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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
나루케 마코토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최근 독서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조금만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 나오면 전체적인 맥락은 커녕 문장에서조차 이해가 되지 않아 몇번씩 다시 읽어보다 책을 덮곤 했다. 가벼운 소설책이라도 읽을라 치면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책의 흐름을 놓쳐버리는 일들이 몇달간 반복됐다.
그런 와중에 예전에 어렵게 읽어냈던 책들을 돌이켜 보며 그땐 어떻게 이런 책들을 읽었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그 때도 겨우 어떻게 읽어내긴 했지만 과연 독서를 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되었다. 문장 하나하나를 겨우겨우 납득해가며 지지부진한 전선을 조금씩 전진시켜 나가듯이 힘들게 독서를 끝마쳤지만, 지금 남은 것은 그런 어려운 책들을 읽었보았다는 사실 뿐...
그런 와중에 마쓰오카 세이고의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라는 책의 리뷰를 보고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류의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그간 멀리해왔었는데, 그간 너무 오만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요즘 아이들에게 독서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제대로 된 독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이 우격다짐 책을 읽어왔었구나'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그렇다고 덜컥 돈 주고 사기에는 겁이 나서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는데 도서관에는 그 책이 없었다. 대신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의 리뷰에서 같이 보았던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가 눈에 보여서 그 책을 빼들고 읽어보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의 간단한 감상이다.
보통의 사람보다 책(을 포함한 여타의 모든 글들)을 읽는 속도가 유난히 느린 탓에 난 제대로 자리잡고 앉아서 몇 시간은 책 읽을 준비를 하지 않는 이상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선택할 만한 책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결국엔 자리 잡고 읽기 전에 책을 들춰보아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어렵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난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 이 책을 선택하지 않고 다시 책장에 꽂아놓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를 선택하지 않게 된 간단한 감상에 대한 글이다.
이 책은 상당히 얇고 가벼우며, 흥미있는 문장들(때론 단호하고, 때론 오만한)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나조차도 창틀에 걸터 앉아 가볍게 훑어볼 수 있었다. 나루케 마코토는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지식인이자 경영인으로 삼십대의 젊은 나이에 마이크로소프트사 일본 법인의 사장을 맡을 정도로 창의적이고 능력있는 인재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성공을 창조적인 독서의 덕으로 돌리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가 제안하는 독서법은 모든 경계를 허무는 초병렬적인 독서법이다. 하나의 책이라고 하는 '완결성'을 허물고, 책의 장르라고 하는 벽을 허물고, 분야를 허물고, 무엇보다도 독서를 하는 시간과 일상이라고 하는 시간적 경계, 그리고 독서를 하는 곳과 아닌 곳의 공간적 경계를 허문다. 어느 곳이든 책을 두고, 어느 때라도 책을 펼치며, 그것이 어느 책이든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지만 그걸 떠나서 그가 이미 선택한 책들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거칠게 말해서 정독도 필요없으며, 메모도 필요없다. 순간 순간 읽는 독서의 단편들은 모든 창조성과 창의력의 자양분이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쉽다. 그러한 독서법이 저자와 같이 창의적이면서도 상업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꽤 필요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진지하게 그의 독서법을 실천해볼 생각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독서법이 아니다.
일단 젊은 나이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저자의 독서법은 평범한 수준의 삶을 누리는, 혹은 그보다 고단한 삶을 누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실천하기 어렵다. 그가 책을 대하는 원칙으로 제시한, "빌려보지 않는다. 빌려주지 않는다. 버리지 않는다."라는 세 원칙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명이나 있을까? 저자 스스로 집에 책이 너무 많아 톤 단위로 헤아릴 정도라며 몇달에 한번씩 이미 읽었거나 필요없는 책을 4톤트럭으로 별장에 옮겨 보관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많은 책을 보관할 집이나 별장은 커녕 4톤 트럭을 하루 대여할 돈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읽고 싶은 책을 모두 사라고 권하는 것이 과연 올바로 된 독서가의 태도일까? 심지어 자신의 독서법을 추천한다며 한 권의 책을 쓰는 작가의 태도일까? 오직 자신만이 실천할 수 있는 독서법은 자신만 알고 있으면 된다.
나루케 마코토의 이러한 태도는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동네의 중소 서점보다 대형 서점을 추천하는 그의 태도에는 책을 사랑하는 독서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도서 유통구조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지는 못한다. 일본의 동네서점들이 우리나라처럼 촉수를 뻗쳐가는 대형서점과 인터넷 쇼핑몰의 공세로 인해 설 자리를 일어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런 불편함 없이 대형서점을 추천하는 저자의 태도는 서점을 지식과 문화가 공유 및 유통되는 상징적 공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쇼핑몰로 취급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저자는 오프라인에서 책을 구매할때 책장 하나를 통째로 드러내버릴 정도로 책을 한꺼번에 구매하는데 이 역시 보통 사람들은 전혀 실천할 수 없으며, 뿐만 아니라 전혀 그럴 필요도 없다. 집안 여기저기에 책을 뒹굴리기 위해 대형서점에 가서 수백만원을 쓰라는건가?
아무리 저자가 추천하는 초병렬 독서법이 효과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독서 방식(여기엔 책을 읽는 행위 뿐 아니라 책을 선택하고, 관리하고, 습득한 지식을 관리하는, 책과 지식을 대하는 총체적인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을 권하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기게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난 저자가 말하는 초병렬 독서의 효과와 그 가능성 자체가 의문시 된다. 일단 대다수의 사람들은 책을 가끔 사서 본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는다. 그런데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책을 모두 사서 보는 경우는 드물다. 시립도서관이나 학생들의 경우 학교 도서관을 이용해 대출하여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책을 여기저기 놓고 수시로 들춰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해진 시간 안에 집중해서 읽고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초병렬 독서가 꼭 책을 여기저기 널어놓고 틈나는 대로 읽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여러 권의 책을 병렬적으로 독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훑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건 어디까지나 책을 지적 자극의 도구로, 아이디어의 도구로 이용하는 방식으로서의 독서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 같은 경영인에게는 그런 자극들이 중요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책을 좀 더 진지하게 대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저자와 달리 억압적이고 소외된 일상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의 일터에서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일상 속에서는 점점 희미해져가는 존재로,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점점 무의미한 사람이 되어간다. 독서는 오히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돌이켜 보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망과 더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그러한 독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 책을 선택하지 않게 된 이유는 저자가 책을 고르는 기준에 관해서 설명한 부분을 읽었을 때다. 저자는 책이 폼내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폼이 난다는 것은 좋은 책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미국 엘리트의 예를 들며, 그들은 자기계발서를 읽었어도 남들이 그 사실을 아는 걸 부끄러워하며 숨긴다고 한다. 저자는 자기계발서에 애한 혐오를 책 곳곳에서 종종 드러낸다. 나도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으며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은 자기계발서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저자는 책을 고를 때 자신이 그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남들에게 보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고 한다. 그 때 만약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폼이 난다면 과감히 사라고 한다. 그게 좋은 책이란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난 이 책을 가지고 사서에게 가서 대출해달라고 말할 상상을 하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이 책에 대해 과도한 비방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나 스스로가 저자가 권하는 초병렬 독서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초병렬 독서법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 이 책을 잠시 훑어본 감상을 말하고 있을 뿐임을 뒤늦게 나마 분명히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