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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역사, 버냉키와 금융전쟁
데이비드 웨슬 지음, 이경식 옮김, 장보형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18세기에 발아하여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발전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산업 자본주의는 ‘자유 시장 원칙’이라는 도그마에 근거하여 거의 아무런 제어장치없이 급격한 성장 일변도로만 치달은 결과,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마르크스가 예측한 대로 자본주의 발전의 최종 단계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었고, 그것이 유럽 대륙에서는 식민지 쟁탈 경쟁의 확대인 세계 대전으로, 그 전쟁에 휩쓸려 들지 않은 미국에서는 대공황이라는 형태로 실현되었습니다.

 

2차 대전의 결과 양쪽 진영으로 나뉘어 다투었던 유럽의 강대국들이 모두 동반 몰락하는 와중에 그 반사 이익을 누리며 단숨에 세계 최강의 자본주의 종주국의 자리에 올라선 미국은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던 대공황을 피하기 위해 수정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단계로 혁신적인 전환을 하면서 뉴딜 정책으로 파국을 모면하고, 이후 20세기 후반 전체와 21세기에 접어든 현재까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최강국으로써의 지위를 굳건하게 유지하게 됩니다.

 

수정 자본주의의 핵심인 시장의 자율 조정 기능을 신뢰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맡겨두는 고전적인 원칙을 전격적으로 타파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을 규제하는 중핵 역할을 담당하는 기구가 바로 미국의 중앙 은행 격인 연방 준비 제도입니다.

 

주식 투자를 하시는 많은 분들이 주가에만 집중하곤 하는 것과는 달리, 넓은 시각으로 경제를 보시는 분들은 단기적인 주가 지수나 개별 종목의 거래가보다 금리와 채권 수익률, 금과 석유 등의 현물 가격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그것들을 장기적인 경제 전망의 지표로 활용하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금리인데, 대출을 받아본 경험이 있으신 분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금리가 일반 가정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전체 주가나 개별 주식의 등락보다도 훨씬 더 직접적입니다. 이것은 가게보다 대출이 훨씬 더 많은 기업에서는 더욱 중요하고, 그래서 매 달 발표되는 한국 은행의 기준 금리나 지불 준비율의 변동이나 추세에 기업을 하시는 분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 국가들의 금리에 가장 크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미국의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가 매 달 발표하는 기준 금리입니다.

 

 



[ 살아있는 역사, 버냉키와 금융 전쟁 ] 은 바로 현재 미국 연방 준비 제도의 의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벤 버냉키와 그가 이끄는 연방 준비 제도가 2008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부터 비롯되었던 초유의 금융 공황 사태의 한 복판에서 어떻게 행동하여 파국의 위기를 헤쳐 나갔는지를 서술한 책입니다.

 

이 책은 1900년대 초 미국의 경제 상황을 설명한 뒤 1907년의 대공황과 그 여파로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가 창설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연방 준비 제도가 설립된 얼마 후에 닥쳐 온 대공황의 발발 원인 중의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연방 준비 제도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여러 학자들의 지적을 소개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였던 벤 버냉키이며, 대공황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는 버냉키로 하여금 연방 준비 제도에 관한 확고한 원칙과 행동 규범을 스스로의 내면 속에 확립하게끔 합니다.

 

버냉키의 선임자인 앨런 그린스펀은 무려 22년동안이나 의장직에 장기 집권하면서 연방 준비 제도를 백악관과 국회, 대법원에 이은 제4의 권력 기관으로 확립시켰고,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의 의장을 스타로 부각시킨 인물입니다. 그린스펀이 집권하던 시기 동안 미국은 1987년의 주가 대폭락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큰 공황 사태없이 급속한 경제 발전을 누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성장을 가능케 하기 위해 그린스펀이 유지해 온 저금리 정책은 경제 발전과 주가 상승에 못지않게 신용 대출의 증가라는 시한폭탄을 키워왔고, 그것이 결국 버냉키 시대에 들어와 금융 공황의 방아쇠를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린스펀은 2001년 1월부터 금리를 공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2001년 초에 6.5%이던 기준 금리가 9. 11 사태 때는 3.5%였고, 2001년 말에는 1.75%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린스펀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후도로 지속적으로 금리 인하 정책을 고수하여 마침내 45년 만의 최저 수준인 1%까지 끌어내리고, 이 수준을 2004년 6월까지 쭉 유지해 나갑니다. 2005년부터 금리를 매 달 0.25%씩 소폭으로 올려나가기 시작했지만, 2005년 5월까지 3% 선까지 밖에 올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임기가 끝나던 무렵인 2006년 2월까지도 4.5% 내외의 낮은 수준으로 금리를 유지했습니다.

 

낮은 금리는 필연적으로 통화량의 증대와 신용 대출의 폭등이라는 거시 경제에 위협적인 뇌관을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평균 2%대인 인플레이션보다도 낮아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 금리 수준인 1% 대의 낮은 금리 조건에서 소득 수준 이상의 대출을 받아 집을 사거나 집을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서민들은 금리가 3~4.5% 선으로 3배~4.5배 이상 오르게 되자 매 달 은행에 갚아야 할 이자도 큰 폭으로 오르게 되어 급기야는 이자를 납입하지 못하는 가게 파산 상태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것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런데 2008년에 미국을 덮친 금융 공황의 확산 요인은 이 모기지 문제가 전부가 아닙니다. 은행들은 대출된 부채를 모기지 채권이라는 형태의 대출 증권으로 만들고, 이것을 토대로 다양한 파생 상품을 개발해 유통시키는 편법을 발명하였습니다.

은행으로써는 위험도가 높은 대출금을 증권 형태로 바꿔 유통시킴으로써 대출이 불량으로 판명되더라도 손해를 볼 위험을 햇지하게 되지만, 문제는 이 불량 대출에 토대를 둔 채권 증서가 폭탄처럼 은행권을 떠돌아다니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너무나 복잡한 파생 상품의 구조와 내용으로 인해 은행조차 그 정확한 가치와 위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규모와 비중이 급격하게 불어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은행들은 자신들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구조의 이 파생 상품들을 별도의 구조화 투자 기구를 설립해 은닉했는데, 이때 소요되는 비용과 자금은 은행의 장부에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금액이 이러한 부실 채권과 파생 상품에 투입되어 있는 지를 은행 내부에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서 시티뱅크 한 곳만 살펴보더라도 2006년 기준으로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구조화 투자 기구에 빌려준 금액은 총 2조 1000억 달러 규모로, 이는 장부에 기록된 시티은행의 총 자산인 1조 8000억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것입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부실은 곧바로 그것에 근거한 부채 채권과 파생 상품들의 부실로 이어지고, 이 어마어마한 자산의 붕괴와 소멸은 결국 은행과 증권사, 투자사의 막대한 부채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2008년에 미국에서 촉발되어 전세계를 휩쓴 금융 공황의 실체입니다.

 



그린스펀의 뒤를 이어 연방 준비 제도의 의장직에 오른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던 버냉키는 당초에는 전임자인 그린스펀의 방침을 존중하고 답습하여 시장과 은행이 자체적으로 충격을 흡수하기를 기대하며 금리를 5% 내외로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저금리에서 고금리로의 전환으로 인한 모기지 부채의 부실 규모를 과소평가하여, 금리를 낮추어야 한다는 일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느린 템포로 서서히 금리를 낮춰나가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유럽 중앙 은행이 먼저 미국의 모기지 금융사에 대출을 한 유럽 은행들의 담보가 위험하다는 경고를 발하였고, 이어서 모기지 금융사에 대출을 해 준 미국 내 대형 은행과 증권사, 투자사들의 현금 유동성이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급변하자 버냉키는 곧바로 자신의 상황 판단 실수를 깨닳고, 금리를 전격적으로 대폭 인하하였고, AIG를 비롯한 대형 금융 업체의 도미노 부도를 막기 위해 무려 2억 8천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현금을 쏟아 부음으로써 1907년과 1929년의 대공황에 필적할 만한 대재앙이 될 뻔했던 금융 공황 사태를 단기간에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대공황을 연구했던 학자로써 대공황 직전에 연방 준비 제도가 신속하고 과감하게 시장을 통제했었더라면 대공황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신념을 지녔던 버냉키는 자신이 마침내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의 의장이 되고 곧이어 금융 공황이 일어나자, 자신의 신념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 자칫 부시 정부의 마지막 업적(?)으로 미국 금융계 붕괴라는 파멸적인 사태로까지 치달을 수 있었던 위기 상황을 거의 도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과감하게 총동원하여 사태를 조기에 진정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현재로써는 보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이 금융 위기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이고, 금융 공황의 원인이 되었던 은행과 증권사들의 부실 채권과 파생 상품 개발 및 유통에 대한 책임 소재 규명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2조 8천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신규 달러의 시장 투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위협이 버티고 있는 상태인 것은 사실인 만큼, 아직 버냉키의 역할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이르다고 보여지는 시점입니다.

 

하지만 이 책 [ 살아있는 역사, 버냉키와 금융 전쟁 ] 은 불과 2년 전에 전세계를 뒤흔들었고 아직 그 여파가 잔존해 있는 금융 공황의 원인과 전개 양상, 그리고 버냉키가 이끄는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의 대응 방법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연방 준비 제도와 기준 금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심어줍니다.

 

현재 국내외 경제계에서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는 올해 하반기부터 시작될 출구 전략도 결국은 미국 연방 준비 제도의 금리 정책에 의해 결정되는 만큼, 경제를 거시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hajin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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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걸
페터 회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에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이라는 길고 특이한 제목의 소설이 애서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이라는 우리에게는 이름만 낯익을 뿐 그외에는 사실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북구 출신의 작가인 페터 회가 1992년에 발표했던 이 책은 본국인 덴마크에서 만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차례로 권위있는 상들을 수상하며 무려 33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국내에서도 첫 번째 번역본이 절판된 이후에 이 책에 대한 소문과 추천이 애서가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면서 읽기 어렵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2005년에 출판사를 옮겨 재간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은 북극에 가장 가까운 국가라는 지리적 조건과 혹한과 백야라는 인상적인 자연 환경을 지닌 도시인 덴마크의 코펜하겐이라는 (우리에게는) 이국적인 무대에 못지않게, 그린란드인의 혈통을 이어받고 눈에 대한 특별한 초감각을 지닌 여성 주인공인 스밀라가 지붕에서 추락사 한 같은 건물에 살던 소년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조사를 해 나가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거대한 사건과 맞부닥쳐 그 전모를 차례로 밝혀 나가는 과정을 이국적이고 독특한 필체로 서술해 낸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인 페터 회가 추리와 스릴러 소설을 뒤섞어 놓은 외양을 지닌 이 작품에서 묘사해 보여준 덴마크와 그린란드라는 북구의 대륙과 도시의 자연 풍광과 스밀라를 둘러싼 다양한 등장 인물들의 강한 개성은 미국이나 영국, 일본의 추리-스릴러 소설과는 확연하게 다른 매우 특별한 분위기와 감흥을 읽는 이에게 안겨 주면서 이국적인 인상을 강하게 남겼습니다.

 

< 콰이어트 걸 > 은 < 스밀라~ > 이후 두 편의 소설을 더 발표한 뒤 근 10년 동안 침묵을 지켰던 페터 회가 2006년에 발표한 그의 근작입니다.

 



 

 

< 콰이어트 걸 > 은 많은 면에서 그의 출세작인 < 스밀라~ > 와 닮은 점들이 두드러집니다.

< 스밀라~ >의 주인공이 30대 중반의 매력적인 여성인 것과는 달리 < 콰이어트 걸 >의 주인공은 42세의 남성인 카스퍼 크로네인 점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고는 두 소설은 설정에서부터 전개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매우 흡사한 점들을 무수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때 유명한 서커스 광대였던 카스퍼는 눈에 대한 특별한 초감각을 지녔던 스밀라처럼 극도로 예민하고 날카로워 거의 초능력의 수준에 이른 청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청력’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카스퍼의 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주변 건물들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 각각을 청력만으로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으며, 전화 수화기를 통해 전달되는 미세한 주변의 소음만으로도 넓은 시가지에서 전화를 걸고있는 특정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으며, 금고의 내부 구조나 카드에 인쇄되어 있는 안료의 무게 차이로 인한 카드의 내용까지도 청력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거의 만화같은 수준의 초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호흡이나 목소리, 심장 박동 등으로 사람을 파악하고 본성을 알아 차리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죠(이런 점들은 < 향수 > 의 주인공과 흡사합니다).

스밀라의 특별한 능력이 그다지 극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던 < 스밀라~ > 와는 달리 이 책에서는 카스퍼의 놀라운 청력이 이야기 내내 초능력 무기처럼 자유자재로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과 구조도 흡사합니다.

같은 건물에 살던 친한 아이의 추락사를 조사하던 스밀라처럼 카스퍼 역시 자신에게 심리 상담을 받으러 왔던 어린 소녀의 실종에 의혹을 느껴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는, 얼핏 보기에는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평범한 사고사처럼 여겨졌던 소년의 죽음 뒤에 거대하고 복잡한 음모가 숨겨져 있었던 스밀라의 경우처럼 카스퍼도 소녀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정보부와 이민국, 연구소, 정부, 해군, 그리고 의문의 수녀회와 거대 기업 등 다양한 조직의 다채로운 인물들을 만나면서 복잡하게 뒤얽혀있는 거대한 음모를 하나씩 풀어나가며 배후의 진상에 접근해 갑니다. 그 와중에 카스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팜므파탈적인 매력을 지닌 과거의 연인과도 재회합니다.

 

[ 아래에는 내용 상의 스포일러가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

 

일상적인 추락사로 보여졌던 사건이 최종적으로는 < X-파일 > 같은 거대한 규모의 미스테리로 연결되었던 < 스밀라~ > 에서처럼 카스퍼가 긴 추적 끝에 마침내 직면한 진상은 놀랍게도 어린 소년소녀들이 정신력으로 거대한 지진을 일으켜 코펜하겐을 붕괴시킨다는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으며, 사건의 흑막처럼 보였던 어른들은 단지 그 사건을 이용해 부동산 투기에 따른 이익을 얻고자 했던 단순범이었을 뿐이라는 경악할 만한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음모의 주모자가 다름 아닌 카스퍼가 찾아 헤매었던 실종된 어린 소녀이며, 또한 그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충격적인 반전도 마지막 장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12명에 불과한 어린 소년소녀들이 단지 정신력만으로 거대한 지진을 일으켜 도시를 바다 밑으로 침몰시킨다는 이야기가 허황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 소설의 기본 설정이 거대한 지진으로 코펜하겐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뒤라는 다분히 SF적인 설정이므로 그다지 큰 위화감이나 비현실감은 없는 편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과 < 스밀라~ > 의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북구 문학 특유의 환상 문학적인 전통이 투영되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런 설정과 전개가 좀 더 받아들이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젊었을 때 전세계를 돌며 갈채 속에 공연을 다녔던 유명한 서커스 광대였던 주인공이 서커스와 쇼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사와 독백들 속에는 실제로 발레 무용수이자 배우였던 작가의 경험이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소설 전반에 걸쳐 주인공 카스퍼의 초능력과 대등할 정도의 빈도로 인용되고 언급되는 바흐의 음악입니다. 저자의 바흐와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과 식견이 상당한 수준임을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바흐의 주요 작품들에 대한 작가의 평가나 분석들에서는 수준 높고 날카로운 통찰력이 엿보입니다.

 

 

 

< 스밀라~ > 를 읽은 많은 독자들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이라는 평가를 하곤 하는데, 필자 역시 < 스밀라~ > 가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흥미로운 묘사나 진행에 비해서 이상하게도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아 의아한 느낌을 가졌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분들처럼 번역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대과거 시제를 과도하게 남발하고, ‘호로비츠’를 ‘호로위츠’라고 쓰는 등 번역에 아쉬움은 분명히 있었지만요), < 콰이어트 걸 > 을 읽으면서 그것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페터 회의 문장 자체의 문제 때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 책에서도 바흐의 음악에 관한 번역들에는 오역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 스밀라~ > 와 < 콰이어트 걸 > 은 공통적으로 상당히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많은 수의 등장 인물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수시로 뜻밖의 시간과 장소에서 사실감이나 당위성없이 불쑥 등장하거나 사라지곤 하며, 사건의 주요 대목들에서 아무런 설명없이 마치 점프 컷처럼 갑작스럽게 실마리가 주어지거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가고, 시간과 공간의 사실성이 흐려지는 부분도 많아, 독자는 수시로 ‘내가 빠뜨리고 건너뛴 부분이 있었나?’하는 당혹감을 느끼게 하곤 합니다.

 

등장 인물을 명확하게 묘사하거나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고, 시간적, 장소적 사실감이 모호해지는 이러한 서술은 이 소설이 사실주의적인 서술 양식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북구 문학이 지니고 있는 환상 소설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페터 회가 안데르센과 종종 연관지어 설명되곤 하는 데에서도 이런 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이런 부분에 대해 덴마크 문학 전문가에게 해설을 맡겨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습니다).

 


추리-미스테리-스릴러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장르 소설치고는 문장이나 서술 방식이 다소 낯설고 생경해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기는 하지만, 너무 가볍게 읽히고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장르 소설들이 넘쳐나는 우리 서점가에 쉽게 접하기 힘든 북구의 문학 전통에 기반한 수작 장르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접하는 기쁨과 읽고난 뒤의 뿌듯함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hajin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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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이동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2 미치 랩 시리즈 1
빈스 플린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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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들어와 청장년층 사이에서 완연하게 하나의 문화 트랜드로 자리 잡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 TV 드라마, 즉 ‘미드’ 입니다. 소수의 수작 드라마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불륜’ 혹은 ‘막장’이라는 악명을 늘상 달고 다니는 국내 드라마나 만화적인 황당함이나 유치함이 지나친 일본 드라마(일드)와는 확연하게 차별화될 정도로 치밀한 구성과 첨단 기술이나 유행에 대한 깊이있는 지식을 토대로 밀도있고 완성도 높게 전개되는 미드는 고정적으로 장기 출연하는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라는 팬덤적인 요소까지 더해져서 영화와는 또다른 의미에서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과 경탄을 품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미드의 주 시청 계층인 2~30대 사이에서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은 드라마는 < 프렌즈 > 와 < 섹스 앤 시티 >이고, 남성들에게 주로 인기가 높은 드라마는 < 24 > 와 < CSI > 로 성별에 따라 취향이 확연하게 갈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모든 시즌에 걸쳐 전체적인 완성도와 밀도감, 긴장감 등 작품성과 오락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는 작품은 바로 < 24 > 입니다.

 

‘대테러조직 CTU’ 요원인 주인공 ‘잭 바우어’가 매 시즌마다 초인적인 정신력과 체력으로 대통령 암살이나 대도시에서의 핵테러 같이 국가적으로 치명적인 테러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원 맨 히어로’처럼 필사적으로 사방을 뛰어다니며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하루 24시간을 매 회 당 1시간 단위로 나눠(총 24회 구성) 실시간 구성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의 이 액션물은 매 시즌이 방영될 때마다 전미 시청률 1위에 오름으로써 21세기 첫 10년 간 미국 TV 드라마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고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수사’라는 범죄 수사 기술의 최첨단 방식과 장비들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을 감탄시켰던 < CSI > 시리즈가 사실은 작가 퍼트리샤 콘웰의 법의관을 주인공으로 한 베스트셀러 소설인 < 스카페타 > 시리즈의 강한 영향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 24 > 역시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작품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빈스 플린의 베스트셀러 소설 < 미치 랩 > 시리즈입니다.

 

이번에 국내에 번역된 [ 권력의 이동 Transfer of Power ] 는 1999년에 발표된 책으로 작년 10월에 발표된 [ Pursuit of Honor ] 까지 모두 10권의 후속 시리즈가 발간된 < 미치 랩 > 시리즈의 히어로인 미치 랩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 미치 랩 > 시리즈가 < 24 > 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실상의 원형이라는 사실은 주인공인 미치 랩이 CIA의 대테러부대 비밀 현장 요원이라는 설정과 이 책 [ 권력의 이동 ] 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권력의 이동 ] 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이 백악관을 습격하여 수 십명의 비밀검찰국 요원들과 직원들을 살해하고 백악관을 완전히 점령합니다. 대통령은 지하의 비밀 벙커로 가까스로 피신했지만, 백악관에는 수 십명의 직원과 기자, 외부 인사들이 테러리스트의 인질로 잡혀있고, 대통령의 지하 벙커조차 완전히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알려집니다. 백악관 전체를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는 막대한 량의 폭탄을 곳곳에 설치해 놓아 FBI나 델타 포스 등의 진압 작전이 극히 어렵고, 설상가상으로 권력층 내부에는 대통령의 구출을 원치않는 세력까지 있는 상황에서 미치 랩이 단독으로 백악관 내부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자, 여기까지의 줄거리만을 들어도 누구나 ‘< 24 >와 정말 흡사하잖아’라고 말할 정도로 이 책이 < 24 >의 캐릭터나 설정에 미친 직접적인 면들은 너무나도 분명해 보입니다.

(IMDB에 의하면 실제로 작가 빈스 플린은 < 24 > 의 시즌 4와 5의 4개 에피소드에 컨설턴트로 참여했다고 나옵니다)

 

테러리스트의 백악관 습격과 점거, 대통령을 비롯한 인질들과 대량의 폭발물로 인한 진입 작전 불가라는 전대미문의 스케일과 난이도로 긴장감을 한껏 높이며 시작되는 이 작품은 톰 클랜시나 프레데릭 포사이스 같은 작가가 좋아하는 선배 첩보 스릴러 작가들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첨단 장비와 기술들, 고도로 훈련된 특수요원들, 권력층 내부의 파워 게임, 미국과 아랍 국가, 이스라엘 사이의 적대감과 긴장감 같은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절묘하게 풀어나감으로써 매 페이지마다 흥미진진하고 긴박감이 가득하여 독자들의 읽는 즐거움을 만끽시켜 줍니다.

 

 

첩보 스릴러로써의 구성 자체만으로도 이미 높은 완성도에 결정적인 재미를 더하는 것은 바로 ‘아이언맨’이라는 암호명을 지닌 주인공 미치 랩의 강렬한 개성입니다. 그리고 백악관에 첫 출근한 신참내기 기자로 출근 첫 날 테러리스트들의 인질로 잡혔다가 미치 랩에 의해 구출된 후 그의 구출 작전에 합류하게 되는 여주인공 격인 애너 릴리를 비롯한 CIA 국장 스탠스필드, CIA 대테러센터 본부장 아이린 케네디, 합참의장 잭 플러드, 해군 실 팀 식스 지휘관 댄 해리스 소령, FBI 국장 브라이언 로치, 대통령 경호 실장 잭 워치 등 미치 랩을 배후에서 돕는 여러 조연들도 한결같이 생생한 개성이 돋보여 이들이 이후의 후속작들에서 미치 랩과의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까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550쪽이 넘는 두터운 책을 불과 2~3일 만에 다 읽었을 정도로 이 책의 재미와 집중력은 단연 탁월하여, 이 미치 랩 시리즈 후속편들을 2~3달에 한 권씩 서둘러서 내주기를 출판사에 강력하게 요청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모든 영화 제작자가 탐낼 만한 내용이지만 무대가 백악관인 까닭에 쉽지않았던 영화화도 작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여 현재 미치 랩 역할의 배우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만큼 조만간 스크린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미치 랩과 그의 동료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hajin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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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좋은 날이 따로 있느냐 - 영원의 숲으로 떠나는 아주 오래 기다린 여행
정휴 지음, 백종하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인간은 혼자됨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죠.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증은 사춘기 이전의 어린 아이 때는 누구나 한 번 쯤은 겪곤 하는 통과 의례와 같은 것이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평소에는 까맣게 잊고 지내는 ‘아직 멀고 실감나지 않는’ 미래의 일처럼 여겨져 망각하고 사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과 생전의 행위가 향방을 결정짓는 죽음 후의 세계를 평상시에도 인지하고 산다면 평소의 행동에 훨씬 더 깊은 주의를 기울일 테지만, 이처럼 죽음을 먼 나중에나 닥칠 일이고 천국이나 지옥 같은 죽음 뒤의 사후 세계를 미신으로 여기는 인식이 일반적이 되었기 때문에, 살아 생전의 언행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극단적인 상벌이 기다린다는 협박(?)이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평균 연령이 3~40세이고 사소한 병도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던 시대와는 달리 어지간한 병은 대부분 발달된 현대 의학의 힘으로 완치가 가능하고, 성 전환이나 전신 성형 같은 이전까지‘신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일마저 과학의 힘으로 가능해진 데다가, 특별한 일이 없다면 거의 8~90세까지 수명이 길게 연장되는 현대에는 과거에 비해 죽음이 주는 공포가 현저하게 적어질 수 밖에 없는 점도 이러한 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불교계의 주요 직책을 두로 거치신 ‘큰 스님’이신 정휴 스님이 쓰신 이 책을 읽어보면 현대 한국 사회, 아니 현대의 모든 나라들을 좀먹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의 근본이 바로 이 죽음에 대한 경시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정휴 스님은 이 책을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스님은 불교의 존경받던 고승과 선승, 법사들이 보여주었던 다양한 입적 행태들을 열거하여 들려주는데, 대부분의 고승들은 앉아서 혹은 서서 입적을 맞이했으며, 많은 분들은 제자들이나 신도들과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홀연듯 입적에 드셨으며, 드물게는 길을 떠나듯 두어 발자욱을 걷다가 혹은 산책하듯 마당을 거닐다가 나뭇가지를 손에 잡은 자세 그대로 입적하신 분도 있으셨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본인의 입적을 예감하고 물구나무를 선 채로 입적하시거나 관을 미리 준비해 놓고 그 속에 들어가 누워 입적을 하시거나 스스로 다비용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 직접 불을 붙여 입적하시는 믿기 힘든 모습마저 보여주신 고승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고승들께서 세상에 별다른 미련이 없으신 듯 홀연히, 혹은 평상시에 행동을 하시던 그대로,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 자체를 희화화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육신과 이승에 아무런 미련과 얽매임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정휴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낡고 더럽고 추한 육체를 오래된 옷을 태워 버리듯이 훌훌 벗어 던지고 더 높은 차원의 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 즐거움이 되면 될 지언정 무어 그리 꺼리낌과 아쉬움을 있을 것이냐는 말씀이십니다.

 

평소에 죽음을 경시하던 현대인들 중의 상당 수가, 그리고 부와 권력과 지식이 많은 소위 권력층과 지식층의 대부분이 정작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억지로 조금이라도 연장하려고 무리하게 애를 쓰는 것은 따지고 보면 결국 이승에서 가지고 있는 것들에 미련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비롯한 전세계를 좀먹고 있는 부와 권력의 불균등과 과도한 편중은 결국 소수의 사람들이 부와 권력과 지식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인데, 이들이 자신들이 이승에서 온갖 노력과 고생, 권모술수로 쟁취한 것들이 정작 죽음이라는 절대 명제 앞에서는 결국 모두 다 놓아두고 빈손으로 떠나가야만 하는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는다면 그렇게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변과 사회에 나누어주어 보다 자비로운 세상이 될 터인데,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헛된 것에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기에 세상이 이처럼 평온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평범하지만 진리에 가까운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거기에 더해 고승들은 자신의 죽은 육신을 위해 화려한 장례식이나 다비식을 치르거나 거창한 탑이나 부도를 만들지 많고, 자신의 남은 육신을 산에 내다버려 짐승이나 벌레들의 먹이가 되도록 하라는 믿기힘든 유언을 남김으로써, 껍데기 뿐인 육신을 훌훌 벗어 던짐은 물론 이승에 남은 흔적까지도 짐승이나 벌레같은 생물들에게 망설임없이 공양함으로써 범인들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더없이 큰 자애심의 본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이 역시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의 재물과 권력을 끌어안고 탐닉하는 세상의 권력자와 부자들의 삶과 진정으로 비교되는 우주와 공감하는 한 차원 높은 삶과 죽음을 직면하는 참된 자세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휴 스님은 이 책에서 고금의 고승과 선승들의 선례를 거듭 들어 말하면서 세상의 모든 번뇌와 망상의 근원, 그리고 깨달음을 훼방하는 것이 바로 ‘집착’이며, 바로 이 집착을 끊고 법아를 직면함으로써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노력함이 수행자의 본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승들이 통찰력을 담아 남긴 법어와 화두들을 열거하며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법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다양한 방법과 모습들을 비유와 실례로 들려 줍니다.

정휴 스님의 이야기들 중에는 황제와 황후, 고관대작의 청을 거듭 고사하며 권력을 멀리한 고승들의 예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정신적인 초월의 경지를 추구하는 수행자가 세상의 권력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종교가 세속의 갈등을 도발하고 부추키는 현재의 실상에 대한 따끔한 꾸짖음으로 들립니다.
 

 


앞부분이 일반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수필로 읽힐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법아와 깨우침에 대한 법어들이 등장하는 부분부터는 불교라는 종교 특유 모습이 많이 드러나지만, 저처럼 불교에 대해 거의 아무런 지식이 없는 외부인이 읽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질 정도로 보편적인 문체로 평이하게 씌여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본문에 나오는 내용들 중에서 크리스트교의 성서에 나오는 것과 깜짝 놀랄만큼 동일한 문장이나 표현들이 상당 수 보이는데, 우리나라 일부 개신교의 완강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종교와 성자들의 말씀에는 근본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많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인 ‘떠나기 좋은 날이 따로 있느냐’는 말도 정휴 스님 본인이나 불교의 고승이 남기신 말씀이 아니라 뜻밖에도 교황 요한 23세가 선종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이라는 데에서 그런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본문 중에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테레사 수녀님의 예도 나와서 큰 스님의 종교를 아우르는 따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정휴 스님이 이전에 쓰셨던 여러 권의 저서들 중에서 가장 나중에 쓰신 책을 랜덤하우스 측의 요청으로 재간한 것인데, 불교 사진에 정평이 높은 백종하 사진 작가가 찍은 아름다운 선방과 사찰, 자연의 풍경사진들이 곁들여져 있고, 글과 사진이 매우 깔끔하게 편집되어 있는 덕분에 시각적으로 보기에도 좋은 점이 두드러지는 장점입니다.

 

이 책은 저처럼 불교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이 읽기에도 별다른 거부감이나 어려움없이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삶과 죽음, 깨우침과 해탈, 집착과 초탈 등의 명제들을 간명하게 풀어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읽은 불교 신자들보다는 오히려 불교에 관심은 있으나 어디에서부터 접근해야 할 지 모르는 비신자분들에게 훨씬 더 유용하고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hajin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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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프리 - 비트 경제와 공짜 가격이 만드는 혁명적 미래
크리스 앤더슨 지음, 정준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2008년에 읽었던 경제경영 분야의 책들 중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책이 마크 펜과 키니 잴리슨이 쓴 [ 마이크로트렌드 ] 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기 전에 먼저 보아야 할 책이 한 권 있는데, 그 책은 바로 [ 롱테일 경제학 ] 입니다. [ 마이크로 경제학 ] 은 [ 롱테일 경제학 ] 에서 도출된 개념을 보다 세부적으로 정리해서 체계화시켜 놓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IT 전문 잡지인 < 와이어드 > 의 편집장인 크리스 앤더슨이 2006년에 자신의 첫 저술로 발표한 [ 롱테일 경제학 ] 은 생산되는 상품의 전체 종류 수보다 상품을 진열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협소하고 한정되어 있음에 따라 히트 상품 중심으로 판매 구조가 형성되는 80/20 법칙이 대세이던 이전의 오프라인 중심 시장과는 달리, 진열 공간이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고 진열에 따른 비용도 오프라인과 비교하면 거의 공짜에 가깝게 저렴한 인터넷의 세상에서는 수요 곡선의 꼬리 부분에서 매우 길고 다양한 소수-소량 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습니다.
 

앤더슨이 [ 롱테일 경제학 ] 이후 3년 만에 새롭게 발표한 그의 두 번째 책 [ 프리 ; Free ] 는 그가 [ 롱테일 경제학 ] 에서 발견해 낸 온라인 공간의 시장 경제 이론을 보다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제목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공짜’에 관한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 우리 주변에서 가장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 바로 ‘공짜’라는 현상입니다. 100년에 가까운 나이를 자랑하고 역대 어떤 정권도 문을 닫지 못했던 거대 신문사들을 현재 휘청거리도록 되흔들고 있는 것은 바로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공짜로 나누어 주는 무료 신문(무가지)들이고, 유료로 판매되는 음악 잡지들이 거의 대부분 폐간된 공간을 대신 메우고 있는 것도 음반점에서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무가 잡지들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터넷 공간에서 무료로 뿌려지고 있는 각종 상품 쿠폰들도 바로 이 공짜 상품의 전형적인 예이죠.
 


그런데 모든 것이 돈과 관계되고 자본과 경제 논리로만 움직이는 첨단 산업 사회에서 어떻게해서 이런 무료라는 경제학의 기본 원칙에 상반되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그 범위가 점차 더 넓어져 갈까요?
 

앤더슨은 이러한 현상을 바로 롱테일 경제학에서 이야기했던 진열 공간과 저장 공간이 거의 무한정이고 그에 따른 소요 비용도 0에 가까운 온라인 경제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기존의 물질 세계의 경제를 ‘원자 경제’라고 하고 디지틀 시대의 경제를 ‘비트 경제’라고 구분한 후, 제품이 처음 발표된 후 가격이 상당히 천천히 낮아지거나 혹은 오히려 더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 원자 경제와는 달리, 비트 경제에서는 일단 소프트웨어화가 되고 나면 그 상품의 원가와 가격은 거의 0에 가까와지는 특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 까닭은 비트 세계에서는 프로세서와 대역폭, 그리고 저장 장치가 기술적 발달에 힘입어 급격하게 빠른 속도로 비용이 낮아지기 때문이라고 하며, 무어의 법칙에 따른다면 인터넷 세상의 순물가하락률은 매년 50% 이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앤더슨은 이러한 공짜 경제가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초창기부터 있어왔다며, 공짜 경제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더불어 공짜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심리학적인 고찰도 덧붙이며, 과거에 이러한 공짜 전략이 어떠한 경제적 성공들을 거두어 왔는지의 실제 예를 다양하게 들어 보여줍니다.
 

그리고 비트 경제에서 공짜는 과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보편화, 일상화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공짜 상품과 가격이 경쟁자로 등장할 상황에 대비하거나 자신의 상품을 공짜로 제공하는 전략을 시행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여러가지 공짜 경제의 유형과 전략들, 그리고 수익 구조들을 제시하고 하나씩 검토해 나갑니다.
 

현재 세계 최고의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가 공짜 전략을 내세운 리눅스와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결국 시장의 상당 부분을 내준 예와 공짜라는 전략만으로 세계 최대 기업 중 하나가 되었으며 현재도 꾸준히 공짜 아이템들을 개발해 제공하고 있는 구글을 대표적인 예로 들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앤더슨은 디지틀 세상에서 공짜라는 전략 하나만으로는 주목은 받을 수 있겠지만, 사업체를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을 만큼의 수익 구조를 창출해 내거나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공짜를 단순한 공짜 소모품으로 낭비하지 않고 공짜의 댓가로 얻어낼 수 있는 디지틀 세계의 중요한 자본으로 ‘관심’과 ‘명성’을 들며, 바로 이 ‘관심’과 ‘명성’을 토대로 수익 구조를 창출해 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리적, 공간적 한계가 명확하고 그 한계 비용이 갈수록 높아져 가는 ‘빈곤’의 토대 위에서 출발한 원자 경제의 세계와는 달리, 거의 무한대의 공간이 펼쳐져 있는 ‘풍요’라는 전혀 다른 토대 위에서 시작된 비트 경제의 디지틀 세계에서는 과거와는 다른 관점의 경제적 마인드를 가져야 하며, 재화를 공짜로 제공하는 대신 얻을 수 있는 관심과 명성이라는 자본을 어떻게 수익으로 연결시킬 수 있느냐가 앞으로 디지틀 세계에서 사업을 하거나 디지틀 세계와 경합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진 커다란 화두라는 사실을 공짜 경제를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측면들과 현실의 성공과 실패 예들, 그리고 공짜 현상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저자의 반론 등으로 다채롭게 채워진 이 책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공짜 경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들어갈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 줍니다.
 

hajin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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