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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ㅣ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인생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다. 사소한 나비의 날갯짓처럼 파국으로 치닫고 마는 일의 시발점은 미미하거나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민과 수호는 폐점한 가구점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 채 시간이 겹치지 않게 현실의 도피처로 가구점에 머무는 사이다.
민의 인생은 의도하지 않은 사건과 우연으로 삶의 전환을 자주 맞게 된다. 그의 결혼 예정자였던 종우와는 C사의 회계 조작, 인원 감축, 파업과 공장 노동자의 분신자살 등으로 퇴사와파혼을 맞는 등의 시련을 겪는다. 파혼 후에도 민은 신혼부부에게 중매를 해준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가 버려 의도치 않게 불행에 가담한 꼴이 되고 만다.
‘그도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51p.)’
종우도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해고를 의도하지 않았듯이 민 역시 신혼부부의 전세보증금을날리는 일에 가담할 의도는 없었다. 신혼부부를 향해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민에게 과거 종우가 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민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때의 ‘허약한 지점들이 복기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악한 의도도 없이 누군가의 삶이 고통스러워졌던 때가.
반면 수호의 삶은 허약한 지점들 없이 누군가 악의에 의한 불행들이 계속된다. 아버지의 실패와 집안의 가난, 쇼핑센터의 진상 민원과 노동자 인권은 안중에 없는 센터장, 불법 노점상신고 등으로 고단하고 지난한 삶이 이어지고, 연주와 같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도 멀어진다. 하지만 민과 수호의 삶은 결국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는 연속적으로 벗어나기 힘든 고난의 굴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행 작가가 꿈이었던 수호에게 연주의 카드에서 훔친 100만원의 의미는 잠시 지난한 자신의삶을 떠나 다른 도피처로 여행하는 자금과 같았다. 연주의 돈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가구점에서 얼굴도 모른 채 서로를 의식했던 민을 만나고, 연주를 미행하며 자신 못지않은 연주의 좌절과 분노를 엿본다. 그리고는 아무런 적의 없이 수호에게 할 도리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며 선량을 베푸는 민에게 자신이 훔친 돈과 지갑을 연주에게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한다.
‘사과나 용서 같은 아름다운 절차를 질리는 사람과 공유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이제 그녀는 좀처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타인을 믿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한 뼘씩 멀어질 것이다. (144p.)’
민은 그때 종우에게서 자신들의 공동명의로 구입했던 일산의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선우를 만나러 간다. 서로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그렇게 기계적으로 차갑게 끊어버린 마지막 날 민은 생각한다.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니,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종우가, 그의 무모한 선택이, 무리에서배제된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순간..... 아니, 부끄러운 건 그가 아니라 민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할 수가 없어서,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부끄러움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리라. 부끄러움의 뒤편은 외로웠으나, 대신 안전했다. (157 p.)’
100만원의 여행자금도, 종우와의 재회도 수호와 민에게는 새로운 해결점이나 다른 인생의 도약을 가져다주진 못했다. 민이 공인중개사로 일하면서 습관처럼 행동했던 매물로 올라온 집에주인 없을 때 몰래 들어가 다른 삶을 사는 것도 잠시일 뿐, 곧 자신의 삶의 위치로 되돌아온다. 또 그들은 자주 과거와 연결된 수치심을 복기시키는 꿈도 자주 꾼다. 그렇게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그들의 삶은 계속 허물을 벗어버리듯 과오와 부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삶을 회피하지만 결국 인생의 다른 열차가 아닌 같은 열차의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데 밖에 그치지 못한다.
‘삶이란 결국, 집과 집을 떠도는 과정이 아닐까. (44p.)’
‘곧 문이 닫혔고, 30분짜리 생애도 끝났다. (52p.)’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수많은 칸들이 연결된 기차처럼 각기 다른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어제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의 포부따위 갖지 않는, 그저 그 순간만을 살다가 죽는 것이 가능하다면 응급실의 노인을 떠올리며, 미리 슬픔에 잠식될 필요도 없을 터였다. (9p.)’
조해진 작가의 작품에서 희극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남의 비극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비겁한 위안이 아닌, 삶의 비극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칸으로 이동하여 결국 꿋꿋하게 버티고 견뎌내는 것을 배운다. 내 인생에서 다른 열차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같은 열차 안에서 다른 칸으로 옮겨 탄다고 내 인생의 열차가 다른 종착지를 향하지는않을 것이고, 그렇게 체념한들 이 열차가 멈춰 서지도 않을 것이다.
가난은 갑자기 쌀이 떨어지거나 전기가 나가는 식의 상투적인 장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작고 구체적으로, 저마다 다른 형태로, 그러나 비참함을 느끼게 할 만큼은 충분히 강렬하게일상과 일상의 틈새로 날카롭게 스며드는 것이다. 수호는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동생의 뺨을 칠까 봐 겁이 났다. 남은 밥을 한 번에 떠서 입안에 욱여넣은 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지만, 문을 통과한 동생의 흐느낌은 끈질기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 P39
삶이란 결국, 집과 집을 떠도는 과정이 아닐까. 타인의 집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면 민은 그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한 시절 거주한 집은 그대로 삶의 일부가 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집은 존재의 시간을 증명한다. 실제로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 P44
화장대 앞에 앉아 산호색 립스틱을 집었다. 군데군데 손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이 집의 화장대 거울은 그리 흐릿하지않았다. 아니, 감출 것도 위장할 것도 없다는 듯 지나치게선명하기만 했다. 아쉬운 건 없었다. 흐릿한 생애는 지금 거울 밖에서 펼쳐지고 있으니까. - P45
그즈음 그도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어쩌면 민보다 더 절박하게, 더 구체적으로, 그럼 이곳은 흐릿한 곳일까, 명료한 곳일까. 진짜 세계인가, 거짓으로 빚어진 허상인가. - P51
상황을 파악한 회사의 반응은 예민했고 그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민첩했다. 회사는 종우에게 의견서와 관련된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공문서 위조죄와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겠다고 정중하게 위협했고, 뒤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자료를 폐기하거나 은폐했다. 회사에는 종우의 편이 없었다. 그의 행동은 정의가 아니라 비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만들어진 허상, 아니면 유치한 과대망상. 그의 정의를 인정하면 자동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 그러니까 부도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그 상황은 모두에게 껄끄럽고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옳은 것, 그리고 옳지 않은 것이 종우의 믿음만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회계사의 서류는 중립적인 숫자들의 조합일 뿐, 거기에 선의도 악의도 없었다. 그러니 일자리를 잃은 자의 좌절과 그가족들의 현실적인 고통은 의도나 목적이 될 수 없었고, 그저 일의 파생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 P94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가정, 그런 안개 같은 가정들. 매 순간 숨을 옥죄어 왔던, 그러나 감정의 차원에서만 세워지고 무너지길 반복했던 텅 빈 성전(聖殿) 같은 고통일뿐이란 걸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민이었다. - P96
할머니에게서 딸과 손자가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관계가 틀어진 연유나 그들의 처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민이 아는 건 드러난 사실뿐이었다. 그들이 할머니를 외면했다는 것, 할머니를 혼자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것, 그런데도 저곳에 앉아 울고 있다는 것, 그 기묘한 어긋남이었다. 용서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어긋남……….. 남자아이가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난 순간, 민은 그대로 돌아서서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그들과는 애도를 나눌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의슬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의 슬픔과 자신의 슬픔이 교환되고 공유되어결국 같은 무게로 남게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게 가장 솔직한 심정인지 몰랐다. - P112
그녀가 사라진 100만 원에 대해 침묵을 선택한 것, 그것은 수호 앞에 던져진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수호가 할 일은 그녀의 침묵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 사건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조차 가치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질리는 사람일 테니까, 돈을 되받기 위해 질리는 사람과 다시 만나야 한다면 그 돈을 포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사과나 용서 같은 아름다운 절차를 질리는 사람과 공유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이제 그녀는 좀처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갈것이다. 타인을 믿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한 뼘씩 멀어질 것이다. - P144
그를 외면했으며 동시에 그에게서 버려졌다.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니,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종우가, 그의 무모한 선택이, 무리에서 배제된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던 순간……. 아니, 부끄러운 건 그가 아니라 민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가 없어서,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부끄러움 뒤에숨어 있었던 것이리라. 부끄러움의 뒤편은 외로웠으나, 대신 안전했다. - P157
수호는 창밖의 운동장이 육신을 잃은 영혼들의 대합실 같다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먼 곳으로 여행을다녀온다 해도, 온 생애에 걸쳐 두고두고 회상할 엄청난 경험을 하고 돌아와도, 결국엔 저렇게 황량한 곳이 생의 최종 목적지가 될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기대하는 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루를 살다가 다음 날이 되면 미련이나 고통 없이 그 지나간 하루를 인생의 총합에서 마이너스하는 것, 사는 게 그것만은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서 여행 작가니 여행 가이드 같은허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 P163
발을 헛딛는 것쯤은 이제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오직 하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오늘뿐이었다. 단절이나 휴지 없이 이어지는 단 하나의 생애, 그 관성이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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