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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읽을 수 없는가 - 인문학자들의 문장을 돌아보다 ㅣ 메멘토 문고·나의 독법 1
지비원 지음 / 메멘토 / 2021년 6월
평점 :
‘독서‘를 하지 않는 것은 꾸준한 논란거리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들이 꾸준히 나오는 중에 이 책은 ‘어떤 책’이 나와야 하는가에 대해서 논지를 펼친다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가 ‘책‘ 이전에 쉽게 접하는 글 이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기사와 평론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학술서도 아닌 기사나 논평들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지식이 기초적인 수준이 아니라서, 대중의 접근성을 차단하고 있다.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정작 글쓰는 사람들에게 ‘독자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 독자들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글‘이 어려워 졌는가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정말 멘탈을 뒤흔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우리가 배우는 국민공통교과의 과목들의 이름이 일본에서 번역한 말이라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상식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목명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많은 한자어들이 일본이 서양 문물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일본식의 한자어라는 것을 알면 많이 놀랄 것이다. 본문에 예시로 들어준 박물관, 경제, 민주, 정부, 사고 등 상당히 많은 용어들이 일본식 번역이다. 이런 일본식 번역어의 문제는 우리가 이런 기초적인 개념들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Economy를 경제라고 번역하는 ‘언어 간 번역’만 이뤄져있고 Economy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언어 내 번역’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카세트 효과‘ 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의 위상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있는 말, 그리하여 사람들이 익히고 활용하면서 존중받는 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19p.)
그래도 지금에 와서 일본 내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번역어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기원을 생각해보고 새롭게 풀어쓰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본의 번역어를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음독하여 사용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유래를 파악하려면 일본의 힘을 빌어야 하니 국민의 정서가 심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어나 일본식 표현을 순화하는 운동도 일본식 발음만 순화할 뿐, 이러한 일본식 한자어는 손댈 수 없어 결국 이 난제를 덮어버리고 마는 것이 이차적인 문제이다.
‘개념을 음독하여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개념의 기원과 역사성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하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저 말들은 한국어인 척하지만 원래 한국어가 아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카세트 효과‘의 기능만 강하고, 실제로 카세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개념의 역사성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기 때문에 오히려 개념을 신중단지모시듯이 하면서 ‘바꿔서는 안되는 , 불면의 무엇처럼 생각한다는 점’ (161p.)
나 같은 대중들에게 책이란 것이 왜 어려운가를 명쾌하게 답해준 책이었다. 물론 해결책은 없다.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문제 때문에 이 난제는 더 풀기 힘들어질 것이고, 카세트 효과로 있어보이고 싶은 대부분의 불친절한 지식인들로 인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해서 미진한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뒤늦게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런 글들은 ‘사람을홀리기 위한 글이라는 측면에서 일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측면 때문에 인문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거나 폄하되는 경향이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써볼까 하고 덤비는 잘 쓰인 광고성 글‘의 ‘경제적 가치는 어떤 사람들이 더 나은 가치를 지녔다‘ 라고 생각하는 다른 글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다. - P33
세계화 담론을 주도한다는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프랑스의 구조주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번역서가 ‘신서‘로서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 있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지금보면 분명 공부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의 책꽂이에 가깝겠지만, 1980년대에는 이런 책들을 새롭게 익혀야 할교양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신서뿐만 아니라 당시 이와 유사한 성격의 책을 출간한 유명 출판사들의 출간 목록을 보고 있자면, 학술과 교양을어떤 식으로 구분했는지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 책들이 담았던 지식과 문장의 자장에 오늘날의인문학과 교양이 아직까지도 휘둘리고 있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한편으로는 신서의 세례를 받은 특정 세대의일부 구성원이 왜 저 책들을 읽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며, 어떻게 저 책들을 다 읽어냈는지 정말 존경스럽기도 하다. 반면 어렵고 까다로운 학술서들을 공부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교양으로 읽은 이들이, 학술의 세계와 일상 세계를 좁히는 측면에서의 ‘교양‘을 어떤 문장과 내용으로담으면 좋을지를 보여준 모범이 될 만한 책은 읽지 못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야 그들에게 전공과 상관없는 학술서가 ‘신서‘로서 교양을 담당했고, 그런 배경에서 써온 논문 아닌 글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 P75
그 완고함의 근원에는 결국 ‘그 언어가 유래한 뿌리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언제부터 써왔는지,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언어 내 번역도 거의 불가능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 변화하는 시대·사회·언어와 동시대적으로 호흡하지 못하는 완고한 상태.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라는 안일한 전제, 배경지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한 ‘우리‘를 대상으로 삼지만 정작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리’ 공부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을 필자 스스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문장 안에 그대로 가져오는 글쓰기 습관. 이것이 내가 그동안 부족하나마 여러 인문교양서를 읽으면서, 또는 읽으려고 애쓰면서 생각하게 된, ‘인문학이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상당히 많이 발간된 철학 안내서, 사상가입문서나 해설서 같은 책이 인문교양서의 주류 자리에서완전히 밀려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또 공감도 하는데 말이다. - P99
어원을 밝히는 작업은인류가 최초로 어떤 현상을 인지했을 때 이를 어떤 식으로 파악했고, 현재와 어떤 공통점 혹은 차이점이 있는지, 공통점이 있다면 이를 어떤 식으로 재구성해 왔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과거에는 어떤 현상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개념화했는지, 그것이 지금도 유효한지를 살펴보는 작업이다. 그런데 보통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한국어 사이에 언어 하나가 더 들어가야 함을 많은 이들이 모르거나 일부러 외면하는 듯하다. - P110
게다가이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일제의 잔재‘를 없애려고 노력해왔다. 그중에는 ‘일어 순화‘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늘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꿀 수 있는 말을 바꾸어쓰려는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싶은 것은 바꿀 수 없다고 생각되는 말은 외면해버리는이중 잣대다. - P112
굳이 따지자면 나는 어떤 개념의 번역보다 그 개념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말에는 만드는 사람의 자의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의성을 보편성으로 만드는 게 이를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믿는다. 현재 한국 인문사회계 학술 용어의 현황은 이 자의성‘의 역사성에 대한 성찰이 부족할뿐만 아니라, 이를 더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하려는노력도 부족하다. 현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이 보편적인 학술 용어다‘라는 인식뿐이다. 이래도 괜찮은지, 학술 용어의 기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늘 걱정이앞선다. 이 말들은 정말로 한국어인가? 한국어라면 어떤논리와 근거로 한국어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음독하여들여오는 것도 번역이라면 번역 가운데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는 번역인가? 음독하여 들여오는 번역을 인정한다면 이는 중역인가, 아닌가?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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