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별책 - 태조·정종·세종실록에서 찾은 태종 이방원 이한우의 태종실록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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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조실록》의 이방원 - 몸소 앞장서다.

 

이방원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시기가 바로 《태조실록》 시절이다. 이 시기 이방원의 모습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조선을 개창하고 이성계가 왕이 되는 굵직한 사건에는 항상 이방원이 있었다. 실록에 이방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시절 가족들을 대피시키면서부터다. 이때 이방원은 가족들을 스스로 호위하면서 "최영은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우리는 무탈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방원이 말한 대로 가족들은 무사했었다.

 

이후 정몽주를 격살하는 일,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문제 등등 굵직한 사건마다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태조실록》을 볼 때 고려해야 할 부분은 《태조실록》이 이방원의 집권기에 저술됐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객관성을 확보한 기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객관성'을 가질 순 없다. 역사는 과학이 아니니까.

 

《태조실록》에서 가장 주관적으로 기록된 부분은 무인정사, 즉 1차 왕자의 난이다. 이방원은 자신의 정적인 정도전을 급습하였고, 궁궐을 장악하여 쿠데타에 성공한다. 문헌에 나온 정도전의 모습은 무척 비굴하다. 그러나 정도전의 저서와 《태조실록》의 여러 부분들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이방원에게 목숨을 애걸했을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승자의 기록이다. 사관이 아무리 객관적인 기록을 쓴다 하더라도 왕의 치부를 함부로 드러낼 순 없다. 태종은 쿠데타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했고, 사관들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지존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기록은 이렇게 탄생했다.

 

아무튼 이 시기의 이방원은 얌전한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와 같았고, 그랬기에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다. 스승과도 같은 정몽주, 정도전과 갈라섰고 이복형제들을 참살했으며 아버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권을 잡았다.

 

2. 《정종실록》의 세자 이방원 - 지존을 위한 준비 기간

 

 이방원은 치밀했다.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는 결국 왕위 서열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목표인 왕좌가 눈앞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표면적으로는 후퇴하는 것이지만 이보, 삼보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종 역시 야심가인 동생의 요구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랬기에 세자 자리에 이방원을 책봉해 스스로 권력에 욕심이 없음을 공표했다. 이 시기 조정은 이방원의 사람들로 채워졌고, 권력의 실세는 왕이 아닌 세자였다.

 

 정종시기의 큰 사건으로는 2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이방간의 난과 사병 혁파다. 사병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이방원이기에 군권의 분산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방간이 군사를 일으킨 것도 따지고 보면 사병을 혁파하지 않아서였다. 방간의 군사를 진압하면서 방원은 심적으로 많이 착잡했을 것이다. 1차 왕자의 난 때에 죽인 동생들은 배가 달랐지만, 방간은 자신의 동복형제였기 때문이다. 난을 진압한 뒤 방원은 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고 사병을 혁파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이방원은 공부에 열중했다는 점이다. 세종이나 성종, 정조와는 다르게 태종은 취임 이후 경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 시기에는 경연에 열중했는데 최고의 제왕학 교제인 《대학연의》를 주로 읽었다. 실록에 나온 태종의 독서 스타일은 무척 독특하다. 세종의 경우 정독을 고집하는데 반해 태종은 핵심과 포인트 위주로 책을 접근했다. 무인 이미지가 강한 태종이지만 그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문사이기도 했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과거에 합격한 이력이 있는 왕은 태종뿐이다. 세종처럼 매일 책을 끼고 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독서를 등외시 하진 않았다. 자기가 읽고 싶거나 필요한 책은 꾸준하게 봤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학술 논쟁을 할 때에도 밀리지 않았다. 아무튼 공부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방원이 세자 시절에 경연에 열중이고 독서에 집중했다는 사실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3. 《세종실록》의 상왕 이방원 - 세종의 든든한 후견인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세종을 든든하게 후견한다. 이 시기 표면적으로는 세종이 왕이었지만, 실질적인 실권은 태종이 가지고 있었다. 태종은 권력의 핵심인 인사권과 군사권을 놓지 않았고, 세종 역시 모든 정치적 의견은 태종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 시기 중요한 사건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세종의 장인 심온의 처결이고 또 하나는 대마도 정벌이다. 어느 것 하나도 세종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일들인데 태종은 아들과 조선을 위해 다시 한번 악역을 자처했다.

 

 심온은 세종이 충녕대군으로 관심을 받을 때부터 교만하게 행동했다. 태종의 심복인 박은이 몇 번 눈치를 줬지만 무시하였다. 박은의 말은 사실상 태종의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심온은 미래권력에 가까운 충녕의 장인이라는 지위를 맹신했다. 이후 사위가 왕으로 책봉되고 교만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새로운 실세 심온에게 관료들은 빌붙기 시작했고 그런 움직임은 외척을 강하게 경계했던 태종의 불안을 사기에 충분했다. 온화한 세종의 성격으로 볼 때 장인인 심온을 강하게 처벌할 순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욕심 많은 장인에게 휘둘려 뜻대로 정사를 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랬기에 태종은 자신의 아들을 흔들 수 있는 조선 국왕의 권위를 흔들 수 있는 심온을 처결하기로 결심했다.

 

 대마도 정벌도 마찬가지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왜구를 소탕할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군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세종이 정벌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마도 정벌의 결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한데 핵심은 이 정벌을 기점으로 왜구들의 소행이 100년 동안 잠잠해졌다는 점이다. 이렇듯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세종과 조선을 위해 힘썼다. 세종의 권력을 뒤흔들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했으며, 왜구를 정벌하여 대외적인 위협도 제거했다. 그랬기에 세종은 안정적이고 탄탄한 권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혁신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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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8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8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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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 틀 무렵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태종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왕좌에 오른 뒤 가장 불행했던 순간이 바로 재위 18년이었기 때문이다. 양녕의 일탈 문제로도 머리가 아픈데, 여기에 정점을 찍은 것이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은 태종과 민씨의 막내아들로 유독 부모의 사랑을 극진하게 받은 자식이었다. 성녕의 죽음 앞에 태종은 절규하고 마음과 멘탈의 안정을 위해 개경으로 떠났다.

 

 태종이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때에도 세자인 양녕은 바뀌지 않았다. 성녕이 죽었을 때에는 활쏘기를 하였고, 어리와 관계는 계속되어 아이까지 가졌다. 장인인 김한로는 세자를 위해 어리를 궁으로 보내줬고, 이들의 밀애는 이어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태종은 또다시 격노했다. 세자를 바르게 이끌어야 할 사돈인 김한로가 오히려 세자의 일탈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신하들과 외척에게는 가혹한 태종이었지만 세자 양녕에게는 무척이나 다정했다. 일탈하는 아들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주변을 내치고 회유하고 타이르는 등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자의 반성은 이어졌고 태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또다시 믿었다. 그러나 세자는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어리를 찾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태종은 분노했고, 세자는 어리가 아닌 숙빈을 뵈려고 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것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태종은 또다시 양녕을 믿었다. 그러나 분노한 양녕은 태종에게 항의성 서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세자 교체의 도화선이 됐다. 양녕의 서신을 압축하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아버지는 숱한 여자를 거느리면서 왜 나 보고만 그러냐, 또 하나는 어리를 잃게 된다면 훗날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미래의 왕은 자신이니 잘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태종은 진노했다. 저를 위해 온갖 악역을 다 맡았건만 돌아온 것은 아들의 협박이었다. 중전의 반대가 있었지만 태종의 마음은 이미 싸늘했다. '저런 놈을 왕위에 올려서는 안 된다. 어떻게 기틀을 잡은 조선인데.'

 

 태종은 심복인 박은과 측근들과 모의 끝에 세자를 교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양녕을 폐한 뒤 끝내 신료들 앞에서 진심 어린 눈물을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앞날은 밝아야 한다. 태종은 충녕을 왕세자에 올린 뒤 얼마 되지 않아 은퇴 선언을 한다. 신료들과 세자는 영문을 모르고 궐 앞에서 양위 불가를 외쳤지만 태종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그렇게 그는 18년간 탔던 호랑이 등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흔히 태종을 두고 권력의 화신이라고 이야기한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아버지와 형제에게도 칼을 겨누고 피를 보는 폭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태종은 권력의 화신이었다.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처단했다. 공신은 물론이요 처가, 사돈까지도 박살 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태종이 왜 그렇게 권력에 집착을 했느냐이다. 사람들은 권력욕이 있다는 것을 사리사욕과 결부 지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권력을 탐한 지도층은 사리사욕과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럼 태종은 어떨까?

 

 그는 권력만을 쫓지 않았다. 권력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의 목표는 무엇일까? 강대한 조선이었다. 아버지 이성계가 이룩한 신생국가 조선의 기틀을 다잡기 위해서는 강한 권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랬기에 태종은 옥좌에 오른 이후 이후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사적으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가 단순하게 권력을 집착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양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태종은 세종을 세자로 책봉한 뒤 재빠르게 양위를 한다. 이 시기 태종의 권력은 막강했다. 나라의 기틀도 다잡았고 신하들도 충성을 다했다. 바꿔 말하면 그가 은퇴를 선언한 시기는 그의 권력이 정점을 향하던 시기였다. 한참 잘나가는 시대에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세간에서 말하듯 태종이 권력만을 탐한 지도자라면 권력의 정점에 퇴임을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오히려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태종의 양위는 조선 역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범적인 케이스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이름난 조선의 명군들도 양위를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왕에게 있어 세자는 권력의 측면에서 해석했을 때 후계자이기도 하지만 경쟁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조는 공을 이룬 광해군을 질투하여 왕위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뿐일까? 조선 후기의 명군이었던 숙종과 영조도 권력욕을 포기하지 못하고 몸이 상할 때까지 장기집권을 고집했다. 그러나 태종은 가장 강력한 시기에 권력을 아들에게 양도했으며, 스스로 아들의 후견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런 양위 사례는 조선을 통틀어 찾아볼 수 없으며, 세계의 어느 왕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범적인 모습이었다.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실로 이미 충분하다."

이 말 한마디에 은퇴를 선언한 태종의 진심이 모두 들어 있었다.

 

태종이 왕좌에 오른 것은 조선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태종이 양위를 한 것 역시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양녕을 폐함과 동시에 새로운 국왕인 세종을 뒤에서 후원하려는 의도였다. 충녕은 무척 똑똑하지만 정치는 똑똑하다고 잘하는 것이 아님을 태종은 잘 알고 있었다. 정치는 경험이었고 어린 세종은 노회한 신료들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랬기에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아들에게 정치를 직접 가르치고자 하였다. 물론 조선의 왕들이 일상적으로 행했던 대리청정 시스템으로 훈육할 수도 있었지만 태종은 실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기에 최고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새로운 조선과 성군 세종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태종의 발 빠른 결정 덕분에 한민족은 세종대왕이라는 귀중한 유산을 가지게 됐다.

 

 태종 이방원. 그의 행위를 무조건적으로 칭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18년이라는 집권기 내내 그를 관통한 것은 '부강한 조선'이었다. 그는 조선을 위해 왕이 되었으며, 조선을 위해 왕좌에서 내려왔다. 그는 조선을 위해 살았고 조선을 위해 죽었다. 조선을 위해 사사로움을 끊어냈고, 가족, 아들과도 등을 져야 했다. 그가 걸었던 길은 오해도 많고 고단했으며 외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소명을 잊지 않고 묵묵하게 시대의 악역을 감당했다. 공적인 삶이 어떠한 것인지, 큰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진정한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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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7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7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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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7년 (1417)에 태종을 괴롭힌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세자 양녕이고 또 하나는 가뭄이었다. 집권기 후반에 접어들어 태종은 강화한 왕권을 바탕으로 다음 정권을 위해 정부 수뇌부 인사교체를 하는 등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문제는 세자였던 양녕의 일탈이 가면 갈수록 심해졌는데, 가장 정점을 찌른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1416년 하륜과 이숙번을 내치고 박은을 좌의정으로 올린 것은 전적으로 세자를 위한 조치였다. 박은은 명나라 사신도 인정한 충신이었고, 소신 있으며 지방관 경험과 중앙 실무를 두루 걸친 행정의 달인이었다. 능력도 탁월하며 사욕을 채우지 않은 인물이니 안심하고 뒷일을 맡기기에 적임이었던 것이다. 박은 역시 이런 태종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탈하는 양녕을 굳게 지지했고 일깨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정초 1월 1일 신료들과 잔치를 하는 도중 박은은 춤을 추다 뜬금없이 세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태종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토로한다. 이뿐 아니라 4월 15일 잔치 자리에서도 박은은 세자에게 충언을 했고 태종 역시 눈물을 보였다.

 

 기록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든다. 박은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은 과연 급조된 것일까? 군신이 모여 즐겁게 마시는 잔칫날, 그것도 왕이 보는 앞에서 미래권력인 세자에게 충언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 그러나 태종은 이런 박은을 두둔하며 세자에게 명심할 것을 당부하고 세자 역시도 표면적으로는 박은의 충고를 수용한다. 남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하물며 신하가 미래권력인 세자에게 공개적인 훈계를 하는 것은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박은의 돌발 행동은 태종과의 상의를 거쳐서 행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박은의 행동은 태종의 심중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세자의 일탈은 대부분 술과 여자에서 비롯했다. 이 시기 세자는 사대부 곽선의 첩인 어리를 보쌈하여 자신이 취하였다. 구종수와 이오방이라는 소인들과 대궐을 넘나들며 기생, 양갓집 규수를 가리지 않고 동침하는 데 열을 올렸다. 사실을 뒤늦게 안 태종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는 미래권력인 세자를 위해 인사를 교체하고 다음 정권의 기틀을 다지는데 집중하는데 반해 세자는 잡다한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태종은 진노했고 세자의 진심 없는 사과는 이어졌다. 당대 최고의 글쟁이인 변계량이 세자의 반성문을 대필하였고, 세자는 이를 종묘에 고하며 반성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아들 바보였던 태종은 양녕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태종의 콤플렉스는 적통성이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동생을 죽이고 형과 싸웠다. 아버지의 권위에도 도전했고, 그랬기에 태종은 더더욱 적장자 계승 원칙에 집착했다. 비록 자신은 이렇게 왕위에 올랐지만 자기 후대는 적장자가 정상적으로 보위에 오르길 희망했다. 그랬기에 숱한 양녕의 일탈을 보고도 참고 인내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태종이 이렇게까지 사람에게 헌신한 인물은 아버지 이성계와 동복형제, 그리고 아들들뿐이었다. 그중 양녕는 태종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고, 조선의 미래를 상징했다.

 

 태종이 선택한 조치는 바로 세자 주변부를 쳐내는 것이었다. 이오방을 비롯하여 구종수 형제들을 필두로 세자의 일탈을 도운 인물들을 차례대로 사사하였다. 주변을 정리하면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제의 근원은 세자 자체에 있었다. 양녕은 겉으로는 반성하는 척했지만, 태종이 사냥 나간 틈을 타서 서연을 중지하였고 활쏘기에 매진했다. 태종이 가뭄으로 근심할 때, 세자는 더위를 핑계로 서연을 줄였다. 자신의 일탈을 도운 소인들을 사사했을 때에도 병을 핑계로 서연에 소홀하였는데 실록에는 주변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세자 주변을 단속하면서도 태종은 떨어진 세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에 세자를 보내고, 9월 28일에는 사냥을 좋아하는 세자와 함께 강무를 떠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달라지지 않았다. 연말에는 신효창의 금빛 고양이를 빼앗으려다 서연관의 관료들로부터 책망을 듣는다.

 

 조정의 권력 구도는 자연스럽게 둘로 갈라졌다. 세자를 지지하는 쪽인 박은과 떠오르는 샛별인 충녕 대군을 지지하는 심온 쪽으로 신료들이 양분됐다. 박은은 심온에게 충녕대군의 이목이 집중되므로 세자의 권위가 상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를 한다. 심온은 그런 박은을 무시하고 오히려 충녕대군을 두둔하기에 이른다. 조심성 없는 심온의 모습을 통하여 그의 앞날을 손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양녕의 폐세자는 당연하게 느껴진다. 태종이 무엇 때문에 나라의 기틀을 다졌던가. 모두 신생국 조선의 밝은 앞날을 위해서였다. 그랬는데 조선의 미래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아들을 끔찍하게 생각했고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적통성에 집착한 태종이었다. 그랬기에 양녕에 대한 애증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공을 위하여 사를 버려야 하는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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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16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16
이한우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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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집권기 16년을 요약하자면 '다음 왕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겠다. 태종은 15년까지 수도 이전과 8도 행정 정비, 군사 정비, 노비 문제 등등의 굵직한 사건을 해결하면서 신생 국가의 제도를 탄탄하게 다졌다. 이후 사냥을 수시로 즐기고 술자리를 자주 베푸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과시하며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그런 태종이 16년에 집중한 것은 신구세대의 교체를 통해 권신들을 물갈이하고 지난 시대에서 부득이하게 피해를 본 가문들에게 화해를 청한 일이었다.

 

 신구세대의 교체에서 주목할 점은 하륜과 이숙번의 은퇴다. 재위 15년 태종은 자신의 처남이자 외척세력인 민무휼과 민무회를 유배 보내는데 성공한다. 그가 외척을 경계한 이유는 단 하나. 권력의 사유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16년의 시작은 그런 민무휼과 민무회를 자진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후 태종의 칼날은 공신들을 향했는데,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하륜과 이숙번이었다.

 

 눈치 없이 토사구팽 당한 거물급 공신들과 외척들과는 다르게 하륜은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태종의 속내를 잘 읽고 적당하게 일탈을 즐겼다. 태종 입장에서도 하륜은 정권의 핵심 브레인이었고 능력이 탁월했기에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군신으로 맺어졌지만 태종과 하륜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륜은 태종 정권 전반에 걸쳐 권력의 실세인 좌의정을 오래도록 역임했다. 그러나 재위 16년 5월 25일 대대적인 인사 단행이 있었는데 좌의정에 하륜을 물리고 박은을 등용했다. 하륜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태종이 권력구도에 변화를 준다는 의미다. 일선에서 물러난 하륜은 태종에게 밀서를 보내 심온(세종대왕의 장인)과 황희는 소인이라고 등용하지 말 것을 권했다. 이를 본 태종은 하륜에게 실망한다.

 

 하륜은 태종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이점도 태종이 하륜을 경계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결국 시간은 젊은 사람의 편이므로 태종 입장에서는 굳이 자기 손에 피를 묻혀서 내쫓을 필요는 없었다. 똑똑한 하륜도 자신의 영화는 태종 대에서 끝날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설사 다음 왕을 모신다 하더라도, 눈치가 백단이기에 서슬 퍼런 태종 앞에서 다음 왕을 뒤흔들려는 경솔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하륜은 11월 6일 눈을 감고 태종 역시도 최고의 예우로 저승길을 배웅해 준다.

 

 그럼 이숙번은 어떨까? 태종 정권의 위기의 순간 이숙번은 늘 태종을 위해 칼을 잡고 앞장섰다. 1,2차 왕자의 난, 그리고 조사의의 난 등등 굵직한 전장에서 빠지지 않았고 그랬기에 태종의 총애가 남다른 인물이었다. 하륜은 문관 출신이었고 유학을 배웠다. 그랬기에 권력의 중심에서도 적당하게 빠지는 법을 알았지만 이숙번은 달랐다. 그는 무관에 가까웠고 유학을 배웠지만 자신의 성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실록에 나오는 그의 행태를 보면 광포하고 무례하다는 말이 대다수다. 그만큼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았다. 재위 16년에도 이숙번의 선 넘은 행동은 여전했다. 태종이 신하들과 토의 끝에 내린 결론을 두고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세자에게 이야기한 것은 세자를 위시하여 태종을 무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에도 태종은 이숙번의 행동을 눈감아줬다.

 

이후 대대적인 인사개혁을 두고도 불만을 표출했다. 하륜을 물리고 박은을 좌의정에 임명했다는 소리에 '내 밑에 있던 사람이 정승이 됐구나.'라고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이 당시 태종은 가뭄 때문에 심기가 무척 불편했다. 가뭄을 두고 태종은 '1,2차 왕자의 난과 아버지 이성계와 싸운 조사의의 난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토로하며 괴로워한다. 아버지, 형제들과 싸워서 왕좌에 오른 심적인 괴로움을 가뭄에 빗대어 표출한 것이다. 이토록 심리적으로 위축된 시기에 공신인 이숙번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급기야 태종은 노골적으로 이숙번을 가리켜 '이런 신하가 있는데 하늘이 어떻게 비를 내리겠는가.'라고 불만을 표출한다. 이후 이숙번은 공신첩을 회수당하고 유배를 떠난다.

 

 태종은 왜 이숙번을 귀양보낸 것일까. 아마도 그가 자신보다 어리고 다혈질이며 광포한 성격이 걱정됐을 것이다. 만약 세자가 이숙번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정권의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륜은 문관이지만 이숙번은 군사를 다룰 수 있는 무인이었다. 게다가 하륜은 눈치가 빠르고 기민하지만 이숙번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붕당을 만들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태종은 그런 이숙번을 컨트롤할 수 있었지만 정치를 모르는 세자의 입장에서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계산을 끝낸 태종은 끝내 이숙번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끝낸다. 말이 유배지 사실상 고향에 내려가서 마음 편하게 즐기고 여생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문에는 하륜, 무에는 이숙번을 내친 뒤 차기 정권의 실세로 부각된 인물은 박은이다. 박은은 이전부터 태종의 총애를 입었는데, 태종 6년 명나라 사신이 방문했을 때 신하들의 대부분이 명나라 사신에게 아부를 했지만 박은은 규정에 맞게 접대를 하였다. 그래서 명의 사신은 태종에게 조선의 충신은 박은밖에 없다고 속삭였다. 이후 박은은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주요 행정직을 두루 겸임하고 좌의정에 내정됐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무엇보다도 충성을 검증받은 신하를 실세인 좌의정에 배치한 것은 그만큼 다음 정권에 대한 기반을 탄탄하게 준비하고자 하는 태종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또 주목할 부분은 연말에 이방간과 내통한 심종을 교하에 유배 보낸 일이다. 태종은 형인 이방간을 최대한 예우해 줬지만 정치적인 인물을 가까이하는 것은 극도로 예민하게 생각했다. 자신과 칼을 겨눈 형이기에 위험하기도 했고, 새로운 정권을 준비하는 시기에 민감한 움직임이 포착되는 것을 간과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심종은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의 아우였다. 그렇기에 이들의 접촉은 보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심종을 유배보낸 뒤, 태종은 이방간의 녹권과 직첩을 회수하는데 이는 형에게 정치적인 행동은 보이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이렇듯 태종은 여러 인사 조치를 통하여 다음 정권에 대한 준비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또한 지난날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대립했던 정적 정도전의 자손들을 용서했고 금지된 벼슬길을 열어줬다. 나아가 정도전의 손자들에게는 직첩을 내려줬다. 지난날의 시대와 화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를 통하여 악업은 자신의 대에서 끝내겠다는 태종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신하들의 물갈이와 더불어 눈여겨볼 부분은 바로 세자인 양녕과 충녕의 대권 경쟁이다. 16년을 기점으로 충녕의 행보는 한층 대담스러워졌는데 기존의 세종대왕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충녕은 세자에게 여러 가지로 충고를 했는데, 듣는 세자 입장에서도 화가 날 만했다. 옷보단 마음이 먼저라고 일갈하는 것을 시작으로, 태종의 부마인 이백강이 거느렸던 기생을 세자인 양녕이 데려가려고 하자 가족 간에 족보 꼬일 짓은 하지 말자고 말한다. 이때 세자는 무척 화가 나서 충녕을 엄청 미워했다고 하는데 태종 역시도 이런 행동들을 주도면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태종은 잔치 때마다 충녕의 총명함을 칭찬하고 세자를 비판한다. 물론 태종이 세자를 눈외에 둔 것은 아니다. 이해 여름을 기점으로 세자는 본격적인 대리청정에 나서는데 이는 태종이 그만큼 양녕을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이 시기 태종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자신은 세자를 위한 다음 정부의 포트폴리오를 짜고 있었다. 그러나 세자는 이런 태종의 노력을 알지 못하고 건성으로 국사에 매진했으며 9월 24일에는 구종수와 이오방과 궁궐 담을 넘어 일탈한 것들이 탄로 난다. 황희의 적극적인 변호와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아진 것은 없었다. 결국 세자 양녕은 태종 정권의 최후의 걸림돌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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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의 유혹 - 주식 투자에 대한 지각심리학적 이해
오성주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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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에서 단타를 배운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차트이고 그다음은 세력의 심리다. 단타는 그날 변동성이 강한 종목을 대상으로 거래하기에 가치투자에 비해 지수의 영향을 덜 받는다. 주식시장이 붕괴된다 하더라도 경제공황이 오지 않는 이상, 지수를 역행하는 종목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런 종목들은 소위 큰손이라 불리는 세력이 가격을 컨트롤하고 있기에 단타 포지션을 잡는 사람들은 세력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따라서 단타 매매의 알고리즘을 도식화해보자면 차트 안에 숨겨진 세력의 흔적을 분석하고 진입하여 세력이 만드는 추세를 타고 움직여서 자신이 목표한 부분에서 칼같이 익절하고 나와야 한다. 만약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면? 손절 기준에 맞춰서 미련 없이 털고 나와야 한다. 그렇기에 단타 매매에서 가격의 우위권을 가지고 있는 세력의 심리를 읽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단타매매의 핵심은 무엇일까? 단타를 흔히 기술적 분석이라고 칭하기에 핵심으로 '차트'를 손꼽는 분들이 많다. 차트,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차트 역시 크게 보자면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단타매매의 핵심은 '심리'다. 단타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력의 심리'를 차트에서 읽어야 하고, 차트의 눈속임으로부터 '나의 심리'를 보호하며 거래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시중에 많은 단타 관련 책들은 저자 나름의 기법을 통하여 세력의 심리를 차트로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단타로 주식 바닥에서 좀 놀아본 사람들은 '세력의 심리를 알아야 한다.'라는 덕목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단타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력의 심리도 중요하지만 나의 심리 역시도 온전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주식 책에서는 투자자의 심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두루뭉술하게 강조하는데 대체로 이렇다. '주식은 결국 멘탈 싸움입니다. 멘탈을 잡아야 합니다.'라고. 사실 이 표현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력에 관한 심리는 그토록 자세하고 집요하게 분석한 사람들이 유독 투자자 개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왜 추상적으로 갈음하고, 자세하게 고찰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개인의 멘탈을 소상하게 분석하고 진단하는 것은 어렵고 전문적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세력의 심리는 차트의 흔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개인의 심리 분석은 전문적인 심리학과 연관되어 있다. 이를 자세히 고찰하기 위해서는 주식시장에 대한 이해도와 심리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결합되어야 하는데,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의 저자는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다. 주식에 대해서는 성적도 좋지 않고 경험도 일천하다고 겸손해하지만 책에 나오는 단어나 내용을 보면 책을 준비하기 위해 주식에 대해서도 기본 이상 공부한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단타 책이 투자자의 외부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투자자 내부에 심리와 멘탈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 책에는 차트와 투자자를 통하여 여러 심리 이론들을 설명하고 있다. 왜 고점에서 물리는 것인지, 왜 내가 산 주식은 내리고 팔면 오르는 것인지, 현실 세계의 인식과 주식차트의 인식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과 주식장의 시간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거래가 꼬일 때마다 왜 자꾸 뇌동매매를 하는 것인지, 도박과 단타의 닮은 점은 무엇인지 등등... 단타 주린이라면 필수적으로 고민하고 번뇌하던 심리들이 전문가의 해박한 설명을 통하여 자세하게 풀어져 있다.

 

 책에 따르면 단타매매는 가치투자보다 훨씬 어렵다. 단타매매에서 인간의 심리를 흩트리고 유혹할 수 있는 여지가 가치투자보다 많기 때문이다. 책에서 급등주나 변동성이 강한 주식은 인간의 심리를 어지럽히고 뇌동매수를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저자는 되도록이면 급등주는 쳐다보지 말고 묵직한 투자를 할 것을 은근히 권하고 있다. 이 말을 바꿔보자면 "단타 매매자일수록 자신만의 '투자철학'과 '투자기법'을 확립하여 기계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단타를 학습할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이 '기준에 맞는 손절'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손실을 회피하고자 하는 희망도 끝이 없다. 그렇기에 칼 같은 손절은 투자자에게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손절에 익숙하지 않다면 단타로 돈을 버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 기계 같은 손절을 지킬 수 없다면 단타매매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손절이 어려운 기도 매매를 할 요량이라면 차라리 지수를 추종하는 ETF를 사서 존버하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명언 중 이런 말이 있다.(실제로는 델피 신전에 쓰인 글귀다.) '너 자신을 알라.' 주식 투자에도 마찬가지다. 세력의 심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나의 심리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특히 단타 매매를 주로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면서 스스로를 점검할 것을 추천한다. 뒤늦게라도 투자자의 심리에 대해 전문가가 분석한 책이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대로 주식시장은 심리적으로 고찰할 부분이 많은 분야다. 이 책을 기점으로 개인투자자의 심리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힌 책들을 자주 볼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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