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네요."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미래를 알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건 ‘미래‘라는 말이 뭘 의미하느냐에 달렸어." 그때 나는 그녀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그녀는 우주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 아니, 시간 자체가 지구에 사는 인간 중심의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으니까.
"인간도 싫어하지만 저들이 가장 미워하는 건 자기가 인간인 줄 아는 기계야. 재수없어 해."
처음엔 그저 그들을 흉내냄으로써 안전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점차 그들과 나 사이에는 과연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들의 관절은 연골과 윤활액 대신 인공적으로 합성한 유기화학 제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뇌에 뉴런 대신 회로가 있다는 것 등의 차이들이 있겠지만, 이미 많은 인간이 뇌에 칩을 박아 컴퓨터와 연결하거나, 잘린 팔다리 대신 인공 수족을 장착하여 높은 곳에 쉽게 뛰어오르거나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인류가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이런 의문들을 품어왔다는 것을 고전 SF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완벽하게 기계의 흉내를 내고, 그러다 언젠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피가 흐르고, 두개골 안에 뇌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인공지능이 우리를 왜 필요로 하겠어? 우리가 인간일 때만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거야. 인간은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으니까. 우리의 비밀이 낱낱이 밝혀지면, 아마 그런 날이 곧 오겠지만, 업로드된 우리의 의식을 기계들이 뭐하러 보존하겠어? 그 의식을 돌리느라 에너지만 잡아먹을 텐데. 어느 날, 한 기계가 다른 기계에게 묻겠지. ‘저장 장치가 꽉 찼습니다. 쓸데없는 파일들을 지우시겠습니까? 그럼 다른 기계가 ‘예’버튼을 누르겠지. 그렇게 그냥 사라지는 거야. 영생은 헛된 희망이야."
인도에 가서 기억을 지우면 선이 너도 잊어버릴 텐데 괜찮아? 나는 묻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선이는 팔을 잃은 민이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었고 수용소에 오기 전에 겪은 민이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주고 싶어했다. 가장 완벽한 치유는 기억의 리셋일 테니, 그것만 가능하다면 자기 따윈 잊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거야.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기계들도 언젠가 종교를 상상해낼 거라 생각한 반면, 선이는 기계가 일단 의식을가진 이상,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고, 그러니까 인간의 의식과 깊은 수준에서 ‘연결’되기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기계에게 의식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지배하는 의식이 태초에 인간에게 깃들었듯이 이제 기계도 인간과 같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활성화된 이 휴머노이드가 과연 여러분에게 고마워할까요?" "그럼요.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니까요. 죽기 전까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거든요." "생존 본능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만약 이 휴머노이드에게 애초에 선택권이 있었다면 애완용 휴머노이드로 태어나겠다고 결정했을까요?" 선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었을 거예요. 민이의 짧은 삶은 고통뿐이었어요." "그런데 다시 활성화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다시 살아난다 해도 이 휴머노이드에게는 별로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저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은 당신의 말입니다. 아마 죄책감은 잠시 줄어들겠지요. 이 휴머노이드가 다시 살아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 휴머노이드도 당신들을 다시 보게 되면 반가워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정말 이 휴머노이드를 위한 거라고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 이 휴머노이드가 앞으로 어떤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르면서요." 나는 그렇게 선이를 다그치는 달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든 살릴 수 있으면 살리는 게 맞잖아요. 안 그래요? 그럼 인간들은 왜 다치면 모두 당연하게 응급실로 가죠? 왜 의사들은 앞으로 남은 인생이 행복할 것 같은 환자들만 살리지 않고 전부 다 살리려고 애쓰죠?"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성이니까요. 그들은 오랜 세월 사람은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윤리를 확립해왔고, 그래서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데도 살려두려고 합니다. 환자의 생각은 무시한 채 말입니다. 생명은 그 어떤 경우에도 소중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그걸 금과옥조처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온 것은 또 아닙니다. 인류가 벌인그 수많은 전쟁을 생각해보십시오. 하지만 그건 인간들의 문제이고 우리는 지금 한 휴머노이드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묻는 것은 이 휴머노이드를 재활성화, 아니 여러분의 표현대로 살리는 것이 정말 이휴머노이드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여러분이 확신하느냐는 것입니다." 선이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달마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의식을 가진 존재, 특히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존재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바다의 물고기든 하늘의 새든,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휴머노이드들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고통도 없었을 테니까요." "살면서 느끼는 기쁨도 있지 않아요?" 나는 달마에게 물었다. "태어났다면 느낄 기쁨을 태어나지 않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그게 참으로 손해일까요? 손해라 느낄 존재가 아예 없는데요?"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고통의 근원인 자아가 아예 없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태어나게 되어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은 해악입니다. 태어나지 않는 쪽이 분명히 낫습니다. 기쁨도 느끼니까 그 유익으로 고통의 해악이 상쇄될까요?
기쁨과 고통을 마치 장부상의 흑자와 적자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임계점을 넘어가는 극한의 고통은 나중에 그 어떤 기쁨이 주어지더라도 장부상의 숫자처럼 간단히 상계되지않습니다. 모든 생명체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고통을 피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을 도모하고 번식에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살면서 기쁜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괴로움에 시달리거나 혹시 찾아올지도 모를 잠깐의 기쁜 순간을 한없이 갈망하며 보냅니다. 갈망, 그것도 고통입니다. 그리고 삶의 후반부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보내게 되고, 죽음은 잊지 않고 생명체를 찾아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를 살려서 이제 더는 겪지 않아도 될 이 모든 고통을 다시 겪게 할 것인가요? 그게 정말 윤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일까요?"
"민이는 아예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아니니까요. 민이는 이미 태어났고 말씀하신 것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지요. 저는 민이가 다시 의식을 회복해서,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로 다시 깨어나 그것의의미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지로 생을 살아가다가, 누군가로부터 폭력적으로 살해당하거나 하지 않고, 자연이 정해준 수명을 다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우주의 일부로, 다시 의식과 영성이 없는 존재로 돌아가기를 바라는거예요." 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이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제 말이 곧, 이미 태어난 존재들이 당장 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다른존재를 마음대로 살해할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아예 태어나지 않음은 누구의 괴로움도 아니지만, 폭력은 다른존재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하는 명백한 해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이가 두려움 속에 폭력적으로 삶의의지를 짓밟히고 살해당한 것은 부당한 일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되살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은 달라요. 이 우주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정말 정말 드물어요.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의미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의미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고통의 의미라고 하셨지요? 고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들은 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통이 없이는 아무의미도 없다고 말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선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달마는 그 말을 듣고 손뼉을 쳤다. "맞는 말씀입니다. 동감입니다.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것, 그게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하려는 것입니다." 달마는 벌떡 일어나 창고 안을 오갔다. "이 지구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압도적으로 생산해내는 존재는 바로 인간입니다. 물론 사자도 살아 있는 영양의목을 물어뜯고, 배부른 곰도 재미로 연어를 사냥해 눈알만 파먹고 던져버립니다. 그러나 누구도 인간만큼 지속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른 종을, 우리 기계까지도 포함해서, 착취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야생동물을 가축화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수로 번식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이 무수한 존재들은 아무 의미 없는 생을 잠시 살다가 인간을 위해 죽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걸 멈추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덜 괴로운 해법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여기로 실려오는 폐휴머노이드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입니다. 의식을 백업해 클라우드에 올리든지, 아니면 그냥 비활성화되든지. 그러자 많은 휴머노이드가 이제는 잘 작동하지도 않는거추장스러운 몸을 버리고 의식만 업로드해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기계의 세상에서는 자아가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도 의미를 잃습니다."
"저도 아직 생각이 다 정리되지 않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민이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않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야기라……" 달마는 우리 쪽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의 무의미한 인생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 아닐까요?"
이야기는 오히려 인간을 더 집단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태어난 인간들은,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야기라는 매우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발명했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이 겪는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은연중에 말합니다. 가장 많은 인간이 믿었던 두 종교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최초의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이야기가 인간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주신다고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거기까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취제는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는 인간의 공감 능력을 이용해 인간들을 끼리끼리 결속시킵니다. 같은 이야기를믿는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다른 인간들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굽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어떤 이야기를 믿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이 음모를 꾸민다는 얘기, 조선인이 대지진을 틈타 우물에 독을 탄다는 얘기, 마녀들이 밤마다 끔찍한 저주를 행한다는 얘기. 그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들이 말하는 자아니, 존재니, 의식이니, 이야기니 하는 것들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뭔가를 믿으려는 마음을 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뭔가를 믿으려는 마음.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정신적 장치입니다." 달마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의 믿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잘 알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인간들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비합리적인 어떤 일을 벌이면서 늘 과학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개념들을 갖다붙입니다. 말이 안 될수록 더 잘 믿는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요. 실은 거짓말을 한 거죠. 눈치가 빠른 휴머노이드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믿는 척을 해줘요. 기억이 이미 사라졌는데 사라진 기억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겠어요? 공장 초기화를 한 뒤에는 완전히 새로운 기억을한 세트 넣어줘요. 아주 즐겁고 행복한 것들로만요. 인간들이 참 무정한 게, 자기들은 어둡고 우울하면서 휴머노이드는 밝고 명랑하기를 바라거든요. ‘자의식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확고하면서 생각이 많은 휴머노이드 주세요’ 하는 고객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그게 만약 잘못이라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를 낳을 때 인간의 부모도 모두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내가 늙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아이가 외동이면 외로우니까 하나를 더 낳아주자. 그런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하죠. 심지어 아이를 낳으면 국가가 보조금이나 집을 주니까 낳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것도 다 이기심이죠. 생각해보세요. 이타심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게 가능할까요? 실은 다들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를 위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나는 행운을 누렸다면 마땅히 윤리도 갖춰야 해. 세상의 고통을 줄이려 노력해야지. 하지만 그 여자는세상에 넘쳐나는 고통의 총량을 더 늘리기만 했어. 우리는 모두 그 여자 때문에, 태어난 걸 저주해야만 했어. 그런 의식이라면 소멸하는 게 모두를 위해 좋아. 어쩌면 그 자신에게도. 그 자신으로 태어난 게 가장 큰 잘못인데, 그 여자는 그걸 몰랐어. 다 남의 탓으로 돌렸지."
"그런데 어떤 사건으로 기억을 모두 잃기도 하고, 사상이나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뀌기도 하잖아. 또 약물에 중독되어 전혀 다른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도 그것은 그대로 나일까? 나일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그런 일을 겪어 너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거나, 모습마저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면 너는 나를 철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혹은 좀비라도 되어서 너를 미친듯이 죽이려 든다면? 아빠는 나에게 늘 고전영화, 작품성이 검증된 지난 시대의 영화들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몰래 그가 허락하지 않을 영화들도 보았어. 그중에는 21세기에 넘쳐났던 좀비 영화들도 있었어. 얼마 전까지도 가족이었는데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완전한 타인으로 생각하고, 정확히는 적으로 여기고 죽이더라고. 의식이라는 건 쉽게 변하잖아. 안 그래?" 선이는 내가 제기한 질문을 오래 숙고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나‘라고 하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거지? 뇌마저도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다거나 하면 더이상 예전의‘나’가 아니니까. 내가 맞게 이해한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이야기도 있고, 너의 이야기도 있어. 우리의 몸이 뭘로, 어떻게 만들어졌든, 우리는 모두 탄생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한 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 "인간은 지독한 종이야.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닥쳐온 시련과 맞서 싸웠을 때만, 그렇게 했는데도 끝내 실패했을 때만 비로소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 나는 인간의 유전자에서 배양되었고, 너나 민이는 인간의 설계대로 제작됐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생에 대한 집착도 함께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생각해.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수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그런데 민이는 아직 아니야."
인간은 모든 것을 도구로만 여기고 그것의 활용을 고민한다. 나의 ‘용도‘는 정확히 무엇일까?
인공지능이 인간적 요소들을 흡수한 반면, 나는 오히려 최 박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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