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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프리모 레비의 생애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증언의 불가능성, 다시 말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143쪽.


재일조선인인 그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이중적이다. 구식민주의 종주국 일본의 언어를 모어로 습득하고 원래 모어였어야 할 조선어를 박탈당한 채, 가해자의 언어로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사고의 가장 내밀한 면조차 그들의 언어로 수행해야 하는 그 부조리함,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그 “위화감”과의 싸움이 투쟁의 한 면이다.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투쟁의 또 다른 면이다. 그는 자신이 강렬하게 공감하였던 이탈리아의 문인 프리모 레비처럼 스스로에게 증언자라는 역할을 부여하고 끊임없이 발언토록 한다. 증언자의 비극성에 그 누구보다 깊게 공명하면서도 결코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진정성과 비장함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런 ‘귀 기울임’이 우리를 그의 말로 인도할 수 있을까? 과연 그의 증언은 가능할까?



이 책 <언어의 감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서경식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이 책의 주된 의도는 저자가 밝히듯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내셔널리즘 비판이라는 첫 번째 평론집 <난민과 국민 사이>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언어의 문제라는 고민이 내포되어 있다. 그가 짧은 한국 생활에서 느꼈던 “모어와 모국어의 강렬한 상극”의 경험은 ‘언어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으로 심화되고 있다.

식민주의, 내셔널리즘, 일본 리버럴 세력 비판, 언어의 문제 등등 서경식이 다루고 있는 쟁점들을 보면, 이 책은 다소간 학술적이고 다소간은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글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성격, 즉 증언으로서의 텍스트라는 성격을 간과한다면 도대체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라는 현대 사상의 가장 주류적인 흐름은 다소간 독자들을 텍스트의 권위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건 기존의 지식 교환체계에서 저자와 독자 간의 위계적 질서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새로운 ‘읽기’ 방식은 ‘창조적 책읽기’라는 이름으로 혹은 ‘생산적 오독’이라는 겸손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류가 동시에 무책임함에 대한 면죄부를 수여할 가능성도 열어 주었다. 증언을 대면하는 피증언자로서의 자세를 방기하는 면죄부말이다.


“살아 돌아온 증인의 증언을 가볍게 여기고 ‘불길한 경종’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우리들이지 않을까?―” -109쪽.


증언자에게 자신의 의무(살아돌아가 증언해야 한다는)가 있듯이 증언자를 대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만의 의무가 요구된다. 그것은 ‘귀 기울이는 것’이다. 여기서 ‘증언’이 다른 텍스트와 갖는 차별점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저자가 “살아 돌아온 증인”이라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 이래로 ‘저자의 죽음’이란 것이 하나의 주도적인 이념이 되었지만, 증언의 텍스트에서 증언자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이다. ‘증언해야만 한다’는 것과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핵심이다. 하나의 증언 앞에서 우리들은 저자를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해야만 하는 윤리적 책임을 발견한다.

피증언자의 윤리적 책임이란 일종의 ‘타자에 대한 윤리’이기도 하다. 증언자는 타자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 너머에 있는 현실을 경험하도록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 장 아메리 같은 아우슈비츠 경험자들은 그 끔찍함과 잔혹함이 도저히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하였다. 서경식의 경우에는 내셔널리즘이란 필터에 걸러져 은폐되어 있는 식민주의와 난민의 삶을 경험하였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혹은 미처) 상상하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 속에서 실제로 살아 돌아온(혹은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증언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타자를 대면하는 것이다.

<장송>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책을 읽는 방법>이란 책에서 창조적인 오독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도 그 위험성을 경계한다. 오독은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책읽기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정작 독자 자신에게는 틀에 박힌 책읽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미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독선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자신의 입맛에 의해서,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에 근거해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독서는 타자와의 만남임을 재차 강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증언자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오독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와 대면하고, 증언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 증언이 요구하는 것에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피증언자의 태도는 저자인 서경식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첫 번째 글 <모어라는 폭력-윤동주를 생각한다>에서 윤동주의 서시 한 구절의 번역을 두고 벌어진 오역 논쟁에 개입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시구를 역자 이부키 고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오무라 마스오의 지적에 이부키 고는 “이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은 군국주의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고 반박한다.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시 속에서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을 읽은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가 어떤 시인인가. 식민지 조국의 현실 속에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자신의 모어인 조선어로 시를 쓰고, 그 때문에 끝내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살해당한 시인이다. 윤동주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포착하고, 그 현실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학대했다. 그의 시는 해방 후 조선 청년들의 정체성 형성의 한 축이 되었다. 윤동주의 시는 그 자체로 시대의 증언이다. 식민지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았던 당시 모든 민중들의 공통의 증언이다. 이런 윤동주의 ‘서시’를 타자인 일본인들이 읽을 때에는 타자에 대한 윤리, 증언을 듣는 피증언자의 책임이 요구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혹은 그들은) 의도적인 오독을 통해 식민지배의 죗값을 면책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만을 노출시켰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의 시 구절로 표현하려 했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에 대해 오직 하나뿐인 진실을 확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 구절을 두고 작동되는 무의식의 권력관계를 인식해보자는 것이다.” -30쪽.


다수자의 자기 중심적인 오독이 아니라 증언자(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마치 타자의 마음 속에 하나의 확정된 의미가 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침묵하는 타자를 제치고 타자의 마음 속에 확정되어 있는 하나의 의미를 찾겠다고 설치는 것이야말로 바로 서경식이 말한 가부장적 온정주의이며 다수자의 폭력일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증언자의 증언을 ‘의미 있는 것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다. 현실에 은폐된 채 작동하는 무의식의 권력 관계를 탈은폐 시키는 것 역시 그런 것이다.


“그(프리모 레비)의 메시지는 사실 그 자체를 알리기보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 고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46쪽.


다수자로서 주어진 피증언자의 윤리적 책임, 증언에 귀 기울이는 것, 증인을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 증언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이것은 바로 방관자가 되지 말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 책을 하나의 증언으로 읽는다면, 저자의 글들은 매번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 요구들이 독자를 당황스럽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독자들이 그런 요구 자체에 닿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오만하게 말하는 나보다 훨씬 더)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에 접근하고 거기서 의미를 고찰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또한 적지 않은 경우 저자가 명시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반응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 일본어로 써서 일본 독자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글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속에 실린 글들은 일차적으로는(저자는 분명 한국의 독자들도 염두에 뒀던 것 같다) 일본의 독자를 대상으로 쓰였다. 이런 점이 이해를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가 책 속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이미 일본이라는 국경을 벗어나 조선과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맥락 속에 위치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지점은 우리 독자들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우리 역시 다수자라는 것, 우리 역시 내셔널리스트라는 것이다. 서경식이 제시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 뿌리깊게 고찰하기보다는 이해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1. 모어와 모국어의 상극


서경식은 여기서 모어와 모국어가 다르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자신의 아포리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이것을 서경식 개인의 비극, 혹은 재일조선인 집단의 비극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경식 개인에게 비극일 수 있으며, 재일조선인 집단의 비극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 경험을 대인적인 차원에 가두어두지 않고 ‘계속되는 식민주의’나 ‘언어 내셔널리즘에’에 대한 좀더 깊은 비판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언어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지 않은 채, 즉 언어 내셔널리즘에 안주한 채, 서경식과 다른 재일조선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다수자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 폭력이란 재일조선인의 경험을 특수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서경식의 말대로 자신은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대다수 재일조선인의 가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그를 언어의 수인으로 만드는가? 모어와 모국어가 다르다는 현실? 구식민지 종주국에 산다는 현실? 그를 수인으로 만드는 것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이며,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내셔널리즘이다. 한국인이지만 태어날 때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에서 산다고하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역시 언어의 수인이자 동시에 교도관이다. 모어-모국어-국민의 일치라는 국민화 과정에 성공하여 국민국가에 성공적으로 편입했을 뿐, 그래서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뿐 우리 역시 국경이란 테두리에 갇혀 있다. 동시에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언어를 기준으로 끊임없이 타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므로써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이 국민국가에 혼란을 주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관리한다. 즉, 언어의 감옥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현실이며, 보편적인 문제이다.



주의해야 할 또 다른 점은, 모어-모국어의 분리라는 아포리아를 본질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무슨 언어를 쓰느냐가 그 사람의 사고와 문화,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자발적으로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하게 됨으로써 비자발적으로 일본의 문화와 일본식 사고를 이식당한 꼴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해 보이는 이런 주장은 사실 재일조선인을 제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모욕에 가까운 말이 될 수 있다. 모국어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로도 수십년간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온 역사를 부정해버린 것 아닌가.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한 좋든 싫은 이미 일본인의 사고와 문화를 공유해버리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이 단지 모어-비모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자신이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때 느끼게 되는 그 “위화감”은 자신이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한 사실 자체가 바로 식민주의 폭력의 결과이며, 그 자체가 계속되는 식민주의의 증거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아닌 말을 모어로 습득한 모든 한국인들, 다른 해외 동포들이 모두 이런 “위화감”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인 맥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포리아가 발생하는 것이다.

특수화와 본질주의는 모두 모어-모국어의 불일치 그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다. 이럴 경우 해결책은 결국 동화 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국에 동화되어 한국어 공동체에 성공적으로 편입되거나 혹은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이 말하는 ‘언어의 감옥’이라는 현실은 바로 이런 경험의 특수화와 본질주의적 접근, 양 편향을 경계하며 접근할 때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보편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서경식은 해결책의 한 예로서, 유토피아일 뿐이라고 선을 긋긴 하지만 다언어․다문화 공동체를 제안한다. 언어 내셔널리즘이 붕괴된 세계,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2. 유토피아의 문제


이 점에서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토피아의 문제,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이다. 서경식의 비판과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뼛속 깊이 공감한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 독자라도 서경식의 제안 내지는 대안(다언어․다문화 공동체, 통일 상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 이유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 유토피아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현실적인 이유를 든다. 여기서 그들이 든 이유를 조목조목 비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적은 타당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지적이 잘못됐다고 비판할 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의 지적은 현실적으로 옳을 수도 있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잣대 그 자체이다.

재일조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곤란과 모순의 경험들에 대해서는 공감하던 사람들이, 일본의 기회주의적인 리버럴 지식인들의 퇴락에 대해서는 공분하던 사람들이,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에 대해 슬퍼하던 사람들이, 왜 국어 공동체 한국을 해체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왜 갑자기 현실주의자가 되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할까?

우리는 ‘실현불가능성’, ‘유토피아적’이라는 말의 허구성에 주목해야 한다. 단일민족 국가를 구성하겠다는 기획 역시 실현불가능하고 유토피아적이다. 수천 년 동안 이미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융합되며 형성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 민족은 다양한 지역으로 이산되고 다양한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왔으며, 수십년간 전국 곳곳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융합되며 한국의 문화정체성을 형성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를 지향해 왔다. 그 과정에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차별과 배제, 강압적인 국민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단일민족 국가 지향의 허구성은 외면하면서 서경식이 주장하는 다언어․다문화 공동체 지향의 새로운 국가상에 대해서는 현실성의 잣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단일민족국가 지향이든 다언어․다문화 공동체 지향이든 그것은 어떻게 보면 추구해야 할 이념상이다. 그 안에서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고 윤리이며 정치이다.


이런 이중 잣대 밑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대로만 이해하겠다”라는 다수자의 자기중심성이 있을 수 있다. 일본의 퇴락한 리버럴 지식인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선 지식인들의 주장을 선별해 들었듯이, 그렇게 박유하를 자기 멋대로 상찬했듯이, 우리들에게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서경식의 글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모국어의 권리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주목하면서 모어의 권리에 대해서는 왜 별다른 언급이 없을까?

모어와 모국어가 불일치하는 고통에는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모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고통에는 주목하지 않을까?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에는 동의하면서 왜 서경식의 유토피아에는 동의할 수 없는가?

여기에는 모두 이중적인 잣대가 작용하고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 자체를 비난할 수도 없고, 그런 현실을 인정하기도 해야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살아돌아온 증인의 증언에 귀 기울이는 태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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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5-21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이렇게 글들을 읽어보고 있는데.. 제 서평이 마음에 안드셨나봅니다;;ㅎ 음... 몇 몇 부분에 대해선 동감을 하기도 하고, 제가 잘못한 부분도 있구나, 하고 여깁니다만 아무래도 조금은 제가 직접 답을 해야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글 자체에 대해서 여기서 제가 비판할 만큼의 학식을 갖추고 있지도 못하고, 또한 그러면 말꼬리잡기에 지나지 않게 되버릴 위험이 있어서 그저 제 서평을 변호하자면, 먼저 모어와 모국어의 상극 부분에 대해서는, 음.. 일본어를 모어로 체득하게 되면서 그 문화적 경험을 이식받는다는 제 주장을 그대로 고수할 수 밖에 없네요. 모어를 체득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형식으로서의 언어를 체득한다는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이는 말씀하신 '위화감'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재단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는 몇 몇 언어학자들의 저서를 참조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토피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 글 쓰신 것을 읽어보니깐 정말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대로만 이해한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래도 저의 입장을 말씀드려보자면 저는 처음부터 현실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네요. 또한 단일민족만의 국가를 이루겠다고 서평에 쓴 적도 없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쓰지는 않으셨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지금 현재 상황이 단일민족의 국가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서평에 쓴 말이고, 이는 앞으로도 단일민족 국가가 되어야 돼, 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의 입장을 공감하고 슬퍼하는데 굳이 비현실주의적일 필요는 없지요. 그래서 제가 서평에 쓴 것은 그의 소수자적인 시각을 존중하지만 다수로서 다수가 볼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에.. 아무래도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남기지 않으면 제가 어떤 입장에서 책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기본적 토대마저도 서로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긴 댓글 남깁니다. 이렇게 댓글 남기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다음엔 좀 더 짧은 댓글을 남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ㅎ

어떻게 2011-06-07 03:37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리뷰를 인상적으로 읽긴 했지만, 제가 이 글을 쓸 때 특별히 가연님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가연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우연찮게도 제가 가연님을 비판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리뷰를 기한 안에 못써서 급한 마음에 거칠게 썼고, 완성된 것도 아니랍니다. 시간이 나면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여지껏 못하고 있었어요. 특히 위에서 언급한 언어와 정체성의 문제랑 유토피아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일단 가연님의 지적에 대해 저 역시 변호를 하자면, 일단 언어와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연님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언어학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언어와 사고, 정체성의 긴밀한 관계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고, 가연님이 리뷰에서 언급하신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그런 주장에 더 힘을 실어 주고 있는 듯 하네요. 이것을 제가 사실의 문제로서 과학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과학적인 사실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문제시 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팩트가 현실에서 효력을 발생시킬 때에는 특정한 문화적, 정치적 구조와 결합된 중층적인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일한 언어학적 발견이 언어 내셔널리즘을 강화할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을 경계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사고가 제약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결정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본질주의적 접근은 오히려 동일한 언어 공동체 내의 다양한 차이들을 은폐하거나 제거할 위험이 있습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추상화된 집합적 한국인과 일본어를 사용하는 추상화된 집합적 일본인 사이의 사고방식의 차이와, 동일한 한국어 사용자이지만 재벌 총수인 중년 남성과 비정규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는 빈곤층 여성 사이의 차이 중 어떤 차이가 더 클까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연히 선택된 두 한국인 사이의 차이가 추상화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이보다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흔히 "개체 차이가 집체 차이보다 크다"는 것이죠.
그런데 집체 차이로 한정해서보더라도 어떤 집체, 즉 어떤 집단 정체성이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느냐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그어진 차이는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근대 사회는 국가, 민족, 성별 등을 중심으로 동일성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런 동일성의 정치는 차이를 통해 차이를 소멸시키는 정치인데, 그렇게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동일성 기제는 다른 기제에 비해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어가 같으니까(혹은 다르니까), 민족이 같으니까(혹은 다르니까), 성별이 같으니까(혹은 다르니까) 동일해야 한다고(혹은 달라야 한다고) 말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로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어떤 차이를 드러내고 어떤 차이를 은폐할 것이냐 하는 것은 권력에 의해 선택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가령 남녀간 차이에 대한 많은 과학적 증거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발견되지만(물론 그 반대 증거도 발견되고 있지만요) 그것이 과학을 넘어서서 현실에 작용할 때에는 성별 이분법적 구조를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지요. 그 과정에서 남성 간의 차이, 여성 간의 차이,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에 포함되지 않은 다양한 차이들이 제거되거나 억압됩니다. 생물학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하면서도 일본인과 다른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언어로 포괄되지 못하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가연님이 언급하신 최근의 발견이나 저보고 참고하시라고 권해주신 그런 언어학 책들이 (아직 안 읽어보았지만)분명 과학적 진실을 담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과학적 진실을 넘어서서 그것이 현실에서 서경식이 비판한 언어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주장의 문제에 가깝고, 가연님이 말씀하신대로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해를 푸시라고 몇가지 변명을 해보자면, 첫째로 아까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가연님의 글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말씀드려요. "단일민족만의 국가를 이루겠다고 서평에 쓴 적도 없"다고 하셨는데,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분들도 그렇게 쓰지는 않으셨으리라고" 본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다른 분들이 그런 주장을 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룬 것은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에 관해서였습니다. 발리바르나 월러스틴 등에 따르면 국민국가라는 것 역시 허구적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매우 제한되어 있는 국가형태라는 것입니다. 국민국가는 근대의 일반적인 국가형태라기보다는 특정한 시기에 중심부와 몇몇 반주변부 국가들에게 국한된 특수한 국가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국가형태는 주변부 국가들에 대한 착취와 배제, 내부적인 배제와 포섭 등을 통해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 전략이 바로 내셔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점에 대해 제가 말하고자 한 것 중 하나는 "실현 불가능성"이란 잣대 자체가 매우 이데올로기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일민족국가를 현실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빈약합니다. 우리나라를 단일민족국가로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은 같은 민족이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믿으라'라는 이데올로기이죠. 그 과정에서 국외의 조선인, 국내의 이주민 등에 대한 많은 차별과 배제 억압 은폐 등이 수행됐고, 이 지점에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의 입장을 공감하고 슬퍼하는데 굳이 비현실주의적일 필요는 없지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제 글을 다시 읽어봐도 오해받을 만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가연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현실주의적이어선 안된다고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로 제 변명을 해보자면, 서경식은 모국어의 권리만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모어에 대한 권리 역시도 위협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경식은 자신의 책에서 모어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어로 말했다고 썼습니다. 그 장면이 재일조선인이 처한 위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미 일본어를 모어로 체득한 재일조선인이 디아스포라의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어를 비모어로 사용하는 한국인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방법이죠.

정리하자면, 저는 가연님의 주장에 반대한다기보다는 가연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서평 제목에서 보이다시피 제 글은 일단 읽는 자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작성됐습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누구나 동의할 수 있게 포괄적으로 아우르지 못하고, 다소 편협해진 것 같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너무 거치네요. 가연님 지적 덕분에 제 글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네요.

그런데, 헉, 너무 기네요. 저도 댓글 다는게 처음이라서.
 
남성성과 젠더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선물, 그것도 책 선물이니 크게 기뻐할 법도 한데 <남성성과 젠더>라는 제목의 다소 딱딱해 보이는 이 책을 받아든 내 표정은 그리 기쁘지 않았었나 보다. 실망한 기색으로 맘에 안 드냐고? 예전엔 이런 거에 관심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는 친구의 말에 당황하여 크게 기쁜 척을 했다.  

  그 친구가 말한 '이런 거'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책은 어떤 책이기에 ‘이런 거’에 포함될까? 이 책은 남성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니 ‘남성학’일까? 하지만 다루는 대상에 따라 그 분야가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말하면 분과학문과 장르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겠지만, 지금 그럴 이유는 없다. 사실 이 책을 포함하여 이번에 소개된 하이브리드 총서의 슬로건 자체가 “경계 간 글쓰기, 분과 간 학문하기”아닌가? 이 책은 따라서 어떤 영역이나 분과 안에 귀속되지 않고, 그 경계들 사이에 위치하며 그 영토들을 넘나들고자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특정한 무언가에 대해 다루며,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다루기에, 내 친구로부터 ‘이런 거’로 분류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거’는 페미니즘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젠더 질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해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목소리이다. 나는 아카데믹한 느낌을 풍기는 여성학이란 말보다는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페미니즘이란 말을 선호한다(여성학과 페미니즘이 상호 대체가능한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게 부를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경제학자가 쓴 경제학 책이더라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썼다면 마르크스주의 책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은가?). 일상적으로는 페미니즘이 여성(권익 혹은 억압)에 대한 것만으로 축소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 친구는 지극히 평범한 남성인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기뻐할 내 모습을 상상하며 이 책을 선물해 준 것 같다. 물론 이 책을 받고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약간 당황했을 뿐이다. 긍정적인 시선으로든 부정적인 시선으로든, 페미니즘을 통해(여기엔 피상적이라는 수식이 붙어야겠지만) ‘남성성’에 대한 담론을 경험한 평범한 남자들에게 ‘남성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친구는 몰랐을 수 있다.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그런 부분과 관계를 맺었던 경험은 일반적인 경우에 비춰 봤을 때 특수한 경험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남성성’의 문제와 관련될 때는 묘하게도 대다수 남성들의 일반적인 경험과 구조적 유사성을 갖게 된다. 그 유사성이란 ‘남성성-부정적’의 도식화다. “남성성은 부정적이다”란 자기부정이거나,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라는 타자혐오이다. 사실 이것은 페미니즘이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와 별개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이 무엇을 말하든 이런 식의 결론으로 흘러가게끔 하는 경향성이 조건 지어져 있다. 그리고 그런 경향성이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 <남성성과 젠더>를 통해, 그런 경향성의 조건을 고찰하고, 남성 독자로서 남성성에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책을 ‘통한다’는 것은 이 책의 내용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이 책을 읽음으로써 등등 안과 밖, 원인과 결과가 없는 접근이다. 이 책 역시 기존의 통념을 여전히 재생산할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해체할 수도 있다. 즉, 기존의 오해 내지는 통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책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는 것 없이는 불가능하다.  

 

남성성=폭력?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대략 2000년대), 나는 특정한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이란 걸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접할 수 있었다. 그 분위기란 당시 대학 안에서 페미니즘이 지닌 독특한 위상에 기인한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당시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진보의 표상 내지는 최전선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대학 안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수용이 자신들의 진보적 성향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기능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페미니즘이 다소 권력화된 형태로(얼마간은 왜곡된 형태로) 작동했다는 걸 의미한다. 페미니즘 운동의 실질적인 지향점과는 별개로 그것은 대학이란 공간 안에서 한 조직, 한 개인에 대해 그 진보성은 물론 그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법관 역할을 수행했다. 한 조직의 입장이 어떤 것이든 충분히 페미니즘적이지 못하면 비판을 받았고, 한 개인의 주장이 어떤 것이든 충분히 남성적이라면 비판을 받았다.  

  학내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운동을 오랜 기간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학생들은 그들이 여성노동자를 “어머니”라고 부른단 이유로(즉,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충분히 페미니즘적이지 못하다고 비판을 받아야 했다. 반대로 여성주의 단체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적절한지, 부적절한지, 예산 낭비가 심하지는 않은지, 혹은 그것이 과연 페미니즘적인지 등에 대해 공적인 자리에서 충분히 논의될 수 없었다. 거기에 태클을 거는 것은 왠지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이 제한된 영역 안에서나마 권력으로 기능했던 것은, 역으로 그것이 권력에 대한 가장 단호하고 섬세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말(18쪽)처럼 우리에게 페미니즘은 일종의 새로운 인식론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보이지도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정치적이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기호와 메시지들로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금강 중류에 불규칙하게 흩어져있는 조약돌들처럼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신체와 습관과 언어와 관념의 배치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조직된 것이며, 권력을 재생산하고, 타자에 대한 억압을 수행하며, 폭력을 은폐하는지, 페미니즘에는 그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 듯 했고, 페미니스트는 이 모든 진실의 담지자와 같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권력’이란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권력’, 즉 지식-권력이 된 것이다.(당연히도 푸코의 말처럼 페미니즘의 ‘권력 효과‘를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은 말 그대로 ‘기본’이 되었고, 누구나 한번쯤은 ‘배워야’ 하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남성이 페미니즘 담론을 수용하는 과정은 특수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이 ‘새로운’ 인식론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과연 무엇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가?  

  여기 명문대에 갓 입학한, 어리디어린 엘리트 남성과 엘리트 여성이 있다. 그 둘은 모두 기존의 젠더 규범에 잘 적응해왔고 그로 인해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페미니즘이란 새로운 인식틀이 생겼다. 엘리트 여성들에게 그것이, 그동안 미분화된 채 느끼긴 했으나 인식할 수 없었던 어떤 감정, 현상, 모순에 대해 비로소 인식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남성들은 반대로 자신들이 무심코 했던 행동들, 당연하게 여겨왔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참해왔던 문화적 규칙들이 실제로는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 외의 타자들에 대한 폭력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혹은 자백)했을 때 은연중 ‘남성성-폭력’이란 도식이 자리 잡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함께 남성성 역시 거부되고 극복되어야 하는 무엇으로 남는다. 남성들에게 이는 일정 정도 자신을 ‘가해자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성이 자신 안에 내재된 어떤 성질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에서 “이들의 ‘여장’은 당시 라이베리아 내전의 전시 집단 성폭력mass rape과 같은 남성성 수행과 전혀 모순을 일으키지 않았다.”(28쪽, 정희진)라는 문장이 쓰이고 읽혔을 때(왜 이렇게 쓰이고 읽혔는지는 아래에서 논하기로 하고), “집단 성폭력”은 단지 폭력이나 범죄가 아니라 “남성성 수행”이다. 그리고 남성성은 자신 역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건 “라이베리아 반군이 저지른 일이지 나랑은 관계없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남성들은 자신이 얼마나 남성적이지 않은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앞서 말했듯 당시 특정한 분위기에서는, 이 사람의 말투는 어떤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술버릇은 어떤지, 어떤 어휘를 사용하며, 어떤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는지 등으로 한 개인의 모든 것들이 판단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던 사람들은 종종 “넌 너무 남성적이야.”라는 말 대신에 “넌 너무 폭력적이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종종이 아니라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성적’이란 말과 ‘폭력적’이란 말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폭력’이란 어휘를 채택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반대로 폭력적인 무엇에 대해 완곡하게 말하고자 할 때는 ‘남성적’이란 어휘가 사용되었다.   

 

나는 좋은 남성이 될 수 있을까?

  이렇듯 남성성이 폭력, 혹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동참하고자 하는 남성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남성’으로 인식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남성성’을 전시해야만 했다. 그것은 ‘다른 남성들과 난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남성들이 ‘나쁜 남성’인 것과 달리 나는 ‘좋은 남성’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며, 일종의 자기 PR이다.(이는 ‘폭력’이란 개념에 바탕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규범적 남성성이 사회적으로 선택되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다른 남성들’은 기존의 가치체계에 종속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미숙한 남성’인 것에 반해 자신은 그렇지 않은 ‘성숙한 남성’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하에서 내게, 페미니즘을 수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좋은 남성’이 되는 기획이었다.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어휘를 거르고, 말투를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대화주제를 검열하는 것 등을 통해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불행히도,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다는 적극성보다는 비판 받지 않아야 한다는 수동성이었지만,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질서, 그리고 그것의 신체화된 형태인 남성성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자신은 폭력적이지 않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환상에 가려져 있었다.  

  자신의 비-남성성을 전시하기 위해 어휘를 거르고, 말투를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대화주제를 검열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사실상)강요받았다는 것이 그 자체로 문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이것은 타인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기본적인 노력이다.(‘배려’란 것도 사실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몇몇 남성들은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려왔던 것이며, 또 다른 몇몇 남성들은 더 남성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해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이런 노력들은 결코 특별한 것도,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며, 불합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이런 노력을 통해 자신이 정말로 규범적 남성성을 제어하고 있으며, 보통의 다른 남성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믿음을 쉽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페미니즘과는 관계없이 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다른 남성들과는 다르며 그런 일반적인 남성들(마초적 속물성에 물든)과의 관계를 불편해 한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우월성(성 평등을 추구하는 자신의 속성, 폭력/부정적인 것과 대비되는 ‘좋은’ 남성)을 강화시키는 논거로 삼는다.  

  그러나 사실 이는 여러 남성 집단들, 남성성‘들’ 사이의 차이일 뿐이다.(114쪽, 119쪽, 나영정) 음담패설을 하는 남자 무리들 사이에서 불편함을 느낀다거나, 거친 욕설, 강한 스킨십이 친밀감의 표시가 되고, 동물적 힘으로 남성 간 우열을 가리는 기호 체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통념적인 미적 기준에 사로잡혀 쭉쭉빵빵한 연예인들에 눈길이 간다거나,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여성들을 여전히 포르노그라피적인 시선으로 본다거나, 전혀 다른 어휘와 어투를 이용해 (자신과 타인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여전히 음담패설을 하는 자신, 그리고 전혀 다른 기호들을 이용해 남성 간에 배타적인 친밀감을 강화하거나 때로는 남성 사이에 우위를 판가름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배적 남성성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종류의 지배적 남성성에 속해 있을 뿐이다. 즉, 좀 더 점잖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나 역시 나의 비-남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해왔으며, 더 나아가 남성성을 노골적으로 목격했을 때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적인 행위 전략일 뿐이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내가 ‘새로운’ 남성이 되었다거나, 규범적 남성성을 제거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규범적인 남성성에 지배되고 있으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어렵다는(혹은 거부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된다. 왜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젠더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까. 

“따뜻하고 친절한 전문가 남성 이미지로 대체하자거나 21세기형 새로운 남성이 되자는 슬로건…… 등 소위 새로운 남성 유의 등장은 …… 일견 ‘진보’한 것인 양 굴지만, 실상은 젠더 위계와 이원화된 젠더 구분이 희미해지거나 흩어지는 것에 대한 강박적 불안이 만들어낸 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0쪽, 서론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자신의 시도가 여전히 기존의 젠더 질서에 갇혀 있으며, 남성성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질 때, 결국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노력은 실패한다. 이 실패가 거듭될수록 그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 자체를 포기하거나. 만약 그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정확히 인정할 수 없다면),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이 질문은 제대로 된 질문인가? 이 질문은 뭔가와 유사하다.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대표적 논리 중 하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이 두 질문은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 상당히 유사하다. 후자의 질문이 현재 시점이라면, 전자의 질문은 미래 시점이다. 문법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가 “내가 폭력적인 남성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내가 폭력적이지 않은 남성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 두 질문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토대 위에 있다. 하나는 페미니즘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고 있다는 믿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어떤 특정한 행동 내지는 태도를(하거나 혹은 안하거나를) 통해서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두 가지 믿음이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물론 이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보다 앞서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인터넷에 올린 한 남성의 서평에서 한 부분을 인용해본다.  

"책을 읽어보니 확실히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은 알겠다. …… 좋다. 다 좋다. 그런데 ‘어쩌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zizi0908), <내게 남은 남성성을 뿌리 뽑아주오> 中 

  이와 같은 불평(?)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할 때 처하게 되는 난점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는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 또 하나는 ‘어쩌란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  

 

무엇이 남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나 - 남성의 언어로 쓰인 페미니즘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페미니즘 담론에 거부감(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것이 남성을 부당하게 착취자나 범죄자 취급을 하거나 남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이다.(이것은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적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페미니즘의 한계이자 과제이기도 한데, 바로 이 책에서도 그런 식의 진술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러한 대립항들은 …… 남성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남성의 입장에서 자신 외의 것들을 배타적으로 구성한 ‘이데올로기’다.” -21쪽, 정희진

  이와 같은 문장들에서는 마치 남성이 세상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권력자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 문장을 읽는 남성들은 (자신이 남성이라고 확신하기에)문장 안의 “남성”이란 표현이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런 문장을 읽을 때 나 또한 매번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정희진이 저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남성”이란 말은 당연히 ‘나’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남성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남성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그런 의미로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남성 권력은 현실을 진단하고 정의 내리며 경계를 만드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남성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25쪽, 정희진

  바로 몇 페이지 뒤의 설명을 진지하게 읽었다면, 다시 앞 페이지로 소급하여 그것이 일부 남성을 비판하는 것도, 혹은 남성 일반을 비판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이런 식으로 ‘남성’이란 개념이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현실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힘, 제도, 규범을 구체화시킨 것이지 남성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말해진 것이 아니다. 이 서평의 소제목 “남성의 언어로 쓰인 페미니즘”의 “남성”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걸 알고 있음에도 읽을 때마다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표현의 문제는 페미니즘이 극복하고 발전시켜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불편함의 핵심은 우리가 속해 있는 언어 체계가 남성/여성의 이분법이라는 젠더 규범적 구조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범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발언조차 그것이 기존 사회의 언어 체계 안에서 수행될 때에는 오히려 그 반대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무언가를 해체하기 위해, 바로 그 해체되어야 할 대상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 책을 제대로 독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남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나 - 유물론으로서의 페미니즘

  이런 한계 안에서는 외과 의학, 생물학, 해부학, 심리학이 과학의 이름으로 젠더 규범을 강화해온 것과 마찬가지로(74쪽, 루인) 여성학 역시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여성은 어떻고, 남성은 어떻고라는 식으로 젠더 이분법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근대적 주체의 위치는 차이화된 존재로 남았던 여성이 아니라 차이를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남성들에게 한정되었다.” -55쪽, 권김현영  

“남자가 외양을 더 꾸미지 않았다고 해서 여자로 오해받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여성은 외양적으로 꾸미지 않을 경우 남자로 오해받기 쉽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성은 남성성을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제거해야 여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남성은 남성성의 충만으로 증명되며, 굳이 빈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여성성을 덧붙임으로 활용하면 꽃미남, 패셔니스타 등의 칭호를 얻을 수도 있다. 또 없어도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 호걸, 마초 등의 늠름함을 획득할 수 있다.” -136쪽, 한채윤  

  이런 진술도 마찬가지로 소외되고 억압된 여성과 특권을 지닌 남성이란 이분법적 구도로 이미지화될 수 있다. 이 역시 언어적 한계로 그 진의가 충분히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한가? 언어적 한계로 인해서 그 의미가 우리에게 잘못 전달되고 있는가? 언어적 한계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저 말은 분명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왜 이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남성성/여성성을 대비시키며, 여성을 부당하게 소외된 이들로, 남성을 부당하게 특권을 지닌 이들로 판단할까? 이런 질문은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과 혐오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많은 페미니즘 담론들은 남성을, 그리고 남성성을 권력, 폭력, 특권과 관련시키고 있다. 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과거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인간의 노동을 수치화된 노동력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을 수량화된 노동력으로 도구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이론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라고. 우리는 이런 마르크스의 대꾸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남성을 부당한 특권계급으로, 폭력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바로 남성 중심 사회이다. 사람들을 여성/남성의 이분법적인 젠더 질서에 강제로 편입시키고, 그런 젠더 질서에서 그 사람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권리를 불균등하게 배분하는 것, 그리고 이런 현실을 은폐하고 재생산하는 구체적 기관으로 우리의 몸을 부당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사회 구조이다.   

  페미니즘은 그런 은폐된 현실을 언어를 통해 불완전하게 드러내며, 더 나아가 그런 지배 구조에 균열을 내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의식과 이데올로기와 개념과 언어를 문제 삼고 있지만, 그 시작과 끝은 언제나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적인 것들이다. 그런 한에서 페미니즘은 유물론적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유물론이 될 것인지는 각각의 페미니즘적 실천이 수행하는 역할이 결정할 것이다.(가령 이 책에서 정희진은 메타 젠더적인 접근을 통해 자신의 글이 수행할 역할을 설정한다. “메타 젠더는 남녀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기존에 구축된 젠더화된 담론 체계를 상대화하고 그 장 밖의 사고를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18쪽, 정희진)   

 

페미니즘은 처세술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통해서 좋은 남성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남성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 역시 폐기돼야 하는 전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좋은 남성이 되게 하는 일련의 행위 준칙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행위 준칙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준칙의 목록표를 작성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역할이 아닐뿐더러 바로 페미니즘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어떤 입장을 취하든 종종 “남성성을 혹은 남성을 그렇게 비판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말해봐라.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페미니즘을 일종의 처세술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포지티브하게 말하면 ‘좋은 남성’이 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고, 네거티브하게 말하면 비판받지 않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이 책이 남성성 혹은 어떤 남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판받아야 하는 남성성의 목록을 작성한 것도 아니며, 비판받을 만한 남성들의 유형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남성의 입장에서는 ‘날 욕하는 건 아니니까’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모든 비판적 담론이 그렇듯이 페미니즘 역시 기존의 진리관과 가치 체계를 근본적으로 공격한다. 진리관과 가치 체계라는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이상, 즉 그 진리관과 가치 체계라는 것이 각 개인의 신체에 체화된 형태로 존재하는 한, 그 사회적 질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 비판에 동의하든 안하든 말이다.   

  하지만 난 그 불편함이 시급히 해소되어야 할 불편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존 사회 질서의 모순이 해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신체에 통증을 느낀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통증이 일시적인 충격에 의한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만약 중병이 난 것이라면? 지금 당장의 불쾌함을 해소할 수 있도록(욕 안 먹도록)하는 행동 준칙을 요구하는 것, 여성학이 처세술화되었을 때 비로소 실용적이며 효용이 있는 것이지 그런 걸 못한다면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암 환자에게 진통제만 처방해주는 것과 같다.   

  좋은 남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혹은 비판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어휘를 거르고, 말투를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대화주제를 검열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할 뿐 아니라 중요한 일이다. 다만 그것은 이 책과는 관계가 없다.    

 

이론이자 실천으로서의 남성성 연구 

  이 책이 어떤 점에서 우리 같은 평범한 남성에게 의미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페미니즘이 이론이자 실천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과 관련지어 생각해봐야 한다. 이 점은 앞서 인용했던 한 블로거가 자신의 서평에서 언급한 내용과 일치한다. “책을 읽어보니 확실히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은 알겠다. …… 좋다. 다 좋다. 그런데 ‘어쩌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과 ‘어쩌란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일단 이 책은 ‘남성성’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남성의 언어로 쓰였다는 한계, 현실과 개념의 관계를 도치시키는 관념론적 경향, 그리고 즉각적인 실용성(불쾌감의 해소)을 요구하는 태도를 치우면, 이 책이 시도하는 남성성 연구의 본모습이 나타난다.   

“젠더 연구로서의 남성 연구는 보편으로서의 남성의 특권적 지위에 대해 다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왜 어떻게 보편자의 자리를 배정받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협상과 수용, 혹은 일탈과 저항을 누가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57쪽, 권김현영     

  권김현영은 남성성을 연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읽는 것에서 “보편적이고도 고유한 실재가 되려는 남성성의 욕망만을 비판하게 되고, 보편화의 욕망과 남성적 보편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함정”에 빠져버려 “폭력, 전쟁, 권력과 같은 모든 지배체제의 구성 요소들을 곧 남성성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56~57쪽) 되는 것을 경고한다.    

  이 책은 남성성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남성성을 문제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 자체를 문제 삼겠다는 것이며 남성성을 “해체”한다는 것이다. 남성성을 해체한다는 것은 남성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성성은 ‘없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남성이 남성성과 연결되는 것은 당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17쪽, 정희진  

  ‘남성=남성성’으로 이해된 당위를 해체하는 것은 남성성을 ‘역사화’하고 ‘다양화’하는 한편, 그 근거를 ‘불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이 책의 전략은 “분과 간, 경계 간”이라는 총서의 모토만큼이나, 남성성이라는 영토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특수하고, 비정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그런 시간과 공간(역사와 신체)에 주목함으로써 남성성의 핵심에 질문을 던진다.   

  정희진이 서구의 지배적 남성성의 역사를 추적하고, 권김현영이 식민지 근대 전환기와 식민지 시대의 남성성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며, 루인이 외과 의학이 내과 의학을 대신해 지배적 의학이 되는 과정을 남성성을 통해 설명할 때, 남성성이란 게 사회적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손상되거나 변형되기 쉬운 것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나영정이 쓴 성전환 남성에 관한 글과 한채윤이 쓴 레즈비언 부치에 관한 글 역시 주목할 만한데, 남성성이 젠더 규범적인 남성의 신체와는 다른 신체와 결합하는 모습들을 통해, 남성성이 그 자체로 특정한 성에 귀속된 것도 고정된 것도 아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변형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남성성은 그것이 어떤 시대와 관계하느냐, 어떤 사회와 관계하느냐, 어떤 신체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남성성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남성성의 불확실성이야 말로 이 책의 핵심이다.    

  심지어 ‘어떤 신체와 결합하느냐’를 넘어서 ‘어떤 신체’라는 것조차 불투명한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피부 표면을 힐끔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젠더를 알 수 있다”(66쪽, 루인)고 믿을까? 어떤 신체가 남성이며 어떤 신체가 비-남성인지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의사들은 성별이 모호한 신생아에게 자신들의 의료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성별을 부여하지만, 결국 “의학적 처방은 늘 문화적 처방”(81쪽, 루인)이다. 즉, 그 의사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규범이 한 인간의 성을 결정한다. 이것은 성별이 모호한 “비정상적인”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무시할 수 없다. “의료 기술 기획을 통과하지 않는 섹스-젠더는 없으며, 외과 기술 기획이 가공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82쪽, 루인)    

  따라서 이 책의 이론적 성과는 남성성을 다양하고 복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것이 뿌리 없고, 불확실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남성을 비판하기 위한 목록표도 없고, 그런 비판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행동의 목록도 없다. 다만 우리가 당연시해온 것들을 그 뿌리부터 흔들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 

  그렇다면 이것은 아슬아슬한 지적 유희인가? 아니다. 페미니즘의 실천적 면모는 책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책이 정치 팜플렛이나 정당의 행동강령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란 질문을 외면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처세술적인 방식이 아닐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남성성은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좋은 남성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좋은 남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젠더 문제, 모든 젠더 불평등을 외면한 채 부정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특정한 남성성을 허물 벗듯 벗어버리고 홀로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은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 책이 그에 대해 뭔가 단서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처세’가 아니라 ‘실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실천이란 말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의감이나 양심에 호소하는 것, 도덕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처세이든 실천이든 그 출발점은 비슷하다. 불안한 것이다. 그 불안은 남성성 해체의 불안이다. 남성성을 해체하는 것은 이 책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며,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남성성을 위협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남성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현실 그 자체이다. 그것은 의료 과학이기도 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체들이기도 하며, 신자유주의 같은 사회 변동이기도 하다.

"남성성이 특정하게 구성되고 유지되는 측면은 비성전환남성에게도 남성 되기를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100쪽, 나영정 

  남성들(혹은 비-비남성)이 비남성을 남성의 영역에서 배제해왔던 바로 그 전략으로 인해, 남성들 스스로에게도 남성성이란 것이 불투명해진다. 엄기호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불안정한 현실이 남성성을 변모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의 남성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는 조건들로부터 일부 남성들이 차례차례 추방당하고 있다.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소외, 노동 형태 및 착취 형태의 변형, 소비 자본주의의 확산, 그리고 시민권의 박탈 등을 통해 남성성의 근거는 취약해졌으며, 뿐만 아니라 남성 간의 차이-차별도 확대되고 있다. 이렇게 남성성을 위협받는 자들이 취한 각기 다른 생존 전략(찌질이-속물 되기, 초식남-동물 되기, 마초-괴물 되기)이 바로 처세에 가까운 것이다. 이보다는 좀 더 아름다운 새로운 생존전략을 원하는가? 그래서 찌질이, 초식남, 마초의 옆에 좋은 남성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가?  

  엄기호는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남성‘들’ 간의 불평등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어져버린 남성들 간의 공동체를 대신하여 불평등하게 취급받고 있는 사람들 ‘간’의 새로운 연대로 옮겨가는 것”(164쪽, 엄기호)이다. 남성성이라는 것이 이미 복수적으로 존재하고, 남성들 간의 차이와 다양성이 실재하는 것이지만, 그런 복수성, 차이, 다양성을 무마하여 남성간의 보편성, 평등을 보장해주는 사회적 역능이 바로 젠더 관계에서 남성 지배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며 그 사회적 역능이 소멸되었다. 이것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다(“‘국민’을 넘어 연대하고 이 시대의 배제와 추방, 그리고 양극화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164쪽, 엄기호) 이것은 새로운 연대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대이다.    

 

좋은 남성은 없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은 좋은 남성은 없다는 것이다. 좋은 남성이 되고자 하는 나의 기획, 혹은 남성들의 욕망은, 또 다른 "보편화의 욕망"일 뿐이다. "보편화의 욕망"의 체제 안에서는 남성성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비판도, 남성성의 다양한 면모도, 불확실성도, 모두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될 뿐이며, 자기 존재의 불안을 심화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런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애초에 자기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욕망은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감각이 외부, 타자, 질서 등과 만나며 발생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편화의 욕망"과 거리를 둔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와 감각이 다양한 외부들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새로운 것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출발점이 바로 남성성 연구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 그 자체를 상대화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성성을 혹은 자신의 남성을 나의 것이든 나의 것이 아니든, 무수한 시선과 관점으로, 자기 영토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방향을 향해, 경계를 넘나들며, 목격하는 것이다. 남성성이란 것이 특정한 신체에 속한 것도 아니며,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닐 때, 자신이 명명한 남성성은 불확실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남성이라는 것조차 불확실한 것이 된다. 내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 내가 남자라는 것, 내가 "정말 남자인지 확정할 근거가 불확실"해질 때의 당황스러움. 나는 단지 테스토스테론이 좀 더 많이 분비되는 신체이며, 비율상 좀 더 남자에 가까운 것인가?  이것이 정말 일상적인 생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책을 읽는 순간의 경험(카타르시스)이다. 이 짧은 순간을 통해 단단했던 모든 근거와 전제들이 흔들리는 경험은, 자신이 위협받는다는 불안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다. 자신이 다른 무엇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처세가 아니라, 자기와 타자의 관계를 새롭게 변형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평등 자체를 다시 사고하는 것", "시민권을 사유하는 방식의 대전환"(164쪽, 엄기호), 즉, 새로운 연대의 모색이다.  

 

마치며 

  읽고 나서 다시 읽으면 또 새로워지는 이 책 때문에,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엄청난 분량의 서평이 되고 말았다. 이 서평을 쓴 이유는 나 스스로가, 이 책에 대해,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과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과정에서 약간의 자기 분석이 필요함을 느껴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책에 대한 다른 독자들(남성이든 여성이든)의 반응을 보고, 이 책을 그리고 페미니즘을 약간은 변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건방졌던 것 같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이 아니면 두 번, 혹은 세 번. 이 책은 스스로 오해를 생산해내기도 하지만, 스스로 그 본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이브리드 총서라는 이름답게 매우 다양한 영역, 관점, 스타일이 교차하여 만들어진 이 책은 마치 매우 꾸깃꾸깃 구겨진 종이처럼 펼치면 펼칠수록 더 많은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난생처음 써본 이렇게 긴 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을 반의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 같아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봐도 좋을 법한 부분들조차 내 스스로가 쳐놓은 울타리에 갇혀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서평은 이 책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저, 하나의 독서의 흔적일 뿐. 욕심은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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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2012-10-27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들의 ‘여장’은 당시 라이베리아 내전의 전시 집단 성폭력mass rape과 같은 남성성 수행과 전혀 모순을 일으키지 않았다.”(28쪽, 정희진)라는 문장이 쓰이고 읽혔을 때(왜 이렇게 쓰이고 읽혔는지는 아래에서 논하기로 하고),===
라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쓰이고 읽혔는지는 아래에서" 못 찾았어요. ㅠㅠ 죄송해요. 알려주세요. 그게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거든요.
멋진 서평 감사합니다. '페미니즘에 자리 찾아주기'에 도움이 되었어요.^^

른느 2015-07-17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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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라는 긴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그 제목 덕에(제목에 언급된 사상가들 덕에) 쉽게 내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을 이 얇은 책에서 뭐 얼마나 제대로 다루겠어?'라는 의구심도 있었다. 

그런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게되는 것은 결국 '쉽게 읽기'라는 저 말 때문 아닌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흔히 구조주의 4인방이라고 불리는 이 사상가들의 저서는 하나같이 두껍고(때론 얇기도 하지만), 난해하며(가끔 쉽게 읽히는 것도 있으나), 몹시도 재미없다.(물론 흥미로운 것도 있다) 그리고 이들의 입문서나 해설서를 자처하면서 나온 책들 역시 하나같이 어렵다. 이 위대한 사상가를 쉽게 설명하는 것은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그동안 부실한 입문서들로 인해 시간과 돈만 버리고 내용은 잘 이해하지도 못했던 경험이 있었던 나로서는 입문서라고 딱지를 붙이고 나온 책들에 대해 선입견이 있다. 조금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원저는 아니라 하더라도)해설서나 연구서를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쉽게 읽을 수 있나 한번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이 책의 본문을 읽기도 전에 나는 '들어가는 말'에서부터 눈이 번쩍 띄고 메모를 해가며 읽게 됐다. 정말 참으로 반갑고 기쁜 마음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이해 받지 못해 외롭게 외톨이처럼 살던 아이가, 자신을 이해해주는 할아버지를 만난 그런 기분이랄까. 이 책의 모든 본문 내용보다도 가장 감명 깊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가 '들어가는 말'에서 담담히 기술한 '좋은 입문서'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전문가의 '말' - 비전문가와 구별짓기

전문가용 책은 안다는 전제하에 구성되어 있다. 그런 책은 '알고 있는 것'을 쌓아 올려간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그들만의 파티나 마찬가지이다. 초보자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 "아는 이 전혀 없는 파티에 참석해 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함을 느끼기 마련"(5쪽)이다. 그들에게는 공유된 것들('이 정도는 다 아는 거지')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책을 백날 읽는다고 절대 그들과 동등해질 수는 없다. 의사가 환자에게 아무리 병에 대해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도 그 말(전문가의 말)에는 그들을 전문가로 만들어온 결정적 과정에 대한 내용은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변호사, 과학자, 의사, 교수 등등 대부분의 전문가의 말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이런 과정과 전제에 대한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전문가의 '말'은 그 내용이 참되고 고귀하며 훌륭하다고 하여도, 결과적으로 발화자가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재확인하고(시키고), 동시에 청자가 결코 전문가가 될 수도 없으며 그 '말'의 참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도 못하는 비전문가라는 사실을 또 다시 확인하는(시키는) 기능을 하게 된다.

입문서, 그 근본적인 지적 탐구

반면 입문서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루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 말에 따르면 입문서의 의미는 두 가지 점에서 근본적이다. 

첫째는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좋은 입문서는 먼저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를 묻는다고 한다. 저자 말대로 이는 참으로 근본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지란 단순히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나태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면의 성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은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더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가?'라는 물음을 정확하게 인지하면 우리가 '거기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적 탐구의 본질적인 의미 아니겠는가. 

둘째는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룬다는 것이다. 

전문서에서 전문가가 무언가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언가가 이미 당연한 것으로 합의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당연히 옳은 것이라 말해지지 않는 것인지, 말해지지 않아서 옳은 것이 되는 것인지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지 않다. 전문가가 그렇게 말하니 그렇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반면 입문서는 말해지지 않는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말한다. 그것이 실제로 옳든 그르든, 이 행위 자체가 이미 은폐된 전제의 권위를 손상시킨다. 면책특권이 있는 독재자에게 '당신이 정말 떳떳하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법정에 한번 서보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독재자가 아무리 결백하여도 그 자체가 이미 독재자를 독재자의 지위에서 끌어내린다.  

바로 이 때문에 저자는 "입문서는 전문서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만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입문서는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 물음 아래에 밑줄을 그어"준다.  

"입문서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서비스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과 '일반적인 해답이 없는 물음'을 제시하고, 그것을 독자들 개개인에게 스스로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천천히 곱씹어보고 음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입문서가 갖는 중요한 의미들은, 반대로 좋은 입문서와 나쁜 입문서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입문서란 이름을 달고 있으나 실상은 자신의 전문가적 지식을 뽐낼 뿐인 사이비 입문서는 물론이고, 그저 쉽기만 한 책 역시 좋은 입문서라고 할 수 없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말과, 전문가가 한 어려운 말을 쉽게 고쳐 쓴 말로 구성된 입문서는 설사 쉽게 읽힌다고 하더라도 좋은 입문서는 아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깊은 성찰도,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질문도 던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입문서의 길

이 책의 본문도 지금껏 여느 입문서보다도 훌륭하고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저자는 자신이 책 서두에 밝힌 입문서의 가이드 라인에 따라 어려운 구조주의 이론과 맑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 같은 구조주의의 창시자들에 대해서까지 쉽게 그려주고 있다. 내친김에 저자가 구조주의 이론에 접근하는 방식까지 간략하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이 리뷰를 '좋은 입문서'에 대한 우치다 타츠루의 철학에 관한 것으로 한정하고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하려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구조주의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책 뒷표지의 광고문구)여서가 '훌륭한 입문서의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한국의 많은 지식인, 저자, 학자들에게 자극이 되어, 우리에게도 우리 글로 쓰인 훌륭한 입문서가 많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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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진지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이 책을, 주제넘게 비판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의 추천사 때문이다. 추천사를 읽고, 본문을 읽고, 다시 추천사를 읽으면서, 우석훈 소장의 추천사와 같은 방식으로 이 책을 독해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한국 독자들의 일반적인 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다음의 글은 책 자체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비평일 것이다.>>

 

  최근 번역 소개된 앨버트 O. 허시먼의 저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의 원제는 “The Rhetoric of Reaction”이다. 직역하면 ‘반동의 수사학’인데, 이런 제목을 통해서도 충분히 나타내고 있듯이 저자는 반동 세력의 논리를 그 내용에서가 아니라, 수사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범위가 확장되어 보수의 수사학과 쌍을 이루는 진보의 수사학에 대한 분석까지 나아간다. 이를 통해, 저자 스스로도 놀라고 있지만, 이 책은 애초의 목표를 뛰어넘어 의사소통의 비타협적 단절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친화적(democratic friendly)’인 공적 담론의 구조를 확립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요컨대, 내가 끝낸 일은, 오랫동안 반동주의자 및 진보주의자 양쪽 모두가 실천해 온 비타협적 레토릭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 227 쪽   
 
“담론이 논쟁의 규범들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런 종속 상태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고, 그에 따라 담론의 방법을 바꾸고 의사소통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 17 쪽 

  책에서 저자가 명시적으로 밝힌 이러한 목적은 진보와 보수 양 쪽이 오랜 기간 서로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오랜 반목과 비타협적 단절을 반복해 온 한국사회의 현실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추천사에서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이 말했듯이 이 책은 “한국의 상황에 ......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저자가 반동적 레토릭의 전형적 형태로 정식화한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란 틀은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보수 세력의 주장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독자들은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이 한국 사회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혹은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보수적 담론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며, 더 나아가 한국정치의 문제점(민주적 소통 양식의 부재, 혹은 보수적 담론에 잠식당한 공론장)을 해결하는 데 역시 도움이 될 것이라 자연스럽게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로 인해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고, 거기에 개입하는데 저자의 분석틀을 거듭 적용하고자 하는 유혹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유혹들은 지적 욕구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매혹을 지니지 못한 이론은 좋은 이론이 되기 힘들고, 그런 유혹이 없다면 이론은 현실적인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수사학적 분석의 유혹이라고 부를 만한 이 유혹은 우리 현실과의 적합성 때문에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사학적 분석의 유혹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강력한 유혹일수록 눈을 흐리게 하는 법이다.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 현실이 지닌 구체성과 책 자체에 내재된 난점이 나타날 것이다.

 

수사학 분석의 모순적 구조

  이 책을 독해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은 허시먼이 수행한 수사학 분석이 이중적인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허시먼이 기획한 애초의 의도가 충분히 달성되었을 때, 의도하지 않았던 또 다른 결과물로 인해 책의 내용이 더 풍부해졌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허시먼이 반동적 레토릭이란 분석틀을 통해 노린 1차적 효과는 분명하다. 그럴듯하고 정교해 보이는 논리로 무장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상대화시키고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고 보니, 언제나 독창적이고 훌륭한 통찰력을 지닌 사상을 제공해 온 일부 '심오한 사상가'들은 보다 덜 인상적이고 때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으로 보이게 됐다.“ -223 쪽 

  저자는 내용에 맞추어진 초점을 형식으로 돌려놓는다. 보수 세력의 주장이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형식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수사적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 그 주장을 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끔 한다.

  그리고 이를 진보세력의 논리에까지 확장시킬 때 허시먼이 노린 2차적 효과는 비타협적으로 대립하는 두 주장의 자기 완결성을 상대화시키고, 반박될 수도 있고 허물어질 수도 있는, 그래서 타협이나 절충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시킴으로써,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의 의도는 '양비론'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적인 담론을, 양쪽 모두가 지닌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자세 이상의 것으로 옮겨보자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논의가 보다 '민주주의 친화적'인 것이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227 쪽  

 

거리두기 1 - 구체적 조건의 차이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이 지닌 이중적 과제가 일관된 프로젝트가 될 수 있는 것은 당시 저자가 당면한 정세적 조건에 기인한다. 저자에게는 당시 보수주의 및 신보수주의의 득세(1)라는 현실 아래서, 논쟁의 성격의 전환을 통해 형세를 역전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 사회가 진보와 보수라는, 저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두 개의 확실하게 구분되는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2) 

“질서 있는 민주사회로 매우 안정적이고도 적절하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그 안에 사는 시민들이 근본적인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몇 개의(이상적으로는 두 개의)확실하게 구분되는 집단으로 나뉘어야 한다.” -16쪽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 기획의 정치적 목표는 사회의 진보, 혹은 근본적인 전환이 아니다. 하나의 사회가 민주적 원리에 따라 질서 있고, 매우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4)이다. 따라서 저자는 보수주의의 득세라는 당시의 정세적 효과들 중에서 민주적 소통의 불능이라는 상호분리(3)에 가장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호분리, 민주적 소통구조의 파괴가 일어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보수주의의 득세를 바라보는 진보주의자들의 지나친(혹은 진지한) 당혹감이었다.   

  따라서 저자는 다른 진보적인 학자들이 수행했던 보수의 정신이나 성격에 대한 연구, “보수주의에 대한 이런 직접적이고 자칭 심층적인 공격”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적 현상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특정한 효과를 노린 것인데, 즉 보수적 담론의 ‘내용’보다는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보다 덜 진지하게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진보주의자에게 풍자적 태도를 강조하기도 한다.(224쪽) 

  우석훈 소장의 추천사에도 언급되듯이 한국 사회 역시 보수의 득세라는 동일한 조건(1)에 처해있는 듯하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과 오늘날의 한국의 정세는 공유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인다.  

(2) ‘보수의 득세’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반목하고 있다는 관념이 유포되어 있고 그것이 얼마간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적 구도라는 개념에는 상호간의 균형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보수세력에 대응하는 진보세력이 부재한 실정이다.
  일단 의회 내에서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들 아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민주당은 진보적 의제를 선도하지 못하고 있다.(민주당 같은 경우 이미 실패했던 신자유주의적 경향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민중운동의 현실은 더욱 열악한데, 과거의 노동자 중심의 획일적인 운동에서 다양한 부문으로의 진출은 의미가 있지만 여전히 미약하며, 노동운동의 경우 노조 조직률은 오히려 하락하며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 등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의 진보적 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적도 있지만, 이를 하나의 진보세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3) 따라서 한국에서 민주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을 진보와 보수 간의 상호분리라고 진단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진보 세력이 과소화된 결과, 실질적인 대화의 균형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은 힘의 압도적 우위를 통해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이기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불필요한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었고, 이런 경험이 축적되어 소통의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소통을 실현하려면 대화를 거부하는 상대를 대화의 장으로 억지로라도 끌어들일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의 보수진영이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였을 때, 오히려 더 큰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현 실정에서는 그것은 지난번의 촛불시위와 같이 직접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4) 앞서 말했듯이 허시먼은 민주적인 사회가 질서 있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걸 목표로 했다. 따라서 극단적인 충돌로 치달을 수 있는 격렬한 갈등과 반목을 피해야 했고, 이런 이유로 허시먼은 진보주의자들에게 보수주의자를 너무 진지한 태도로 대하기보다는, 때로는 풍자적인 태도로 대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진단과 처방이 나온 데에는 미국사회가 양당적인 견제와 균형을 어느 정도 이루고 있다는 전제가 바탕이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허시먼과 같은 진단과 처방을 할 수 없다. 첫째는 보수주의자의 득세가 초래한 결과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견제 받지 않는 보수 세력의 발호는 서민들의 삶, 생태, 문화, 평화, 모든 것들을 참혹하게 파괴하고 있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이러한 현실은 유행처럼 왔다가 가는 것이 아니다. 허시먼이 수사학 분석의 배경으로 설정한 시민혁명, 보통선거권, 사회복지라는 단계적 진보는 유보되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급격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극도로 불안정해진 세계 경제, 급속히 확산되는 사회적 불평등, 전지구적 차원의 불균형의 심화, 심각하게 손상된 생태계... 우리가 처한 현실은 시급히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도 근본적인 대전환을, 그것도 아주 폭넓은 차원에서 말이다.  

 

거리두기 2 - 반동이란 무엇인가? 예외성의 일반성

  허시먼의 프로젝트가 지닌 또 다른 난점은 그가 분석한 담론들이 역사의 극히 전형적인 형세 속에서 발생한 것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허시먼의 연구에서는 보수와 반동이 일치되고 있다. 하지만 허시먼의 분석이 밝혀낸 수사적 규범은 ‘보수’의 레토릭이 아니다. ‘반동’의 레토릭이다. 허시먼은 자신의 연구에서 다룬 ‘반동(reaction)’이란 개념을 가치중립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반동이란 개념은 두 가지의 지성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뉴턴에 의해 정립된 고전역학의 영향이다. 흔히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알려진 운동의 제3법칙은 “모든 움직임(action)에는 언제나 그와 반대되는 동등한 반동(reaction)이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반작용’과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인식되는 ‘반동’은 모두 영어로 reaction이다. 이런 물리학적 발견과 더불어 ‘사회는 진보한다’는 계몽주의의 단선적인 역사관이라는 지적 조류가 결합함으로써 ‘반동’이란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진보한다는 단선적인 역사인식을 제거한다면, 사회진보를 되돌리려는, 낡고 수구적인, 시대착오적인, 등등의 ‘반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성립할 수 없다. 허시먼의 표현에 따르자면 반동파는 “......에 대해 명백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반응(react)'했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허시먼이 분석한 사례들에서는 보수와 반동이 일치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명백하게 진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진보에 대해 보수주의자는 반동했다. 프랑스 혁명, 보통선거권 쟁취와 같이, 광범위하게 확립된 진보적 전환이 이미 주도권을 잡은 형세에서 보수주의자는 그런 진보적 전환이라는 사건에 대해 반응(react)했던 것이다.  

  바로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에서도 이런 도식이 맞아 떨어질까? 비단 오늘날의 한국에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 대부분의 시기는 이런 전형적인 정세에서 예외적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예외적 형태가 일반적 형태가 된다. 오늘날 한국은 지난 십 수 년간,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지배세력의 선제공격에 대해 “명백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반응”해야 했고, 최근 몇 년간은 토건주의 세력의 공세에 저항해야 했다.   

 

보수와 진보의 레토릭 스와핑

  이런 명백한 현실 조건 속에서 반동적 레토릭을 단순히 보수의 전유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시대적 흐름이란 이름 아래 밀어붙여진 파괴적인 개혁에 맞서야 했던 것은 진보세력이다. 가령 한-미 FTA를 반대하는 진보세력의 논리는 허시먼이 말한 세가지 반동 레토릭에 부합한다.  

역효과 명제 : 한-미 FTA는 오히려 서민,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무용 명제 : 한-미 FTA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위험 명제 : 한-미 FTA는 힘들게 이룩한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와 사회안전망을 파괴할 것이다. 

  4대강 사업을 대하는 진보세력의 비판 역시 이와 비슷한 수사적 형식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보수적 담론이 반동 레토릭에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던 것처럼(혹은, 그보다 더) 진보의 주장들 역시 기가 막힐 정도로 반동 레토릭에 맞아 떨어진다. 

  반동적 레토릭과 쌍을 이룬다고 한 진보적 레토릭 역시 언제든지 보수적 담론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 FTA에 대한 비판에 보수세력은 진보적 레토릭으로 대응했다.  

“한-미 FTA를 추진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에 빠질 것이다”라든지,  

“한-미 FTA가 한국의 사회적 역량을 파괴하기보다는 더욱 강화시키는 상승작용을 이룰 것이다” 

“한-미 FTA가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이에 맞서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다” 같은 것들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첫째는 수사학 분석 그 자체의 역효과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공격적으로 진행될 때 성인이 됐던 나로서는 진보 혹은 좌파의 가장 큰 역할을 권력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반인권적, 노동탄압적, 비민주적,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등의 수식어가 붙곤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강력한 저항 운동이 결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적 담론이 수사학적 형식을 답습하고, “논쟁의 규범에 종속” 되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기득권층의 공세를 더욱 강화시켜줄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주장 역시 역효과 명제의 전형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둘째는 여전히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동적 레토릭이든 진보적 레토릭이든 그 수사적 구조를 폭로하는 것은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정보와 그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다. 한-미 FTA를 비판하건 4대강 사업을 비판하건 간에 그 비판적 담론이 실질적으로 비판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한-미 FTA와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세력의 주장을 우스운 것으로 만듦으로서가 아니다. 실제로 상대의 주장이 담고 있는 내용을 비판하고, 자신의 주장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알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식량시장, 의료시장 개방의 야만성, 지적재산권,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의 위험성,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상 같은 것들을 알리고,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거짓을 밝히는 것 말이다. 4대강 사업의 경우 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2007년 대선에서 나타났듯이 오직 경제적 이슈로 환원되었던 정치의 쟁점들에서 생태라는 영역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사소한 지적

  이 외에도 이 책은 사소한 문제점, 혹은 난점들이 있다. 간단히 몇 가지만 언급한다면 번역의 문제인지, 저자의 실수인지 맥락상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나, 혹은 앞선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반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19세기 정치적 시민권을 확대하려는 조류와 그에 대한 반동의 정치적 형세에 대해 서로 모순적인 주장을 다른 곳에서 펴고 있다.

“보통선거권에 반대하는 두 번째 반동적 조류는 …… 첫 번째 조류보다 훨씬 덜 반개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선거권을 확대하고 ‘하원’의 권력을 강화해 얻어낸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진전을 거꾸로 돌리자고 주장한 논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25쪽 

“하지만 참정권이라는 특정한 '진보'의 화신은 자유무역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그후 거의 한두 세기 동안(그리고 최소한 19세기 동안에는 분명하게)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갖지 못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명백한 민주주의적 정치 형태의 진보는 그에 대한 회의론과 적대감이 널리 퍼져 있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49쪽 

  다른 곳에서 저자는 “1867년 개혁법과 보통선거권 일반에 대한 반대론자들 사이의 당시에 유행하던 이런 종류의 진술은, 민주주의의 도입이 상황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할 것이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해를 가져온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것이 무용 명제의 핵심이다”(100쪽)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무용 명제라기보다는 역효과 명제에 대한 설명으로 보인다. 

  번역의 오류로 추측되는(하지만 원문을 모르기에 확인할 수는 없는) 부분들도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마셜의)이 단계적이고 누적된 진보 이야기는 한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의 이런 이행이 그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128쪽)라는 문장에서는 ”그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처럼 간주했다는 이유만으로“가 맥락상 맞지 않는가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관점에서 우리의 탐구는 마셜 이론이 여전히 유용함을 확인할 뿐 아니라 그 단순성에 더욱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130쪽) 같은 경우도 비슷하다. 여전히 유용함을 확인했는데, 그 단순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마셜 이론이 여전히 유용한지 검증(혹은 판별)받도록 하게 할 뿐 아니라“ 정도의 뜻이 아닐까싶다.  

  일일이 다 지적할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 맥락상 맞지 않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비문이나 약간은 생뚱맞은 개념(“여기서 파레토가 진정으로 제시하려는 핵심은, 민주주의란 다른 정치 제도와 마찬가지로 다중에 대한 '강탈'에 불과하다는 점이다.“(93쪽) 여기서 ‘다중’이란 개념이 어떤 의미로 나왔는지 모르겠다.)들도 있다. 전반부는 비교적 매끄럽게 읽히는 것에 반해, 이런 번역상의 오류로 추측되는 부분은 중후반부에 주로 발견된다. 만약 번역상의 문제라면 교정될 필요가 있겠다.  

 

조금 더 덜 사소한 지적

  조금 더 덜 사소한 점을 지적하자면, 역효과 명제와 위험 명제의 구분이 때때로 불분명해지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수행한 꼼꼼한 분석은 독자에게 역효과 명제와 위험 명제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어떤 효과들을 발생시키는지 가르쳐준다. 하지만 때때로 혼동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데, 그건 아마도 저자가 경제학자라는 사실 때문인 것 같다. 

“개혁으로 인해 발생한 비용과 나타난 결과가 그로 인한 이득을 초과한다. 이 (방대한) 영역의 대부분은, 제4장 첫머리에서 지적했듯이 위험론이 담당한다.”(187쪽) 

  긍정적인 효과들과 부정적인 효과들을, 그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득과 손실이란 양적 기준으로 치환하게 되면, 역효과 명제와 위험 명제는 그 종적 차이를 상실하게 된다. 역효과 명제가 가리키는 것은 그 분명한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했던”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며, 위험 명제가 말하는 것은 그 분명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이미 이룩했던” 성과들을 파괴하는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추천사에서 우석훈 소장도 위험 명제를 설명하며 “각종 미디어에서 ‘과잉 복지는 알코올 중독자를 양산하고 재정 위기를 가져온다’는 식의 발상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때면...”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위험 명제보다는 역효과 명제에 적합한 설명이다.  

  비슷한 이유로, 역효과 명제와 무용 명제의 질적인 차이도 상실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주장의 유일한 경험적 근거는 영국에서 국영의료서비스(NHS)를 도입한 이후 가난한 사람들의 사망률이 하락한 게 아니라 상승했다는 주장이었다. 무용 명제 지지자들은 그 수사 효과를 크게 하기 위해 또다시 역효과 명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셈이다.”(106쪽) 

  사망률이 상승하면 역효과 명제이고, 그대로면 무용 명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주장, 혹은 그 근거가 역효과 명제인지 무용 명제인지 그 수치상의 차이로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스스로 정확하게 분석했듯이 역효과 명제에서 그 역효과는 필연적이고 심각하지만, 무용 명제에서는 효과든 역효과든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조금 더 덜 사소한 지적 - 두 진보의 양립가능성으로서의 공산주의 담론 

  마지막으로 언급할 조금 더 덜 사소한 지적은 공산주의 담론에 관한 부분이다.  

“예컨대 무용 명제가 전개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결과로 기본적인 가치들이 급격하게 변화하면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전혀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결국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런 옹호는 위험 명제의 반사영상이다. 두 입장의 공통된 가정은, 한편으로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험 명제 주장자들은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사회적 진보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반대의 선택을 한다.“ - 206쪽 

  저자는 공산주의 담론을 위험 명제의 반사영상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양립불가능성에 동의했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 담론이 처음부터 자유와 평등, 혹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양립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자유와 평등(추가적으로 박애)이라는, 실제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환상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유와 평등의 실질적인 실천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제한이 아니라 무한한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실제로 현실 사회주의가 어쨌든, 애초에 공산주의에 대한 담론은 두 가치의 양립불가능성이 아니라, 양립가능성을 전제로 형성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말했듯이 무용 명제와 위험 명제의 상호파괴적인 효과(그리고 그런 효과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던 19세기 후반)로 인해, 서로 다른 두 진보의 양립불가능이란 기본 전제가 무력화된 공간에서, 양립가능성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요청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물론 저자가 지적했듯이 사회주의는 위험 명제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 명제의 반사영상으로서가 아니다. 오히려 혁명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이 보수화되면서 전형적인 보수의 레토릭으로서 위험 명제가 사용된다. ‘지금 자유에 대한 요구는 우리가 이미 이룩한 혁명의 성과를 위협할 것이다’와 같은 방식이다.  

 

이론에다 현실을 섣불리 적용하지는 말 것. 그러나 이론으로부터 언제나 배울 것.

  나는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는 매우 훌륭하고 흥미로운 연구라는 점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결코 그가 이룩한 성과들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으며, 그럴 능력 역시 없다. 하지만 이 책의 한 독자로서, 이 책이 내뿜는 강력한 유혹을 발견했기에 그에 대해 경계가 필요함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구체적 조건의 차이를 고려한 충실한 독해를 거치지 않고, 현실을 집어다 이론에 적용하고는 잘 맞아떨어진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하지만 사실 허시먼의 수사학 분석이라는 틀이 우리 현실을 잘 설명하지도 못할뿐더러,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더더욱 제시해주지 못한다.  

  허시먼의 연구가 우리에게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한다면, 그건 바로 그 내용에서가 아니라 형식에서이다. 그는 수사학 분석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당시의 이론적 정세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개입하는 방법을 보여줬다. 그는 논쟁의 방법 자체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책을 통해서나마 이런 경험은 구체적인 (정치적, 이론적) 정황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법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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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1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을 수록 손해?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언어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 등이 두루 향상될 것이라는 믿음은 세대를 불문하고 광범위하게 합의된 진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 믿음이 결코 진실인 것만은 아니란 생각 또한 널리 퍼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주로 번역서에 대한 비평 혹은 불만들을 통해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해가 안되는 건 어려워서가 아니라 번역이 엉터리라서 그런다”라는 우스갯소리를 대학에 들어와 처음 들은 후 그 농담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이런 우스갯소리는 종종 (흔히 일본과 비교되는)우리나라의 후진적인 번역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서 번역서에 대한 폭넓은 불신을 조장하기도 했다. 이런 불신이 더 구체성을 띈 것은 번역에 대한 논쟁이 학술적인 공간으로 확대되고, 또한 최근 일부 ‘지식인’들의 번역비평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이다. 

 나 같은 경우도 주로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번역서나, 번역서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해외 유명대학의 석, 박사 출신인 학자들의 연구서를 읽게 되는데, 외국어가 약하다보니 정확한 번역이나 올바른 해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비문이나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을 자주 보게 된다. 원문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나라면 이런 식으로 문장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식으로 자주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번역이나 내용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보다는 한국어 실력(마저..)에 대한 걱정이 앞서곤 한다. 우리말의 다양한 표현력을 배우지 못하거나 잃는 것은 물론이고, 나도 모르는 새에 번역 투의 문장에 감염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사용자를 위한 한국어 교재

 번역이라는 장르, 혹은 분과학문으로서의 번역이란 영역 자체가 더 발전하고, 거기에 투자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의식적으로 한국어 실력을 더욱 계발하고, 한국어에 대한 감수성을 좀 더 다듬는 자체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어 독자를 위한 우리말 관련 서적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은 반가운 현상이다. 

 그 중에서도 꽤 오래된 편에 속하는 <<국어 실력이 밥먹여준다 - 낱말편 1>>을 최근 읽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깔끔한 편집과 다양한 예시문, 실무 경험에서 우러나는 저자의 조언들,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잡아내기 위한 노력들이 돋보였다. 특히 “조상언어가 없는(혹은 아직 조상언어를 찾아내지 못한) 한국어의 특수성 탓에” 정확한 어원이나 낱말들 사이의 관계가 학술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 아래에서 “직관에 기댄 추측”까지 동원해가며 유사한 낱말들 사이의 관계와 차이들을 밝혀내고자 한 저자들의 노력은 정당히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최고의 '덤' : 한국어는 번역된 영어가 아니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본문보다는 오히려 ‘덤(일종의 부록, 쉬어가는 페이지)’에서 영어 번역 투의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어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되돌리려고 한 시도들이다. 대표적으로 영어 문장의 'in', 'into'를 굳이 번역하다보니 ‘과일을 내장고 안에 넣다’, ‘수건을 서랍 안에 보관하다’, ‘책을 가방 안에 넣다’와 같이 어색한 표현이 오히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일을 냉장고에 넣다’, ‘수건을 서랍에 보관하다’, ‘책을 가방에 넣다’와 같이 원래 보관이 목적인 장소에는 굳이 ‘안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영어의 ‘have'를 ’가지다‘가 아니라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칠 뻔했다. 한국어에서는 소유의 의미로 ’~을 가지다‘보다는 ’~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난 지금 돈을 가지고 있어‘보다는 ’난 지금 돈이 있어‘ 같은 것이다. ’나는 집이 있다‘, ’나는 차가 있다‘, ’우리 집에는 정원이 있다‘ 같은 경우이다. ’~이 있다‘가 어색할 경우 ’가지다‘, ’소유하다‘라는 식으로 번역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한국어 표현의 자연스러움과 다양함이, 영어 단어장이나 번역문을 통해 의식적으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한국어에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다 

 책에는 이런 절묘한 자극이 곳곳에 함정처럼 놓여져 있어서 약간 지루한 듯, 거슬리는 듯 책을 읽고 있다가 우연치 않게 기분좋은 발견을 하게 되곤 한다. 가령 ‘가족’과 ‘식구’의 차이를 밝히는 부분도 그랬다. ‘가족’이 집단으로서의 공동체를 지시한다면, ‘식구’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으로서의 구성원을 지시한다. 또 ‘새’와 ‘새로운’의 차이 역시 생각보다 크다. ‘새’가 시작, 또는 최초의 의미를 갖는다면 ‘새로운’은 갱신, 변화의 의미가 강하다. ‘또’와 ‘다시’의 경우도 비슷한 말 같지만 ‘또’가 단순 반복의 의미가 강하다면, ‘다시’는 ‘달리’, ‘다르게’와 비슷한 어원을 같는 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변화와 차이의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이런 낱말들의 미묘한 차이들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식으로 사용해왔던 것이다.(하지만 말이 아니라 글을 쓰려고 할 때는 이런 무의식적인 언어 기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의식적인 수준에서의 언어 능력이 글쓰기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아주 소소한 수준으로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낱말의 어원이나, 역사, 낱말 사이의 파생적 관계를 보여주려고 한 시도는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었다. ‘껍질’에서 ‘질’을 ‘질기다’와, ‘껍데기’에서 ‘데기’를 ‘단단’, ‘딱딱’과 연결짓고, ‘껍데기’의 이형태(異形態)는 많으나 ‘껍질’의 이형태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껍데기’와 ‘껍질’의 역사를 추측해보는 내용은 한국어 사용자에게 많은 상상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권 작가들이 한 개념의 어원을 라틴어, 그리스어까지 추적해 그 본원적 형태나 사용을 되돌이켜 봄으로써 많은 지적 상상력을 공급받고 있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한국어를 통해 이런 종류의 상상력을 공급받으려는 시도는 매우 부족하기만 했다. 물론 이는 앞서 언급했던 한국어의 특수성 탓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 이런 시도가 더욱 반가울 수 있는 것이다. 

 

단점 1: 무리한 정식화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어의 특수성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사소하지만 거슬리는 부분들 역시 존재했다. 일단은 곳곳에서 법칙화에 대한 욕심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 그리고 실제적이 사용에서의 쓰임의 차이를 밝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런 경우에는 이 말, 저런 경우에는 저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문법적으로 정식화되기에는 아직 우리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독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고 전체적으로 지루함이 발생한다. ‘안’과 ‘속’의 경우 1, 2차원 vs 3차원, 추상명사 vs 보통명사, 빈 공간으로서의 정상 vs 비정상 등, 꽤 정연한 도식을 보여주었지만, 다른 리뷰들을 보건데도 독자들은 그다지 납득하지 못한 것 같다. 이 경우는 오히려 ‘안’과 ‘속’은 한자어 內(내)와 裏(리)의 대응으로서 발달해온 것 같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껍질’과 ‘껍데기’의 경우에도 둘을 구분할 수 있는 도식화된 기준을 많이 제시했지만 사실 일상적으로 그에 반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특히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구분 기준은 큰 효용이 없을 듯하다. 특히 식품의 경우에는 일상적인 용법상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 같다. ‘고개’와 ‘머리’의 구분도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구분법을 제시했지만, 동물은 어차피 ‘머리’가 아니라 ‘대가리’를 사용하는 것이고, ‘머리’란 말을 쓸 때는 비유적이거나 의인화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이라는 구분법은 의미가 없어진다. 의도나 목적이라는 기준 역시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제시한 예문 중 몇몇은 ‘머리’와 ‘고개’가 둘 다 사용한 경우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개’와 ‘머리’가 서로 다른 신체 부위를 지시한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뉘앙스의 차이를 보려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런 어색함은 이글이 신문 연재기사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각 챕터마다의 분량 상의 균형을 무리하게 유지하려다보니 발생했다는 인상도 든다. 어떤 낱말들은 좀 더 긴 설명과 다양한 예문들이 필요하고, 입는 입장에서도 재밌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낱말들은 분명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너무 길게 설명하다보면 오히려 납득하지 못하는 점들이 드러나 의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단점 2: 적절한 쓰임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 기준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낱말이 제대로 사용되었는지, 부적절하게 사용되었는지를 판가름하는 데에 있어서 저자들이 취하는 방법이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한국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독자들에게 이런 의심을 최대한 줄여줄 수 있는 좀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보니 ‘어색하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부자연스럽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판단을 통해 적절한 쓰임이 아니라고 판결내려진 것중 몇몇은 단지 그 특정한 관용적인 쓰임이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그런 용법이 굳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저자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자연스럽지만, ‘즐겁다, 구주 오셨네’는 어색하다고 했을 때 이것은 캐롤 가사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익숙해진 원인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즐겁다, 구주 오셨네’도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기쁘다’와 ‘즐겁다’의 의미상 차이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충분히 받아들인다고 해도 말이다. 

 

총평 

 상당히 길게 이 책을 독서하면서 느낀 거슬림이나, 어색함을 나열했지만, 최종적으로 말하자면 분명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한국어의 가능성과 한국어 사용자로서 가질 수 있는 언어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대중적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독서는 누구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그 후속편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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