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
실비아 플라스 지음, 진은영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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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는 목적도 불확실한 이 폭주기관차에서 뛰어 내려야 한다.

"어머니, 저 오늘 못 가겠어요. 절대로 못 가요. 아직 여행할 준비가 안 돼 있단 말이에요."
"무슨 소리니, 메리."
아버지는 딸의 말을 쾌활하게 가로막았다.
"너는 단지 과민해졌을 뿐이야. 북부여행은 고생이 아닐 거다. 그냥 기차를 타는 거야.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건 걱정하지 마라. 승무원이 그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줄 테니까." - P12

"맞아요, 이 노선의 종착지. 아버지는 내가 연결차편이나 뭐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거기서 어디로 가야 할지는 승무원이 말해줄 거래요." - P38

"눈멀지 않았어. 귀가 먼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어쩌다 보니 기차가 더는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되었어. 아홉 번째 왕국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의정차는 예정에 없단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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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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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이 과하면 난잡성(?)이 된다.

쥴리아나 도쿄를 보고 앞으로 나오는 한정현 소설을 좋아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젠 좋아할 뻔했다고 해야겠다.

짧은 분량에 작가가 소화할 수 없는 설정을 해 놓아 소설이 너무 산만하다.
여장 남자 운서는 언론사의 기자이다. 운서는 트랜스 젠더가 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여성인 가성을 사랑하는데 이것은 마치 작가가 트렌스 젠더만으로는 신선함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생각했는지 트렌스젠더와 레즈비언을 혼합해 억지스러운 잡종을 탄생시켰다는 느낌이다.
반면 중성적인 외모를 지향하는 페미니스트이자 검안의인 가성의 정체성은 너무 전형적이고 진부하다. 페미니스트와 중성적인 이미지가 필연적이라는 논리는 언제 사라질까? 페미니즘과 여성성은 상호배타적이라는 선입견을 키우고 있는 주인공 답게 만나는 남자들에게 맞고 외도당하고 팔자가 아주 사납다.
자웅동체로 태어나 간성인 수술을 받고 현초의와 연대해 가는 호텔포엠의 사장 에리카까지 너무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해 난잡해진다. 이러면 정말 성‘소수’자들이 진정한 ‘소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성소수자들을 제외하더라도 등장인물들의 서사는 파라만장하다. 비구니로 자라다 기생으로 팔리고 마약 운반 혐의를 뒤집어 쓸뻔하지만 가성의 도움으로 풀려난 송화는 거창한 배경설명에 비해 비중도 없다.(폭력과 역사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소설쓰기?)
세 명의 용의자 중 하나인 ‘모던조선’ 편집장 선주혜는 윤박에게 화대를 요구 받다가 윤선자의 누명을 풀어주기 위해 죽이지도 않은 윤박을 죽였다고 자수를 한다. 현초의는 편집장 선주혜를 찾아가 윤박에게 자신의 원고를 갈취당한 사실을 고한 적이 있고, 선주혜는 원고에서 한 문장도 말하지 못하는 윤박을 압박하다 감금을 당한다. 끝내 현초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윤박의 식모살이를 한 윤선자는 윤박이 갈취한 현초의의 원고를 대필하는 일을 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며, 지속적인 성상납도 요구받는다.
미군정 치하에 미군을 체포할 수 없으니 죄를 주변 여성인물들에게 뒤집어씌우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형사과장이자 가성의 상사인 양준수의 첫 등장부터, 가해자를 밝히고 사실 속에 더 험한 진실을 밝혀내는 구성은 좋았다.
다만 한정현의 소설에 더 이상 퀴어들이 이용당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소자도, 여성도 소설과 역사적 배경에 억지로 짜맞추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쳤다.
매력적일 수 있는 캐릭터들을 창조해 놓았지만 아무도 제대로 빛나지 못했다. 아깝다, 차용해온 역사도, 성소수자라는 소재도.

국가에 쓰임을 증명하는 것. 가성은 증명이라도 할 수 있는 명문대 남학생들의 처지가자신과는 퍽 다르다고 느꼈다. - P40

관계를 확인한다지만 친구라는 건 정말 아무런 대가도 기준도 없는 관계였다. 가성에게 그래서 친구는 더욱 어려운 존재였다. 가성은 어릴 때부터사람들이 이상할 때가 있었다.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밥 한번 먹었다고 친구라고 이름 붙이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친구라는 것은 그저 자신들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을 거른후 ‘같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끼리 맺는 동맹처럼보였다. 일본인들은 일본인만을 친구로 생각하여조선인들을 착취하고 또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들끼리 급을 나누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 P108

"이곳에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남자이고 좌익이거나 우익일테죠. 여성과 아이와 노인의 목숨따윈 안중에도 없겠죠. 이 조선 땅에서 저 순교같은 거 안 합니다." - P129

하지만 가성이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남아 있는 삶과 연결되곤 했다. 꼭 범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누군가를 기억하거나 애도하면 죽었어도 살아 있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반대로 살아 있어도 잊혀져버리면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가성은 가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죽은 이와 살아 있는 이, 누구를위로해야 하는지도 말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 P141

남성과 여성이 한 몸에 있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에리카도, 그의 부모도에리카가 두 가지 성을 가진 것에 큰 관심을 두지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농사에 필요한 것은 아들이었기에 계속 남자아이로 키워졌을 수도 있고 후에의사에 따라 여자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혹은두 가지의 성을 다 가지고 살아갔을 수도 있었다.
운서는 폭력의 가장 위험한 측면이 그거라고 생각했다. 가능성의 삭제. 에리카는 그때 그 모든 가능성을 빼앗긴 것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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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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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리아나 도쿄>를 읽고 한정현의 소설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소녀 연예인 이보나>를 보며 작가가 왜 이렇게 됐지 싶다가 <마고>를 통해 아주 큰 실망을 하고 결국 산 책이기 때문에 읽어 본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까지, 정말 한정현의 책은 더 이상이 궁금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피해야 할 책이 되었다.

한정현의 이분법적인 성대결이야말로 진정한 폭력이다. 성폭행만 폭력인가.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성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강간을 위해 태어나는 존재는 아니다. ‘이상하게 여성들은 변화된 점이 꽤나 있는 것도 같은데 남성들은 확실히 변화하는 면이 적은 것 같고요’(376p.) 같은 편견도 서슴없이 드러내는 이 소설에서는 지연, 도영, 춘희, 의선은 물론 설영의 할머니는 공장에서 관리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심지어 사격장 강사인 메이까지 선수촌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나온 사람이다.

당하고만 사는 사람들은 순결하다는 논리.

이걸 근거삼아 아주 고약한 행패를 부린다.

여성과 퀴어를 어떻게 해서든 불행으로 몰아가는 것이 한정현의 주특기이며, 세상의 모든 불행이라면 개연성 따위는 무시하고 억지로 여성의 삶에 가져와 배치해 버려야 만족하는 작가이니, 이제 이 정도 고집이 과연 여성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보탬이 되려는 것인지, 남성들의 성인지 감수성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되려는 것인지 스스로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불행만큼 한정현이 또 하나 집착하는 것이 추리소설 흉내 내기이다. 억지스러운 설정과 개연성 없는 불행에 추리소설까지 따라해 보려고 사건을 역순으로 구성해 버렸는데, 아쉽게도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개가 없다. 궁금증을 유발해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게 해야 하는데, 시간 순서만 꼬아놔서 독자를 혼란하게 하는 것 말고는 잘한 게 아무것도 없다.

알라딘에 중고로 1200원에 팔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솔직한 게 좋다고 하면서도 정작 솔직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솔직하게 산다는 건 친구들의 말처럼 무언가를 가졌을 때에야 가능하니 어려운 일이긴 했다. - P11

정확히 말하자면 돈에서 오는 안정감을 갖고 싶었다. - P33

비록 누군가에게 말하진 않았어도 자신이 신바에게 불만을 그렇게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건 어쩌면신바가 자신보다 약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연 신바가 정교수에 헤테로 남성이라면 자신이 과연 곧장 그런 불만을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었을까 설영은 스스로에게 궁금했다. - P56

그런데 말이에요, 그 산 위에서조차 약한 사람들은 그렇게 늘 아무렇게나 건드려도 된다는 식의 취급을 당했어요 - P74

신바는 확실히 일상 전시 자아와 본연의 자아가 따로 있는 사람이었다. - P79

"세츠에 상, 저는 일본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싫어요.
외적으로 잔잔하고 평온한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 일을저질렀는지……… 물론 좋은 사람 많지요. 그런데 저는 가끔은… 평온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갖는 면죄부 같은 게 아닌가 싶게 느껴집니다, 이 나라에서요. 그러니까, 그저 누군가의 몹쓸 짓을 못 본 척하는 데 그 평온함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 말이에요. " - P82

뭔가 보수적인 것을 넘어서는 답답함에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대구라는 지명을 가져오곤 했는데 그 역시 어딘지 혐오인 줄 모르는 혐오 같은 느낌이었다. 설영은 이날 자신이 이야기에서 겉돌고 있다고 느꼈다. - P93

설영은 남자가 사용한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들끼리 서로 물어뜯게 하는 것, 권력의 최상위층이 가장 잘하는 방식이었다. 자신들은 조금도 나서지 않은 채약한 자들끼리 치고받게 해서 결국 한쪽은 죽고 한쪽은 자신에게 영원히 종속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 - P134

사람들은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을 혐오하는 존재에게 뒤집어씌운다. - P169

"연정아, 우리 업계가 그런 말을 하잖아. 성형은 원본이없어지는 거라고. 그래서 더 예민한 거라고. 근데 나는 자주생각했어. 아니, 요즘 더 자주 생각하게 됐어. 원본이라는게 사람들에게 대체 뭘까, 하고." - P182

그들은 여자들을 마릴린 먼로에 비교하면서 여자들조차 마릴린 먼로를 비난하게 만들었다. 권력자가 만들어낸, 권력 없는 사람들끼리 물어뜯는 구조, 연정이 느끼기엔 그랬다. - P184

상담실장의 어머니는 부도가 난 병원의 시술 기계를 중고로 빼돌리는 업자에게서 넘겨받아 무허가 시술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단속에 걸렸을 때 그 업자가 한 말은 이거였다. "나는 반성 안 해. 얼굴 뜯어고치려고 한 여자들인데, 이게 무슨 죽을병 걸린 사람을 내가 속인 거야? 어디 사람죽었어?"
마음을 죽였겠죠, 연정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외모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건, 적어도 성형외과의로서는합의해주기가 힘든 말이었다. - P253

하지만 어느 날 신문에 씌어져 있던 ‘성괴‘라는 단어를 보면서 연정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연정이 보기에여성들의 외모에 신경 쓰는 건 오히려 남성들 같았다. 텔레비전 예능에서 범죄를 저지르려던 사람이 여자의 얼굴을보고 도망친다는 말도 안 되는 개그를 웃어넘길 수 없던 것도 그 이유였다. - P260

"네, 그런데 다시 만난 윤설영 씨는……… 서로 사랑했던,
그리고 이지연 씨가 너무 괴로워했던 마지막 8개월의 기억이 없는 채였어요. 아무리 좋은 의도라지만 굳이 그 아픈기억을 말해줘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게 가끔은 얼마나 힘든지 잘 아니까요."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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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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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노동이 판을 치지만 인간의 자기 방어 본능으로 이를 수면에 드러내기를 꺼리고, 종종 최악의 인간들은 가짜 노동이 가짜인 줄도 모르고 이를 신봉한다. 가짜 노동을 지키는 것이 생존 수단이기 때문에 가짜 노동의 필요성을 스스로 설득시키는 자기 최면에 빠지는 것이다. 이제 와서 이걸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아무도 읽지 않는 허위 보고서, 억지 목표 설정과 허위 절차, 면피를 위한 과도한 점검과 규제, 타성적으로 행해지는 헛짓거리들, 보고가 최우선......

책에서 또 중요한 내용은 민간 부분이 공공 부분보다 더 효율적이고 기능적으로 작동한다는 근거 없는 착각을 일깨워 주는 것, 그리고 사무직에 대한 숭배를 버리고 육체노동과 무대 앞 노동이 일종의 패자부활전이라는 관념을 버려 진짜 노동에 대한 존경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해방은 우리 자신에서 시작되고 끝난다.’(357p.)

과연 나부터 실천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나도 너무 괴롭지만 또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다는 데 결백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우리 문명의 위대한 진보, 위대한 예술 작품과 기념비적 과학 발견은 노동자들이 아닌, 여가라는 사치를 즐기는계급에서 비롯됐다. 고대로부터 문명과 교양 있는 개인을 만들어낸 것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였다. - P35

그렇다면 러셀의 해답은 무엇일까? 러셀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답이라고 말했다. 교육을 늘리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는 당시 학계가 문명과 사람들의 필요와 절연됐다고생각했다. 계속해서 러셀은, 우리의 일이 줄어들면 탐구심이 더많아지고 공부를 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생계의 필요에 얽매이지 않아서 공부가 혁신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P36

고고학자들은 석기가 순수하게 기능적이기만 했던 건 아니라고 알려준다. 장식적인 요소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오르는 의문은, 석기시대 인간은 언제 이 도구들을 꾸밀 시간이 났을까?
이는 다소 상식을 거스르는 질문 같다. 어차피 모두가 알고 있듯이 진보란, 등골 휘도록 고된 수렵채집 생활을 뒤로하고안정적인 음식 공급과 여가를 즐길 시공간을 향해 나아간 것이기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우리는 원시인에 대해 그렇게 들어왔다. 인류가 땅을 쟁기로 갈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그리고 한참 후 산업혁명이 점화되면서 우리는 불쌍한 석기시대 인류의 혹독한 삶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서구사람들은 인류 진화를 고된 석기시대에서 오늘날 행복한 삶으로의 발전 과정으로 보았다. 더 많은 부와 자유, 여가를 가지게 된 삶 말이다. - P41

물론 석기시대에도 삶은 여러모로 힘들었다. 고질적인 폭력과 만연한 질병으로 평균수명은 30대 정도였다. 다시 말해, 힘든 노동 때문에 사람들이 죽는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농업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정착지를 이루니 땅을 더 잘 사용할 수 있고, 훨씬 많은 식구를 먹일 수 있다니 끝내주는 발상 같다. 하지만식량 생산이 늘어난다는 것은 훨씬 더 많은 힘든 노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나자 새로운 농업 계급은 두 배로 일해야했다. 많은 면에서 농업은 근시안적 전략이었다. 농부의 조상들은 자기 오두막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열 명의 식구들을 보면서 쟁기질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할까? - P42

새로운 발명은 원래 일을 더 쉽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종종 온갖 종류의 새로운 절차와 새로운 형태의 감독,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요구했다. 전화 같은 연락 수단이 좋은 사례가 될 수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새로운 의사소통 기술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점점 더 많은 일거리를 가져왔다. 노동자는 이를 처리해나가며 많은 생산물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더 많은 문서(청구서, 영수증, 계약서, 보고서, 손익계산서)가 생겨났고 더 많은 타자수와 통신물을 나를 더 많은 운송업자" 즉 미국에서 사무직의 초기 급증을 가져왔다. - P49

과거의 노동에 대해 살펴보면 한 가지 의미심장한 경향이되풀이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절약할 방법을 알아낼 때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시간을 사용할 새로운 방식을 알아낸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을 ‘지식사회‘와 ‘지식노동자‘보다 노동시장의 변화를 더 잘 설명하는 개념은 없다. - P55

그럼에도 여전히 뭔가 좀 이상했다. 궁극적으로 이런 대학과 경영대학원 졸업생들을 위해 맞춤 제작된 많은 일자리가 특정학문의 자질과 지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과거의 일자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드러커조차 이게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다. 1979년 드러커는 지적인 사람들이 지루한 업무를 맡고 나서 자신이 지나친 교육을 받았음을 깨닫게 되는 상황에 우려를 표했다. "대단한 ‘지식인‘이 되리라 기대했던 자신이 일개 ‘직원‘일 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 P57

다른 연구들도 비슷한 결과를 내놓았다. 예를 들어 심리학과 건축학에서 자격을 갖춘 전공자도 자신이 배운 기술을 제대로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냐하면 이들이 학위를 단지 구직자를거르는 용도로 사용하는 직장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회사로서는최고의 인재를 영입해야 하기에, 교육을 적게 받은 사람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는 일자리임에도 굳이 더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들을 뽑으려 했다. 그리고 회사의 이런 전략에 대해 우리 사회는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 P58

여기서 요점은, 현대 노동에 대한 풍자가 새로운 현상이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농부, 어부, 대장장이, 항만 근로자라는직업에 대해 풍자적이거나 비판적인 작품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에 사무직은 처음부터 통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허먼 멜빌의 첫 책 『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rener』는 그가 『모비딕 Moby Dick』으로 유명해지기 훨씬 전인 1853년에 출판되었다. 이소설은 익살스러운 작은 소동을 다룬다. 흠 없는 이력으로 열심히 일하던 서기가 어느 날 갑자기 지시받은 일을 거부하는 이야기다. 바틀비는 어느 날부터 시키는 모든 일에 "나는 하지 않기를선호하겠습니다"라는 의아한 대답으로 일관한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이를 업무의 부조리함에 대한 수동적 저항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 P67

내가 보기엔 너무 잔인할 정도로 무의미한 노동이 분명정신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묻습니다. ‘난 정말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걸까? 내가 평생하고 싶은 일이 이건가?‘라고요." - P84

"자신의 직업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어떻게 노동의 존엄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까?" - P86

무슨 뜻이냐고? 파킨슨은 관료제의 무한한 확장 능력에대해 말한 것이다. 해양사학자이자 군대 장교로 복무했던 그는 당시 한 가지 희한한 사실에 주목했다. 대형 군함은 62척에서 20척으로, 장교 수는 31%까지 감소하는 등 함대는 줄어드는데, 기지에서 일하는 인력은 40%가 증가했고, 특히 행정팀은 78%까지급증했다. 파킨슨은 관리 조직의 규모가 줄어들어야 하는 때에오히려 관리직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없었다. - P126

1975년의 한 연구는 여기에 꽤 단순한 원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늘 그렇듯 인간의 본성, 즉 자기방어 때문이다. 상황이좋을 때 조직은 관리직과 실무직을 더 고용한다. 사업 주기가 바뀌고 절약해야 할 때가 오면 여분의 노동력 감축은 주로 실무직에 돌려진다. 관리직은 권력에 더 가깝고 자신을 닮은 일자리를보호하는 데 아주 능숙해서, 실무직보다 사무직이 비율상으로 더적은 감축이 이뤄진다. - P130

게다가 이런 최고위 중역들은 서로의 터무니없는 봉급을합리화하고 자기들 모두가 얼마나 유용한지 세상을 설득하는 데고도로 능숙하다. 자기 일이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하고 어렵고꼭 필요한지 서로 맞장구치는, 아주 소수가 뿜어내는 특정 합리성 덕분이기도 하다. - P132

말하자면 모두가 언제나 끊임없이 뭔가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건 그 주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른 동료들은 생각 못했던 어떤 아이디어에 대한 회의에 갑자기 참석해야 하거나 혹은 ‘우리 경쟁자들의 SNS 사용법에 대한분석‘을 지휘하거나, 어떤 의미 있는 일에도 사용된 적이 드문 다른 과제를 해야 하는 등 말이다. 그러다가 진짜 가치를 낳는 일이밀려들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런 보고서와 분석을 다시 쳐다보지않는다. 그냥 집에 가지 않는 사람을 위한 일시적인 관심 돌리기라는 본연의 목적으로 돌아가 조용한 죽음을 맞는다. - P147

"그래서 만일 이런 유형의 직업인이 점점 더 무의미한 업무를 떠맡게 되고 의미 있는 업무를 하기 힘들어진다면, 심각한 윤리적 딜레마에 봉착할 겁니다. 온갖 스프레드시트를 채워야 하는교사는 어떨까요? 아마 교사는 시트를 채우기보다 특별히 더 돌봐줘야 하는 꼬마들에게 자기 시간을 쓰고 싶을 텐데 말이죠. 문제는 그녀가 엑셀에 제출되는 내용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겁니다. 꼬마들에게 해주는 일이 아니라." - P162

하지만 이 모든 결과에서 ‘민간부문이 더 좋은가?‘라고 질문한다면 그 답은, 공공부문이 민간 부문보다 그다지 더 나쁘지도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놀라워할지도 모르겠다. 공공 부문은 무능하고 비효율적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기때문이다. 또한 종종 합리적이고 지적이며 매끄럽게 돌아가는 민간 부문도 존재는 하니까 말이다. - P173

"정책을 만들어내는 대신, 우리는 각각의 모든 책임자에게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복지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바로 그들의 업무라고 말해야 합니다. 병가 규정과 스트레스 관리 방침 뒤에 숨어서 ‘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하고 빈말만 하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관리직은 규정 준수 능력으로 평가되어선 안 됩니다." - P207

이런 상황에 저항하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예를 들어 루이세는 상사들의 가짜 노동남발을 공공연히 비판하다가 하마터면 잘릴 뻔했다고 한다. 그러니 여러분도 온갖 어리석은 규칙과 문서 요구에 큰 소리로 의문을 제기하거나, 가치가 있는 일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전에다른 방법은 없는지 궁리해봐야 한다.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다면 말이다. - P211

사실 전문용어의 목적은 진짜 문제를 대체하려는 데 있다. 취재원 중 하나의 표현에 따르면, 전문용어에 유창한 사람들은 명료성을 위협으로 간주한다. - P216

조나스, 토케, 프레데리크가 지적한 가짜 노동 확산의 중요 원인 중 하나는, 과잉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할 일을 줘야 한다는 책임 의식이었다. 감독, 안전, 경영 교육을 받은 사람은 조직내에서도 그에 대해 계속 지적할 것이다. 홍보 전공자를 양산하면 홍보 전략을 얻는다. 단 - P224

본인이 타인에게 상을 수여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려면 막대하게 부풀려진 자아가 필요하다. 이 행사는 분명 과시적으로 느껴졌다. - P230

원래 참조(cc)란 20세기에 문서를 1부 더 복제해 보관하기 위해사용했던 먹물지(carbon-copy)를 뜻하는 말이다. 이제 참조는 많은여분의 이메일을 보내고 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 P245

50시간 이후에는 부가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한다. 63시간이후에는 완전히 급락하며 생산성의 우물이 말라버린다. 노동자들이 너무 지쳐 효율성이 제로로 떨어지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주당 70시간을 일하면 그중 15시간은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내게 된다. - P260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우리의 그런 기대를 지지해주는 이야기를 하나 더 들었다. 덴마크의 어느 선도적인 컨설팅 회사 내부의 사례다. 그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수익 목표에 도달할 때마다새로운 목표가 설정되고 그에 상응하는 더 높은 임금을 줬다. 이런 종류의 컨설팅 회사는 피라미드처럼 작동한다. 바닥에서 노예처럼 시작해 힘들게 위로 올라간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아래쪽의 고된 노동으로부터 더 많은 이득을 취한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 처음으로 승진을 원하지 않는 컨설턴트가 생겼다. 그는 늘 벌던 것만큼만 벌길 원했다. 회사는 그런 상황에 대처한 전례가 없었다. 사실상 그는 회사의 성장에 대한 위협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그가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관심이 없기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성장 패러다임을 뛰어넘을 남다른 사고와 새로운행동 방식 말이다. 노동 생활에 의미를 다시 주입할 방법인지도모른다. - P274

불신의 분위기에서는 가짜 보증이 합리적인 해답이 될 수있다. 알 방법이 없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때, 모든 일이 잘될거라는, 위험한 일은 없다는 억측을 만들어내서 그것에 대한 긴보고서를 쓰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짜 노동과 마찬가지로, 지시하는 자와 수행하는 자 사이의 암묵적 동의하에 이뤄진다. - P293

2015년 옥스퍼드 대학교출판부가 펴낸 결론은 허망했다.
모든 규제와 감사가 결국 공공 부문을 더욱 높은 비용이 들고 더무능력하고 더 불만스러워하는 최종 수혜자가 늘어난 곳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더 많은 규제와 인증, 성과 검토와 성과 기반계약이 공공이든 민간이든 개선됐다는 증거는 매우 찾기 어렵다. - P315

독일 철학가 헤겔과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것은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꼭 임금노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시간제 일당 노동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노동에는 자신이 탈 보트를 만들거나 자신이 먹을음식을 만드는 일도 포함된다. 노동은 처리 활동이다. - P323

다시 의미를 찾으려면 큰 그림을 봐야 한다. 회사보다 더큰 무언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 의사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일하지 자신의 직장인 병원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다. 변호사는 정의를 위해 일하지 자신의 법무 법인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다. 교사는 사회의 미래를 위해 일하지 특정 학교를 지키는 게 임무가아니다. 광고업계에서 일한다면 인생을 그냥 안락하게 지내는 것보다 원하는 것이 더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 P343

줄리가 했던 말이다. "결정을 내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문서를 요구하는 걸 수시로 보게됩니다. 특히 정부부처의공무원들이요. 그들에겐 결정을 내릴 만한 권력이 있어요. 그저보여주기가 싫을 뿐이죠. 보고서를 읽지 않는 이사회도 마찬가지예요. 회의에 가보면 토론으로 합의를 내리기보다 더 많은 보고서를 요구해요.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도 있겠죠. 그래도 문서요구는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회의가 끝도 없이 늘어져요. 결정 장애가 있는 상사가 그래요. 더 많은 문서를 요구하고 프로젝트팀을 구성하고 가짜 상향식절차로 직원 시간을 낭비하죠. 하루 종일 외부 자문이랑 이야기하고 직원들은 경영진이원하는 게 뭔지 추측하느라 시간을 낭비해요." - P358

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 대학 학위로 포장된다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사무직에 대한 숭배 의식을 버리고 육체노동과 무대 앞노동이 일종의 패자부활전이라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진짜 노동에 대한 존경을 재발견해야 한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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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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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묘지>
상고를 졸업한 네 여성이 졸업 후 현실에서 겪는 지난한 경험에 대한 소설이다. 상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용모단정’이라는 벽에 부딪혀 끝내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채로 수석졸업장을 받는 수영. 졸업 후 화자의 백화점에 취업하지만 백화점의 과한 규율과 통제방식에 끝내 퇴사를 하며, 몇 년째 공무원시험에 낙방하고 있다. 유일하게 대학교에 입학한 동기 한오는 은행에 취업하지만, 대졸 행원들에게 실적도 빼앗기고 승진도 늦는 각종 불이익을 당하고 그에 따른 자격지심에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직원 휴게실에서 과로사한다. 윤주는 대기업에 취직한 후 직장 상사들의 핀잔과 냉담함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따듯했던 13살 연상의 차장과 결혼을 한다.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둬도 좋다는 말에 도피하듯 결혼한 윤주는 한오의 죽음 이후 한오의 실적을 가로채 간다는 김대리에게 복수하려 은행에서 진상 민원을 부리다 업무방해죄로 고소를 당한다. 알고 보니 한오를 괴롭히던 김대리는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었고, 다른 엉뚱한 김대리에게 분풀이를 했던 것을 알게 되었으며 심지어 남편에게 외도 의심까지 사고 만다. 한오의 기일에 만난 친구들은 윤주의 사연을 들으며 다 죽은 포도밭에 들어선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34p.)

‘얻어 터지기 전에는 누구나 전략이 있’(9p.)던 것처럼, 결국 세상에 얻어터져 인생의 쓴맛만 본 친구들은 그래도 “아무도 죽지마”(34p.)라며 서로를 응원한다.
나도 무엇인가 될 줄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진학하면, 군대를 다녀오면, 취업을 하면, 내가 무엇인가 될 거라는 착각을, 세상에 얻어터지기 전엔 가지고 있었다. 결국 내 자신이 될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위로로 정신승리하며, 행복을 바라지도 않고, 소소하고 평탄한 나날과, 소중하고 아껴주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 너무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포도밭 묘지처럼 그들이 너무 인생이 비참해 보이진 않는다. 다시 봄이 오면 살아날 나무들처럼, 나의 인생도, 나머지 세 친구들의 인생도 그 실패가 너무 비극이 아니라고 응원하고 싶다.


<진주의 결말>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병 수발을 들다가 지쳐 아버지를 살해하고 방화까지 저질렀다고 오해를 받는 ‘진주’가 있다. ‘사건반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자극적인 땔감을 찾고자 심리학자인 화자에게 범죄심리를 의뢰하면서 아버지의 성범죄라는 최악의 경우의 수까지 추가해 유진주를 패륜아로 묘사한다. 방송을 본 유진주는 화자에게 메일을 보내며 형편없는 심리분석과 유추를 조롱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68p.)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71p.)

어머니가 죽고 낯선 생각들이 떠오르던 유진주는 그 글을 공책에 적어나갔다. 주변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그 글을 보고 생각에 밑줄을 긋고 지우듯, 생각도 겁먹지 말고 마음껏 연상하고 지우면서 좋은 생각만 선택하라고, 그게 너의 미래라고 말한다. 제주의 어느 작가의 북토크에서 “모든 글‘쓰기’는 글‘짓기’입니다”(68p.)라는 말이 연상하게 한 그 당시의 아버지의 말을 빌어 유진주는 ‘인간의 실존은 앞뒤가 맞지 않는 비논리적인 이야기’(69p,)라며 자기는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을 다루는 언론과 타인들의 앞뒤 맞지 않는 기만에 대해서, 누구나 가진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유진주는 존속상해치사죄 무혐의 처분을 받고 방화죄는 심신미약을 사유로 감경돼 징역을 1년 6개월 받는다. 유진주는 화자를 제주도로 초청해 바람의 박물관으로 안내한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예약한 입장권이라며 아버지의 치매증상이 극에 달할 때 유진주가 과거를 떠올리며 아버지에게 무엇이라도 쓰라고 준 펜으로 아버지는 신혼여행 때 다녀온 풍림호텔과 ‘바람이 돌멩이 보다 흔하다.’(75p.)라는 문장을 썼고, 유진주는 풍림호텔이 바람의 박물관으로 바뀐 것을 알아내고는 예약을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할 수 없는 상황에, 화자를 제주로 초청해 함께 관람하며 말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실존을 창조하는 신처럼, 사전 경고 없이 일을 질러버리는 신처럼 하고 싶어 방화를 저질렀다고 말한다.
누군가 이해를 할 수 없다며 한탄할 때마다 ‘이해라는 것이 꼭 필요한가, 그 상대방은 꼭 이해하려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만 해야하는가, 그런 생각이 요구가 너무 이기적이고 폭력적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해를 포기하는 것은 관심을 끊는 극단적인 행동이 아니라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진주의 이메일이, 화자를 만나면서 날리는 말이 너무 통쾌했다.


<홈 파티>
연극배우 이연은 성민에게 홈파티를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성민이 최고경영자 과정을 받으면서 알게된 지인으로 오대표의 홈 파티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와 특권을 누리고 사는 명상센터 소장, 성형외과, 변호사 등이 초대받았다. 배우인 이연을 신기해하면서 각자 자신들이 소비하는 고급 취향을 열거하며 이연은 점점 이 모임에서 자신이 소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감염병 재난 상황 때문에 취소된 배역을 학창시절 연극에 대한 경험으로 비교하는 그들은 무례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함으로 이연과 성민의 상황을 비참하게 만든다. 이연에게 코로나로 뒤집힌 <보이체크>무대를 어린 시절 잠시 거쳐간 순수한 감수성으로 소비되고, 성민의 금융 문맹에 가까운 경제적 관념은 불우한 환경의 결과라 단정해 버린다. 동등한 인격체로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한 수 아래의 계급을 대상으로 평가하고 훈계하고 있었다. 그들과 어울리는 사람으로서 연기하는 것을 포기한 이연은 고아원을 퇴원하는 아이들이 자립 정착금으로 명품가방을 산다는 것을 한심하다는 듯 탄식하며 염려하는 그들에게 뜬금없이 돌직구를 날리며 분위기를 냉각시키면서 일어나다 오대표의 가보인 찻잔을 깨버린다. 오대표는 이연의 멋진 퇴장이 실패했음에 살짝 미소를 비추지만 이를 간파한 이연이 오대표를 향해 오늘의 홈파티가 즐거웠다며 다시 오대표에게 실망감을 준다.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 뭔가 주고 싶다면 그에게서 먼저 그걸 빼앗으라‘는 법칙이었다.’(123p.)

오대표는 자기보다 못한 자들 앞에서 우월감을 과시하고 열패감을 안겨주어 만족감을 느끼려던 홈파티의 기획 연출에 변수가 생기자 심기가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일시적인 일탈>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시간을 보내 특이해 보이는 K는 요주의 인물이다. K의 아들과 화자의 딸이 같은 반 친구라는 이유로 화자는 K와 가까워진다. K는 이혼한 돌싱으로 작가였고 둘은 쉽게 친해지면서 켈리그라피를 하는 화자에게 K는 작업실을 공유해 주었다. 하지만 K의 전남편이 재혼하고, 아이를 방치한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K에게 아들을 빼앗아 가자 둘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K가 건설 현장 인근에서 봉변을 당하고 장례식에 간 화자는 가족들에게 K의 작업실을 계속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화자는 엉망이 된 K의 작업실을 청소하고 K의 책과 작업실에 쌓여있는 책들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점점 작업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화자는 남편에게 켈리그라피 학원을 열었다는 거짓말을 하고 학원수익으로 위장하기 위해 물건을 팔고, 대출까지 받으면서 작업실에 머무는 시간에 집착한다. 가족들이 캠핑을 가기로 한 날 화자는 갖은 핑계를 대 작업실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하고, 그날 새벽 K의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유령이 되어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화자는 K의 소설에 등장했던, 뇌사상태에 빠져 남편의 간호를 받으면서 동시에 증오를 받는 아내를 떠올린다.

‘나는 그 소설의 주인공이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내의 이야기였다. 자신을 향한 증오와 악의를 가늠하지 못한 채 잠든 여자. 몸에 불이 붙은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는 여자. 그 유령이 바로 여기 있었다.’(162p.)

<자기만의 방>이나 <19호실로 가다>에서 계보를 잇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화자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당했던 억압을 상징하는 ‘개구리’라는 매개체가 등장한다. 화자는 어렸을 적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어느 날 하굣길에 마주친 개구리를 보고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다 통금시간을 어기는 일이 벌어졌고, 그때부터 화자에겐 개구리 공포증이 생겼다. 하지만 유령을 만난 그날 밤, 작업실을 나오면서 화자는 비오는 길가에서 마주친 개구리를 움켜잡는다. 개구리 공포증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 화자는 K의 소설의 주인공을 인식하는 것처럼 자기 인생의 주체성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우연히 스타벅스에서 만난 화자와 아야는 같은 대학에서 초급 한국어와 일본어를 가르치는 사이이다. 화자는 성수대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문학 전공인 듯하나)도시공학에 가까운 논문을 쓰고 있었고, 아야와 함께 다리를 건너자는 제안을 한다. 성수대교가 붕괴됐을 때 우연히 살아남은 작가는 맨해튼을 지나며 911테러 당시 자신이 복무 중이던 군대에서 전쟁이 발발해 휴가가 짤렸던 기억을 떠올리고, 아야는 동일본 쓰나미 때 집을 빠져나오지 않은 히키코모리가 파도에 떠밀려 온 집 안에서 살아남은 일화를 나눈다. 화자는 끊임없이 우연과 확률에 대해서, 아주 희박한 확률로 연결되는 우연들에 대해서, 다른 두 곳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다리를 건너며 생각한다. 여러 가지 우연들이 겹쳐서 엮이고 묶이고 풀어지기도 하는 삶을 다리라는 장소와 함께 잘 엮은 단편인 듯했다. 인생은 무엇인가 운명적인 우연인 듯해 보이지만 사실 큰 의미 없이 모든 경우의 수 중에 하나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초고를 던져버릴 생각이었지만 우연히 만난 아야를 핑계로 마음을 바꾸고, 학교에 가려고 하지만 돌아서는 선택들이 뭔가 중대하고 부담스러운 결정이 아닌 것처럼...


<아주 환한 날들>
할머니 옥미가 앵무새를 돌보며 과거를 회상하고, 앵무새와 헤어지지만 옥미에게 앞으로 환한 날들만 이어지기를 기대했던 소설이다. 옥미는 어렸을 때 집안 사정으로 백부의 집에서 키워지고, 결혼 후에도 삶이 고단해 딸에게 큰 애정을 쏟지 못한 채 노년을 맞았다. 딸이 어렸을 때 운동회도 가주지 못하고, 과일 노점을 하던 중 실랑이를 벌이는 옥미에게 챙피하다는 말을 내뱉는 딸에게 체벌을 가한 뒤로 딸과의 사이는 계속 소원했지만, 옥미의 진심은 딸이 결혼해서 손주를 낳을 때 간절하게 딸의 무사를 염원했던 만큼 진정한 사랑이었다.
옥미는 사위에게 부탁을 받은 앵무새를 맡아 키우면서 밥도 주고 새장도 관리를 하지만 앵무새의 건강이 나빠져 동물병원에 데려간다. 의사에게 앵무새는 애정이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앵무새와 놀아주고 산책도 다니면서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마치 딸에게 쏟지 못했던, 딸을 키울 때처럼 밥만 챙겨주고 잠잘 곳만 챙기면 되는 줄 알았던 과거 자신의 행동과는 다른 행동을 하면서 앵무새와 애정을 주고받는다. 사위가 다시 앵무새를 집으로 데려갔고, 앵무새를 떠나 보내서 옥미의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하지만, 수필 쓰기 수업에서 들었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라는 조언도 마음에 와닿기 시작해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앵무새도 딸처럼 옥미를 떠났지만, 옥미는 딸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던 것처럼 앵무새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 않았을 것 같다. 수필을 쓰면서, 앵무새와 함께했던 아주 환한 날들처럼, 그녀 혼자의 인생도 환한 날들만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럴 거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애당초왜상고에 왔느냐고묻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다. 공부를 못하거나 대학에가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는 교육에대해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형편이 좋지 않으니 고등학교까지 가르치면 족하다는 식이었고, 그 이상을 꿈꾸기를 바라지않았다. 우리는 일단 우리 몫의 미래에 순응했다. 대학을 가거나사회적으로 주어진 것과 다른 사람이 되려면 응석을 부리는 대신자립심을 키우는 편이 나았다. 자립심이 마음이나 용기가 아니라돈이라는 게 문제가 됐다. - P13

성실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최악의 노동자가되기 십상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 P27

곳곳에 버려진 비닐 무더기를 보자 고등학교 교실에 두고 온방석이 생각났다. 솜이 다 꺼진 그 방석은 누가 버렸을까.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방석을 깔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 P34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만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달까지 걸어가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꽉 막힌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제게 그 말씀들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제가 쓴 일기며 낙서를 꼼꼼하게 읽으셨다니. 제가 집에 불을지른 일과 우리를 기억할까 말까 싶은 이웃들이 한 말들을 토대로 아빠와 제가 보낸 육 년의 삶을, 아니, 그 이전의 모든 인생을손금 들여다보듯이 하나의 이야기로 꿰뚫어보시다니.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이 말하는 게 분명 제 마음일 텐데도 전혀 제 마음 같지가 않았어요. 아빠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제가 몰리고있었다는 게 선생님의 전제인데, 그것부터가 잘못됐습니다. 그러니 그다음의 분석도 죄다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에요. - P57

말씀드렸다시피 이런 살인은 화산 폭발 같은 거예요. 자잘한것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임계점을 넘기면 터집니다. - P64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 P68

그러니까 선생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실 거예요. 인간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잖아요. 모든 게 잘될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잠들었다가도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한 아침을 맞이하기도 해요. 인간의 실존은 앞뒤가 맞지않는 비논리적인 이야기예요. - P69

아까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 P71

타인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삶의 일들은 그저 벌어질 뿐인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위해이유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유가 필요 없다. 대신에 희망이필요하다. 나의 희망으로는 결코 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해도 말이다. - P82

성민은 ‘너무 평범한가?‘ 갸웃거리다 ‘왠지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어른들 선물사는 게 제일 어렵다‘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다 ‘아니야, 압도적이지 못할 바엔 관습적인 게 나아‘ 웅얼웅얼하며 주억거렸다. - P94

-부담은 명예래. - P97

이연은 자신이 대상을 편견 없이 대하는 태도에 작은 만족을 느꼈다. 타고난 성정이라기보다 수양의 결과였다. ‘어렸을 땐 정말 타인을 시시콜콜 판정했는데… 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 P106

- 매일 쓰는 물건이 아름다우면 좋죠. 그리고 그냥 시간을 견딘 것들이 주는 위로가 있잖아요? 제 사무실에도 비슷한 거 있어요. - P110

-그래, 모던에 질릴 때도 곧 있을 거예요. 모던도 모던 나름이고 가끔 싸구려 자재 쓴 모던만큼 또 싫증나는 게 없더라고요.
요즘처럼 무슨 저가 시공, 저가 인테리어 상품에 창궐하는 그런모던은…………
박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 이연과 성민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두 사람만 아는 순간이었다. 박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 흉내는 흉내고, 본질은 돈으로 못 사죠. 역사도 그렇고.
이연이 박을 흘깃 쳐다보며 ‘저 사람 진골이 아니라 성골인가?‘ 갸웃거렸다. ‘뒤늦게 인맥 학교 다닌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것 같은데?‘ 싶어서였다. ‘창궐이라니. 사람들이 한정된 자원 안에서 나름 생활에 윤기를 주려 하는 게 무슨 질병이라도 되나?‘
눈을 굴렸다. 그런데 그 눈빛을 맞은편의 서가 봤고, 그 시선의 흐름을 또 성민이 알아챘다. - P111

술자리가 무르익자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돈‘으로 흘러갔다.
사람들은 최근 흥행하는 드라마를, 플랫폼과 콘텐츠의 관계를,
이제는 시들해진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그러나 여전히 ‘쇼‘가 된계급 상승을, 그 쇼가 ‘모욕과 영광을 동시에 주는 방식‘을 밀도높고 느긋한 어휘로 토론했다. ‘요즘엔 관심만큼 비싼 것도 없다‘면서 ‘자기 서사가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식의 말도 이어나갔다. 이연도 어디서 한 번쯤 들은 말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전염병 시대에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라했고, ‘영화관 시대가 이렇게 끝날지 누가 상상했겠어?‘ 한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관련주 사둘걸‘ ‘요즘 유명 배우들도 다 스트리밍 플랫폼 회사에 줄선다‘라며 안주를 씹었다. - P113

-나도 이십대 때만 해도 바보같이 빛이 나쁜 건 줄 알았어.
빚에 대한 안 좋은 경험만 있어서. 생각해봐. 어릴 때 대출로 어딘가 투자하는 부모를 본 사람하고, ‘빚‘ 하면 보증과 고함, 부모의불화, 이런 것만 떠올리는 사람하고 뭐랄까, 대출 상상력이나 금융 감수성이 다르지 않겠어? - P118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임원‘ 연기를 위해 ‘최대한 저 사람들처럼 생각하자, 저 사람들 입장에서 느끼고, 즐기자‘ 다짐했는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게 있어서였다.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여겨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순간 몇몇 이들이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연은 자신이 뭔가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걸 수습하고 싶은 마음이들지 않았다. 동시에 술을 더 마시고 싶은 걸 꾹 참고 성민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제 모습을 의식했다. 여기서 혼자 정색하면 연극이 망한다고, 막이 내릴 때까지 최대한 자연스레 퇴장하자 다짐했다. - P120

이연이 넋 나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며 오대표의 옆얼굴을 살피다 문득 몸이 굳었다. 오대표의 얼굴에 잔을 잃은 서운함이나 원망 대신 묘한 만족감이라 할까 승리감이 얼핏 스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마치 오늘 파티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는 이만하면 괜찮은 계산서가 나왔다는 표정을 지은 까닭이었다. - P122

그런 뒤 오대표는 이연에게 갑자기 이상한 걸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정말 궁금한 것 같기도 하고 마땅한 작별인사가 떠오르지 않아 불쑥 튀어나온 말 같기도 했다.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 뭔가 주고 싶다면 그에게서 먼저 그걸빼앗으라‘는 법칙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지금도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면, 사랑이나어떤 성취 혹은 명예 앞에서 너무 벅찬 감정을 표할 때면 어김없이 ‘저 사람 곧 저걸 잃어버리겠구나‘ 예감하곤 했다. 이연은 오대표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어떤 주문을 외듯, 마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사랑을 어서 잃고 싶어하는연인처럼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어요. - P123

이전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좌천을 당한아버지는 그 분풀이를 가족들에게 했는데, 자신이 정한 규율을따르지 않으면 말그대로 발작을 일으켰다. - P142

나는 이 일시적인 일탈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그 방에는 수백 권의 책이 남아 있었다. 한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른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꼈다. 책이 나를 이곳저곳으로 끌고다녔다. 집으로 갈 때면 아쉬움에 입이 말랐다. 아이들과 저녁을먹으면서도, 밤에 남편과 침대에 누워서도 작업실의 빈 공간을떠올렸다.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P154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너무 무섭고 고통스럽다. 소설을 쓸 때마다 달아나고픈 충동에 휩싸이는 건 소설을 쓰는 일이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옥미는결국 해냈고 그걸 생각하면 아주 작은 불빛이 켜진 것처럼 내게도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를 등불 삼아 컴컴한 강물 속 물풀처럼자라나 있는 슬픔과 고통, 시기심과 비겁함, 자기모순과 기만 따위를 헤치며 또다시 조금씩 앞으로 헤엄쳐나간다. 그 길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어코 환한 쪽으로 고개를 돌릴 것이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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