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러키 스타트업
정지음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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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 무조건적인 상대의 비난에 물린지 오래지만 그래도 재밌다.

박국제는 어떤 미팅에서든 본론보단 기선제압에 용쓰는 사람이었다. 제시간에 갈 수 있음에도 일부러 늦게 도착하기, 회의 내용을 숙지하지 않고 상대방에게재차 설명하도록 만들기, 느슨한 존대에 비아냥거리는 반말을 농담처럼 섞기. 의미 없는 기선제압은 상대방이 어린 여자일수록 은밀해졌다. - P29

- 서경 언니가 조언하길…… 상대에게 큰 실망을 선물하고 싶다면 먼저 기대감을 키워 주래. 기대가 클수록 깨졌을 때 실망도 충격도 커지는 법이라고. 배신하고 싶으면 더충성하고, 절연하고 싶으면 더 친해지고, 헤어지고 싶으면더 사랑하래. 처음엔 이 언니 뭐야, 되게 무섭다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 P78

용도가 결백하지 않을 땐 ‘크리에이티브‘, ‘린‘, ‘그릿‘등의 단어도 금지해야만 옳았다. 그것들은 원래의 건강한의미를 잃고, 스타트업 대표가 노예에게 산업혁명을 떠넘길때나 쓰이게 된 지 오래였다. 사람을 노예처럼 다루는 자의최후는 노예혁명뿐이라는 걸…….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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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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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무엇도 해석하려하지 않았어. 어떤 것은 다른 것의 결과일 뿐이라고 여겼지. 당신도주변 세계가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며 춤을 추도록 내버려두는 타입으로 보여, 당신도 자신을 직접 연루시키기보다는 경험들이 스스로를연출해 보일 수 있도록 배려하는 편이라는 의미야. 당신은 세상이 당신을 위해 마련된 성탄절의 선물 축제인 듯 행동하지. 당신은 포장된 선물 꾸러미가 하나하나 풀어지는 모습을 공손하게 지켜볼 뿐이야. 그 일에 관여하는 것은 무례한 태도가 되겠지. 당신은 사건이 일어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무엇인가 당신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면그제야 놀라서 해결하려고 나서지. 그러고는 그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감탄하면서 그것을 이전에 경험했던 수수께끼와 비교해보기도 하고 말이야.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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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공무원 생리학 인간 생리학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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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와 비슷한 듯 아닌 듯.

발자크의 소설 중 이 정도 냉소는 겪어본 적이 없는데, 소설 외의 형식이다보니 본색이 드러나는가 싶을 정도로 신랄한 것이 충격적이다. 에밀 졸라가 생각났는데, 해설을 보니 순서가 바뀌었다. 졸라가 발자크의 영향을 받았다.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때 그의 냉소와 풍자를 유심히 찾아봐야겠다.

살기 위해 봉급이 필요한 자, 자신의 자리를 떠날 자유가 없는 자, 쓸데없이 서류를 뒤적이는 것 외에 할줄 아는 게 없는 자.

철학자라면, 약간 의사라면, 약간 생리학자라면, 약간 작가라면, 약간 행동관찰가라면, 약간 골상학자라면, 약간 자선가라면, 우리 시대 편집증의 산증인인 공무원의 정신상태가 심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제3장에서 ‘백치로 만들다‘라는 동사를 가지고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몇 년 동안 사무실에서 똑같은 일만하면 그런 불운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깃털 포유류가 이 직업으로 인해 백치가 되는 건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약간 백치였기 때문에 이 직업을 택하는 것인지, 뭐가 더 맞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회계사는 기계처럼 또는 의미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처럼 주고받는 것에 능하다. 하는 일이 ‘회계‘ 이다 보니 자신을 화폐처럼 다룰 줄 아는 것이다. 쥐며느리처럼 창구에 딱 붙어 해고 걱정 없이 은신하면 되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을 그리고 싶다면 장관 부처의 금고 창구에 딱 붙어 있는 포동포동하고 반반한 얼굴을 그리면 된다. 이 자들은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다.

이 청년은 정치인은 아니지만, 정치적 인간이거나 인간 정치 그 자체다. 거의 항상 젊은 사람인데, 장군에부관이 있듯 장관에 보좌관이 있는 것이다. 그의 역할은 밀착전담이다. 그는 장관의 필라테스이다. 장관에게 아첨하고 충언한다. 아니, 충언하기 위해 아첨하고, 아첨하면서 충언하고, 충언 아래 아첨을 감추기도 한다.
새파란 젊은이는 얼굴이 누렇게 뜬 채 장관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인데 소통을 해야 하니 아는 척을 하느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도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척할 것이다. 그들은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도‘ ‘그러니까 저라면‘ ‘당신 입장이라면 저는 같은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산다. 문장마다 이미 모순어법이 준비된 것이다.

순진하고 순박하며 어떤 환상에 젖어 있는 자다. 하기야 환상 없이 어찌 살 수 있을까? 예술이라는 ‘성난황소‘를 실컷 먹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모든 기초 과학을 게걸스럽게먹어 치울 수 있는 힘을 주는 게 이런 환상 아니던가. 환상이란 과도한 믿음이다!

두 종류의 임시직밖에 없다. 가난한 임시직과 부유한 임시직
가난한 임시직은 희망만큼은 부자이다. 자리 하나만 주면 된다. 부유한 임시직은 정신만큼은 가난하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부유한 집안의 이름난 재사라면 관청에 들어가겠다고 그렇게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수집가
관공서 일은 교대 근무를 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따분한 일이다. 이 권태를 다른 열정으로 풀게 하는데, 직원들 정신 상태가 완전히 불이 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행정부마다 수집가나 예술가가 없는 부처가 없다.
정리 정돈을 좋아하고 세심하고 꼼꼼한 수집가는 자신의 승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생활할 수 있을 만큼만 벌고 취미에 몰두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국가는 공무원에게 아주 적은 비용을 들이지만, 공무원은 두 배의 실존을 요구받는다. 정부 일과 산업 일 둘 다 공유하면서 해내야 한다. 그 결과 일은 더 힘들어지니 천천히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모든 공무원은 사무실에 9시에는 출근하지만, 대화하고 설명하고 토론하고 깃털 펜 다듬고 밀통하다 보면 벌써 오후 4시 반이다. 노동 시간 가운데 50퍼센트는 이렇게 날아간다. 20만을 지불하면 되는 일에 1천만을 지불하는 꼴이다.

적게 받기 때문에 적게 일한다.

두 친구는 평화 시에는 함께 흐르는 강물을 보며 낚시의 기쁨을 누리다가 전쟁 시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갈라설 수 있다.

프랑스 문학에서 ‘생리학‘ 시리즈가 대유행한 것 1840~1842년 무렵이다. 이 용어는 이중적인 함의를 갖는데, 하나는 내용적인 면이고 하나는 형식적인면이다. 인간 또는 인간 사회를 더는 관념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이제 동물이나 식물의 분류법처럼 인간 또는 인간 유형을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분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나름의 생존방식에 따라 생리적 기질대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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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에 대하여 - 지금, 깊은 상실을 겪고 있는 당신에게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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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똑똑한 사람들도 슬픔 앞에서는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슬픈 감정도 절망한 상태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누군가를 잃는 슬픔은 잔인한 종류의 배움이다. - P14

슬픔은 내게 새로운 거죽을 씌우고 눈에서 비늘을 벗겨 낸다. 나는 과거의 확신들을 후회한다. 너는 물론 애도하고, 이야기로 풀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돌파해야 해. 아직 진정한 슬픔에익숙하지 않은 자의 우쭐대는 확신이었다. - P23

너무 깊게 생각할 엄두를내지 않는다. 안 그랬다가는 고통뿐만이 아니라 숨 막히는 허무주의에 질 테니까. 아무 의미도 없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아무것에도 아무런 의미도 없어, 라는 생각의 반복. 나는 의미가있길 바란다. 설사 지금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내가 모르더라도. 현실 부정에는 품위가 있다는축스 오빠의 말을 속으로 되뇐다. 이 현실 부정,
이 외면은 피난처다. - P24

나는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닌다. 친절한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사실을 안다고 해서 상처를 덜 받지는 않는다. - P36

"그 사람은 좋은 선생이 아니구나. 문제를 못 풀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모른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기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모를 때 모른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걸까? 아버지는 내게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했다. - P50

친구가 내 장편 소설의 한 구절을 보낸다. "애도는 사랑에 대한 찬미다. 진정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진짜 사랑을 경험한 운 좋은 사람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쓴 글을 읽는 것이이토록 고통스럽다니. - P78

나이지리아는 늘 그렇듯이 모든 일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든다. 다채로운 무능이 사방으로 사지를뻗어 사악한 광채로 모든 것을 오염시킨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환멸은 어제오늘 일이아니지만 이 정도로 강렬한 적대감은 신선하다. - P84

어떻게 자신의 무의식이 그토록 잔인하게 자기를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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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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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에겐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6살의 나이로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지네트라는 언니가 있다. 이는 10살 때 우연히 엄마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엿들으면서 알게 된다. 그런 화자는 언니를 성모처럼 신성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실체가 없는 텅 빈 형체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5살 때 파상풍으로 죽다 살아났는데, 그때 자신은 이미 죽었고 다른 사람, 글을 쓰기 위해 지난 자신의 육체를 빌려 들어온 새로운 자아라고 생각한다.
부모와는 언니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서로 과거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으며 말을 꺼내선 안 되는 비밀과 침묵으로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건 예의나 배려라기보다는 괴롭힘에 가까웠고,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남아있게 됐다.

지네트의 나이인 6살을 넘어가자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진 부모는 화자가 거북하기도, 벅차기도 했다. 지네트가 착한 딸이라고 했던 엄마의 말로 인해 ‘나쁜 딸’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화자는 6살 때까지는 부모에게 지네트를 연상하기 위한 도구로 다뤄졌다 생각한 것이다.

화자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죽은 언니의 그늘로 여기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고 깊은 원한으로 남았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담담하게 죽은 언니에게 고백한다.

지네트가 언니였다면이라는 가정은 화자에겐 고통이다. 외동을 고집했던 부모에게 둘은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부모에겐 고통스러운 언니라는 존재를 대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에 지배당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로 인정받기보다는 존재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불완전함에서 오는 결핍에 대한 분노가 응어리로 남아있다.

외동을 고집했던 부모는 꼭 외동이라는 원칙을 위해서 지네트를 슬픔에 묻어두고 비밀로 간직해야 했을까. 진실을 나누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려 소통을 포기하게 되고, 서로에게 의심스러운 추측과 그로 인한 상처만 남게 된 것처럼 보여 안타까웠다. 나 스스로 완전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를 전제해야 존재가 증명되다니, 그 자아의 공허함을 평생 고통으로 간직하고 살아야 했단 말인가.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사진이 그렇듯, 이야기의 장면도 한 곳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않습니다. - P19

난 외동딸이었기에 응석받이였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반에서늘 1등을 했어요. 말하자면, 나인 모습 그대로 살아갈권리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 P21

내게 가장 잘 맞는다고 여겨진 단어는 ‘잘 속는‘이었답니다. 치욕적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나는 잘 속는 아이였어요. 그동안 착각 속에서 살았던 거지요. 난 외동딸이 아니었어요. 무에서 솟아난또 다른 아이가 있었으니까. 내가 받았다고 믿었던 모든 사랑은 가짜였던 거예요. - P25

50년대에 어른들은 아이들의 귀는 무시해도 된다고 여겼고, 단지농담의 대상인 성적인 이야기만 제외하고는 아이들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모든 걸 얘기할 수 있었어요. - P29

나는 처음부터 ‘우리 어머니‘라든가 ‘우리 부모님‘이라고 쓸 수도, 세 명으로 이루어진 내 유년의 세계에 당신을 끼워 넣을 수도, 공동의 소유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어요. - P45

침묵은 그들과 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이 나를 지켜주었어요. 가족 중에서 죽은 아이들을 숭배해야 하는 부담을 피하게 해주었으니까요. 그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알 수 없는 비참한 마음을 안겨주어요. 내가 분노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그 당사자였으니까요. - P54

‘당신‘은 덫입니다. 숨 막히게 하는 무언가를 가진채, 역겨운 슬픔의 냄새를 풍기며 당신에 대한 가상의친밀감을 만들어내요. 나를 비난하려 가까이 다가오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믿게 하며, 당신의 죽음을 우위로 두어 내 존재 전부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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