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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주거 문제로 골몰하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다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그 유명한 문구가 내 눈에는 신기하게도 ‘인간은 노력하는 한 이사한다’로 읽히는 것이 아닌가. 주거 문제가 은연중 내 삶에 중요한 비중으로 다가와 있었다.

 

 

투쟁 끝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건 서른여섯 살이 돼서다. 대출이 대부분이라 ‘내 집’이라 부르기도 무색하지만, 원금과 이자를 꼬박꼬박 내다보면 15년 만기상환일이 도래할 것이다. 나이 쉰은 넘어야 온전한 내 집을 갖게 되는 셈이다. 까마득하지만 그날은 온다.

 

 

‘내 집’ ‘대출’ ‘이자’ ‘만기상환’과 같은 세속의 용어를 언급하면서 투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투쟁을 논하려면 최소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 부정적 대상을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 등 거시적 담론쯤은 돼야 한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이상을 고민하면서 온몸을 던졌던 위인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라 여겼다.

    

 

투쟁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서른을 넘기면서부터다. 직장에 다니고, 가정을 이루고 육아를 하면서 투쟁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닌 걸 알게 됐다. 하루하루 밥벌이를 고민해야 하고 기약 없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며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야말로 투쟁의 현장이다.

    

 

결혼에 진입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결혼을 넘어서면 ‘육아 전쟁’이 찾아온다. 투쟁을 넘어 전쟁의 반열에까지 오른 게 육아의 세계다. 미세먼지의 습격 속에서 아이들과 속수무책으로 방구석에서 씨름해야 하는 눈물겨운 일상이야말로 단언컨대 투쟁의 단면이다.

 

평범한 사람의 미시적 일상도 투쟁이다.

    

내 집 마련으로 주거 투쟁은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녀교육, 자연과 주변 환경, 또 노년을 어떤 모습으로 보낼 것인가 하는 고민 등 넘어야 할 산이 또 보인다. 종착지인 줄로만 알았던 내 집 마련이 사실은 정류장에 불과했다. 주거 투쟁의 2막, 3막은 이어질 것이다.

    

 

* * *

 

10대 시절에서 30대 후반의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집을 하나씩 되돌아보면서

백지에 ‘주거 이력서’를 써내려갔다.

처음엔 단순히 주거 문제라 생각했지만, 어느덧 ‘주거=인생’이었다.

집은 내 희(喜), 로(怒), 애(哀), 락(樂)과 묵묵히 함께해오고 있었다.

 

삶의 과정이 ‘주거 투쟁’의 연속이었음을 깨닫는다.

인생의 시기마다 이사의 이유와 지향점이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40대가 돼도 이 투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지금까지, 또 앞으로 전개될 ‘주거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 위 내용은 <나의 주거 투쟁>(김동하 지음, 궁리 펴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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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독립했다. 대학 입학 후 처음 경험한 주거 형태는 ‘하숙’이었다. 2000년, 당시 내가 살았던 하숙집 가격은 보증금 없이 30만 원이었다. 싸다고 해야 하나, 비싸다고 해야 하나. 이불 두 개 정도 깔 크기의 비교적 넉넉한 면적이었다. 서울에서 그렇게 큰 방, 게다가 아침, 저녁 식사까지 제공되는 하숙집이 30만 원밖에 안 한다고?

 


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 2인 1실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 45만 원은 족히 받아도 될 만한 정도의 방이었지만 둘이 살았기에 가격이 내려갔다.

 


하숙을 택했던 이유는 부모님 의지였다. 자취와 달리 하숙은 식사가 제공되니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셨나 보다.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했던 아들 혼자 서울에 보내놓고 얼마나 걱정이 되셨을까.

 


한 달에 한 번 삼겹살이 별미로 제공되는 하숙집에서 나는 대학 1년을 보냈다. 부모님의 의지가 반영된 주거는 거기까지였다. 서울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될 무렵부터 나는 내 의지대로 주거 형태를 결정하기 시작했다.

 


자취에서 더부살이까지, 온갖 주거 형태를 이때 경험했다.

 


자취, 그냥 월세, 우편물 수령이 어려운 다가구주택, 공동 화장실 옆 미닫이 방, 후배 집에 얹혀살기, 선배 원룸에 얹혀살기, 독신자 간부 숙소 등.


  

대학 1학년 시절을 보낸 하숙집은 2인 1실이었다. 방을 같이 사용하는 동갑내기 하숙생은 알던 사이가 아니었다. 둘 모두 예민하지 않은 성격이었지만 타인과의 동거는 기본적으로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방에서 속옷을 갈아입기 민망하다. 혼자 살면 창문 단속만 잘 하면 속옷을 입든 말든, 퍼질러 누워 있든 코를 후비든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만물의 영장인 한 인격체와 방을 공유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체면 해소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느니 나는 그냥 자유롭게 혼자가 되기를 택했다.

 


반지하에서 지내는 생활이었지만, 이상만큼은 하늘을 날아다녔다. 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의미 있는 삶을 꿈꿨다. 대학을 졸업하고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저마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하나, 결혼은 할 수 있을까 등의 질문은 일단 뒤로 제쳐놓았다. 어차피 한때 나그네로 살 인생, 안락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했다.

 


방랑하는 20대, 그 시절. 배는 고팠지만 이상은 맘껏 춤췄다….

 


 

6화에서 계속됩니다.

 

* 위 내용은 <나의 주거 투쟁>(김동하 지음, 궁리 펴냄)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나의 주거 투쟁>

김동하 지음 / 궁리 펴냄 / 2018년 6월 18일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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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을 끼고 있는 빌라는 만족스러웠다. 햇빛이 넉넉했다. 이사를 잘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빛이 잘 드는 조건만 만족스러운 게 아니었다. 창틈으로 투과되는 청량한 공기는 ‘관악산 공기청정기’를 돈도 안 내고 맘껏 사용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커가고 병설 유치원에 합격하면서,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겨났다.

유치원 등, 하원을 시켜야 할 텐데 걸어서 20분 거리,

더 큰 문제는 급경사를 오르락내리락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르락 내리락 반복해”(리샹, <회상>)라는 가사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이가 하나라면 어떻게든 급경사를 감당할 수 있겠지만, 세 살 된 둘째까지 데리고 유치원을 오가는 일이 만만찮았다. 엄마의 허벅지는 날로 튼튼해졌다. 결정적 문제는 무릎이었다.

 

 

아이를 안고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엄마의 무릎이 제대로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사를 다시 고민해야 했다. 지도를 또 펼쳤다. 유치원 반경 5~20분 거리가 후보지였다. 약간의 거리가 있더라도 지금 사는 집만큼의 급경사만 아니면 됐다. 신혼 반지하에서 처음 탈출했을 때 세웠던 ‘산 주변 공기 좋고 햇볕 잘 드는 곳’이라는 이사의 대원칙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유치원에 가까우면서도 산에 인접한 곳으로 후보군을 좁히고 나니 생각보다 몇 군데 되지 않았다. 최적의 후보지에 위치한 아파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한참 모자랐다. 과다한 대출을 피할 수 없었다.

전세를 알아보러 다녔다.

전세를 구해도 구해도 안 되던 어느 날,

‘차라리 매매로 돌아가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세금도 없는 무슨 매매?’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지만 매매가 가능한지 대출을 한번 알아나 보자 싶었다.

 

 

 

주택금융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부지런히 보금자리론 대출 한도를 계산했다. 당시 2016년 초 기준으로 계산해보니 대출 70%를 꽉 채우면 간당간당하게 매매할 수 있겠다 싶었다. 1년 반쯤 뒤에 단행된 2017년 ‘8․2 부동산 대책’이 만약 그때 시행됐더라면 나는 매매에 필요한 돈을 대출받는 것이 불가능해 전세를 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다주택자들, 강남의 집값을 잡는다고 세운 정책에 나와 같은 불가피한 이유로 매매를 알아봐야 하는 사람 역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생계형 매매’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책을 만들 때 모두를 만족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겠지만, 한 사람의 피해자라도 줄일 수 있도록 치밀한 대책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 살지도 않을 집을 두세 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주거는 돈이다.

 

반면 나 같은 사람에게 주거는 생활공간이자 생존 공간이다.

 

주거 공간을 제대로 확보하지 않으면 날마다 땡볕에 한 아이를 안고,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무릎이 나가도록 급경사를 오르내리며

유치원 등, 하원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거는 생활․생존 공간이다.

 

 

 

5화에서 계속됩니다.

 

* 위 내용은 <나의 주거 투쟁>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나의 주거 투쟁>

김동하 지음 / 궁리 펴냄 / 2018년 6월 18일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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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0만 원 반지하 전셋집에서 4년 반 동안 살면서 나름 절약했더니 제법 돈이 모였다. 돈이 배가 되니 선택지가 네 배 정도 넓어지는 것 같았다. 이 맛에 사람들이 돈벌이에 열중하나 보다.

 

주거에 있어 빛은 돈이다. 빛이 잘 드는 고층 아파트 전세, 매매 가격이 저층보다 비싸다. 빛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빛은 태양에서 출발해 광활하게 뻗어 ‘아낌없이 주는’ 속성을 지녔는데, 이를 대하는 인간의 마음은 이기적이다. 빛을 좀 더 받고자 조망권을 침해하면서까지 경쟁적으로 건물을 올리고, 일조권을 놓고 여기저기서 분쟁이 일어난다.

    

 

한참 인터넷 발품을 팔아 몇몇 후보지를 선정했고, 부동산을 통해 후보지 중 몇 군데를 방문해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 우리 기준, 즉 환경과 돈에 맞는 최적의 빌라 한 곳을 찾아냈다.

 

산 주변이라 해도 산으로의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가 주변에 있으면 배제했다. 산이 가까워도 해가 잘 들지 않는 빌라 저층이나 주택도 탈락이었다.

 

우리가 찾아낸 빌라는 뒤쪽으로 곧바로 산 진입로가 이어졌고, 앞쪽 창으로는 신림동 풍경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당히 고가 전세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싼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산과 가까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의미다. 높다는 말은 집까지 올라가는 경사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경사로를 오르내리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있었지만, 과감히 선택했다. 우리 부부가 정한 ‘공기 좋고 볕 잘 드는 곳’이라는 기준에 확실히 부합하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교통이 불편한 것은 내가 출퇴근에 좀 더 고생하면 될 일이다.

 

 

장마철에 곰팡이 스미는 눅눅한 곳에서 살다가, 이사한 곳은 아이들에게 넉넉한 빛과 맑은 공기, 집 주변에서 즐길 수 있는 흙 놀이를 맘껏 선물할 수 있는 집이었다. 창밖으로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풀과 꽃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또로로로로로로’ 하는 딱따구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주거 공간이 서울에 과연 몇 군데나 될까.

 

    

  

 

4화에서 계속됩니다.

 

* 위 내용은 <나의 주거 투쟁>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나의 주거 투쟁>

김동하 지음 / 궁리 펴냄 / 2018년 6월 18일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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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을 반지하에서 시작했지만 감사했다. 결혼 전에는 단칸방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부부다. 고시원과 자취, 하숙, 달동네와 단칸방 주택을 전전하고 가끔 누군가의 갖춰진 원룸에서 신세를 지면서도 20대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방 2개에 화장실, 부엌이 달린 다가구주택 반지하 신혼집이 우리에겐 과분했다.

    

 

원체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한 부부였기에 빛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라 해도 몸에 이상 징후가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주택이 옹기종기 밀집해 있는 데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집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이웃 간에 정도 생겼다. 서울인 듯 시골 같은 면이 있었다.

    

 

이런 장점에도 아이가 성장하면서 아쉬운 점이 하나둘 불거졌다. 태어나서 몇 년 간을 이 집에서 보낸 첫째 아이가 비염 탓에 날마다 잠을 설쳤다. 처음엔 어린아이에게 으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 생각했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가 커가면서 저절로 치료될 거라고 봤다.

    

 

그러나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날이 점점 잦아졌다. 어느 날부터 바퀴벌레가 하나둘 눈에 띄더니 전기압력밥솥에서 수십 마리의 바퀴 시체를 발견하기까지 했다.

 

 

비로소 우리가 살고 있는 주거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과 우리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깨닫게 됐다.

집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집 주변 환경은 더했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려운 다가구주택 밀집가였다.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반지하를 탈출해야 했다.

 

 

이사를 계획하면서 목표는 단 하나, ‘공기 좋고 햇볕 잘 드는 곳’. 사실 처음에는 서울에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만남이 우리 부부의 고정 관념을 깨주었다.

    

 

유아전문한의원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가 아이가 비염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본인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우리 아이는 아토피와 천식이 심해서 눈두덩이가 검붉어질 정도였는데

관악산을 끼고 있는 000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 완전히 나았어요.

비염은 치료보다 주거 환경이 중요해요.”

 

 

그날 밤, 우리 부부는 당장 포털 사이트에서 그 지역을 검색했다. 그러나 당장 그 아파트에 전세로 가기에는 무리였다. 돈이 부족했다. ‘플랜 B’를 가동해야 했다.

    

 

‘산 주변’을 찾으면 된다. 우리는 인터넷 포털 지도에서 로드뷰를 켜고 며칠 동안 서울에 있는 산 주변 빌라와 다가구주택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3화에서 계속됩니다.

 

* 위 내용은 <나의 주거 투쟁>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나의 주거 투쟁>

김동하 지음 / 궁리 펴냄 / 2018년 6월 18일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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