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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평점 :
<포도밭 묘지>
상고를 졸업한 네 여성이 졸업 후 현실에서 겪는 지난한 경험에 대한 소설이다. 상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용모단정’이라는 벽에 부딪혀 끝내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채로 수석졸업장을 받는 수영. 졸업 후 화자의 백화점에 취업하지만 백화점의 과한 규율과 통제방식에 끝내 퇴사를 하며, 몇 년째 공무원시험에 낙방하고 있다. 유일하게 대학교에 입학한 동기 한오는 은행에 취업하지만, 대졸 행원들에게 실적도 빼앗기고 승진도 늦는 각종 불이익을 당하고 그에 따른 자격지심에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직원 휴게실에서 과로사한다. 윤주는 대기업에 취직한 후 직장 상사들의 핀잔과 냉담함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따듯했던 13살 연상의 차장과 결혼을 한다.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둬도 좋다는 말에 도피하듯 결혼한 윤주는 한오의 죽음 이후 한오의 실적을 가로채 간다는 김대리에게 복수하려 은행에서 진상 민원을 부리다 업무방해죄로 고소를 당한다. 알고 보니 한오를 괴롭히던 김대리는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었고, 다른 엉뚱한 김대리에게 분풀이를 했던 것을 알게 되었으며 심지어 남편에게 외도 의심까지 사고 만다. 한오의 기일에 만난 친구들은 윤주의 사연을 들으며 다 죽은 포도밭에 들어선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34p.)
‘얻어 터지기 전에는 누구나 전략이 있’(9p.)던 것처럼, 결국 세상에 얻어터져 인생의 쓴맛만 본 친구들은 그래도 “아무도 죽지마”(34p.)라며 서로를 응원한다.
나도 무엇인가 될 줄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진학하면, 군대를 다녀오면, 취업을 하면, 내가 무엇인가 될 거라는 착각을, 세상에 얻어터지기 전엔 가지고 있었다. 결국 내 자신이 될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위로로 정신승리하며, 행복을 바라지도 않고, 소소하고 평탄한 나날과, 소중하고 아껴주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 너무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포도밭 묘지처럼 그들이 너무 인생이 비참해 보이진 않는다. 다시 봄이 오면 살아날 나무들처럼, 나의 인생도, 나머지 세 친구들의 인생도 그 실패가 너무 비극이 아니라고 응원하고 싶다.
<진주의 결말>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병 수발을 들다가 지쳐 아버지를 살해하고 방화까지 저질렀다고 오해를 받는 ‘진주’가 있다. ‘사건반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자극적인 땔감을 찾고자 심리학자인 화자에게 범죄심리를 의뢰하면서 아버지의 성범죄라는 최악의 경우의 수까지 추가해 유진주를 패륜아로 묘사한다. 방송을 본 유진주는 화자에게 메일을 보내며 형편없는 심리분석과 유추를 조롱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68p.)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71p.)
어머니가 죽고 낯선 생각들이 떠오르던 유진주는 그 글을 공책에 적어나갔다. 주변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그 글을 보고 생각에 밑줄을 긋고 지우듯, 생각도 겁먹지 말고 마음껏 연상하고 지우면서 좋은 생각만 선택하라고, 그게 너의 미래라고 말한다. 제주의 어느 작가의 북토크에서 “모든 글‘쓰기’는 글‘짓기’입니다”(68p.)라는 말이 연상하게 한 그 당시의 아버지의 말을 빌어 유진주는 ‘인간의 실존은 앞뒤가 맞지 않는 비논리적인 이야기’(69p,)라며 자기는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을 다루는 언론과 타인들의 앞뒤 맞지 않는 기만에 대해서, 누구나 가진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유진주는 존속상해치사죄 무혐의 처분을 받고 방화죄는 심신미약을 사유로 감경돼 징역을 1년 6개월 받는다. 유진주는 화자를 제주도로 초청해 바람의 박물관으로 안내한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예약한 입장권이라며 아버지의 치매증상이 극에 달할 때 유진주가 과거를 떠올리며 아버지에게 무엇이라도 쓰라고 준 펜으로 아버지는 신혼여행 때 다녀온 풍림호텔과 ‘바람이 돌멩이 보다 흔하다.’(75p.)라는 문장을 썼고, 유진주는 풍림호텔이 바람의 박물관으로 바뀐 것을 알아내고는 예약을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할 수 없는 상황에, 화자를 제주로 초청해 함께 관람하며 말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실존을 창조하는 신처럼, 사전 경고 없이 일을 질러버리는 신처럼 하고 싶어 방화를 저질렀다고 말한다.
누군가 이해를 할 수 없다며 한탄할 때마다 ‘이해라는 것이 꼭 필요한가, 그 상대방은 꼭 이해하려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만 해야하는가, 그런 생각이 요구가 너무 이기적이고 폭력적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해를 포기하는 것은 관심을 끊는 극단적인 행동이 아니라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진주의 이메일이, 화자를 만나면서 날리는 말이 너무 통쾌했다.
<홈 파티>
연극배우 이연은 성민에게 홈파티를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성민이 최고경영자 과정을 받으면서 알게된 지인으로 오대표의 홈 파티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와 특권을 누리고 사는 명상센터 소장, 성형외과, 변호사 등이 초대받았다. 배우인 이연을 신기해하면서 각자 자신들이 소비하는 고급 취향을 열거하며 이연은 점점 이 모임에서 자신이 소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감염병 재난 상황 때문에 취소된 배역을 학창시절 연극에 대한 경험으로 비교하는 그들은 무례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함으로 이연과 성민의 상황을 비참하게 만든다. 이연에게 코로나로 뒤집힌 <보이체크>무대를 어린 시절 잠시 거쳐간 순수한 감수성으로 소비되고, 성민의 금융 문맹에 가까운 경제적 관념은 불우한 환경의 결과라 단정해 버린다. 동등한 인격체로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한 수 아래의 계급을 대상으로 평가하고 훈계하고 있었다. 그들과 어울리는 사람으로서 연기하는 것을 포기한 이연은 고아원을 퇴원하는 아이들이 자립 정착금으로 명품가방을 산다는 것을 한심하다는 듯 탄식하며 염려하는 그들에게 뜬금없이 돌직구를 날리며 분위기를 냉각시키면서 일어나다 오대표의 가보인 찻잔을 깨버린다. 오대표는 이연의 멋진 퇴장이 실패했음에 살짝 미소를 비추지만 이를 간파한 이연이 오대표를 향해 오늘의 홈파티가 즐거웠다며 다시 오대표에게 실망감을 준다.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 뭔가 주고 싶다면 그에게서 먼저 그걸 빼앗으라‘는 법칙이었다.’(123p.)
오대표는 자기보다 못한 자들 앞에서 우월감을 과시하고 열패감을 안겨주어 만족감을 느끼려던 홈파티의 기획 연출에 변수가 생기자 심기가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일시적인 일탈>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시간을 보내 특이해 보이는 K는 요주의 인물이다. K의 아들과 화자의 딸이 같은 반 친구라는 이유로 화자는 K와 가까워진다. K는 이혼한 돌싱으로 작가였고 둘은 쉽게 친해지면서 켈리그라피를 하는 화자에게 K는 작업실을 공유해 주었다. 하지만 K의 전남편이 재혼하고, 아이를 방치한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K에게 아들을 빼앗아 가자 둘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K가 건설 현장 인근에서 봉변을 당하고 장례식에 간 화자는 가족들에게 K의 작업실을 계속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화자는 엉망이 된 K의 작업실을 청소하고 K의 책과 작업실에 쌓여있는 책들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점점 작업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화자는 남편에게 켈리그라피 학원을 열었다는 거짓말을 하고 학원수익으로 위장하기 위해 물건을 팔고, 대출까지 받으면서 작업실에 머무는 시간에 집착한다. 가족들이 캠핑을 가기로 한 날 화자는 갖은 핑계를 대 작업실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하고, 그날 새벽 K의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유령이 되어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화자는 K의 소설에 등장했던, 뇌사상태에 빠져 남편의 간호를 받으면서 동시에 증오를 받는 아내를 떠올린다.
‘나는 그 소설의 주인공이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내의 이야기였다. 자신을 향한 증오와 악의를 가늠하지 못한 채 잠든 여자. 몸에 불이 붙은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는 여자. 그 유령이 바로 여기 있었다.’(162p.)
<자기만의 방>이나 <19호실로 가다>에서 계보를 잇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화자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당했던 억압을 상징하는 ‘개구리’라는 매개체가 등장한다. 화자는 어렸을 적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어느 날 하굣길에 마주친 개구리를 보고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다 통금시간을 어기는 일이 벌어졌고, 그때부터 화자에겐 개구리 공포증이 생겼다. 하지만 유령을 만난 그날 밤, 작업실을 나오면서 화자는 비오는 길가에서 마주친 개구리를 움켜잡는다. 개구리 공포증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 화자는 K의 소설의 주인공을 인식하는 것처럼 자기 인생의 주체성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우연히 스타벅스에서 만난 화자와 아야는 같은 대학에서 초급 한국어와 일본어를 가르치는 사이이다. 화자는 성수대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문학 전공인 듯하나)도시공학에 가까운 논문을 쓰고 있었고, 아야와 함께 다리를 건너자는 제안을 한다. 성수대교가 붕괴됐을 때 우연히 살아남은 작가는 맨해튼을 지나며 911테러 당시 자신이 복무 중이던 군대에서 전쟁이 발발해 휴가가 짤렸던 기억을 떠올리고, 아야는 동일본 쓰나미 때 집을 빠져나오지 않은 히키코모리가 파도에 떠밀려 온 집 안에서 살아남은 일화를 나눈다. 화자는 끊임없이 우연과 확률에 대해서, 아주 희박한 확률로 연결되는 우연들에 대해서, 다른 두 곳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다리를 건너며 생각한다. 여러 가지 우연들이 겹쳐서 엮이고 묶이고 풀어지기도 하는 삶을 다리라는 장소와 함께 잘 엮은 단편인 듯했다. 인생은 무엇인가 운명적인 우연인 듯해 보이지만 사실 큰 의미 없이 모든 경우의 수 중에 하나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초고를 던져버릴 생각이었지만 우연히 만난 아야를 핑계로 마음을 바꾸고, 학교에 가려고 하지만 돌아서는 선택들이 뭔가 중대하고 부담스러운 결정이 아닌 것처럼...
<아주 환한 날들>
할머니 옥미가 앵무새를 돌보며 과거를 회상하고, 앵무새와 헤어지지만 옥미에게 앞으로 환한 날들만 이어지기를 기대했던 소설이다. 옥미는 어렸을 때 집안 사정으로 백부의 집에서 키워지고, 결혼 후에도 삶이 고단해 딸에게 큰 애정을 쏟지 못한 채 노년을 맞았다. 딸이 어렸을 때 운동회도 가주지 못하고, 과일 노점을 하던 중 실랑이를 벌이는 옥미에게 챙피하다는 말을 내뱉는 딸에게 체벌을 가한 뒤로 딸과의 사이는 계속 소원했지만, 옥미의 진심은 딸이 결혼해서 손주를 낳을 때 간절하게 딸의 무사를 염원했던 만큼 진정한 사랑이었다.
옥미는 사위에게 부탁을 받은 앵무새를 맡아 키우면서 밥도 주고 새장도 관리를 하지만 앵무새의 건강이 나빠져 동물병원에 데려간다. 의사에게 앵무새는 애정이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앵무새와 놀아주고 산책도 다니면서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마치 딸에게 쏟지 못했던, 딸을 키울 때처럼 밥만 챙겨주고 잠잘 곳만 챙기면 되는 줄 알았던 과거 자신의 행동과는 다른 행동을 하면서 앵무새와 애정을 주고받는다. 사위가 다시 앵무새를 집으로 데려갔고, 앵무새를 떠나 보내서 옥미의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하지만, 수필 쓰기 수업에서 들었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라는 조언도 마음에 와닿기 시작해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앵무새도 딸처럼 옥미를 떠났지만, 옥미는 딸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던 것처럼 앵무새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 않았을 것 같다. 수필을 쓰면서, 앵무새와 함께했던 아주 환한 날들처럼, 그녀 혼자의 인생도 환한 날들만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럴 거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애당초왜상고에 왔느냐고묻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다. 공부를 못하거나 대학에가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는 교육에대해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형편이 좋지 않으니 고등학교까지 가르치면 족하다는 식이었고, 그 이상을 꿈꾸기를 바라지않았다. 우리는 일단 우리 몫의 미래에 순응했다. 대학을 가거나사회적으로 주어진 것과 다른 사람이 되려면 응석을 부리는 대신자립심을 키우는 편이 나았다. 자립심이 마음이나 용기가 아니라돈이라는 게 문제가 됐다. - P13
성실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최악의 노동자가되기 십상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 P27
곳곳에 버려진 비닐 무더기를 보자 고등학교 교실에 두고 온방석이 생각났다. 솜이 다 꺼진 그 방석은 누가 버렸을까.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방석을 깔고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때 우리가 가능하리라 여겼던 인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 P34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만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달까지 걸어가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꽉 막힌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제게 그 말씀들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제가 쓴 일기며 낙서를 꼼꼼하게 읽으셨다니. 제가 집에 불을지른 일과 우리를 기억할까 말까 싶은 이웃들이 한 말들을 토대로 아빠와 제가 보낸 육 년의 삶을, 아니, 그 이전의 모든 인생을손금 들여다보듯이 하나의 이야기로 꿰뚫어보시다니.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이 말하는 게 분명 제 마음일 텐데도 전혀 제 마음 같지가 않았어요. 아빠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제가 몰리고있었다는 게 선생님의 전제인데, 그것부터가 잘못됐습니다. 그러니 그다음의 분석도 죄다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에요. - P57
말씀드렸다시피 이런 살인은 화산 폭발 같은 거예요. 자잘한것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임계점을 넘기면 터집니다. - P64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 P68
그러니까 선생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실 거예요. 인간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잖아요. 모든 게 잘될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잠들었다가도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한 아침을 맞이하기도 해요. 인간의 실존은 앞뒤가 맞지않는 비논리적인 이야기예요. - P69
아까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 P71
타인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삶의 일들은 그저 벌어질 뿐인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위해이유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유가 필요 없다. 대신에 희망이필요하다. 나의 희망으로는 결코 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해도 말이다. - P82
성민은 ‘너무 평범한가?‘ 갸웃거리다 ‘왠지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어른들 선물사는 게 제일 어렵다‘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다 ‘아니야, 압도적이지 못할 바엔 관습적인 게 나아‘ 웅얼웅얼하며 주억거렸다. - P94
이연은 자신이 대상을 편견 없이 대하는 태도에 작은 만족을 느꼈다. 타고난 성정이라기보다 수양의 결과였다. ‘어렸을 땐 정말 타인을 시시콜콜 판정했는데… 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 P106
- 매일 쓰는 물건이 아름다우면 좋죠. 그리고 그냥 시간을 견딘 것들이 주는 위로가 있잖아요? 제 사무실에도 비슷한 거 있어요. - P110
-그래, 모던에 질릴 때도 곧 있을 거예요. 모던도 모던 나름이고 가끔 싸구려 자재 쓴 모던만큼 또 싫증나는 게 없더라고요. 요즘처럼 무슨 저가 시공, 저가 인테리어 상품에 창궐하는 그런모던은………… 박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 이연과 성민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두 사람만 아는 순간이었다. 박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 흉내는 흉내고, 본질은 돈으로 못 사죠. 역사도 그렇고. 이연이 박을 흘깃 쳐다보며 ‘저 사람 진골이 아니라 성골인가?‘ 갸웃거렸다. ‘뒤늦게 인맥 학교 다닌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것 같은데?‘ 싶어서였다. ‘창궐이라니. 사람들이 한정된 자원 안에서 나름 생활에 윤기를 주려 하는 게 무슨 질병이라도 되나?‘ 눈을 굴렸다. 그런데 그 눈빛을 맞은편의 서가 봤고, 그 시선의 흐름을 또 성민이 알아챘다. - P111
술자리가 무르익자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돈‘으로 흘러갔다. 사람들은 최근 흥행하는 드라마를, 플랫폼과 콘텐츠의 관계를, 이제는 시들해진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그러나 여전히 ‘쇼‘가 된계급 상승을, 그 쇼가 ‘모욕과 영광을 동시에 주는 방식‘을 밀도높고 느긋한 어휘로 토론했다. ‘요즘엔 관심만큼 비싼 것도 없다‘면서 ‘자기 서사가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식의 말도 이어나갔다. 이연도 어디서 한 번쯤 들은 말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전염병 시대에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라했고, ‘영화관 시대가 이렇게 끝날지 누가 상상했겠어?‘ 한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관련주 사둘걸‘ ‘요즘 유명 배우들도 다 스트리밍 플랫폼 회사에 줄선다‘라며 안주를 씹었다. - P113
-나도 이십대 때만 해도 바보같이 빛이 나쁜 건 줄 알았어. 빚에 대한 안 좋은 경험만 있어서. 생각해봐. 어릴 때 대출로 어딘가 투자하는 부모를 본 사람하고, ‘빚‘ 하면 보증과 고함, 부모의불화, 이런 것만 떠올리는 사람하고 뭐랄까, 대출 상상력이나 금융 감수성이 다르지 않겠어? - P118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임원‘ 연기를 위해 ‘최대한 저 사람들처럼 생각하자, 저 사람들 입장에서 느끼고, 즐기자‘ 다짐했는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게 있어서였다.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여겨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순간 몇몇 이들이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연은 자신이 뭔가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걸 수습하고 싶은 마음이들지 않았다. 동시에 술을 더 마시고 싶은 걸 꾹 참고 성민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제 모습을 의식했다. 여기서 혼자 정색하면 연극이 망한다고, 막이 내릴 때까지 최대한 자연스레 퇴장하자 다짐했다. - P120
이연이 넋 나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며 오대표의 옆얼굴을 살피다 문득 몸이 굳었다. 오대표의 얼굴에 잔을 잃은 서운함이나 원망 대신 묘한 만족감이라 할까 승리감이 얼핏 스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마치 오늘 파티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는 이만하면 괜찮은 계산서가 나왔다는 표정을 지은 까닭이었다. - P122
그런 뒤 오대표는 이연에게 갑자기 이상한 걸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정말 궁금한 것 같기도 하고 마땅한 작별인사가 떠오르지 않아 불쑥 튀어나온 말 같기도 했다.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 뭔가 주고 싶다면 그에게서 먼저 그걸빼앗으라‘는 법칙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지금도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면, 사랑이나어떤 성취 혹은 명예 앞에서 너무 벅찬 감정을 표할 때면 어김없이 ‘저 사람 곧 저걸 잃어버리겠구나‘ 예감하곤 했다. 이연은 오대표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어떤 주문을 외듯, 마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사랑을 어서 잃고 싶어하는연인처럼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어요. - P123
이전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좌천을 당한아버지는 그 분풀이를 가족들에게 했는데, 자신이 정한 규율을따르지 않으면 말그대로 발작을 일으켰다. - P142
나는 이 일시적인 일탈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그 방에는 수백 권의 책이 남아 있었다. 한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른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꼈다. 책이 나를 이곳저곳으로 끌고다녔다. 집으로 갈 때면 아쉬움에 입이 말랐다. 아이들과 저녁을먹으면서도, 밤에 남편과 침대에 누워서도 작업실의 빈 공간을떠올렸다.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P154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너무 무섭고 고통스럽다. 소설을 쓸 때마다 달아나고픈 충동에 휩싸이는 건 소설을 쓰는 일이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옥미는결국 해냈고 그걸 생각하면 아주 작은 불빛이 켜진 것처럼 내게도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를 등불 삼아 컴컴한 강물 속 물풀처럼자라나 있는 슬픔과 고통, 시기심과 비겁함, 자기모순과 기만 따위를 헤치며 또다시 조금씩 앞으로 헤엄쳐나간다. 그 길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어코 환한 쪽으로 고개를 돌릴 것이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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