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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의 빛 : 시인이 말하는 호퍼 (리커버)
마크 스트랜드 지음, 박상미 옮김 / 한길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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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의 그림은 고독과 우울, 그러면서 평안한 분위기가 주는 위로와 안식이었다. 그런 감상에 더해 기하학적인 요소에 눈 뜨게 해준 책이었다.

우리는 원인도 결과도 알 수 없는 어떤 현상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그늘 속에서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과 우리 사이에 놓인 무언의 장벽을 바라보며 숙고하는 일뿐이다. - P53

내면으로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그림의 주된 방향과 엇갈리고 있어서, 기차간의 갇힌 속성에서 자유로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안에서밖으로 나갈 수 없는 동시에 밖에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듯한느낌은 「나이트호크」에서 경험했던 그 느낌,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다가는 머무르게 하는 느낌과 유사하다. 이것은 호퍼의 그림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양식으로, 서사성의 의도에 회화적인 기하학적 요소가 반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P71

호퍼의 빈 공간
호퍼의 그림은 짧고 고립된 순간의 표현이다. 이 순간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암시한다.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증거보다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호퍼의 그림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이 연극적일수록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지고, 그림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떠나지 않을 때, 그림은 우리를 더욱 끌어들인다. 어차피 우리는 캔버스를 향해 다가가거나, 아니면 거기서 멀어지는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우리 자신을 자각하고 있다면 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호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들로 채워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vacancy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어두움은 우리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 있다고 말해준다. - P50

나는 앞에서 호퍼의 빛은 이상하게도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대신 그의 빛은 벽이나 물건에 달라붙어 있는 듯하다. 마치 그곳에서 조심스럽게 잉태되어 고른 색조로 우러나오는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여기서 색조란 명암을 포함한 색의 효과를 의미한다). 화가인 내 친구 베일리William Bailey가 언젠가 호퍼의 형태는 빛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난 그 말에 동감한다. 호퍼의 그림에서 빛은 형태에 드리워지지 않는다. 그보다 그의그림은 형태를 가장한 빛으로 구성된다. 그의 빛, 특히 실내의 빛은그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신빙성이 있다. 모네의 빛과는 정반대다. 모네의 빛은 사방으로 맹렬하게 퍼지면서 모든 것을 비물질적으로 만든다. 그의 그림 속에서 루앙 성당의 장엄한 파사드는 웨딩 케이크처럼 부서질 듯하고, 견고한 석교인 워털루 다리는 푸르스름한보라빛의 안개 같은지 생각해보면 된다. - P58

호퍼의 그림은 즉흥적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계획된 것이고, 그의 빛은 축하의 빛이라기보다는 기념의 빛이다. 그의빛이 기하학적인 견고성을 갖추게 된 것은 빛이 흩어지지 않도록빛에 어떤 생명을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은오히려 빛이 저항하고 있는 대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빚은 결국 어둠이라는 더욱 강한 세력의 휴지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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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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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워터퍼드의 다가회에서 스트릭랜드 부인을 처음 만난 화자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초대로 그녀의 집에서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만난다. 증권 중개인이었던 스트릭랜드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상이 남았지만 어느 날 그가 돌연 스트릭랜드 부인을 두고 ‘브리지’ 클럽의 술집 여자와 파리로 떠났다는 소식을 워터퍼드 부인에게 전해 듣는다. 스트릭랜드 부인을 찾아간 화자는 그녀의 부탁으로 파리로 향해 스트릭랜드의 행방을 찾아나선다. 파리의 호화스러운 호텔에서 지낸다는 소문과는 달리 스트릭랜드는 허름한 여관에서 기거하였고 클럽에서 만났다는 여자도 없었다. 찰스는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 먹었다며 클럽에 간 시간들은 사실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는 의아한 소리를 늘어 놓는다. 자기의 부인과 자식들에게는 전혀 미안한 마음과 미련이 남아있지 않다며 매정하고 무관심한 태도에 화자는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화자는 영국으로 돌아와 스트릭랜드의 소식을 부인에게 전달하지만 여자 문제가 아닌 사실에 스트릭랜드 부인은 더 큰 충격을 받으며 찰스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5년 뒤 화자는 진부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파리로 향했고, 4년 전 로마에서 만난 화가 더크 스트로브를 만나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방을 물어보았더니 더크는 찰스의 예술적 재능을 극찬하였다. 하지만 찰스는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지는 못한 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태도 역시 5년 전과 다를 바 없이 냉철하고, 부탁도 뻔뻔스럽게 요구하는 등 화자는 연민이나 동정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더크만큼은 스트릭랜드의 멸시와 냉소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베풀었는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더크는 화자와 자신의 부인 블란치와 함께 기념일을 보내자는 제안을 한다. 스트릭랜드를 찾아간 더크와 화자는 그가 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알았고, 블란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크는 그녀에게 찰스의 병간호를 부탁한다. 스트릭랜드는 블란치의 간호를 받으며 병을 회복해가다 더크의 작업실을 점점 독차지하는 듯하자, 더크는 그만 집에서 나가주기를 요청한다. 그러자 블란치가 갑자기 찰스와 함께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더크는 블란치가 스트릭랜드를 간호하다 그에게 빠져 버린 것을 알았고,, 그녀를 내쫓을 수는 없다며 부인을 설득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 버린다. 하지만 블란치는 결국 찰스와 다투고 자살기도를 하다 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사망하고 만다. 더크는 블란치가 죽자 네덜란드로 떠날 결심을 한 와중에 자신의 집에서 스트릭랜드가 그린 블란치의 누드화를 보며 감동하고는 찰스에게 자신과 함께 네덜란드로 떠나자는 제안도 한다. 한편, 스트릭랜드를 우연히 만난 화자는 그가 블란치에 대한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며 그를 한층 더 경멸하게 되었다. 찰스는 화자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겠다며 작업실로 데리고 갔고, 화자는 그의 그림을 보며 대단한 감명을 받지는 못하지만 묘한 감상을 느낀다. 그 뒤 찰스는 마르세유로 떠났고 화자는 다시는 찰스를 보지 못했다.
찰스는 죽은 뒤 애호가들의 칭송을 받는 작가가 되었고, 화자는 그를 알고 지냈던 사이인 만큼 그가 마르세유로 떠난 뒤의 행적을 찾아 마르세유로 향한다. 마르세유에서 찰스 스트릭랜드를 알고 지냈던 캡틴 니컬즈와 터프빌을 통해 그가 타히티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토착민인 아타를 만나 평생을 함께한 여정을 듣는다. 찰스는 타히티에서 티아레 존슨의 소개로 아타를 만나 토착민에 가깝게 그곳 생활에 동화되어 살았고 오두막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쿠트라 의사를 만나 말년에는 찰스가 문둥병에 걸려 죽어간 이야기를 들었고, 아타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는 얘기를 듣는다.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따르는 자유분방한 예술가에 대한 소설로 기억에 남았지만 이번에 재독할 때는 자유로운 영혼의 방랑보다는 여성들은 다소 거친 나쁜남자를 선망한다는 남성주의적 시각이 두드러져 보였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스트릭랜드가 순수한 예술적 열망에 자신을 버린 것이 바람피우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라는 말부터 시작해, 더크같이 여성에게 헌신하는 남자를 견딜 수 없다며 매정한 스트릭랜드를 따라나서는 블란치와 그녀를 대하는 스트릭랜드의 태도가 그러하다. 특히 말미에 티아레는 자신의 첫번째 남편 존슨선장에게 폭행을 당했지만 두번째 남편이 자신을 극진히 대하는 것을 보며 끔찍했다고 발언하며 스트릭랜드와 스트로브를 상징하는 듯한 구성까지 다소 왜곡된 시각이 두드러져 보였다.
자신의 영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들이 이제는 너무 흔해져서 그런지 새로울 게 없다. 스트릭랜드의 행동은 더이상 평범한 사람들에게 영적 자유를 고취시키지 못한다. 제멋에 빠져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나르시스트에, 사후 예술작품은 갤러리들의 스토리텔링 마켓팅에 성공한 작자의 소설이라는 게 지금 시대의 해석이지 않을까.

부인의 상심 가운데에는 버림받아 괴로워하는 마음과 자존심을 상해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내젊은 마음에는 그런 자존심이 야비하게 여겨졌다――뒤섞여 있지 않나 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 P56

나는 남들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에서 오는 허세이다. 그것은 남들이 자신의조그만 잘못들을 비난할 때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들은 아무도 그 잘못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철석같이 믿고 있다. - P76

나는, 양심이란 인간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敵)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행위가 불러일으킬 비난에 정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무서운 사람을 피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인간이랄 수 없는 괴물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고 뒷걸음 치듯. - P78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의 인격이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훌륭한 여자에게 그토록 깊은 앙심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가슴이 아팠다.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 P85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 P90

근사한 말은 할 줄 몰랐지만 정곡을 찌르는 신랄한 야유를 할 줄 알았고, 자기 생각을 늘 정확하게 표현했다. 남의 감정이란 도무지 고려할 줄 몰랐고, 상대방이 상처를 받으면 오히려 즐거워했다. - P117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잊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도――머리로는 알지 모르나―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 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 사랑에 감상이 전혀 배제된다고는할 수 없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어느 누구보다 그런 약점에빠질 위인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무엇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는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그런 상태를 견뎌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외부의 낯선 속박을 견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미지의 어떤 것으로 몰아가는 그 불가해한 갈망을 방해하는 것이 혹시 자기 안에 들어와있다면, 어떠한 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결국은 만신창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방해물을 가슴속에서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인간 같았다. 내가 스트릭랜드에게서 받은 그 복잡한 인상을 이제까지 조금이라도 성공적으로설명했다면, 내게는 그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위대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너무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해도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애정에 대한 개념이란 개성에 따라 형성되기 마련이라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한다.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에게도자기 나름의 사랑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감정을 분석해보려 하였으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 P160

「저기 담벼락이 보이나요?」나는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렇소만」
「그게 보인다면 내가 댁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 P195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치 이국 땅에 사는사람들처럼 그 나라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온갖 아름답고 심오한 생각을 말하고 싶어도 기초 회화책의 진부한 문장으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들과 같다. 머리 속에는 전하고 싶은생각들이 들끓고 있음에도 기껏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정원사 아주머니 우산은 집 안에 있습니다〉 따위인 것이다.
결국 내가 받은 인상이란 정신의 어떤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는 거대한 안간힘이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를 그처럼 당황하게 만든 원인도 바로 그러한 면에 있는 것 같았다. 스트릭랜드에게는 색채와 형태들이 어떤 특유한 의미를 지님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가 느낀 어떤 것을 전달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없었고, 오직 그것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그림들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찾는 미지의 그것에 좀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단순화시키고 뒤틀었다. 사실(事實)이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와는 관계없는 무수한 사실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만을 찾았다. 우주의혼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해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그림들에 혼란과 당혹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 있는 정서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스트릭랜드에게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억누를 수 없는 어떤 공감이었다. - P212

사랑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남자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그런 남자들은 별 재미가 없다. 사랑을 지상(至上)의관심사로 삼는 여자들도 그런 남자를 경멸한다. 하기야 그런 남자들 덕분에 여자들은 기분이 우쭐해지고 자극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이 좀 덜 떨어진 인간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갖는 것이다. - P219

나는 예술이란 성적 본능이 구현된 것이라고 본다. - P220

누군가 뜻하지 않은 행동을 하면 주위사람들은 아주 망측한 동기를 찾아내는 법이다. - P225

무엇인가 가슴을 뒤트는것 같더니 돌연 어떤 환희의 느낌, 벅찬 자유의 느낌이 가득 차오르더라는 것이었다. 내 집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서 단 한순간만에, 그는 나머지 인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내겠노라고 결심을 하고 말았다고 했다 - P256

정말 아브라함이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을까? 자기가 바라는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사 작위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어찌 감히 말대꾸를 하겠는가. - P260

토박이든 유럽인이든 이곳 사람들은 그를 괴짜로 보긴 했지만, 워낙 괴짜들을많이 보아온 사람들이라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세상은 이상한 짓을 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는것, 사람은 자기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생겨먹은 대로 된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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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코리아 The Big Issue No.294 - (표지 : 유튜브 채널 <하랑스토리>의 고양이 토리) 빅이슈 코리아 2023년
빅이슈코리아 편집부 지음 / 빅이슈코리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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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가 2010년에 창간을 했다니 그 숫자에 감회가 새롭다. 대학교 3학년 때 한 교수님의 소개로 알게 된 잡지였는데, 창간 후 꼬박 3-4년을 매번 빅판을 볼 때마다 구입을 해서 보았다. 그러다 이상을 쫓는 대학생 신분을 졸업하고 직장인이라는 때가 묻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은 더러워졌고, 사회적이라는 단어는 사치라는 범주에 넣어두고는 모른 척 해버린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인가.
안국역을 지나가다 고양이 사진에 끌려 구입하게 되었다. 요즘 누가 종이 잡지를 보나…. 3천원이던 가격이 5천원이 되더니 이젠 7천원이 되어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아직까지 살아남아 준 잡지에 감사하다.

여전히 누군가는 ‘사회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인권을 끝없이 옹호하고, 환경에 대한 희망도 버리지 않으며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세상에 맞서고 있다. 내가 얼마나 자기합리화를 반복하며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버렸을까. 여전히 만족할 줄은 모르지만 그래서 먹고 살 만해졌다. 나는 비겁하고 옹졸하더라도 여전히 자신을 내던지고 ‘활동’하며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응원하고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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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생활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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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단편은 타인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단편들은 관계에 대한 염증이 곪아 버릴 정도로 타인을 혐오하게 만들기도 한다.
‘너’라는 타인은 대체 나에게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편견과 추측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무례한 호기심과 관심의 극단을 보여주는 ‘자정 무렵’과 ‘아는 언니’는 이 소설집의 진미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는 ‘너’처럼 저런 의견들이 힘과 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상의 모든 일이 그냥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다…

생각해 보니 김혜진의 소설은 중장편만 봤지, 단편집은 처음이었다. 몇몇 수상작품집에서 시커먼 먹지같은 소설을 봤고, 보고 나면 이상하게 그 먹지가 점점 밝아져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런 느낌은 작가의 글에서 느껴지는 동질감에서 오는 공감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조수석에 앉은 채 차창을열었고 차가운 바람을 들이마셨다. 어떤 의도 같은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네가 한 말의 의미를 자꾸 요리조리 돌려보게 됐다. - P28

서른 중반이 다 되도록 아무 요령도, 준비도 없이 살아왔다는생각은 차츰 잦아들었다. 네 눈엔 틀림없이 내가 무능하고 한심하게 보였을 거라는 생각도 점점 옅어졌다. 끝까지 남은 건, 멀쩡한동네에 재개발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기대감을 전염시키고 십 년이 넘도록 그곳 사람들을 끙끙 앓게 만드는 게 바로 너 같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 P29

너는 길고양이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고 요령 있게 집을 사고팔며 차익을 남길 줄 아는 사람이고 내게 아무런 경계심 없이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고, 누구나 관심 있어 하고 궁금해할 정보를 대가 없이 공유하는 사람이고 낡고 오래된 것들은 말끔히 부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몇날 며칠씩 오지 않는 고양이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결코 내가 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35

누군가 취업이 됐다는 소식을 들으면몸과 마음이 한없이 위축되던 시기였다. - P54

다행이다. 그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행이라니.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않는다.
그러나 한밤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들 무렵에는 이만하면 나쁘지않고, 어쨌거나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하자, 헤어지자, 내내 벼르듯 쥐고 있었던 그런 말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내일은, 모레는, 더 좋아질 거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오 년이 지났구나, 이대로 십 년이 가고 또 십 년이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에 오싹해지면서도 네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없이 놓아버리고 그만두고 포기하고 싶으면서도, 끈질기게 너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거듭 확인하는 지금의 생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P86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다. 나도 잠자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듣다보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싶은 이야기들이고나와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나와 너의 의견을 묻고 동의를 구하고 싶은 눈치다. - P106

내 설명을 듣고서도 사람들은 그래도 대우나 조건이 비슷한 거 아니냐고 알은체를 한다. 나는 몇 차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보태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버린다. 사람들의 추측과 짐작들이 내 처지와 형편을 마음대로 상상하도록 내버려둔다. - P107

어쨌든 누구든 결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여기저기서 들은 외국의 사례들을 들먹이기까지 한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모두가 흥분하면서 해야 할 이야기일까 싶은데도 도무지 그만둘 기미가 없다.
그게 뭐 중요한가요.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죠.
내 입에서 문득 그런 말이 튀어나온다. 이쯤에서 다들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분위기는 묘하게 더 경직된다. - P109

사람들은 우리와 나란히 서 있다가 한꺼번에 갑자기 몇 계단 위로 뛰어올라간 뒤 우두커니 우리를 내려다보고, 또 갑자기 우르르 몇 계단 아래로 내려선 다음 멍하니 우리를 올려다본다. 그 바람에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그들보다 아래였다가 위였다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와 나란히 서 있는 건 해본 적도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 같다. - P110

나는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물리치듯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곳에 앉아 네 입장이 생략된 일방적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네가 정말 그렇게 했다면 내가 다 알지 못하는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고,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 P159

이후 몇 번인가 너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 이야긴 꺼내지 못했다. 어쨌든 말을 시작하면 결국엔 내가 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에게 이런 원망과 비난을 들어야 하는지, 다시금 너를 탓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옳고 그름을 따지고 훈수를 두면서 주제넘은 이야기를쏟아내게 될지도 몰랐다. - P160

네가 신경도 쓰지 않고, 도움도 주지 않아서 내가 다 망하게 생겼다.
나는 네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을 우회적으로 토로하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시금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또 나를 지목하며 원망을퍼붓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순간 내가 확인한 건아주 가까운 사람을 탓하는 네 오랜 버릇이 여전히 너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이었고 그것이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웠다. - P164

너와의 관계는 왜 이렇게 계속 이어져온 것일까. 완전히 연락이 끊어지고 그래서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서로에 대해 편안한기억만을 나눠 가질 수 있었는데. 나는 왜 겁도 없이 네 연락을 받고, 안부를 듣고, 네 삶에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걸 포기하지못한 것일까. - P172

내가 한 마디를 하면 언니가 두 마디, 세마디를 했다. 누구나할 법한 이야기이고 틀린 말이 아닌데도 듣다보면 묘하게 기분이상했고 뭔가 말을 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대화는 적당한 속도로 차분하게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덜컹거리며 엉뚱한 방향으로이어졌고 매번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 P187

고개를 들면 언니의 표정과 눈빛이 마주보였다. 그게 호의든,
배려든, 친절이든, 호기심이든 뭐든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욕을 당한 것처럼 불쾌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최선을 다했다. 그날 하루 동안의 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 P190

그 언니가 사온 호두파이는 끔찍하게 달았다. 나는 견디듯 입에한 움큼씩 파이를 떠넣으며 계속 말했다. 도대체 이해니 격려니그런 것에 왜 목숨을 거냐고. 그런 말이 더 역겹고 짜증난다고. 너는 내 손에서 포크를 빼앗고 파이를 통째로 개수대에 처넣으며 소리쳤다.
진짜고 뭐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진짜가 아니면 뭐 어때서. 내가 좋으면 된 거지. 내가 그런 것도 모르는 바보 등신인 줄 아니? - P197

너에게 나는 연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월세를 내는 세입자조차도 아닌 그저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를 좋아했고 너와 함께하고 싶었던 마음 같은건 너무나 철없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 P198

관광이나 휴양이 아니라 여행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고,
그런 여행을 통해 삶에 대해 소박하고 단순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을 너는 자랑처럼 말하곤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여행이 아니라 고된 훈련이나 극기 체험처럼 느껴졌다. - P211

형식적으로라도 우리를 붙잡지 않던 주인에 대한 괘씸함, 보란듯 신속하게 테이블을 치우던 직원들에 대한 불쾌함, 나를 유별난사람으로 만들어버린 너에 대한 미움,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과 귀한 시간을 망쳐버렸다는 후회 따위의 감정들은 집에가까워져올 무렵에 잦아들었다. - P216

너와 함께 본 조감도 속의 팔복장이 완공되었더라면, 그것이너와 내 상상 속에 있던 어떤 미래라고 할 만한 것을 완벽하게 실현했더라면, 우리는 그 광장에서 어떤 봄을 마주했을까. 어떤 일상을 나누었을까. 그중엔 우리를 결코 떼어놓을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순간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런 순간들이 너와 나를더 힘껏 끌어안을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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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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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망하던 친구 카톨리카의 수작에 넘어가 문 뒤에서 절친한 친구 폴가의 자신에 대한 뒷담화를 듣고 상처받는 이야기… 자신에 대한 흉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몇 년 뒤 폴가가 찾아와 ‘쓰리섬’을 제안하자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 생각이 들지만 결국 거절하여 다시 문 뒤로 숨어 버리는, 다소 엇나간 해명 방식이 불편하기도 한 소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벗은 비참한 등 앞에서, 갑작스럽게도 아득해지며, 자신의 고독 속으로는 다다를 수 없어진 그앞에서,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고, 그 순간에조차 이미나에게 뭔가가 말을 건네고 있었다. 루차노 풀가는 진실과 대면하기로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나는 완강하게, 깨어나지 않은 채, 단절과 적대감이라는 타고난 운명에 사로잡힌 채문 뒤에 또다시 숨어 있었으니, 활짝 열려고 생각했대도 헛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지금도 못하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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