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행복해지지 않는가 - 서울대 이정전 교수의 한국 경제에 대한 55가지 철학적 통찰
이정전 지음 / 토네이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대선이 끝난 후 유독 눈길이 가는 기사가 하나 있다. 90%라는 엄청난 투표율을 기록한 50대에 관한 에피소드다.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베이비붐세대의 특별한 선거철학을 소개하며 한때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그들이 왜 갑자기 보수로 돌아섰는가에 특별한 메시지를 전했다. 대한민국 50대는 변화보단 부동산 가격을 선택했다. 한편으론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씁쓸한 마음이 앞선다. 대한민국 부동산 거품을 일으킨 이들이 누군가? 자본주의 논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들이 자본주의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배고픈 자만이 배고픈 고통을 알 수 있다던데 그들이 배고픈 사회의 일원은 아닐 것이다. 부족분에 대한 욕망은 탐욕일 뿐이다. 한때 기득권 반대를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50대는 한국사회 새로운 기득권이 되고 있다.

 

세계를 주름잡는 이들은 경제학자다. 정치가 앞선 미국 역시 경제전문가의 입김에 의해 새판을 짜야할 정도로 세계사회는 경제를 가장 시급한 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끝은 있는지에 대해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리지 않는다. 영원한 이념이나 이상이 있을 수 있을까? 경제전문가들은 마치 그들이 세상의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과연 그들의 예언이 한번이라도 제대로 맞은 적이 있었던가? 수천 명의 경제학박사가 포진되어있는 미국경제가 서브프라임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면 후속조치에 대한 일반인의 믿음을 곤고히 하는 전략에 미래를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제학은 인간의 행복추구를 위해 만들어진 사회과학의 일부분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이를 통한 시장경제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가치 있는 교환수단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맞다. 그들의 이론은 완벽하리만치 훌륭하다. 하지만 왜 자꾸 그들의 이론이 제멋대로 빗나가는 것일까? 거기엔 완전시장이라는 함정과 완벽하게 합리적인 인간의 사유라는 망상, 그리고 전혀 동일시될 수 없는 지불능력이 배제되어있다. 처음부터 경제학적 명제는 완벽한 사회구조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그들의 바람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으니 그들이 신성시하는 효율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현실과 교과서는 완전히 다르다.

 

경제전문가들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을 빈부의 격차라 말한다. 실제로 정부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해결하기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노력한 만큼 칭찬을 받는 일이 드물다. 이는 정책의 대부분이 실질적이라기보다 선심성 혹은 일회성에 불과한 땜방질이기 때문에 예산낭비만을 초래한 결과다. 대기업이 중심이 된 마트와 소시민이 살아가는 재래시장을 비교해보자. 어떤 전문가도 재래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전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는 변화된 사회적 환경을 무시한 결과다. 바뀐 사회적 시스템을 재조절하는 방법이외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문제는 모든 경제적 상황이 상대적이라는데 있다. 하나를 선택하면 10가지의 문제가 터지는데 이를 막을 방법이 전무하니 사회갈등이 빠르게 증폭되는 것이다.

 

우린 지금 행복한가? 소득2만 불 시대를 넘어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지금, 한국사회는 진정한 행복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가?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경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다. 돈 만큼 상대적인 물건이 없지만 이를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해 자신을 올인하는 사고와 행동이 우리의 모든 의식을 빼앗아 버렸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생계 이상의 물질을 축적하면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돈이 쌓인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더욱 큰 행복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 배상은 가난한 이들의 성공신화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다. 아마도 경제학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 것 같다. 효율에 대한 재발견이다.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능력이 아니라 행복을 충족시켜주는 능력으로 말이다. 경제에 대한 55가지의 뛰어난 철학적 통찰이 돋보이는 이정진 교수의 우리는 왜 행복해지지 않는가?’ 경제학적 이해관계를 넘어 세상을 바로볼 수 있는 특별한 책으로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임용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민족이나 국가를 패망하게 만든 요인은 무수히 많지만 그중 특출난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국수주의. 안으로 걸어 잠그고 밖으로 닫은 쇄국의 문은 항상 패망의 지름길이었다. 무엇보다 5천년이란 짧지 않은 한반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혹자는 한민족을 단일민족이라 자랑하지만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민족은 크고 작은 수백 차례의 전쟁을 통해 다민족으로 변천되었다. 그럼에도 그토록 굳건히 폐쇄정책을 고수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역사에 만일이란 가정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지만 단 한번이라도 속칭 내부권력을 벗어 던지고 외부로 시선을 향했더라면 한반도의 역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우린 역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들이 너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조선사회에 대한 실상이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통치방법은 우민화정책이었다. 똑똑한 이들이 너무 많아도 안 되고 부족해도 안 되는 적당한 관료와 이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이념, 그리고 대다수의 다루기 쉽고 가난한 백성들이 존재하면 된다. 세습체계, 이보다 더 안정적이고 환상적인 왕권강화 정책이 있을까? 태어나자마자 왕이 되고 고위관료의 길이 열린다면 굳이 조직사회를 재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얼은 그 가운데 태어난 지독한 운명을 가진 이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얼제도가 세종대왕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서얼은 말 그대로 서얼일 뿐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자질이 있어도 입신은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유독 18세기 한양에 박제가를 비롯한 이덕무, 유득공등 서얼 천재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시와 술로서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문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중국에까지 명성이 자자 했다고 한. 글깨나 읽는다는 양반들의 중화사상이 극에 달한 시절이라 서얼들은 더욱 시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외모까지 왜소했던 박제가는 모진 성격 때문에 더욱 심란하고 거친 젊은 시절보내게 된.

 

침울한 인생을 거닐던 서얼들에게 한 줄기의 광명이 보인 것이 정조의 서얼 철폐제도였다. 박제가는 즉시 정조의 눈에 띄었다. 의심 많았던 영조 덕분에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는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관료들에 대적하기 위해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박제가의 기대와는 달리 서얼 철폐는 정조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박제가를 비롯한 서얼들에겐 빠른 출셋길이 열렸지만 그들이 정무에 간여할 정도의 신분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왕을 중심으로 한 견제 내지는 균형을 계산에 두었다. 하지만 박제가를 중심으로 한 규장각 학사들은 운명을 바꿀만한 역사적 개가를 마련한다.

 

박제가는 정조의 신임덕분에 조선 관료들이 오랑캐라 얕잡아 보았던 청의 수도 북경을 방문한다. 북경은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서구문화와 동양문화의 교접은 박제가 일행의 근시안적 사고를 단박에 엎어버렸다. 박제가는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이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 일상적인 믿음에 대한 의문은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이덕무나 유득공이 북경의 일상이나 세세한 여행일지에 관심을 가졌다면 박제가가 바라본 북경은 근원적으로부터의 변화였다.

 

그 중 하나가 조선이 주창하는 농본사회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당시 조선은 농업을 최고의 기치로 여기며 상업을 극히 천대했다. 백성의 대다수가 농부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였으나 문제는 포괄적인 과정과 선택이 여전히 후진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충분히 실용적인 농지계량법을 통해 실 이익을 늘릴 수 있었으나 관료들의 관심은 농민의 우민화, , 부자가 되안 되는 것이었다. 개인의 자산획득은 복잡한 사회를 만든다. 일견 기득권을 고민한 관료들에게 변화 없는 조선사회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공식이었다. 모든 상황이 오직 양반의 집권만을 위해 규정된 사회, 만에 하나라도 이를 어기면 즉시 탄핵되는 사회, 박제가는 북경에 다녀올수록 자신의 한계를 더욱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다.

 

현 시대를 18세기 조선의 시대적 상황과 비교한다면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한국은 그 어떤 국가보다 개방적이고 다민족 화되었으며 어떤 민족보다 빠르게 지구촌 동일화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한국의 발전을 기적이라 말한다. 300전 북경을 방문했던 박제가가 21세기 한국을 바라본다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박제가를 재조명해야할 이유는 너무도 많다. 그 중 하나가 그의 독특한 시각이다. 우린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조그만 변화에 익숙한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조선이 현재와 다르지 않는 건 욕망의 집합체라는 사실뿐이다. 서얼 출신으로 조선사회의 밑바닥을 끄집어낸 박제가의 의기, 과연 현 시대에도 그럴만한 용기를 가진 관료가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말의 심리학 - CIA 거짓말 수사 베테랑이 전수하는 거짓말 간파하는 법
필립 휴스턴 외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선후보자들의 TV 토론만큼 극적인 프로그램도 흔치않다. 정책적 비교에 앞서 후보자들의 인간적인 면면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진실여부를 가늠한다. 정책적 비교야 언제든 뒤집을 수 있지만 진실은 마음 깊이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후보자들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하지만 정당정치는 예외다. 온갖 감언이설과 부정적인 말로 상대를 비판한다. 도대체 어떤 주장이 맞는 것일까? 스스로 진실이라 말하지만 어느 것 하나 믿기 어렵다. 정치가 어렵다는 건 정치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신뢰와 믿음이 존재하지 않아서 어려운 것은 아닐까?

 

그런데 토론회 후보자들이 행동을 보고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면, 혹 행동과학을 통해 그들의 일거수를 분석해 보고해놓은 자료가 있다면 유권자들의 선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행동 연구가 이미 체계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기업들은 면접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상자의 사고와 행동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경찰등 수사기관은 범인을 잡기위해 탁월한 거짓말 분석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거짓말의 심리학'은 전현직 CIA 보안담당자들의 거짓말 탐지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거짓말이란 주제가 워낙 일상화되어 다소 마음이 불편하지만 사회가 발전한 만큼 거짓말 역시 진화를 거듭해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거짓말하는 자신을 직접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한 거짓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 것일까? 너무도 쉽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거짓말은 상상이상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타인의 거짓말을 파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거짓말 탐지법은 정보의 선택에 따른 전체적 행동 분석에 가깝다. 하지만 정보가 많을수록 상대의 거짓말을 파악하기 어렵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논리적이지 않다. 거짓말은 분명한 징후가 나타나며 보안담당자들은 첫 번째 질문에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상대의 행동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알아내기 위해선 행동이 자극을 받고 최초 5초이내를 주목한다. 인간의 뇌는 5초가 지나면 스토리를 쓰기 시작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거짓말을 탐지하기 위해선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사용하는 곱자모드를 훈련하는 게 좋다. 또 다른 징후는 5초이내에 발생하는 언어, 비언어적 행동이다. 거짓행동의 클러스터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는데 최고한 두 개 이상의 클러스터가 보이면 거짓말 징후가 포착된다고 한다.

 

가장 교묘한 거짓말은 무엇일까? 어떤 포장이 그럴싸할까? 설득력 있는 거짓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표현 말이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대답은 예, 아니오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은 다양한 징후를 나타내는데 상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설득력은 담당자의 편견과 쉽게 동화되어 수사의 방향을 흩뜨린다. 아마도 범죄수사에 가장 어려운 항목이 자신을 설득하려는 거짓말 속의 진실일 것이다. 저자는 거짓말에 관한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동화되지 말고 리드하라는 이야기다.

 

우린 매 시간 만남을 통해 상대의 진실을 알기위해 고민한다. 그가 지닌 의도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솔직하면 좋을 텐데 이는 영원히 풀기 어려운 과제로 남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의중에 속지 않고 현명하게 처신하는 방법뿐이다. 거짓말은 초기단계부터 다양한 징후가 나타난다. 모든 이들을 직접적으로 면담할 순 없지만 최소한 그들의 행동을 통해 거짓 징후를 포착할 수 있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까? 속기 쉽고 속이기 쉬운 세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CIA 베테랑이 전하는 거짓말 징후들, 그 노하우를 파헤쳐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독교의 거짓말 - 교회가 가르쳐주지 않는 기독교의 불편한 진실
지윤민 지음 / 유리창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교가 국가의 이념이 될 수 없는 것은 종교적 가치가 너무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종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고 있는 이슬람국가들을 보더라도 이들의 사고와 생각 그리고 행동이 쉽게 상대국과 어울릴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원리주의자들과의 충돌이다. 입으로만 외치는 평화, 과연 이들에게 평등한 사회라는 개념이 가능하기나 한 것 일까?

 

한국사회 기독교의 타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면세, 엄청난 기득권, 천문학적인 건축비용,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배경이 부족했음일까? 이젠 빠르게 가족세습을 서두르고 있으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 마치 중세유럽의 가부정적 왕족이 연상된다. 하늘높이 솟아있는 십자가아래 놓인 멋진 고딕 건물 안에서 도대체 그들은 어떤 종교적 행위를 추구하는 것일까? 솔직히 두렵기까지 하다. 한국사회를 짓누르는 대부분의 경제계인들이 이들과의 관계를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엄청난 수의 교인이 곧 정통성을 보장하고 이들을 통해 정치적 이해관계가 성립된다. 흔히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의 중세를 암흑기라 하는데 과연 그 후 1000년과 지금의 한국 기독교가 다른 부분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교회한번 다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교인들은 뛰어난 전도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린 아주 어렸을 적부터 교회를 접한다. 싫든 좋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입식 종교관을 강요받는다. 유일신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선택일 뿐, 믿음은 곧 진리요 믿지 않으면 불신인지라 불편한 마음은 항상 교회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성악설이든, 성선설이든 인간이 어떻게 한쪽면만 가지고 태어날 수 있을까?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신에 대한 성숙이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종교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로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코 기독교를 그리고 기독교인을 폄하하거나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떤 믿음을 갖던 개인의 자유의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종교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정통이 무엇이고 이단이 무엇이란 말인가? 교인들은 성경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누구도 성경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성경을 의심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아는 성경이 진정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따라야겠지만 어느 시기에 정치인들의 편의에 의해 각색되고 편집되었다면,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토록 철썩 같이 믿었던 말씀들의 진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기독교의 불편한 진실은 성경의 내용과는 달리 교회에서 행해지는 불편한 관행들에 관한 보고서다. 복음서마다 다른 내용들, 뭔가 꾸민 것 같은 이야기들, 구약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예수의 증언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화에 따른 역사적 증언들이 디테일하게 기록되어있다. 저자는 스스로를 초기기독교의 근본원리를 파헤치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는 거대한 기득권과의 싸움을 선택했다. 스스로가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 될지는 모르지만 박스에 갇힌 자신이 탈출할 유일한 돌파구를 마련한 셈이다.

 

한국교회 목사들이 지닌 설교의 특징은 철저히 문자주의다. 앞뒤의 문맥이나 이해가 아닌 문자를 따로 떼어내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것인지, 진정으로 모르는 것인지 교회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고 하느님과 예수의 말씀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전도가 그리 어렵지마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신을 낮추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한다. 하지만 약자 앞에서 더욱 높아져만 가는 한국교회의 현실,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문제보다. 종교적 근원에 대한 이해와 고찰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저자는 결코 예수를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선택한 기독교의 근원에 목이 마를 뿐이었고 스스로 우물을 찾고 있을 뿐이다. 누구 이러한 고행을 자행하겠는가? 스스로에 대한 경외와 진정한 믿음이 그의 마음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간신들은 어떻게 정치를 농락하는가?
김영수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가 간신이고 누가 충신일까? 정치사를 주름잡았던 수많은 권력자들을 단번에 간신과 충신으로 구분 짓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하지만 역사마저 등을 돌린 이들이 있다. 역사는 그들이 자행했던 권력찬탈에 의외로 관대하다. 누가 제왕이 되었든 백성들은 로또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역사가 증언하는 간신들은 지나칠 정도의 권력욕망과 한번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처절한 살육을 자행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이들이 그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했고 심지어 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도 무능한 황제는 간신들에게 더할나위없는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현재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간신의 역할, 그들이 존재했기에 시대가 변화했을까? 그렇다면 그토록 수많은 사례를 남겼지만 여전히 간신들이 들끓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 비정할 정도로 비참한 말로를 남긴 중국고대사의 간신들,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무엇일까?

 

중국 고대사를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간신이 남송시대의 진회다. 600년이 지난 후 그의 자손들마저 부끄러워 할 정도라니 그가 중국인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진회는 자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간신으로서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다. 난세를 틈타 권력의 틈바구니에 끼어든 것이나 수많은 우국지사를 헤치고 적에 투항하여 목숨을 보존한 일을 보면 그가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해왔는지가 분명해진다. 문제는 그의 간신 횡보가 중국인이 우상으로 여겼던 악비 장군을 해했다는데 있다. 조선에 이순신이 있다면 송엔 악비가 있었다. 패망해가는 국가를 몸으로 막았던 악비. 진회는 적의 첩자가 되어 왕의 비위를 맞추며 송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악비를 죽이고 금과의 회의를 대가로 그가 얻었던 권력은 후세인들의 원망뿐이었다. 무능한 국왕, 그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했던 진회,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진회는 악비 사당을 향해 처절한 참회를 하고 있다.

 

간신과 충신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당대의 충신도 한순간에 간신이 되고 간신으로 멸족을 당했지만 충신으로 복권되기도 한다. 그렇고 보면 간신과 충신을 나누는 기준은 후대의 평가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당대를 주름잡는 충신들도 있지만 이들이 자신의 영역을 펼쳐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스스로의 평가를 후대에 맡기는 것을 선택한다. 당대엔 선택이 불가능한 것일? 올바른 사견이나 판단을 보류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혹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아니면 진정으로 역사의 판단을 믿는 것일까? 모난 돌이 정에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정치가 어지러운 건 분명 사익을 추구하려는 간신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건 입과 귀를 막은 채 권력만을 추종하는 방관자들의 복지부동이다.

 

고대사를 읽다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스토리다. 너무 각박해 생존조차 불투명한 시대, 대부분의 영웅들은 특별한 지기를 통해 난세를 극복한다. 서민들은 처지가 비슷한 이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정치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고행 길을 같이 걸어본 사람들은 찐한 동료애를 나눈다. 하지만 권력은 나눌 수 없다. 고생은 함께하지만 권력은 유한하다. 때문에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유아독존을 꿈꾼다. 그들에게 서민과 백성은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기위한 최소한의 도구일 뿐이. 역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한다. 한명의 권력자와 소수의 피해자 그리고 대다수의 복종자. 그럼에도 우린 이와 같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간신들은 어떻게 정치를 농락하는가?’ 태어나면서 간신이라고 쓰인 사람은 없다. 간신은 분명 시대를 명확히 파악하며 최선의 처신에 성공한 이들이다. 문제는 그들의 욕망이 너무 개인적이고 독점적이어서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롭게 만든다는데 있다. 권력의 독점화가 당연성을 만들듯이 세상은 그들의 발아래 놓여있다. 간신들이 득실거리는 사회는 군주의 영향력이 제로다. 무능한 군주를 둔 백성들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나 해 보았을까? 정치인들은 왜 스스로를 유능하다고만 생각할까? 혹 자신이 처신에 능한 간신이라고 생각해보진 않았을까?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 그들이 생각하는 간신과 충신은 무엇인지, 혹 모른다면 중국고대사의 간신들을 눈여겨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