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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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인터넷 서점들에 올려져 있는 광고나 서평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책의 주제는‘우익 청년의 탄생기’라는 단어였습니다. 테제가 다소 의아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우익이 아닌 사대주의자와 정상배들이 우익의 탈을 뒤집어쓰고 설치고 있는 현실에서 ‘제대로 된 우익’의 모습이라면 민주 투사보다도 오히려 더 ‘가짜 우익들’의 위선과 모순을 폭로하기에 효과적일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상상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난 후의 결론은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우익 청년의 탄생기라기 보다는 우리나라 우익들의 저열함과 무능력을 비꼬는 정치 우화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금’과 ‘은’이라는 두 대학생의 1년 남짓한 대학 시절을 그리고 있습니다.

광주 출신으로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관을 발탁되면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된 ‘금’의 이야기는 (내용상으로는 가장 많지만) 연상의 여성과의 관계에 탐닉하는 정도 외에는 별다른 사상적 편력이나 방황없이 지내다가, 아버지가 자살을 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낙향한다는 비교적 단선적인 스토리로 그려집니다. 문학보다 사회 과학이나 실용적인 학문의 가치를 훨씬 더 높게 여겼던 금이 낙향 후 문학에 뜻을 두게 된다는 점 정도가 두드러진 변화라고 할까요.

잘생긴 얼굴에 키도 크고 체격도 건장한 법대생인 금보다도 작가의 관심은 왜소한 체구의 시인 지망생이었던 국어교육학과생 은 쪽에 더 집중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사회적 성공을 거둔 아버지를 둔 금과는 정반대로 거듭된 파산 끝에 고향을 떠나 서울의 큰집을 봐주러 올라온 부모 밑의 은은 상대적으로 패배의식과 나약함에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살로 현실에 회의를 느낀 금이 멸시하던 문학의 길을 걷게 된 것과 대비되듯 은은 뜻밖에도 우익 운동의 길을 선택해 걷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의 경제적 패배와 시인을 꿈꾸던 자신의 나약한 정서, 그리고 동성애자라는 성적 정체성 등의 복합적인 열등 의식에 대한 반발과 그 돌파구로 선택한 우익의 길은 ‘박정희가 빨갱이라는 거짓(?)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김정일에게 퍼주기를 한 댓가라는 다른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자신의 사회적 무관심에 대한 열등감’이라는 은이 우익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물론 이후에 길게 펼쳐질 과정들 역시 ‘건강한 진짜 우익’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은에게 우익의 길을 권한 은의 작은 아버지의 말을 통해 ‘세상에는 진리란 없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강자의 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엘리트들은 그 사실은 꽁꽁 감추고 도덕과 종교라는 채찍으로 대중을 조종해야 한다’라는 우익들의 가증스러운 속내를 드러내고, (누가보아도 김동길이 분명한) 거북선생이라는 우익의 원로의 입을 통해서는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총량 중에서 우파가 쓸 수 있는 것은 5%도 안된다. 이렇게 좌파와 대적하는 우파의 논리가 허약하므로, 우파는 김대중이나 노무현에게 그냥 빨갱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이다. 논리 따지기 좋아하는 놈들에게는 다짜고짜 빨갱이라는 인장부터 찍어서 그들과의 대화를 무조건 거절하고 보는 것이 유일한 전략인 것이다’라고 ‘빨갱이로 몰기’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물론 은은 거북선생같은 친일의 원죄가 따라다니는 Old Right나 좌파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으로 가득찬 작은 아버지 세대인 New Right가 아닌 ‘강한 것은 아름답다’라는 근원적인 사상을 기치로 한 Pure Right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거북선생이나 변지갑(변듣보?)와 마음에도 없는 동성애 관계를 가지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스스로의 논리와 지향점과는 정반대의 모습만을 마지막까지 보여줄 뿐입니다.

금과 은의 관계는 결국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를 맺고, 사상은 정반대이지만 정신적인 유대만은 굳건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에서 끝맺는데, 작가는 후기에서 이 두 사람의 다시 한 번 정반대로 역전되는 이후의 삶을 그린 속편의 구상을 거의 완성시켜 놓았다고 하여 금과 은의 성장한 모습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을 품게 만듭니다.

작가는 후기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네오콘인 앨런 블룸과 그의 스승인 레오 스트라우스를 모델로 거북선생을 비롯한 책 속의 우파들을 묘사했고, 우리 문학사에서 아직 그려진 적이 없는 진정한 의미의 우익 청년의 탄생기를 그려보고자 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지는 은의 모습은 자신의 성적 소수성과 정신적, 경제적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정반대인 우익 성향으로 전화시켜 발산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으로만 비춰지는데(마치 동성애를 비난하던 앨런 블룸이 AIDS로 죽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작가의 아직 미완인 과정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우파의 이중성과 비정상성에 대한 야유가 이 작품의 본질인지는 읽는 이에 따라 다소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저는 후자의 관점으로 읽혔습니다).

이 작품 속에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실명과 실제 사건으로 계속해서 나오지만, 근본적으로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슬픈 정치 우화’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소감입니다.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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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1 - 워런 버핏과 인생 경영 스노볼 1
앨리스 슈뢰더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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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가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을 통해 중세의 청교도주의나 배금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혜안으로 근대적 자본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이래, 기업가는 이전 시대의 정복자나 개척자와 비견될 만한 역사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무력에 의한 영토의 확장이나 미지의 새로운 영토의 발견과 식민화라는 중세적인 수단이 불가능해진 근대 이후 가장 치열한 권력과 헤게모니의 다툼은 경제라는 비지리적인 지평에서 벌어졌고, 기업가는 자본과 재화 그리고 혁신이라는 무기로 시장이라는 전쟁터에서 무자비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전지구적인 전장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의 기업가와 자본가는 중세의 제후나 귀족, 기사의 위치에 놓일 것이고, 카네기나 록펠러와 같은 전설적인 부자들은 알렉산드로스나 나폴레옹, 혹은 메로빙거 왕조나 부르봉 왕가와 비견될 만한 존재감을 가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던져지는 ‘현대 최고의 부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답변이 지니는 의미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 확장을 한 정복왕은 누구인가’와 비슷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사상인 자본주의의 패자(覇者)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부자를 묻는 질문에 매년 세계 최대의 부자 400명을 선정하여 발표하는 [ 포브스 ] 2008년 판은 ‘워런 버핏’이라는 답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한 두 차례를 제외하고는 빌 게이츠와 매년 세계 1위 부자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벌였던 워런 버핏인 만큼 1위 발표에 대한 위화감이나 의구심은 없지만, 그의 1위 소식은 빌 게이츠의 1위 소식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빌 게이츠는 현대 IT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시피 한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세계 최대의 매출을 독점적으로 향유해 온 초거대 기업의 창업자이자 회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워런 버핏은 그와는 달리 세계적인 기업의 총수나 소유자도 아니고 중동의 부호들처럼 천문학적인 천연 자원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며, 심지어 그가 소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회사인 버크셔 헤서웨이가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조차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타이틀을 십 여년 째 보유하고 있는 만큼 서점에 가보면 그의 이름을 내세운 경제학이나 재테크 서적은 물론 위인전까지 수 십권의 책들이 쌓여있고, 이중 상당 수가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라있지만, 자신이 직접 쓴 저서만도 여러 권인 빌 게이츠나 잭 웰치와는 달리 버핏은 단 한 권의 책도 직접 저술한 바가 없고, 심지어 그의 공인을 받은 자서전이나 투자지침서조차 없을 정도로 그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책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에 대한 책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워런 버핏을 가까운 곳에서 관찰한 측근에 의한 책은 아들인 피터 버핏의 이혼한 아내, 즉 전 며느리인 메리 룰로 버핏이 쓴 책 정도인데, 이 책은 버핏이 인정하기는 커녕 불같이 화를 내었다는 뒷이야기가 있고, 실제로 워런은 메리 버핏이 피터와 이혼한 이후 데려와 피터의 양녀로 입적시킨 두 딸을 자신의 손녀로 인정조차 않을 정도로 며느리 메리를 싫어했던 만큼 책의 신뢰성은 그다지 높다고 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런만큼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거나 회사를 세워 수익을 창출해 내지 않고, 대공황 이후 자신의 돈 100달러와 가족과 친구로부터 투자받은 10만 5천 달러로 본격적으로 주식 투자를 시작한 이래 60여년 동안 무려 60억 달러 이상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익과 그 수 십배인 2천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오직 주식 시장에서만 벌어들이고 확장시킴으로써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으며, 석유 파동과 전쟁, 테러, 금융 공황 등 세계적인 규모의 돌발 사태가 빈번했고 제조업의 몰락과 IT 혁명 등 변화의 속도가 눈부셨던 20세기 말~21세기 초라는 격변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적이라고까지 여겨질 만큼 믿기 어려운 성공을 꾸준히 이어간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궁금증은 대단히 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가 거둔 엄청난 경제적 성공에 대해서도 경제학자와 주식 전문가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버핏의 투자 방식을 꼼꼼하게 분석하였지만, 컴퓨터를 이용한 수학적, 통계학적 분석을 앞세우거나 복잡한 파생 금융 상품을 생성시켜 내는 월 스트리트의 기술적인 투자 경향이나 투자전문가들의 통례적인 지침과는 전혀 다른 ‘버핏톨로지’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그만의 투자 방식은 '가치 투자'라는 고전적인 대명제 외에는 명확하게 정리된 바가 없다. 

 기업의 실질적인 내제 가치보다도 주 당 가격이 낮게 저평가되어 있는 주식을 구입해서 되도록 장기간 보유한다는 버핏의 가치 투자 개념은 이론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지극히 상식적인 방법일 뿐이지만, 수많은 투자자들이 버핏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주식을 인플레이션보다 좀 더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자산 축적 방식이라고 보지않고 요행의 대박을 노리는 자본 투기로 보기 때문이고, 자신이 투자하는 회사의 자산 상태와 해당 시장의 장기 동향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연구가 선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워런 버핏의 이제는 전설이 된 투자 성공과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비결은 획기적인 이론이나 비공식적인 방식이 아닌 버핏이 평생동안 해 온 투자의 궤적을 뒤따라가 거시적으로 통찰함으로써 그 비결을 유추해 낼 수 밖에 없는데, 그러기에는 버핏 자신에 관한 신뢰할 만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이다.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공개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해 왔던 버핏은 2003년에 전격적으로 마음을 바꾸어 앨리스 슈뢰더라는 모건 스탠리 출신의 여성 애널리스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쓰도록 허락하고 이를 위해, 버핏 자신이 그동안 모아두었던 방대한 량의 자료들을 과감하게 제공하였음은 물론, 필요한 만큼 무제한의 인터뷰를 허락하는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고, 이를 토대로 이후 무려 5년 간에 걸친 집필 작업 끝에 2008년 버핏이 인정한 최초의 자서전[ 스노볼 - 워렌 버핏과 인생 경영 ]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1년 후에 마침내 랜덤하우스를 통해 국내판이 발간되자마자 주요 신문들과 인터넷 서점들이 한결같이 프론트페이지에 이 책에 대한 소개와 추천들을 앞다투어 내걸었을 만큼 이 책에 대한 관심이 엄청난 데에는 ‘단순히 세계 최고 부자의 첫 공식 평전’이어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들이 배경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두터운 두 권의 하드커버에 합쳐서 총 1,834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은 위압감마저 줄 정도이지만, 내용은 복잡한 경제나 투자 이론들은 의외로 많지 않고 워런 버핏의 일생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인물 평전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의외로 쉽고 재미있게 잘 읽힌다.

평전의 첫 장은 상투적인 워런 버핏에 대한 찬사나 통속적인 가계도 나열이 아니라 1999년 7월 선 밸리에서 열렸던 연례 컨퍼런스에서 버핏이 했던 연설을 소개함으로써 시작한다. IT 기술의 대도약 시기를 맞아 월스트리트가 IT 기술주의 폭등으로 열광하던 시점에 버핏은 IT 기술주 열풍에 엄청난 거품이 끼여있으며, 자신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고 자산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기술주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폭탄 발언을 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새로운 기술 자체는 분명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지만, 그것과 그 기술을 지닌 회사의 성장은 별개의 문제라고 하면서, 자동차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임은 분명하지만 초기에 2,000개가 넘었던 자동차 회사의 목록은 현재는 3개 밖에 살아남지 못했으며, 20세기 초에 200개가 넘던 비행기 산업 관련 회사들 중 현재 수익이 나는 항공 회사 주식은 단 하나도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예로 들었다. IT 산업 전성기의 한 복판에서 버핏이 말한 이 주장은 당시 최악의 수익률을 기록하던 버핏과 버크셔 헤서웨이의 현실과 대비되면서 월스트리트와 산업계 전체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얼마 후 IT 기술주의 거품이 대붕괴를 일으킴으로써 월스트리트 전체가 대공황 이후 최대의 폭락을 겪게 되자 ‘오마하의 현인’ 버핏의 통찰력은 모든 이의 존경의 대상이 된다.

2장부터 시작되는 버핏의 가계와 어린 시절의 경험들은 버핏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려했던 이유를 일정 부분 짐작케 한다. 17세기에 미국으로 이주해 19세기 중반에 네브래스카의 오마하에 정착한 버핏의 가문은 아버지인 하워드가 하원 위원이 됨으로써 지역 사회에 탄탄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지만, 외가쪽으로 유전된 정신병적인 기질은 어머니 레일라의 난폭하고 가학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 버핏에게 평생동안 깊이 내재된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갖가지 통계 수치로 가득찬 책을 통째로 외우기 좋아했던 버핏은 서른 다섯 이전에 백만장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문 배달과 마권 줍기 등을 통해 모은 돈으로 11살 때 첫 주식 매입을 하였다.

대학 졸업 때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나이로써는 막대한 자금을 모은 버핏은 벤저민 그레이엄의 [ 현명한 투자자 ]를 읽고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기술적 분석에 매료되어 존경하는 그레이엄이 강의를 하던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그레이엄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그레이엄의 투자 회사에 입사해 그레이엄의 지론인 ‘가치 투자’를 평생의 투자의 기본으로 몸에 익혔다. 회사가 지닌 자본과 자산의 청산 가치가 그 회사의 주식의 총액보다 크다면 비록 최악의 경우 그 회사가 망하더라도 결코 손해는 보지않는 최소한의 ‘안전 마진’을 확보한 것이므로 실제 자산 가치보다 주가가 낮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있는 기업을 골라 투자하여 장기간 보유하는 가치 투자 전략은 단순하고 원칙적이지만, 위험은 극히 낮고 수익률은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정석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이다. 

그레이엄의 은퇴 이후 그레이엄의 후계자 권유를 고사하고 오마하로 돌아온 버핏은 가족친지와 동료,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투자 회사를 세운 후 저평가된 회사의 주식을 사모은 후 수익을 배당하지 않고 계속해서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불려나간다. 직물 회사인 버크셔 헤서웨이를 비롯하여 버핏이 지배 주식을 가진 회사들은 개별적으로는 큰 수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주식 교환을 통한 지속적인 주식 매입과 재투자, 차익 거래 등을 통해 꾸준히 자산을 확대시켜 나간 결과 월스트리트의 평균적인 수익률을 훨씬 능가하는 높은 수익률을 매년 기록하고, 그 결과로 막대한 투자자와 자금들이 버핏에게 몰려들기 시작한다.
  

2권에서는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하여 살로몬 브러더스, 코카콜라 등 월스트리트의 굵직굵직한 대기업들의 이사로 참여하여 직접 경영에 관여하고, 그 과정에서 겪은 복잡한 경영권 다툼과 법적 소송을 통해 월스트리트와 미국 금융계의 숨겨진 모습들을 상세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특히 1999년의 IT 기술주에 대한 예언에 이어 서브프라임 부실로 인한 금융 부실에의 경고, 월스트리트에 만연한 분식 회계와 장부 조작에 대한 비판, 테러나 자연 지진에 대비한 모험 상품의 설계 등에서 보여준 버핏의 시대를 앞선 혜안은 경제 원칙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진정한 자본주의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부자들의 상속세 면제를 앞장서서 반대하고 경영자들에 대한 막대한 스톱 옵션 지급을 비판한 그의 목소리는 엄청난 자산을 가진 부자들의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함으로써 전 미국인의 존경을 받는 계기가 된다. 

그 연장선 상에서 버핏과 부인 수지, 그리고 자녀들의 이름으로 각각 재단을 설립하여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나아가 자신이 사망한 후에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의 대부분을 자신의 재단이 아닌 빌 게이츠의 재단에 기부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보다 더 잘 활용해 줄 곳에 위탁하는’ 이상적인 기부 문화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현대 자본주의의 현인’다운 모습을 실천적으로 제시하였다.



책에는 버핏의 투자나 경영에 관한 이야기들에 못지않게 버핏 개인의 특이한 성향과 생활 모습, 사고 방식과 성격상의 장단점들, 수지를 비롯한 여러 여성들과의 독특한 관계들, 자식들을 대하는 모습 등을 자세하게 그려냄으로써 버핏을 성인이 아닌 피와 살을 가진 장점만큼이나 결점과 특이점도 많은 인간으로 형상화시켜 보여준다.  

극도로 주관적인 성격과 인색함,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버핏의 사실적인 모습과 수지와 애스트리드, 케이, 샤론 등 그의 주변 여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폭로로 인해 이 책이 출간된 이후 버빗과 저자의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는 말도 들려 왔지만, 본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의 성공과 기부를 신화화했을 때 가졌을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결점들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여주었을 때 오히려 그의 삶이 진솔하고 투명하게 그려져 친근감과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평전의 모범적인 사례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버핏이 지닌 모든 인간적인 장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공을 거둔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엄청난 집중력 때문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도 있지만, 이 책에는 그런 단순한 요약 이상의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주식이나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강력하게 추천할 매우 중요한 책이다. 

(특히 버핏이 한국과 한국 기업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분석한 대목은 반드시 읽어두어야 할 부분이다).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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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공화국 일본여행기 - 만화평론가 박인하의 일본컬처트래블
박인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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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인 2007년 늦여름 경에 도쿄와 오사카를 각각 1주일씩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테마파크 건립 기획과 관련된 리서치를 위해서였는데, 도쿄에서는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씨, 지브리 박물관, 남코 난쟈타운, 도쿄 돔시티 등을, 오사카에서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오사카성, 니죠성. 도에이 스튜디오 등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미리 세세하게 사전 조사를 한 후에 출발했었습니다.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 평론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해 온 만큼 자신있게 목적지를 선택하고 여러 권의 가이드북과 인터넷 게시판들을 참조하여 일정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몇 년 만에 다시 밟은 일본은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변해있어 혼란스러웠고, 우리가 대상으로 삼았던 장소들 중에서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목적지들은 참고할 수 있는 정보 자체가 적거나 가이드북에 실려있는 정보가 잘못되었거나 아예 아무런 정보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길거리에서 낭비한 시간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브리 박물관의 경우에는 국내에서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매우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적지않은 입장료를 내고 어려운 예약 과정을 거쳐 도쿄 외곽의 미타카까지 애니메이션 관련 명소를 보라가는 가는 경우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지 않아서인지 가이드북마다 실려있는 정보들이 거의 똑같은 기본적인 정보들 뿐이고 그나마 최근에 변경된 사항들은 전혀 업데이트되어있지 않아서, 정작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팬이라면 그곳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무엇을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고 어디에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지 박물관 내 기념품점에서는 무엇을 파는지 같은 애니메이션 전문가의 상세하고 전문적인 정보가 정말 아쉬웠습니다.
 

이런 아쉬움은 도쿄보다도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적은 오사카-교토-나라는 더욱 심해서 덴덴 타운의 애니메이션이나 음반 전문점들에 대한 정보는 아키하바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적었고,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게시판의 정보들도 관동 - 도쿄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문화적 토양을 지닌 관서 - 오사카의 문화 특징들을 소개하고 설명해주는 책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해외 여행이 보편화됨에 따라 이제는 여행사 상품이나 패키지 여행 같은 유명 관광지 위주의 단순 관람형 여행에서 여행자 각자의 취미나 기호에 따른 주관성이 강한 여행이나 맞춤형 여행으로 넘어가는 추세이고, 특히 젊은 층에서는 이러한 관광 형태가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개정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국내의 가이드북이나 여행 책자들을 볼 때마다 매번 아쉬웠던 점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 관광지들이 아닌 영화나 음악, 문학, 미술, 건축, 연극, 무용, 만화, 식도락, 민속 등 세분화된 취미나 기호를 가진 사람들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해외 여행길에 오를 때 그들을 위해 신뢰할 만한 그 방면의 전문가나 애호가가 특정 문화 분야에 초점을 맞춰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정확하고 풍부하면서도 세밀한 정보를 담아놓은 책이 의외로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 발간된 [ 만화공화국 일본여행기 ] 는 우선 국내에 몇 되지않는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의 전문가인 박인하 교수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 바라본 일본 문화 탐사기’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일단 제가 바라던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기본적인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추천사와 인사말들을 넘어 목차 쪽을 펼쳐 보면 흔히 예상되는 대중적인 만화들이 아니라 < 명가의 술 > 이나 <바텐더 >, < 현시연 >, < 캣 스트리트 >, < 어시장 3대째 >, < 갤러리 페이크 >, < 산 > 같이 최근 진지한 만화 매니아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있는 전문적인 직업과 소재를 다룬 작품들을 선정하고, 각 작품과 작품 속에 그려진 직업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한 것이 눈에 띄어 지나치게 대중적이거나 보편적인 방향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2~30대의 진지한 만화 애호가들의 시선에 맞추겠다는 방향성이 명확하게 보이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저자가 현재 교토에 거주하고 있어서 인지 일본 만화의 다수가 다루고 있는 도쿄가 아닌 오사카와 교토 등의 관서 지역을 먼저 다루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드는데, 특히 오사카의 우메다와 도톰보리, 덴덴타운, 오사카성과 니죠성, 만국박람회장과 다카라즈카 극장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점이 매우 흡족합니다. 

도쿄로 와서도 긴자의 바와 쇼핑 문화, 오모테산도의 건축물들과 캣스트리트의 잡화점들, 도쿄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들, 츠키지 시장 등을 일반적인 가이드북들과는 다른 만화와 애니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들 위주로 소개하는 방법이 돋보이고, 아키하바라와 이케부쿠로의 오타쿠와 동인지 문화를 설명하는 장에서는 일반인들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 ‘전문용어’들까지 쏟아져나와 슬며시 웃음을 지게 만듭니다. 

토이와 피겨, 건프라 등을 소개하는 장에서는 국내의 어떤 가이드북들에서도 언급조차 하지 않는 나카노 브로드웨이와 토이러저스 등의 매니아틱한 명소들을 소개하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4부인 테마파크 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각종 테마파크들을 모두 소개하지 않은 점은 다소 아쉽지만,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테마파크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분량을 할애하여 소개가 되어있고(교토역 안에 테즈카 오사무 기념관이 있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지 못해 교토역 바로 전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는 실수를 한 안타까움이 지금도 뼈에 사무치는 저로써는 특히 와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만화 - 애니메이션 기반의 테마 파크 개발과 건설의 구체적인 예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 돗토리현의 사례를 자세하게 소개한 부분은 특히나 유익했습니다.

커피나 카페 같은 여성적인 기호를 테마로 한 일본 기행문들은 많은 반면 서브 컬쳐에 초점을 둔 기행문은 비교적 다양한 일반 서적에 비해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희소한 우리나라 상황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서브 컬쳐의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가 같은 작품들을 좋아하는 진지한 애호가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눈으로 직접 둘러본 것 같은 체험을 들려주는 이 책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 친숙해진 일본을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 전게 꼭 한 번 먼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풍성한 책’입니다.

단,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익숙하지 않거나 작가가 예로 든 만화들을 전혀 읽어보지 않은 초보자에게는 내용이 감이 안 잡힐 수 있겠고, 여백을 너무 많이 주다보니 글자 크기가 작아져서 가독성을 떨어트리는 편집상의 문제점은 지적하고 싶네요.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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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고전이 된 작가가 아닌 현대 일본의 장르 문학 작가로 가장 먼저 접한 이가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였습니다. 랜덤하우스에서 발간되었던 [ 게임의 이름은 유괴 ] 와 [ 호숫가 살인사건 ] 등과 창해에서 출간되었던 [ 비밀 ] 과 [ 변신 ], [ 아내를 사랑한 여자 ] 등을 시작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아직 일반적으로 널리 읽히지 않던 시절부터 국내에 번역, 출간된 그의 작품들을 빼놓지 않고 탐독했습니다. 
 

그러다가 [ 백야행 ] 과 [ 탐정 갈릴레오 ] 시리즈, [ 유성의 인연 ] 등이 차례로 드라마화되면서 국내에서 그의 인지도가 대중적으로 높아져 그의 작품들이 여러 출판사들을 통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자 그 양과 구입 비용이 부담스러워져서 소프트커버로 나온 책들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게 되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그는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데뷔 이후 현재까지 발표한 작품 수가 무려 60편 이상으로 한 해 평균 3~4 작품씩을 꾸준히 발표해 온 편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렇게 다작을 하면서도 각각의 작품들이 대부분 평균 수준 이상의 높은 완성도를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의 작품들 중에서 적지않은 수의 작품들은 참신한 발상에만 의존하여 도식화된 전개와 존재 자체가 예측가능한 반전이 기계적으로 배치되어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 비밀 ] 이나 [ 용의자 X의 헌신 ], [ 백야행 ] 등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나오는 마치 더 높은 단계로 훌쩍 도약한 듯한 발전상을 보여준 히가시노 게이고의 탁월한 작품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인기작 [ 백야행 ]은 분명히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걸작이지만, 그 이후에 나온 [ 환야 ] 는 [ 백야행 ]의 여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재탕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었고, [ 변신 ] 과 [ 레몬 ]처럼 유사한 느낌을 주는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한동안 그가 상투적으로 구사하였던 휴머니즘적인 결말 처리 방식이 확연하게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승화되어 구사됨으로써 큰 감동을 주었던 [ 용의자 X의 헌신 ]은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이 작품이 TV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면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지자 줄줄이 시리즈로 이어서 나온 후속편들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한 점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인 컨셉의 작품들이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008년 연말 일본 베스트셀러 집계의 소설 부문에서 그의 작품이 10위 권 안에 네 작품이나 들었고, 현재도 교보 문고 외서부의 일본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 10위권 안에 그의 작품이 다섯 권이나 올라가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적지않은 작품들이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도식적인 전개와 예측가능한 반전의 기계적인 반복으로 매너리즘을 느끼게 하였다면, 반대로 전개 과정의 군더더기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빠른 속도로 결말을 향해 돌진하는 단편이라면 그러한 비판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평소에 종종 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깔끔하고 임팩트감 있는 단편들을 기대했었지만, 연작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와 ‘~소’ 시리즈 정도를 제외하고는 국내의 여러 출판사들을 통해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무수한 그의 책들 중에서 의외로 단편의 묘미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바로 얼마 전에 발간된 [ 범인없는 살인의 밤 ] 밖에 없어 무척 아쉬웠던 참에 초창기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을 꾸준히 발행해 왔고 [ 범인없는 살인의 밤 ]을 내주었던 랜덤하우스에서 [ 수상한 사람들 ] 이라는 제목 아래 다양한 인물과 상황, 장르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또 한 권의 단편집을 내놓아 그의 팬들을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수상한 사람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활동 시기에서 비교적 초기에 속하던 시기에 쓴 모두 7편의 단편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각 단편들의 분량은 40쪽 정도로 비슷한데, 공간적 범위가 좁은 작품에서 넓은 작품 순으로 배열되어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각 작품들의 주인공이나 배경, 사건들은 거의 겹치는 부분이 없이 다양해 전체적인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데, 당연히 모두 추리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나 전개에 있어서는 첫 번째 작품인 [ 자고 있던 여자 ] 와 [ 결혼 보고 ], [ 달콤해야 하는데 ] 가 빼어나고, [ 판정 콜을 다시 한 번 ] 과 [ 등대에서 ], [ 코스타리카의 비는 차갑다 ] 는 결말은 훌륭하지만 구조가 다소 단순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 죽으면 일도 못해 ] 는 추리 소설적인 면보다는 사회적인 측면의 메시지가 더 인상적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장편이나 중편이 아닌 각각 독립적인 40쪽 분량의 짧막한 단편들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신선한 발상과 놀라운 반전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전개와 탄탄한 구성으로 펼쳐져 부담없이 상쾌하게 읽는 즐거움을 줍니다.

이 단편들을 다 읽고나면 초기에 벌써 이정도로 완성도 높은 단편들을 발표했다면 필력이 원숙기에 이른 지금은 또 어떤 단편들을 창작해 내었을까 하는 궁금증에 그의 최근 단편집의 출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단편집의 경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각 작품들의 발표년도와 발표된 매체에 대한 정보가 누락되었다는 점입니다. 워낙 그의 작품이 많은 만큼 일본 사이트를 통해서도 쉽게 파악하기 힘든 만큼 출판사에서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면 하는 바램이 남습니다.

 

hajin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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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흉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데뷔 이후 현재까지 20년 동안 무려 60권이 넘는 단행본을 발표함으로써 1년에 평균 3~4편 꼴이라는 다작을 하고 있고, 그중 대부분이 대중적인 추리나 SF 장르의 소설로 분류되면서 상당 수가 영화와 드라마로 앞다투어 제작된 가장 대중친화적인 소설가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처럼 녹록치 않은 평가를 동시에 얻고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엄청난 다작과 방대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일정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는 균일하게 높은 작품성의 성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눠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휴머니즘적인 감정이 중심이 된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오락적인 재미에 치중한 작품이다. 동일한 사회성 짙은 내용과 추리나 스릴러 소설, 혹은 연애 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느낌은 크게 달라지는데, 문학적인 평가는 물론 전자 쪽이 훨씬 더 높은 편이다(가장 대표적인 예로 나오키상 수상작인 [ 용의자 X의 헌신 ]을 들 수 있다). 

오사카 부립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약력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작품에는 과학계의 최신 동향이나 이론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많은데, 성전환을 소재로 한 [ 아내를 사랑한 여자 ]이나 뇌이식을 다룬 [ 변신 ], 인간 복제를 테마로 한 [ 레몬 ], 물리학을 전면에 내세운 [ 탐정 갈릴레오 ] 등이 대표적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2년에 발표한 [ 아름다운 흉기 ] 역시 스포츠 과학과 도핑이라는 다분히 과학적인 소재를 채택한 작품이다. 

소설은 첫 도입부에서 일찌감치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며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복수자를 모두 드러냄으로써 일반적인 추리 소설보다는 스릴러 소설에 훨씬 더 가까운 형태로 진행되어 나간다. 

자신들이 금지된 약물을 사용하여 기록을 높이고 명성을 얻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술자인 센도의 집에 침투하여 그를 죽이고 집을 불태운 과거의 유명 스포츠 선수 4명에게 센도가 스포츠 과학 기술을 집약시켜 육성한 여성 철인 7종 경기 선수인 타란툴라(본명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사실 이것은 입국 기록만 조사해 보면 금방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의 복수가 소설의 뼈대를 구성하고 있다.

처음부터 사건의 전모와 범인들의 정체가 낱낱이 밝혀지며 시작되는 만큼 소설은 불필요한 설명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빠른 템포로 4명의 가해자들을 차례로 응징하는 복수의 과정을 직선적인 구성으로 그려나간다. 두드러진 신체적 특징에 일본어를 읽을 수 없고 지리에 무지하다는 치명적인 약점들을 지닌 타란툴라가 오직 탁월한 육체적인 능력과 인내심만으로 가해자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살해하는 집요함과 대담함이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불필요한 묘사를 배제한 치밀하면서도 간결한 필체를 타고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전체적인 전개 과정이 뻔히 예상되는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매 단락마다 몰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필력이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탁월함인데, 액션과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외견상 사건이 일단락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대목에서 갑작스럽게 제시되는 뜻밖의 반전과 속이 후련해 지는 권선징악의 엔딩은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찬탄을 금할 수 없게끔 만든다. 

운동 선수의 신체적 능력을 자연적인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되는 스포츠 과학의 여러 가지 방법들에 대한 서술은 하나의 소재를 선정하면 매우 치밀하게 사전 조사를 하여 흥미롭게 풀어놓는 작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인데, 여성이 임신을 하면 그 직후부터 태내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육체적인 근력이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점에 착안해 임신과 유산을 인위적으로 반복하게 만들어 임신을 단순한 육체적 능력 강화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장면과 최후의 순간에 보여지는 타란튤라의 모성 본능은 독자들에게 엄청난 정서적인 충격을 안겨주면서 안타까움에 눈물짓게 만든다.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와 예측 가능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잘 짜여진 세부 설정과 긴박감과 속도감이 넘쳐나는 전개는 400쪽에 달하는 책을 단 하룻 밤 만에 독파하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재미로 가득 차 있다. 추리적인 요소가 적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리기는 할 테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중에서 읽는 재미에 있어서는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수작이다. 

hajin

최근에 발간된 한 일본 순정 만화에서 문학 동호회에 가입한 여주인공에게 선배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아니면 히가시노 게이고?’하며 거장급 작가들의 이름을 쭉 나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위치는 단순한 인기 대중 작가의 범주를 넘어 순수 문학도들 사이에서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만큼 상당히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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