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와 아미 컬처
이지행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BTS 하면 떠오르는 게 몇 가지 있다. 자로 잰 듯한 칼군무, 서사에 기초한 음악 등. 이것들 외에도 몇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들의 팬덤 '아미(Adorable Representative MC for Youth)'일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미는 단순히 BTS에게 꽃길을 깔아준 팬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후에는 아미란, 단순히 BTS를 세계 최정상의 가수에 올려 놓은 팬을 초월해 그들과 함께 동시대를 걷고 있는 동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까지 BTS가 거둔 성과는 화려하다. 한국 가수 최초의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1위, 빌보드뮤직어워즈 본상 수상, 전 세계 메인 스타디움 공연 매진, 유엔총회 연설, <<타임>> 표지, 문화훈장 수상, 그래미 노미네이션' 등이 이를 말해준다. 이 중 어느 하나 '한국 가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것이 없다. 이처럼 BTS가 이뤄낸 성과의 원동력으로 전 세계 언론이 한결같이 짚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이들의 팬덤인 아미다. 아미가 BTS의 음악과 콘텐츠를 소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메시지를 체화하고 전파하며 보여주는 글로벌 결속력은, '취향의 공동체'가 어떤 대상을 향해 신념에 가까운 열정을 보여줄 때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로 평가받는 BTS의 시작은 초라했다. 중소 기획사 출신의 가수라는 이유로 방송 출연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BTS는 무대 뒤의 일상과 모습을 인터넷에 꾸준히 업로드했다. '방탄 로그' 같은 자체 콘텐츠에는 순간순간의 불안과 각오가 담겼다. 방송 출연의 대안으로 제작한 자체 콘텐츠에 그들만의 서사가 덧붙는 순간이었다. BTS는 한국에서 2015년에 'I NEED YOU'라는 곡으로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2014년 KCON(K팝 콘서트)에서 엄청난 갈채를 받으면서 심상치 않은 기미를 보인 바 있다. 2014년 발매한 앨범 'SKOOL LUV AFFAIR'는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에서 인지도조차 없던 BTS의 앨범을 빌보드 월드 앨범 차트 3위에 올라가게 했다.

 BTS 팬의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BTS만 좋아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다른 K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오로지 BTS에만 열광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생겨난 반(反) BTS 정서는 오랫동안 전 세계의 아미를 괴롭혀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공격은 글로벌 아미의 결속력을 강화했다. 아미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은, 후에 해외 팬들이 오직 BTS만을 위해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계기가 됐다. 결국 BTS와 아미는 K팝의 변두리에서 출발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현재 BTS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보이 밴드이고, 아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팬덤이다.

 아미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의 투표 문화다. 아이하트라디오(iHeartRadio)는 2014년부터 '아이하트뮤직어워즈'를 개최해 왔다. 2018년 1월, SNS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BTS가 보이 밴드와 팬덤 부문의 후보로 올랐기 때문이다. 소셜 투표로 진행된 수상자 선정 방식은 간단하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후보의 해시태그를 만들거나 아이하트의 홈페이지에서 직접 투표를 하면 된다. 그런데 트위터에서 BTS는 한국 계정 중 가장 많은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2019년 5월 기준으로 BTS의 팔로워는 2,000만 명 이상이었는데, 하루에도 수십만 명의 팔로워가 새롭게 유입되고 있다. 그래서 트위터는 BTS와 아미의 소굴이나 다름없다.

 가장 큰 위협은 베스트 팬덤 부문에 함께 오른 한국 아이돌 엑소(EXO)의 팬덤이었다. 그러나 아미는 각 부문의 경쟁자들을 1억 표 이상의 차이로 따돌리고 두 개 부문을 모두 거머 쥐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해시태그 투표는 빌보드 톱소셜 아티스트 투표였다. 2017년 5월, BTS는 팬들의 환호 속에 빌보드 톱소셜 아티스트 수상자에 올랐다. 전 세계의 아미들이 빌보드 시상식과 온라인을 점령하며 BTS를 미국의 메인 시상식장으로 보낸 것이다. 사실 BTS가 빌보드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낸 때는 2015년이었다. 하지만 팬덤은 서구의 메인 음악 시장이 BTS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SNS 투표를 통해 수상자를 결정하는 선정 방식은 아미에게 최적화된 것이었다. BTS는 2018년 2년 연속으로 빌보드 톱소셜 아티스트 부문의 수상자가 되는 동시에 그들의 새 앨범 타이틀곡인 'FAKE LOVE'의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일주일 후, BTS의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2019년, BTS는 빌보드 본상인 톱 듀오·그룹 수상자에 오르면서 빌보드 본상을 탄 아시아권 최초의 가수가 됐다.

 BTS와 아미의 주무대는 트위터다. 2018년 한 해 동안 트위터에서 BTS와 관련해 생산된 해시태그는 1억 개가 넘는데, 이 중 대부분이 전 세계 실시간 트렌드 1위에 올랐다. 트위터의 트렌드 순위는 아미에게는 접근하기 쉽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무료 홍보 수단이다. 트위터상의 아미 사이에서는 BTS와 관련된 것들을 해시태그로 만들어 실시간 트렌드 1위에 올리는 일이 하나의 관행이다.

 트위터에서 이뤄지는 아미의 활동을 본 미디어는 이를 기초로 기사를 쓴다. 그만큼 아미는 트위터에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이 중 교육적 목적으로 활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타래(스레드) 홍보'다. 아미는 트위터에서 BTS에 관심을 표하는 일반인들에게 BTS를 홍보하기 위해 타래를 쓰곤 한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가 발표한 2018 결산 글로벌 아티스트 순위에서 BTS가 2위를 차지했다. 디지털과 앨범 판매, 스트리밍, 뮤직비디오 뷰 수 등 한 해 동안 전 세계 음악 시장을 대표하는 지표를 집계해 만든 차트다. 답은 아미의 압도적인 구매력이었다. 그들은 실물 앨범과 디지털 음원을 전투적으로 구매했다. 이 덕분에 BTS는 2018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실물 앨범을 두 번째로 많이 판매한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다.

 BTSX50States는 미국 50개 주의 BTS 팬 사이트 연합으로 이들은 라디오 홍보, 풀뿌리 캠페인, 광고, 프로젝트 등을 통해 미국 전역에 BTS를 알렸다. 이중에서 라디오는 미국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들은 라디오 공략에 공을 들였다. 각 지역의 아미들은 자신이 사는 곳의 라디오 방송사들을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빌보드 앨범 차트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 방송사를 분류하고 디제이를 만나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다. 이 같은 미국 아미들의 노력과 BTS의 미국 방송 출연으로 인지도가 상승하자, 라디오에서 BTS의 노래가 서서히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아미들은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오면 영상을 찍어 디제이에게 전송했다. 이는 곧 더 많은 선곡 횟수로 이어졌다.

 2019년 BTS의 새 앨범 'MAP OF THE SOUL: PERSONA'가 출시된 첫 날, 미국 라디오들은 그 날 하루에만 타이틀 곡인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무려 850회에 걸쳐 틀어줬다. 이 노래는 단숨에 미국 팝라디오에어플레이(Pop Radio Airplay)의 메인 차트 41위에 올랐고, 한 달 뒤에는 이 차트의 톱 20에 들었다. 미국 아미들의 라디오를 뚫기 위한 오랜 헌신이 보상을 받는 순간이었다.

 K팝이 유튜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간 2000년대 중반, 이 흐름을 효과적으로 이끈 것이 바로 유튜브 리액션 비디오였다. 리액션 비디오를 생산하기 시작한 주요 집단은 '게이 커뮤니티'였다. 이들은 자신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하위 문화로서 K팝을 소비했다.

 LGBTQ 팬들이 본격적으로 BTS에 호의를 보인 것은 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아티스트에 대한 멤버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BTS는 성소수자 아티스트의 음악을 소개하고 그들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밝혀 왔다.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성을 넘어 BTS의 존재 자체가 LGBTQ 커뮤니티에게 위로가 된 것은 'LOVE YOURSELF' 시절부터였다. BTS의 메시지는 세대와 인종을 넘어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넸지만, 그중에서도 이 메시지를 깊이 각인한 사람들이 바로 LGBTQ 팬이었다. LGBTQ 팬들이 BTS 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첫째, BTS의 메시지, 둘째, 아미의 포용력 때문이다.

 K팝에 무지한 북미와 유럽의 음악 팬들이 BTS의 열렬한 팬이 되면서 기존의 K팝 팬 구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K팝과 멀리 떨어진 지역, 특히 미국 팬들의 열렬한 팬덤이 유독 BTS에게만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언더독 서사'다. 소규모 기획사 출신의 주목받지 못한 출발, 유독 악의적인 루머와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오직 음악으로만 답해온 BTS의 모습이 언더독의 성공 신화에 열광하는 서구, 그중에서도 미국인들의 구미에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들의 언더독 정체성은 미국 사회에서 소수로 취급받는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에게 동일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17년 이후, 팬의 폭이 훨씬 다양해졌지만 기존의 미국 BTS 팬 중에서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 등의 유색 인종과 퀴어 팬들이 눈에 띄게 많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소수자로서의 정서적 공감대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아미의 언어 문화에서 눈에 띄는 점은 동시대 현실에서 주류 언어와 비주류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처지와 감정이 역전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해외 팬덤을 관찰할 때 주목할 만한 점은 언어의 장벽이 주는 좌절감이 역전된다는 사실이다. 공식 뮤직비디오나 네이버 V앱의 '달려라 방탄' 같은 일부 콘텐츠를 제외한 대부분의 BTS 관련 콘텐츠에는 영어 자막이 없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발적인 팬 번역가인 '번역계'가 영어 자막을 붙이기는 한다. 이때까지 영어권 아미 등은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제1 세계 시민으로 우월한 문화적 지위를 놓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이런 감정은, 세상에서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곳과 타 문화권에 관해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실 다른 K팝 팬덤에도 번역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아미의 번역가와 다른 K팝의 번역계를 분명하게 구분짓는 점은 이들이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고민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번역은 단지 뜻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문화적 지식이 요구된다. 그들 스스로 공부하면서 변역을 하는 것이다.

 BTS가 지금처럼 세대와 인종을 뛰어넘는 팬을 거느리게 된 저변에는 깊은 공감대가 자리하고 있다. '성장하는 존재'로서의 BTS에 관한 공감대 말이다. 십대와 이십대 팬들에게는 롤 모델이자 공감 가는 동세대로, 삼십대와 사십대 팬들에게는 자신이 지나쳐 온 청춘의 불안한 연약함과 성실한 자기 극복의 상징으로서, BTS라는 불완전한 존재가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의 아름다움에 모든 세대가 동참하는 것이다.

 한편 BTS의 음악에 담긴 메시지를 접하면서 생긴 변화에 대한 열망은 팬이라는 개인적 존재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대한 변화의 열망으로 확장된다. 바로 이때가 그저 소비자 주체로 치부돼 왔던 팬덤이 사회적 주체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BTS의 노래에 담긴 핵심 메시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며 끊임없는 경쟁과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 모두를 위한 메시지다. 누군가는 이것이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감성적인 메시지일 뿐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미는 이런 비판 등에 아랑곳하지 않고 BTS의 메시지를 개인의 삶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전파해 지금보다 더 나은 개인과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결국 아미는 BTS가 던진 메시지를 기초로 개인을 넘어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 가려는 존재들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BTS와 아미 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고 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BTS와 아미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 있다.

 끝으로 현재 진행형인 BTS와 아미의 동행도 언젠간 끝을 맺으며 K팝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날이 온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개인과 사회의 더 나은 변화를 바라며 음악과 팬덤을 통해 함께 걸어온 BTS와 아미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동행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켜본 동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피 세계사 - 한 잔의 커피로 마시는 인류 문명사
탄베 유키히로 지음, 윤선해 옮김 / 황소자리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해 스무 살 넘은 한국인 1명이 마신 커피의 양은 353잔이었다. 이는 전 세계 1인당 소비량인 132잔의 3배에 달한다. 인구 대비 커피 매장 수도 미국·중국·일본보다 많다. 고급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국내 수요가 늘어나면서, 스타벅스 리저브 바·블루보틀·커피앳웍스 같은 매장이 늘고 있다. 특히 스타벅스는 한국에 고급 매장(리저브 바)을 많이 개설했는데, 그 수가 인구 1,000만 명당 9.8개다. 전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수다(조선일보, '당신이 1년간 마시는 커피 '353잔'', 2019. 8. 30.). 그만큼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유별나다.

 따지고보면 커피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기호식품이다. 이런 커피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커피라는 사물은 도대체 어떻게 탄생해 지금에 이르렀을까'였다. 커피 역시 다른 사물처럼 역사를 지닌 물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커피 세계사>>를 알게 됐다. 이 책은 커피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조망한다.

 커피의 역사를 짚기 전에 커피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부터 다루는 게 좋을 듯하다. 커피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고 봤을 법한 단어가 '모카'일 것이다. 모카는 어떻게 만들어진 어휘일까? 모카는 아라비아 반도 남단에 위치한 예멘의 항구도시다. 17세기, 예멘과 에티오피아 산지에서 수확한 커피콩을 이 항구에서 유럽으로 수출했다. 이 과정에서 모카는 가장 오래된 커피 브랜드이자 이후 고가에 거래되는 고급 커피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전반, 모래가 쌓이면서 항구는 폐쇄되고 만다. 그러나 모카라는 브랜드는 그대로 살아 남아 근린 항구로부터 수출됐고, 그 명성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음료인 커피는 커피나무라고 불리는 꼭두서니과 식물의 종자(커피씨)로 만들어진다. 커피의 총 소비량은 하루 약 25억 잔인데, 이는 물과 차(1일 약 68억 잔) 다음으로 많다. 국가별로 소비량을 살펴보면 북유럽 국가가 가장 높다. 1위인 핀란드는 1인당 평균 1일 약 3.3잔이며 미국은 1.2잔이다. 일본은 1.0잔을 기록했다.

 '커피'라는 명칭은 아라비아어의 '카와qahwah'에서 나온 말로, 커피가 유럽으로 본격 수출되면서 coffee(영국), cafe(프랑스), kaffee(독일) 등 각국어로 파생됐다. 일본에는 네덜란드인이 처음으로 전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의 koffie에서 따와 '코히'라고 불리게 됐다.

 중세 아라비아의 사전 편집자에 따르면, 아라비아어의 카와는 '식욕을 줄여준다'는 뜻의 단어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것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커피가 본격적으로 음용되기 시작한 15세기경부터 '수면욕을 없애주는' 음료를 지칭하는 것으로 정착한 듯하다. 카와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커피나무의 원산인 에티오피타 서남부의 '카파kaffa'라는 지역명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주로 재배되는 커피는 아라비카종과 로부스타종인데, 여기에 리베리카종을 더해 '커피의 3원종'이라고 한다. 이 중 아라비카는 전 세계 생산량의 60~70%를 차지하며, 에티오피아 서남부 에티오피아 고원이 원산이다. 나머지 30~40%는 로부스타가 차지하고 있는데, 로부스타의 원산은 중앙 아프리카 서부다. 리베리카의 원산도 중앙 아프리카 서부다.

 시중에 있는 커피 관련 책을 살펴보면, 커피와 인간의 최초 만남과 관련해 두 가지 에피소드가 존재하고 있다. '염소치기 칼디 발견설'과 '쉐이크 오말 발견설'이다.

 분자진화시계에 따르면, 커피나무의 기원은 '중신대(약 2,300~53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약 1,440만 년 전 카메룬 부근(중앙 아프리카)에서 근종 식물과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커피나무 동종(커피나무속)이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 열대림으로 확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커피나무는 아프리카 각지에서 다양하게 분기됐다. 이것은 약 420만 년 전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때 소말리아 반도에서 진화한 것 중 일부가 인도 연안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로, 탄자니아에서 진화한 것 중 일부는 코모로 제도와 마다가스카르섬으로 전파됐다.

 인류가 최초의 커피로 이용한 것은 아라비카종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녹병이라는 병해가 세계적으로 만연하면서, 내병 품종 탐색이 이뤄졌다. 이때 발견한 것이 바로 로부스타종과 리베리카종이다. 로부스타종과 리베리카종은 중앙 아프리카 서부에서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지만, 아라비카종의 탄생 경위는 이와는 다르다. 아라비카종은 커피나무가 아프리카 각지에서 진화를 거친 후, 탄자니아 서부 고지대에서 자생하는 '유게니오이디스종eugenioides'이라는 커피나무에 로부스타종 화분이 수분되면서 탄생했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만 년 전 에티오피아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 이미 아라비카종도 에티오피아에 널리 서식하고 있었다.

 앞서 밝혔던 것처럼 두 가지 커피 발견셜은 '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라고 있던 커피를 발견했다'는 이야기지만, 각각의 탄생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실제 최초의 만남은 이와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커피나무가 이미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에티오피아에서 유라시아로, 그리고 세계 각지로 여행을 떠나게 됐다. 이는 약 7만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아라비카종이 에티오피아에서 세계로 퍼져나간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재배 작물은 세계로 퍼져 커다란 영향을 준 '확산형'과 한정된 지역에 머물렀던 '국소형'으로 나뉜다. 이 중 후자로는 에티오피아 고지대에서 재배되는 곡물인 '테프'와 '엔세테'를 들 수 있다. 아라비카종도 이들처럼 고도 1,000~2,000미터의 열대 고지대에 적응한 식물이다. 따라서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를 떠난 후에도 에티오피아 산속에 남겨져 현지인들만이 아는 존재가 됐다.

 에티오피아 서남부 부족들이 언제부터 커피를 이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에티오피아 서남부에 관해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남긴 자료다. 이들이 에티오피아 서남부로 진출해 커피를 이용하고 있던 현지 부족을 처음 만난 때는 9세기경이라고 추정된다.

 에티오피아인이 예멘으로 건너 갔음에도, 노예로 팔려간 탓인지 이들이 커피를 전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대 이후 세계 학문의 중심으로 떠오른 페르시아 의학서에 커피로 추정되는 생약이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초경, 테헤란 근교의 '레이'라는 마을에 한 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 라지Al-Razi'였다. 그는 925년에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의학집성>>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이 책은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과거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책에 '분 혹은 분카'라는 이름의 식물 열매와 종자로 끓여서 만든 약이 등장한다고 한다. 여기서 분은 15세기 이후 아라비아어로 커피콩과 커피 열매를 의미했다.

 알 라지 이후 약 100년 뒤, 페르시아에서 또 한 명의 뛰어난 학자가 활약한다. 이름은 '이븐 시나Ibn Sina'. 그가 1020년에 쓴 <<의학전범>>의 약 해설에 '분큼 혹은 분코'라는, 예멘에서 전해진 식물 생약이 실렸다. 이 역시 분처럼 커피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두 문헌이 등장한 시기와 에티오피아 서남부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간 시기 및 예멘에서 그 수가 증가한 시기가 겹친다는 점은, 이 시기에 아라비아 반도에 커피가 전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근거 중 하나로 쓰인다.

 한편 10~11세기에 간신히 모습을 나타내는 듯하던 커피 관련 기술은 이후 400년이 넘도록 관련 문헌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커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5세기 예멘이었다. 라수르 왕조 말기, 알 라지 이후 약 400년이 흘렀을 때 예멘에서 커피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마 이 시기에 에피오피아에서 예멘으로 커피가 다시 전래된 듯하다.

 14~15세기에 걸쳐 에티오피아 서남부에서 이파트를 거쳐 홍해 연안부, 예멘에 도달하기까지 비교적 거대한 사람들의 이동이 있었다. 이 움직임 이후 15세기 예멘에서 커피가 모습을 드러낸다.

 15세기가 되면, 커피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로 예멘에서 확산한 '카와'다. 카와는 14~15세기에 에티오피아 홍해 연안부에서 예멘에 도래했지만 처음에는 커피 이외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예멘에 최초로 소개된 카와는 커피가 아니라 하라 원산인 '캇Khat'이라는 식물의 잎으로 만든 차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15세기에 접어들어 예멘의 아덴에서 커피로 만드는 카와가 발명된다. 예멘에 카와를 전했다고 알려진 사람은 샤즈리 교단의 수피인 '알리 이븐 우말 아 샤즈리'다. 당시에는 아직 빈촌이었던 모카로 이주해 사람들에게 포교를 했다.

 캇을 이용한 커피는 15세기 초 모카에서 예멘 각지의 수피들에게 전파됐다. 커피처럼 고지대에서만 자라고 신선도가 중요한 캇을 사람들은 예멘의 산속에서 재배했다. 산과 멀리 떨어진 항구마을 아덴은 캇을 구하기 어려웠다. 아덴 수피들은 구하기 어려운 캇의 대체재는 없는지, 어느 수피 도사에게 질문했다. 그는 '무하마드 자말린 아 자부하니'다. 자부하니는 '커피 열매와 종자에도 캇과 같은 성분이 있으므로, 그것으로 카와를 만들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 무렵, 커피 카와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둘 다 현재의 커피와는 다르다. 하나는 '기실(껍질) 카와', 또 다른 하나는 '분(커피 열매) 카와'다. 예멘의 카와가 세계에 알려지는 과정 속에서 기실은 모습을 감추고 분만 남았다. 분 카와가 콩 부분만을 사용하는 현재의 커피로 변모한 것이다. 그래서 '카와가 커피의 기원이다'라고 할 수 있다.

 커피 카와는 캇과 달리 장기간 보존과 수송에 용이했다. 이 점 덕분에 머지 않아 예멘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더 나아가서는 이슬람권 타 지역으로도 확산했다.

 1470~1495년에는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예멘인 거주 지구에서 커피 카와가 음용되면서 이 지역과 교류하던 마을의 사람들에게도 전파되기에 이른다. 수피가 졸음 방지용으로 마셨음을 물론 이슬람 학교의 학자와 학생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학업과 업무에서 능률 향상을 위해, 또는 단순 기호식품으로서 커피를 이용했다.

 1500년경, 메카에서 '카페하네(커피하우스라는 뜻)', 즉 커피를 마시는 전문점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 다만 카페하네에는 기본적으로 남성만 드나들 수 있었다. 1510년경에는 당시 이슬람 대국이었던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수도 카이로에도 커피가 전해졌다.

 또 다른 이슬람 대국 오스만제국에도 16세기에 커피가 전파됐다. 이스탄불 시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16세기 중반이다. 오스만제국이 직접 재배한 커피가 더 널리 보급됐는데, 커피가 많은 이슬람 교도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예멘의 주요 특산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에 오스만제국은 1544년경부터 예멘 주민의 캇 재배를 제한한다. 대신 외화획득수단인 커피나무 재배를 장려했다. 오스만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서 커피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1554년이다. 두 명의 시리아인 하킴과 샴스가 커피하네를 오픈한 것이 계기라고 한다. 16세기 중반, 오스만제국에서는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이 수피즘에 빠지기 시작했고, 커피와 카페하네가 유행했다. 원통형 수동 배전기와 커피 그라인더 등 커피 전용 기구도 이 시대에 이스탄불에서 고안됐다.

 한편 이슬람권에 확산된 커피는 16세기 후반 유럽인들에게도 소개됐고,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유럽까지 도달한다. 크게 네 개로 이뤄진 루트는 각각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연대가 이른 순서대로 정렬하면 '지중해 루트-동인도회사 루트-파리 루트-빈 루트' 순이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 무렵, 레반트와 이스탄불에서 유럽인들이 목격한 것은 분이었다. 따라서 유럽에는 지금처럼 커피콩만 이용하는 형태가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유럽으로 건너간 커피는 영국·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에 정착했는데, 이 중 프랑스에서는 카페가 프랑스 혁명의 시작점 역할을 했다. 커피는 미국으로도 건너갔는데, 그곳에서는 커피하우스가 공민관으로 쓰였다. 이후 커피는 나폴레옹 시대와 대공황, 제1·2차 세계대전 등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부침을 겪어가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거의 매일 마시는 커피의 맛 등에는 관심을 보여도 역사에는 그만큼의 흥미를 갖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상황 속에서 커피의 기원과 변천 과정, 현재 모습 등을 통해 세계사의 흐름을 바라볼 수 있어 흥미진진했다. 

 개인적으로 한 사물의 역사 등을 알게 되면 그 사물을 보는 사고가 그만큼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비춰봤을 때, 이 책은 우리에게 커피에 관한 사고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일상 속 익숙함으로 인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커피와 관련된 사고의 폭을 넓히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재인 대통령이 근 한 달간 논란의 중심에 있던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솔직히 옳은 선택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임명된 이상, 조국 신임 장관은 사법 개혁이라는 대의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이전에 조 장관이 고 노회찬 전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조 장관이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하다˝고 일갈했던 노 전 의원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업무를 추진해 나갔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한론 - 아베, 일본 우경화의 뿌리 살림지식총서 529
이기용 지음 / 살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7월 4일부터 시작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일본산 불매 운동, 8월 2일에 있었던 일본의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 8월 22일에 발표된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연장 종료 결정 등의 일들이 진행되면서, 한일 관계는 무기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거의 전쟁 수준까지 간 것 같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원인은 결국 일본이 제공했는데, 그렇다면 왜 일본은 이렇게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한 걸까? 그 이유를 파악하려면 먼저 아베와 그를 위시한 일본 우익의 사상을 알아야만 한다. 아베와 그의 주변에 포진한 일본 우익의 핵심 사상에는 '정한론'이 자리 잡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과거사에 관한 책임과 반성을 회피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이 보이는 이런 태도의 근간에는 정한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을 진정한 반성의 길로 유도하려면 한일 관계를 파탄시킨 침략 사상의 원형, 정한론의 실상을 이해하고 뿌리 뽑아야 한다고 한다. 더구나 현재 일본에서 정한론이 무서운 생명력으로 부활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규명과 시정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한론은 일본 근대화의 기점인 메이지 초기에 등장한 사상으로, 불행한 근대 한일 관계의 서곡이자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연원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일본의 침략 사상인 정한론은 메이지 초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정한론의 근원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건국 과정을 담은 <<일본서기>>는 일본의 기원과 형성 과정을 다룬 책으로, 한반도에 관한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이 너무 신화적인 데다가, 초기 기록자의 조작과 후세의 개작이 더해지면서 사실로 볼 수 없는 왜곡된 부분이 많다. 고대 천황제 국가에서 천황의 정당성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편찬한 책이기에, 한반도와 관련된 내용은 사실성이나 시기적인 부분에서 많이 왜곡돼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많다. <<일본서기>>에 기술된 내용 중에서 아직까지도 일본인의 뇌리에 각인돼, 한일 간의 긴장 관계나 무력 충돌이 있을 때마다 상기되는 이야기가 바로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설'이다. 내용은 신탁을 받은 진구 황후가 신의 보호 아래 신라를 무력으로 침공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했다는 것이다. 이후 삼국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고 종속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 허구의 설화는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 기해동정이라고 불리는 쓰시마 정벌, 임진왜란, 메이지 초기 정한론 등, 한일 간의 긴장 관계나 무력 충돌이 생길 때마다 다시 포장되고 재생됐다. 이 설화의 내용은 일본을 천황 중심의 신국으로 보는 인식과 조선을 향한 멸시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삼한 정벌설이 등장했는데, 결국 일본에 침략적인 집권자가 등장할 때마다 이 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둔갑돼 침략 행위에 힘을 실어줬다.

 임진왜란 이후 등장한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선린우호의 길을 열었다. 이는 에도 막부의 문을 연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조선을 문화와 학문의 선진국으로 간주하고 다시 교류하길 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삼한 정벌설에 근거한 침략적인 시각은 잠시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삼한 정벌설에 입각한 '조선 멸시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에도 초기 유학자들이 형성한 '조선 존중론'과 대치하는 조선 멸시론과 속국론이 하야시 시헤이라는 사람에 이르러 침략론으로 발전한다.

 한편 정한론과 관련해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은 1853년에 미국의 함선을 이끌고 와 개항을 요구한 페리 제독의 행동에 자극을 받았다. 이에 그는 천황을 중심으로 서구를 무찌르자는 '존황양이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속 대상으로 조선과 아시아를 겨냥하는 침략론을 펼쳤다. 요시다 쇼인은 삼한 정벌설을 최초의 조선 침략으로서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그 위에 자신의 침략론을 펼쳤다. 그가 구상한 조선 침략론의 중심에서 삼한 정벌설이 부활한 것이다. 이 사상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주창한 '대동아공영권'의 원론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멸시론과 침략론이 요시다 쇼인에 의해 집대성돼 체계화된 정한론으로 결실을 맺었음을 볼 수 있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 열강의 압박에 못 이겨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막부 체제의 무능을 비판하면서, 막번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천황 중심의 '국체론'을 이념으로 삼았다. 이 이념의 근거는 삼한 정벌설이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은 존황국체론과 일치한다. 그래서 정한론은 천황 중심의 신국을 수립하고, 이 위세를 몰아 조선을 정벌하자는 '존황정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메이지 초기에 이르러 정한론으로 이어진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와 동조자들은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세운다. 이는 도쿠가와 봉건 막번 체제를 무너뜨리고 일본을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변모시킨 정치사회적 개혁이었다. 이 시기에는 열강의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논리가 통했다. 그러자 일본 내에서도 내적으로는 민권을 탄압하고, 외적으로는 식민지 확장을 통해 국권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것의 첫 단계가 바로 정한론이다.

 메이지 정부 내에서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해 정한론을 처음 발의한 사람은 당시 참의(각료)였던 '기도 다카요시'다. 당시 조슈 번(오늘날의 야마구치현)의 역할과 대조선 외교에서 보여준 지위를 감안했을 때, 그의 발언에는 영향력이 있었다. 메이지 정부의 집권자는 요시다 쇼인의 존황국체론을 계승해, 왕정 복고를 알리는 서계(공식 외교 문서)를 조선에 보냈다. 그런데 서계에서는 메이지 천황을 조선 국왕보다 위에 뒀다. 

 종래 선린우호의 격례와 양식, 내용과는 다른 서계를 본 동래부사 정현덕은 문서 수납을 거절하고 일본 사절을 돌려보낸다. 조선은 조선 시대 이래로 이어져 온 일본과의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다. 이후 조선 정부가 일본에 서계 양식 변경을 요청했지만, 메이지 정부는 '황(皇)'과 '칙(勅)'이라는 문구를 고수한 채 사신을 보냈다. 이는 메이지 정부가 요시다 쇼인의 존황정한론을 그대로 계승해 외교 정책에 반영한 결과다.

 조선이 계속해서 일본 사절을 돌려보내자, 메이지 정부는 1869년 12월에 쓰시마를 통한 대조선 교섭을 중단한다. 교섭을 중단한 일본은 당시 외무대록이었던 사다 하쿠보 등을 조선으로 파견해 실상을 파악하도록 한다. 그런데 사다 하쿠보는 조선으로 가기 전부터 삼한 정벌설을 사실로 규정하고 과격한 정한론을 주장했다. 1870년 4월에 돌아온 사다 하쿠보는 "조선과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과격한 정한론의 주장을 담은 <<건백서>>를 제출했다. 이 내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재현하자는 것이었다.

 정한론은, 1873년에 사쓰마(오늘날의 가고시마) 출신의 집권자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 등 메이지 정부 내에서 파벌을 가르는 심각한 정치 문제였다.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불리는 '정한 논쟁'은, 왕정 복고를 알리는 문서를 조선에 보낸 후 교착 상태에 빠진 대조선 교섭에서 정한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실행 방법과 시기의 차이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메이지 정부의 내분을 초래한 정한 논쟁은 즉시 정한을 주장한 자나 시기상조를 이유로 반대한 자나, 정한이라는 대외관의 본질에서는 같았다. 따라서 이 논쟁의 진상은 권력 내부의 파벌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메이지 초기의 정한론은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계승한 것이며, 메이지 정부 수립 직후 정치적 불안이 생기자 조선 침략을 통해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 서구 열강에 정치·경제·심리적으로 입은 압박과 손해를 보상받으라는 요시다 쇼인의 주장을 그의 제자와 동조자들이 실천에 옮긴 것이기도 하다.1876년, 드디어 조선 침략의 첫 단계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됐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조선을 강제 병합할 때까지 일관된 대조선 침략 정책을 수행했다.

 정한론자로 이뤄진 메이지 정부가 일본의 부국강병을 성공시키려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국민 통합이 필요했다. 메이지 정부 수립 직후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는 1888년 6월에 추밀원에서 제국 헌법 초안을 심의한다. 당시 그는 "일본에서 중심이 될 존재는 오직 천황가뿐이다"라고 단정한다. 이 결과, '천황제'가 국가 통합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이는 요시다 쇼인의 존황국체론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주의 침략 사상'과 도쿠토미 소호의 '대일본 팽창론'이 등장한다.

 현대 일본은 어땠을까?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연합국 군정의 지배를 받는다. 전후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에 천황이 있다고 보고 천황제 폐지를 고려한다. 그러나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천황제 폐지 시 있을 일본 국민의 반발과 패닉을 생각해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점령 정책에 유리하게 활용하기로 한다. 이로 인해 천황은 책임을 면하게 됐다.

 1947년, 지금의 '평화헌법'인 일본 헌법이 제정되는데, 천황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남게 됐다. 천황이 면죄되면, 천황을 따른 국민들만 전쟁과 침략에 대한 반성을 통감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황의 면죄는 현실로 나타났다. 이렇듯 쇼와 천황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일본은 침략 전쟁에 대한 책임을 매듭 짓지 않고 넘어가 버렸다. 심지어 천황은 '더 비참할 수 있었던 일본을 구원했다'는 전후 평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전후 일본 우익의 천황 숭배와 정한론 부활의 씨앗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아베 정권 우경화의 원인이기도 한데, 아베도 천황 숭배자다.

 아베는 재집권 1년차인 2013년 12월 26일,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과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참배했다.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배경에는 과거 일본이 벌인 침략 전쟁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기시 노부스케를 향한 존경심이 깔려 있다. 

 또한 아베는 2006년 1차 집권 시부터 평화 헌법 개정을 주창했다. 재집권 후에도 그는 정치 생명을 걸고 다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평화 헌법을 자주 헌법으로 바꾸고, 자위대를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강한 군대'로 만들자는 게 요지였다. 2014년 7월 1일, 평화 헌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헌법 해석 변경이라는 변법으로 각의 결정을 거쳐 집단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했다. 왜 아베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집단 자위권을 추진할까? 그리고 왜 그릇된 역사관에 기초해 망언을 일삼을까? 이를 알려면 아베의 배경과 본질 사상을 알야야 한다.

 아베의 고조 할아버지인 오시마 요시마사는 1894년에 청일전쟁이 있기 전 불법으로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의 사령관이었다.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이자, 전후 일본 우익 보수 정치의 대부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걸 봤을 때 아베는 뿌리 깊은 우익 집안의 구성원이다. 이런 아베가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묘소에 찾아가 참배를 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은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아베의 고향이자 선거구인 조슈 번의 하기에서 사숙을 열어 천황 숭배와 정한론을 설파했다. 그렇기에 아베가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살펴보면 아베 정권의 향후 방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도 아베 주변에는 2차 세계대전 전범과 관련되거나 일본 제국주의에 동참한 사람들의 후손과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들이 포진해 정권의 핵심 보직을 맡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우익 사상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정한론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살펴봤다. 사실 일본과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 갈등의 주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정한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한론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본을 상대한다면,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봉합 수준에 머물 것이며 우리의 이익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일본과의 갈등이 첨예해진 이 시점에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정한론을 학습해 일본 우익의 사고 체계를 파악한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내가 외교 전문가는 아니기에 조심스럽지만, 이럴 때일수록 일본의 양심 세력과 전 세계에서 일본의 참회를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해 아베 정부를 압박해 나가는 기본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작품 <<파친코>>. 강렬한 도입부만큼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의 삶도 참 기구하다. 도대체 역사는 각 인물들을 어떻게 망쳤으며, 그들은 어떻게 이에 맞서며 살아갈까? <<파친코>>는 재일 한국인 가족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를 그려냈다.

 부산 영도가 고향인 훈이 엄마와 아버지. 그들의 유일한 혈육인 훈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언청이인 데다가 한쪽 발이 뒤틀린 장애까지 갖고 있다. 이런 아들을 키우는 훈이의 부모는 먹고살기 위해 하숙을 치기 시작한다.

 훈이가 27살이 되던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다. 그럼에도 훈이의 부모는 생계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1년 뒤, 훈이는 한 가난한 집안의 막내 딸인 양진이와 결혼한다. 둘은 결혼해 아이를 낳긴 했지만 모두 죽고 딸인 선자만 살아 남았다. 훈이는 유일한 자식인 선자를 아끼지만, 선자가 13살이 되던 해에 결핵으로 죽고 만다. 남편과 시부모를 모두 잃은 양진은 혼자서 선자를 키우고 하숙집을 운영해 나간다.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1932년, 평양에서 백이삭이라는 목사가 양진의 하숙집을 찾아 온다. 그의 형인 백요셉이 오사카로 가기 전 이 하숙집에 머문 적이 있어 동생에게 오사카에 오기 전에 한번 묵으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삭은 이미 하숙객으로 꽉 차 있는 양진의 하숙집에서 지내게 된다.

 한편 선자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시장에 간다. 필요한 물품을 다 사고 집에 돌아가려 할 때, 일본인 학생들이 선자를 에워싸고 희롱하기 시작한다. 선자는 그들에게 제대로 저항할 수 없어 당하고만 있었다. 이때 시장에서 생선 중매상으로 일하는 고한수가 일본인 학생들을 쫓아내 선자를 구해낸다. 이 일로 둘은 가까워졌고 만나는 사이까지 발전한다. 그리고 성관계까지 맺게 되면서 선자는 한수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 선자는 오사카에 갔다 돌아온 한수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 그런데 한수는 오사카에 자신의 본처가 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3명의 딸을 낳았다고 고백한다. 선자는 이 말에 충격을 받는데, 한수는 그런 선자에게 엄마인 양진과 뱃속의 아이와 같이 살 수 있도록 집을 구해주겠다고 말한다. 선자는 한수에게 배신감을 느껴 그에게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말해 버린다.

 선자는 아이를 가진 사실을 양진에게 말했고, 양진은 이 일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아이를 낳게 되면, 선자가 손가락질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아이를 호적에 올리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양진에게 이삭은 자신이 선자에게 청혼을 해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 안 되겠냐고 묻는다. 양진은 이를 허락한다. 이삭이 선자에게 청혼하자 선자도 이를 수락한다. 이삭과 선자는 요셉이 있는 오사카로 향한다. 둘은 요셉과 그의 부인 경희가 사는 집에 살게 된다. 이삭은 오사카에서 한 교회의 부목사로 일한다. 얼마 후, 선자는 아이를 낳는다. 비록 이 아이는 한수의 아이지만, 요셉은 이 아이를 자신의 친조카라 생각하고 '노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몇 년 후에는 이삭과 선자 사이에서 또 다른 남자 아이가 태어난다. 이 아이의 이름은 '모자수'다.

 노아가 6살이 되던 1939년의 어느 날, 요셉이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요셉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 이삭의 교회로 간다. 그곳에서 교인들로부터 이삭이 신사참배를 거부해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말을 듣게 된다. 요셉은 곧바로 경찰서로 갔지만 이삭의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이삭이 갇혀 있는 동안, 요셉만으로는 집안 형편이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희와 선자는 장사를 하기로 한다. 경희가 김치를 담그면 선자가 그것을 팔았다. 선자가 한창 장사를 하던 어느 날, 근처에서 숯불구이점을 운영하는 김창호라는 사람이 선자에게 다가왔다. 그는 선자의 김치가 맛있다고 소문났다면서 자기 식당에 팔라고 했다. 선자는 김치를 담근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며칠 후에 주겠다고 말하면서 창호를 돌려 보냈다. 며칠 후, 선자와 경희는 김치를 가지고 창호의 가게에 갔다. 창호는 선자와 경희에게 자신의 가게에서 반찬을 만들어주면 안 되겠냐며 제안한다. 선자와 경희는 이를 받아들인다.

 노아가 8살이 되던 해였다. 노아가 집에 돌아왔는데 거지꼴을 한 사람이 집에 쓰러져 있었다. 알고보니 그 사람은 이삭이었다. 이삭은 2년이 넘는 투옥 기간 동안 고문을 심하게 당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원래 몸이 약한 체질이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선자가 그를 간호했지만 애석하게도 이삭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1944년 12월, 창호는 선자와 경희에게 전시 체제로 인해 더 이상 가게를 운영할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경희와 함께 시장으로 간다. 홀로 남은 선자가 가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가게에 찾아왔다. 그는 한수였다. 선자는 깜짝 놀랐다. 한수는 충격을 받은 선자에게 창호의 가게는 사실 자신의 가게이고, 선자가 오사카에 온 이후부터 그녀를 쭉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한다. 한수는 선자에게 곧 미군이 오사카를 폭격할 테니 가족과 함께 자신의 지인이 운영하는 농장으로 가라고 말한다. 선자는 집으로 가 떠날 준비를 하지만, 요셉은 나가사키에 일자리가 있다면서 나가사키로 떠난다. 결국 요셉을 제외하고 선자와 경희, 노아, 모자수만 한수가 알려준 농장으로 피난을 간다. 선자와 나머지 가족이 농장에서 전쟁의 참극을 피하고 있을 때, 한수는 한국에 있는 양진을 찾아 농장으로 데려온다. 또 부하들을 시켜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인해 부상당한 요셉까지 찾아 농장으로 데려온다. 요셉은 큰 부상을 당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 한수가 노아의 친부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수가 야쿠자의 보스라는 사실까지 알고 만다.

 전쟁이 끝난 후 선자의 가족은 다시 오사카에 돌아온다. 양진과 선자는 장사를 하고, 경희는 아픈 요셉을 간호했다. 노아는 대학 입시를 봐도 되는 나이까지 자랐고, 모자수도 학교에 다니게 됐다. 두 형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차별을 받아왔다. 하지만 노아는 공부를 잘했기에 동생인 모자수보다는 차별을 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모자수는 성적도 안 좋아 더 많은 차별을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주먹으로 자신을 멸시하는 상대를 혼내줬다.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자 모자수는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모자수는 싸움에 휘말리는 게 피곤하다고 여겨 방과후에는 엄마의 가게에서 일을 도왔다. 한창 엄마의 일을 돕고 있던 모자수는 배가 고팠는지 김밥을 사 먹고 오겠다며 가게 밖으로 나선다. 그러다 양말 가게 점원인 지아키를 보고 그녀에게 가 대화를 나눈다. 둘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 손님이 가게로 들어와 지아키를 희롱한다. 모자수는 그 손님에게 주먹맛을 보여줬다. 모자수는 곧바로 엄마의 가게로 도망쳐 왔는데 경관이 가게로 찾아온다. 경관은 선자에게 몇 가지를 물으면서 조사를 한다. 이때 선자의 가게 단골이자 파친코 게임 가게 사장인 고로가 들어와 경관에게 몇 마디 하자 경관이 돌아가버린다. 고로는 모자수에게 당장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지 말고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라고 말했고, 모자수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모자수는 고로의 밑에서 일하게 된다.

 노아는 와세다대학에 합격한다. 하지만 등록금이 문제였다. 이것 때문에 고민하던 선자와 노아에게 한수가 손을 내민다. 한수는 노아의 등록금을 내주고 도쿄에 있는 자취방까지 잡아준다. 선자와 노아가 한사코 거절했지만 한수는 막무가내였다. 한수 덕분에 노아는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형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모자수는 고로의 새로운 파친코 가게 운영인이 된다. 그리고 유미를 만나 결혼해 솔로몬이라는 사내 아이를 낳는다.

 학교에서 공부에 매진하던 노아는 한수가 자신의 친부임을 알게 된다. 노아는 오사카로 가 선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선자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얘기한다. 노아는 자신의 친부가 야쿠자 두목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오사카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간다. 이후 노아는 선자에게 편지를 부쳤는데, 그 내용은 대학을 그만두고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앞으로는 자신을 찾지 말아 달라는 것, 한수가 지원해준 돈을 갚겠다는 것 등이었다.

 나가노에 도착한 노아는 그곳에 있는 파친코 매장에서 경리 일을 맡았다. 노아는 일을 아주 성실하게 잘해 일하고 있는 파친코의 책임자가 됐다. 그리고 같은 경리 직원인 리사와 결혼해 아이 넷을 낳는다.

 선자는 노아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수가 노아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며 그녀를 차에 태우고는 나가노로 향한다. 그곳에는 노아가 운영하는 카지노가 있었다. 선자는 바로 노아에게 달려간다. 모자는 오랜만에 얘기를 나눈다. 그런데 노아가 선자에게 충격적인 말을 한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 중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면서, 이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순간 큰일이 나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한 후 노아는 선자를 돌려보내면서 곧 집으로 연락하겠다고 약속한다. 며칠 후 선자는 한수로부터 노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노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은 후로도 양진, 선자, 경희, 모자수, 솔로몬은 각자 자신의 삶을 치열하고 처절하게 살아 나간다.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디테일하게 잘 이뤄졌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인으로 살아가길 바라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노아와 모자수, 솔로몬의 심정이 잘 표현됐다고 본다. 이 덕분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아 일본 국적을 취득한 노아의 심정이 아프게 느껴졌다. 또 일본에게 나라를 뺏긴 상황 속에서도 먹고사는 문제를 더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서민들의 감정도 세세하게 잘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선자와 그녀의 손자인 솔로몬까지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이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역사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역사가 이들을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아 넣었다. 그럼에도 선자와 가족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강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삶을 꾸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의 치열한 삶은 단순히 생계 때문만도 아니고 일본에서 인정받으려는 노력만도 아닌 개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행위였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파친코에서 일하는 노아와 모자수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지만(선자의 가족에 비해 한수의 비중은 작기에 한수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불법을 자행하며 장사를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능력이 닿는 선에서 법을 준수하며 정직하게 일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끝으로 최근 한일 양국이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데, 이런 시점에 이 책을 읽으니 마음이 어지럽다. 그럼에도 한 가지 생각은 명확하다. 선자의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각종 혐한 시위와 일본 내에 존재하는 재일 한국인을 향한 부정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굳세게 살아가는 현재의 재일 교포들도 개개인으로서의 존엄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역사는 선자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들을 고난으로 밀어버렸다. 하지만 선자와 그녀의 가족뿐만 아니라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 한국인들 역시 이런 역사에 관계 없이 꿋꿋이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 이처럼 역사의 비극 속에서도 강인하고 굳세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이번 리뷰의 제목을 '역사가 그들을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정하게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