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읽을 수 없는가 - 인문학자들의 문장을 돌아보다 메멘토 문고·나의 독법 1
지비원 지음 / 메멘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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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지 않는 것은 꾸준한 논란거리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들이 꾸준히 나오는 중에 이 책은 ‘어떤 책’이 나와야 하는가에 대해서 논지를 펼친다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가 ‘책‘ 이전에 쉽게 접하는 글 이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기사와 평론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학술서도 아닌 기사나 논평들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지식이 기초적인 수준이 아니라서, 대중의 접근성을 차단하고 있다.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정작 글쓰는 사람들에게 ‘독자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 독자들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글‘이 어려워 졌는가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정말 멘탈을 뒤흔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우리가 배우는 국민공통교과의 과목들의 이름이 일본에서 번역한 말이라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상식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목명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많은 한자어들이 일본이 서양 문물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일본식의 한자어라는 것을 알면 많이 놀랄 것이다. 본문에 예시로 들어준 박물관, 경제, 민주, 정부, 사고 등 상당히 많은 용어들이 일본식 번역이다. 이런 일본식 번역어의 문제는 우리가 이런 기초적인 개념들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Economy를 경제라고 번역하는 ‘언어 간 번역’만 이뤄져있고 Economy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언어 내 번역’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카세트 효과‘ 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의 위상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있는 말, 그리하여 사람들이 익히고 활용하면서 존중받는 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19p.)

그래도 지금에 와서 일본 내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번역어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기원을 생각해보고 새롭게 풀어쓰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본의 번역어를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음독하여 사용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유래를 파악하려면 일본의 힘을 빌어야 하니 국민의 정서가 심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어나 일본식 표현을 순화하는 운동도 일본식 발음만 순화할 뿐, 이러한 일본식 한자어는 손댈 수 없어 결국 이 난제를 덮어버리고 마는 것이 이차적인 문제이다.

‘개념을 음독하여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개념의 기원과 역사성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하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저 말들은 한국어인 척하지만 원래 한국어가 아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카세트 효과‘의 기능만 강하고, 실제로 카세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개념의 역사성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기 때문에 오히려 개념을 신중단지모시듯이 하면서 ‘바꿔서는 안되는 , 불면의 무엇처럼 생각한다는 점’ (161p.)

나 같은 대중들에게 책이란 것이 왜 어려운가를 명쾌하게 답해준 책이었다. 물론 해결책은 없다.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문제 때문에 이 난제는 더 풀기 힘들어질 것이고, 카세트 효과로 있어보이고 싶은 대부분의 불친절한 지식인들로 인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해서 미진한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뒤늦게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런 글들은 ‘사람을홀리기 위한 글이라는 측면에서 일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측면 때문에 인문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거나 폄하되는 경향이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써볼까 하고 덤비는 잘 쓰인 광고성 글‘의 ‘경제적 가치는 어떤 사람들이 더 나은 가치를 지녔다‘ 라고 생각하는 다른 글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다. - P33

세계화 담론을 주도한다는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프랑스의 구조주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번역서가 ‘신서‘로서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 있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지금보면 분명 공부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의 책꽂이에 가깝겠지만, 1980년대에는 이런 책들을 새롭게 익혀야 할교양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신서뿐만 아니라 당시 이와 유사한 성격의 책을 출간한 유명 출판사들의 출간 목록을 보고 있자면, 학술과 교양을어떤 식으로 구분했는지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 책들이 담았던 지식과 문장의 자장에 오늘날의인문학과 교양이 아직까지도 휘둘리고 있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한편으로는 신서의 세례를 받은 특정 세대의일부 구성원이 왜 저 책들을 읽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며,
어떻게 저 책들을 다 읽어냈는지 정말 존경스럽기도 하다. 반면 어렵고 까다로운 학술서들을 공부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교양으로 읽은 이들이, 학술의 세계와 일상 세계를 좁히는 측면에서의 ‘교양‘을 어떤 문장과 내용으로담으면 좋을지를 보여준 모범이 될 만한 책은 읽지 못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야 그들에게 전공과 상관없는 학술서가 ‘신서‘로서 교양을 담당했고, 그런 배경에서 써온 논문 아닌 글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 P75

그 완고함의 근원에는 결국 ‘그 언어가 유래한 뿌리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언제부터 써왔는지,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언어 내 번역도 거의 불가능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 변화하는 시대·사회·언어와 동시대적으로 호흡하지 못하는 완고한 상태.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라는 안일한 전제, 배경지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한 ‘우리‘를 대상으로 삼지만 정작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리’ 공부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을 필자 스스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문장 안에 그대로 가져오는 글쓰기 습관. 이것이 내가 그동안 부족하나마 여러 인문교양서를 읽으면서, 또는 읽으려고 애쓰면서 생각하게 된,
‘인문학이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상당히 많이 발간된 철학 안내서, 사상가입문서나 해설서 같은 책이 인문교양서의 주류 자리에서완전히 밀려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또 공감도 하는데 말이다. - P99

어원을 밝히는 작업은인류가 최초로 어떤 현상을 인지했을 때 이를 어떤 식으로 파악했고, 현재와 어떤 공통점 혹은 차이점이 있는지, 공통점이 있다면 이를 어떤 식으로 재구성해 왔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과거에는 어떤 현상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개념화했는지, 그것이 지금도 유효한지를 살펴보는 작업이다. 그런데 보통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한국어 사이에 언어 하나가 더 들어가야 함을 많은 이들이 모르거나 일부러 외면하는 듯하다. - P110

게다가이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일제의 잔재‘를 없애려고 노력해왔다. 그중에는 ‘일어 순화‘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늘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꿀 수 있는 말을 바꾸어쓰려는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싶은 것은 바꿀 수 없다고 생각되는 말은 외면해버리는이중 잣대다. - P112

굳이 따지자면 나는 어떤 개념의 번역보다 그 개념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말에는 만드는 사람의 자의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의성을 보편성으로 만드는 게 이를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믿는다. 현재 한국 인문사회계 학술 용어의 현황은 이 자의성‘의 역사성에 대한 성찰이 부족할뿐만 아니라, 이를 더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하려는노력도 부족하다. 현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이 보편적인 학술 용어다‘라는 인식뿐이다. 이래도 괜찮은지,
학술 용어의 기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늘 걱정이앞선다. 이 말들은 정말로 한국어인가? 한국어라면 어떤논리와 근거로 한국어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음독하여들여오는 것도 번역이라면 번역 가운데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는 번역인가? 음독하여 들여오는 번역을 인정한다면 이는 중역인가, 아닌가?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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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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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또 뭐하자는 건가 싶었는데 의도된 느슨함이라니 수긍하려고 한다.
옹주의 이야기는 흡입력이 있었다. 감동이었다.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민영은 그런일을 매우 자주 저질렀다. 남들과 똑같이 말하고, 별다를 것 없이 행동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늘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
민영은 요령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이 원하는 걸요구할 때, 타인을 짜증 나지 않게 하는 법을 전혀몰랐다. 물론 그 나이에 그런 감각을 갖고 있기란 어렵다. 하지만 민영은 유독 미숙했다. 그 애는 늘 속이 훤히 보였다. 무엇을 얼마나 바라는지, 얼마나 간절한지, 그래서 얼마나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지 전혀 숨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짜증 나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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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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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다. 사소한 나비의 날갯짓처럼 파국으로 치닫고 마는 일의 시발점은 미미하거나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민과 수호는 폐점한 가구점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 채 시간이 겹치지 않게 현실의 도피처로 가구점에 머무는 사이다.
민의 인생은 의도하지 않은 사건과 우연으로 삶의 전환을 자주 맞게 된다. 그의 결혼 예정자였던 종우와는 C사의 회계 조작, 인원 감축, 파업과 공장 노동자의 분신자살 등으로 퇴사와파혼을 맞는 등의 시련을 겪는다. 파혼 후에도 민은 신혼부부에게 중매를 해준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가 버려 의도치 않게 불행에 가담한 꼴이 되고 만다.

‘그도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51p.)’

종우도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해고를 의도하지 않았듯이 민 역시 신혼부부의 전세보증금을날리는 일에 가담할 의도는 없었다. 신혼부부를 향해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민에게 과거 종우가 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민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때의 ‘허약한 지점들이 복기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악한 의도도 없이 누군가의 삶이 고통스러워졌던 때가.

반면 수호의 삶은 허약한 지점들 없이 누군가 악의에 의한 불행들이 계속된다. 아버지의 실패와 집안의 가난, 쇼핑센터의 진상 민원과 노동자 인권은 안중에 없는 센터장, 불법 노점상신고 등으로 고단하고 지난한 삶이 이어지고, 연주와 같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도 멀어진다. 하지만 민과 수호의 삶은 결국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는 연속적으로 벗어나기 힘든 고난의 굴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행 작가가 꿈이었던 수호에게 연주의 카드에서 훔친 100만원의 의미는 잠시 지난한 자신의삶을 떠나 다른 도피처로 여행하는 자금과 같았다. 연주의 돈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가구점에서 얼굴도 모른 채 서로를 의식했던 민을 만나고, 연주를 미행하며 자신 못지않은 연주의 좌절과 분노를 엿본다. 그리고는 아무런 적의 없이 수호에게 할 도리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며 선량을 베푸는 민에게 자신이 훔친 돈과 지갑을 연주에게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한다.

‘사과나 용서 같은 아름다운 절차를 질리는 사람과 공유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이제 그녀는 좀처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타인을 믿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한 뼘씩 멀어질 것이다. (144p.)’

민은 그때 종우에게서 자신들의 공동명의로 구입했던 일산의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선우를 만나러 간다. 서로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그렇게 기계적으로 차갑게 끊어버린 마지막 날 민은 생각한다.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니,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종우가, 그의 무모한 선택이, 무리에서배제된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순간..... 아니, 부끄러운 건 그가 아니라 민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할 수가 없어서,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부끄러움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리라. 부끄러움의 뒤편은 외로웠으나, 대신 안전했다. (157 p.)’

100만원의 여행자금도, 종우와의 재회도 수호와 민에게는 새로운 해결점이나 다른 인생의 도약을 가져다주진 못했다. 민이 공인중개사로 일하면서 습관처럼 행동했던 매물로 올라온 집에주인 없을 때 몰래 들어가 다른 삶을 사는 것도 잠시일 뿐, 곧 자신의 삶의 위치로 되돌아온다. 또 그들은 자주 과거와 연결된 수치심을 복기시키는 꿈도 자주 꾼다. 그렇게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그들의 삶은 계속 허물을 벗어버리듯 과오와 부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삶을 회피하지만 결국 인생의 다른 열차가 아닌 같은 열차의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데 밖에 그치지 못한다.

‘삶이란 결국, 집과 집을 떠도는 과정이 아닐까. (44p.)’
‘곧 문이 닫혔고, 30분짜리 생애도 끝났다. (52p.)’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수많은 칸들이 연결된 기차처럼 각기 다른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어제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의 포부따위 갖지 않는, 그저 그 순간만을 살다가 죽는 것이 가능하다면 응급실의 노인을 떠올리며, 미리 슬픔에 잠식될 필요도 없을 터였다. (9p.)’

조해진 작가의 작품에서 희극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남의 비극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비겁한 위안이 아닌, 삶의 비극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칸으로 이동하여 결국 꿋꿋하게 버티고 견뎌내는 것을 배운다. 내 인생에서 다른 열차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같은 열차 안에서 다른 칸으로 옮겨 탄다고 내 인생의 열차가 다른 종착지를 향하지는않을 것이고, 그렇게 체념한들 이 열차가 멈춰 서지도 않을 것이다.

가난은 갑자기 쌀이 떨어지거나 전기가 나가는 식의 상투적인 장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작고 구체적으로, 저마다 다른 형태로, 그러나 비참함을 느끼게 할 만큼은 충분히 강렬하게일상과 일상의 틈새로 날카롭게 스며드는 것이다. 수호는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동생의 뺨을 칠까 봐 겁이 났다.
남은 밥을 한 번에 떠서 입안에 욱여넣은 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지만, 문을 통과한 동생의 흐느낌은 끈질기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 P39

삶이란 결국, 집과 집을 떠도는 과정이 아닐까.
타인의 집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면 민은 그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한 시절 거주한 집은 그대로 삶의 일부가 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집은 존재의 시간을 증명한다. 실제로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 P44

화장대 앞에 앉아 산호색 립스틱을 집었다. 군데군데 손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이 집의 화장대 거울은 그리 흐릿하지않았다. 아니, 감출 것도 위장할 것도 없다는 듯 지나치게선명하기만 했다. 아쉬운 건 없었다. 흐릿한 생애는 지금 거울 밖에서 펼쳐지고 있으니까. - P45

그즈음 그도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어쩌면 민보다 더 절박하게, 더 구체적으로, 그럼 이곳은 흐릿한 곳일까, 명료한 곳일까.
진짜 세계인가, 거짓으로 빚어진 허상인가. - P51

상황을 파악한 회사의 반응은 예민했고 그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민첩했다. 회사는 종우에게 의견서와 관련된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공문서 위조죄와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겠다고 정중하게 위협했고, 뒤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자료를 폐기하거나 은폐했다. 회사에는 종우의 편이 없었다. 그의 행동은 정의가 아니라 비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만들어진 허상, 아니면 유치한 과대망상. 그의 정의를 인정하면 자동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 그러니까 부도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그 상황은 모두에게 껄끄럽고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옳은 것, 그리고 옳지 않은 것이 종우의 믿음만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회계사의 서류는 중립적인 숫자들의 조합일 뿐, 거기에 선의도 악의도 없었다. 그러니 일자리를 잃은 자의 좌절과 그가족들의 현실적인 고통은 의도나 목적이 될 수 없었고, 그저 일의 파생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 P94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가정, 그런 안개 같은 가정들. 매 순간 숨을 옥죄어 왔던, 그러나 감정의 차원에서만 세워지고 무너지길 반복했던 텅 빈 성전(聖殿) 같은 고통일뿐이란 걸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민이었다. - P96

할머니에게서 딸과 손자가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관계가 틀어진 연유나 그들의 처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민이 아는 건 드러난 사실뿐이었다. 그들이 할머니를 외면했다는 것, 할머니를 혼자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것, 그런데도 저곳에 앉아 울고 있다는 것, 그 기묘한 어긋남이었다.
용서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어긋남………..
남자아이가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난 순간, 민은 그대로 돌아서서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그들과는 애도를 나눌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의슬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의 슬픔과 자신의 슬픔이 교환되고 공유되어결국 같은 무게로 남게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게 가장 솔직한 심정인지 몰랐다. - P112

그녀가 사라진 100만 원에 대해 침묵을 선택한 것, 그것은 수호 앞에 던져진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수호가 할 일은 그녀의 침묵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 사건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조차 가치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질리는 사람일 테니까, 돈을 되받기 위해 질리는 사람과 다시 만나야 한다면 그 돈을 포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사과나 용서 같은 아름다운 절차를 질리는 사람과 공유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이제 그녀는 좀처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갈것이다. 타인을 믿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한 뼘씩 멀어질 것이다. - P144

그를 외면했으며 동시에 그에게서 버려졌다.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니,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종우가, 그의 무모한 선택이, 무리에서 배제된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던 순간……. 아니, 부끄러운 건 그가 아니라 민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가 없어서,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부끄러움 뒤에숨어 있었던 것이리라. 부끄러움의 뒤편은 외로웠으나, 대신 안전했다. - P157

수호는 창밖의 운동장이 육신을 잃은 영혼들의 대합실 같다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먼 곳으로 여행을다녀온다 해도, 온 생애에 걸쳐 두고두고 회상할 엄청난 경험을 하고 돌아와도, 결국엔 저렇게 황량한 곳이 생의 최종 목적지가 될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기대하는 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루를 살다가 다음 날이 되면 미련이나 고통 없이 그 지나간 하루를 인생의 총합에서 마이너스하는 것, 사는 게 그것만은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서 여행 작가니 여행 가이드 같은허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 P163

발을 헛딛는 것쯤은 이제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오직 하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오늘뿐이었다. 단절이나 휴지 없이 이어지는 단 하나의 생애, 그 관성이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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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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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작가의 단편집이고 표제작이 <부루마블에 평양이 있다면>이라니, 이번에도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재치 넘치는 상상력이 가득할 것이란 기대가 부풀었고, 결과도 역시 대만족이었다. <양말들>은 죽은 연지가 영혼이 되어 나타난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다소 코믹하게 그린 소설이다. 삼 년 전 들었던 강좌에서 과제로 녹음한, 시기적으로 논리적으로 전혀 납득될 수 없는 유서를 친구 윤과 슬은 연지의 언니가 진지하게 남겨놓은 유서라고 받아들이게 하고 만다. 결국 연지의 언니는 동생이 파혼 후 단지 두세 번 만났던 결혼식 축가 담당 후를 연지가 마지막으로 품었던 연인이라 믿게되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그는 규칙 없이 찾아오는 이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심리적인 이유가 큰 것 같다고 하기에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줬다. 이명을 이명이라고 부르지 말고, 다른 이름을 붙여보라고 말이다. 더 편안하고 만만한 이름 말이다. 이건 학생들을 상담할 때 많이 쓰던 방식이었다.
후는 ’양말‘을 골랐다. 후의 이명은 양말이 되었다.
......
나는 얕은 비명을 질렀다. “앞에 저게 뭐예요?” 후는 고라니라고 대답했다. 새라고도 대답했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양말이라고 대답하세요.”’(22-26p.)

믿음과 진실 사이는 재미있다. 믿음으로서 진실이 되기도 하고 진실이기 때문에 믿기도 하므로. 믿음으로 진실이 괴로워지는 상황에선 믿음을 변경시키면 진실은 좀 더 견딜 수 있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도 믿음을 앞세워 평양에 부동산투자를 종용하며 마음의 안식을 찾아 나서는 상황을 그린다. 하와이에서 도일이 선영의 이름을 빌려 북한사람이라 사칭하고 숙박집 호스트 알리를 만나는 것부터도 믿음에 대한 종용을 재밌게 비튼다. 물론 도일과 선영이 존재할 것이라 믿는 공간에 찾아갔다 허탕을 치며 되돌아오는 시점까지 그 허황된 믿음에 의지하지만, 모델하우스에서 직원의 신혼부부냐는 물음에 결국 진실에 가까운 현실로 돌아오지만.

연경과 신입직원 우준과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담은 <오믈렛이 달리는 밤>이나 프리미엄 통근 버스 안에서 엿보게 되는 직장 내 생리와, 통근 버스 같은 자리를 이용하는 다른 회사 여직원과의 에피소드를 다룬 <우리의 공진>, 전 남자친구 표고영과 친구 민아의 영상을 표고영의 오피스텔에서 같이 보게 되는 다소 19금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평범해진 처제>, 부잣집 친구 재석과 평범하지만 우등생이었던 화자와 권력 관계가 엎치락뒤치락 전복하며 지난 순간의 ‘잔열’을 약혼자 선영과 감지하는 <물의 터널>까지, 그동안 윤리적인 상상력과 결말을 전복시키는 소설들에 비해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남자들이 특히 궁금해하는 부분이지. 아냐, 정정할게. 두려워하는 부분이지. 이 여자가 지금 쇼하는 건가 아닌가."
내가 그렇게 말한 건 표고영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할 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거였다. 에로 비디오에서, 그러니까 야동에서 ‘진짜‘와 ‘가짜‘를 논할 때는 한 가지 관점만 있는 것이다. 저들이 진짜로 하는 건가, 아니면 그저 연기를 하는 건가. 일상생활에 적용해볼 때도 비슷한 거다. 저 여자가 진짜로 느끼는 건가, 아니면 그저 오르가슴을 연기하는 건가. 보통 남자들이 궁금해하는 건그런 진짜와 가짜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표고영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보다 감정적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좋아하는 감정이 섹스에 드러날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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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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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나무 꼭대기>
혜원은 같은 대학 시절을 보낸 동기 강희의 병간호를 받다 죽는다. 혜원은 이혼 후 연락이 두절된 미국에 있는 아들이 있었고 강희에게 자신이 교직 생활을 할 때 거주했던 홍천의 아파트를 관리하며 아들이 미국에서 돌아오면 아들에게 돌려달라는 부탁을 남긴다.
강희는 졸업 후 절에 들어갔던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 절에서 밭을 캐다 자신의 힘이 닿지 않아도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을 보며 한 줌의 흙과 같은 인간의 구도에 무의미함을 느껴 하산하였다. 혜원이 죽기 전 홍천의 아파트 거주권을 주는 조건에는 자신의 아들에게 매일같이 보내던 이메일을 강희가 계속 써달라는 부탁이 있었는데, 수신자가 볼 수 없는 이메일을 보내는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는 강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느꼈던 허무한 인간의 삶과 겹쳐진다.
홍천으로 거주지를 옮긴 강희는 기도원에 올랐다 탈영한 병사를 마주하였고, 먹을 걸 달라는탈영병에게 음식을 가져다 준다. 식당에서 군인의 탈영뉴스를 접한 것이 떠올랐던 강희는 혜원의 아들이 얼핏 탈영병의 나이와 비슷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기도원 숲에서 마주친 탈영병 이혜원의 아들일까 확인하고 싶었지만 탈영병을 다신 만날 수 없었다.

‘노트에 꾹꾹 눌러썼던 시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언어의 쓰레기로 보였던 것도 시간이 지나니 얄팍한 재능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여겨졌다. 날마다 그녀의 일부가 하수구로, 하수구의 구정물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녀의 모든 것이 그리될 거라는 비관적인 허무에서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던 시절이었다. 절에 들어간 이유라면, 오직 그뿐이었다.‘(28p.)

비관적인 허무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강희의 욕구는 무엇인가의 갈망으로 이어져 젊은 시절 절에 들어가는 행위로 빚어졌다. 강희는 탈영병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예상을 했음에도 다시 음식을 싸서 수도원으로 향한다. 자신의 젊은 시절, 불가능할 것이라 깨달았던 인간의 구도를 한 차례 경험했음에도, 비관적인 허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계속된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하는 행동은 때로는 좌절감을 주지만 충만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시도한다. 하지만 실패만 주는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이 책의 제목은 <환한 숨>인데 아무래도 <환한 나무의 꼭대기>와 <하나의 숨>의 앞뒤 단어를 하나씩 차용해서 지은듯하다. 아무래도 하나의 숨은 이 책에서 다루는 소재인 ‘노동‘에 대한 참담한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그런 듯하다.
<하나의 숨>에서는 노동의 참담함이 연속된 사슬같이 이어지는데, 기현의 어머니가 오랜시간이 지났음에도 강박적으로 연상하게 하는 편직물공장에서의 경험과 마침내 비참한 최후를 맞게되는 하나의 평택공장 환경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해결되지 못한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하나의 공장 직원들이나 계약직 담임인 화자와 하나의 어머니의 갈등, 계약직 담임 화자와 하나의 고2 때 정규직교사인 담임의 대화는 노동자들이 투쟁의 대상을 잡는 데 방향을 놓치고 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 MBC 비정규직 아나운서들의 논란이 모티브가 된 듯한 <경계선 사이로>는 투쟁과 분노의 방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에 특히 집중된 소설이다. 윤희는 어린시절 뇌졸중으로 쓰러진 청소노동자 엄마의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을 벌였던 기자이다. 그런 기자가 정권에 맞서는 언론사의 파업에 동참하다 사직을 하였고, 연진은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조건으로 입사한 신입 기자인데, 정권이 교체된 후 복직한 선배 기자들에게 기회주의자라는 낙인에 찍혀 변방으로 밀려나는 상황이다. 연진은 입사 전부터 동경했던 윤희선배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기존 기자들과 신입 기자들 간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특히나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했던 선배 기자들은 복직 후 투쟁의 대상을 신입 기자들로 방향 전환하며 투쟁의 본연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자신들이 추구하던 것은 언론의 자유가 아닌 편을 가르고 자신의 이익들만 챙기려하는 집단 이기주의와 다르지 않은 모양새를 띄는 것이다. 정작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구조를 파악하여 개혁하지는 못하고 그 구조 안에서 자신의 이익 위에 그럴싸한 정치적, 도덕적 프레임만 씌운 채 이기주의, 편파주의에 편승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위선을 그리고 있다.

<파종하는 밤> 수은 공장에서 괴로워하며 죽어갔던 소년과 그 공장을 모티브로 작품을 진행하던 화자에게 전시를 의뢰한 큐레이터 역시 작품과 전시의 의미보다는 화자의 결혼, 예술가의 결혼이 결국 작가 생활의 무덤이 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우리 개개인의 이기심은 사회의 바른 방향과는 무관하고, 결국 그 의미가 도태되어 버리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공장은 철거되고 작품은 결국 미완성이 되는 것이 보여지는 것처럼, 화자와 남편은 자신들의 목표를 생활과 양육에 매달려 작품, 사회와는 계속해서 괴리되어 살아갈 것이고 이건 너무나 보편적인 우리의 현실이다.

<경계선 사이로>에사 복직한 기자들이 신입 기자들을 새로운 적으로 삼는 것은, 투쟁의 대상을 비교적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돌려버리는 약육강식의 습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는 <파종하는 밤>에서 아동 성추행을 범할 수 없는 지능을 가진 왼팔 청년에게 주민들의 비합리적인 의심이 집중되는 것과도 닮아있다.

<흩어지는 구름>과 <눈 속의 사람>에서는 연인이거나 연인이 될 뻔한 사람들이 결국 이어지지 못한다.(<하나의 숨>에서도 자연스런 파혼의 과정이 나오긴 하지만)
<흩어지는 구름>에서는 계약직으로 일하다 곧 계약이 만료될 위기에 처한 화자의 상황, 자신들의 꿈(영화)을 끝내 이어갈 수 없는 화자와 호재의 현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시댁으로 보내진 동생과 단절된 채 어색해져 버린 관계가 복합적으로 혼재되어 있다. <눈 속의 사람>의 여진은 지도교수를 성추행범으로 신고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여진을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로 몰아간다. 정찰병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데 일조했던 영어 교사 출신의 최길남이 시체 속에서 꿈틀대는 사람에게 달려드는 정찰견을 막아 생명 하나를 구했다는 점마저도 위안삼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머리로는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살아남은 자는 강한 것이 아니라 뻔뻔하다는 생각은 좀처럼 떨쳐지지 않았다.
......
“그래도 지금껏 괴로워하며 사시는 분이잖아요. 설마 그마저 뻔뻔하다고 여기는 거예요?”
......
“무의미한 일 같을 때가 있긴 해요, 나도.”
그녀가 테이블 구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삭이듯 말했다.
“어차피 세상은 믿고 싶은 것만 믿잖아요, 편한 게 진실이 되기도 하니까.”(181-182p.)

우리의 삶은 이상향과의 모순, 괴리로 결국 뻔뻔하게 살아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믿고 싶은 대로 자신의 위선을 적절한 추상적 개념으로 덧씌워 위안 삼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버린다. 하지만 <흩어지는 구름>에서도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은 있는 듯하다.

’그중 누군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해줄지 몰랐다.
당신은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누구도 그 이상을 해낼 수 없었을 거라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69p.)

최길남의 장례식에서 다시 만난 둘은 버스 터미널에서 헤어진다. <흩어지는 구름>에서 동거생활을 하던 화자도 호재와 버스 터미널에서 이별을 고한다.
다양한 사람과 그들의 목적이 모였다 흩어지는 버스 터미널처럼 다양한 생존 욕구와 이해관계가 얽힌 인생에서도 또 각자의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인연이 되었다 흩어진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높고 느린 용서>에서는 가해자의 서사가 아닌 가해자 가족의 서사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삶에 누릴 수 있는 의미가 어디까지인지 상상해보게 한다.

그녀는 혜원이 어떻게 사는지 몰랐지만 혜원 쪽에서는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혜원뿐 아니라 독문과의 다른 동기들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절에 들어가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일 테니까.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처럼 부풀려진 그녀의 삶은 입술과 전화선과 커피와 맥주가 놓인 테이블을 통해 여기저기로 퍼져나갔을 것이고, 그중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기울 수밖에 없는 고뇌의 시소 한쪽에 그녀를 올려놓고는 전에 없이겸허한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가출가했다는 것만 알 뿐, 정식 승려가 되기도 전에 환속했다는 것이나 그녀 역시 그들처럼 직장과 연애라는 트랙을 돌며한 시절을 살아왔다는 건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동미의 말에 따르면, 대학 동창 중 일부는 그녀가 지금도 승려이거나 승려와 다를 것 없이 산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이해했다. 재산이나 가족, 심지어 욕망도 없이 산속 은둔자로 사는 지인이란 속세의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패배했을 때 그 쓰라린 마음을 되비춰볼 만한 거울로 퍽 쓸모가 있을 테니까. 상대적인 박탈감을 위로받을 수 있는 영원한 타자…. - P12

저마다 비슷한 무게로 절박했을 그들의 염원을 고유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그 염원의 안쪽에 펼쳐진 개개인의 고통을 절대적으로 동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전체와 영원의 시선으로 본다면 한 사람의 염원이란 퀼트의 한 조각처럼 평균적인 일부이자 보편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절에서 나올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여느 날처럼 점심 공양을 마친 뒤 텃밭에서 작물을 캐는데, 작물은 계속 자라고 그녀가 아닌 누구라도 감자를 캐고 풋고추를 딸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대단한 깨달음인 듯 다가왔다. 흙 한 줌을 보면서도 구도를 생각하라고 은사 스님은말하곤 했지만,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 앞에서 인간의 구도는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 생각은 그때껏 그녀가 절에서 찾아낸 유일한 진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호미와 바구니를 텃밭에 내버려둔 채 터덜터덜 산길을 내려왔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으며 소지품을 챙기지도 않았다. - P26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고 귀를 기울였지만 올해의 귀뚜라미들은 모두 일생을 마친 건지,
아니면 서울에는 원래 귀뚜라미가 살지 않는 건지, 본능에순종하는 생명체가 노동하듯 날개를 비비며 내는 그 마찰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나는 18년을 살았다. 도로 창문을 닫으면서 나는 문득 그것을 깨달았다. 하나의 의식이 돌아오지않는다면 하나가 아는 세상이란 18년의 세월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으로 그 범위가 제한된다는 것을, 마치 가을 한철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귀뚜라미처럼……… - P90

그녀는 평소와 달리 존댓말을 섞어가며 그렇게 말을 이었고,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쉬운 단념에 사나워졌던 마음이풀리는 걸 느꼈다. 그녀의 말은 모두가 공평하게 비정하다면한 사람의 비정은 모두의 비정으로 희석된다고, 세상 어디에도 더 비정한 비정은 없다고, 그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뒤편에 유리창이 있었고 유리창너머로는 초겨울의 운동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는 학생들이보였다. 학교를 빠져나간 학생들이 어디로 갈지, 아니 갈 곳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 P96

증언은 객관적일 수 없다. 증언은 증언자의 기억 속에서선택된 언어이고 증언자는 역사의 현장에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구경꾼의 위치에 있으려 할 뿐, 자신의 과오나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의식하지 못하며 때로는 완전히 망각하기도 한다. 철원과 진주와 함양과 여수 등에서 만난 역사의 증언자들에게서 내가 본 것은 혼란이었다. 말해도 되는것과 말해선 안 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아니 어느 부분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 - P180

머리로는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살아남은 자는 강한것이 아니라 뻔뻔하다는 생각은 좀처럼 떨쳐지지 않았다. 한번은 생각에 그치지 않고 무심결에 말로 내뱉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 앞에는 여진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이전에도 종종 그랬듯 직원들이 퇴근한 텅 빈 출판사의 접대용 테이블에마주 앉아 받아온 구술 녹음을 각자의 노트북에 입력하던 중이었다. 정신없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그녀가 언뜻 고개를 들어 나를 건너다봤다. 틀어놓은 녹음기에서는 정찰병으로 처음 수색을 나갔던 날을 묘사하는 최길남 님의 목소리가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손을 뻗어 녹음기를 껐다.
"그래도 지금껏 괴로워하며 사시는 분이잖아요. 설마 그마저 뻔뻔하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고, 나는 식은 차를 연거푸 마시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영토에 발이묶인 채 최소한의 힘으로만 현재를 견디는 사람이었다. 그시절에 대학 교육까지 받았지만 교직으로 돌아가지 않았을뿐더러, 평생 뚜렷한 직업 없이 가난하게 살았다. 마흔이 넘어서야 결혼했고 자식은 낳지 않았으며 20여 년 전 아내와사별한 뒤부터는 고향인 태백으로 돌아와 쭉 혼자 지냈다. - P180

그런 질문이 있다. 답을 찾게 하기보다 그 질문 안에 머물게 하는. - P203

귀하는 모든 것을 잃은 그 사람을 용서해줄 수 없겠느냐고,
용서가 힘들다면 결혼을 결정하지 못하는 동생에게 용기의말이라도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제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귀하에게 되묻고 싶습니다. 용서란 무엇인가요? 저에게 용서는그 사람이 저만큼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표현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고통에는 저에 대한 미안함뿐 아니라 그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이 포함되어야 하고요. - P214

죽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스물다섯 살에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 바로 우 감독의 그 다큐멘터리영화 속 한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결국그 장면이 내 발걸음을 로프웨이 승차장 쪽으로 돌아서게 했다는 걸 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감독의 요구가 없었는데도 스태프들이 자발적으로 한 명씩 왕년의 선장에게 다가가 작별의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죽는다면 그렇게 죽고 싶다고, 눈 쌓인 평원을 걸으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열망했었다. 그중 누군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해줄지 몰랐다.
당신은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누구도 그 이상을 해낼 수없었을 거라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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