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
백낙청 외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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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역사적인 내용을 조금 참고 넘기면 현안들을 가지고 흥미롭게 토론하는 걸 읽을 수 있다. 특히 표준어의 서울 중심의 편향성 뿐만 아니라 민주적 개념이 부족한 민족주의 성향을 띤다는 지적이 인상적이다.

표준어 개념은 두가지를 구별해서 봐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의 대결, 그리고 국가와 민간의 대립입니다. 서울과 지방의 문제를 보면요, 1935년 당시에 민간 국어운동을 주도한 조선어학회에서 표준어사정위원회를 구성하고 1만여개의 단어를 심의해서 그중 6천여개를표준어로 정합니다. 그 위원이 73명인데 과반인 37명이 서울과 경기출신 위원이었고, 표준어로 할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을 이들에게만줬다고 해요. 나머지 지방 출신 위원들은 이의제기만 할 수 있었고요. 표준어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이미 서울중심의식이 반영돼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P63

언문일치가 꼭 입말과 문장을 일치하자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T. S. 엘리엇의 유명한 말이 있어요. "당신이 말하는 그대로글을 쓰면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쓰는 그대로 말을 하면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 P91

1990년대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그 반작용으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투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이후로 지역에 따라 사투리 교육도 이루어지죠. 저는 언어규범화의가장 큰 문제가 사투리에 모멸감을 안긴 것이라 봅니다. 사투리 쓰면창피한 것이고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한 것…. 중앙집권이 조금씩 약화되면서 그런 모멸감도 줄어들고 있다는 점 역시 표준어운동이 결국 국가통제의 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반증하는 사례가 아닐까합니다. 그런데 이미 전국적으로 전통 사투리가 많이 소멸되어버렸거든요. 언어다양성을 위해서도 남아 있는 전통 사투리를 보존하는노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 P96

국문연구소에서 정한 표기법은 교과서나 사전 등의 표준을 정하는 것이지 일반에서 편지 등을 쓸 때 편리함을 좇아 달리 쓰는 것까지 국문연구소가 상관할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저는 이런 의견이 연구보고서에 기록된것을 보면서, 표기법과 같은 규범의 적용범위를 그 당시에도 많이 고민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보일 것인지를 생각하며 쓰는 것이고, 언어규범은 공적인 글쓰기에서적용되는, 말 그대로 ‘공적인‘ ‘규범‘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선생님 말씀처럼 규범의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 P139

하지만 국어원에 외래어표기법을개정하라는 요구는 성립이 안 된다고 보는데, 규정의 가장 큰 문제는규정을 바꿀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있는 걸 바꿀 때 혼란이 훨씬 크기 때문에 국어원에서도 지금 표기법을 유지하려고 하죠. - P141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차원보다 민주사회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국어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정교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이러한 정책은 향후 이주민의 증가로 이들의 집단거주지가 확대되는 상황에 대응하는 면도 있는데, 다문화사회로의 진입 국면에서세계화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공용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P152

대개의 대학생들이 왜 욕을 안 쓰냐면 이 언어공동체가 그렇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욕을 사용하는 공동체와 그렇지않은 공동체를 구별하거든요. 그래서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도 사투리처럼 욕을 다시 사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중고등학생들이욕을 하는 이유는 또래집단에서 그걸 일상어처럼 쓰기 때문이에요.
세대단절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어른들과 단절하려는 작용의 하나로 청소년기에 욕을 짙게 사용한다는 거죠. 그래서 지나친 언어적 간섭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국가 전체를하나의 언어공동체로 보기 때문에 발생한 일로 생각돼요.
이와 관련해서 언어소멸의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해볼게요. 요즘 제주방언을 제주어라고 부르면서 제주방언의 소멸에 대한 얘길 많이 합니다. 대표적인 부분이 아래아 발음이죠. 젊은 사람들은 거의발음을 못하지만 저희 윗세대 어른들은 많이 씁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자꾸 아래아를 발음해야 한다고 이야길 하고요. 아래아를 안 쓰면제주도사람이 아니라고, 모멸감을 주는 방향으로 지나친 간섭이 이루어지는 거죠. 하지만 그럴수록 젊은 사람들은 스스로 제주도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커져요. 서양의 언어소멸에 대한 학자들 사이의 유명한 말이 있죠. "언어소멸은 젊은 사람들의 입에서생기는 게 아니라 노인들의 귀에서 생긴다." - P156

세계적으로 여러 사람이 쓰는 언어인데 동시에 각 지역의 영어가 독자성을 주장하고 있어요. 그걸로는 문학창작도 잘 안되죠. 지역적으로 한정된 독자성을 유지 못하면 언어의 창조력도 쇠퇴한다고 봐요. 영어의 위세에는 그런 양면이있다고 생각합니다. - P159

"언어는 민중 전체가 의식주보다도 평등하게 가지는최대의 문화물" (이태준 『문장강화』, 창비 2005, 95면)이라고 한 이태준의 말과 연관 지을 수 있겠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라는 건 오늘을 사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계속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측면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언어교육을 통해 어떤 말은써도 되고 어떤 말은 쓰면 안 된다는 식으로 바른말을 규정하고 가르치는 것을 경계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언어라는 공유지의영역은 경계가 명료하진 않은 상태죠. 그래서 써야 할 말과 쓰지 말아야 할 말을 인위적으로 구분해내기보다는 우리말의 원형적인 구조와 내용을 습득하면서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의 영역을 확장해서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게 언어교육에서 중요합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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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 일상용품의 비밀스러운 삶
존 라이언.앨런 테인 더닝 지음, 고문영 옮김 / 그물코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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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 그리고 높은 소비 수준이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착각을 버릴 것.

●당신이 무엇을 입고, 신을 것인가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자발적 가난을 서약하라. - P60

불행하게도, 이제 높은 소비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환상이 되어버렸다. 전세계인들은 이제매일 스테이크를 먹고, 한 집에서 차를 몇 대씩 굴리면서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매일 자신의 몸무게만큼소비하는 행위를 지속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한 높은 소비수준을 전세계 사람들이 영위하는 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자원 소비를 줄이고 삶의 참된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생활 양식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세계적인 생태학적 재앙을막을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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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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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십여년 전 읽었던 보통의 책들을 다시 꺼내 보고 있다.
처음 시작은 아무래도 얇고 여러 저서들 중에서 발췌한 이 책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도로변의 식당이나 심야 카페테리아, 호텔의 로비나역의 카페 같은 곳에 가면 쓸쓸한 공공장소에 고립되어있다는 느낌이 희석되기도 하고, 그 덕에 독특한 공동체의식을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 P11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것이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안 변한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 환경은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호텔 역시 정신의 습관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슷한기회를 제공한다. - P20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안개야 많았겠지만, 우리의 시선을 인도해주는 휘슬러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 독특한 특질을 보는 것이 약간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와일드가 휘슬러를 두고 한 이야기는 호퍼에게도 할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림으로 그리기 전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주유소, 리틀 셰프, 공항, 기차, 모텔, 도로변 식당의 숫자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 P24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이 질문의 재귀적 운동 속에서 나의 자아는 일종의 배신과 비진정성에 점차 물들 수밖에 없었다. - P45

코스[젊은 발몽 남작인 나에게는장애물 코스였다가 나오는 대로 식사를 하면서 나는 한가지 의견을 내놓았다가 잠시 후 그녀의 의견과 맞추기위해 그것을 약간 수정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클로이의질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 P55

(하인한테 노동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이러한 주장은 근대의 경영 이론을 기다려야 한다) - P73

능력주의 시대에는 천한 직업을 가진 것이 단지 가엾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런 직업은 그 반대의 기분 좋은직업과 마찬가지로 능력에 따라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서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고, 또 그 대답에아주 신중하게 귀 기울이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 P76

"[경제학은] 노동자를 일하는 동물로밖에 알지 못한다-최소한의 육체적 요구만 남은 짐승으로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에 따르면 피고용인에게주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돌아가도록 칠하는 윤활유와같다. 일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 - P79

석탄 사용을 중단하고 천연가스를 사용해도 도태된 에너지 자원은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는자신의 가격이나 존재를 축소하려는 시도에 감정적으로대응하는 습관이 있다. 노동자는 화장실에 들어가 흐느끼기도 하고, 실적 미달에 대한 두려움을 술로 달래기도 하며, 해고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면 작업장에 두 가지 요구가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이윤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경제적 요구다. 또 하나는 경제적 안정, 존중, 종신직, 나아가 형편이 좋을 때는재미까지도 갈망하는 피고용자의 인간적 요구다. 이 두가지 요구가 오랜 기간 이렇다 할 마찰 없이 공존할 수도있지만, 이 둘 사이에서 진지하게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에 따라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 P81

여자들은 홀로 있는 남자들의 절망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미래의 충성과 이타심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 P99

그러나 어머니들이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흔히 들려주는 말처럼, 따분해하는 사람들은 주로 따분한 사람들이다. 나는 사샤의 권태에 인내심을 잃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의 내부가 흥미로워 굳이 도시까지 ‘흥미롭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원했다. 정열의 샘에 늘 가까이 있어 도시가 ‘재미‘ 없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을 원했다. 인간영혼의 어둡고 비극적인 면을 잘 알고 있어 취리히 주말의 고요를 고맙게 생각할 사람을 원했다. 결국 사샤와 나는 오래가지 못했다. - P110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프루스트 - P122

흔히 말하듯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모두 희극적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중요한 외과 수술을 하는 의사를 비웃지 않는다. 그러나 수술을 끝낸 뒤 집으로돌아가서 거만하게 의학적 은어로 부인과 딸들을 으르는의사는 비웃을 수 있다. 우리는 지나치고 어울리지 않는것을 비웃는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왕, 능력이 권력을따라가지 못하는 왕을 비웃는다. 인간적 본성을 잊고 특권을 남용하는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비웃고, 비웃음을 통하여 불의와 과잉을 비판한다.
따라서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여지면 도덕적의미를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격과 습관을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표현하는 방법,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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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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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폭력성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폭력적인 아이와 평안한 가정 중에서 선택의 갈등을 겪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초반엔 ‘벤’이 어떻게 될까 궁금했지만, 이 소설에서는 결국 ‘헤리엇’은 어떤 기분으로 남겨지게 될까를 고민하게 하며 결말을 맞는다.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반해 런던 외곽의 도시에서 빅토리아풍의 3층 저택에 신혼을 차린다. 수입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데이비드의 아버지 제임스의 도움으로 집을 마련했고, 이혼해 각각 재혼한 배우자를 두고 있는 데이비드의 아버지와 어머니 몰리의 식구들을 비롯해 헤리엇의 어머니 도로시, 사촌들까지 모여 대저택에서 미래를 계획하며 풍성한 파티를 즐긴다. 많은 아이를 낳을 계획으로 루크, 헬렌, 제인, 폴 등의 자녀를 출산하고, 제임스의 경제력과 도로시의 양육을 토대로 양가의 지원을 받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만, 폭력적인 성향의 다섯째 아이 벤을 낳으면서 가정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태생부터 힘이 세고 폭력적인 성향이 강했던 벤은 다른 형제들을 위협하고, 강아지를 목 졸라 죽이는 등 비정상적이고 통제 불능한 아이이다. 벤에 대한 공포심과 두려움은 로버트 부부와 친지들과의 왕래를 드물게 만들고, 헤리엇은 벤을 낳은 엄마라는 비난의 시선을 감당한다. 다른 가족들은 벤을 로버트 가와 분리 시키기로 합의하고 몰리의 남편 프레데릭이 나서 벤을 요양소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헤리엇은 벤을 보내고 난 후 계속해서 죄책감과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몰리를 통해 벤의 요양소를 찾아내고, 요양소에서 구속복에 묶여 진정제를 투약받고 정신이 나가 있는 벤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그를 구출해낸다. 벤이 없는 동안 다시 가정의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던 로버트가의 분위기는 다시 삭막하게 가라앉고, 헤리엇은 벤을 낳은 여자라는 비난과 동시에 벤을 요양소에서 데려와 집안을 파탄 낸 여자라고 질타를 받는다. 헤리엇도 가정의 화목과 벤을 두고 선택의 저울질을 해보지만 벤에 대한 죄책감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다. 루크는 제임스의 집으로 떠나고, 헬렌은 몰리와 프레더릭의 집으로 떠나고, 제인은 도로시와 함께 로버트 가를 떠난다. 벤으로 인해 영아기에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해 정서적으로 불안한 폴은 벤을 두려워하며 가장 오랫동안 헤리엇과 데이비드와 함께한다. 그러다 우연히 벤은 정원 일을 도와주러 온 날품팔이 존을 따르고 신뢰하게 된다. 헤리엇은 존에게 대가를 치르며 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 부탁하고, 벤은 저학년까지 존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존도 곧 다른 일을 찾아 로버트의 가족을 떠난다. 헤리엇은 벤의 학교생활을 염려했지만, 벤은 존과 헤어진 후 다른 비행 청소년들과 함께 어울리며 각종 사건 사고를 일으킨다. 오랜만에 로버트 부부의 집에 모인 가족 모임에서 폴도 결국 제임스가 데려가기로 하고, 로버트 부부는 자신들의 꿈과 함께 빅토리아풍의 저택을 팔기로 결정한다.

헤리엇이 잘못을 했을까. 그녀는 왜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을까. 헤리엇의 선택과 그녀가 처하게 된 주변 상황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점들이 많았다. 어떤 선택이든 주변의 인물들은 ‘벤’이라는 사태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헤리엇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 모순이다. 모성의 책임이 ‘벤’이라는 존재의 탄생에 대한 비난의 수단이었고, ‘벤’을 선택한 그 모성의 책임은 또 역설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결국 모성이라는 것은 어머니를 억압하고 비난하기 편리하게 만든 개념인지도 모른다.
벤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볼 수 있게, <세상 속의 벤>이 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바란다.

그가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신에게 키스를 하기 위해수그릴 때, 해리엇은 그의 강렬한 소유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좋아했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이나 아기가 아니라 행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의 행복. - P26

그럴 만한 돈은 없었지만 제임스가 돈을 주겠다고, 해리엇이 나아질 때까지만 도와주겠다고했다. 제임스답지 않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그는 해리엇이 이런인생을 선택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 값을 대신 치러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 P53

하지만 벤은 자기도 고통받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 애는 고통을 받고 있는가? 그 애는 과연 무엇일까? - P91

그 애는 다른 아이들을, 특히 루크와 헬렌을 항상 쳐다보았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며 앉고 서고 하는지를 연구했다. 그들이 먹는 방식도 그대로 따라했다. 그 애는 이 두 나이 든 아이들이 제인보다 사회성이 더 발달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폴도 완전히 무시했다. 애들이 텔레비전을 볼 때 그 애는 그들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화면을 보다가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어떤 반응이 적절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었기때문이다. 그들이 웃으면 잠시 후에 그 애는 딱딱하고 어색하게들리는 커다란 웃음소리를 더했다. 그 애에게 즐거운 순간에 자연스러운 것이 있다면 온 이를 드러내면서 적대적으로 웃는 미소였다. 그 웃음은 정말 적대적으로 보였다. 그들이 뭔가 흥분된 순간에 가만히 관심을 집중하느라 고요해지면 그 애도 그들처럼 자기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화면에 빨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 애의 눈은 그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P93

그녀는 전반적으로 안도하게 되었고 자신이 어떻게 그러한긴장을 그렇게 오래 견뎌냈는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벤을 추방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벤에 대해생각할 때 그건 사랑이나 온정의 마음에서가 아니었다. 그녀는자기 내부에서 정상적인 감정의 불티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오히려 죄의식과 공포감으로 그녀는 밤새 잘 수 없었다. 감추려고 애썼지만 데이비드는 그녀가 깨어 있는 것을 알았다. - P105

「그래요, 로바트 부인.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시겠어요? 우선 저는 이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리고 또한 이런 일이 희귀한 일도 아니라는 사실도요. 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 P139

「전 제 자신을 비난하지 않아요」 해리엇이 말했다. 「당신이그 말을 믿기를 기대하지 않지만요. 하지만 이건 정말 불쾌한농담이에요. 난 벤이 태어난 이후 줄곧 벤 때문에 비난을 받아온 것 같아요. 난 죄인처럼 느껴요. 사람들이 내가 죄인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요」이렇게 불평하는 동안 ― 신랄했지만 해리엇은 목소리를 낮출 수 없었다― 쓰라린 세월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길리 박사는 책상에 앉아 쳐다보았다. 이건 정말희한해요. 이전에, 아무도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네 명의 정상적이고 똑똑해 보이는 멋진 아이들을 갖다니 넌 정말 똑똑하구나! 그 애들은 모두 네 덕분이야. 훌륭한 일을 해냈어, 해리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무도 이제까지 그런 말을안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벤에 대해서는 ―전 그저 죄인이죠!」 - P140

불쌍한 데이비드…………. 항상 그런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을 해리엇은 알았다. 때때로 불쌍한 해리엇, 그러나 그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는 항상 무책임한 해리엇, 이기적인 해리엇, 미친 해리엇………… - P158

「우린 애가 없어, 해리엇. 아니, 나는 애가 없어. 당신은 애가 하나 있지」 - P169

두루두루 둘러봐. 만약 내가 그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면 그럼우리 모두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었는데.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고, 그래서……..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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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와 진짜 - 김승옥 초단편 소설집
김승옥 지음 / 보랏빛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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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의 가치관을 볼 수 있다. 옛날 생각들, 유행이 지나버린 사고방식들.

피투성이인 이웃집 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엄격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떠한 부정不淨으로부터도자기 가정을 지키려는 여자들의 안간힘이 2월의 밤바람보다 더 매섭게 휘몰아쳐옴을 느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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