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2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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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짓고 악을 응징하는 것은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악의 평범성‘이라고 생각한다. 선과 악의 대립은 일반 독자들에게 자신을 선의 편에 서게 하고 내가 아닌 타인이 가진 악의 습성을 지적하고 비난하려 하지 자신을 반성하게 하진 않는다. 악한 자가 패하면 정의가 바로 선 것 같고 선의 입장에 섰던 내가 승리하고 고결해진 것 같은 느낌. 이런 느낌이 싫다. (그래서 나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가 늘 불편하다.)

소장은 누가 봐도 악한 존재이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고 갈취한다. 폐사된 가축으로 선심 쓰듯이 회식을 해 공치사를 떨고, 사건과 사고의 본질을 흐려 책임을 남에게 뒤집어씌운다. 선길은 약한 존재이다. 직장을 잃고 아들은 아픈데다가 기술도 없이 노가다판에 뛰어들어 적응도 힘들어하는 불행한 인물이다. 약함이 선함이 되는 단순성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현경은 정의의 사도로 그려진다. 선길의불행에 공감하며 비닐하우스에 해자를 두르는 선의를 베풀고 마지막에 소장에게 통쾌한 응징을 하는 영웅적인 인물이다. 각자의 캐릭터나 인물간의 갈등관계 명확한 권선징악의 교훈적인소설이다.

그래도 소설에서 악을 표현하는 데 현실의 잔인함을 고발하는 탁월함이 돋보인다. 특히 소장의 감정이나 행동에서 이 인물이 사회적인 문제로 표상된다면 단체, 기업, 사회라는 주체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성이 얼마나 잔인 한지를 실감할 수 있다.

누구의 잘못도 죄도 아니었다. 세상은 여기저기 함수가 틀린 엑셀표 같은 것이었다. 어떤 칸에서는 아무리 올바른 숫자를 넣어도 에러라고 뜰 수밖에없는,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자꾸 움츠러들고 소심해졌다. - P28

목 씨는 시선을 피했다. "나일 먹을수록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 어쨌거나 반장이고, 잡부가 아니잖아." 들키기 싫은 것이었다. 아쉬운 소리를 할 만큼 가진 게 없는 처지와 능력을, 나이를 먹고 자리가 생기면 그렇게 됐다. 그럴수록 허울 같은 체면밖에 남는 것이 없었지만. - P42

"인마, 해 줄 거 다 해 주고 챙겨 줄 거 다 챙겨 주는 게, 그게 관리야? 그게 시중드는 거지, 관리야? 해 줄 거 다 해 주고챙겨 줄 거 다 챙겨 줘야 일하겠다는 놈은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놈이야. 관리는 그런 놈들부터 제일 먼저 녹아 내는 게관리고, 걔네들은 관리가 안 되니까! 황 반장도 그런 놈이니까 내 진즉 솎아 낸 거야. 알겠어? 그런 놈들은 해 주고 챙겨줄수록 지가 상전인 줄 안다고. 아쉬운 게 있어야, 뭐 하나 빠지고 부족한 데가 있어야, 그걸 내가 쥐고 흔들 수 있어야 관리가 되는 거야." - P45

"봐라, 너부터 당장 그러고 있잖냐.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소장은 흡족하게 웃었다. 즉흥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퍽 마음에 들었다. 멧돼지를 떠올렸던 그때처럼. - P46

"뭘 저렇게들 떠들까요. 아는 것도 없으면서, 남의 일에."
현경은 윤 씨 주변에 둘러앉아 떠들고 있는 인부들을 보며 말했다.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이 갔다. 선길이 도망갔나 안갔나, 그것 때문에 반장이 소장에게 얼마나 곤란할지 말지 하는 그런 이야기. 윤 씨는 반장과 있을 때는 반장의 비위를 맞췄지만 인부들과 있을 때는 인부들 구미에 맞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주목받고 주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남의 일이니까, 다 가진 게 없으니까 그런 거지. 겸손이니뭐니 해도 자기 자랑하는 게, 남 부러움 받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다 없으니까, 남 일이니까 자기 얘긴 안 하고 못 하는거야. 남 없을수록 자기 없는 게 덜 없어 보이고 남 못날수록자기 못난 것도 덜 못나 보이니까." - P56

그렇게 일은 다시 소장의 뜻대로 흘러갔다. 반장들이 갈라서는 한 필승은 소장의 것이었고 사실 이제 소장은 좀 따분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저렇게들 뻔하고 뭘 모를까. 역시나 관리자에게 필요한 것은 갈라 세우고 갈라 세우고 오로지 어떻게든 갈라 세우는 일이었다. 줄을 세우고 편을 갈라서 저희끼리 알아서 치고받도록, 그러느라 뭐가 중요하고 누가 이득을 보는지 생각도 못 하도록, 인간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지기 싫어한다. 그 속성마저 남들만 그렇고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그래서 싸우고, 그렇게 싸우기 때문에 싸울수록 더 편향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 불신을 극복하지도, 서로 이기거나 져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진흙탕 밑바닥까지 서로 끌고 들어가기만 한다. 그러다 결국 자신들을 끄집어 올려 줄 관리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싸움은 끝나야 하고 누군가는 개처럼 물불 못 가리게 된, 자신들이 아니라 저것들을 따로 가둬야 하니까. - P94

현경은 고개를 파묻었다. 아무리 움직여 보려고 해도 그럴수록 더 친친 감겨드는 덫에 걸린 것 같았다. 어떻게 소장을만나야 할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자기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살아 있고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의 숙명인 것 같았다. 잔인하고 비겁하게 거짓말하거나 침묵하면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죽은 사람에게 떠넘기면서. 그것이 산 사람의 몫, 생존의 대가 같았다. - P141

그것이 중요했다. 이거 먹고 제발 입 좀 다물어 달라는 식이면 나중에 더 내놓으랄 수도, 또 어느 순간 죄책감에 혼자미쳐 날뛸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의 힘은 늘 위대하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믿음은 모든 믿음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세상에서 제일 참혹한 일을 벌였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이 바로 자신은 착하고 항상 착하다는 믿음이었다. 그 사람들은 양민을 칼로 총으로 베고 쏴 죽이면서도 생각했다.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오로지 선행을 베푸는 것뿐이라고. 오, 세상에 정말!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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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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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현대사회에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자발적인 행위를 하지 못한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얻는 물질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를 얻는 과정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사물을 숭배하는 병을 벗어나면 삶의 권태와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결과물을 숭배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
하지만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스스로 사물이 된다면 자각하건 못 하건 병이 들고 말 것이다.
……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우리는 이 질병을 신경증‘이라 부른다.’ (27-28p.)

2장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이성을 진화심리학이나 칸트의 이성을 예시로 들어 대조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속성을 ‘자연의 변덕‘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절대적인 본질을 찾아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의보다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비유를 통해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3장에서는 자유를 실존하는 사실이 아니라 행위로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정의하며, 열정과 노력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첫 장에서 언급했듯이 ‘존재‘가 아닌 ‘소유‘를 추구함으로써 ‘인격으로서의 자신이 되기를 중단‘ (63p.)하였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자발성‘이다. 다만 이러한 자발성에 대해서 우리가 과연 진정한 의미의 자발성을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생각과 느낌, 소망은 물론 심지어 감각적 느낌까지도 주관적으로 우리 것이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고,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의 것일 수 있다’(119p.)
‘스스로 결심을 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관습을 지키거나 의무감에서 혹은 아주 단순히 압박감에서 해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깜짝 놀랄 것이다.’ (135p.)

존재보다는 소유에 집착하는 삶과 자발적인 결정이 결여된 삶은 무력감을 만든다. 그럼 무력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우리의 또 다른 무력감의 원인은 ‘기대‘ 이다.

˝그게 무엇이더라도 외부 상황의 어떤 변화가 급변을 몰고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160p.)

또한 ‘가짜 활력‘에 대한 주의도 준다.

‘만약 학술 논문을 써야 한다면 이들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대신 도서관에서 십여 권의 책을 주문하고 중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전문가들과 면담을 하면서 온갖 시도를 다한다. 그런 행동으로 기대하는 성과를 올리기에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통찰을 회피한다. 과도한 단체 활동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쉼 없는 걱정, 카드게임이나 단골 술집에서 장시간 환담을 나누는 것 또한 다른 형태의 가짜 활력이다’(163-164p.)

사실 전체적인 내용을 되새겨 보아도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명확하거나 간단해 보이진 않는다. 스스로 존재에 대한 확신과 자발적인 활력으로 인간성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타인과의 소통과 사랑까지 언급하지만,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답은 없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 선행돼야 할 것 같은데 이 행동이 과연 주체적인 자발성인가를 또 의심해 봐야하지 않나.
진화심리학을 잠깐 언급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으로 축적되어진 본능이 지금 집단에 동조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 지위가 퇴색되었다는 점을 짚어 줬으면 한다. 특히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삶의 자세라는 점. 그리고 가짜 활력으로 회피하기 보다는 본질적인 활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에리히 프롬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사실 가짜 활력도 인생의 도움이 되기도 한다. 가짜 활력이라도 살아야 그 과정 속에서 진짜 활력의 실마리를 건질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활동 그 자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무게중심이 정확히 거꾸로 되어 있다. 우리는 구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산하는 대신 상품을 팔겠다는 추상적 목적을 위해 생산한다.
모든 유형, 무형의 사물을 돈을 주고 살 수 있고, 돈만 주면다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여긴다. 우리 개인의 특성과 노력의 성공 또한 돈과 명성, 권력을 위해서 팔 수 있는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무게중심이 창의적 활동이 주는 순간적 만족에서 완제품의 가치로 옮겨간다.
인간은 진정으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만족 - 활동의 순간 체험하는 것 - 을 잃고서 잡았다고 믿는 순간 실망을 안겨주는 환영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가짜 행복의 뒤를 쫓아다닌다. - P83

우리의 느낌과 감정 못지않게 독창적 사고 역시 왜곡된다.
처음부터 우리의 교육은 아이의 독자적 사고를 막고 아이의머리에 완성된 생각을 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방법이 어린아이에게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아이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한 손으로, 이성으로세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이 낯설고 거대한 세상에서 방향을 잡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 P93

독자적 사고를 할 용기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교육과정 몇 가지를 더 살피고 넘어가기로 하자. 예를 들면 오늘날에는 사실 - 더 정확히 말해 정보 - 의 습득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한다. 점점 더 많은 사실들만 기억하면 결국에는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비장한 미신을 섬긴다. 상호 연관 없이 이리저리 흩어진 수많은 개별 지식들을 학생들에게주입시킨다.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쓰이기 때문에 정작 사고를 할 시간은 거의 남지 않는다. 물론 사실의 습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허구일 뿐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너무 적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 P95

이 모두는 진리의 관념이 모호하다는 증거이다. 현대인은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ㅡ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이는 인간이해결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이다. 완제품으로제공된 목표를 우리의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악착같이 회피하려는 바로 그 과제인 것이다. - P101

또 가짜 사고가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고의허위성이 반드시 비논리적 사실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 P125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결심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외부의 힘이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확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는 큰 착각이다. 우리가 결심하는 것의 대다수는 실제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외부에서 암시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결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있지만 실제로는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 이유는 고립이 두렵기 때문이며 우리의 삶, 우리의 자유와안락이 직접적인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P133

환자는 변하고 싶고 변할수 있다고 느끼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세상모든 것을 기대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스스로 변화를 위해무언가 할 수 있다는 기대만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그는 의사가 정신분석을 통해 반드시 그에게 결정적인일을 해줄 것이며, 그는 수동적으로 이 과정을 참고 견딜 수있다고 기대한다. 실제로 그 어떤 변화도 믿지 않지만, 위에서 설명한 위안의 합리화로 불신을 은폐한다. - P169

일련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는 사실, 인간이 자기 역사의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 P43

확정된 인간 본성, 인간 본질의 존재를 부인하는 데 일조한 한 가지 요인이 더 있다. 인간 본질이라는 개념이 자주 악용되었고 최악의 부정을 행하는 핑계로도 이용되었던 것이다. 인간 본질의 개념을 언급할 때면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심각하게 의심하는, 심지어 그 개념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18세기의 철학자들까지인간의 본질을 들먹이면서 노예제도를 변호했다. (인간의 평등을 확신한 그리스 스토아학파와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 토마스모루스, 후안 루이스 비베스 같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예외였다.) 국수주의와 인종주의 역시 ‘인간 본성‘을 들먹이면서 탄생했다. 국가 사회주의는 특정 민족의 본질이 우월하다는 주장으로 6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았다. 특정한 추상적 인간본성의 개념을 들먹이며 백인은 유색인에게, 권력 있는 자는권력 없는 자에게, 강자는 약자에게 우월감을 느낀다. 지금까지도 ‘인간 본성‘의 개념은 국가와 사회의 목적에 자주 이용당하고 있다. - P39

우리는 존재를 추구하지 않고 소유를 추구한다.
많은 경우에서 소유가 존재보다 더 강한 현실성을 갖는다.
자신을 소유자로 소외시키는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일 뿐 인간 인격으로서의 자신이 되기를 중단하였다. - P63

일단 우리는 자발성을 갖춘 혹은 갖추었던 사람들을 알고있다. 그들의 사고, 감정, 행동은 자동인형의 표현이 아니라자아의 표현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예술가이다. 실제로 예술가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정의를 인정한다면 - 발자크의 예술가 정의가 그랬다 — 몇몇 철학자와 학자들 역시 예술가라 불러야할 것이다. 그들은 다른 철학자 및 학자들과 구식 사진사와-
창조적인 화가만큼이나 다르다.
예술가만큼 객관적인 수단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은부족하지만 - 혹은 좀 더 훈련할 필요가 있지만 - 예술가와 같은 자발성을 갖춘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런데 예술가들의 처지는 정말 곤란하다. 성공한 예술가의 개성이나 자발성만 존중을 받기 때문이다. 작품을 파는 데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미친놈 아니면 신경증 환자‘ 취급을 받는다. 이때의 예술가는 혁명가와 비슷한 처지이다.
성공한 혁명가는 정치인이 되지만 성공하지 못한 혁명가는 범죄자다. - P79

이 메커니즘의 사례로 재능이 매우 뛰어난 어떤 작가를들 수 있다. 그는 세계문학 역사에 남을 만한 책을 쓰고 싶지만, 쓰고 싶은 내용에 대해 일련의 생각들을 하고 자신의 책이 얼마나 획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까 상상하며 친구에게거의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 벌써 7년 동안이나 책 ‘작업‘을 했지만 실제로는 아직 한줄도 못 썼다. 그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성사시킬 것이라는 상상에 발작하듯 매달릴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일정한 연령 - 평균적으로 40대 초반 - 에 도달하면 각성하여 상상을 포기하고 자력을 활용하려 노력하거나, 아니면 위안을 주는 시간의 착각 없이는 견딜 수 없기에 신경증으로 무너진다. - P162

만약 학술 논문을 써야 한다면 이들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대신 도서관에서 십여 권의 책을 주문하고 중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전문가들과 면담을 하면서 온갖 시도를 다한다. 그런 행동으로 기대하는 성과를 올리기에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통찰을 회피한다. 과도한 단체 활동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쉼 없는 걱정, 카드게임이나 단골 술집에서 장시간 환담을 나누는 것 또한 다른 형태의 가짜 활력이다 - P163

하지만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경험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감정, 즉 정체감이필요하다. 이 ‘자아‘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미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정체감은 우리가 사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개인이 아직 개체가 아닌 원시 사회의 ‘자기‘ 감정은 ‘나는 우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감은 내가 나를집단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이 진척되고 스스로를 개체로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정체감이 집단과 분리된다. 독자적 개체인 그는 이제 스스로를 ‘나‘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자아‘ 감정과 관련하여서는 수많은 오해가 존재한다. 심리학자들 중에는 이 감정을 자신에게 할당된 사회적 역할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타인이 그에게 거는 기대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경험상 그것이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자아의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짙은 불안과 공포, 강박적인 순응의 욕망을 초래하는 병리학적 현상이다. 이런 공포와 순응의 강박은 나 자신을 창의적인 내 행위의 장본인으로 느끼는
‘자아‘ 감정을 키워야만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반대로 나는 나를 타인과의 관계의 과정에서만 ‘나‘로 느낄 수있다. - P197

타인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고립될 경우에는 나의 정체성과 나의 자아라는 감정을 전혀 키울 수 없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나는 정체감 대신 내 인격을 소유한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 나는 나의 소유물이 된다. 나의 지식, 신체, 기억을 포함하여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는 앞에서 설명한 자아의 경험이 아니다. 그럴 때 나의자아는 사물로서의, 소유물로서의 나의 인격에 집착하는 ‘자아‘이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포로다. 감금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불행하고 공포에 사로잡힌 포로다. 진정한 자아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부수어야 한다. 사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 응답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을경험하도록 배워야 한다. 여기서의 역설은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인격의 경계를 초월하며, 나다‘라고 느끼는순간 나는 너다‘ ‘나는 온 세상과 하나다‘ 라고도 느낀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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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읽을 수 없는가 - 인문학자들의 문장을 돌아보다 메멘토 문고·나의 독법 1
지비원 지음 / 메멘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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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지 않는 것은 꾸준한 논란거리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들이 꾸준히 나오는 중에 이 책은 ‘어떤 책’이 나와야 하는가에 대해서 논지를 펼친다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가 ‘책‘ 이전에 쉽게 접하는 글 이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기사와 평론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학술서도 아닌 기사나 논평들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지식이 기초적인 수준이 아니라서, 대중의 접근성을 차단하고 있다.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정작 글쓰는 사람들에게 ‘독자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 독자들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글‘이 어려워 졌는가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정말 멘탈을 뒤흔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우리가 배우는 국민공통교과의 과목들의 이름이 일본에서 번역한 말이라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상식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목명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많은 한자어들이 일본이 서양 문물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일본식의 한자어라는 것을 알면 많이 놀랄 것이다. 본문에 예시로 들어준 박물관, 경제, 민주, 정부, 사고 등 상당히 많은 용어들이 일본식 번역이다. 이런 일본식 번역어의 문제는 우리가 이런 기초적인 개념들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Economy를 경제라고 번역하는 ‘언어 간 번역’만 이뤄져있고 Economy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언어 내 번역’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카세트 효과‘ 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의 위상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있는 말, 그리하여 사람들이 익히고 활용하면서 존중받는 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19p.)

그래도 지금에 와서 일본 내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번역어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기원을 생각해보고 새롭게 풀어쓰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본의 번역어를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음독하여 사용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유래를 파악하려면 일본의 힘을 빌어야 하니 국민의 정서가 심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어나 일본식 표현을 순화하는 운동도 일본식 발음만 순화할 뿐, 이러한 일본식 한자어는 손댈 수 없어 결국 이 난제를 덮어버리고 마는 것이 이차적인 문제이다.

‘개념을 음독하여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개념의 기원과 역사성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하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저 말들은 한국어인 척하지만 원래 한국어가 아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카세트 효과‘의 기능만 강하고, 실제로 카세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개념의 역사성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기 때문에 오히려 개념을 신중단지모시듯이 하면서 ‘바꿔서는 안되는 , 불면의 무엇처럼 생각한다는 점’ (161p.)

나 같은 대중들에게 책이란 것이 왜 어려운가를 명쾌하게 답해준 책이었다. 물론 해결책은 없다.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문제 때문에 이 난제는 더 풀기 힘들어질 것이고, 카세트 효과로 있어보이고 싶은 대부분의 불친절한 지식인들로 인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해서 미진한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뒤늦게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런 글들은 ‘사람을홀리기 위한 글이라는 측면에서 일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측면 때문에 인문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거나 폄하되는 경향이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써볼까 하고 덤비는 잘 쓰인 광고성 글‘의 ‘경제적 가치는 어떤 사람들이 더 나은 가치를 지녔다‘ 라고 생각하는 다른 글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다. - P33

세계화 담론을 주도한다는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프랑스의 구조주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번역서가 ‘신서‘로서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 있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지금보면 분명 공부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의 책꽂이에 가깝겠지만, 1980년대에는 이런 책들을 새롭게 익혀야 할교양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신서뿐만 아니라 당시 이와 유사한 성격의 책을 출간한 유명 출판사들의 출간 목록을 보고 있자면, 학술과 교양을어떤 식으로 구분했는지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 책들이 담았던 지식과 문장의 자장에 오늘날의인문학과 교양이 아직까지도 휘둘리고 있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한편으로는 신서의 세례를 받은 특정 세대의일부 구성원이 왜 저 책들을 읽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며,
어떻게 저 책들을 다 읽어냈는지 정말 존경스럽기도 하다. 반면 어렵고 까다로운 학술서들을 공부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교양으로 읽은 이들이, 학술의 세계와 일상 세계를 좁히는 측면에서의 ‘교양‘을 어떤 문장과 내용으로담으면 좋을지를 보여준 모범이 될 만한 책은 읽지 못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야 그들에게 전공과 상관없는 학술서가 ‘신서‘로서 교양을 담당했고, 그런 배경에서 써온 논문 아닌 글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 P75

그 완고함의 근원에는 결국 ‘그 언어가 유래한 뿌리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언제부터 써왔는지,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언어 내 번역도 거의 불가능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 변화하는 시대·사회·언어와 동시대적으로 호흡하지 못하는 완고한 상태.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라는 안일한 전제, 배경지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한 ‘우리‘를 대상으로 삼지만 정작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리’ 공부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을 필자 스스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문장 안에 그대로 가져오는 글쓰기 습관. 이것이 내가 그동안 부족하나마 여러 인문교양서를 읽으면서, 또는 읽으려고 애쓰면서 생각하게 된,
‘인문학이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상당히 많이 발간된 철학 안내서, 사상가입문서나 해설서 같은 책이 인문교양서의 주류 자리에서완전히 밀려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또 공감도 하는데 말이다. - P99

어원을 밝히는 작업은인류가 최초로 어떤 현상을 인지했을 때 이를 어떤 식으로 파악했고, 현재와 어떤 공통점 혹은 차이점이 있는지, 공통점이 있다면 이를 어떤 식으로 재구성해 왔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과거에는 어떤 현상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개념화했는지, 그것이 지금도 유효한지를 살펴보는 작업이다. 그런데 보통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한국어 사이에 언어 하나가 더 들어가야 함을 많은 이들이 모르거나 일부러 외면하는 듯하다. - P110

게다가이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일제의 잔재‘를 없애려고 노력해왔다. 그중에는 ‘일어 순화‘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늘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꿀 수 있는 말을 바꾸어쓰려는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싶은 것은 바꿀 수 없다고 생각되는 말은 외면해버리는이중 잣대다. - P112

굳이 따지자면 나는 어떤 개념의 번역보다 그 개념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말에는 만드는 사람의 자의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의성을 보편성으로 만드는 게 이를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믿는다. 현재 한국 인문사회계 학술 용어의 현황은 이 자의성‘의 역사성에 대한 성찰이 부족할뿐만 아니라, 이를 더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하려는노력도 부족하다. 현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이 보편적인 학술 용어다‘라는 인식뿐이다. 이래도 괜찮은지,
학술 용어의 기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늘 걱정이앞선다. 이 말들은 정말로 한국어인가? 한국어라면 어떤논리와 근거로 한국어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음독하여들여오는 것도 번역이라면 번역 가운데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는 번역인가? 음독하여 들여오는 번역을 인정한다면 이는 중역인가, 아닌가?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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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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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또 뭐하자는 건가 싶었는데 의도된 느슨함이라니 수긍하려고 한다.
옹주의 이야기는 흡입력이 있었다. 감동이었다.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민영은 그런일을 매우 자주 저질렀다. 남들과 똑같이 말하고, 별다를 것 없이 행동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늘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
민영은 요령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이 원하는 걸요구할 때, 타인을 짜증 나지 않게 하는 법을 전혀몰랐다. 물론 그 나이에 그런 감각을 갖고 있기란 어렵다. 하지만 민영은 유독 미숙했다. 그 애는 늘 속이 훤히 보였다. 무엇을 얼마나 바라는지, 얼마나 간절한지, 그래서 얼마나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지 전혀 숨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짜증 나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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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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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다. 사소한 나비의 날갯짓처럼 파국으로 치닫고 마는 일의 시발점은 미미하거나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민과 수호는 폐점한 가구점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 채 시간이 겹치지 않게 현실의 도피처로 가구점에 머무는 사이다.
민의 인생은 의도하지 않은 사건과 우연으로 삶의 전환을 자주 맞게 된다. 그의 결혼 예정자였던 종우와는 C사의 회계 조작, 인원 감축, 파업과 공장 노동자의 분신자살 등으로 퇴사와파혼을 맞는 등의 시련을 겪는다. 파혼 후에도 민은 신혼부부에게 중매를 해준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가 버려 의도치 않게 불행에 가담한 꼴이 되고 만다.

‘그도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51p.)’

종우도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해고를 의도하지 않았듯이 민 역시 신혼부부의 전세보증금을날리는 일에 가담할 의도는 없었다. 신혼부부를 향해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민에게 과거 종우가 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민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때의 ‘허약한 지점들이 복기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악한 의도도 없이 누군가의 삶이 고통스러워졌던 때가.

반면 수호의 삶은 허약한 지점들 없이 누군가 악의에 의한 불행들이 계속된다. 아버지의 실패와 집안의 가난, 쇼핑센터의 진상 민원과 노동자 인권은 안중에 없는 센터장, 불법 노점상신고 등으로 고단하고 지난한 삶이 이어지고, 연주와 같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도 멀어진다. 하지만 민과 수호의 삶은 결국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는 연속적으로 벗어나기 힘든 고난의 굴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행 작가가 꿈이었던 수호에게 연주의 카드에서 훔친 100만원의 의미는 잠시 지난한 자신의삶을 떠나 다른 도피처로 여행하는 자금과 같았다. 연주의 돈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가구점에서 얼굴도 모른 채 서로를 의식했던 민을 만나고, 연주를 미행하며 자신 못지않은 연주의 좌절과 분노를 엿본다. 그리고는 아무런 적의 없이 수호에게 할 도리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며 선량을 베푸는 민에게 자신이 훔친 돈과 지갑을 연주에게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한다.

‘사과나 용서 같은 아름다운 절차를 질리는 사람과 공유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이제 그녀는 좀처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타인을 믿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한 뼘씩 멀어질 것이다. (144p.)’

민은 그때 종우에게서 자신들의 공동명의로 구입했던 일산의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선우를 만나러 간다. 서로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그렇게 기계적으로 차갑게 끊어버린 마지막 날 민은 생각한다.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니,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종우가, 그의 무모한 선택이, 무리에서배제된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순간..... 아니, 부끄러운 건 그가 아니라 민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할 수가 없어서,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부끄러움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리라. 부끄러움의 뒤편은 외로웠으나, 대신 안전했다. (157 p.)’

100만원의 여행자금도, 종우와의 재회도 수호와 민에게는 새로운 해결점이나 다른 인생의 도약을 가져다주진 못했다. 민이 공인중개사로 일하면서 습관처럼 행동했던 매물로 올라온 집에주인 없을 때 몰래 들어가 다른 삶을 사는 것도 잠시일 뿐, 곧 자신의 삶의 위치로 되돌아온다. 또 그들은 자주 과거와 연결된 수치심을 복기시키는 꿈도 자주 꾼다. 그렇게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그들의 삶은 계속 허물을 벗어버리듯 과오와 부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삶을 회피하지만 결국 인생의 다른 열차가 아닌 같은 열차의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데 밖에 그치지 못한다.

‘삶이란 결국, 집과 집을 떠도는 과정이 아닐까. (44p.)’
‘곧 문이 닫혔고, 30분짜리 생애도 끝났다. (52p.)’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수많은 칸들이 연결된 기차처럼 각기 다른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어제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의 포부따위 갖지 않는, 그저 그 순간만을 살다가 죽는 것이 가능하다면 응급실의 노인을 떠올리며, 미리 슬픔에 잠식될 필요도 없을 터였다. (9p.)’

조해진 작가의 작품에서 희극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남의 비극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비겁한 위안이 아닌, 삶의 비극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칸으로 이동하여 결국 꿋꿋하게 버티고 견뎌내는 것을 배운다. 내 인생에서 다른 열차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같은 열차 안에서 다른 칸으로 옮겨 탄다고 내 인생의 열차가 다른 종착지를 향하지는않을 것이고, 그렇게 체념한들 이 열차가 멈춰 서지도 않을 것이다.

가난은 갑자기 쌀이 떨어지거나 전기가 나가는 식의 상투적인 장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작고 구체적으로, 저마다 다른 형태로, 그러나 비참함을 느끼게 할 만큼은 충분히 강렬하게일상과 일상의 틈새로 날카롭게 스며드는 것이다. 수호는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동생의 뺨을 칠까 봐 겁이 났다.
남은 밥을 한 번에 떠서 입안에 욱여넣은 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지만, 문을 통과한 동생의 흐느낌은 끈질기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 P39

삶이란 결국, 집과 집을 떠도는 과정이 아닐까.
타인의 집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면 민은 그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한 시절 거주한 집은 그대로 삶의 일부가 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집은 존재의 시간을 증명한다. 실제로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 P44

화장대 앞에 앉아 산호색 립스틱을 집었다. 군데군데 손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이 집의 화장대 거울은 그리 흐릿하지않았다. 아니, 감출 것도 위장할 것도 없다는 듯 지나치게선명하기만 했다. 아쉬운 건 없었다. 흐릿한 생애는 지금 거울 밖에서 펼쳐지고 있으니까. - P45

그즈음 그도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어쩌면 민보다 더 절박하게, 더 구체적으로, 그럼 이곳은 흐릿한 곳일까, 명료한 곳일까.
진짜 세계인가, 거짓으로 빚어진 허상인가. - P51

상황을 파악한 회사의 반응은 예민했고 그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민첩했다. 회사는 종우에게 의견서와 관련된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공문서 위조죄와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겠다고 정중하게 위협했고, 뒤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자료를 폐기하거나 은폐했다. 회사에는 종우의 편이 없었다. 그의 행동은 정의가 아니라 비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만들어진 허상, 아니면 유치한 과대망상. 그의 정의를 인정하면 자동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 그러니까 부도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그 상황은 모두에게 껄끄럽고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옳은 것, 그리고 옳지 않은 것이 종우의 믿음만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었다. 회계사의 서류는 중립적인 숫자들의 조합일 뿐, 거기에 선의도 악의도 없었다. 그러니 일자리를 잃은 자의 좌절과 그가족들의 현실적인 고통은 의도나 목적이 될 수 없었고, 그저 일의 파생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 P94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가정, 그런 안개 같은 가정들. 매 순간 숨을 옥죄어 왔던, 그러나 감정의 차원에서만 세워지고 무너지길 반복했던 텅 빈 성전(聖殿) 같은 고통일뿐이란 걸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민이었다. - P96

할머니에게서 딸과 손자가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관계가 틀어진 연유나 그들의 처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민이 아는 건 드러난 사실뿐이었다. 그들이 할머니를 외면했다는 것, 할머니를 혼자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는것, 그런데도 저곳에 앉아 울고 있다는 것, 그 기묘한 어긋남이었다.
용서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어긋남………..
남자아이가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난 순간, 민은 그대로 돌아서서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그들과는 애도를 나눌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의슬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의 슬픔과 자신의 슬픔이 교환되고 공유되어결국 같은 무게로 남게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게 가장 솔직한 심정인지 몰랐다. - P112

그녀가 사라진 100만 원에 대해 침묵을 선택한 것, 그것은 수호 앞에 던져진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수호가 할 일은 그녀의 침묵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 사건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조차 가치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질리는 사람일 테니까, 돈을 되받기 위해 질리는 사람과 다시 만나야 한다면 그 돈을 포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사과나 용서 같은 아름다운 절차를 질리는 사람과 공유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이제 그녀는 좀처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갈것이다. 타인을 믿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한 뼘씩 멀어질 것이다. - P144

그를 외면했으며 동시에 그에게서 버려졌다.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니,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종우가, 그의 무모한 선택이, 무리에서 배제된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던 순간……. 아니, 부끄러운 건 그가 아니라 민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가 없어서,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으므로 부끄러움 뒤에숨어 있었던 것이리라. 부끄러움의 뒤편은 외로웠으나, 대신 안전했다. - P157

수호는 창밖의 운동장이 육신을 잃은 영혼들의 대합실 같다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먼 곳으로 여행을다녀온다 해도, 온 생애에 걸쳐 두고두고 회상할 엄청난 경험을 하고 돌아와도, 결국엔 저렇게 황량한 곳이 생의 최종 목적지가 될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기대하는 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루를 살다가 다음 날이 되면 미련이나 고통 없이 그 지나간 하루를 인생의 총합에서 마이너스하는 것, 사는 게 그것만은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서 여행 작가니 여행 가이드 같은허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 P163

발을 헛딛는 것쯤은 이제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오직 하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오늘뿐이었다. 단절이나 휴지 없이 이어지는 단 하나의 생애, 그 관성이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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