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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임용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민족이나 국가를 패망하게 만든 요인은 무수히 많지만 그중 특출난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국수주의’다. 안으로 걸어 잠그고 밖으로 닫은 쇄국의 문은 항상 패망의 지름길이었다. 무엇보다 5천년이란 짧지 않은 한반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혹자는 한민족을 단일민족이라 자랑하지만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민족은 크고 작은 수백 차례의 전쟁을 통해 다민족으로 변천되었다. 그럼에도 그토록 굳건히 폐쇄정책을 고수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역사에 만일이란 가정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지만 단 한번이라도 속칭 내부권력을 벗어 던지고 외부로 시선을 향했더라면 한반도의 역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우린 역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들이 너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조선사회에 대한 실상이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통치방법은 우민화정책이었다. 똑똑한 이들이 너무 많아도 안 되고 부족해도 안 되는 적당한 관료와 이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이념, 그리고 대다수의 다루기 쉽고 가난한 백성들이 존재하면 된다. 세습체계, 이보다 더 안정적이고 환상적인 왕권강화 정책이 있을까? 태어나자마자 왕이 되고 고위관료의 길이 열린다면 굳이 조직사회를 재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얼은 그 가운데 태어난 지독한 운명을 가진 이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얼제도가 세종대왕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서얼은 말 그대로 서얼일 뿐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자질이 있어도 입신은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유독 18세기 한양에 박제가를 비롯한 이덕무, 유득공등 서얼 천재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시와 술로서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문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중국에까지 명성이 자자 했다고 한다. 글깨나 읽는다는 양반들의 중화사상이 극에 달한 시절이라 서얼들은 더욱 시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외모까지 왜소했던 박제가는 모진 성격 때문에 더욱 심란하고 거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침울한 인생을 거닐던 서얼들에게 한 줄기의 광명이 보인 것이 정조의 서얼 철폐제도였다. 박제가는 즉시 정조의 눈에 띄었다. 의심 많았던 영조 덕분에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는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관료들에 대적하기 위해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박제가의 기대와는 달리 서얼 철폐는 정조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박제가를 비롯한 서얼들에겐 빠른 출셋길이 열렸지만 그들이 정무에 간여할 정도의 신분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왕을 중심으로 한 견제 내지는 균형을 계산에 두었다. 하지만 박제가를 중심으로 한 규장각 학사들은 운명을 바꿀만한 역사적 개가를 마련한다.
박제가는 정조의 신임덕분에 조선 관료들이 오랑캐라 얕잡아 보았던 청의 수도 북경을 방문한다. 북경은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서구문화와 동양문화의 교접은 박제가 일행의 근시안적 사고를 단박에 엎어버렸다. 박제가는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이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상적인 믿음에 대한 의문은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이덕무나 유득공이 북경의 일상이나 세세한 여행일지에 관심을 가졌다면 박제가가 바라본 북경은 근원적으로부터의 변화였다.
그 중 하나가 조선이 주창하는 농본사회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당시 조선은 농업을 최고의 기치로 여기며 상업을 극히 천대했다. 백성의 대다수가 농부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였으나 문제는 포괄적인 과정과 선택이 여전히 후진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충분히 실용적인 농지계량법을 통해 실 이익을 늘릴 수 있었으나 관료들의 관심은 농민의 우민화, 즉,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개인의 자산획득은 복잡한 사회를 만든다. 일견 기득권을 고민한 관료들에게 변화 없는 조선사회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공식이었다. 모든 상황이 오직 양반의 집권만을 위해 규정된 사회, 만에 하나라도 이를 어기면 즉시 탄핵되는 사회, 박제가는 북경에 다녀올수록 자신의 한계를 더욱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다.
현 시대를 18세기 조선의 시대적 상황과 비교한다면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한국은 그 어떤 국가보다 개방적이고 다민족 화되었으며 어떤 민족보다 빠르게 지구촌 동일화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한국의 발전을 기적이라 말한다. 300년 전 북경을 방문했던 박제가가 21세기 한국을 바라본다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박제가를 재조명해야할 이유는 너무도 많다. 그 중 하나가 그의 독특한 시각이다. 우린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조그만 변화에 익숙한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조선이 현재와 다르지 않는 건 욕망의 집합체라는 사실뿐이다. 서얼 출신으로 조선사회의 밑바닥을 끄집어낸 박제가의 의기, 과연 현 시대에도 그럴만한 용기를 가진 관료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