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알튀세의 ‘반인간주의’,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전후 ‘포스트’ 담론의 대두 이후, 오랫동안 서구 지성사의 중추적 역할을 자임해온 인문주의(Humanism)의 몰락의 속도는 가팔랐다. 그 여파는 주지하다시피 현재진행중이다. 단적으로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의 처지만 살펴보더라도 異論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변변한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과, 정년 보장은커녕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도 없이 시간강사나 기껏해야 겸임교수로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강의를 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 앞에서 한숨짓기가 일쑤다. 보스턴대 명예교수인 역사학자 하워드 진을 다룬 『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는 전술한 시대적 조류와는 걸맞지 않게 ‘인문주의의 부활’을 역설하고 있다.

 

反인문주의의 역사적 연원은 얕지 않다. 1960~7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 대학의 인문학부에 프랑스 이론이 출현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해 널리 퍼진 반감 등의 영향으로 반인문주의의 기운은 여지없이 미국의 지성계를 강타하기에 이른다. 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인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의 사유 전반을 관류하는 ‘인간-저자의 죽음’이라는 핵심적인 테제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전까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온 ‘위대한 문학 텍스트의 중심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서, 베르길리우스, 단테, 아우구스티누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망라하는 유서 깊은 인문학 도서목록의 질이 이제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이드는 『저항의 인문학』의 진정한 주제가 ‘말 그대로의 인문주의’가 아니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전통의 ‘방향성’ 자체는 이어받되 그것을 ‘매우 선택적으로만 이용’하겠다고 밝힌다. 그가 강조점을 두는 것은 현재적 맥락의 인문주의이다. “인문주의의 현재성을 재숙고하고 재검토하고 재정식화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사이드는 덧붙인다. ‘변화는 곧 인간의 역사’ 자체인데 이 역사야말로 ‘인문학의 근본 전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변화’란 “인문주의라는 관념을 구성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비극적 결함”으로, 구체적으로는, 달라진 그리고 달라지고 있는 ‘우리’라는 범주 기준을 전제한 것이다. 미국과 같이 근본적으로 다문화 사회인 곳에서 “백인, 남성, 유럽인이자 미국인인 우리”의 개념이야말로 해체되어 마땅한 것이 아니냐고 사이드는 주장한 바 있다.


사이드적 인문주의의 종착점은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라고 하는 ‘불안정한 추방의 장소’에로 향한다. ‘추방의 장소’라는 표현이 구사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사이드 스스로 그 장소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이라 생각한 것과 맞닿는다. 그리고는, 필연적으로 ‘실천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때문에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의 하워드 진이라면 사이드의 예술론을 틀림없이 명백한 ‘자기기만’ 행위로 비판할 것이다. 일례로 영화 「대부」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영화라 하더라도 그 속에 등장하는 자객, 암살자, 폭력배조차 결국에는 마치 선한 사람인양 미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에서 드러나는 하워드 진의 인문주의적 태도는 굉장히 간결하고 명쾌하다. 이는 시대의 양심으로 대변되는 그의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이 책이 저널리스트이자 인터뷰의 대가로 알려진 데이비드 바사미언과의 현장감 있는 인터뷰 형식의 외피를 띠고 있는 것에 연유한다. 하워드 진의 문화예술론의 핵심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개인의 이야기에 접근”해보려는 것에 있다. 방점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에 찍힌다.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힘’을 주는데, 재미없는 수차례의 강의보다 한 편의 예술작품이 사회의 핵심을 보다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옹호하는 문학작품의 전형이 여론조작과 언어조작 ― ‘이중 언어’와 ‘이중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미래 전체사회를 비판한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류의 작품이 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워드 진의 예술론은 군더더기가 없는 만큼 적지 않은 논쟁의 씨앗을 품고 있다. 자연스레 문학의 가치를 외재적 측면에만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반론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 ‘문학과 활자화된 글의 가치’만을 중시한 나머지 영상 미디어의 존재론적 가치를 손쉽게 폄하한 태도 역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오늘날 인문주의의 부활 담론을 살펴볼 때 상당부분 ‘정체성’ 연구에 중점을 둔 “탈식민주의, 민족학, 문화 연구 같은 최신 유행” 사조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된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단어-회전과 태평한 전문성이라는 공장”의 엘리트주의적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심심찮은데, 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전언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인문주의적 지식에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임시적이고, 의문스럽고 논쟁적인 무언가”가 항시 존재하게 마련이니 이야말로 ‘비극적 결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비극’은 다른 한편 “인간의 의지와 행위능력이 이뤄낸 형식의 성취”를 가능케 하는 인문주의의 또 하나의 얼굴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문주의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김정하 옮김 / 마티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알튀세의 ‘반인간주의’,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전후 ‘포스트’ 담론의 대두 이후, 오랫동안 서구 지성사의 중추적 역할을 자임해온 인문주의(Humanism)의 몰락의 속도는 가팔랐다. 그 여파는 주지하다시피 현재진행중이다. 단적으로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의 처지만 살펴보더라도 異論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변변한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과, 정년 보장은커녕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도 없이 시간강사나 기껏해야 겸임교수로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강의를 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 앞에서 한숨짓기가 일쑤다. 2003년 타계한 컬럼비아대 석좌교수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은 전술한 시대적 조류와는 걸맞지 않게 ‘인문주의의 부활’을 역설하고 있다.

 

흔히들 사이드 하면 본능적으로 ‘오리엔탈리즘’ 담론만을 떠올리기 일쑤이고,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오직 ‘오리엔탈리즘’에만 쏠리는 결과를 낳았다.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은 대중의 그 같은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는지를 그의 폭넓은 ‘인문주의자적’ 면모를 통해 증명한다. 이 책은 생전에 백혈병 말기의 사이드가 “화학치료와 수혈을 강도 높게 받던 시기”에 펴낸 마지막 책으로, 2002년과 2003년에 걸쳐 각각 컬럼비아대와 영국의 캠브리지대에서 했던 강의들을 묶은 것이다.

 

反인문주의의 역사적 연원은 얕지 않다. 1960~7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 대학의 인문학부에 프랑스 이론이 출현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해 널리 퍼진 반감 등의 영향으로 반인문주의의 기운은 여지없이 미국의 지성계를 강타하기에 이른다. 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인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의 사유 전반을 관류하는 ‘인간-저자의 죽음’이라는 핵심적인 테제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전까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온 ‘위대한 문학 텍스트의 중심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서, 베르길리우스, 단테, 아우구스티누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망라하는 유서 깊은 인문학 도서목록의 질이 이제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이드는 『저항의 인문학』의 진정한 주제가 ‘말 그대로의 인문주의’가 아니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전통의 ‘방향성’ 자체는 이어받되 그것을 ‘매우 선택적으로만 이용’하겠다고 밝힌다. 그가 강조점을 두는 것은 현재적 맥락의 인문주의이다. “인문주의의 현재성을 재숙고하고 재검토하고 재정식화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사이드는 덧붙인다. ‘변화는 곧 인간의 역사’ 자체인데 이 역사야말로 ‘인문학의 근본 전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변화’란 “인문주의라는 관념을 구성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비극적 결함”으로, 구체적으로는, 달라진 그리고 달라지고 있는 ‘우리’라는 범주 기준을 전제한 것이다. 미국과 같이 근본적으로 다문화 사회인 곳에서 “백인, 남성, 유럽인이자 미국인인 우리”의 개념이야말로 해체되어 마땅한 것이 아니냐고 사이드는 주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혹은 아이러니한 것은, 사이드와 비슷한 맥락의 주장을 구조주의적 반인본주의자들이나 리오타르 등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정작 이를 두고 인문주의의 파괴 혹은 해체의 근거로 삼는다. 이에 대한 사이드의 반론은 곱씹어볼만하다. 인문주의는 다만 그저 ‘잘못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주의는 ‘악용’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인문주의의 종언 담론은 사이드가 보기에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우울한 사건을 소란스러울 정도로 분석”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된다.

 

사이드적 인문주의의 종착점은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라고 하는 ‘불안정한 추방의 장소’에로 향한다. ‘추방의 장소’라는 표현이 구사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사이드 스스로 그 장소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이라 생각한 것과 맞닿는다. 그리고는, 필연적으로 ‘실천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때문에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의 하워드 진이라면 사이드의 예술론을 틀림없이 명백한 ‘자기기만’ 행위로 비판할 것이다. 일례로 영화 「대부」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영화라 하더라도 그 속에 등장하는 자객, 암살자, 폭력배조차 결국에는 마치 선한 사람인양 미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주의의 부활 담론을 살펴볼 때 상당부분 ‘정체성’ 연구에 중점을 둔 “탈식민주의, 민족학, 문화 연구 같은 최신 유행” 사조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된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중에는 “단어-회전과 태평한 전문성이라는 공장”의 엘리트주의적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심심찮은데, 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전언을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인문주의적 지식에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임시적이고, 의문스럽고 논쟁적인 무언가”가 항시 존재하게 마련이니 이야말로 ‘비극적 결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비극’은 다른 한편 “인간의 의지와 행위능력이 이뤄낸 형식의 성취”를 가능케 하는 인문주의의 또 하나의 얼굴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문주의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간’의 문제를 다룰 때 그것을 단순히 양적 연장(extension)의 맥락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공간은 결코 즉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간을 실생활에서 체험하므로 그것은 차라리 ‘삶세계’(Lebenswelt)로서의 공간이다. 다시 말해 일종의 ‘생활역학’으로서의 공간이라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개인이 그 공간을 받아들이는 ‘지각’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개입 된다.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이난아 역, 민음사, 2008)과 데틀레프 블룸의 『고양이 문화사: 작은 발이 걸어간 길을 찾아서』(두행숙 역, 들녘, 2008)는 이러한 맥락에서의 공간-삶세계로서의 공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스탄불』은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자전 에세이다. 파묵과 그의 작품에 있어 이스탄불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공간이다. 파묵은 말한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날부터 시작하여 내가 살았던 집, 거리 그리고 마을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파묵은 조셉 콘래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나이폴 등의 작가들과 달리 “언어, 국민, 문화, 나라, 대륙, 더욱이 문명을 성공적으로 바꾸면서 글을 쓴 작가”가 아니다. 파묵의 문학적 창조의 정체성은 유배나 이주가 아닌, “항상 같은 집, 거리, 풍경 그리고 도시에 매여 사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때문에 파묵에게는 “도시의 운명도 사람의 성격이 된다.”


파묵에게 이스탄불은 ‘기억’의 공간이다. 파묵은 터키어 고유의 시제인 ‘비한정 과거시제’로 이를 설명해낸다. 이 시제는 “터키어에서 남에게 들은 이야기나, 사건이 일어난 것을 나중에 보고 알게 되었을 때 사용하는 과거시제”를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말했던 것이 우리가 스스로 경험했던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기억으로 변한다. 때문에 “나는 한때 그림을 그렸고, 이스탄불에서 태어났고, 이스탄불에서 자랐고, 그럭저럭 호기심 많은 아이였고, 그 후 스물두 살에 어떤 이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와 같은 말로 종결돼서는 안 된다. “시작했다고 한다”로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파묵은 이 책의 초입에서 독자에게 자신과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해줄 것을, 추억해줄 것을 부탁한다. “아, 독자여, 이는 당신의 집중에 달려 있다. 나는 당신에게 진솔함을 보여 줄 테니, 당신도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 주길.”


파묵에게 기억의 문제는 공간의 문제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스탄불이라는 공간은 파묵에게 정확히 ‘비애’라는 상실감의 그것으로 표현된다. 파묵이 이스탄불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가 있겠지만, 비애는 『이스탄불』에서 여러번 곱씹어봐야 할 개념이다. 역자 역시 비애의 원어인 ‘h¨uz¨un’의 번역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비애가 “시간적으로 오랜 세월을 걸쳐 축적되고 문화적으로 의미가 덧씌워진, 공동체가 함께 연대하고 공감하여 느끼게 되는 어떤 살아 있는 느낌”일 것이라 말한다. 비애는 서구가 바라보는 시선-제국의 영광이 사라진 곳으로서의 이스탄불-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한 사람이 느끼는 멜랑콜리도 아니다. “수백 명의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그 암담한 느낌”, 그것이 바로 비애이다. “이스탄불 전체의 비애”인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차라리 이스탄불의 비애는 벗어나야 할 고통이 아니라 도리어 직접 “자신이 택한 그 무엇”이다. 때문에 비애는 “이스탄불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이 마비의 변명”이 된다. “이스탄불을 무대로 한 흑백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이며 진정한 사랑 이야기는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명백하게 지니고 있는 ‘비애’ 때문에 멜로드라마로 끝난다.” 이런 식으로 파묵은 이스탄불의 비애를 일종의 ‘영광’으로 긍정한다. 파묵은 평생 동안 한 곳에서 자신의 두 눈으로 이스탄불의 비애를 보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비애의 이스탄불을 끝내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일 테다.


인간적 지각의 대상으로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매력적인 소재임에 틀림없다. 그간의 ‘도시’ 담론은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달로 대두된 ‘대도시’(metropolis) 담론으로 그 외연이 확장되고 있는 추세이고, 최근에는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보여줬던 서울시 시청 앞 공간 담론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로 인해 촉발된 광화문 일대의 공간 담론으로 하루가 다르게 첨예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스탄불』과 『고양이 문화사』는 미시-문화사적 맥락에서의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 담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 아메리카
수잔 손택 지음, 임옥희 옮김 / 이후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번의 암과의 투병과정조차 거뜬히 이겨냈던 그녀가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결국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는 비보가 전해졌을 때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던 그녀였던지라 그 충격과 허탈함은 더 했을 것이다. 『인 아메리카』(임옥희 역, 이후, 2008)에는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 직면한 ‘인간’ 수전 손택의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다.

손택에게 삶을 향한 저 가열찬 몸짓 외에 하나의 거대한 욕망이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 그것은 예술이었다. 이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그녀의 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이미 명확히 드러난 바 있다. 손택은 단언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또 어떠했던가.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수많은 강연과 저술 일정 중간에도 짬짬이 연극과 춤, 영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던 것도 필경 그 같은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했던 것이 문학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손택이 이제는 “자신에게 정말로 소중한 일”을 하고 싶다고, 특히 소설을 많이 쓰고 싶다고 소망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두 번째 암과의 투쟁 당시 손택이 몰두했던 것도 소설인데, 그 책이 바로 『인 아메리카』다. 자궁육종치료까지 뒤로 미룰 정도로 그녀는 이 작품에 적지 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손택으로 하여금 그토록 예술을, 문학을, 소설을 간절히 욕망케 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문학은 자유다」에서 손택은 스스로를 “저는 이야기꾼입니다”라고 선언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인 아메리카』에서 손택은, 작품 속 여주인공의 입을 빌어 “예술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은 특권이자 축복이었다”고 말한다. 평론가 강유정은 소설이란 장르가 “대답이라기보다 공모나 위안”이라고, 즉 “소설은 답이 아닌 위안을 준다”고 압축적으로 정의내린 바 있는데, 이 설명이 손택의 경우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실제로 손택은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고 토로하고 있다. 왜 ‘이’ 이야기가 아니라 하필이면 ‘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그녀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긴 여정이라 할지라도 어딘가에서 시작해야 한다.” 때문에 손택은 결코 글쓰기를, 소설을 멈출 수가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가 왜 그리도 생을 갈망했는지 공감하게 된다.


『인 아메리카』에서 손택은 “민족의 상징”이었던 폴란드 실존 여배우 헬레나 모드제예브스카의 미국 이민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다. 여기서 손택은 “누가 옳고 그른가에 관한 논쟁”에서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다음 날이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그러다가도 또 다음날 아침이면 완전히 마음이 반대로 바뀔 수가 있다. 모두헬레나가 왜 폴란드를 떠나려 하는지 궁금해 한다. “남들은 이유가 필요하다.” 조국이 서구 열강들에 의해 지배되고 분리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저항 운동에도 참가했던 헬레나가 미국에서 유토피아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일 수도, 미국 무대에 서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행 직전 헬레나는 푸리에 식의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을 잊는다. 대신 셰익스피어를 떠올린다. “셰익스피어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그녀에게 셰익스피어는 곧 아메리카를 뜻한다. 그렇게 하여 헬레나는 아메리카로 갔다.


“미국은 대량학살 위에 세워졌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던, 그래서 미국 내에서 ‘반역자’로 매도되기까지 했던 손택의 입에서 느닷없이 아메리카가 모든 것을 의미한다니, 의아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손택이 가리키는 ‘아메리카’는 과거다. “과거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나라다.” 그 때 “미국은 단지 또 다른 나라가 아니었다.” 그 때 미국은 세계사의 정당한 진로로서 창조된 ‘미국’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유토피아 공동체 건설에 실패한 헬레나에게서 보듯, 결과적으로 유토피아는 실패했다. 흥미로운 것은, 유토피아를 공간적 맥락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손택의 주장이다. “유토피아는 공간의 일종이 아니라 시간의 일종이다. 어디에도 아닌 이곳에 있고 싶다고 느끼는 그 짧은 순간, 모든 유토피아들은 너무나 짧은 찰나다.” 결국 『인 아메리카』의 ‘미국’은 좋았던 그 때 그 시절의 아메리카로 귀결된다.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 보다 정확히는 자살을 지켜보아야 했던 지인 알프레드 알바레즈는 학창시절 자신의 물리 선생님의 말을 쉬이 잊지 못했다. “누구든 목을 베어 죽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세심하게, 먼저 자기 머리를 자루 안에 넣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혼란이 남게 된다”던. ‘존재하기를 멈추기’ 얼마 전 손택은 간호조무사에게 몸을 기댄 채 “내가 이제 죽나 봐요”라는 말과 함께 울음을 터뜨리며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실비아 플라스와는 달리 손택은 코앞에 닥친 가혹한 죽음의 현실 앞에서 결코 초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권의 책에서 자연스레 우리는 그녀의 이름 앞에 그 어떤 수식도 붙지 않은, 다만, 그저 ‘인간’ 손택의 모습을 그려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머니의 죽음 - 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
데이비드 리프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2번의 암과의 투병과정조차 거뜬히 이겨냈던 그녀가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결국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는 비보가 전해졌을 때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던 그녀였던지라 그 충격과 허탈함은 더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이민아 역, 이후, 2008)에는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 직면한 ‘인간’ 수전 손택의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다.

『어머니의 죽음—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은 무엇보다도 저자가 수전 손택의 외아들인 데이비드 리프라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어머니의 사망 이후 3년 만에 그녀가 죽기 전 몇 달 동안을 기록한 것이 이 책이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유지되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어머니 수전 손택의 투병 과정을 저자는 “고통학 대학원 과정”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어머니가 ‘죽었다’ 혹은 ‘사망했다’고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어머니는 존재하기를 멈추었다”라는 표현을 저자는 굳이 가져온다.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생을, 삶을 갈망한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들을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책 속에 묘사된 수전 손택의 생에 대한 집념은 굉장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어렸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다 “언젠가 내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썼다. 데이비드 리프는 손택이 항상 미래를 살았다고 말한다. “어머니에게는 미래가 모든 것이었다. 사는 것이 모든 것이었다.” 실제로 손택은 “화학적 불멸”을 꿈꿨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는 것”, “삶을 지속하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다. 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스스로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공격적인 서평을 접한 손택이 보인 반응이다. “내가 내 작품을 믿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그래 줘야 할 이유는 없겠지.”


가령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손택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병실에서 자신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던 중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 아무것도 잘못될 게 없지. 이제 나는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지저귈 지빠귀의 노래도 즐길 수 있다네.” 이렇듯 브레히트는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손택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는 사실과 화해할 수 없다”던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손택에게 “‘나’를 초월하지 않는 한 죽음은 견딜 수 없는 문제”였다. 죽은 자에게는 그 무엇도 위안이 되지 못하는 법이지 않은가. 종합해보면 데이비드 리프의 결론은 이렇다. 브레히트의 죽음은 손택의 죽음보다는 훨씬 편안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의 위안이며, 예술의 거짓”이다. 저자는 손택을 옹호한다. “어머니에게는 어머니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권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손택에게 삶을 향한 저 가열찬 몸짓 외에 또 하나의 거대한 욕망이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 그것은 예술이었다. 이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그녀의 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이미 명확히 드러난 바 있다. 손택은 단언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또 어떠했던가.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수많은 강연과 저술 일정 중간에도 짬짬이 연극과 춤, 영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던 것도 필경 그 같은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했던 것이 문학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손택이 이제는 “자신에게 정말로 소중한 일”을 하고 싶다고, 특히 소설을 많이 쓰고 싶다고 소망한다.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 보다 정확히는 자살을 지켜보아야 했던 지인 알프레드 알바레즈는 학창시절 자신의 물리 선생님의 말을 쉬이 잊지 못했다. “누구든 목을 베어 죽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세심하게, 먼저 자기 머리를 자루 안에 넣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혼란이 남게 된다”던. ‘존재하기를 멈추기’ 얼마 전 손택은 간호조무사에게 몸을 기댄 채 “내가 이제 죽나 봐요”라는 말과 함께 울음을 터뜨리며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실비아 플라스와는 달리 손택은 코앞에 닥친 가혹한 죽음의 현실 앞에서 결코 초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권의 책에서 자연스레 우리는 그녀의 이름 앞에 그 어떤 수식도 붙지 않은, 다만, 그저 ‘인간’ 손택의 모습을 그려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