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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ㅣ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평점 :
화자에겐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6살의 나이로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지네트라는 언니가 있다. 이는 10살 때 우연히 엄마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엿들으면서 알게 된다. 그런 화자는 언니를 성모처럼 신성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실체가 없는 텅 빈 형체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5살 때 파상풍으로 죽다 살아났는데, 그때 자신은 이미 죽었고 다른 사람, 글을 쓰기 위해 지난 자신의 육체를 빌려 들어온 새로운 자아라고 생각한다.
부모와는 언니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서로 과거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으며 말을 꺼내선 안 되는 비밀과 침묵으로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건 예의나 배려라기보다는 괴롭힘에 가까웠고,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남아있게 됐다.
지네트의 나이인 6살을 넘어가자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진 부모는 화자가 거북하기도, 벅차기도 했다. 지네트가 착한 딸이라고 했던 엄마의 말로 인해 ‘나쁜 딸’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화자는 6살 때까지는 부모에게 지네트를 연상하기 위한 도구로 다뤄졌다 생각한 것이다.
화자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죽은 언니의 그늘로 여기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고 깊은 원한으로 남았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담담하게 죽은 언니에게 고백한다.
지네트가 언니였다면이라는 가정은 화자에겐 고통이다. 외동을 고집했던 부모에게 둘은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부모에겐 고통스러운 언니라는 존재를 대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에 지배당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로 인정받기보다는 존재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불완전함에서 오는 결핍에 대한 분노가 응어리로 남아있다.
외동을 고집했던 부모는 꼭 외동이라는 원칙을 위해서 지네트를 슬픔에 묻어두고 비밀로 간직해야 했을까. 진실을 나누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려 소통을 포기하게 되고, 서로에게 의심스러운 추측과 그로 인한 상처만 남게 된 것처럼 보여 안타까웠다. 나 스스로 완전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를 전제해야 존재가 증명되다니, 그 자아의 공허함을 평생 고통으로 간직하고 살아야 했단 말인가.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사진이 그렇듯, 이야기의 장면도 한 곳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않습니다. - P19
난 외동딸이었기에 응석받이였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반에서늘 1등을 했어요. 말하자면, 나인 모습 그대로 살아갈권리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 P21
내게 가장 잘 맞는다고 여겨진 단어는 ‘잘 속는‘이었답니다. 치욕적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는 잘 속는 아이였어요. 그동안 착각 속에서 살았던 거지요. 난 외동딸이 아니었어요. 무에서 솟아난또 다른 아이가 있었으니까. 내가 받았다고 믿었던 모든 사랑은 가짜였던 거예요. - P25
50년대에 어른들은 아이들의 귀는 무시해도 된다고 여겼고, 단지농담의 대상인 성적인 이야기만 제외하고는 아이들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모든 걸 얘기할 수 있었어요. - P29
나는 처음부터 ‘우리 어머니‘라든가 ‘우리 부모님‘이라고 쓸 수도, 세 명으로 이루어진 내 유년의 세계에 당신을 끼워 넣을 수도, 공동의 소유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어요. - P45
침묵은 그들과 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이 나를 지켜주었어요. 가족 중에서 죽은 아이들을 숭배해야 하는 부담을 피하게 해주었으니까요. 그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알 수 없는 비참한 마음을 안겨주어요. 내가 분노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그 당사자였으니까요. - P54
‘당신‘은 덫입니다.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가진채, 역겨운 슬픔의 냄새를 풍기며 당신에 대한 가상의친밀감을 만들어내요. 나를 비난하려 가까이 다가오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믿게 하며, 당신의 죽음을 우위로 두어 내 존재 전부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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