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
나루케 마코토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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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독서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조금만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 나오면 전체적인 맥락은 커녕 문장에서조차 이해가 되지 않아 몇번씩 다시 읽어보다 책을 덮곤 했다. 가벼운 소설책이라도 읽을라 치면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책의 흐름을 놓쳐버리는 일들이 몇달간 반복됐다.  

그런 와중에 예전에 어렵게 읽어냈던 책들을 돌이켜 보며 그땐 어떻게 이런 책들을 읽었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그 때도 겨우 어떻게 읽어내긴 했지만 과연 독서를 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되었다. 문장 하나하나를 겨우겨우 납득해가며 지지부진한 전선을 조금씩 전진시켜 나가듯이 힘들게 독서를 끝마쳤지만, 지금 남은 것은 그런 어려운 책들을 읽었보았다는 사실 뿐... 

그런 와중에 마쓰오카 세이고의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라는 책의 리뷰를 보고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류의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그간 멀리해왔었는데, 그간 너무 오만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요즘 아이들에게 독서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제대로 된 독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이 우격다짐 책을 읽어왔었구나'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그렇다고 덜컥 돈 주고 사기에는 겁이 나서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는데 도서관에는 그 책이 없었다. 대신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의 리뷰에서 같이 보았던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가 눈에 보여서 그 책을 빼들고 읽어보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의 간단한 감상이다.  

보통의 사람보다 책(을 포함한 여타의 모든 글들)을 읽는 속도가 유난히 느린 탓에 난 제대로 자리잡고 앉아서 몇 시간은 책 읽을 준비를 하지 않는 이상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선택할 만한 책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결국엔 자리 잡고 읽기 전에 책을 들춰보아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어렵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난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 이 책을 선택하지 않고 다시 책장에 꽂아놓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를 선택하지 않게 된 간단한 감상에 대한 글이다. 

이 책은 상당히 얇고 가벼우며, 흥미있는 문장들(때론 단호하고, 때론 오만한)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나조차도 창틀에 걸터 앉아 가볍게 훑어볼 수 있었다. 나루케 마코토는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지식인이자 경영인으로 삼십대의 젊은 나이에 마이크로소프트사 일본 법인의 사장을 맡을 정도로 창의적이고 능력있는 인재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성공을 창조적인 독서의 덕으로 돌리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가 제안하는 독서법은 모든 경계를 허무는 초병렬적인 독서법이다. 하나의 책이라고 하는 '완결성'을 허물고, 책의 장르라고 하는 벽을 허물고, 분야를 허물고, 무엇보다도 독서를 하는 시간과 일상이라고 하는 시간적 경계, 그리고 독서를 하는 곳과 아닌 곳의 공간적 경계를 허문다. 어느 곳이든 책을 두고, 어느 때라도 책을 펼치며, 그것이 어느 책이든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지만 그걸 떠나서 그가 이미 선택한 책들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거칠게 말해서 정독도 필요없으며, 메모도 필요없다. 순간 순간 읽는 독서의 단편들은 모든 창조성과 창의력의 자양분이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쉽다. 그러한 독서법이 저자와 같이 창의적이면서도 상업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꽤 필요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진지하게 그의 독서법을 실천해볼 생각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독서법이 아니다. 

일단 젊은 나이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저자의 독서법은 평범한 수준의 삶을 누리는, 혹은 그보다 고단한 삶을 누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실천하기 어렵다. 그가 책을 대하는 원칙으로 제시한, "빌려보지 않는다. 빌려주지 않는다. 버리지 않는다."라는 세 원칙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명이나 있을까? 저자 스스로 집에 책이 너무 많아 톤 단위로 헤아릴 정도라며 몇달에 한번씩 이미 읽었거나 필요없는 책을 4톤트럭으로 별장에 옮겨 보관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많은 책을 보관할 집이나 별장은 커녕 4톤 트럭을 하루 대여할 돈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읽고 싶은 책을 모두 사라고 권하는 것이 과연 올바로 된 독서가의 태도일까? 심지어 자신의 독서법을 추천한다며 한 권의 책을 쓰는 작가의 태도일까? 오직 자신만이 실천할 수 있는 독서법은 자신만 알고 있으면 된다.  

나루케 마코토의 이러한 태도는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동네의 중소 서점보다 대형 서점을 추천하는 그의 태도에는 책을 사랑하는 독서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도서 유통구조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지는 못한다. 일본의 동네서점들이 우리나라처럼 촉수를 뻗쳐가는 대형서점과 인터넷 쇼핑몰의 공세로 인해 설 자리를 일어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런 불편함 없이 대형서점을 추천하는 저자의 태도는 서점을 지식과 문화가 공유 및 유통되는 상징적 공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쇼핑몰로 취급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저자는 오프라인에서 책을 구매할때 책장 하나를 통째로 드러내버릴 정도로 책을 한꺼번에 구매하는데 이 역시 보통 사람들은 전혀 실천할 수 없으며, 뿐만 아니라 전혀 그럴 필요도 없다. 집안 여기저기에 책을 뒹굴리기 위해 대형서점에 가서 수백만원을 쓰라는건가? 

아무리 저자가 추천하는 초병렬 독서법이 효과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독서 방식(여기엔 책을 읽는 행위 뿐 아니라 책을 선택하고, 관리하고, 습득한 지식을 관리하는, 책과 지식을 대하는 총체적인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을 권하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기게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난 저자가 말하는 초병렬 독서의 효과와 그 가능성 자체가 의문시 된다. 일단 대다수의 사람들은 책을 가끔 사서 본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는다. 그런데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책을 모두 사서 보는 경우는 드물다. 시립도서관이나 학생들의 경우 학교 도서관을 이용해 대출하여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책을 여기저기 놓고 수시로 들춰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해진 시간 안에 집중해서 읽고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초병렬 독서가 꼭 책을 여기저기 널어놓고 틈나는 대로 읽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여러 권의 책을 병렬적으로 독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훑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건 어디까지나 책을 지적 자극의 도구로, 아이디어의 도구로 이용하는 방식으로서의 독서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 같은 경영인에게는 그런 자극들이 중요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책을 좀 더 진지하게 대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저자와 달리 억압적이고 소외된 일상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의 일터에서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일상 속에서는 점점 희미해져가는 존재로,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점점 무의미한 사람이 되어간다. 독서는 오히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돌이켜 보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망과 더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그러한 독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 책을 선택하지 않게 된 이유는 저자가 책을 고르는 기준에 관해서 설명한 부분을 읽었을 때다. 저자는 책이 폼내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폼이 난다는 것은 좋은 책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미국 엘리트의 예를 들며, 그들은 자기계발서를 읽었어도 남들이 그 사실을 아는 걸 부끄러워하며 숨긴다고 한다. 저자는 자기계발서에 애한 혐오를 책 곳곳에서 종종 드러낸다. 나도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으며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은 자기계발서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저자는 책을 고를 때 자신이 그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남들에게 보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고 한다. 그 때 만약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폼이 난다면 과감히 사라고 한다. 그게 좋은 책이란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난 이 책을 가지고 사서에게 가서 대출해달라고 말할 상상을 하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이 책에 대해 과도한 비방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나 스스로가 저자가 권하는 초병렬 독서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초병렬 독서법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 이 책을 잠시 훑어본 감상을 말하고 있을 뿐임을 뒤늦게 나마 분명히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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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11-08-1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도서관에서 이책을 빠르게 읽고 왔습니다. 꼭 직장인을 위한 독서법이라기보다 저는 크리에이티브 해지기 위한
사람들에게 크리에이티브가 필요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좀더 빠른시간안에 다독하고 여러분야의 지식을 섭렵
하게하여 상상력이 풍부하게 해짐으로서 자신만의 아이디어 창출 자신만의 생각을 갖게 함에 있어 굉장히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이 책의 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이 저자의 독서법을 그대로 따라하기는 무리가 있다는것에
매우 동의합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어떻게 빌리지않고 버리지않고 빌려주지않겠어 라고 생각하기도하고
마치 별장이 책을 위해 존재 해 보이니까요. 저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그냥 휴식을 위한 별장 조차 구입도 못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이책의 저자가 태어날 때 부터 부자는 아니였다는 점에서
이 저자만의 철칙을 약간은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어쨋든 님 블로그에서 오늘 읽은 책에 대해 꽤 신랄한 비판을 읽고 나니 저는 너무 안일하게 책의 내용과 저자의
논리적 모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않고 비판하지않고 그냥 그대로 수용 하려고 했던 점에 반성을 하게되네요.

저자는 남이 하는것을 그대로 따라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자가 했던 그대로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하는 바입니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초병렬독서법을 한번쯤 실행 해본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논리학 콘서트 -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는 논리 이야기
사와다 노부시게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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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리학', 내지는 '논리'란 말은 (다른 여타의 단어들이 그러하듯)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철학'이란 학문이 일상적인 용법에서 자신의 가치관이나 이념, 혹은 한 사회/집단의 문화나 질서, 심지어는 특정 분야에서의 무형적인 기술을 의미하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흔히 철학의 한 분과로 이해되는 논리학의 경우도 지식의 명증성을 검증하려는 까다로운 인식론적 이해에서부터 담론의 (언어적)구조, 사회 현상의 작동 방식, 심지어는 화술이나 설득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생활 속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논리학이지만 엄밀히 논리학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지식, 내지는 판단, 혹은 지식 활동들을 원리적으로 분석하고 검증하고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이 논리학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되어서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단논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체계화된 고전 논리학은 논리학의 뼈대를 이루고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헤겔 이후 논리학에서는 다양한 분화와 변화가 일어나고, 특히 영미미 분석철학에서는 복잡한 수학과 최신의 과학 이론들과 결합하여 굉장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학문으로 발전했다. 과거엔 논리학은 다른 지식 생산의 토대로서 그 자체로 타당한 학문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논리학 자체가 학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까다롭고 복잡한 학문이 최근 한국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건 논리학이란 학문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아마도 논술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쉽게 풀어 쓰여진 책들은 대부분 교양도서가 아니라 수험서 코너에서 팔린다. 그러다보니 수시로 변화하는 입시 제도에 따라 수익성 있는 책을 팔기 위해 충분한 준비 없이 성수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급하게 만들어진 책들이 태반이다. 간혹 아주 잘 만들어진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수험서일 뿐 그 자체로 독자들이 논리학이란 학문에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지금 소개하는 <<논리학 콘서트>>은 일본에서 출간된지 50년이 넘은 책으로 분석철학을 전공한 전문가이다. 이 책이 지금 이제야 한국에 번역 출간된 이유가 지금의 논술 붐에 편승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책의 본문 자체에선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논리학에 대한 애정을 갖고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논리학을 친숙하게 소개하려고 애쓰는 젊은 학자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철저한 논리학 입문서이다. 논리학이란 학문 안에는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지만 동시에 굉장히 흥미로운 미지의 영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수 차례 강조하면서도 저자는 철저하게 한계를 지킨다. 이 책에서 다루어야 할 논리학의 기초적인 내용은 딱 여기까지라고. 그러다 보니 내용은 평이하다. 논리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기보다는 좀 더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논리학을 전혀 몰랐던 사람, 혹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입문서로서 안성맞춤이다.  

  

 이 책에는 이해를 돕는 쉽고 재미있는 예시(예문)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 책의 추천사와 몇몇 평에서는 이 책의 장점으로 꼽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실 이 점은 논리학 입문서의 미덕조차 되지 못한다. 웬만한 논리학 서적은 굉장히 풍부한 예시(예문)들을 담고 있고, 그 예문들을 통해서 그 사고의 타당성을 좀 더 보기 쉽게 다듬어서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영미 철학의 공공연한 전통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사용된 그런 예시와 예문들은 아마도 이 당시 이미 널리 사용되는 유형의 것들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에 풍부한 예시와 예문들이 있어서 읽기 쉽다는 것이 아니다. 논리학이란 학문이 어떤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저자가 본문에서도 밝히듯이 논리학을 몰라도 일상 생활에서 적절한, 혹은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으며, 논리학을 공부했다고 옳은 판단을 항상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문으로서의 논리학 그 자체만 보면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분리된 지식의 세계를 다루는 것 같으며, 우리 일상생활에 유용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그것이 지난 수십년간 한국 사회에서 논리학이 등한시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논리학은 우리에게 더 유용한 판단(즉 이익이 되는 판단)이 아니라 타당한 판단에 대해 질문하며, 우리가 보고, 듣고, 내리는 모든 판단들에 대해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논리학이 지식과 판단(명제)에 대한 학문이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이익을 주는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올바름과 타당함에 따라 움직이도록 간섭한다. 이것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된다. 우리가 논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책을 읽든, 기사를 보든, 뉴스를 보든, 정치인의 연설을 듣던, 선생님의 설교를 듣던, 혹은 어떤 과학자의 연구결과를 읽던,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검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논리적 능력이다. 우리가 접하는 정보들에 대한 학술적이고 비판적인 독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논리학이다. 이 순간 우리가 공부한 논리학은 기존의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의미에서 변형되어 우리의 사고 능력을 가르키는 말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어를 공부할 때 문법뿐 아니라 회화도 공부하듯이 논리학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변 사물을 해석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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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 콘서트 -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는 논리 이야기
사와다 노부시게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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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이란 것이 뭔지 궁금한 사람에게 추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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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철학적 유산 공감이론신서 33
박상현 외 지음, 과천연구실 엮음 / 공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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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튀세르에 대한 해설서로서는 손색이 없다. 쉽게 읽히는 대중 소개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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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리라이팅 클래식 7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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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은 국내에선 최고의 입문서, 개론서, 해설서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최근 1년 7개월 만에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드 프로젝트]가 발간되면서 2003년 이후 9번째 시리즈가 탄생했다. 그린비의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딘 행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트랜스 소시올-로지 총서라든가 크리티컬 컬렉션 등 현 시대를 반영하는 좀 더 정세적인 텍스트들을 출간하는 데에 그린비가 경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찌됐든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는 초급독자에게 가장 안심하고 권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책이라는 점에서 분명 한국 독자들에게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역시 국내 칸트 철학 입문서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문체나 구성이 균형 잡혀 있으며,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고, 너무 많은 걸 포기하지도 않았다.  

 이 책은 칸트 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입문서가 아니라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이다. 따라서 책 전체의 구성은 칸트의 인식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은 '2부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짧은 고찰'이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부분도 바로 이 2부다.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 해설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반면 3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다. 칸트 철학의 철학사적 의미,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과 한계, 이를 넘어서는 철학의 단초들을 밝히려는 웅대한 프로젝트의 냄새가 느껴지지만, 저자의 취향이 너무 강하게 베어 나온다. 이 책은 입문서이자 해설서이기에 2부까지 견지해왔던 좀 더 기본에 충실한 자세를 끝까지 밀고 나갔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든다.  

 칸트가 미친 영향과 철학사적 의미, 비판, 극복이란 주제를 긴장감 있게(대중성과 이론적 밀도의 융합) 끌고 나갔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서 너무 갑작스럽게 니체와 들뢰즈로 뛰어 넘어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부가 진행될 수록 오히려 칸트는 소외되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칸트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무시 같은 것이다. 3부에 소개된 칸트 비판은 지엽적이거나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원인은 3부에 소개된 칸트 비판의 내용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2부에 남겨진 상태의 칸트과 3부에서 비판 받는 칸트 사이의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3부를 읽다보면 저자가 느꼈을 곤란이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책이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해설서이다보니 느꼈을 곤란이다. 칸트 이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칸트 철학에 대한 종합적 실체가, 특히 [판단력비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이 책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판단력비판]에 대한 설명을 삽입했지만 뭔가 급박하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의 곤란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 같다.  2부를 좀 더 포괄적으로 구성하여 [순수이성비판]으로부터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으로 진행되는 칸트 철학의 흐름과 그 내적 긴장들을 2부의 후반에 구성하고, 3부는 철저하게 칸트 이후, 즉 비판과 반비판, 한계와 극복의 문제에 집중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구성상의 아쉬움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사소한 것인데, 니체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법한, 혹은 수유+너머의 문화적 전통이기도 한 저자의 풍부한 비유들이 또 하나의 아쉬움이다. 사실 저자의 비유들은 다른 딱딱한 철학 해설서에서는 보기 힘든 독창적이고 색다른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다지 성공적인 비유들은 아닌 것 같다. 개념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문학적으로 성공적인 비유도 아니다. 오히려 흐름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나는 후반부에서는 비유가 등장하면 그 부분은 건너뛰어 버리기도 했다. 나의 책 읽는 습관에서 어느 부분을 건너 뛰고 읽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수능 문제 풀때조차 부호 하나 빼놓지 않고 지문을 읽어야 속이 풀리는 스타일이니 말이다. 
 

(20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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