잉 시대에 신문은 사람들이 신뢰하는 매체가 되어야 한다. 가장 빠를 필요는 없다. 심지어 마지막이 되어도 좋다. 그러나 반드시 옳아야 한다'는 피트 해밀의 말('뉴스는 동사다.'중에서)을 사례(事例)처럼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진실을 왜곡하거나 또는 미처 진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기사같지 않은 기사, 뉴스같지 않은 뉴스로 그렇지 않아도 바쁜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혼란스럽게 하고 아까운 시간을 훔치는 돼먹지 못한 엉터리 신문과 언론 종사자들에게 꼭~ 권하고픈 책이다. 

껍질을 벗기란 말이야, 껍질을!
껍질을 못 벗기겠으면, 있지도 않은 껍질을 만들어 씌우지나 말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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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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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두 번째 권이다.
첫 번째 권은 제목도 신선 아니 충격적인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라는 책으로 작년에 무척 파격적(?)으로 읽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무렵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였을까... 한창 명작의 원전 읽기가 화두처럼 불거졌었던 것같다. 그래서인지 나뿐만 아니라 원전에 대한 욕구에 목말라하던 이들에게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는 한줄기 신선한 바람과도 같았을 것이다.
더구나 저자 자신이 현재 우리가 또는 우리의 아이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명작동화가 탄생한 독일에서, 세계적인 대안교육 기관으로 손꼽히는 발도르프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쓴 글이라니 신빙성이 더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발도르프 선생님인 저자가 들려주는 애초의 독일동화인 백설공주에는 그 어디에도 '공주'라는 말은 없었다. 다만 '새하얀 눈 아이'만 있었을 뿐. 다만 '새하얀 눈 아이'가 이런저런 연유로 '공주'가 되었다는 것! 즉, 원작을 무시한 엉터리 번역을 거치며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콤플렉스까지 생겨나게 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저자 나름의 논거는 다름아닌 원작자인 그림 형제의 이야기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가 아니라 가족들을 위한 가족동화인 백설공주였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이 책 역시 그림 형제의 작품을 바탕으로 저자는 독일어와 영어를 병행하여 실어놓고, 단어 하나의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가 발도르프 대학에서 4년동안 들었던 '언어조형'수업을 통해 발견하고 깨달았을 '왜곡'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 일련의 개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데렐라'는 이미 첫 번째 권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에서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온가족이나 사회 전체가 읽는 가족동화가 아니라 그저(?) 아이들이 '재미'로 읽는 많은 명작동화 중 하나이다. 물론 단순한 '재미'만이 아니라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뻔하게 담고 있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읽는 신데렐라는 이미 아이들도 '재투성이'란 뜻임을 알고 있다. 신데렐라가 바로 재투성이라는 뜻임을 대부분의 책들이 알려주고 있기에...... 

물론, 발도르프 선생님의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에는 액면 그대로의 '재투성이'의 의미만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재'가 의미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재투성이'란 그저 먼지처럼 '재'가 묻어 있는 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재'를 입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재투성이는 재를 입고 있는 아이로, 결국엔 '재'를 벗고 황금옷을 입는 아이가 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인격을 상징하는 '옷'의 의미를 되새겨준다. 

그림 형제의 원작에는 '재투성이'의 모습뿐만 아니라 번역과 왜곡을 거치는 동안 바뀌고 변질되어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이야기를 복구해내고 있어 마치 또 다른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어머니의 무덤이며 아버지의 모자와 '어린 나뭇가지'와 새하얀 새 등등이 정말 생소하다.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에서보다 더 폭넓게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어쩌면 당시에는 표출하고 있는?) 의미를 파헤치는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는 원작에 대한 갈구를 더욱 타당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문득,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읽는 명작들이 단순히 원작의 번역상 왜곡이 아닐 수도 있다는 오기가 피어오른다.
오늘날 주로 어린아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명작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애초의 명작이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을 위한 가족동화였다는 점과 더불어 사회가 어린아이들을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즉, 애초의 이야기는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성인)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그에 비해 어른들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 원작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적당한(?) 손질을 거쳐야 하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공주가 탄생하고, 재투성이는 옷이 아닌 먼지와 같이 다소 가벼워진(?) 것이 되지 않았을까.....물론, 예기치 못한 부작용(?)의 하나로 '공주 콤플렉스'가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요즘의 명작은 아이들만 읽는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발도르프 선생님의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읽혀지던 이야기가 애초에는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분명 신선한 이야기이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과연 이것이 아이들만 읽는 동화란 말이야? 라는 소리가 절로 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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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치 - 제7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미래의 고전 11
보린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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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치'.. 참 제목이 심상치 않다.
무슨 뜻일까? 뿔등에서 났다고 뿔치라고 하였단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 

살강이와 뿔치가, 당할머니가 유언처럼 남긴 이삭항의 이삭 대감을 찾아가 용궁 가는 길을 물어 용궁으로가서 뿔등에서 태어난 뿔치의 신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아봐야 하는 일, 그것은 이 이야기의 시작이고 끝이 되는 아주 표면적인 목적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살강이가 뿔치가 끊임없이 떨쳐내고자 하는'부정(不淨)!' 바로 그것이 최종의 목적이라 할 수 있을까...... 

낯설기보다는 왠지 신비감을 더해주는 것같은 '보린'이란 이름의 작가가 이야기에 앞서 들려주는 어린시절 그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TV화면에 초점을 모으고 목청껏 따라 불렀던 '두근두근 울렁울렁 가슴 뛰지만~... 펼쳐라 펼쳐라 너의 모험담~....'이란 만화영화의 주제가가 친근하고도 울렁거리게 다가왔다.
그리고 들려주는 작가의 '맛난 모험 한 그릇'! 

당할머니의 살강에 살짝 두고간 아이, 살강이와 검무기의 뿔등에서 태어난 아이, 뿔치의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이름하여 해상 판타지!
용이 되지 못한 검목이(이무기) 뿔등에서 난 뿔치는, 십 년만에 찾아온 큰 풍랑으로 마을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기 씨가 말라버린 끝말 섬사람들에게는 모든 잘못을 탓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이고 부정일 수밖에 없었다.

섬의 모든 악재를 깨끗하게 몰아낼 부정을 없애는 것만이 끝말 사람들의 일편단심으로 모아지고 그리하여 몰아낼 부정이 된 뿔치. 뿔치를 부탁하던 당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지키기 위해, 뿔치와 끝말 섬을 도망쳐 흰 바다 너머 검은 바다, 검은 바다 너머 붉은 바다, 붉은 바다 이삭항 이삭 대감을 찾아 용궁을 가려했던 살강이. 

끝말 사람들은 용케도 도망치는 그들을 붙잡아 결국엔 이무기 골짜기로 밀어넣는다. 모든 부정을 말끔하게 몰아내려는듯........그러나 그곳에서 돛의 씨앗 세 개와 제 목숨을 바꿔버린 뿔치의 이무기와의 위험한 거래가 맺어진다.

주문을 외워 던지면 장작개비 위에라도 파초처럼 돛을 펼쳐 아무리 험한 파도라도 길을 열어 준다는 돛의 씨앗. 용궁으로 가야만하는 뿔치에게 결코 거절할 수없는 유혹이 된 돛의 씨앗.  세 개의 돛의 씨앗은 뿔치와 살강이의 모험이 펼쳐지는 내내 언제쯤 씨앗을 쓰게 될까...하는 궁금증에 긴장을 더해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문득 전래동화 <여우누이>의 막내 오빠가 쫓아오는 여우누이에게 내던지는 빨강, 노랑, 파랑의 세 개의 주머니가 떠오르기도 한다.

우여곡절을 겪고 살강이와 뿔치가 도착한 용궁에서 뿔치의 부정한 이유와 바래님이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와 이무기가 용이 되지 못하는 이유까지 죄다 알게된 살강이와 푸른 용을 해하고 동쪽 바다까지 집어삼키려는 붉은 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세 번째 돛의 씨앗을 집어던지는 뿔치.
그리고 마침내 쏟아지는 반전들! 

살강이와 뿔치를 비롯하여 검무기와 곰치, 깍짓동, 귀신상어, 소금더께 등... 왠지모르게 살가운 느낌의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바다를 무대로 펼치는 모험 속에 알듯모를듯한 이야기가 더욱 흥미롭다.
살강이와 뿔치는 물론 읽는 이들에게도 적잖은 놀람과 허무(?)에 더하여 짠!하고 들려주는 것은 살강이와 뿔치가 그토록 '떼어내려 했던 더께처럼 그들을 짓누르고 있던 '부정(不淨)'의 실체. 

"남들이 붙여 놓은 것은 본질이 아니라 이름일 뿐이니, 너희에게 붙은 것은 그것도 부정 그 자체가 아니라 부정이란 이름일 뿐이거늘." 

문득, 남들에게 보여지고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에 연연하며 살아가고 있는 요즘의 우리들의 가슴 속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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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지 말라는 거야? - '금지'와 '허용' 사이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 1
마르크 캉탱 지음, 브뤼노 살라몬 그림, 신성림 옮김 / 개마고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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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지 말라는 거야?'라는 제목이자 질문에 대뜸 '정말 그걸 몰라서 물어?'하고 반박하고픈 마음이 몰려온다.
어느덧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 된 우리는 저마다의 사회가 특별히 '금지'하고 있는 것만 잘 지킨다면 훨씬 더 '허용'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텐데.... 왜 굳이 '금지'되는 것을 부각시켜 부정적인 시각을 키워주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앞선 탓이다.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시리즈의 첫 번째 권인 이 책은 아마도 여태껏 자신들을 감싸주던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세상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딛는 청소년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에 대해서 가장 크게 느낄 혼란스러움 또는 의문점을 해소라도 해주려는 듯하다. 부제가 '금지'와 '허용'사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컨대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내용을 읽어보면 이른바 본격적인 '사회'에서 살아갈 때 지켜야 하는 질서와 규칙들, 예를 들면, 의무조항이나 금지조항같은 것들에 앞서 청소년들의 생활에서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 풀어내고 있다.
청소년인 아이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야하니 처음부터 하나하나 아이들의 생활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는 셈이랄까... 

솔직히 그전에는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설득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저 학교는 학교대로 학칙이며 규칙이 있고, 또 사회에 나가면 회사나 각종 모임이나 단체에서는 나름의 사규나 회칙을 정해놓고 의당 따라야 하는 것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고보면, 안 되는 것보다는 지키고 따라야 할 것을 우선시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되는 것보다는 안 되는 것, 허용보다는 금지를 앞세워 부정적인 면을 더 부각시키기라도 한 것일까?

다행스럽게 이 책은 일방적으로 '금지'를 다루거나 주장하지는 않는다. '금지'조항이 필요한 연유와 스스로 자제하고 때에 따라서는 강제로 금지하여야 하는 이유도 있음을 다소 조심스레(?) 들려준다. 
금지조항은 그저 제약과 규제, 통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호존중과 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인간이 살아가는데 불가분한 요소임을 거듭 강조한다.

물론, 금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음의 내용도 잊지 않고 있다.
'금지조항은 완벽을 주장하지 않으며, 세상은 항상 변하고 진보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금지조항들에 대해 토론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커다란 자유일 것이다.'(본문112쪽) 

그러고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금지도 허용과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규칙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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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자! - 왜 당장 시작하지 않는 거야?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 2
마르틴 라퐁 지음, 모니크 프뤼당-미노 그림, 이충훈 옮김 / 개마고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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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자!'는 강력한 메시지 자체가 제목인 이 책. 그러나 정작 본문을 읽어나가려면 그다지 일방적이지 않다. 오히려 구구절절 설득조이다.  

언제부터인가 지구가 응급상태임을 환경가들은 물론 생태연구가와 과학자들, 심지어는 시민단체에 개인들까지 나서서 사이렌을 울려대고 있다. 지구의 허파가 숨을 못 쉬고 있다네,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어가고 있다네, 지구의 강과 바다가 오염되어 가고 있다네.....심지어는 지구 위에 살아가는 생태계도 위협을 받고 있다네,있다네,있다네....... 

지구는 물론 지구 위에 살아가는 자연과 생물들이 위험에 빠진 그 이유란 과연 무엇때문? 그것은 이제 초등학생 아이들도 다 아는 다름아닌 인간들때문!
그렇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소비와 낭비가 불러일으킨 결과인 것이다.
바로 인간들의 잘못된 '행위'에 의해 지구는 이제 더이상 푸른별이 아닌 고갈되고 황폐해지고 썩어가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난리법석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동네수퍼에 가면 온갖 일회용품들이며 세제들이 부리나케 팔려나가고, 쓰레기통은 넘치고, 주말이면 곳곳이 차량들로 교통정체를 빚는 광경이라니....... 

태초의 신에 의한 천지창조와 같은 다소 서정적(?)인 지구와 생명체의 탄생을 시작으로 펼쳐가는 이 책에는 태초의 창조물과 다름없는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머니 지구 위에서 마음껏 사냥하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음에 감사드리는 순수한 인간의 모습.

그러나 어느 순간, 인간은 지구의 품 안에서 감사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지구의 자원을 약탈하고, 마치 자신이 지구와 지구 위 모든 생명체들의 주인인 양 행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이며 산업의 발달... 어느새 인간은 지구 위의 모든 것에 군림하며 진보만이 최선의 가치로 여기며 자기최면(?)에 빠져든 것이다.
그 결과, 무한한 지구는 어느새 고갈되어 가고 황폐해져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더이상 날 괴롭히지 말라고....... 

먹이피라미드의 최고 자리에 우뚝! 선 자신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라도 되는 듯, 먹이사슬의 최강자인양 오만방자를 떠는 인간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다. 지구와 자연을 마음껏 유린하고도 부족해서 이제는 인간들끼리 속고 속이며 살아가는 모습이 그야말로 접입가경이 아닐 수 없다. 먹을 거리로 장난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믿고 먹을 것이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구절구절 읽다보면 정말 낯이 뜨거울 뿐이다. 여태껏 어느 생명체보다 용량이 커 자랑스럽던 인간의 두뇌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인류의 발전이며 과학을 비롯한 온갖 발전이 오히려 저주스럽다. 그저 지구 위의 생명체로 다른 생물들과 비슷하게 살아왔더라면.....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온갖 발달과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쌓아올린 오늘날 인류의 모습(성)은 어쩌면 모든 인류가 함께 쌓아올린 모래성이 아닐까?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의 멸망은 당연지사이므로....) 

'왜 당장 시작하지 않는 거야?'라는 앞표지의 다그침에 앞서, 여태껏 인간의 행동에 의한 결과에 대한 반성보다도 인간 본연에 대한 반성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솔직히, '지구를 구하자!'는 제목이 살짝 낯뜨거움도 느낀다. 과연 인간이 지구를 구할 능력은 고사하고 생각이나마 있는지 말이다. 당연 오늘날 지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지구를 망치지 않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드니.....그것 참... 

본문에서처럼 몇몇 정신이 제대로 박힌 모자란(?) 놈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그 몇몇 모자란 놈들이 그래도 지구를 지킬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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