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의 시대 - 우리는 왜 냉정해지기를 강요받는가
알렉산더 버트야니 지음, 김현정 옮김 / 나무생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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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과 이 세상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지고 스스로를 이 사회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체념적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해 무관심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것이 아예 마음이 편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는 더욱더 풍요로워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안정된 곳에서 실존적 황페화, 실존적 공허가 퍼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침반을 잃어버리고 삶이 나가야 할 방향과 태도에 대한 통찰력을 상실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체념에 빠지면 자신의 행복에만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곤경에도 똑같이 눈이 멀게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더불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소흘히 하면 삶도 우리를 소흘히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체념은 삶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초부터 높은 이상을 품은 뒤 그것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포기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난 빈자리에 무관심이 스며든다.... 그런데 무관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위로가 필요한 타인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그 역시 절망과 개인적으로 경험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p.25-26)​

이러한 현 사회에서 저자는 삶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기꺼이 참여하는 마음, 무언가에 전념하는 삶, 공동체적 목표와 의미를 가지고 사는 삶이 중요한 희망이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점점 더 개인주의적이고 개인의 행복을 달려가는 이 사회에서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계를 함께 사랑하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

가치를 잃어버렸을 때는 우리가 세상에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세상도 우리의 기여와 노력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 하지만 사람들이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 인간은 세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 희망을 표출하는 유일한 생명체이며, 이 세상의 무질서한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고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 독단적인 허무주의와 무관심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는 불완전한 이 세상이다. 불완전함은 이 세상이 우리의 희망에 의존하며, 인간만이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희망을 포기하면 희망은 이 세상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이다. (p. 41-46)

우리의 삶은 그냥 소진되고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양초의 왁스가 빛이 되듯이, 삶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와 가능성을 제공하며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삶의 순간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어떠한 조건을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조건에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운명이, 이 사회가, 과거가 나에게 건네준 것보다 내가 세상을 향해 무엇을 발산했는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

우리가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는 이유는 무언가를 전혀 얻지 못하거나 부족하게 얻어서가 아니다. 이는 존재가 지닌 수많은 모순점 중 하나일 것이다. 오히려 황폐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무언가를 발산하고 방출하는 것을 등한시하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영적 결핍은 이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취할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기꺼이 세상에 동참할 때 비로소 사명을 얻게 된다. (p. 54)


​우리의 삶은 그냥 소진되고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이루는 물질이 훌륭한 영향력이 될 수 있다. 양초의 왁스가 빛이 되듯이 삶은 우리에게 수많은 의미와 가능성을 제공하며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삶의 의미와 가능성은 우리에게 포착되기를 바라고,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내놓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것들은 가능성으로만 남을 뿐이다. 말하자면 결코 빛이 되지 못하는 왁스와 같다. (p.61-62)​

저자는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받아들인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면서 무엇을 발산하였는지가 중요하다고.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맞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조건 속에 있었거나 조건을 갖추고 떠나느냐 보다는 삶의 여정 가운데서 무엇을 하였거나 하지 않았거나가 중요한 것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 측면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두고 보았을 때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현재는 100% 과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힘이 빠진 채로 무기력하게, 무관심하게 살다보면 과거의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고, 예측하고 종용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현재에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간과할 때가 많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받아들인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로부터 만들어내고 발산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물론 과거는 실제로 이미 기술된, 더 이상 수정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한 장이다. 하지만 현재의 장은 과거로부터 지시 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삶의 주인공이면서도 이러한 과거의 요인들이 종용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현재에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더 간단히 말하면 어떤 궁핍함이나 고통스러운 경험, 매정함을 겪었더라도 이 요인들을 현재에 어떻게 작용시킬 것인지는 우리가 직접, 그리고 현재에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체 조건은 우리가 그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p. 83-84)


즉, 저자는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결정이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고 말한다. 알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 어떤 색을 우리에게 입힐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것에 빛을 밝히고 발산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성된 스스로의 삶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말이다. ​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결정이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할지를 선택할 수 없다.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운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쥐여줄지를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발산할지를 결정할 수는 있다. 우리의 기여,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 인간은 인과 사슬의 맨 마지막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시작 지점에 서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가져올 모든 예측을 제쳐두고 예기치못한 것을 세상에 내놓을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정상적인 환경'에서 계속 마주칠 수 있지만 또 다른 고통의 연쇄반응을 작동시킬 수 있는 장소에서 멈추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보다 성숙하고 의식적인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기적인 행동으로부터,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첫걸음을 내디뎌서 좋은 것을 발산할 수 있는 존재다. (p. 86-87)

현재는 운명의 협상 장소라는 저자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역할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현재에 대한 선택과 책임을 갖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 모든 것을 기대하지 않기에는 우리의 삶에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뜻이리라.

몇년 전까지 자기개발서가 유행하면서 성공한 삶이 되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무조건 열심히 살아야 한다 라는 식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그와 반대로 요즘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내 존재자체로 충분하다는 메세지의 위로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고무줄을 당기면 당길 수록 놓았을 때 반대지점으로 멀리 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처럼 우리의 사회의 에너지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쳤다가 또 다른 쪽으로 가는 느낌도 든다. 그러한 와중에 어느 양극단도 아닌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자신에게 기여하는 것이 더 멀리는 타인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며 더 넓은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이 참 소중하게 여겨진다.

심리치료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도, 음식을 파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그 어떤 직업과 행동도 그 행위를 하는 주체와 행위에 영향을 받는 또다른 주체들에게 소중한 의미를 발견하고 의미를 전하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무각감한 우리를 다시 깨어나게 하는 것은 삶에 대한 관심과 희망뿐이라는 문구가 더 와닿는다.

그렇기에 오늘도 삶의 의미를 찾기위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에게 연락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야지. 그렇게 나와 내 주변 사람들과 세게에 대한 관심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지. 자신의 삶에 빛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건물의 모든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두자는 저자의 말처럼 빛이 들어오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빛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그 의미가 의미를 상실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재는 운명의 협상 장소다. 이곳에서 우리는 협상가가 되기도 하고, 활발한 삶의 동맹자가 되기도 하고, 혹은 적이 되기도 한다. 현재에 대한 선택과 책임을 갖는 것이다. 물론 이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생에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냉혹함이 존재한다. 이러한 경험의 기억은 미래에도 그를 따라다니며, 쉽게 협상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고통과 냉혹함이 항상 최종결정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충분히 협상 가능하다. 현재는 제한성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의 장소다.

...

우리의 과거, 그리고 아직 쓰이지 않은 인생에 대해 현재의 제한성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리가 직접 협상하고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에 우리의 과거를 만난다. 이 만남이 어떤 양상이 되는지는 현재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끝없는 불평과 자기연민, 증오, 원망, 거부감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다면 과연 우리가 겪은 고통을 끊어내거나 치유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까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준 세상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믿음과 희망의 상실이 충분히 그럴 만하며 정당하거나 옳다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의 책임이 면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p. 102-103)


어차피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확신과 믿음을 정당화하기에는 대가가 너무 크다. 왜냐하면 더 이상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어둠이 아니라 빛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조자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빛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건물의 모든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빛이 밖에서 들어오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빛이 들어오도록 행동을 개시하고 직접 빛을 끌어당겨야 한다. (p. 104-105)


https://blog.naver.com/sak0815/22176726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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