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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2 - 파이드로스 / 메논 / 뤼시스 / 라케스 / 카르미데스 / 에우튀프론 / 에우튀데모스 / 메넥세노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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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물이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디모데후서 4장이던가. 장례식 때 자주 읽히는 성경구절처럼 메넥세노스의 소크라테스의 추도사는 훗날 그리스인들이 장례식에서 읽을 정도로 유명했다던데, 읽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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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에세이 - 고전세계로 향하는 첫걸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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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아르고>라는 영화를 봤다. 어 이거 아이손의 아들 이아손인지 이아손의 아들 아이손인지가 대권을 쥐기 위해 필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헤라클레스처럼) 함선 아르고호를 타고 떠나는 그 이야기인갑다, 게임으로도 나오고 그리스신화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니까, 하는 정도로 그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왠걸, 이 영화는 그리스신화의 아르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물론 메데이아 공주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1979년 이란에 억류된(정확히는 억류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인 몇 명을 탈출시켜야 하는데, 갖은 노력 끝에 채택된 아이디어가 이란을 배경으로 <아르고>라는 영화를 찍는데 장소 헌팅 등을 위해 입국하여(입국은 정보부 요원만 하고) 서류조작을 한 다음에(캐나다 여권으로), 비행기편으로 빠져나온다는 얘기이다. 어쨌거나 사람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하는 후반부의 비행기가 이륙하기까지는 정말 탑승하여 비행기가 뜨기만을 기다리는 한 사람의 승객으로 감정이입되어 손에 땀을 쥐고 볼 수 있었다. 신화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래도 영화이름이 <아르고>니까,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황금양모피를 습득하여 과제를 해결한 이아손이 떠날 때 콜키스 왕의 딸 메데이아도 동행을 하는데, 이들은 아르고호를 타고 탈출하면서 메데이아의 오빠를 데리고 간다(납치인지 동행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가 추격하자, 오빠를 살해해서 시신을 토막내어 바다에 뿌림으로써, 아버지는 아들의 사체를 수습하느라 추격이 더뎌지고, 그맇게 콜키스의 땅을 벗어나는 장면, 다시 얘기해서 영화 아르고와 아르고호가 등장하는 신화는 무관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스릴만은 닮은 점이 있었다. 어쨌거나 영화가 끝나고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라스트 신이 끝나자 곧이어 불이 켜지고 관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도 옆 사람들 자리 비켜주느라고 일어나서 빈 좌석에 앉아 이들은 엔디 크레딧을 어떻게 활용했나(평소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관찰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많은 관객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2/3쯤이 빠져나가고 텅 비어갈 즈음, 미국의 전 태통령 카터의 음성과 자료사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아로고 작전은 미국 카터 대통령 재임시-그해에 우리나라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했다- 진행된 일로 미국 입장에서는 통쾌한 성공이겠으나 국제사회의 여론을 감안해서 봉인한 사건이었던 것, 그것이 시효가 만료되어 개봉된 것을 기사로 다루고 그 기사를 읽은 감독이 영화화하기 시작했으며, 이 영화와 관련해서 이란에서 촬영하기가 쉽지 않았고, 카터 대통령도 한 차례인가 이란을 방문했다는 그런 내용들이 엔드 크레딧에는 담겨 있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하는 자막이 맨 앞에 나오기는 했지만, 상상에 의한 해프닝이 아닌, 역사 속 한 장면이었다는 점과 연관 짓는 중요메시지를 영화 아르고는 엔티 크레딧을 보게 하는 <미끼>로 끼워넣었던 것이다. 어쨋거나 마음이 무지 바쁜 우리 국민들, 그렇게 바쁜데 어찌 이토록 한가하게 영화를 즐기려 오셨는지, 화장실 용무가 바쁜 사람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화장실에 가거나 곧 출발한 고속버스를 타려는 것처럼 쏜살같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더라.

엔드 크레딧은 흔히 엔딩 크레딧이라고 부르는데, 참으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시간도 상당히 길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요즘의 엔드 크레딧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영화의 엔드 크레딧”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스크린에 'The End'가 뜨면 불이 켜졌다. 이탈리아 영화는 'Fin', 홍콩영화는 '劇終'. 영화의 라스트 신 다음에는 이 마침표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제작진/출연진 소개는 도입부에. 영화에 투입되는 자본 규모가 커지면서 필요한 인력들도 점점 늘어나자 오프닝에 그 명단을 하염없이 보여줄 수 없는 상황에 이름. 엔드 크레딧 시초는 1956년도 할리우드 영화 <80일간의 세계일주>. 당시 기준으로 블록버스터였던 작품이라 적지 않은 인력이 투입되었고 그들 모두를 소개하기 위해 엔딩 크레딧이라는 장치를 처음 도입. 그러나 정착은 1961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을 거쳐 서서히 일반화.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주제곡 두세 개를 온전히 다 들어야 끝을 볼 수 있을 만큼 엔딩 크레딧이 길어진 첫 작품은 리처드 도너의 1978년도 영화 <슈퍼맨>이었다. 거의 8분 가까이. 당시의 관객들은 꽤나 놀랐을 것. 이렇게 기나긴 엔딩 크레딧이 대세가 되면서 '히든 컷'처럼 관객들을 끝까지 자리에 앉혀두기 위한 장치가 개발되기도.

정리하면 위와 같다. 그런데 나는 생각해본다. 내가 혹은 나의 지인이 이 영화에 참여했는데 이름이 어떻게 나오나 보자 하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나, 거두절미하고 '이영애 매니저 ***'라는 이름까지 등장하는 영화에 관여한 숱한 사람들, 협조해준 단체, 장소제공에 대한 감사 등등 엔드 크레딧에 포함된 많은 정보들은,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데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기록인 것이고, 영화에서 받은 감동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물심양면의 노고에 감사를 표해야 할 시간이 엔드크레딧이 있는 이유이고, 또한 뒷풀이(향연)의 시간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책 얘기는 언제 시작하냐고요? 네, 지금 시작합니다)

<그리스로마에세이>는 4권의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들이 쓴 에세이, 그러므로 철학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나, 라고 질문하면 그럴 수 있는 것들을 묶은 말 그대로의 그리스 로마의 주옥같은 에세이들을 모은 그리스로마 철학에세이모음이다. 첫번째로 나서는 주자가 '철학을 잘 읽어주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다. 곳곳에 주옥같은 명언들이 등장하고 서양 명언이나 격언들로 회자되는 것 가운데 데이터를 내보면  출처가 <명상록>인 경우가 가장 많을 정도로 대단한 책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제작된 그리스로마에세이를 펼치다가 새로운 발견을 했으니, 그것은 명상록의 서두가, "~덕분에 나는 ~을 갖게 되었다" 류의 헌사, 보통 책이라면 맨 앞에 한두 줄 씌어있기 마련인 내용들이 1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필자)가 오늘 여기에 지금 여기에 있기까지 나는 이런 고마운 분들의 덕분에, 그러므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이다. 나는 이런이런 분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이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씁니다와 아주 대조적일 것인데, 감사를 표하는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평정을 찾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2권부터는 한번에 소화하기는 힘들 정도로 당시의 그리스철학의 이런저런 풍조를 담고 있게, 쉽지는 않다. 그러나 1권의 감사사연들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는 저자인 아우렐리우스와 동일시되는 어떤 경험 속에서 다음 권의 책 내용으로 빨려들어가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앞서 엔드 크레딧을 길게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가 상업화되면서-다 나쁜 것은 아니다- 투입 자본과 규모 면에서 전문(집단)가들이 숱하게 결합하면서 엔드 크레딧은 길어졌지만 그것을 영화 서두에 소개하기는 너무 장황하여.. 그러나 철학자 황제는 과감하게 책의 서두에 오늘의 나를 잊게 해준 이들에 대한 감사를 한 장으로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99개(숫자는 중요하지 않다)의 감사가 들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옮긴이 천병희 교수는 17면의 주2에서 "~덕분에 ~을 하게 되었다"는 그리스 원전에 없는 정동사를 역자가 삽입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배웠다" 또는 "나는 습득했다"는 말을 삽입하는 이들도 있단다.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말씀을 듣기 전에 주기도문을 읽듯이, 사찰에서 법회를 할 때에 경을 독송하는 사전의식이 진행되듯이 명상록은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나의 지금 여기를 있게한 고마운 분들에 대한 감사를 영화의 엔드 크레딧 분량의 목적성 글을 앞세움으로써 독서하는 공간과 시간을 경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황제는 이 글이 출판되어 널리 읽히는 것을 전제로 쓰지 않았다, 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영혼을 치유하는' 세네카, '로마의 최고 지성' 키케로, '최후의 그리스인; 플루타르코스의 주옥같은 철학에세이들을 한 자리에서 마치 명절의 '종합선물모임'처럼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이 이 책에는 있다. 그리고 명상록 서두의 감사잔치는 이 책 전체의 독서를 의미있게 하는데 압도적인 역할을 해주는 구성이다.

나는 이 글을 고전읽기모임을 진행하는 나의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토대로 작성했다. 덕분에 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지성들을 만난다. 고전읽기모임은 선생님의 안내강의를 토대로 논의한 결과 이 책을 첫번째 텍스트로 선정했고,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부터 읽고 토의하기로 했다. 정년은 쉽게 연장되지 않고 한계수명은 늘어나는 이 때에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이 역설이 아닌 현실이 되어 있는, 키케로의 책 덕분에 우리는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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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 2012-11-27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라, 흥미로운 발견이네요 덕분에로 처리한 옮긴이의 지혜도 돋보이고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작품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고 사안이었는데 <경향신문>에 신형철 님이 이런 글을 썼더군요. 잘 읽었고요. 지인들끼리 이곳에서 관련해서 토론을 해볼까 하고요. 발제문을 대신해서 올린 것이니 양해바랍니다.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쓴 글도 검색이 되더군요. 일단 이 글부터..

[문화와 세상] 박근혜 혹은 안티고네 신형철 | 문학평론가 2012-09-27 21:11:33ㅣ수정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272111335&code=990100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관련 기자회견을 보면서 느낀 비애가 이 글을 쓰게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말투는 거의 기계적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역사관이라는 것이 바뀔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녀에게 그 기자회견은 고통스러운 자기 부정의 연극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좌파인사들의 전향선언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군부독재 시절의 저 악명 높은 사상전향제도는 김대중 정권에 이르러 준법서약제도로 대체됐는데, 군부독재의 퍼스트레이디가 이제와 자기 신념을 일부 부정하며 전향을 선언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기자회견을 보고 난 뒤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소위 '오이디푸스 3부작'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이디푸스 3부작'은 <오이디푸스 왕>,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로 이어지는 가족사 비극이다. 오이디푸스는 타고난 지혜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이 되지만,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부친살해와 근친상간 때문에 왕국이 도탄에 빠졌음을 깨닫고 자신의 눈을 찌른 뒤 왕국을 떠난다. 추방된 맹인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최후를 맞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킨 이는 그의 맏딸 안티고네였다.

3부작에서 2부까지의 내용이 이와 같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이야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를 떠올리기 전에 내가 두 부녀의 삶을 세부까지 일일이 대조해본 것은 물론 아니다. 두 아버지 모두 한 나라의 왕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다가 추락했지만, 테바이의 왕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처벌했고 유신체제의 대통령은 부하의 손에 암살됐다. 이것은 큰 차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하건 사랑과 존경을 포기하지 않은 두 딸은 닮았다. 박근혜 후보에게서 눈 먼 아비를 부축한 채 벌판을 떠도는 안티고네를 연상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안티고네>까지 읽은 이라면 이와 같은 비교가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를 지적하게 될 것이다. 아비의 저주 탓인지 그의 두 아들은 권력을 놓고 전쟁을 벌이다 모두 죽는다. 두 아들 중 하나는 적국에 투항해 조국을 침공한 터다. 배반자에게까지 장례의 예를 갖춰줘야 할 것인가. 테바이의 왕 크레온은 이를 금지하지만 안티고네는 국가의 법보다 친족 간의 인륜을 따르겠다며 두 오빠를 모두 매장하려 한다. 그녀는 끝내 처단되지만, 이 와중에 크레온은 부인과 아들을 잃었으니 그녀의 패배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안티고네가 비극적 영웅이라는 점은 대개 부정되지 않는다. 물론 배반자를 용인할 수 없다는 크레온의 단호한 태도는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불가피한 선택이라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안티고네를 죽게 한 그의 처사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가 독재자에 가까운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바꾸자면 그는 국회의 동의를 얻지도 않은 채 칙령을 공표했고, 공정한 재판을 거치지도 않고 안티고네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안티고네가 영웅인 것은 그와 같은 독재에 저항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레온의 두 가지 조처에서 유신체제 하의 악명 높은 긴급조치와 사법살인으로서의 인혁당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단호히 선을 긋지 않고 이를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안티고네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안티고네를 민주투사라 볼 수 있다면 그때의 안티고네는 (말장난이 용서된다면) ‘안티(anti)근혜’라고 해야 옳다. 유신체제가 조국의 배신자라 낙인찍은 당시의 희생자들을 온전히 매장하는 데 헌신한다면 그때 박근혜 후보는 비로소 안티고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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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 2012-11-27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선거판 참 웃기지요. 프레임이라고, 아전인수식 프레임을 짜놓고 객관적인듯 몇몇 신문들은 몰아가고 식당에서 그런 무가로 들어왔을 두꺼운 신문들 보면 브라우니! 태워! 하고 싶은 심정..
 
게르마니아
타키투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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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고 평이해보이지만 메시지가 강한 책, 로마인이 우려 속에 바라보는 게르마니아의 잠재력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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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 2012-11-2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ㅇ;네요.
 

'서양 고전과 역사 속의 여성 주체들'이라는 부제를 가진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도서출판 길)에서 한정숙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속 여성들을 논문에 담으면서 메데이아가 놓인 처지를 분석한다('에우리피데스 극 속의 여인들-메데이아, 파이드라, 바코스의 여신도들').

알다시피 그리스 고전 비극 3대 작가 가운데 가장 나중에 태어난 "에우리피데스는 여성 등장인물들에 대한 복합적 묘사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비극의 완성자의 작품답게 두 친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아버지로서의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아들들에게 사랑을 받을 아버지의 권리를 앗아가면서까지 복수를 실행에 옮긴 메데이아의 '범행' 동기를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여 살피기란 쉽지 않다. 다만 한정숙의 글에서 메데이아가 이방인 여성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중의 고통을 안아야 하는 점을 살핀 점을 흥미롭게 읽었다.

 

 

 

 

 

 

 

 

 

 

 

 

*가운데 비극걸작선에는 세 작가의 작품들이 두 편씩 실려 있는데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실려 있다. 소포크레스의 <안티고네>도 실려 있다.

콜키스 여인인 메데이아가 이국 땅 코린토스의 여인들(코러스장과 코러스들)을 상대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듯 말한다. 코러스로 이들 여인들을 설정했다는 극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메데이아는 고국에서 왕녀였으나 지금은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 어디에서나 이방인들은 시민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고 소외된 존재이다. 가령, 국내의 경우도 귀농한 가족을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왔다는 것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뒤농 10년 만에야 청첩장을 받았다는 한 후배의 얘기가 와 닿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여성은 더욱 소외된 존재이다. 더구나 정권 회복을 기도하다가 이아손도 이방인 신세, 그러나 그는 코린토스 왕의 궁정에서 왕녀와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메데이아에게는 두 자녀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 고립무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 말인가!

한정숙 님이 글을 쓰던 당시에는 한국사회의 다문화가정의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을 때인 듯하다. 비극 <메데이아>를 읽으면서 또한 한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대체로 우리나라의 농촌총각들과 결혼해서 살아가는 외국인여성이 처한 현실을 생각한다. 언어의 소통 문제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남성(부권) 중심 사회이기에, 더구나 농촌의 남자들이 좀더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전제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안고 살아가는 어려움에 이주민 여성이라고 안아야 하는 중첩된 문제가 예견되고, 그러한 갈등이 폭발한 사건들이 가끔 뉴스가 되곤 한다.

"여성 일반 중에서도 이방인 여성인 메데이아는 코린토스 여자들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

다. 여자들은 비록 지위가 낮더라도 일반적으로 사적 영역에서 친한 사람들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위안을 얻곤 하지만 부모 형제를 떠나 오직 남편 한 사람만을 의지한 채 코린토스로 온 메데이아에게는 이러한 가능성마저 없기 때문이다. 메데이아는 사고무친, 고립무원한 상황에 있다."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뻔한 살림에 친정마저 멀리 있는 다문화가정 주부들은 이러한 존재 자체가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금만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주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서 혹은 획득하기 위해 주한 미군과 결혼하였던 우리네 누나 언니들의 삶이 있다. 그런데 그 상당수가 결국은 버림을 받아 극도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고 미국 현지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한 목사님이 방한하여, 그녀들이 주로 목회 대상이라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눈물겹고 울분이 일게 했으며 놀라웠다.

메데이아의 경우는 눈에 사랑의 콩깍지가 씌여, 그놈의 사랑 때문에 조국을 버리고 아버지를 부정하고 오빠마저 살해하여 토막냄으로써 아버지의 추격을 지연시키는 등 씻을 수 없는 죄과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왕국이라는 친정이 있지만 돌아갈 수가 없다. 사랑 때문에 웃고 사랑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울고 또한 사랑 때문에 또 울어야 하는 메데이아. 메데이아에게 (남편을 두고) 코러스 장(여인들 중)에게 하소연하는 다음 대사를 보자.

 

"하지만 그대는 나와 처지가 달라요. 그대에게는/ 여기 고향 도시와 아버지의 집과 인생의 행복과/ 많은 친구들이 있어요. 그러나 나는 외톨이로/ 고향 도시도 없고 이민족의 나라에서 납치되어 와/ 남편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어요./ 이런 폭풍을 피할 수 있는 항구가 되어줄/ 어머니도 오라비도 피붙이도 없어요. (251~268행)

 

비극 메데이아를 비롯해서 이아손과 메데이아가 등장하는 신화의 부분들을 촘촘하게 살펴지만 "납치되어 와"는 (격분한 상태에서 하는, 시쳇말로) 좀 오버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아손 자신도 조국에서 추방되어 이방인으로 사는 마당에 동병상련이라는데 아내를 잠싸주지는 커녕 자기는 새장가를 드는데, 그것도 이미 있는 두 아들이 꿀리지 않고 살아가도록 배다른 형제들(왕손)이 필요하다는 얼토당토 않은 핑계까지 대고 있으니 화가 치솟을 수밖에 없다.

비극에서 한 가지 주목할 곳은 그녀의 한탄이 코린토스 여인들에게도 공감을 얻는 지점이다(코린토스 여인들이 코러스들이다). 코린토스 여인들은 자기네 공동체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기의 땅에서 소외되어 있고, 그러므로 출신지역과 지위는 다름에도 메데이아와 코린토스 여인들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인이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더불어 슬품을 나누고 공감하는 것이다. 귀농을 한 선배의 부인 곧 형수가 젊은 시절 사회운동을 했는데, 농촌지역 다문화가정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남자들은 다 그래, 하면서 남편들 흉을 보는 가운데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얘기.. 그러나 생각해보면 비단 한국의 남자들과 살아가는 외국인 여성들만의 심정이겠는가! 무슨 이유에서건 친정이라는 뒷배, 때론 힘이들면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피붙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 아내의 심정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아손은 이기적이다. 이기적인 남자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까? 메데이아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떠나온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아손의 고향(시댁)에서는 국왕 펠리아스의 딸들을 속여 왕을 죽이게 했다. 해서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녀에게는 말 그대로 퇴로(출구)가 없다. 이런 그녀 앞에 나타난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비난 앞에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메데이아가 자기를 도와준 것은 단지 그녀가 이아손 자기에게 반해서 그런 것일 뿐이고, 자기와 결혼한 덕분에 그녀는 야만의 땅 콜키스에서 문명의 땅인 그리스로 와서 정의와 법을 배웠으며 지식이 많은 현명한 여성이라는 명성까지 얻게 되었으니, 오히려 자기가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베푼 셈이라고 주장한다. 메데이아가 외국 출신 여성이라는 것을 빌미로 이아손은 그리스 중심주의적 문명론을 들먹이며 그녀를 배은망덕한 오랑캐 취급을 하여 모욕한다.

 

"메데이와와 이아손 사이의 대화는 이른바 문명-야만 구분에서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사회 구성원들이 결혼한 후 성적 매력이 사라질 때 찾아오는 긴장된 관계가 어떤 모습을 띌 수 있는지 보여준 다음, '거래로서의 결혼'의 내부사정을 좀더 세밀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한정숙)"

 

분명 한국의 다문화가정의 문제는 '거래로서의 결혼'에서 깊이 연구되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내국인들끼리의 결혼도 '거래로서의' 측면으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나쁜남자' 이아손을 좀더 지켜보자. 이아손은 메데이아를 질투에 사로잡힌 나쁜 여자로 비난한 다음, 자기가 새 아내를 맞이하기로 한 것을 열심히 옹호한다. 그것은 자기의 신분상승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와 메데이아 사이에 난 자식들의 앞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 앞서 언급했듯이 . 그는 코린토스 왕녀와 결혼하여 새로운 자녀를 얻으려고 하는 이유를 이렇게 강변한다.

 

"그리고 나는 자식들을 내 가문에 어울리게 양육하고,/ 당신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형제를 붙여주고,/ 그들을 모두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고, 그들을 모두/ 한 씨족으로 묶음으로써 행복해지고 싶었소. 당신에게/ 아이들은 더 필요 없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태어날 아이들로/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소."(562~567행)

 

메데이아의 머리꼭지가 확 돌아버리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아손은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냐고 묻는다. 코린토스 왕은 이미 메데이아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이아손은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아손은 모험하는 시대의 영웅이었으나 약자인 여성의 처지를 헤아리고 대화로 아루만지는 다정함이랄까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은 가지지 못하였다.

 

"당신도 새 신부 때문에 기분이/상해 있지 않다면 '아니오'라고 말하겠지요. 당신들 여자들은/어떤가 하면, 결혼생활만 원만하면 모든 걸 다 갖고 있다고/생각하고, 결혼 생활이 여의치 않으면 가장 훌륭하고/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가장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지요. "


여성 전체로 일반화하면서 사실은 질투가 아니냐, 왕녀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라면서 적반하장, 그리고 결정적인 대사를 날린다.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식들을 낳고,/여자 같은 것은 없어져버렸으면 좋으련만!/그러면 인간들에게도 불행이라는 것이 없어질 텐데!"(573~575행)


아이를 낳는 것만 아니라면.. 결혼도 여자도 필요없다는 식인데, 그렇다면 새로운 결혼도 앞서 말했듯이 출산을 위해서라는 얘기인가! 갈수록 태산이다. 어쨌거나 문제제기가 하고 만 것 같은데, <메데이아>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 제기할 발제 형식의 글을 미리 올렸다. 토론 결과로 다시 글을 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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