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싱의 후기 단편들을 먼저 접하고 나서 느낀 점은 레싱의 작품은 조금 난해한 기분을 가져다주는 소설이라는 거였다. 때문에 그녀의 장편을 읽는다는 것은 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그렇게 막연한 마음으로 시작한 소설이었는데 1장에서부터 소설의 결말을 보여주며 궁금증을 자아내어 사건에 빠져들게 하더니, 그 몰입감을 타고 작품에 열광하면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 장편이 그녀의 데뷔작이라니, 글을 쓰는 능력은 타고났나 보다.

메리와 모세의 성적인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 글의 분위기가 아주 절묘하게 갈등관계에 가려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뒷면 해설에서 관련된 함축된 의미의 설명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서 끝내 혼자만의 의문으로 남고 말았다. 토니의 의심도 둘 간의 정사를 암시하고, 모세에게 살인의 충동까지 일게 할 동기가 메리와의 치정말고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는 듯 하다.

메리가 농장에서 표독스럽게 남발하는 권력을 통해 희열을 느끼는 것을 보며 군림하는 자세에 대한 (나 자신의) 성찰해보는 계기도 있었다. 사소하지만 각자 자신들에게 쥐어져 있는 요망한 권력을 행사하며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있다는 만족감의 실체를 메리를 통해 제3자의 입장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어 불편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큰 주제와 관련된 일이겠지만 인종의 문제, 성별의 문제, 계급의 문제에서 연장되어 작금의 계약관계에서 재현되고 있는 인간의 더러운 본성을 항상 억눌러야 한다는 의무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소설은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사들을 총망라한다. 식민지, 인종차별, 성차별, 조금 더 큰 맥락에서는 멀어져 보이지만 천박한 자본주의와 자연파괴, 더불어 이제는 새롭지도 않은 가부장들의 지리멸렬한 군상까지 고발하는 주제들.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고 재미까지 갖추고 있는 문학작품을 읽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옆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아무리 평범하고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여인일지라도 조명을 받으면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리처드는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해야 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상황이달라졌던 것이다. 그날 밤에 그녀 곁을 떠나며 곧 다시 만나러오겠다고 작별 인사를 할 때도 리처드는 섭섭한 마음을 금할길이 없었다. - P81

그녀는 원주민 우두머리를 통하지 않고 냉랭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직접말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자신의 처사가 왜합당한지에 대해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서 짤막하게 훈계하면서 말을 끝맺으려 했다. 그녀는 일 그 자체를사랑하여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받는 돈 따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도 일 그 자체를 위해서 일하게 될 때까지는 원주민의 생활이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그녀는 카피르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말했는데, 토속 부락에서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원주민들은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백인을오늘날과 같은 백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일에 대한 그러한 태도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백인이 일을 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신성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며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할때 인간의 가치가 나타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한 짤막한 훈계는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일부러 생각해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흑인 하인들에게 훈계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그때의 기억으로 별 어려움 없이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었다. - P199

한번은 전쟁에 관해서였다.
"부인은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하나요?"
메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간지조차 읽지 않으면서모든 것과 단절된 채 지내는 그녀에게 전쟁은 다른 세상에서일어난 루머에 불과했다. 그러나 메리는 주방 탁자 위에 깔려있는 낡은 신문을 모세가 열심히 읽는 걸 여러 차례 보았다.
그녀는 딱딱하게 모르겠다고 대꾸했다. 그 후 며칠 뒤, 그는 줄곧 생각해 왔다는 듯 다시 질문을 해 왔다.
"예수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걸 옳다고 생각했나요?"
이번에는 그 질문에 함축된 비난 때문에 화가 났다. 그래서예수는 착한 사람 편이라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날하루 종일 예전처럼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으며, 마침내는 저녁 때 리처드에게 물어보았다.
"모세는 어디 출신이에요?"
"선교사 밑에 있었대. 그래도 제일 고상한 녀석이오."
남아프리카 백인들 대부분이 그렇듯 리처드도 교회 출신 원주민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우야 어떻든 깜둥이들한테 읽고 쓰는 걸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노동의 신성함과 백인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라고만 가르쳐 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 P266

필요에 의해서건 선택에 의해서건 이웃 때문에 번거로움을겪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면 마음이 편치못하고 기분이 몹시 언짢은 법이다. 마치 잠을 자던 사람이 깨어나 보니 침대 주위에서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역의 주민이나 일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달나라에서 사는 셈이었던 리처드와 메리 부부가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근방 농부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신세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부부의 이름 정도만 알거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도슬래터 부부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치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들처럼 그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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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tine 2022-03-25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3번째 단락이 너무 좋네요. 저도 얼마 전 이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요, 마음속으로는 막연히 느끼겠는데 언어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던 것들이 님의 글을 읽으니 확 와닿네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나는 너와 헤어지는가 -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라는 환상에 대하여
켈리 마리아 코르더키 지음, 손영인 옮김 / 오아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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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애가 끝난 이유야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애정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정확히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그 실체를 알 수 없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불행했지만 이유를 딱 꼬집어 개선을 요구할 수없는 그 모호함은 점차 더는 무시할 수 없는 몸의 감각으로 쌓여갔다. 나는 내 행복의 가치를 인정하고,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여러 가지였고 헤어지고 나서 돌이켜봤을 때도 매우 합당하다고 여겨졌다. 그중 하나가 타이밍, 그러니까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영향이다. 내가 품은 나를 위한 꿈은 우리를 위한 꿈보다 크고, 시끄럽고, 강렬했다. 그 ‘우리‘에 전 애인이 포함되든, 앞으로 사귈지도 모르는 가상의 짝이 포함되든 간에 말이다. - P7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언제부터 이리도 어려운 일이 됐을까. 무엇보다도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물질적인 고민과 감정적 윤리가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에 갈렸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돈과 사랑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이 언제부터 무례한 일이 되어버렸을까. 마치 자신들의 공생 관계는 반지 위에 올라가는 다이아몬드의 크기와 무관하다는 듯이 말이다. - P12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 재정적 화합은 누군가와 사귀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돈을 제외한 다른 이유로만 결혼해야 한다는 걸 전제로 누가 돈 때문에 결혼‘했는지 아닌지를 추측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대부분은 실제로 돈 때문에 결혼한다. 적어도 돈은결혼하는 이유의 일부가 된다. 결혼이라는 계약은 애초부터 경제적 동맹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는 곳, 각종 청구서, 부 또는 가난을 공유하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정부에 신고해 결혼을 공식화하거나 변호사를 통해 이혼을 확정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 P44

게다가 섹스 문제도 있다. 미혼 여성이 남성의 육욕적인 덫에걸렸을 때 여성에게 도덕적 분노가 집중됐으며, 때로는 여성의인생이 끝장나기도 했다. 특히 아이가 생겼다면 그 무분별한 행동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 처한 여성 대부분은 종교 자선단체라는 허울 좋은 도피처나 미혼모 시설에 수용됨으로써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제거됐다. - P73

"이혼은 결혼의 적이 아닙니다. 간통, 난폭함, 음탕함이 결혼의적입니다. 이혼이 결혼의 적이라고 하는 것은 의학이 건강의 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P80

"농부는 해가 뜨면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일한다. 농부의 아내는 대개 해가 지고 난 후에도 일한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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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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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작가와 비슷한 시대의 교육과정을 같이 이수한 사람으로서 최은영 작가는 정말 제대로 배운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을 지난 시대의 비극과 이에 대한 고발과 함께 병치시킨다. 극단의 시대를 통렬하게 비난하는 좀 시대착오적이고 시시한 글쓰기가 아닌 우리 주변에 스며들어 버려 우리가 감내해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더 이상 자기합리화로 우리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쇼코의 미소가 대승적 차원에서 개개인의 고통을 이야기했다면 내게 무해한 사람은 소승적 차원에서 자기고백과 상처를 드러내며 치유하고 있는 듯하다. 전작에 비해 실망이라는 평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최은영작가의 시각은 다른 곳을 향했지만 우리 내면을 이해하고 감싸주려는 의도는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만족스럽다. 비슷한 세대를 같이 경험한 작가의 글이다 보니 추억이 돋아나는 장치들에 의해 지난날의 향수와 어리석었던 과거의 치부들이 뒤섞여 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여성편향적인 시각에 대한 논란은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을 듯하다. 소설이나 영화는 사실을 예술장르로 재탄생시키면서 자연스레 미화가 된다. 잔인한 서술조차도 작가의 필력으로 피어나는 문학성 덕에 결국엔 예술성을 띄는 작품이 된다. 잔인한 현실이 작품이 되는 아이러니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마주치는 잔인한 삶은 설마 저런 일이 있을까 싶고, 소수의 사례에 불과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제 우리는 소수의 불행을 덮어버리는 미개한 시절에서 비극과 부당한 일을 드러내 함께 공감하고 반성하는 시대로 발전해 가고 있다(이런 경우는 발전, 진보라는 말이 적합하다). 그리고 현실을 더 깊게 파고보면 최은영작가의 소설은 소수의 사례를 다룬 게 아니라 너무나 일상적으로 만연하게 퍼져있는 비극일 확률이 높다.

최근에 문학계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작가 중 하나로 인상깊게 남았다. 그 오만한 권력들이 글쓰는 사람을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실감했길 바란다.

엄마는 겸손의 표시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딸을 번번이 깎아내렸다. 아줌마 앞에서 효진이를 칭찬할 때면 그 칭찬의 번제물로 나의 모자람을 바치곤 했다. - P67

가까운 친구 둘은 다른 지방으로 대학을 가서 자주 볼 수 없었고 대학에서는 마음을 붙일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 P112

하지만 모래는 자신의 환경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았다. 지하상가에서 산 삼천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편의점에서 파는 로션을 발랐다. 그런데도 그애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태가 났다. 그애의 넉넉함은 물질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 P118

어린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폐 그 자체인 내 존재에 대한 빚을 갚을 수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를 이해하려고노력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부모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를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쉬운 일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짜 이유라도 만들어서 믿고 싶었다.
공무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 P121

나를 제외한 강사들은 삼십대 초중반이었고 처음부터 학원 강사가 꿈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강사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대학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떤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는지, 왜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지, 어째서 개인주의 문화가 판을 치게 되었는지.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대표라도 된 기분으로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러는 선생님들은 왜 입시 지향적인 사교육 현장에서 일하고 있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피치 못할 선택을한 사람들에게 자신들 삶의 모순을 또박또박 말하는 건 잔인한 짓이될 테니. 그 시간들을 거치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런 비판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테니까. - P161

너희와 있을 때는 나의 좋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왔어. 그래서그런 착각도 했어. 나는 나아졌고,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되었다고. 너희들에게는 너희가 좋아할 만한 내 모습만 보여주고싶었어.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따돌렸던 것 같아. 너희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미워 보이고 창피했던 내 모습을 따돌렸어. 예전부터 그랬었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저리 가. 나는 그애에게 말했어. 내 눈에도, 남들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왜 너는 죽지도 않아?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안에 남아 있어? 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 - P178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 P179

그들은 삼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 아는 한 그런 말을 했던사람 중에 삼촌보다 더 행복한 이는 없었으니까. 겪어보지 못한 일을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 P222

사람들은 내가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철저히 계산적이며,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이상 낯선 사람을 결코 돕지 않는다고, 설사 도와준다 해도 그런 선의의 이면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다는 오만한 기쁨이 어려 있다고. 그 말은 아마많은 경우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그도 나를 돕는 행동으로 자기만족을 얻었는지 모른다. - P246

난 항상 열심히 살았어.
하민은 종종 그 말을 했다.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 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 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 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할 때, 그래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 P265

작가는 미주를 포함해 우리가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하는 방식을 들춰낸다. - P308

자신이 느끼는 안도와 행복의 풍경이 언제나 상대의 외로움과 아픔을 철저히 밀봉했을 때에야 가능한 것임을 선연하게 의식하는예민한 윤리, 이 서늘한 거리 감각이란 최은영 소설의 요체이자 매력이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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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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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에서는 담담하게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문체가 좋았다. 누군가는 문학성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는 문체가 현실의 문제의식을 드러내주기에 더 적합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받아들이기도 좋았다. 다만, 사하맨션같은 판타지를 설계했으면 이런 환상을 독자들에게 흡입시키기 위한 다른 작법, 좀 더 섬세하고 디테일한 서술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냥, 재미가 없었다. 새로운 세계관에 다양한 등장인물에 숨은 과거들까지 서사가 어마어마 한데 몰입감도 없고 감동도 없고 담담하기 보다는 건조하다.

돌아보니 이제껏 이익이 큰 쪽을 선택해 본 적이 없다. 늘 잃게 되는 것을 떠올린 후그나마 덜 잃는 쪽을 선택했다. 모두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므로 그 결과를 온전히 책임져야 했다. - P101

적지 않은 목격담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수와 도경을평범한 연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증언보다 상식이더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다. - P200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쁘지 않아.
어떻게든 둘러대는 사람들이 주로 나쁘지." - P240

그러니까 우미에게 질병은 신체에 드러나는 여러 증상이나 징후들을 종합해 판단하는 결과물이 아니었다. 당연하게 주어진 운명 같았다. 통증과 불편을 느끼기 때문에 건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검진과 치료를 받는다. 인과관계는 후자쪽에만 존재했다. - P273

우미의 가슴속에는 분노로 키운 맹수 한 마리가 있다. 언제든 표적이 나타나면 급소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단박에 숨을 끊을 수 있도록 거칠게 단련시켰다. 발톱은 금세 날카로워졌고 가두어 놓기 어려울 정도로 공격성이 자랐다. 안에서 종종 우미를 할퀴기도 했다. 그런데지금, 그 사납던 짐승이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린다. 우미는 맹수를 키운 힘이 분노가 아니라 외로움이었다는것을 알았다. - P278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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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수밭 대산세계문학총서 65
모옌 지음, 심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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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긴 마라톤을 달려온 기분이다. 고전의 분량은 원래 어마어마한 쓰나미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데, 심지어 중국의 근현대사가 배경인 모옌의 작품이라 시작하는 마음을 잡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노벨문학상의 타이틀을 쥔 작가들의 작품은 항상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힘든 마라톤을 모래주머니까지 쥐고 뛰는 일 아닌가.
몇몇 중국작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도전해보는 소설이었지만 작가의 사관이 현시대의 정신에 부응하지 않는 듯한 평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권 감수성과 정치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문학성이 얼마나 메워줄 수 있는 지도 궁금했다. 사실 붉은 수수밭에서 작가의 정치편향적인 작법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괴뢰군, 일본군, 공산당, 국민당 모든 특정 집단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화자는 주요 등장 인물들에게 애정은 담아 묘사하지만 정당한 정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짧은 리뷰 하나 쓰기도 어려운데 장대하고 유려한 문장들을 길고 길게 서술해나가는 작가의 필력에 감동하며 보았다. 잔인하기도 하고 구역질나기도 하면서도 휴머니즘적이고 전체적으로 담담하다. 감정의 온도는 낮게 유지하면서 그 많은 역경과 풍파를 그려내는데 표지 뒤의 작가 사진이 푸근하면서도 차가운 이미지처럼 느껴지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랄까.

다시 한번 모옌의 소설을 찾아볼 이유가 있다면, 좀 더 다양한 작품을 섭렵하여 정치적인 지점을 구분할 수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은 중국의 의식있는 지식인들이 비난해야할 이유가 있었는지가 참으로 궁금했는데 뭔가 답을 찾지 못하고 싱겁게 끝나버린 것 같았으니....

할머니는 너무나 피로하다고 느꼈다. 그 미끌미끌한 현재의 손잡이가, 인간 세상의 손잡이가 그녀의 손을 막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인가? 내가 죽어가고 있는 건가? 이 하늘과 이 땅, 이 수수와 나의 아들을, 지금 사람들을 데리고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총소리가 너무나 멀게 들렸고, 모든 것이 두꺼운 안개 뒤에 가려져 있는 것 같았다. 더우관! 더우관! 내아들아, 엄마를 도와주렴. 어미를 꼭 잡아라. 어미는 죽고 싶지 않다, 하늘이시여! 하늘…… 하늘이 내게 사랑하는 이를 주셨고, 하늘이 내게 아들을 주셨고, 하늘이 내게 재물을 주셨고, 하늘이 내게 붉은 수수 같은 30년의 충실한 인생을 주셨습니다. 하늘이시여, 당신이 이왕 나에게 준것이니, 도로 거두어가지 마소서. 나를 용서하소서, 나를 놓아주소서! 하늘이시여, 당신은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내가 문둥병자와 동침을 해서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괴물을 낳아 이 아름다운 세상을형편없이 더럽혔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하늘이시여, 무엇이 정조고, 무엇이 정도(正道)입니까? 무엇이 선량한 것이고 무엇이 사악한 것입니까? 당신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고, 난 단지 나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난 행복을 사랑했고, 힘을 사랑했고, 아름다움을 사랑했습니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난 죄도 벌도 두렵지 않고 당신의 열여덟 층 지옥에 들어가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난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니 어떤 것도 겁날 게 없습니다. 하지만 난죽고 싶지 않습니다. 난 살아야겠습니다. 살아서 이 세상을 더 보아야겠습니다. 아 나의 하늘이시여…….… - P128

할아버지는 나중에 다시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할머니에 대한감정은 이미 색과 맛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져 있었다. - P302

사랑이라는 게 뭔가? 저마다의 대답이 있겠지만, 이 요상한 일이 무수한 영웅호걸과 요조숙녀를 시달려 죽게 했다. 할아버지의 연애 역사와아버지의 애정의 광란, 그리고 사막처럼 창백했던 나 자신의 연애 경험에근거해서, 나는 우리 집안 3대의 사랑에 부합되는 철칙을 도출해냈다. 열광적인 사랑의 첫번째 요소는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다. 찔린 심장에서는송진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사랑의 고통으로 인해 흘려야 하는 붉은 피는 위장에서부터 흘러나와 소장과 대장을 지나면서 오동나무 기름같은 대변으로 바뀌어 체외로 배출된다. 잔혹한 사랑을 이루는 사랑의 두번째 요소는 가차 없는 비난이다. 사랑하는 쌍방 모두 산 채로 상대방의가죽을 벗기지 못해 안달한다. 생리적인 가죽과 심리적인 가죽, 정신적인가죽과 물질적인 가죽을 벗기고, 혈관과 근육과 퉁퉁 움직이는 내장과 검붉은 심장을 벗긴다. 그러고 난 뒤에 둘은 상대방을 향해 서로의 마음을던지고, 두 마음은 공중에서 부딪쳐 박살이 난다. 얼음처럼 싸늘한 사랑을 이루는 사랑의 세번째 요소는 지속적인 침묵이다. 싸늘한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얼려 얼음과자로 만들어버린다. 우선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얼고 그다음에는 눈 속에서 얼다가 다시 꽁꽁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던져지고 마지막에는 현대 문명이 낳은 냉동고 안이나, 돼지고기나 조기를 보관하는 냉장실 속에 언 채로 걸려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랑을하는 사람은 얼굴이 서리처럼 하얘지고 체온은 25도로 내려가, 입만 움찔거릴 수 있을 뿐 절대로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그들이 짐짓 벙어리 노릇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 P464

할아버지가 롄얼과 몰래 정을 통했을때는 부끄럽고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호되게 욕을 먹고 얻어맞고 나니 그런 감정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원래 있었던 자기비판의 양심은 강렬한 복수심으로 대체되었다. - P491

난 가끔씩 인종의 퇴화가, 갈수록 더 부유하고 편리해지는 생활 조건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은 인류가 분투노력하는 목표이고 또한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한 불가피하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바로 자신의 노력으로 인간의 우수한 품성을 소멸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 P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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