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 꿈은 아니었습니다만?!
꿀별 지음 / 넥서스BOOKS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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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자발적 노예가 되려고 자기 체면에 열심인 젊은 친구들이 많다. 더 나아가 그 노예의 모습마저 사랑스럽다고 자위한다.

고등학교 때 나는 ‘대학 만병통치설‘에 홀려 있었다. 대학 만병통치설이란 ‘대학만 가면~‘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대학만 가면 남자친구도 생기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살까지 빠진다는 신기한 속설이다. 과학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인데 그 정도의 효능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대학, 안 가는게 이상한 거다.
그 속설을 순수하게 믿었던 탓일까. 대학에 입학한 후깜짝 놀랐다. 나는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았고, 하고 싶은일과는 더 멀어졌으며, 체중은 날로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5

머릿속에 그려 보고는 했던 최악의 일들은 결국 벌어지지 않았다. 분명 이 길에서 벗어나면 망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얼마안가 새로운 길을 찾았다. 나는 조금씩 지금, 여기, 행복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 P21

통화를 끊고 깨달았다. 내 인생의 중대한 결정에 대해 나는 24시간 고민한다면 타인은 5분도 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것을 타인에게 물어볼 이유도, 진지하게 생각해 달라 부탁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나를 제일 잘아는 것은 나이며, 나만큼 내 앞길을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 P25

좋아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써 조금 더 비효율적이고, 수고스럽게 살게 됐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재미있으니까. 그 안에서 나는 가치를 느끼고 행복하니까. 그렇기에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포기할 수 있을까‘가 아닌 ‘어떻게 하면 지속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본다. - P30

이 시간을 통해 ‘좋아하는 일을 현실에 적용하며 사는것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하는 마음과 그 일이업이 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이렇게만살다가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더욱 싫어질 것 같았다. 나는 나의 애매한 재능을 인정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했다. - P35

한 주간 제작되는100장 이상의 이미지는 고객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판매까지 이어져야 한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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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 성석제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0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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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분의 이까지 견디다가 대각선으로 속독해 버렸다.
시골 지역의 남자들의 무용담이란, 단세포 동물들의 특색 없는 일관적인 허세일 뿐이라 도저히 몰입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영웅을 만들어간다. 마사오가 불패의 신화를 가지게 된 것은 사람들이 불패의 신화를 가지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 P31

세심한 사람은 물방울 입자가 만들어질 때 그 중심에 혹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울분이나 떠난 사람들의 미련, 회한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아낼지도 모른다. 혹은 병든 몸으로 고개를 넘어오다 지쳐 쓰러진 귀향자들의 원혼이 음울한 비안개로 변해 떠나려는 자의 눈을 가리고 성한 몸으로 씩씩하게 돌아오는 자의 발을 미끄러지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기쁨과 사랑, 출세와 영광을 신비롭게 장식하는 운무라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 P85

소문은 항아리처럼 생긴 지역이 스스로의 특성에 맞게 극적으로 개량하고 발달시킨 정보 매체다. 소문은 중앙이나 제도권 언론에서 도저히 취재할 수 없는 것, 예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사실인 것, 무시하고 포기하는 진실, 다룰 수 없는 역사를 폭넓고 세세하게 다룬다. 지역 재판소, 경찰, 세무서, 행정관서, 의원 사무실, 사건 당사자의 입과 주변 사람의 증언과 같은 공식적인매체를 합쳐놓은 것보다 풍부하고 설득력이 있는 것이 소문이다. 따라서 다른 데서는 몰라도 지역에서 장사를 하거나 길을 걷거나출세를 하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데 소문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아미노산이자 미네랄, 산소 같은 것이다. 그렇다. 그랬다. - P105

그는 대낮처럼 밝은 사내였다. 태양에 비밀은 없다. - P132

재천 역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다.
평범한 성적을 유지하고 평범한 자질을 가진 것도 나와 같다. 다만평범한 것에는 만족을 하지 않는 것이 나와 다른 점이었다. 그는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참지 못했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범한 인물을 자신처럼 평범한 위치로 끌어내리든가, 자신이 비범하게 되기를 원했다. 강력히 바랐다. - P140

권력자 가까이서 세상을 살아나가는 기술 가운데 아주 사소한것처럼 보이나 실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아첨이다. 아침은 인간의 일생을 기름지게 할 수도 있고 비겁한 자로 낙인찍히게 할 수도있다. 아침을 아침 같지 않게 하는 것이 기술의 핵심인데 그때나그후에나 나는 그런 데에 익숙하지 못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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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구석들 창비세계문학 88
에밀 졸라 지음, 임희근 옮김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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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본능 때문에 이 소설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소감이 나올 수 있으나, 이 소설은 너무나 사실적이다. 체면을 지켜야 하고 위신을 세워야 하는 파리의 부르주아들, 지금의 현실에서는 위선적인 특권 중산층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마르세유에서 빠리에 입성한 옥따브는 깜빠르동의 소개로 바브르 댁의 5층 하숙생으로 들어온다. 바브르가는 소문에 의하면 공증인 출신의 재력가로 건물의 2층에서 사위 뒤베리에 판사와 딸 끌로띨드와 함께 살고 있고 2층 나머지 방에는 그의 둘째 아들 떼오필과 발레리부인이 산다. 1층은 주단가게로 중2층에 사는 큰아들 오귀스뜨가 운영한다. 3층에는 지체 높은 작가가 살고, 4층에는 쥐죄르 부인과 깜삐르동이 아내 로즈, 딸 앙젤과 살고 있다. 5층에는 조스랑씨와 아내 엘레오노르, 딸 오르땅스와 베르뜨, 정신나간 아들 사뛰르냉이 살고 있고 맞은 편에는 쥘 삐숑과 마리 부인이 딸 릴리뜨와 살고 있다. 위 다락에는 하녀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젊잖고 격조 높은 부르주아들이라 생각하고, 본인들이 거주하는 바브르 씨의 건물은 채신있는 집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간통과 오욕으로 얼룩진 위선자 집단이다.
건축가 깜빠르동은 옥따브가 일하는 될 들뢰즈에두앵 합작회사 포목상점에서 일하는 아내의 사촌 가스빠린과 간통하는 사이이며, 로즈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체념하고 있다. 가스빠린은 로즈와 깜빠르동이 결혼하기 전 자신이 깜빠르동과 결혼을 꿈꾸었으나 로즈에게 깜빠르동을 빼앗긴 뒤 사이가 틀어졌으나 둘이 화해하면서 심지어 가스빠린이 깜빠르동 집에 들어와 살게된다.
바브르 씨 건물에 드나드는 트뤼블로라는 청년은 옥따브와 금방 친해져 친구가 된다. 어느 날 다락에 올라간 옥따브는 트뤼블로가 건물의 모든 하녀들과 잠자리를 즐기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면서 아래층 주인 집들의 하녀들의 거친 입담을 통해 집안의 속사정들이 다락방에서 퍼져나가는 것을 알게 된다.
회계원 조스랑씨는 하청작업을 맡아 아내와 딸들의 허영을 충족시켜주고, 하녀 아델에게 주는 밥마저 야박하게 아껴야 하는 형편이고, 조스랑 부인은 자신들의 밑천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딸과 아들의 혼사에 앞뒤 가리지 않는 속물이다. 자신의 딸 베르뜨를 바브르의 재산을 탐하며 오귀스뜨와 결혼을 시키려 오빠 나르시스 바슐라르에게 지참금을 구걸하지만 그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돈을 흥청망청 쓸 망정 조카들을 위해서는 20프랑도 내주기를 꺼려한다. 조스랑부인은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쳐 지참금 5만 달러를 낸다는 거짓 공증을 받아 결혼을 시키고야 만다. 결혼식 날 떼오필은 수상한 편지를 발견하고 옥따브와 발레리의 관계를 의심하여 결혼식 내내 아내를 추궁하고 하객들의 시선을 끌다 결국 그 편지는 하녀에게 온 편지라고 사람들이 달래 종결짓지만 의심은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결혼한 베르뜨는 엄마의 습성을 닮아 오귀스뜨의 재산의 자신의 허영을 채우기 위해 탕진하고 다녀 부부관계를 악화시킨다.
옥따브는 돈 많은 여자를 만나 출세하려는 욕망을 속에 품고 파리에 상경하여 발레리 부인에게 접근하다 퇴짜를 맞고 아쉬운대로 정숙한 마리를 책으로 꼬드겨 손쉬운 관계를 즐긴다. 그러다 마리를 임신시키지만 삐숑은 임신한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 믿고, 마리의 부모인 뷔욤 부부는 그저 아이를 둘이나 낳는 것에 대해서만 한탄한다. 옥따브는 그들에게 축하한다며 저녁을 한 번 대접하는 것으로 마리를 떨궈버리고는 발레리부인 이후 관심이 갔던 에두앵부인에게 접근하지만 그녀에게도 퇴짜를 맞고 자존심이 상해 포목상점을 그만두고 나온다. 자신의 충동적인 결정에 후회하지만 곧 바브르의 주단가게에서 일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끌로띨드와 옥따브가 함께 합창연습을 하는 중 갑자기 바브르가 졸도하는 위급상황이 벌어지자 끌로띨드는 뒤베리에를 급하게 찾는다. 뒤베리에는 지루한 예술적 감흥에 젖어사는 재미없는 끌로띨드 몰래 끌라리스라는 여자를 후원하며 바람을 피고 있었다. 그 날 뒤베리에는 바슐라르와 그의 조카 괼랭, 트뤼블로와 고급식당에서 회포를 풀고 같이 끌라리스의 집으로 가지만 끌라리스는 자신의 모든 짐을 들고 도망을 가버린 뒤였고, 옥따브는 끌라리스의 집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뒤베리에를 찾아내 바브르의 소식을 전해준다.
바브르는 결국 사망하고, 삼 남매는 그의 유서를 찾아내려 온 집안을 뒤지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재산분배에 대해 고민하지만 바브르는 증권투기로 전 재산을 탕진한 뒤 건물에도 저당이 잡혀있는 것을 발견한다. 건물을 팔아 채무를 갚아야할 판에 놓인 세 남매에게 뒤베리에는 수작을 부려 건물을 절반 값에 낙찰을 받고, 두 아들은 분노하지만 그와중에 오귀스뜨가 뒤베리에에게 월세를 몇 년간 공제받는 약속을 받아낸 사실을 알고 떼오필과 오귀스뜨도 갈등을 겪게 된다.
베르뜨의 사치로 악화일로를 걷던 오귀스뜨는 옥따브에게 베르뜨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대화를 요청하지만 이를 계기로 옥따브는 베르뜨를 겁탈하여 내연관계를 만든다. 베르뜨에게 선물 공세를 하며 유지하던 옥따브의 내연관계는 하녀 라셸에게 들키게 되고, 라셸이 집을 떠난 날 밤 라셸의 방에서 만나기로 했던 옥따브는 밤새 베르뜨를 기다리다 아델을 기다리는 트뤼블로를 마주쳐 뒤베리에와 아델의 불륜을 알게 된다. 옥따브를 바람맞힌 베르뜨는 새벽에 라셸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자신을 기다리던 옥따브를 마주치는데 둘은 창문을 통해 새벽에 뒤뜰에 나와 대화하는 하녀들을 통해 주인들의 지저분한 간통관계는 물론 자신들의 관계까지 하인들이 알고 욕하는 것을 듣는다. 충격에 빠진 베르뜨가 먼저 라셸의 방을 나오자 마자 하녀들을 통해 에두앵 씨가 사망한 것을 들은 옥따브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를 한다. 베르뜨를 레이스숄 선물로 자신의 방으로 유인한 옥따브는 결국 간통 현장을 오귀스뜨에게 발각되어 소동이 벌어지고, 한밤의 추태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버린다.
떼오필은 오귀스뜨를 찾아가 위로하면서 상속 문제로 겪던 갈등을 풀지만 속으로 자신이 결혼식 때 벌였던 소동을 떠올리며 고소해한다. 오귀스뜨는 자신이 당한 모욕으로 복수심에 불타 옥따브와의 결투를 결심하고, 두 형제는 결투에 관해 뒤베리에 판사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한다. 마침 뒤베리에는 트뤼블로가 찾아낸 끌라리스와 다시 살림을 차린 뒤였다. 바브르 형제는 뒤베리에를 찾기 위해 끌로띨드를 찾아가지만 딴 살림을 차린 뒤베리에 행방은 바슐라르에게 물어보라 한다. 끌라리스의 집을 찾아 바슐라르를 만나지만 바슐라르는 자신이 아끼던 숙녀 피피와 조카 꾈랭이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목격하고 난동을 피우는 중이었다. 끌라리스의 집을 묻는 두 형제에게 그녀의 집은 트뤼블로가 알 것이라며 셋이 같이 트뤼블로와 함께 끌라리스의 집으로 찾아간 그들은 끌라리스가 이번엔 가족들을 전부 대동하여 뒤베리에의 등골을 빨아먹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결국 결투를 상의하기 위해 식당으로 가서는 세 시간이 넘게 다른 이야기만 하다 애초에 결투는 하지도 못할 깜냥이었던 오귀스뜨는 그들의 조언대로 결투보다는 협상으로 의견을 모은다.
조스랑댁으로 피신한 베르뜨는 조스랑 부인의 욕을 한바가지 먹고는 언니 오르땅스의 방에 근신하는 중 당브르빌 부인이 나타난다. 당브르빌 부인은 조스랑의 아들인 레옹이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시켜 달라는 청언에 질투심을 느껴 레옹을 어느 과부와 결혼시키려 하다가 레옹으로 부터 버림을 받았다며 그를 찾으러 조스랑 댁을 방문한 것이었다. 조스랑 부인은 당브르빌 부인에게 레옹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면 그녀의 조카딸과 결혼시키라고 설득하였고, 당브르빌 부인은 자신의 집에서 레옹과 조카딸이 신혼 살림을 차린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결혼을 승낙하기로 한다.
베르뜨의 추문을 듣지 못한 조스랑은 베르뜨의 방문을 의아해 하지만 베르뜨는 오귀스뜨가 지방으로 내려갔다고 둘러댄다. 하지만 오귀스뜨가 집으로 찾아오자 당황하며 가족들을 추궁하지만 지참금 문제를 다시 상기시키며 사위와의 다툼은 온갖 신변잡기와 인신공격으로 빠진다. 한편 옥따브는 다시 에두앵 부인을 찾아가 상점에 취직을 하고, 마음을 잡고 성실하게 사업에 열중하다가 상회가 승승장구하여 사업을 키우고 에두앵 부인의 청혼을 받는다. 뒤베리에는 법원에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 지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의 건물에 대하여 파리에 퍼진 소문으로도 고통을 받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 오귀스뜨에게 베르뜨와 화해하라며 종용한다. 오귀스뜨는 부인상회가 번창하는 중에 자신의 상점은 점점 망해가고 있었다. 조스랑 부인은 괼렝과 피피의 결혼식에는 5만 프랑의 지참금을 내준 바슐라르를 보채며 오귀스뜨의 조건대로 5만 프랑의 지참금을 들고 베르뜨를 다시 앉히려 하지만 바슐라르는 자신이 파산상태라는 것을 털어놓으며, 조스랑은 괴로워하다 병들어 결국 사망한다. 오귀스뜨는 고집을 부려 버티다 결국 자신의 처지에 외롭기도 하고, 하녀 라셸이 집주인 행세를 하는 둥, 동생 내외는 가게를 말아먹고 있는 둥 여러가지 지칠대로 지쳐 결국 베르뜨를 받아들인다. 뒤베리에는 끌라리스가 피아노 선생과 바람이 나고 다른 후원자를 만나 이별을 선고하자 괴로워하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총알이 빗나가 턱뼈만 기형이 되고 만다. 트뤼블로는 조스랑의 장례식에서 쥐죄르 부인을 꾀려 시도하고 있었고, 마리는 셋째도 임신 중이었으며, 3층의 신사는 건물 내의 파렴치한 사건들을 소설로 써 흥행하지만 내용이 너무 불순하고 퇴폐적이라며 비난도 받는다.
다시 평안을 되찾은 건물에서 조스랑댁의 하녀 아델은 혼자 다락방에서 트뤼블로의 아이를 낳고 버리고 오고, 뒤베리에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조스랑 부인은 아델의 임신 사실을 숨기려 자신의 하녀의 정숙함을 자랑한다. 남자들은 다락방에 잠시 살다가 쫓겨난 구두꿰는 여자의 영아살해사건을 맡은 뒤베리에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도덕적 견해를 내놓으며 위선을 떤다.

"나는 내 할 바를 했어. 그리고 만일 다시 해야 한다 하더라도,
필요하면 다시 할 거야. 인생에서 소심한 자는 손해 보기 마련이지. 어디까지나 돈은 돈이라고. 돈이 없으면 가서 발 닦고 자는 수밖에없어. 난 수중에 20수가 있으면 40수가 있다고 늘 남들 앞에서 말해왔어. 바로 그것이 지혜거든. 남의 동정보단 부러움을 받는 게 나으니까. 배운 게 많으면 뭘 해, 차림새가 시원찮으면 남들이 무시하는걸. 옳은 일은 아니지만, 그런 걸 어떡해 난 옥양목 드레스를 걸치느니 차라리 더러운 속치마를 입겠어. 보통 땐 감자를 먹을망정저녁 초대를 했을 땐 통닭을 내놔야지. 내 말과 반대로 얘기하는인간들은 멍텅구리들이야!" - P56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동안 마리는 멍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도원처럼 봉쇄된 작은 집, 뒤랑땡 거리, 그 집의 좁디좁은 방들, 창가에 팔꿈치를 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던 그곳이 눈앞에 떠올랐다. 너무 길게 끌었던 유년 시절, 이해할 길 없는 온갖금지 사항들, - P104

"어이구!" 이윽고 그가 중얼거렸다. "작가들은 과장이 심해요.
제대로 교육받은 계층에서는 불륜이란 아주 드문 일이거든요. 좋은 가문 출신의 여자는 마음이 고결하기 마련이죠." - P149

옥따브가 다가오자 그는 하인이었다가 이제는 남을 부리게 된 사람 특유의 노골적인 지배 심리와 거친 복수심을 드러내면서 빼루 할멈에 대한 얘기를 했다. - P156

그러나 문지기는 자기 권위가 무시되는 장면을 입주자인 옥따브가 보게 된 것이 몹시 화가나서, 자기가 어떻게 남을 복종시키는지 보여주겠다는 듯이 뻬루 할멈에게 분풀이를 했다. - P158

그래 이 집에선 참 깔끔한 일들만 생기더군. 겉 다르고속 다른 두엄 같은 것들만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데, 자기 건물에 여자를 들이지 말라고? 층층이 잘 차려입은 더러운 여자들이 문뒤에서 개처럼 살아가는 꼴은 참아주면서 말이지. 천한 것들, 더러운 졸부들! - P181

"난 남의 동정보다는 부러움을 받고 싶어요. 돈은 돈이죠. 난 수중에 20수가 있으면 언제나 40수가 있다고 말해왔다고요."
베르뜨는 결혼하자 조스랑 부인의 몸집을 닮아가고 있었다. - P351

자신이 세워놓은 계산이 엉망으로 뒤흔들리며 옥따브는 차츰베르뜨를 향해 젊은 피가 끓어오르는 욕망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예전에 세워둔 유혹의 계획, 즉 여자들을 수단으로 삼아 출세해보려는 의지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베르뜨를 사장 부인으로만 보고 그녀를 차지하여 이 가게를 맘대로 쥐고흔들어보겠다는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빠리 여자, 마르세유에서는 한번도 걸려본 적이 없던 사치스럽고 맵시 있고예쁘장한 이 여자를 원하고 있던 것이다. - P365

것이 그녀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는 쌓이고 쌓인 허기같은 것을 지닌 채 시집왔고, 친정에서 궁하게 보낸 미혼 시절 신발을 사기 위해 버터도 없이 먹던 형편없는 고기, 단벌 드레스를스무번이나 뜯어고쳐 입어야 했던 괴로운 기억, 궁핍한 생활과 칙칙한 누추함을 대가로 치르며 버텨온 집이 꽤 잘산다는 거짓말, 이런 것들에 대한 보상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는 남편감을 낚으려고 무도회용 신발을 신고서 빠리의 진창을 누비고 다닌 지난 삼년간의 겨울, 빈속에 들척지근한 물만 잔뜩 마셔댄 죽도록 지겨운 파티들, 얼간이 청년들 곁에서 방긋방긋웃으며 다소곳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야 했던 고역, 다 알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을 때 남모르게 치밀어 오르던 부아, 비맞으며 마차도 안 타고 걸어서 돌아오던 일, 얼음장 같은 이부자리에 누우며 부르르 떨던 일, 어머니가 따귀를 때려 두 뺨이 계속 화끈거리던 일, 이런 일들에 대해 스스로 앙갚음하고 있는 중이었다. 스물두살의 나이에 그녀는 꼽추 여인이나 느낄 만한 굴욕감에 빠져, 저녁이면 자신에게 뭐 부족한 점이 없나 싶어 잠옷 차림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절망하곤 했다. 그러다 마침내 한 남자를 붙든 것인데, 숨 가쁘게 쫓아다니던 산토끼를 우악스러운 주먹질 한방으로 죽여버리고 마는 사냥꾼처럼, 그녀는 오귀스뜨에게 냉혹한태도를 보이며 그를 패자 취급하고 있었다. - P372

봇물처럼 쏟아지는 이런 말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돈에 대한 그녀의 존중과 맹렬한 욕구였다. 이처럼 돈을 섬기는 종교를 그녀는 단지 있는 척하기 위해 친정 식구들이 할 수밖에 없었던 비굴한 행동들을 보면서 절로 배운 것이었다. - P378

바로 그녀의 배가 부풀어 오르면서 이 건물에는 파렴치한 그 무엇이 가득 차고, 그로 인해 벽들조차도 영 편치 못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배가 불러갈수록 이 집 사람들의 도덕성에 일종의 혼란이 생겨났다고 했다. - P396

그는 미친 사람을 두려워했다. 미친 사람들하고는 사리를 따져 얘기할 수가 없으니까. - P458

그리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녀가 내뱉는 토막말들 속에서결혼에 얽힌 얘기들이 몽땅 다시 쏟아져 나왔다. 신랑감을 낚으러나섰던 지난 삼년 동안의 겨울, 떠미는 바람에 온갖 총각들 품에안겨본 일, 양갓집 응접실이라는 공인된 매춘 장소에서 이런 식으로 몸을 내맡겨봤지만 결국 허탕친 일들, 가져갈 재산이 없는 딸들에게 어머니들이 가르치는 얘기들, 점잖고 허가받은 매춘 강의, 춤추면서 몸을 갖다 대기, 무심한 듯 문 뒤에 두 손을 놓아두기, 숙맥 같은 남자들의 욕심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순진무구함의추잡한 이면, 그리하여 어느날 저녁 매춘부가 남자 하나 낚듯이 낚아낸 남편, 커튼 뒤에서 욕망의 열기에 들떠 흥분한 채 덫에 걸려든 남편, 이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 P518

판사는 법원에 나갈 때 처남을 데리고 센 강변의 둑을 따라 걸으며 축축이 눈물 젖은 음성으로 모욕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여자 없이는 지낼 수 없으니 유일하게 가능한 행복은 그저 여자를 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침울하고 비겁한 철학으로 그를 세뇌했다. - P543

그는 여자들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인형처럼 교육받은 탓에 신세를 망치거나 멍청이가 돼버리는 여자들, 대물림한 신경증 때문에 감정과 정열이 변태적으로 꼬여버리는 여자들, 이 모두 욕망도기쁨도 없이 지저분하고 어리석게 전락해버리는 여자들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남자 쪽, 그러니까 겉치레만 멀쩡한 위선으로 끝내 인생을 망쳐버리고 마는 호색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급진파인 이 의사의 분노 속에 한 계층의몰락을 알리는 조종소리가 집요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버팀목이 썩어 제풀에 우지끈 넘어가는 부르주아 계층의 와해와 붕괴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이어 그는 다시금 미개족들에 대해 이 소리 저 소리 했고, 만인의 보편적 행복을 예견했다. - P562

게다가 다른 남자들도 겉으로 드러나게 짐짓 역겨워하고 엄격하게 굴었다. 깡빠르동은 비행을 이해 못하겠다고 했고, 바슐라르영감은 아동보호를 주장하였다. 떼오필은 조사를 요구하였고, 레옹은 매춘행위를 국가와 관련지어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한편트뤼블로는 옥따브의 질문을 받고 뒤베리에의 새 내연녀에 대해얘기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주 괜찮은 여자인데, 나이는 좀 들었지만 엉뚱한 데가 있고, 판사가 애정을 정화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바로 그 이상에 맞는 마음 넓은 여자라고 했다. 한마디로 쓸데없이소동을 피우지 않고도 그를 이용하고 그의 친구들과 동침도 하면서 본처와도 탈 없이 지내게 해주는 바람직한 여자라는 것이었다. - P590

건물은 마치 품위 있는 잠에 빠져버린 듯 암흑 속에 엄숙히 잠겨들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삶은 다시 전처럼 덤덤하고 어리석은 수준으로 돌아갔다. - P595

"그것들은 내 신발짝만큼도 속이 없다고. 서로 얼굴에 침을 뱉고 나선, 남들한테 깨끗하게 보이려고 그 침으로 서로 세수를 시켜준다니까." - P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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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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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의 공정성, 취재 윤리에 대해서 따지기도 중요하지만, 윤리와 도덕은 너무 비현실적이니 저널리즘은 단지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언론사가 한 사건을 두고 취재하며 싸지른 배설물만도 못한 기사를 보도하고, 이는 결국 살인과 폭력사건으로 이어진다. 사건뿐만 아니라 사건을 보도함으로 인해 다른 사고들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쓰레기 저널리즘이라고 고발한다. 인물들의 냉소적이고 신랄한 비아냥과 작가의 필력 덕분에 재밌기까지 하다.
다만, 작가가 언론에 대한 복수심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작품의 질을 좀 떨어뜨리지 않았나.
그리고 언론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사실을 왜곡해서 보도하는 것이 우리가 늘상 교묘하게 말을 바꾼다든지, 상황의 선후관계를 뒤집어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라는 반성도 해 보았다.

카타리나 블룸은 그녀의 지인 볼터스하임의 댄스 파티에서 만난 괴텐과 첫눈에 눈이 맞아 불타는 사랑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괴텐은 공개수배중인 범법자였고, 카타리나는 괴텐의 도주를 도와주고 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그녀가 가정부로 일하던 블로르나 부부는 휴가에서 급하게 복귀했고, 가택 수사와 심문을 받는 과정 중에 주변인들로부터 카타리나 블룸의 집에 ‘신사의 방문’이 찾았다는 증언을 듣는다. 카타리나의 자동차 주행기록으로 ‘비밀스러운 드라이브’와 고액의 반지와 편지가 집에서 발견되어 그녀의 행실에 대한 의심을 받게되고, <차이퉁>지는 카타리나를 마녀사냥하듯 악의적인 추측성 보도를 내보낸다. 하지만 수사팀은 괴텐과 사랑에 빠져 그의 도주에 협조한 혐의 외에는 이성적이고 사리분별에 철저한 그녀에게 다른 결점을 찾아낼 수 없었고, 블로르나 부부의 가사도우미 역할에 매우 충실했으며, 그녀가 연락이 두절됐다는 어머니에게 매달 병원비를 보내고 있었고, 절도죄로 복역중인 오빠에게도 매달 용돈을 보내고 있는 등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도 밝혀진다.
카타리나에게 추근댔던 ‘신사’는 블로르나의 지인인 알로이스 슈트로입레더였고, 휴가에서 급하게 돌아온 블로르나 부부를 찾아 자신이 반지를 강제로 선물한 사람임을 밝히며, 자신이 반지뿐만 아니라 자신의 별장의 열쇠까지 카타리나에게 준 사실을 밝히며, 괴텐이라는 자가 카타리나의 도움으로 자신의 별장에 숨어든 것 같다며 블로르나에게 별장을 가 볼 것을 부탁하지만 같은 시각 괴텐은 슈트로입레더의 별장에서 체포된다.
<차이퉁>지의 퇴트게스 기자는 블룸부인의 인터뷰를 위해 병원출입을 요청하지만 담당의사가 거절하였고, 페인트공으로 분해 병원에 무단 침입해 결국 블룸 부인을 인터뷰를 하여 진술을 교묘히 바꿔 보도한다. 퇴트게스는 이를 영웅담처럼 떠벌리고 다녔으며, 퇴트게스의 방문으로 충격을 받아 블룸 부인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괴텐이 체포된 후 카타리나와 블로르나 부부, 볼터스하임과 그녀의 남자친구 콘라트는 함께 카페에 모여 블룸 부인의 시신을 확인하러 갔다 오고 블로르나 부부의 집에서 저녁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카타리나는 <존탁스차이퉁>에 퇴트게스가 카타리나의 비밀 드라이브를 ‘숙녀 방문’이라고 칭하며 카타리나를 창녀로 묘사하고, 그녀의 행실로 블룸 부인이 충격을 받아 사망한 피해자이며, 괴텐의 도주를 협조하는 과정에서 슈트로입레더의 도움을 악용하였고, 그녀가 살던 아파트가 투르데 블로르나가 설계한 것임을 근거로 ‘빨갱이’ 투르데의 공작까지 의심하는 기사를 보고난 뒤 총을 챙겨 퇴트게스를 만나러 간다. 퇴트게스가 자주 출몰하는 식당에서 그를 보지 못하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고, 결국 카타리나의 집으로 찾아온 퇴트게스가 그녀를 덮치려는 순간 카타리나는 퇴트게스를 총으로 쏴죽여 버리고 자신을 심문했던 뫼딩 경사를 찾아가 자수한다.
블로르나는 카타리나의 변호를 맡지만 카타리나 아파트 신탁권리권을 넘겨받으며 경제적 상황이 안좋아지고, 투르데는 배임죄로 설계사무실에서 해고당해 소송을 진행중이며, <차이퉁>은 블로르나 부부의 이혼 루머를 보도하고 있었다. 그와중에 블로르나가 후원하는 브레데리크 르 보슈의 전시에서 휴트로입레더 부부를 만난 블로르나 부부는 슈트로입레더의 뻔뻔스러운 입질에 폭력을 휘둘러 버리고, 카타리나는 괴텐과 자신이 석방된 후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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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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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계가 인공지능에게 점령당한다는 식상한 예언이 아니라 인간은 결국 스스로 전멸하고 인공지능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시각이 획기적이었다.

달마와 선이의 대화를 읽으면서 김영하작가의 인간 존재론에 대한 고찰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참고서적이 있었다고 한다.

"정말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네요."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미래를 알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건 ‘미래‘라는 말이 뭘 의미하느냐에 달렸어."
그때 나는 그녀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그녀는 우주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 아니, 시간 자체가 지구에 사는 인간 중심의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으니까.

"인간도 싫어하지만 저들이 가장 미워하는 건 자기가 인간인 줄 아는 기계야. 재수없어 해."

처음엔 그저 그들을 흉내냄으로써 안전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점차 그들과 나 사이에는 과연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들의 관절은 연골과 윤활액 대신 인공적으로 합성한 유기화학 제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뇌에 뉴런 대신 회로가 있다는 것 등의 차이들이 있겠지만, 이미 많은 인간이 뇌에 칩을 박아 컴퓨터와 연결하거나, 잘린 팔다리 대신 인공 수족을 장착하여 높은 곳에 쉽게 뛰어오르거나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인류가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이런 의문들을 품어왔다는 것을 고전 SF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완벽하게 기계의 흉내를 내고, 그러다 언젠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피가 흐르고, 두개골 안에 뇌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인공지능이 우리를 왜 필요로 하겠어? 우리가 인간일 때만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거야. 인간은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으니까. 우리의 비밀이 낱낱이 밝혀지면, 아마 그런 날이 곧 오겠지만, 업로드된 우리의 의식을 기계들이 뭐하러 보존하겠어? 그 의식을 돌리느라 에너지만 잡아먹을 텐데. 어느 날, 한 기계가 다른 기계에게 묻겠지. ‘저장 장치가 꽉 찼습니다. 쓸데없는 파일들을 지우시겠습니까? 그럼 다른 기계가 ‘예’버튼을 누르겠지. 그렇게 그냥 사라지는 거야. 영생은 헛된 희망이야."

인도에 가서 기억을 지우면 선이 너도 잊어버릴 텐데 괜찮아? 나는 묻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선이는 팔을 잃은 민이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었고 수용소에 오기 전에 겪은 민이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주고 싶어했다.
가장 완벽한 치유는 기억의 리셋일 테니, 그것만 가능하다면 자기 따윈 잊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거야.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기계들도 언젠가 종교를 상상해낼 거라 생각한 반면, 선이는 기계가 일단 의식을가진 이상,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고, 그러니까 인간의 의식과 깊은 수준에서 ‘연결’되기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기계에게 의식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지배하는 의식이 태초에 인간에게 깃들었듯이 이제 기계도 인간과 같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활성화된 이 휴머노이드가 과연 여러분에게 고마워할까요?"
"그럼요.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니까요. 죽기 전까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거든요."
"생존 본능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만약 이 휴머노이드에게 애초에 선택권이 있었다면 애완용 휴머노이드로 태어나겠다고 결정했을까요?"
선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었을 거예요. 민이의 짧은 삶은 고통뿐이었어요."
"그런데 다시 활성화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다시 살아난다 해도 이 휴머노이드에게는 별로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저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은 당신의 말입니다. 아마 죄책감은 잠시 줄어들겠지요. 이 휴머노이드가 다시 살아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 휴머노이드도 당신들을 다시 보게 되면 반가워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정말 이 휴머노이드를 위한 거라고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 이 휴머노이드가 앞으로 어떤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르면서요."
나는 그렇게 선이를 다그치는 달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든 살릴 수 있으면 살리는 게 맞잖아요. 안 그래요? 그럼 인간들은 왜 다치면 모두 당연하게 응급실로 가죠? 왜 의사들은 앞으로 남은 인생이 행복할 것 같은 환자들만 살리지 않고 전부 다 살리려고 애쓰죠?"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성이니까요. 그들은 오랜 세월 사람은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윤리를 확립해왔고, 그래서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데도 살려두려고 합니다. 환자의 생각은 무시한 채 말입니다. 생명은 그 어떤 경우에도 소중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그걸 금과옥조처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온 것은 또 아닙니다. 인류가 벌인그 수많은 전쟁을 생각해보십시오. 하지만 그건 인간들의 문제이고 우리는 지금 한 휴머노이드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묻는 것은 이 휴머노이드를 재활성화, 아니 여러분의 표현대로 살리는 것이 정말 이휴머노이드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여러분이 확신하느냐는 것입니다."
선이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달마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의식을 가진 존재, 특히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존재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바다의 물고기든 하늘의 새든,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휴머노이드들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고통도 없었을 테니까요."
"살면서 느끼는 기쁨도 있지 않아요?"
나는 달마에게 물었다.
"태어났다면 느낄 기쁨을 태어나지 않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그게 참으로 손해일까요? 손해라 느낄 존재가 아예 없는데요?"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고통의 근원인 자아가 아예 없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태어나게 되어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은 해악입니다. 태어나지 않는 쪽이 분명히 낫습니다. 기쁨도 느끼니까 그 유익으로 고통의 해악이 상쇄될까요?

기쁨과 고통을 마치 장부상의 흑자와 적자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임계점을 넘어가는 극한의 고통은 나중에 그 어떤 기쁨이 주어지더라도 장부상의 숫자처럼 간단히 상계되지않습니다. 모든 생명체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고통을 피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을 도모하고 번식에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살면서 기쁜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괴로움에 시달리거나 혹시 찾아올지도 모를 잠깐의 기쁜 순간을 한없이 갈망하며 보냅니다. 갈망, 그것도 고통입니다. 그리고 삶의 후반부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보내게 되고, 죽음은 잊지 않고 생명체를 찾아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를 살려서 이제 더는 겪지 않아도 될 이 모든 고통을 다시 겪게 할 것인가요? 그게 정말 윤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일까요?"

"민이는 아예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아니니까요. 민이는 이미 태어났고 말씀하신 것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지요. 저는 민이가 다시 의식을 회복해서,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로 다시 깨어나 그것의의미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지로 생을 살아가다가, 누군가로부터 폭력적으로 살해당하거나 하지 않고, 자연이 정해준 수명을 다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우주의 일부로, 다시 의식과 영성이 없는 존재로 돌아가기를 바라는거예요."
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이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제 말이 곧, 이미 태어난 존재들이 당장 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다른존재를 마음대로 살해할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아예 태어나지 않음은 누구의 괴로움도 아니지만, 폭력은 다른존재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하는 명백한 해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이가 두려움 속에 폭력적으로 삶의의지를 짓밟히고 살해당한 것은 부당한 일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되살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은 달라요. 이 우주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정말 정말 드물어요.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의미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의미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고통의 의미라고 하셨지요?
고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들은 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통이 없이는 아무의미도 없다고 말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선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달마는 그 말을 듣고 손뼉을 쳤다.
"맞는 말씀입니다. 동감입니다.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것, 그게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하려는 것입니다."
달마는 벌떡 일어나 창고 안을 오갔다.
"이 지구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압도적으로 생산해내는 존재는 바로 인간입니다. 물론 사자도 살아 있는 영양의목을 물어뜯고, 배부른 곰도 재미로 연어를 사냥해 눈알만 파먹고 던져버립니다. 그러나 누구도 인간만큼 지속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른 종을, 우리 기계까지도 포함해서, 착취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야생동물을 가축화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수로 번식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이 무수한 존재들은 아무 의미 없는 생을 잠시 살다가 인간을 위해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걸 멈추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덜 괴로운 해법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여기로 실려오는 폐휴머노이드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입니다. 의식을 백업해 클라우드에 올리든지, 아니면 그냥 비활성화되든지. 그러자 많은 휴머노이드가 이제는 잘 작동하지도 않는거추장스러운 몸을 버리고 의식만 업로드해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기계의 세상에서는 자아가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도 의미를 잃습니다."

"저도 아직 생각이 다 정리되지 않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민이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않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야기라……"
달마는 우리 쪽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무의미한 인생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닐까요?"

이야기는 오히려 인간을 더 집단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태어난 인간들은,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야기라는 매우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발명했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이 겪는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은연중에 말합니다. 가장 많은 인간이 믿었던 두 종교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이야기가 인간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주신다고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거기까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취제는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는 인간의 공감 능력을 이용해 인간들을 끼리끼리 결속시킵니다. 같은 이야기를믿는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다른 인간들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굽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어떤 이야기를 믿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이 음모를 꾸민다는 얘기, 조선인이 대지진을 틈타 우물에 독을 탄다는 얘기, 마녀들이 밤마다 끔찍한 저주를 행한다는 얘기. 그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들이 말하는 자아니, 존재니, 의식이니, 이야기니 하는 것들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뭔가를 믿으려는 마음을 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뭔가를 믿으려는 마음.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정신적 장치입니다."
달마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의 믿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잘 알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인간들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비합리적인 어떤 일을 벌이면서 늘 과학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개념들을 갖다붙입니다. 말이 안 될수록 더 잘 믿는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요. 실은 거짓말을 한 거죠. 눈치가 빠른 휴머노이드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믿는 척을 해줘요. 기억이 이미 사라졌는데 사라진 기억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겠어요? 공장 초기화를 한 뒤에는 완전히 새로운 기억을한 세트 넣어줘요. 아주 즐겁고 행복한 것들로만요. 인간들이 참 무정한 게, 자기들은 어둡고 우울하면서 휴머노이드는 밝고 명랑하기를 바라거든요. ‘자의식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확고하면서 생각이 많은 휴머노이드 주세요’ 하는 고객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그게 만약 잘못이라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를 낳을 때 인간의 부모도 모두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내가 늙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아이가 외동이면 외로우니까 하나를 더 낳아주자. 그런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하죠. 심지어 아이를 낳으면 국가가 보조금이나 집을 주니까 낳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것도 다 이기심이죠. 생각해보세요. 이타심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게 가능할까요? 실은 다들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를 위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나는 행운을 누렸다면 마땅히 윤리도 갖춰야 해. 세상의 고통을 줄이려 노력해야지. 하지만 그 여자는세상에 넘쳐나는 고통의 총량을 더 늘리기만 했어. 우리는 모두 그 여자 때문에, 태어난 걸 저주해야만 했어. 그런 의식이라면 소멸하는 게 모두를 위해 좋아. 어쩌면 그 자신에게도. 그 자신으로 태어난 게 가장 큰 잘못인데, 그 여자는 그걸 몰랐어. 다 남의 탓으로 돌렸지."

"그런데 어떤 사건으로 기억을 모두 잃기도 하고, 사상이나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뀌기도 하잖아. 또 약물에 중독되어 전혀 다른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도 그것은 그대로 나일까? 나일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그런 일을 겪어 너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거나, 모습마저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면 너는 나를 철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혹은 좀비라도 되어서 너를 미친듯이 죽이려 든다면? 아빠는 나에게 늘 고전영화, 작품성이 검증된 지난 시대의 영화들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몰래 그가 허락하지 않을 영화들도 보았어. 그중에는 21세기에 넘쳐났던 좀비 영화들도 있었어. 얼마 전까지도 가족이었는데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완전한 타인으로 생각하고, 정확히는 적으로 여기고 죽이더라고. 의식이라는 건 쉽게 변하잖아. 안 그래?"
선이는 내가 제기한 질문을 오래 숙고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거지? 뇌마저도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다거나 하면 더이상 예전의‘나’가 아니니까. 내가 맞게 이해한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이야기도 있고, 너의 이야기도 있어. 우리의 몸이 뭘로, 어떻게 만들어졌든, 우리는 모두 탄생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한 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
"인간은 지독한 종이야.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닥쳐온 시련과 맞서 싸웠을 때만, 그렇게 했는데도 끝내 실패했을 때만 비로소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 나는 인간의 유전자에서 배양되었고, 너나 민이는 인간의 설계대로 제작됐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생에 대한 집착도 함께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생각해.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수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그런데 민이는 아직 아니야."

인간은 모든 것을 도구로만 여기고 그것의 활용을 고민한다. 나의 ‘용도‘는 정확히 무엇일까?

인공지능이 인간적 요소들을 흡수한 반면, 나는 오히려 최 박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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