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스토너 (초판본)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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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태어나 뜻밖의 문학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영문학 교수가 되지만 아내와의 결혼은 실패하고, 자식도 엇나간다. 젊은 제자와 불륜에 빠지기도 했고, 영악한 제자와 자격지심에 빠진 동료 교수에게 모함을 받기도 하지만 끝내 그들을 굴복시킨다.
삶은 그렇게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지만 결국 삶이기에 조건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죽을 때도 스토너처럼 무엇을 기대했나 자문하며 기쁨이 몰려올 수 있기를 바란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P6

대학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걸세.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학생들이나 이타적인 지식추구나 그밖에 사람들이 말하는 이런저런 이유를 위해서가 아니야.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를 내놓고 평범한 사람들, 그러니까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몇 명 받아들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저 보호색일 뿐이지. 중세 교 회가 평신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신에 대해서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 가장을 하는 걸세. - P28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들의 신혼여행도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 사실을 스스로 인정 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를 때까지 이 실패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 P56

그는 그녀가 불행해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이런 말을 꺼내면, 그녀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질책으 로 받아들여 그가 사랑의 행위를 할 때처럼 침울한 표정으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그는 자신이 서투른 맛에 그 녀가 마음을 닫았다고 한탄하며 그녀의 기분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 P61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 P61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 P101

젊음의 서투름과 어리석음 - P108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 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 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40.6)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 P153

그해 여름 두 사람의 시간이 온통 정사와 이야기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말하지 않고도 함께 있 는 법을 터득했으며, 편안히 쉬는 데에 익숙해졌다. - P155

그것이 그해 여름에 두 사람이 배운, 이른바 ‘기존 관념‘의 기이한 점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음 과 몸이 별개의 것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듯이 믿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 를 강화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체험이 먼저 찾아왔으므로, 이 새로운 발견이 오로지 두 사람만의 것처럼 보였다. - P156

흡연실에서 언뜻언뜻 화제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 싸구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내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젊음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아가씨와 사귀면서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그 젊음을 향해 원숭이처럼 서투르게 손을 뻗는 비루한 중년남자. 번쩍번쩍하게 차려입은 어리석은 광대 같은 그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불편함, 연민, 경멸을 느끼며 웃음을 터뜨릴 터였다. - P158

그들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용서하고, 자신들의 삶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지 생각하 는 일에 빠져 있었다. - P214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 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 P218

스토너의 삶은 뜻밖의 ‘기회‘와 그에 따르는 ‘대가‘에 언제나 공평하게 점령당한다. 그런 그가 계산한 바에 따 르면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대‘와 ‘실망‘의 총합은 결국 0이다. 이 계산 과정은 경이롭도록 정확해서 어 떤 아름다움에까지 이른다. - P221

서술형 수학 문제의 경우 답이 틀려도 풀이 과정에서 부분 점수를 받는다. 인생이라는 문제를 푸는 세상의 많 은 좋은 소설들도 자신만의 오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부분적 옳음을 성취한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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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 - 박서련 일기
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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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작가의 소설은 유쾌했거나 비참해도 통쾌했으며 그게 위로가 되었다.
일기라니 재미가 없을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예쁘고 산뜻하고 재미있는 것들에 대한 나의 직관을 아끼는 사람이고 나는 내 기준에서 너무 벗어나 있고나는 내가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
제일 싫은 건 이렇게 형편없으면서도 죽고싶지 않은 너절함이다.
품위라곤 하나도 없다. - P29

나는 관객이아니었지만 아마 관객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면시즌제 드라마 앞부분을 하나도 보지 못한 채로시즌3의 1화를 보기 시작한 기분이었을 것 같다. - P54

지난 사흘간 내가 쓴 접시가 사실은 디저트접시였고 제대로 된 식사용 접시는 훨씬 크다는 걸알았다. 목적어 없이 배신감을 느꼈다. - P239

"잔고가 20만 원일때랑 200만원일 때랑 문장이 달라요."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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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
김용언 외 지음 / 문예출판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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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천편일률적 독해’, ‘읽기의 진부함’이라는 표현이 있다. 고전을 읽는데 꼭 기성세대의 선견을 간파해야만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상당히 많은 유명한 작가들이나 명사들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인생책으로 꼽는 경우를 봤다. 그런 사람들과 취향이 같으면 스스로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될 것 같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는 해석을 답습하며 억지로 그것을 체화하려 애쓰는 것 같다.

고전도 새로 해석되고, 지금 시대에 맞는 견해로 재평가 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고전이 아닐까 싶다.

본문에서 다루는 책들 중 ‘나자’와 ‘안녕 내 사랑’은 읽어보진 못했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진정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최근에 다시 읽어보고 여성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놀랐던 ‘달과 6펜스’도 그렇고,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명작이라고 추천하기 보다는 망작이라고 소개하는 ‘그리스인 조르바’도 마찮가지다. 이상의 ‘날개’는 특히 저자의 독설이 돋보적이었는데,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

소수자들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는 해석하는 위치를 점령한 주류 서사에 균열을 내는 저항 행위다. - P17

특히나 사회가 여성의 정신세계를 규정하고 단죄하는 방식을 알고 난 뒤에는 과거에 이 작품 이 가진 문제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 P25

필리스 체슬러는 〈여성과 광기>에서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정신병원은 의료기관이라기보 다는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을 바로잡기 위한 처벌, 교정을 담당하는 시설에 더 가까웠다고 지적한다. - P32

이처럼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 ‘길들이기‘에서부터 이미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지 않은, 가축이나 사물과 같은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읽힌다. 남편을 길들인다‘, ‘아버지 를 길들인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이는 없다. - P33

물론 희극이니만큼 모든 장면은 어디까지나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아무리 유쾌한 분 위기로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가 내포한 폭력적 행위의 본질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 P35

성폭력과 여성험오적 언행을 일삼은 예술가들의 실체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는 요즘 (달과 6펜스)와 같은 소설을 어떻게 독해해야 할지 아무래도 고민스럽다. 이 소설에는 여전히 ‘고 전‘이라는 이름의 ‘권위‘가 부여된다. 유명인들의 추천, 권장 도서로 끊임없이 언급되기도 한 다. 하지만 이제는 여성에 대한 시선과 묘사가 모두 참담한 100년 전 소설을 지금 읽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면으로 다뤄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 P44

이 작품이 남성 작가가남성 화자를 통해 쓴 100년 전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 이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여성혐오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 다. - P45

이 책이 모든 유명하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예술가들의 악행에 대한 면죄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P45

세 여성은 오직 스트릭랜드의 판단에 따라 평가되고, 그 의미가 부여된다. "여자에게도 영혼 이 있다는 건 기독교의 망상 가운데서도 제일 터무니 없는 망상이죠 (287)라며 주체로서의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스트릭랜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니 여성 인물은 철저 히 그의 도구로만 재현된다. - P46

이처럼 <달과 6펜스 )는 전기 형식의 글을 쓰는 서술자인 ‘나‘를 등장시켜 독자들이 자연스 럽게 ‘나‘의 생각을 따라오게 만든다. - P47

많은 논술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달과 6펜스>를 읽히고,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이지만, 위대 한 예술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하지만 이는 추상적인 논의에 불과하다.
더 많은 비평과 토론이 이뤄져야 할 부분은 <달과 6펜스>의 여성혐오적 요소 그리고 실존했 던 예술가의 성 착취 행적을 오늘의 관점에서 어떻게 비판적으로 성찰할 것인가이다. - P50

미투 운동은 혁명에 가까웠다. ‘거목‘이, ‘스승‘이, ‘천재‘ 라 불리던 이들이 성범죄자로 전락 했다. - P51

우리는 이 소설이 고갱의 성 착취와 비도덕적 행위를 ‘천재성‘과 ‘비타협성‘으로 덮었다는 사 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의 인기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으로 ‘예술가‘의 표상이 굳어 졌고, 그 표상 속에서 남성 예술가들이 타인을 착취할 자유의 근거‘를 찾았기 때문이다. - P53

평가의 주체는 소설의 서술자인 닉이다. 닉은 개츠비와 데이지를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의 캐 릭터와 운명에 대한 평가, 도덕적 판단 등으로 소설의 방향성과 질감을 결정 짓는 인물이다. - P98

전 세계에 걸처, 세대를 넘나들며, 수많은 사람이 그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을 보았고 영감 을 받았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상당히 늦은 나이게 처음 읽었다. 하지만 왜 내게는 별 감 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매력도 없는지 당혹스러웠다. - P139

좀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나는 자연인이다‘를 꿈꾸는 남성 판타지다. 나약한 지식인 인 ‘나‘가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남자 조르바에게 바치는 열렬한 찬사다. - P139

선악을 넘어, 유일신 기독교를 넘어 타 종교도 품어버리거나 종교 자체를 집어던지고, 인간 과 동물, 아니 세상 만물과 합일을 추구하고, 이성을 향한 과도한 숭배를 가볍게 깨는 조르바 라는 한 인간에 대한 감탄과 경외. 좋다, 다 좋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이 소설을 정리하기에 는 이 영향력 큰 소설에 담긴 여성협오가 너무나 방대하고 일상적이며 강력하다. - P140

조르바는 정확히 그런 ‘나‘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도수 높은 술을 마셔야 하고, 곡괭이 와 타현악기 산투르를 다루며, 단지 하고 싶다는 이유로 특별히 악인도 아닌 광산 시찰원을 패고, 여자는 섹스 상대거나 근심과 잔소리만 제공하는 마누라뿐이라고 말하는 남자. 거친 힘과 생존력을 보여주는 남자가 조르바다. 도둑질도 해봤고 사람도 죽여봤고 거짓말도 해봤 고 계집들도 무더기로 데리고 자본 사람, 계명이라는 계명은 깡그리 어긴 인간‘인데, 그러면 서도 하느님을 접내지 않는다. 특히 섹스에 관해서라면 말이다. 하느님이 미쳤다고 지렁이 앞에 앉아 지렁이가 한 것을 꼬치꼬치 캔답니까? 그리고 그 지렁이가 이웃에 있는 암지렁이 를 피어 먹고 금요일에 고기 한 입 먹었다고 화를 내며 질책할 것 같소? 염병할!"(339) 그렇 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하느님은 개의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조르바의 거침없 음에 뒤통수를 맞은 듯 환호하는 모양이다. 이런 성적 해방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었다면 나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르바는 자신을 포함한 남자들의 성에는 신의 관대함 을 역설하면서 여성의 성은 ‘악마‘와 연결한다. - P141

그런 그가 두려워하는 게 딱 한 가지 있다. 바로 나이 먹는 것이다. 그는 늙는 걸 창피하게 여 긴다. 그래서 기침도 참고 등이 아파도 안 아픈 적한다. 세상에 여자가 너무나 많아서 그녀들 을 두고 죽을 걸 생각하면 억울해 미치겠단다. - P142

‘나‘가 조르바를 찬양하는 대목을 보면 ‘나‘에게 모든 것을 경험한 남자에 대한 동경, 세상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겪어 깨닫는 남자에 대한 동경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P142

크레타섬에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 난 후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든 이는 조르바였다. 이성을 동경하고 이성으로 살아가는 ‘나‘의 육체는 어디에 있는가? 육체와 정신으로 엄격히 분리된 이들의 브로맨스. 사랑과 우정의 경계. 왜 이 둘은 화해하거나 결합할 수 없을까? - P143

이 책에는 여성에 대한 온갖 정의가 넘쳐난다. 그런데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는 모두 욕이다.
여성에 대한 욕 없이는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다. 책에 나온 표현만 나열하자면 여 자는 절대로 만족할 줄 모르는 ‘더러운 암캐‘이거나, ‘사내만 보면 발정‘이 나고 ‘돈으로 기를 죽여주면 좋아‘ 하는 ‘암컷‘, ‘꼬랑지에 기름이 잔뜩 오른 암양‘,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 하는 사람을 ‘암캐처럼 촉촉한 코를 내두르며‘ 분간해내는 ‘화냥년‘이다. ‘오직 성적 욕망과 남자로부터 받는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하고‘, ‘악마의 불‘로 만들어져서 남자를 못살게 구는 존재이며, ‘새벽이면 수컷을 잡아먹을 곤충의 암컷‘과도 같고, ‘몽땅 빨아먹어‘ 버리는 통에 사자도 겁내는 ‘이‘와 같은 존재다. 그뿐인가? ‘샴페인과 과자, 재스민‘을 사주면 누구나 여 자를 무릎 위에 앉힐 수 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씨받이 암말‘, ‘잡것‘, ‘잡년‘, ‘암소‘‘늙 은 세이렌‘ 늙은 물개‘, ‘골이 빈 것‘들이자, ‘찢어진 깃발 같은 넌‘이고 천 번을 깔려도 처녀 로 다시 살아나는 ‘요물‘이다. 여기에 강간 판타지가 덧붙여진다. 남자가 덮치면 ‘악을 쓰며 제 얼굴을 제 손톱으로 할퀴며 사내에게 달려들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눈을 감고 콧노래 를 부르‘는 ‘어쩔 수 없는‘ 존재다. 다른 무엇보다 남자는 ‘자유를 원하는 인간‘이지만 ‘여자 는 자유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남자와는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다고 조르바는 말한다. 물론 여자가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지만, 설사 그렇다 쳐도 그는 왜 여자가 감히 자유를 원할 수도, 꿈꿀 수도 없는 상태에 놓였는지 성찰하 지 않는다. 성찰은 그의 몫이 아니라 ‘나‘의 몫인데, 성찰만 하는 ‘나‘는 성찰하지 않는 인간 조르바에 홀딱 빠져 있기 때문이다. - P143

그가 보기에 남자와 여자의 화냥기는 다른 가치를 지닌다. 그에게 여자의 ‘화냥기‘는 ‘악 마의 속성이어서 욕먹어도 싼 일이나, 남자의 ‘화냥기‘는 ‘야성‘이며 대지와 하나 되어 펄펄 끓는 정열이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조르바는 자기 할머니가 여든 살에도 젊은 여자를 흉내 내며 매트리스를 창가에 깔고 남자가 세레나데를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고 말하며 늙은 여자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다. 할머니는 손자의 모욕에 충격받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 다. 정작 조르바 자신은 죽을 때까지 여자와 자고 싶어서 늙는 게 억울해 미치겠다고 하면서 도 늙은 여자가 사랑을 꿈꾸는 건 용납할 수가 없다. - P144

여기서 우리는 이성이 마비되고 본능만 비대하게 부푼 육체 앞에 무릎 끓는 남자를 본다. 하 지만 책은 그게 ‘자유‘라고 외친다. - P147

그가 설정한 ‘육신의 현현‘인 조르바가 순전히 왜곡된 남성성이라는 판타지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거칠 것 없이 페니스를 휘두르며 자유인이라 주장하는 상상 속 남성성. 평생 책상 앞에서 ‘나‘가 했다는 공부와 성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P148

이 책이 영리한 건, 여성험오적 대목을 인간에 대한 연민과 뒤섞어놓는다는 데 있다. 천박한 욕망덩어리인 데다 화려한 과거를 놓지 못하는 늙고 뚱뚱한 ‘퇴물 창녀‘를 ‘자유인‘ 조르바가 인간에 대한 크나큰 ‘연민의 마음‘으로 품어주듯이 묘사하는 것이다. 조르바는 천하의 바람 등이 제우스도 단지 여자를 위해서 섹스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신화에서 제우스는 여자와
‘섹스‘한 게 아니라 여자를 ‘강간‘ 한 것임에도 ‘여자를 위해‘ 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P149

자신의 성욕을 ‘자연‘, ‘정열‘, 심지어 불쌍한 여자를 위한 ‘봉사‘로 왜곡하던 조르바는 남자 의 성욕은 좀 더 모호한 표현으로 미화한다. "인격으로서의 여자는 사라지고, 젊든 늙든, 아 름답든 추하든(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식에 불과했다) 용모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 았다. 모든 여자 뒤에는 위엄이 있고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이었다"(64)라는 대목은 섹스만 할 수 있다면 여자의 용모나 천박함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 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어떤 여자든 자신이 그 안에 있는 신성을 본다는 의미로 독해할 수도 있다. 이로써 조르바의 성욕은 자연의 순리이자, 정열이며, 자유를 꿈꾸지 못하므로 인 간이 될 수도 없는 존재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껴 자기 한 몸 불살라 마지막 한 방울의 정액까 지 쏟아내는 살신성인의 정신이자, 끔찍한 암컷에게서도 신성을 보고 봉사하는 고귀한 정신 으로까지 승화된다. - P150

상상속 남성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책의 주인공들은 여자 앞에서는 울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왜곡하고, 여성을 타자화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자존감과 우월감을 지켜낸다. - P151

한국 사회에서 일제시대 지식인들의 작품이 (무조건) ‘저항성‘ 위주로 독해되는 상황을 환기 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 P157

나는 이상 작품을 읽는 방식의 변화가 곧 한국 사회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독서는 독자의 의 식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 P159

경제 발전은 허버트 마셜 매클루언의 책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처럼, 몸의 확장the extensions of man, 즉 에고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매체(도구)의 발전은 인간 신체의 기능 을 몸 외부로 이전했고 인간은 자신이 발명한 매체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것이 에고 인플 레이션이다. 확장된 자의식은 타인과 자연에 대한 성찰을 어렵게 한다. 한계 없는 자본주의 (매체의 발달)로 지구 생태계는 무너졌고, 전 인류의 일곱 명 중 한 명이 물• 식량• 잠자리가 없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 사이토 고혜이에 의하면 1800년대 이후 사용한 화석 연료 중 절반은 1989년 냉전 체제 이후에 소모되었다. 이 모든 게 겨우 30여 년 동안 벌어진 일이 다. 최상위 부자 스물여섯 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의 재산과 같다. 코로나가 초래한 재난 편승형 자본주의로 2020년 봄 미국 초부유층의 자산은 687조 원 늘었다. - P161

노동하지 않고, 무능하며, 여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면서도 여성 부양자를 미워하거나 두 려워하며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20대 남성 현상‘의 기시감을 <날개>에서 본다. - P161

분노 표출 방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한국 사회 - P162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인터넷 사용 시간과 한중일의 민족주의를 비교한 연구에서 민족주의적 ‘감정‘이 아니라 실업이라는 시간적 조건이 민족 간 갈등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자원이 많은 남성 혹은 매우 바쁜 글로벌 시티즌 남성은 아무래도 컴퓨터 앞에 앉아 미소지니를 실천할 시간이 많지 않다. 실업으로 인한 남는 시간이 한중일 민족주의의 소모전을 낳았다. - P162

계급이 낮고 자원이 없고 노동하지 않고 심리적으로 취약한 남성의 약자 혐오인 미소지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P162

남성이 노동하는 여성, 경제력 있는 여성에게 ‘빌붙어‘ 살 때 그들은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다. 오히려 분노(아내 폭력)와 무기력증(<날개>)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 P162

말할 것도 없이, 소설이 허구라는 말은 소설이 ‘없는 현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현실은 재 현을 통해서만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 재현 방식에 따라 ‘창작과 비평‘, ‘소설과 비소설‘ 같 은 비본질적인 구분이 만들어진다. 재현은 글쓴이의 시각, 정치학, 관점, 경험의 해석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 P164

지배계급 남성들이 피지배 남성들의 분노와 불만을 해소하고 이를 남성 연대로 봉합하는 방 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성을 공급하는 것이고(성 산업 활성화, ‘농촌 총각 결 혼시키기‘ 등), 하나는 ‘공공의 적‘인 ‘외세‘와 같은 범주를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거래 대상 인 물건(여성)이 행위성을 발휘하거나 지배계급 남성이 자신을 실제로 구원해주지 않을 때 발생하는 피지배계급 남성의 좌절감이다.
그런 피지배계급 남성의 목소리가 바로 <날개>다. <날개>는 치욕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낸‘ 남성 심리의 원형이다. 자신이 존재가치가 없는 남성임을 깨달은 남성 지식인이 현실에 대처 하는 방식은 자기 조작making이다. ‘가난한 천재‘가 대표적이다. - P173

심지어 한국이 경제 부국이 된 이후의 젊은 남성들도 "여자는 몸이라도 팔 수 있지. 우리는 아무것도 팔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자원이 되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피 해의식이 혼재된 정신 분열 상태다. - P174

타자화는 발화자 자신에게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자신을 설명하는 데 타인을 동원하는 폭력이다. - P178

한국 문학사에서 이상이 이룬 문학적 성취에 동의한다. 내가 불편한 점은 콘텍스트context, 즉 그의 작품에 대한 변화 없는 해석이다. 그의 문학은 한국 사회에 갇혔다. 그런 의미에서 <날개>는 죄가 없다. 지금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다시 읽기가 필요할 뿐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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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북촌 서촌 - 인왕산 아래 궁궐 옆, 아파트엔 없는 생활
심혜경 외 지음 / 에이치비프레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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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은 화자가 북촌의 집과 동네에 대한 본인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공동주택을 벗어난 삶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다만 본인들의 선택에 정당성을 애써 부여하고자 아파트 생활을 너무 평가절하한다면 그들의 생활은 다수의 역공을 받을 수 있으니, 서로의 선택을 존중해주면 좋겠다.

2장부터는 거의 북촌여행가이드에나 나올 법한 수준의 소개글이나 다름없다. 일기라고 보기엔 세부묘사가 과하고, 에세이라고 하기엔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서술이라 빠르게 넘겨 보았다.

돌이켜보니 자신의 인생은 지나치게 우발적인 선택의 연속이었다고. 자신은 고민거리가 생 기면 선택할 수 있는 수백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떨까, 각각의 장단점 을 비교하는데, 문제는 정작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 수백 가지 옵션들에 없었던 이상하고 엉 뚱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 실컷 합리적인 척하다가 끝에는 충동적인 선택만 하는, 그런 자신 이 너무도 싫은데 도대체 매번 왜 이러는지 모르겠단다. 일종의 자아비판인 셈인데, - P25

이런 이사를 몇 번 반복하면서 얻은 결론은 집의 면적을 줄여야 짐의 부피가 줄어든다는 것.
그동안 고정불변의 원리처럼 떠받들어 모시던 ‘정리 = 수납‘이라는 공식을 살짝 비틀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수납공간을 늘리면 물건 정리가 쉬워질 것 같지만, 관리해야 할 공간이 더 넓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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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같은 삶의 자세로 서있다가 고통받았던 젊은 청춘들을 위로한다………

그는 정말로 이기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면 누구나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팔씨름이 낚시에 소중한 오른손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P60

「나쁘지 않아.」 그는 말했다. 「고통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 P71

너무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 P85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 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 P85

바라는 게 너무 많군. 하지만 그게 지금 내가 바라는 거야. 그는 키를 조종하는 데 더 편안한 자세를 잡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고통 덕분에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 P95

그런데 이 여자는 그가 알았던 여자들 중에서 제일 돈이 많았다. 이 세상의 돈은 다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남편과 자식들이 있었으며, 애인들을 사귀었으나 그들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이 여자는 작가로서, 남자로서, 동반자로서, 멋진 소유물로서 그를 굉장히 사랑했다. 그건 정 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이 여자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때, 그는 여자에게 훨 씬 더 돈값을 해주었다. 그가 진실을 말하면서 여자를 사랑할 때보다 말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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