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인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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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반기를 들지않는 비정상적인 인간사회 시스템을 적나라하고 잔인하게 비판하는 잔혹동화. 이상한건 과연 주인공인가 지구성인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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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커브를 반복하며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면 귀가 먹먹해져 점점 하늘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할머니의 집은 우주와 가깝다. - P6

③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무슨 뜻이야?"
"다음 여름에 또 우리가 무사히 만날 수 있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아남아 내년 여름에 건강하게 만나자고 약속하자."
"알았어." - P39

눈을 감고 유우를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암흑뿐 아니라 별같은 빛도 보였다.
새로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걸까. 이제 감은 눈 너머로 유우의 고향 포하피핀포보피아별이 있는 우주를 볼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언젠가 우주선을 찾으면 나도 포하피핀포보피아별에 데려가 달라고 해야지. 우리는 부부니까, 내가 유우의 고향 별로 시집가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퓨트도 데려갈 것이다.
눈을 감고 우주를 떠다니고 있으니 정말 포하피핀포보피아별의 우주선이 바로 옆에 다가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사랑과 마법 안에 있었다. 그 안에 있는 한 나는 안전했다. 아무도 나와 유우의 행복을 깨뜨릴 수 없었다. - P42

나는 인간을 만드는 ‘공장‘에 살고 있다.
동네에는 인간의 둥지가 빼곡히 늘어서 있다.
데루요시 삼촌이 이야기해준 누에님 방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줄줄이 늘어선 네모난 둥지 안에 짝을 지은 인간 수컷과 암컷, 그들의 자식이 산다. 암수는 둥지에서 자식을 키운다. 나는 그 둥지 중 하나에 산다.
이곳은 육체로 이어진 ‘인간 공장‘이다. 나 같은 아이들은 언젠가 이 공장 밖으로 출하된다.
출하된 인간은 암컷이든 수컷이든, 일단 먹이를 제 둥지로 나르는 훈련을 받는다. 세상의 도구가 되어 다른 인간에게 화폐를 받고, 그것으로 먹이를 산다.
- P44

시간이 흐르면 그 젊은 인간들도 짝을 짓고 둥지에 틀어박혀 번식을 한다.
5학년에 막 올라와 성교육을 받았을 때 ‘역시 그랬구나‘ 하고생각했다.
내 자궁은 이 공장의 부품이며, 마찬가지로 부품인 누군가의 정소와 연결되어 아이를 제조할 것이다. 암컷과 수컷은 공장의부품을 몸 안에 감춘 채 너나 할 것 없이 둥지에서 꿈틀거린다.
나는 유우와 결혼했지만 유우는 외계인이니 아마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주선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분명 다른 누군가와 짝짓기를 해 세상을 위해 인간을 낳아야 하리라.
부디 그렇게 되기 전에 우주선을 찾을 수 있기를.
퓨트는 책상 서랍 안에 만들어둔 침대에서 자고 있다. 나는 퓨트가 준 요술봉과 콤팩트로 몰래 마법을 쓴다. 마법을 통해 내 생명을 미래로 운반한다. - P45

이곳은 둥지의 나열이자 인간을 만드는 공장이다. 나는 이곳에서 두 가지 의미로 도구이다.
하나, 열심히 공부해 공장의 노동 수단이 되어야 하는 도구.
또 하나, 열심히 여자가 되어 이 마을을 위한 생식기가 되어야 하는 도구.
나는 아마 어느 쪽으로도 꼴등일 것이다. - P50

어른도 고생이 많다. 어른은 아이를 심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른도 심판받고 있다. 시노즈카 선생님은 사회의 톱니바퀴로 성실히 일하지만, 사회를 위한 생식기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님은 나를 키우고 지배하는 입장이지만, 동시에 세상의 도구로서 심판받고 있다. 하지만 내 손으로 벌어 스스로 밥을 사 먹을 수 있게 되면, 최소한 누군가에게 버림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 P55

마법, 마법, 마법을 써야 한다. 암흑 마법이든 바람 마법이든뭐든 좋으니 마법을 써야 한다. 내 마음이 뭔가를 느끼기 전에 온몸에 마법을 걸어야 한다. - P62

살아남기 위해 마법을 써야 한다. 온몸을 텅 비우고 복종해야 한다. - P66

"아이의 목숨은 아이 것이 아냐. 어른 손에 달렸지. 엄마가 아이를 버리면 아이는 밥도 굶게 되고, 어른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아이는 모두 그래."
유우가 화단에 핀 꽃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른이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남아야 해." - P86

태어난 이후로 줄곧 이곳에 오고 싶었다. 아키시나도 그 하얀마을도, 우주선도 아닌 그보다 훨씬 먼 곳에 도달한 것이다.
아픔보다 안도감이 더 컸다. 우리의 내장은 물소리를 내며 한데 뒤섞여 있었다. 배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조용히 먹어치우고 있었다. - P103

세상에 순종적인 어른들이 세상에 순종적이지 않게 된 우리를 보고 동요하고 있었다.
어른들 역시 마취되어 있다. 마취되기 전의 기억이 없는 것처럼.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듯 호들갑을 떠는 어른들이 내 눈에는 어떤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 P110

모두 공장을 믿으며, 공장에 세뇌되어 공장을 따르고 있다.
온몸의 장기를 공장을 위해 쓰며, 공장을 위해 노동한다.
남편과 나는 ‘완벽한 세뇌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공장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끝없이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 - P126

"사실 인간은 일하는 것도, 섹스 하는 것도 싫어해. 최면술에걸려서 그게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지." - P127

남편의 부모, 형 부부, 친구들이 가끔 우리 공장을 정찰하러왔다. 나의 자궁과 남편의 정소는 공장에 조용히 감시당하고있다. 새 생명을 제조하지 않는 인간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은근한 압력을 받게 된다. 새 인간을 ‘제조‘하지 않는부부는 노동을 함으로써 공장에 공헌하는 모습을 어필해야만했다.
나와 남편은 공장 구석에서 숨죽인 채 살아가고 있다.
어느샌가 나는 서른네 살이 됐고, 유우와 보낸 그날 밤부터 스물세 해가 지나 있었다. 그토록 시간이 흘렀어도 나는 아직공장 구석에서,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남고 있었다. - P127

"그냥 죽었으면 좋겠어. 단 한 번이라도 공장에서 자유로워진다음에 죽고 싶어."
말리려 했지만, 남편을 이 세상에 붙잡아둘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에게 좋아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런데도 남편이나 나나 살아남고 있었다.
무얼 위해 살아남아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잘 모르겠다. - P128

내가 인간 공장의 도구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기 때문에 지구성인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젊은여자는 반드시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해야 하며, 그러지 않는 사람은 ‘외롭고‘ ‘재미없으며‘ ‘나중에 후회하는‘ 청춘을 보낸다는 낙인이 찍힌다.
‘되찾아야 해."
미호는 늘 내게 그렇게 말했다. 원하지도 않는 걸 왜 되찾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곧 공장으로 출하되는 우리는 출하를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먼저 출하 준비가 된 이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사람을 ‘지도‘
한다. 나는 미호에게 ‘지도‘받은 것이다. - P203

세상은 사랑을 하는 시스템에 지배되고 있다. 사랑을 못하는 사람은 사랑에 가까운 행위를 하라고 강요받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이 먼저인지 사랑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지구성인이 번식을위해 이 시스템을 만들어냈으리라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 P204

공장은 연애가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인간을 생산하는 행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점점 더 힘주어 선전하는 것 같았다.
이 거대한 인간 공장을 위한 자궁은 내 아랫배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 장기를 공장을 위해 쓰겠다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규탄받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었다. - P204

시어머니의 자궁도, 시아버지의 정소도 모두 도구다. 고작 유전자 따위에 지배당하는 주제에 뭐가 저렇게 자랑스러울까. 자긍심까지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성인은 참으로 가엾고사랑스러운 생물이다. 왠지 우스워졌다. - P223

"여기는 공장이니까. 우리는 아마 유전자의 노예일 거야." - P227

"정말 무서운 건 세상이 말하게 하는 말을 자기 말이라고 믿는 거야. 당신은 달라. 그러니까 당신은 분명히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야." - P234

"이 별에 와서 당신과 결혼하길 잘했어." - P236

"모르겠습니다. 자유를 받았지만 자유가 불편합니다. 명령과달리 이정표가 하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지금, 아니, 분명 오래전부터 그걸 갖고 있던 거군요." - P246

"여기 오고부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지구성인 같은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 아닐까. 처음에는 다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었는데 우리 세 마리만 세뇌에서 풀려난 거지. 지구성인 같은 건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이 이 낯선 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고" - P284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오른쪽 귓속에 내려앉아 서서히 고막을 흔들었다.
이날, 내 몸은 온전히 내 것이 됐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방 안의 촛불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가루가 우주에서 휘날려 떨어졌다.
누에나방의 비늘 가루가 떠올랐다. 방에서 무수한 나방이 날아올라 하얀 가루를 흩뿌리며 멀리 날아가는 광경을 상상했다.
새까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은 지면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눈은 외부 생물의 기척을 뒤덮었고, 촛불 일렁이는 방에는 우리의 식사 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 P286

"괜찮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당신 안에도 분명 이 모습의 당신이 잠들어 있으니까요. 분명 금방 전염될 겁니다."
안심시키려는 듯 유우가 지구성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우리는 내일 더 늘어날 겁니다. 모레에는 그보다 훨씬 더 늘어날 거고요." - P290

"밖으로 나갈까. 우리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
유우의 말에 나도, 남편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세마리의 포하피핀포보피아성인은 조용히 팔다리를 덩굴처럼 이으며 일어났다. ‘밝은 시간‘의 빛과 흰 눈에 반사된빛이 외부 세계에서 우리의 우주선으로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한 우리는 지구성인이 사는 별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빛에 휩싸인 우리에게 호응하듯, 지구성인들의 울음소리가 별의 아득한 곳까지 메아리치더니 숲을뒤흔들며 퍼져나갔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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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줘이. 줘이. 메뚜기 줘이."
울 소리다. 그건 벌써 당연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한 수 지고 들어가는 못난 놈의 소리였다. - P16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내가 더 미워하고 있는 놈은 역시, 그 웃통을 벗은 못난 메뚜기 임자놈이었다. 그놈이 내 동생 놈이라면,
그저 한바탕 두들겨주고 싶으리만치 미웠다.
나는 아침 목욕탕 안에서부터 참아오던 울분을 터뜨리기라도하는 듯 연방 ‘못난 자식‘ ‘못난 자식‘을 맘속으로 되풀이해가며 걸상을 들고 일어섰다. - P18

두 노인 손등에 사뿐사뿐 흰 눈송이가 날아와앉았다.
"알지. 내 다 알지."
이장영감은 고개를 수그린 채 주억주억하였다.
"그래도 내겐 그놈 하나밖에…………… 혹시나 돌아올까 해서."
"그럼. 그렇구말구. 내 다 알지."
이장영감은 그저 고개만 자꾸 주억거렸다. 박훈장은 이장영감의 손을 다시 한 번 쓸어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털썩 이장네마루에 주저앉아버렸다. 으흐흐흐 하는 박훈장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듯이 이장영감은 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섰다.
"그럼 가자."
이장영감은 봉네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한 손에 들고 선두에 섰다. 그 뒤를 한 줄로 마을 사람들은 따라 걸었다.
박훈장은 비틀비틀 학나무 밑으로 갔다. 그리고 어린애 모양으흐흐으흐흐 울며 눈발 속에 사라져가는 행렬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서 있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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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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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에 너무나 당연시 스며들어 눈치채지 못하는 폭력들. 서로가 서로를 수단과 개체로써만 이용한다. 그렇기에 영혜는 자아가없고 비폭력적인 식물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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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로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 P43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 P53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적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 P61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싶어졌다. 그는 더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처제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푹푹 찌는 여름 오후의 택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협했고, 구역질나게 했고,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그는 그때 했다.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 P83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 P84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동서가 마치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처제를 버리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 P86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 P101

"힘들지 않았어?"
그때 그녀는 그를 보며 웃었다. 희미하지만 힘이 있는 어떤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시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 P104

전화가 끊겼다. 차라리 아내가 다른 아내들처럼 소리치고화를 낸다면, 잔소리를 하고 악담을 퍼붓는다면 마음이 편할것이다. 이토록 쉽게 체념하고, 그 체념의 앙금이 우울함으로가라앉는 아내의 성격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그것이 아내의 선하고 약한 면임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 P119

이즈음처럼 무수한 색채들이, 물론이전에도 색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그의 안에서 터져나온 적은 없었다. 마치 몸의 내부가 힘찬 색채들로 가득 차올라, 그 격렬함이 더 견디지 못해 분출돼 나오는 것같았다. 매우 격렬하게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의 어떤 시기에도 결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었다.
나는 어두웠다.라고 그는 느낄 때가 있었다. 그는 어두웠다.
어두운 곳에 그가 있었다. 그가 이즈음 경험하는 색채들이 부재했던 그 흑백의 세계는 아름다웠고 고즈넉했으나, 그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잠잠한 평화가 주는 행복을그는 영원히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실감 따위를 느낄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격렬한 세계가 주는 자극과 고통을견디기에만도 그의 에너지는 벅찼다. - P122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으로 반점을 어루만졌다. 낙인같은 이 점을 나눠갖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널 삼켜서, 녹여서, 내 혈관 속을 흐르게 하고 싶다. - P142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 P142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 P143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 P146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P175

고개를 외틀어 그녀를 외면하며, 영혜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찌르는 거지 - P190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 P192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 P197

문득 그녀는 이 순간을 수없이 겪은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고통에 찬 확신이 마치 오래 준비된 것처럼,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 P200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 P201

자신을 집어삼키는 구멍 같은 고통을, 격렬한 두려움을, 거기 동시에 배어든 이상한 평화를 그녀는 느꼈다. - P202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 P204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 P205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 P214

넋이 풀린 그들의 간절한 시선은 마치 창 너머로 걸어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들은 여기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그렇듯이. 영혜가 그랬듯이. 그녀가 이 여자를 안지 않은것은,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16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그 기묘하고 황량한 영상에 자신의 전부를걸고, 전부를 잃었을까. - P218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 P220

이건 말이야.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덜컹, 도로가 파인 자리를 지나며 차체가 흔들린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영혜의 어깨를 붙든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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