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 Routes of Santiago de Compostela in France
차노휘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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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적당히 이루었고, 적당히 포기한 채 살아갈 나이에 저자는 34일간의 순례길 여정을 떠납니다. 소설가이자 문학박사인 그녀는 일상을 지내다가 작은 '틈'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틈이 그녀를 간지럽히면서 훌쩍, 떠나야 했다고 그녀는 밝히고 있습니다.


마흔. 적당히 이루었고, 적당히 포기한 채 살아갈 나이. 책임져야 할 것과 책임에서 벗어나고픈 것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칠 나이. 불혹이란 말은 틀렸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억지로 무엇인가를 움켜쥔 채 흔들리지 않기를 갈망했다. 때로는 이를 악물고,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적당한 자리를 잡기 위해 체제에 순응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틈'을 발견했다.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그 틈이 나를 간지럽히면서 뭔가를 터트리기 위해 점점 커져갔다. 훌쩍, 떠나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벌어진 틈새로 어쩌면 추락했을 것이다. ... 결론적으로는 무척 잘한 일이었다. 그 틈에서 느꼈던 폭발직전의 간지러움은 에너지로 변환되었다. 나의 순례길은 내 안의 나를 만나는 길이었으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p. 13-14)

그렇게 그녀는 길을 나섭니다. 이 여정의 이전에 그녀는 제주도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하였고, 평소에도 걷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생장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거창한 이 길위에 오른 이유에 대해서 그녀는 극적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저 걷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작은 틈의 발견으로부터 이어진 이 여정에서 뭔가 인생의 큰 것을 바라는 마음이 그녀 안에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우선은 그저 걷고 싶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걷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손에 잡힐지는 모르겠으나, 그 막연함 그 자체가 그녀를 길위에 세웠습니다.

카미노를 걷다 보면 으레 왜 걷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도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묻곤 했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된 데에는 극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걷고 싶었을 뿐이다. 뭔가를 더 바라는 솔직한 마음도 있을 수 있다. 나를 추동하는 그 힘이, 내가 내보이기 싫은 그 무엇이 무의식에 있을 거라고. 걷다 보면, 그러니까 걸으면서 내가 '나'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윤곽이 잡히겠지 싶었다. 그 막연함이 좋았다. (p. 45)​



누구나 그렇듯 여행의 길 위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익숙한 길, 익숙한 풍경,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고립시켜 비행기를 타고 새로운 땅을 걷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혼자를 추구하고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기를 기대하였던 그 여정의 시작에서 시간이 흐를 수록 그녀는 아이러니 하게도 혼자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외로움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기에 끊임없이 사람을 갈구한다. 결코 사람이 빈 가슴을 다 채워 줄 수 없기에 허전할 뿐이다. 반면 고독은 '나'와의 대화 속에서 발생한다. 나를 향한 성찰이 길수록 내면은 윤택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 혼자 있어서 고통스러운가, 아니면 즐거운가. (p. 53)​

길 위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찾고자, 혹은 다른 여타의 이유들로 같은 땅을 내딛는 동료 순례자들과의 필연적인 만남을 합니다. 같은 땅을 공유하고 걸어가면서 물 한잔을 나눠마시고, 밥 한끼를 함께 하면서 서로의 인생과 영혼을 나눕니다.



그것은 한 끼 식사 때문이었다. '밥'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다. 과장되게 말하면 밥을 위해 살고 죽을 수도 있다. 그것을 나눈다는 것은 친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가 순례자들의 밥의 의미는 더 심오하다. 사랑(영혼)의 밥이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사랑(영혼)을 나눈다는 것이다.

나는 좀 더 진중하게 밥을 많이 먹어야 했다. 앞으로 남은 일정을 위해서, 건강한 걸음을 위해서, 몸과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서.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식욕이 돌지 않았다. 이러다가 주저 앉는 거 아니야? 불안이 슬금슬금 기어 왔다. 에이, 그럴 수는 없어! 당분간 '밥'에 '무조건' 집중하자. 밥을 많이 먹어야(건강해야) 밥(사랑)을 더 자주 나눌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영역을 넓히려는 잡념을 마무리했다. (p. 86)​

그 가운데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받고 친절을 베풀게 됩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찾아서 혼자 시작한 여정에 누군가의 작은 도움과 친절들로 그 틈을 메워 갑니다.

"산티아고까지 완주하게 된다면 혼자만의 힘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내가 내 발로 걷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알게 모르게 받잖아. 맥스와 걸으면서도 너는 도움을 받았을 거야. 맥스도 마찬가지야. 너와 동행해서 외롭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길 위에서는 만남도 이별도 아무 대가 없이 다가오니까. 또한 아무 대가 없이 베푼 인정과 여러 응원이 있으니까. 이런 힘들이 모여서 완주를 해낼 수 있는 거야.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힘이지. 그러나 나는 대가가 있다고 생각해. 내가 첫 번째 완주를 했을 때 프랑스 노부부가 나를 도와줬어. 그때 지갑을 분실했거든. 내게 50유로를 선뜻 내주었어. 며칠간 알베르게를 사용하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어. 네가 내가 고마움을 느낀다면 노부부의 도움을 이제야 갚을 수 있어서야. 그래서 나도 네가 고마워."



"길을 걸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을 때 도와줄 수 있어. 그게 가장 기본이야. 이미 너는 깨달았지?" (p. 150-151)​

길위의 여정들을 써내려감에 있어서 저는 이 책이 다른 여행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행의 시작 부터 끝까지 저자가 길 위에서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을 채워나가는 것은 여타 여행에세이와 비슷할 수 있겠으나, 저자의 원래 배경인 소설가와 문학전공이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몰라도 저자가 보는 풍경을 묘사하고 길위에서 만난 친구들의 만남들을 묘사하는 글 들이 마치 소설속에서 풍경과 주인공들을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소설의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가가 사소하게는 나무의 나이테, 주인공의 방 풍경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 처럼 소설의 풍경을 묘사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여행에세이를 읽었을 때는 친구가 여행기를 이야기 해주듯이 잘 듣는 느낌들을 받았는데, 저자의 글은 마치 내가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의 주인공인 1인칭 시점에서 주변 풍경과 주변 다른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내가 저자의 눈을 통해 주인공이 되어 순례길을 걷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친구들을 만난 느낌이 듭니다. 누군가의 여행의 일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삶이 된 듯한 그 느낌이 퍽 좋습니다. 대리만족을 느끼기에 퍽 좋습니다.

인생이란 저 멀리 저 지평선 너머 더 먼 곳까지 나아가려는 욕망을 키우는 것이 아닐까. 욕망을 실현시키면 시킬수록 또 다른 욕망이 생기니, 인생이란 신기루만 보다가 끝나는 길 위의 여정이 아닐까. 신기루만 보다가 끝나는 길 위의 여정일지라도 괜찮다. 하루라는 시간이 있고 그곳에 내가 걸을 거리가 있다면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다. 어느새 걷는 그 자체를 나는 즐기고 있었다. 늘 현재진행형으로 말이다. (p. 119)​

그래서 길위를 걸으면서 계속 되었던 저자의 발과 몸의 고통을 보고 있자면 저도 제 발이 아픈듯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계속 걸었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계속 걷게 하였을까요? 그녀는 쌩쌩한 삶을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록 고통일지라도, 나는 나이기 때문에 말이죠.

나는 일어섰다. 아직, 내 힘듦이 남아 있기에 그것을 마저 즐기고 싶었다. 목적지에 도작해서 저 지독한 태양에 내 피곤한 발을 말리면서 웃고 싶었다. 쌩쌩한 삶을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고통일지라도. 나는 '나'였다. (p. 101)


올라오면 반드시 내려가야 할 이치. 아프면 언젠가는 나을 이치. 떠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 이치. 요요처럼 생각들을 먼 곳에 던졌다가 다시 끌어왔다가 또 던졌다. 솜씨가 좋지 않아 이마를 치기도 했지만 그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p. 261)​

그리고 혼자 시작된 여정에서 길 위를 걸으면서 다양한 친구들과 함께 했던 여정이 다시 혼자 여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저자는 많이 성장하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를 찾을거야! 혼자 해낼거야!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을것이야! 라고 외치는 듯 혼자 꿋꿋이 걸어가다가 저자는 길 위의 친구들을 만나 예기치 못한 배려, 친절, 영혼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스스로를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다시 혼자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꿋꿋하게 자신의 고독과 다시 마주하며 걸어갑니다. 혼자에서 함께로, 그리고 다시 혼자로 돌아오며 끝난 그녀의 여정에서 그녀는 무엇을 얻었을까요?

"그런데, 저는 기적의 길 위에 있는데 왜 이렇게 허전한 거죠?"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걷는 기적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아닐까요? 그 기적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는... 하지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 바로 느낄 수 없지만 그 기적이 시간이 지나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서 알 수 있을 테니까. 기적이라는 것은 아주 평범한 것이니까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 일을, 실은 용기가 없어서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 용기를 이 길에서 당신이 얻은 것이니까." (p. 297-298)​


이제는 바깥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대신 마음의 풍경에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말하는 듯했다. ... 사는데에 그리 많은 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짐들. 최소의 것들. 그래야 저렇게 훌훌 날 듯 걸을 수 있을 테니깐. (p. 160)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읽는 저는, 저자의 여행기에 너무 빠져서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책을 덮고 라면이 땡겼습니다. 책에는 라면을 먹고 싶다 던지 이런 말이 나오지는 않는데 만약 제가 저 길 위에 있었다면 라면이 제일 먹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했나봅니다. 저자와 함께 진하게 여행했나봅니다.

(걷기 동료 유리의 말 중에서)

"나는 저 언덕에서 나를 용서하고 싶어. 용기가 없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한 나, 때로는 비열하고 나약하고 게으른 나, 결정을 했으면서도 자꾸 망설이는 나를 말이야. 허약한 나를 버리고 싶어." (p. 72)​


https://blog.naver.com/sak0815/221772878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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