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 3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8년 전 기억상실을 겪은 주인공 기 롤랑은 위트가 운영하는 흥신소가 폐업하여 일을 그만두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자신의 기억을 찾으려는 여정을 떠난다.
처음 만난 폴 소나쉬체와 장 외르퇴르에게서 자신에 대해 기억나는 것들을 얘기해줄 것을 요청하여 자신의 친구라는 스티오파 드 자고리에프를 알게되었고, 스티오파를 찾아간 기는 러시아 망명 귀족들 사진을 받아오면서 사진 속 젊었을 때 자신이라고 확신이 드는 인물을 발견한다. 하지만 추적 끝에 사진 속 인물은 프레디 하워드 드뤼즈라는 자신의 친구이며, 하워드의 고향인 발 브뢰즈를 찾아가 하워드가문의 정원사인 로베르를 만나 자신이 남미 출신의 페드로 맥케부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쟁상황 중 자신의 연인이었던 드니즈 이베트 쿠드뢰즈라는 여인과 친구 페드로, 페드로의 연인 게이, 경마 기수인 앙드레 빌드메르와 함께 반 알렌의 산장으로 피난을 갔던 것을 알게 된다. 산장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중 같이 파티를 즐기던 보브 베송과 올레그 드 브레데가 므제브로 도피할 수 있는 길을 주선해준다고 하여 드니즈와 함께 따라 나섰다 그들에게 배신을 당해 길을 잃게 되었고, 그 이후로 자신이 기억상실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 기 롤랑, 페드로는 충격과 상실감에 빠지면서 자신의 친구 프레디가 살고있는 지역을 알아내 자신의 남은 기억을 찾아 떠난다.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는 귀소본능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치부하기엔 그것이 인간의 감정에 패인 깊이는 너무 심오하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신의 현재이지만, 현재의 자신을 입증해주는 기반은 과거의 시간과 경험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잃어버린 페드로(기 롤랑)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이다. 무너져있는 나 자신이라는 퍼즐을 완성해야만 나라는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궤도에 진입할 수 있기에 상실된 기억을 찾는 절박한 심정이 절제된 문장 속에서도 처절하게 느껴졌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기 주변과의 관계를 잃는 것과 같다. 추억이 변질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아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도 모르는 상실은 다른 종류의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나의 추억과 기억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기억을 상실한다는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영진닷컴에 제출했던 과제입니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어 보이곤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들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 - P74

나는 프레디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우리들의 사진들을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어린 시절의 게이 오를로프의 사진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 여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계의 다른 끝, 오랜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 P2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일상을 지켜내야만 했으므로 나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아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이 생길 때에만 비로소 그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오랫동안 읽지 않았던 책들을 꺼내쌓아놓고 그 속의 단어들을 국어사전에서 찾아 단어장을 만들기도 했다. 가끔은 단어를 정의하는 데에 사용된 단어들의 뜻조차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사전을 몇번이나 다시 찾아야 했다. 그 작업은 길고 더뎠다. 며칠씩 밤을 새우기도 했다. 때로는 대본 속의 대사들을 일상 속에 부려놓기도 했다.
허구의 인물처럼 나는 주어진 문장들 속에 내 진심을 숨겼다. 그렇게말들을 고르고 고르면서 나는 타인의 말을 빌릴 때에만 내가 안전할수 있음을 깨달았다. - P21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잃어버렸다고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가, 나는 자문한다. 설혹 정확한 표현이어도 내가 생각하는 ‘잃어버렸다‘와 글을 읽은 사람의 ‘잃어버렸다‘는 같은 뜻일 수 있을까, 무서워진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한 글자도 쓸 수 없겠다는 공포가 밀려온다. - P29

"나는 결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한국말을 배우려고 결심한 것도 아버지와 communicate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내가 벗어던지려 해도 절대, 절대 벗을 수 없는 내 피부색의 역사를 말이에요." - P80

폴, 왜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해준 거야? 술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내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폴의 답이 그 순간 떠올랐다. 왠지 선생님만은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줄 것 같았어요. 도대체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수많은 취객들 사이에 마주앉아, 폴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금, 삶이란 신파와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내게 실연을 안겨준 그가 더이상 원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실연당한 여자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가 해준 이야기가내 초라한 사랑에 대한 그만의 응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 P85

바그너의 반유태주의가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가 『음악신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 때문이었다. 그 글에서 그는 유태인들에게는 진정한 예술을 창조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바그너가 주로 공격하는 유태인은 마이어베어와 멘델스존이었는데 그 점이 그녀에게는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바그너보다 먼저 성공한 유태인 음악가들이었고, 바그너는 그들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열등감에 시달렸다. 게다가 바그너는 젊은 시절 여러 실패를 겪으며 편집증을 앓기도 했다. 만약 정말 바그너가 파쇼의 아버지고 그의 반유태주의가 나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면, 수많은 죽음이,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한인간의 병든 마음을 토양 삼아 자라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너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도대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가슴이먹먹했다. 그는 학원에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학생들에게 말하고는했다. 양비론은 절대 안 돼. 한쪽의 입장을 택하면 다른 한쪽은 잘못됐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줘야 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는 건 논술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야. 알았지? 그는 때때로 그가 믿는 정의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눈 속에서 빛나던 차가운불꽃. 그렇지만 옳고 그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 P107

있잖아, 당신도 들었지? 물고기들은 기억력이 삼 초밖에 안 된다잖아. 아닌가? 금붕어만 그런 거던가? 갑자기 헷갈리네. 어쨌든 기억력이 단 삼 초뿐인 생명체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불현듯 궁금해져. 삼초 후면 소멸될 것이 자명한 불안과 두려움이라면 삶은 훨씬 수월해질까. 아니, 어쩌면 지금의 행복과 짜릿함이 삼 초 후면 또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불안에 삶은 고통의 연속이 되어버릴지도. 분명한 것은 기억이 오직 삼 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 생명에게 역사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거야. 그렇지? 결국에는 사랑도, 슬픔도, 아니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확신마저도. 그것들은 모두 기억에 의해 지속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 P121

나는 그날 밤, 아버지 옷 어딘가에, 혹은 머리카락 사이에 섞여온 이국의 모래알로 만들어진 아이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은 분명 내 존재를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핑계였다. 엄마는 이 세계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서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려 했던 가장 건전한 소통방식이었는지도. - P196

첫사랑이니 어쩌니 운운하며 선배 때문에 마신 소주가 한강을 이룰 지경이었지만 나는 정작선배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어느 날, 소주를 먹다가 나는 깨달았다. 그 무렵의 나는 선배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쩌면 나는 전 세대가 갖고 있는 어떤 이미지를 막연히 동경했던 것에 불과했는지도. 그러나 그 무렵의 나는 선배를 향한 사랑의 고통에 도취되어 있었다. 시대의 고통에 둔감했던 우리 세대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최대치라 착각하면서. - P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은 감당하기 어렵고 내일은 다가올까 두렵고
전강산 지음 / 강한별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뭐든지 해봐야 후회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엔 안해봐서 안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보니 후회건 안도건 큰 차이는 없다.

누군가의 경험과 생각을 읽음으로써 비슷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지금 우리 시대 모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위안, 공감, 그로 인한 연대.
다르지 않은 것이나 다른 것이나 똑같이 위안이 되고 공감도 된다는 것을.

남의 고통과 불행으로 위안 받는 건, 결코 무례함이나 비겁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또 다른 동료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내 이야기가 쓰인 이 책이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동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 P6

그즈음 나는 중간 정도의 재능을 가진 나를 매일같이 저주했다. 남들보다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많았으나 그냥 그 정도였다. 특출 나지도 않고 직업으로 삼기에는 더더욱 보잘것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따금씩 누군가의 칭찬을 받을 뿐, 그마저도 입에 발린 말이란 것쯤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많았고 내가 가진 능력은 나조차도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지만, 그러기엔 현실이 너무 무거웠다. - P17

전처럼 인정받으려고 가면을 쓴다거나, 경험담을 전시하지않았다. 이런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그러자 그는, 그러시냐고 자기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했고 앞으로 또 이런 일을 하고싶다고 말했다. 구구절절 자기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남의 꿈을 함부로 호출하는 무례함에 짜증도 났다. 자기 자랑만 할 거면 내 꿈은 왜 묻는 거야, 도대체, 그러다가 과거에는 나도 그랬겠구나 싶었다. 저 사람과 다를 바 없었겠구나.
가면을 쓴다고 해서 인정받는 건 아니었겠구나. - P37

그냥 이런 것들을 위안 삼기로 했다. 작은 것들에 위로받는삶을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건 큰 기회나 행운이 아니라, 일상 속의 작은 것들에서 느끼는 안정감일 수도 있으니까. - P119

결국 난 무작정 퇴사를 했다. 날 못마땅해하던 상사와 불화를 겪은 후에 경영진과 상담을 통해 퇴사를 한 거다. 하지만그 소식을 알리기 무서웠다.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난퇴사 소식을 유일하게 당시의 연인에게 알렸지만, 그 사람은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도 그 사람 몫의 슬픔이 있었다. 그는 나의 감정을 안아 줄 수 있는 상태가아니었다. 자신의 슬픔에 취해 날 돌볼 여유 따윈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연인에게 나의 슬픔을 같이 안아 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 사람의 슬픔을 더 안아주려고 했다. - P1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로하
윤고은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작에 이 작가의 상상력이 독보적이고 윤리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있을 법한 세상이 소설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 현시대의 비극이 슬플 따름이다.

우리 가족이 찢어진 일차적인 이유는 빚이었다. 그러나 언니의오피스텔과 내 원룸, 아빠의 트럭과 엄마의 생활비를 나눌 정도였다면 네 식구가 함께 사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평생을 싸우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가족도 있다는데, 우리 가족은 적당히 가난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차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분리되었다. 아빠와 엄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에게 냉담했고, 이혼을 미루고만 있었다. 두사람은 이십팔년간 한집을 공유했다. 집에는 수많은 잠재적 무기들이 있었다. 과용하면 독이 되는 상비약을 꾸준히 건네는 것만으로도 범죄는 가능했다. 한때는 철제 의자가 찌그러진 적도 있었다. 밤마다문짝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질풍노도의 시기마저 지나고 고요해진 지 오래였다. 평화가 아니라 침묵이었다. 내공이 쌓인 두사람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공유하면서도 대화하지 않는, 농담하면서도 웃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사에 조금 앞서서두사람은 공식적인 부부관계를 청산했다. 나는 그저 덤덤했다.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성이 고민입니다 - 혼자이고 싶지만 외로운 과학자의
장대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낯부끄러운 인간본성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진화심리학을 좋아한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인정욕구, 관종, 연예인병, 질투, 시기 등등이 진화심리학적 이론을 근거로 친절하게 해명이 되니 감동적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숫자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최대치입니다. 우리는 이한계치인 150을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고 부릅니다. - P34

배제되는 느낌이나 무리에서 소외되는 느낌도 일종의 고통입니다. 물리적 고통은 아니지만, 때로는 물리적 고통보다 더 큰 괴로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배제감이나 소외감을 ‘사회적 고통‘ 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뇌는 몸에서 피가 날 때와 투명인간이 된 느낌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뇌는 물리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을 비슷하게 처리하게 되었을까요? 물론 모든 동물이 사회적 고통을느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분리나 배제 경험이 생존에 치명적인 사회적 동물에게만 필요한 감정이니까요. 아마도 사회적 동물은 원래 있었던 물리적 고통 시스템을 사회적 입력에 대해서도 작동시켰을 것입니다. - P57

우리는 평판에 둔감한 사람의 후예가 아닙니다. 평판에 둔감한 사람은 집단에서 생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낙인찍히거나 따돌림을 당했을 것이기에 그와 협력하고자 그에게접근했던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종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협력할 수 없다.
면 말 그대로 끝입니다. 평판에 신경 쓰는 것은 이처럼 진화적으로 적응된 형질입니다. - P79

예컨대 중국의 양쯔강을 경계로 약 1,000년간 쌀농사를 지어온 남쪽 지역과 밀농사를 지어온 북쪽 지역의 경우, 쌀농사 지역 사람들은 더 집단주의적인 반면, 밀농사 지역 사람들은 더 개인주의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쌀농사가 성공하려면 함께 관개시설도 만들고, 잡초도뽑고 모도 심어야 하기에 많은 일손이 필요합니다. 반면에밀은 약간 춥고 건조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만 있으면 쌀농사에 비해 손이 덜 갑니다.
쌀농사의 핵심이 농부들의 상호 협력이라면 밀농사의 핵심은 기후와 토양이죠. 이런 논리라면, 밥심으로 살아온 우리는 빵이 주식인 이들(대표적으로 서양인)에 비해 관계를 더 중시하고 평판에 더 신경쓸 수밖에 없었던 사람인 셈입니다.
연유가 어찌 되었든, 우리 사회가 서양에 비해 타인의 시선에 더 민감한 사회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 P87

예전에 발매한 앨범의 인트로 부분에는 "아홉이나 열 살쯤 내 심장은 멈췄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돌아보면, 그 시절 저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시선을 통해 나 자신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밤하늘과 별을 올려다보는 것을 멈췄고 꿈꾸기를 중단했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나 자신을 밀어 넣으려고만 했습니다. 이내 제 자신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저 또한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제 심장은 멈췄고 제 눈은 감겼습니다. 이처럼 저와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유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안식처가 있었는데 그것은 음악이었죠. 제 안의 작은 목소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일어나, 네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봐." - P93

우리는 방문한 곳의 교수와 연구자 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한민국과 비교해보면 기본적으로 경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곳 국민들은 경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그들의 대답이 다소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기에도 경쟁은 있습니다. 우리 아이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어요. 하지만 경쟁 상대가 일차적으로 남은 아닙니다.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는 거니까요!" - P113

핀란드에서는 학생 스스로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훈련을 어릴 때부터 합니다.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우쭐하거나 우울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에요. 학교에서는필요 이상으로 경쟁하는 것은 탐욕이라고 가르치죠. 스스로선택한 것을 성취하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자 성숙임을 강조하는 게 바로 그들의 교육철학이었습니다. - P114

경쟁 트랙에 빨리 올라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서보았듯이, 경쟁에 대한 인식입니다. 남과 비교하고 서열을 정하기 위한 경쟁을 경험하고 가르치는 사회일수록 행복은 모두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패자는 사회적 낙오자가 돼 승자를 원망하며, 결국 남의 자원을 빼앗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자기 자신과경쟁하는 성숙한 사회에서 패자는 성찰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승자는 타인을 이겨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기에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경쟁은 어느 사회에나 있습니다. 어떤 생명체든 경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경쟁은 생명의 징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경쟁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종입니다. 나쁜 경쟁과 좋은 경쟁, 미숙한 경쟁과 성숙한 경쟁 등을 구분할 수 있기도 합니다.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통해 만족감을 얻는 것, 즉 과거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졌기에만족하는 것은 성숙한 경쟁입니다. 승자와 패자를 모두 행복하게 만드는 경쟁입니다. - P116

동물은 자기 자신이 극심한 경쟁적 상황에 놓여있다고 감지하면 번식 전략이 아닌 성장 전략을 취합니다. 경쟁이 극심하면 자식을 낳아봤자 생존도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대신 번식을 미루고 자신의 성장에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자신의 경쟁력을 먼저 높인 후에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의 생존확률을 더 높이는 쪽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느동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사회가 경쟁적이라고 인식하면 자식을 낳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 전략이 개인을 위해 좋은 선택입니다. - P119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경쟁적 상황에대한 감지는 매우 상대적입니다. 거주자의 평균 연봉이 2억인동네에서 연봉 1억을 받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은 경쟁해야 할 때라고 지각하는거죠. 타인과 비교하면서 경쟁해온 이들은 현재가 과거보다나아졌다고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옆 사람과의 비교 우위에 있어야만 행복합니다. - P120

이를 ‘에코 챔버echo chamber효과‘라 부르기도 합니다. 에코 챔버는 원래 방송에서 연출에 필요한 에코 효과를 만들어내는 방을 뜻하는데요, 에코챔버 효과란 자신이 뱉은 목소리가 반사되어 중첩되고 증폭되는 효과를 의미합니다. 이 의미가 확대되어 요즘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비슷한 성향의 사람끼리만 정보와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결국 한목소리만 남는 현상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에코 챔버 효과를 증폭시키는 ‘필터 버블 filter bubble‘이라는 현상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보 제공자가 이용자에게 맞춤형 정보만을 필터링해줌으로써 원래 있었던 편향을 더욱 증폭시키는 현상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과학책을 좋아하는 제는 페이스북에 뜬 과학 신간 페이지라면 늘 클릭해서 훑어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페이스북에서 제가 보는 책 광고는 모조리 과학 신간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소설에도 관심이많은데 말입니다. - P142

물론 이것이 페이스북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팟캐스트를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개인 미디어나 트위터 같은 다른 소셜미디어도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편향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오래된 심리입니다. ‘동조 심리가그것입니다.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려는 본능은 줏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생존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집단생활을 하다 보면 집단의 다른 구성원에게 왕따를 당하는 것보다 자신의 신념을 숨기고 비굴하더라도 타인에게 동조하여 받아들여지는 것이 더 유리할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지식과 견해가 짧을 때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좋은 전략이기도 합니다. 또한 대세를 따르는 행위는 크게 나쁘지않은 결과를 낳습니다.
따라서 동조 심리 자체는 인류의 진화사에서 오랫동안 진화하여 장착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작금의 소셜미디어가 그 동조 심리를 활용하고 증폭시키며 심지어 갈취하기까지 한다는 것이 문제지요. - P1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 3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