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가득한 하루를 보냅니다 - 식물 보듯 나를 돌보는 일에 관하여
정재경 지음 / 생각정거장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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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식물을 돌보듯 나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미세먼지를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초반에는 저자도 크게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점점 몸의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할 때 저자는 공기청정기를 삽니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 창문을 꽁꽁닫고 공기청정기를 틀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환기가 잘 안되어서인지 실내에 이산화탄소가 많아 잠이 너무 많아지자 이번에는 산소발생기를 사는 것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전자제품을 하나 둘씩 더 장만하고 플러그에 꽂는 자신의 문제해결 방식이 뭔가 이상함을 저자는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저자는 식물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하나 둘 함께 한 식물들이 늘어 현재는 200그루의 반려식물들과 함께 생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잘 자고, 일을 잘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 종일 마시는 공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한 식물을 많이 키우는 것이다. 식물은 산소와 음이온을 만들고 새 잎을 틔어 마음에도 에너지를 채운다. 음이온은 혈액을 깨끗이 하고 통증을 완하하며, 자율 신경의 조정 능력을 키우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p. 48)

그러한 저자는 반려식물을 키우듯, 나를 키우고 돌보는 것에 초점을 맞춰 이어기를 풀어나갑니다.

나를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확보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위해 땀흘리는 시간은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의 뿌리가 된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튼튼하게 자라난다. (p. 42)

누군가를 돌보고 먹이고 씻기고 양육하는 일은 적지 않은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 많은 에너지가 드는 육아 뿐만 아니라 반려동물들을 돌보고 집안을 가꾸고 식물을 가꾸는 일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에너지가 들어가지요. 무언가를 키우고 돌본다는 것은 그것이 가장 최적으로 있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아픈데를 돌봐주며, 좋아하는 먹을 것을 주고 안좋은 것들은 주변에서 제거하고 좋은 것들은 더 있을 수 있게 하는 것들일 겁니다. 그렇게 저자는 식물을 돌보듯 나를 돌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식물을 키우는 경험은 심리치료에도 활용될 만큼 효과가 좋다. 식물은 어떤 곳에서도 적응하며 새 잎을 틔운다. 엔어지를 모아 있는 힘껏 연두색 어린잎을 올리는 식물을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나도 해봐야지!' 하는 긍정의 힘이 솟아난다. (p. 23)

적당한 바람과 햇빛, 습도, 양분이 있어야 식물이 잘 자라듯 나를 잘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이야기 합니다. 이 책을 통해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이여서 바람이 잘 통하지 않으면 선풍기를 틀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바람에도 식물은 반응하고 전신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항상 적당한 바람이 불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너무 추운 칼바람이 불기도 하고 어떨 때는 미세먼지 많은 바람이 불기도 하며 아예 바람 조차 불지 않은 척박한 마음밭일 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작은 선풍기 바람이라도 커나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바람도 잘 통해야 한다. 식물은 해, 물, 바람이 있어야 잘 자란다. 누구나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는 햇빛과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바람에는 무심한 편이다. 식물은 바람결에 운동하며, 잎맥과 수맥을 키우고, 땅을 단단하게 붙들도록 뿌리를 뻗어 나간다. 식물 입장에서는 바람 덕에 전신 운동을 하는 셈이다. 실내에서는 바람이 모자라 식물이 잘 자라기 어렵다. 창문을 열 수 없을 때는 선풍기나 써쿨레이터를 틀어 바람을 만들어 주면 좋다. 선풍기 바람에도 식물은 잎과 줄기를 흔들어 운동하고, 생명을 유지하며, 튼튼해진다. (p. 53)

식물의 뿌리, 줄기, 가지, 수관 들을 관찰하다보면 그 모양이 사람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오늘도 우리의 위치를 잃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발을 디뎌 땅을 다지고, 우리의 가지는 지경을 넓히기 위해 열심히 팔을 뻗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손을 잡습니다. 우리의 수관은 닿지 않는 곳까지 멀리 나가기 위해, 풍성해지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머리를 굴립니다.

하지만 마음도 하나하나 꺼내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무엇이 좋은지, 싫은 마음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스스로 들여다보는 일을 시작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알맹이가 없는 글도 뿌리 없이 흔들리는 나에게서 나온다. 뿌리가 단단하지 못한 나무는 풍파에 몸살을 앓고 쉽게 쓰러진다. (p. 141)

애정어린 시선으로 반려식물을 보듯이, 자신을 돌보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평안한 초록색으로 찾습니다. 이 책을 읽고 반려식물을 하나 데리고 오고 싶어졌는데, 두 그루를 가져와야겠습니다. 실제 식물과 내 마음 안에 있던 그 나무. 내 마음안에 있던 그 나무에 언제 물을 주었을까요? 나에게 물을 주러 가보렵니다.

정말 모든 식물이 다 죽었냐고 물으나, 그건 아니라고 했다. ... 그런데, 왜 '다 죽인다' 생각하는 걸까. 아마 내 손에서 생명이 죽어나간 경험이 마음이 남아 생긴 트라우마일 가능성이 크다. 식물은 아무리 열심히 돌봐도 죽어버릴 수 있다. 그냥, 자연의 이치인 거다. 같은 땅에 씨를 뿌려도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지는 않는다. 비슷한 크기의 해피트리 다섯 그루를 같은 날 데려와 똑같이 관리했는데도 잘 큰 나무가 잇었고, 덜 자란 나무, 죽어버린 나무도 있었다. 살아있는 건 모두 그 마지막을 알기 어렵다. (p. 51)

내게 맞는 방향성, 지금 필요한 것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사과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열매를 솎아내고, 하나하나를 봉지로 감싸는 수고가 필요하며 수박은 열매가 장맛비에 무르지 않도록 땅에서 틔우는 받침대가 필요하다. 사과에 받침대를 받치거나, 수박을 봉지로 싸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쓸데 없는 일이다. 방향성을 찾는 데에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좋은 영감을 주는 것들을 모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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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어린 시절이 울고 있다 - 몸에 밴 상처에서 벗어나는 치유의 심리학
다미 샤르프 지음, 서유리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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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은 책을 만났다. 오히려 그저 그런 책을 만나면 책의 많은 부분 중 좋았던 부분은 일부분이기 때문에 책에 대한 감상과 좋았던 구절을 찾아 쓰기가 수월해진다. 그런데 너무 좋은 책을 만나면 책 전체가 좋고 밑줄의 천지라 어느 한 부분을 꼭 찝어 말하기가 굉장히 애매하다. 그래서 더 책에 대한 느낌과 서평을 쓰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바로 이 책이 그렇다. 정말 좋은 책이다. 이 책은 크게는 트라우마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몸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어려운 용어가 남발하는 심리학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저 그런 뻔한 이야기를 내뱉는 책도 아니다. 정말 자신의 분야에서 뼈가 굻은 이론의 핵심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가 이론의 정수를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그래서 트라우마와 치료와 몸과 심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촘촘하고 밀도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어렵지 않다. 상담사나 심리치료를 하는 분들이라면 정말 꼭 보기를 권하고 싶으며, 그보다 더 권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다.

우리의 고통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진짜 문제가 우리의 기억 속, 마음속 그리고 몸속에 꼭꼭 숨어 있기 때문이다(p.10) ​

 

트라우마라는 심리학적 개념이 요즘에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쉽게 쓰인다. 그렇다는 것은 이 사회가 그만큼 트라우마를 경험하기 쉬운 사회라는 반증일 것이다. 트라우마는 교통사고나 어떤 사고 등과 같이 예기치 못하게 일상에 찾아오는 단일 트라우마 일수도 있고, 자라면서 일상적인 상처를 통해 얻거나 반복적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치는 환경에 노출되면서 얻게 되는 것도 트라우마에 속할 수 있다. 후자를 이 책에서는 '발달 트라우마'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를 테면 트라우마 중에는 자라면서 일상적인 상처를 통해 얻은 '발달 트라우마'가 있다. 성인이 된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에 감당하기에는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험을 했을 때 생긴다. 이것은 주로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극단적인 사건이나 잔혹함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무지나 선입견, 능력 부족 때문에 벌어진다(p. 18).

우리의 몸은 위험에 처했을 때 경계 경보를 울리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위험속에서도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이런 생존 메커니즘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투쟁, 도피, 경직(fight, flight, freeze). 맞서 싸우거나 달아나거나 그 자리에 얼어 붙거나 이 셋이다. 위험 상황에서는 이 세개의 반응이 꽤 효과를 나타낸다. 그런데 문제는 위험이 끝났을 때 발생한다. 위험이 이미 끝났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는데도 아직 경계 경보가 울리고 있는 상황이 쉽게 말해 PTSD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은 태어난 이후 불과 몇 년의 시간 안에 일어난다. 그런데 성인이 된 우리에게 이미 그 기억은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기가 우리의 일생을 좌우하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안정적 토대가 마련되며 이때 받은 상처는 이러한 토대가 생성되는 것을 방해하거나 제한해서 많은 사람의 인생에서 긴 그림자를 남긴다(p.10).​

우리의 몸을 조절하는 체계 중 많이 알려진 것이 자율 신경계다. 자율신경계는 교감 신경계와 부교감 신경계로 나눌 수 있는데 교감 신경계는 흥분을 담당하고 부교감 신경계는 이완과 안정을 담당한다. 건강한 자율 신경계는 무엇보다 유연하게 반응하는 체계이다. 상황에 따라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몸이 적응하도록 한다. 이것을 쉽게 '감정 내성의 창문(window of tolerance)'이라 할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은 감정 내성의 창문이 커 많은 감정들을 자신의 창문안에서 담을 수 있고 그것들을 올라가면 내리고, 내려가면 올리면서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에 반해,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감정 내성의 창문의 폭이 좁아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창문의 폭이 좁다는 것은 금방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문 안에서 감정이 아래 위로 움직여야 편한데 창문의 폭이 좁다 보니 위로 넘칠 수도 아래 뚫고 들어가기도 쉬운 것이다.

 

 

감정이 위로 넘치게 된다는 것은 교감 신경계가 과잉 활성과 되는 것을 뜻하고, 아래로 너무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부교감 신경계가 과잉 활성과 된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되면 신경 체계가 계속 해서 아주 높은 수준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극도로 흥분되거나 예민해지거나 안절부절 못하는 것과 같은 한 극단과 해리되는 것과 같이 멍한 상태가 되거나 우울해 지거나 무언가 차단된 느낌과 같은 또다른 극단이 번갈아 나타날 수 있다. 아니면 계속 한 극단에만 주로 머무를 수도 있다.

모든 형태의 트라우마는 항상 자기 자신과 몸을 분리하며, 다른 사람들과도 분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력 있는 삶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또 주변 사람들과도 분리되면서 도움 받는 것을 힘들게 만들고 만다....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몸을 통해 잘 관찰하면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각도 변하게 된다. 자신만 소외되어 있다는 감정도 줄어들고 불편했던 마음도 훨씬 잦아 들 수 있다. (p. 163-164)​

이렇게 되면 안정 적인 감정 내성의 창문의 범위안에서 감정의 파도가 치는 것과 비교하였을 때 그 창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감정들을 경험하게 되면 항상 힘들고 피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 내성의 창문의 범위를 점차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일 텐데 신체 감정 통합 치료법(SEI)을 주치료로 사용하는 저자는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리고 몸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학습 과제, 자기 조절, 애착 관계는 생각에만 반영되지 않고 몸과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몸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성격과 태도를 만들어낸다. 우리 몸이 곧 나다. 점점 더 가상의 시대가 되어가고 몸은 그저 물리적인 기능을 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는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과 감정은 몸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몸을 느끼지 못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공허해질 뿐이다. 인생에 깊이가 없다. ... 몸 안에는 억압된 상처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몸을 통해 드러나게 마련이다. 어린 시절에는이런 패턴이 일시적으로 일어나도 감정과 행동이 여러 번 반복되면 결국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p. 50~51)

저자가 말하는 몸에서 나타나는 일들을 알아차리고 몸을 돌본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몸을 키우고 살을 빼고 근육량을 늘리고 땀을 빼고 이런 것과는 다르다. '지금 내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지금 이야기를 할 때 당신의 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 나고 있나요? (p. 165)

수시로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몸에 어떤 감각이 나타나는지 관찰해보자. 이때 해석하거나 평가하지 말고 그냥 인지만 해야 한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5분 동안 그저 몸을 느끼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매우 힘들 수 있다. 아니면 불안하거나 내일까지 급히 처리해야 할 일 등등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런 증상은 지극히 정상이다. (p. 169)

​​

​결국 몸을 돌보고 자각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나와 세상, 나와 타인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나의 감정과 욕구에도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온전히 내 몸과 마음으로 존재할 때, 즉 자기 자신과 만날 때 타인과도 건강한 관계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온전한 나로 서 있지 못하고 경계의 기본 단계인 몸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쉽게 나의 몸과 마음을 침범 당할수도, 또 누군가의 경계를 침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반대의 경우도 함께 존재할 것이다. 건강한 관계와 거리가 없다면 원래는 내 몸을 잘 유지하고 경계를 명확히 해야하는데 써야 할 에너지를 다른데 쓰게 되고, 그러면 분명 몸의 어딘가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치유를 '통합'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에 벌어진 이야기를 바꾸거나 지워버릴 수 없다. 과거는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한 번 부러진 다리는 절대로 '안 부러졌던' 다리가 될 수 없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다리가 부러졌던 흔적은 평생 남아 있다. 하지만 잘 치료하면 달리고 뛰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오히려 부러졌던 부분이더 단단해질 수 있다. 몸은 상처가 난 부분을 과도하게 보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트라우마 치유라는 개념은 내가 더는 과거의 내 모습으로 규정되지 않고 다른 여러 가지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트라우마 경험을 성공적으로 통합했을 경우 이를 '외상 후 성장'이라 부른다. 트라우마 자체는 많은 고통을 일으키지만 이렇게 다른 측면도 있는 것이다. (p. 125-126)

개인적으로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서평단에 신청하고 당첨되어 책을 받게 되어 읽었지만 정말 좋은 책이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심리치료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오히려 이 책을 쓴 저자는 전문가들 보다 일반 대중들을 염두해 두고 책을 썼을 것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을 때 속도가 나가지 않거나 어렵지 않고 아주 술술 읽히면서도 중요한 부분들 담아내고 있다. ​

​​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해도 만성적인 감정 상태는 몸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된 감정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자각하고 새로운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뿐 아니라 몸에도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내 안에 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내 삶을 결정하고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나의 감정 상태와 생가그이 패턴이 내 것이 아닌 내 몸에 각인되어벌니 과거에서 온 것이라면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일까? 우선 우리는 몸이 감정뿐 아니라 생각까지 결정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잘 알게 되면 '몸'을 통해 감정과 생각도 바꿀 수 있다. (p. 52-53)​

특히 나는 작년에 이 책의 내용의 베이스가 된 신체감각기반 치료 워크샵과 집단 등에 참여하였는데 며칠 간 배웠던 이론과 내용들이 이 책에 아주 쉽고도 다 들어가 있어서 놀랬다. 그렇지만 책이 전혀 두껍거나 내용이 방대하지도 않아서 놀라울 뿐이다. 주변 동료들에게도 내가 직접 사서 꼭 권하고 싶고,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분들을 상담할 때 이 책을 꼭 권해주어야겠다. 현재 내가 트라우마로 딱히 힘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에 노출되고 나의 주변 사람들이 노출된다. 이 책을 통해 내 마음과 몸에 대해서 이해를 한다면 나와 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격대비, 두께 대비 내용을 봤을 때 근래 최고의 책이다. 이 서평에 내용을 다 담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 모두가 꼭 한번 봤으면 좋겠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몸을 느끼고 친숙해지는 것이다. (p. 145)

이렇게 몸을 하찮게 여기면 인생의 질은 현격히 낮아진다. 우리의 몸은 이번 생에서 우리의 집이자 안식처이자 감정의 공명판이다. (p. 147)​

 

 

 

 

 

살아가면서 무엇을 경험하든지 그 경험을 지워버릴 수도, '벗어던질' 수도, 그냥 없었던 일로 생각할 수도 없다. 그 경험들은 모두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치유는 흉터가 남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원래 의학적으로도 그런 치유는 불가능하다. 내가 생각하는 치유는 '통합'한다는 의미이다. 과거에 벌어진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통합한다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서 새로운 좋은 경험을 만들어서 옛 상처가 더는 지금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합하기 위해서는 지금 주어진 대로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뭔가 새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통합이란 내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유대감을 만드는 것이다. (p.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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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 Routes of Santiago de Compostela in France
차노휘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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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적당히 이루었고, 적당히 포기한 채 살아갈 나이에 저자는 34일간의 순례길 여정을 떠납니다. 소설가이자 문학박사인 그녀는 일상을 지내다가 작은 '틈'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틈이 그녀를 간지럽히면서 훌쩍, 떠나야 했다고 그녀는 밝히고 있습니다.


마흔. 적당히 이루었고, 적당히 포기한 채 살아갈 나이. 책임져야 할 것과 책임에서 벗어나고픈 것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칠 나이. 불혹이란 말은 틀렸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억지로 무엇인가를 움켜쥔 채 흔들리지 않기를 갈망했다. 때로는 이를 악물고,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적당한 자리를 잡기 위해 체제에 순응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틈'을 발견했다.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그 틈이 나를 간지럽히면서 뭔가를 터트리기 위해 점점 커져갔다. 훌쩍, 떠나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벌어진 틈새로 어쩌면 추락했을 것이다. ... 결론적으로는 무척 잘한 일이었다. 그 틈에서 느꼈던 폭발직전의 간지러움은 에너지로 변환되었다. 나의 순례길은 내 안의 나를 만나는 길이었으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p. 13-14)

그렇게 그녀는 길을 나섭니다. 이 여정의 이전에 그녀는 제주도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하였고, 평소에도 걷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생장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거창한 이 길위에 오른 이유에 대해서 그녀는 극적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저 걷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작은 틈의 발견으로부터 이어진 이 여정에서 뭔가 인생의 큰 것을 바라는 마음이 그녀 안에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우선은 그저 걷고 싶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걷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손에 잡힐지는 모르겠으나, 그 막연함 그 자체가 그녀를 길위에 세웠습니다.

카미노를 걷다 보면 으레 왜 걷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도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묻곤 했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된 데에는 극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걷고 싶었을 뿐이다. 뭔가를 더 바라는 솔직한 마음도 있을 수 있다. 나를 추동하는 그 힘이, 내가 내보이기 싫은 그 무엇이 무의식에 있을 거라고. 걷다 보면, 그러니까 걸으면서 내가 '나'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윤곽이 잡히겠지 싶었다. 그 막연함이 좋았다. (p. 45)​



누구나 그렇듯 여행의 길 위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익숙한 길, 익숙한 풍경,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고립시켜 비행기를 타고 새로운 땅을 걷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혼자를 추구하고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기를 기대하였던 그 여정의 시작에서 시간이 흐를 수록 그녀는 아이러니 하게도 혼자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외로움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기에 끊임없이 사람을 갈구한다. 결코 사람이 빈 가슴을 다 채워 줄 수 없기에 허전할 뿐이다. 반면 고독은 '나'와의 대화 속에서 발생한다. 나를 향한 성찰이 길수록 내면은 윤택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 혼자 있어서 고통스러운가, 아니면 즐거운가. (p. 53)​

길 위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찾고자, 혹은 다른 여타의 이유들로 같은 땅을 내딛는 동료 순례자들과의 필연적인 만남을 합니다. 같은 땅을 공유하고 걸어가면서 물 한잔을 나눠마시고, 밥 한끼를 함께 하면서 서로의 인생과 영혼을 나눕니다.



그것은 한 끼 식사 때문이었다. '밥'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다. 과장되게 말하면 밥을 위해 살고 죽을 수도 있다. 그것을 나눈다는 것은 친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가 순례자들의 밥의 의미는 더 심오하다. 사랑(영혼)의 밥이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사랑(영혼)을 나눈다는 것이다.

나는 좀 더 진중하게 밥을 많이 먹어야 했다. 앞으로 남은 일정을 위해서, 건강한 걸음을 위해서, 몸과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서.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식욕이 돌지 않았다. 이러다가 주저 앉는 거 아니야? 불안이 슬금슬금 기어 왔다. 에이, 그럴 수는 없어! 당분간 '밥'에 '무조건' 집중하자. 밥을 많이 먹어야(건강해야) 밥(사랑)을 더 자주 나눌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영역을 넓히려는 잡념을 마무리했다. (p. 86)​

그 가운데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받고 친절을 베풀게 됩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찾아서 혼자 시작한 여정에 누군가의 작은 도움과 친절들로 그 틈을 메워 갑니다.

"산티아고까지 완주하게 된다면 혼자만의 힘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내가 내 발로 걷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알게 모르게 받잖아. 맥스와 걸으면서도 너는 도움을 받았을 거야. 맥스도 마찬가지야. 너와 동행해서 외롭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길 위에서는 만남도 이별도 아무 대가 없이 다가오니까. 또한 아무 대가 없이 베푼 인정과 여러 응원이 있으니까. 이런 힘들이 모여서 완주를 해낼 수 있는 거야.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힘이지. 그러나 나는 대가가 있다고 생각해. 내가 첫 번째 완주를 했을 때 프랑스 노부부가 나를 도와줬어. 그때 지갑을 분실했거든. 내게 50유로를 선뜻 내주었어. 며칠간 알베르게를 사용하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어. 네가 내가 고마움을 느낀다면 노부부의 도움을 이제야 갚을 수 있어서야. 그래서 나도 네가 고마워."



"길을 걸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을 때 도와줄 수 있어. 그게 가장 기본이야. 이미 너는 깨달았지?" (p. 150-151)​

길위의 여정들을 써내려감에 있어서 저는 이 책이 다른 여행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행의 시작 부터 끝까지 저자가 길 위에서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을 채워나가는 것은 여타 여행에세이와 비슷할 수 있겠으나, 저자의 원래 배경인 소설가와 문학전공이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몰라도 저자가 보는 풍경을 묘사하고 길위에서 만난 친구들의 만남들을 묘사하는 글 들이 마치 소설속에서 풍경과 주인공들을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소설의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가가 사소하게는 나무의 나이테, 주인공의 방 풍경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 처럼 소설의 풍경을 묘사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여행에세이를 읽었을 때는 친구가 여행기를 이야기 해주듯이 잘 듣는 느낌들을 받았는데, 저자의 글은 마치 내가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의 주인공인 1인칭 시점에서 주변 풍경과 주변 다른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내가 저자의 눈을 통해 주인공이 되어 순례길을 걷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친구들을 만난 느낌이 듭니다. 누군가의 여행의 일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삶이 된 듯한 그 느낌이 퍽 좋습니다. 대리만족을 느끼기에 퍽 좋습니다.

인생이란 저 멀리 저 지평선 너머 더 먼 곳까지 나아가려는 욕망을 키우는 것이 아닐까. 욕망을 실현시키면 시킬수록 또 다른 욕망이 생기니, 인생이란 신기루만 보다가 끝나는 길 위의 여정이 아닐까. 신기루만 보다가 끝나는 길 위의 여정일지라도 괜찮다. 하루라는 시간이 있고 그곳에 내가 걸을 거리가 있다면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다. 어느새 걷는 그 자체를 나는 즐기고 있었다. 늘 현재진행형으로 말이다. (p. 119)​

그래서 길위를 걸으면서 계속 되었던 저자의 발과 몸의 고통을 보고 있자면 저도 제 발이 아픈듯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계속 걸었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계속 걷게 하였을까요? 그녀는 쌩쌩한 삶을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록 고통일지라도, 나는 나이기 때문에 말이죠.

나는 일어섰다. 아직, 내 힘듦이 남아 있기에 그것을 마저 즐기고 싶었다. 목적지에 도작해서 저 지독한 태양에 내 피곤한 발을 말리면서 웃고 싶었다. 쌩쌩한 삶을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고통일지라도. 나는 '나'였다. (p. 101)


올라오면 반드시 내려가야 할 이치. 아프면 언젠가는 나을 이치. 떠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 이치. 요요처럼 생각들을 먼 곳에 던졌다가 다시 끌어왔다가 또 던졌다. 솜씨가 좋지 않아 이마를 치기도 했지만 그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p. 261)​

그리고 혼자 시작된 여정에서 길 위를 걸으면서 다양한 친구들과 함께 했던 여정이 다시 혼자 여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저자는 많이 성장하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를 찾을거야! 혼자 해낼거야!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을것이야! 라고 외치는 듯 혼자 꿋꿋이 걸어가다가 저자는 길 위의 친구들을 만나 예기치 못한 배려, 친절, 영혼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스스로를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다시 혼자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꿋꿋하게 자신의 고독과 다시 마주하며 걸어갑니다. 혼자에서 함께로, 그리고 다시 혼자로 돌아오며 끝난 그녀의 여정에서 그녀는 무엇을 얻었을까요?

"그런데, 저는 기적의 길 위에 있는데 왜 이렇게 허전한 거죠?"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걷는 기적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아닐까요? 그 기적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는... 하지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 바로 느낄 수 없지만 그 기적이 시간이 지나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서 알 수 있을 테니까. 기적이라는 것은 아주 평범한 것이니까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 일을, 실은 용기가 없어서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 용기를 이 길에서 당신이 얻은 것이니까." (p. 297-298)​


이제는 바깥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대신 마음의 풍경에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말하는 듯했다. ... 사는데에 그리 많은 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짐들. 최소의 것들. 그래야 저렇게 훌훌 날 듯 걸을 수 있을 테니깐. (p. 160)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읽는 저는, 저자의 여행기에 너무 빠져서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책을 덮고 라면이 땡겼습니다. 책에는 라면을 먹고 싶다 던지 이런 말이 나오지는 않는데 만약 제가 저 길 위에 있었다면 라면이 제일 먹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했나봅니다. 저자와 함께 진하게 여행했나봅니다.

(걷기 동료 유리의 말 중에서)

"나는 저 언덕에서 나를 용서하고 싶어. 용기가 없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한 나, 때로는 비열하고 나약하고 게으른 나, 결정을 했으면서도 자꾸 망설이는 나를 말이야. 허약한 나를 버리고 싶어."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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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의 시대 - 우리는 왜 냉정해지기를 강요받는가
알렉산더 버트야니 지음, 김현정 옮김 / 나무생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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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과 이 세상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지고 스스로를 이 사회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체념적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해 무관심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것이 아예 마음이 편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는 더욱더 풍요로워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안정된 곳에서 실존적 황페화, 실존적 공허가 퍼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침반을 잃어버리고 삶이 나가야 할 방향과 태도에 대한 통찰력을 상실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체념에 빠지면 자신의 행복에만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곤경에도 똑같이 눈이 멀게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더불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소흘히 하면 삶도 우리를 소흘히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체념은 삶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초부터 높은 이상을 품은 뒤 그것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포기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난 빈자리에 무관심이 스며든다.... 그런데 무관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위로가 필요한 타인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그 역시 절망과 개인적으로 경험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p.25-26)​

이러한 현 사회에서 저자는 삶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기꺼이 참여하는 마음, 무언가에 전념하는 삶, 공동체적 목표와 의미를 가지고 사는 삶이 중요한 희망이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점점 더 개인주의적이고 개인의 행복을 달려가는 이 사회에서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계를 함께 사랑하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

가치를 잃어버렸을 때는 우리가 세상에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세상도 우리의 기여와 노력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 하지만 사람들이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 인간은 세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 희망을 표출하는 유일한 생명체이며, 이 세상의 무질서한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고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 독단적인 허무주의와 무관심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는 불완전한 이 세상이다. 불완전함은 이 세상이 우리의 희망에 의존하며, 인간만이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희망을 포기하면 희망은 이 세상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이다. (p. 41-46)

우리의 삶은 그냥 소진되고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양초의 왁스가 빛이 되듯이, 삶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와 가능성을 제공하며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삶의 순간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어떠한 조건을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조건에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운명이, 이 사회가, 과거가 나에게 건네준 것보다 내가 세상을 향해 무엇을 발산했는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

우리가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는 이유는 무언가를 전혀 얻지 못하거나 부족하게 얻어서가 아니다. 이는 존재가 지닌 수많은 모순점 중 하나일 것이다. 오히려 황폐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무언가를 발산하고 방출하는 것을 등한시하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영적 결핍은 이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취할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기꺼이 세상에 동참할 때 비로소 사명을 얻게 된다. (p. 54)


​우리의 삶은 그냥 소진되고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이루는 물질이 훌륭한 영향력이 될 수 있다. 양초의 왁스가 빛이 되듯이 삶은 우리에게 수많은 의미와 가능성을 제공하며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삶의 의미와 가능성은 우리에게 포착되기를 바라고,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내놓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것들은 가능성으로만 남을 뿐이다. 말하자면 결코 빛이 되지 못하는 왁스와 같다. (p.61-62)​

저자는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받아들인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면서 무엇을 발산하였는지가 중요하다고.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맞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조건 속에 있었거나 조건을 갖추고 떠나느냐 보다는 삶의 여정 가운데서 무엇을 하였거나 하지 않았거나가 중요한 것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 측면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두고 보았을 때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현재는 100% 과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힘이 빠진 채로 무기력하게, 무관심하게 살다보면 과거의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고, 예측하고 종용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현재에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간과할 때가 많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받아들인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로부터 만들어내고 발산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물론 과거는 실제로 이미 기술된, 더 이상 수정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한 장이다. 하지만 현재의 장은 과거로부터 지시 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삶의 주인공이면서도 이러한 과거의 요인들이 종용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현재에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더 간단히 말하면 어떤 궁핍함이나 고통스러운 경험, 매정함을 겪었더라도 이 요인들을 현재에 어떻게 작용시킬 것인지는 우리가 직접, 그리고 현재에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체 조건은 우리가 그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p. 83-84)


즉, 저자는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결정이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고 말한다. 알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 어떤 색을 우리에게 입힐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것에 빛을 밝히고 발산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성된 스스로의 삶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말이다. ​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결정이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할지를 선택할 수 없다.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운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쥐여줄지를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발산할지를 결정할 수는 있다. 우리의 기여,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 인간은 인과 사슬의 맨 마지막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시작 지점에 서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가져올 모든 예측을 제쳐두고 예기치못한 것을 세상에 내놓을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정상적인 환경'에서 계속 마주칠 수 있지만 또 다른 고통의 연쇄반응을 작동시킬 수 있는 장소에서 멈추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보다 성숙하고 의식적인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기적인 행동으로부터,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첫걸음을 내디뎌서 좋은 것을 발산할 수 있는 존재다. (p. 86-87)

현재는 운명의 협상 장소라는 저자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역할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현재에 대한 선택과 책임을 갖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 모든 것을 기대하지 않기에는 우리의 삶에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뜻이리라.

몇년 전까지 자기개발서가 유행하면서 성공한 삶이 되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무조건 열심히 살아야 한다 라는 식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그와 반대로 요즘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내 존재자체로 충분하다는 메세지의 위로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고무줄을 당기면 당길 수록 놓았을 때 반대지점으로 멀리 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처럼 우리의 사회의 에너지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쳤다가 또 다른 쪽으로 가는 느낌도 든다. 그러한 와중에 어느 양극단도 아닌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자신에게 기여하는 것이 더 멀리는 타인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며 더 넓은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이 참 소중하게 여겨진다.

심리치료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도, 음식을 파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그 어떤 직업과 행동도 그 행위를 하는 주체와 행위에 영향을 받는 또다른 주체들에게 소중한 의미를 발견하고 의미를 전하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무각감한 우리를 다시 깨어나게 하는 것은 삶에 대한 관심과 희망뿐이라는 문구가 더 와닿는다.

그렇기에 오늘도 삶의 의미를 찾기위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에게 연락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야지. 그렇게 나와 내 주변 사람들과 세게에 대한 관심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지. 자신의 삶에 빛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건물의 모든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두자는 저자의 말처럼 빛이 들어오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빛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그 의미가 의미를 상실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재는 운명의 협상 장소다. 이곳에서 우리는 협상가가 되기도 하고, 활발한 삶의 동맹자가 되기도 하고, 혹은 적이 되기도 한다. 현재에 대한 선택과 책임을 갖는 것이다. 물론 이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생에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냉혹함이 존재한다. 이러한 경험의 기억은 미래에도 그를 따라다니며, 쉽게 협상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고통과 냉혹함이 항상 최종결정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충분히 협상 가능하다. 현재는 제한성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의 장소다.

...

우리의 과거, 그리고 아직 쓰이지 않은 인생에 대해 현재의 제한성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리가 직접 협상하고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에 우리의 과거를 만난다. 이 만남이 어떤 양상이 되는지는 현재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끝없는 불평과 자기연민, 증오, 원망, 거부감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다면 과연 우리가 겪은 고통을 끊어내거나 치유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까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준 세상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믿음과 희망의 상실이 충분히 그럴 만하며 정당하거나 옳다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의 책임이 면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p. 102-103)


어차피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확신과 믿음을 정당화하기에는 대가가 너무 크다. 왜냐하면 더 이상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어둠이 아니라 빛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조자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빛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건물의 모든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빛이 밖에서 들어오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빛이 들어오도록 행동을 개시하고 직접 빛을 끌어당겨야 한다. (p. 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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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질 때
박철우 지음 / 다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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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생각에는 대체재가 없다. 왜냐하면 생각은 바다를 많이 닮았으니까. 밀물과 썰물처럼 말이다. (p.29)



깊은 생각에는 대체재가 없다는 작가는 일상에서 혼자 있는 시간 속에 느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이 책을 통해 풀어냅니다. 작가의 일상 속에 담긴 조각 조각의 생각들이 모여 이 책을 이루고 있습니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작가의 조각 조각의 생각들이 심심한 콩나물 국처럼 별 의미 없이 다가왔었는데 책장을 넘기고 책을 덮을 때에는 작가의 생각 조각들이 진한 에스프레소처럼 향기를 내어 내 마음에 머무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별거 아닌 작가의 일상 속의 생각 조각들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 친구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 괜한 걱정 -

'혹시 몰라서' 넣고 다니는 것들이 가방의 무게를 더한다.

미성년의 티를 채 벗지 못하고 대학에 입학했던 3월, 렌즈가 끼고 싶었다. 맨얼굴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안경을 벗은 얼굴, 그 낯섦에 대한 동경이었다. 열 살 때부터 써온 안경이 주는 익숙함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렇게 어른이 될 것 같았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이전과 달라지면 비로소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챙겨야 할 게 많아지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도, 사물도.

바지 주머니에 오천 원짜리 한 장 찔어 넣고, 놀러 다니던 시절이 그립다. 외출할 때 챙긴 거라고는 건강한 몸뚱이와 정신줄 반토막뿐이었으니, 하물며 그것조차도 반토막인지 몰랐던 시절을 이제 와 회상한다.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챙겨야 할 거보다 의식하는 게 많아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p.30-33)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라는 소금을 쳐서 성실히 글을 토해내는 작가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위로해주고 싶기도 합니다. 이 책에 엮은 글들은 차가운 철제 현관문 뒤편에서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 그리고 계단을 밟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쓴 문장임을 작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 계란찜의 마지막 한 숟갈은 허허롭다 -

계란찜 한 숟갈은 꼭 아껴둔다. 밑반찬부터 다 먹고, 마지막 남은 밥숟갈에 몽글몽글한 계란찜을 얹어 먹으면 그 여운이 배로 짙어진다. 초코파이 속 마시멜로를 아껴먹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그 마음을 회상한다. 파이 부분만 걷어 먹고 마시멜로에 손대지 않으면, 마지막 한입 가득 쫀득함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닿기만 하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허전함을 느낀다.

해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에 사로잡힌 시절이 있었다. 뭐든지 뚝딱뚝딱 잘해내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나만 성장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애달픈 날엔 그렇게 나를 방 안에 묶어두었다. 사는 게 꼭 계란찜 같아서, 빈 숟가락 핥는 일 없도록 최고의 날을 아껴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관조하고 나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되레 나이테는 깊어지는지도. (p. 84-85)​

다른 사람들의 신발을 바라보는 반지하 집에서 그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신어보지도 못한 신발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작가는 철제 현관문의 차가움을 느끼며 삶의 이면들을 담담히 적어나갑니다.

- 해방 -

하나라도 꼭 되어야 한다면, 거부감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채색 아이답게 어디에다 붙여놔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면 좋겠다. 동시에 변화무쌍한 사람이고 싶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만,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한다.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생각하는 것도 좋아한다.

...

반면에 펜을 잡을 땐 뽀족한 심 끝에 고독을 투영하고 싶다. 보고, 듣고, 느낀 것 중에서 입으로 뱉으면 그 맛이 덜해지는 말들을, 종이에 적어 표현하고 싶다. 멋있어 보이려는 대신 솔직함을 한 숟갈 더 얹고 싶다. 저마다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한평생 감추고 갈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말로 하고, 글로 쓴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입으로 뱉고 글로 쓰는 순간엔 초라한 자신을 마주하겠지만 저지르고 났을 때 쾌감은 근사하다. 남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우려했지만, 알았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내가 만든 생각 속에 갇히곤 한다. 그럴 때마다 글을 쓴다. 펜을 돌려 나를 가두고 있는 자물쇠 푸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세상과 단절되지 않으려는 일종의 몸부림이다. 좋았든 나빴든, 오늘의 것들을 털어버리고 난 뒤에 죄책감 없이 펄럭일 수 있는 이불이 나는 좋다. (p.94-95)​



​- 감정의 최소단위 -

복잡한 마음이 잘게 쪼개어지면 무엇이 될 것인가, 그 최소단위에 대해 고민해본다. 형태가 존재하는 것들은 잘게 쪼개어지면 입자, 더 잘게 쪼개어지면 분자, 깊숙이 들어가면 원자라 불리는 최소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쪼개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닌데, 여태 불리지 않은 마음이 단위에도 이름을 붙여주었으면 한다. 복잡한 마음이 드는 때, 어떤 감정들이 모여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p.236-247)​

현관문의 뒤편에서 혼자 있는 시간과 함께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는 오늘의 삶을 위해, 그리고 내일의 삶을 위해 지금 이 순간도 글을 써나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글이 같은 시대에 사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감정이 앞서는 날에 무거운 안경을 찾는다. 물리적으로 꽉 잡아주는 무엇인가를 몸에 지니면, 흔들리는 마음을 고정해주는 단단한 기분이 든다. (p.78)



https://blog.naver.com/sak0815/221766762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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