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은 쓰리지만 겉으론 조심조심 국보급 백자 달항아리를 다루듯, 경상우수사 배설의 동태와 심기를 관리하며 열두 척의 배를 '안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인수하는데 노심초사하는 충무공 이순신의 마음과 행보, 당면한 한반도 평화도 이처럼.. 쓰라린 칠천량해전 대패에서 명량해전의 달콤한 승리까지, 『난중일기』 <정유년Ⅰ>을 새롭게 읽었다. 4월 1일에 시작, 10월 8일까지. 한 번의 대패와 한 번의 대승을 포함하는 이날들의 기록이다. 두 해전은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극적인 전환점. 플롯의 초고급인 급반전이랄까? 마음이 분주하시면 후반부 인용만을 읽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필사 수준으로 입력한 깨알같은 인용과 정리에 보물이 숨어 있다는..<필자>  

‘상유십이(尙有十二)’, "지금 신에게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오니"는 『이충무공전서』 중 이분李芬의 「행록」이 그 출처다. 이충무공문서(전집)에서는 『난중일기』(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의 일들)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어쨌든 ‘장계’에서 충무공은 수군을 재건해야 하며, 그 길만이 또 한 차례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는 방법임을, 왕에게 읍소한다. 그는 이 장계를 언제 어디에서 쓴 것일까, 『난중일기』 <정유년Ⅰ>에서  작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언급하지 않는다. 충무공의 뜻대로 명량해전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데, 이 유명한 장계는 치열한 해전의 승리를 통해 스스로 결재했다고 할까. 그만큼 수군 재건과 응전에 관한 왕과 중신들의 의지는 흔들리고 있었다. 필자는 ‘열두 척의 배’가 충무공 자신에게, 조선 수군에, 그리고 조선에 어떤 의미인지를 텍스트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사실 이 글은 이어질 <서사시 『일리아스』 속 ‘열두 척의 배’들>에 대한 머리말에서 길어졌음을 밝힌다). 

 

‘상유십이(尙有十二)’, 치열한 해전의 승리를 통해 ‘스스로 결재한’ 장계
인터넷 사전 기록을 보자. "명량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척 이상을 격퇴한 해전이었."(백과) 12척이 아니라 13척이다. 그러나 일본 수군에 대해서는 '130척 이상'이라고 하여 의견의 분분함을 반영한다. 국어사전에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명량에서 왜선(倭船)을 쳐부순 싸움. 10여 척의 전선(戰船)으로 적 함대 133척을 맞아 싸워, 적국의 배 31척을 격파하여 크게 이겼다."고 이 전쟁을 정의한다. '10여 척'이라고 한 발 물러서면서, 적 함대는 '133척'이라고 명시한다. 사실 이미 관용구처럼 쓰는, '상유십이(尙有十二)'는 충무공이 직접 올린 장계에 따른 기록이니, 실제 전쟁에 투입된 전선이 12척이냐, 13척이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필자는 이 열두 척을 어떻게 충무공의 통제에 들어왔으며,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무너진 조선 수군을 충무공이 재건하는데, 어떻게 불씨 역할을 하는지를 살폈다. 거의 필사수준으로 입력하면서 해당 일기(<정유년Ⅰ>)를 읽었다. 소회를 직접 담고 있지는 않지만, 충무공이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를 인수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던 듯하다.

 

12척 혹은 13척이냐는 중요하지 않아, 배설로부터 인수과정이 녹록치 않아 

대한 압축·정리하고 필요시 주석을 인용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면(이라고 하면 그렇지만) 관계를 고려함에도 스크롤 압박이 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대 최대영화 관객1위(누적 관객수 177,615,152명)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명량>(2014)은 배경쯤으로 참고하는 것으로 하자, ‘무료상영’까지 들어간 <극한직업>의 누적관객수가 16,258,132명 (2019.03.24.,)이라는데, <명량>이 1위자리를 고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쨌든 <트로이>라는 영화가 고전 『일리아스』를 제대로 읽는데, 도움이 되면서도 걸림돌이 되듯, 『난중일기』만을 충실히 살핀 결과라는 것(훗날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을 다시 강조한다. (해당 월일은 모두 음력이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 조선의 지휘관 원균의 거북선 세 척과

판옥선 100여 선 침몰, 수군 2만여 명 궤멸, 원균 사망."
실패한 전투에 대한 기록, 칠천량해전의 결과다. 그날 원균이 죽지 않고 1601년까지 살아있었다던가 하는 기록 등, 이처럼 간명한 이 기록에도 이의제기는 많지만 왜군의 급습에 조선 수군이 순식간에 무너진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우선 좀 색다르게 접근해보자. 『난중일기』에는 이 전투를 전후로 한 '날씨'가 맨 앞에 적혀 있는데, 조선의 운명이면서 충무공의 울분과 분노를 담은 마음지도 같아, 정리하면서 놀랐다. 그 무렵 충무공은 칠천량(거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경남 합천과 산청 사이로 추정)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설욕하는 결정적인 해전은, 그날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인 9월 16일에 이루어진다. 명량해전이다.

 

칠천량해전 전후 충무공의 일기, 사변을 바라보는 저자의 ‘마음지도’ 같아
삶은 늘 전쟁이다. 그런데 당시 전쟁은 생활이었다. 전투 현장 부근의 날씨를 통해, 칠천량해전 전후의 사정을 되짚어본다. 당시 충무공은 이 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머물렀고, 걱정스럽게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므로 다음을 『난중일기』에서 추출한 당시의 <날씨와 생활>이라고 하자. 충무공은 하루도 밀리지 않고 일기를 썼다. 사실이다. 또한 날씨를 거짓으로 적지 않았다. 역시 사실이다.

 

<7월> [14일]맑음, [15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16일](칠천량 해전 당일)비가 오다 개다 하면서 끝내 흐리고 맑지 않았다. [17일]비가 간간이 내렸다, [18일]맑음, [19일]종일 비가 내렸다, [20일]종일 비가 내렸다. [21일]맑음, [22일]맑음, [23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24일]비가 계속 내려 그치지 않았다, [25일]늦게 갬. [26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27일]종일 비가 내렸다. [28일]비가 내렸다, [29일]비가 오다 개다 했다, 밤 내내 큰비가 왔다. <8월> [1일]큰비가 와서 물이 불었다. [2일]잠시 갰다. [3일]맑음.


공교롭게도 (다음에 살피는)  하루하루 그날의 맑거나 흐르거나 쾌청하거나 하는 날씨와 당시 전황(충무공이 파악한 것이 아니라)을 받아들이는 조선인의 마음이 꼭 닮았다. 더구나 충무공은 가끔 꿈을 기록하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꿈을 꾼다. 일종의 전조인데, 걱정하는 마음,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7월 7일: 꿈에 원균이 나타남. 즐거운 기색인데 그 징조를 잘 모르겠다.(10일도 안 되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다) *8월 2일: 잠시 갰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8월 3일: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날들의 날씨와 칠천량해전 패배(전황)가 쓰라인 조선인의 마음이 조응
위 날씨 기록과 해당 일을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이제 『난중일기』를 자세히 살펴보자. <정유년Ⅰ>편은 4월 1일에 시작하여, 10월 8일에 끝난다. 한 번의 대패와 한 번의 대승을 포함하고 있는 날들의 기록이다. 내용이 결코 길지 않으나 이제 상당수는 '날씨'는 빼고 그 중 필요한 대목만 따왔으며, 주석이나 필자의 설명인 괄호 안에 처리했다. 먼저 감옥에서 풀려나 임지로 가는(권율 도원수가 머무는 순천 부근으로) 과정을 살핀다. 생략한 날이 많다. 

 

<4월> [1일] "맑음. 옥문(獄門)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여종 집에 이르니.. [3일]맑음.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4일] 오산, [5일]선산(先山)(현재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의)을 찾아 선친의 산소에 참배, [13일]어머님 마중하려고 바닷가의 길로 가다가, 어머님 부고를 접함. [19일]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길을 떠남. [26일] 구례현 도착. <5월> [28일]하동현에 이름. <6월> [2일]단계(丹溪: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에서 점심, 삼가(三嘉: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의 관가에 숙박, [4일]삼가를 떠나 오리쯤에 갈림길을 만남(한 길은 고을로, 다른 한 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 십리쯤 더 가니 원수(권율)의 진이 보였다. [5일]점심을 먹고 도배를 함(당일 초계군수가 급히 찾아옴), [6일]잠자는 방을 다시 도배, 군관이 쉴 대청 두 칸을 만듦.

 

6월 4일 일기에 주목한다. '초계'는 지금의 경남 합천군 초계면으로, 최계 변씨(卞氏)들의 본향이다. 주석에 따르면, 충무공 집안은 3대가 초계 변씨와 결혼했다. 할머니는 변함의 딸이고, 어머니는 변수림의 딸이며, 누이도 변기에게 출가했다. 얼마 전에 작고한 어머님과 할머니의 고향이 지척에 있다. '삼가'를 지나서 만난 갈림길(삼거리)에서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엿본다. 도원수 권율이 머물고 있는 곳은 순천인데, 합천, 산청, 진주 등 인접한 당시의 지명과 실제 위치를 고증한 자료는 적지 않으리라. 충무공이 거처로 정한 곳이 거제 곧 칠천량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만 해두자.

 

초계는 다산에게 강진 같은 돗, 삼가를 지나 삼거리에서 충무공은 무슨 생각을..
또한, 이즈음부터 '도배'를 하고, 군관들이 머물 장소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아. '발령대기' 상태이지만 근무를 시작했다. 또한 다산 18년의 귀양 때에 외가(해남 윤씨)의 지원을 받았듯이, 임시 머무는 곳이지만 이곳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본향인 점, 덕분에 충무공이 고단한 심신을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된 듯하다. 이곳에 머물며, 권율의 종사관 등을 통해 전황을 살피고, 칠천량해전 직후까지 머문다.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전선의 어두운 소식이 들려온다. 주로 원균과 관련된 소식들이다.

 

<6월> [11일]한산도와 여러 곳에 갈 편지 열네 장을 씀. [12일]이른 아침에 종 경과 종 인을 한산도 진으로 보냄(수신인 중에는 경상 수사(배설), 녹도 만호(송영종), 거제 현령(안위) 등이 보임), [17일]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많이 말함. [19일]진에 이르러 원수와 황 종사관을 만남. '원수는 원균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데'(우려가 가득함), [25일]황 종사관이 와서 만나고는 해전에 관한 일을 많이 말하였다. [27일]늦게 황여일(황 종사관에 대한 호칭이 달라지고 있다)이 와서 만나 한참 동안 이야기함. <7월> [7일]꿈에 원균이 나타남. 즐거운 기색인데 그 징조를 잘 모르겠다. [10일]황 종사관(여일)이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14일]황 종사관은 사람을 보내, 전황이 담긴 첩보를 보내와 공유함. "7일 왜선 오백여 척이 부산을 드나들고, 9일 왜선 천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두모포에 표류하여 대었고, 일곱 척은 간 곳이 없었다.", 달려가 점호 중인 황 종사관을 만남. [15일]우리 수군 이십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음. [16일]저녁에 7월 4일~6일의 해전에 참여했다가 단신으로 살아온 사노에게 전쟁 소식을 생생하게 전해 들음(전투가 벌어진 당일에 10여 일 전의 전황을 참전자에게 듣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수군에 있었는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또다시 가망이 없을 것이다.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18일]칠천량 패배 소식을 접함. 해안지방을 살피러 가겠다고 원수와 상의하고,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름. [21일]노량에서 거제 현령(안위)와 영등포 만호(조계종) 등 여남은 명을 만나, 자세한 소식을 듣다. "경상 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앞서 '배설'에 대한 언급은 두 번. 이후 기록을 읽는데도 그의 등장에 주목한다.

<7월> [22일]맑음. 아침에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아마도 이때 에 12척의 배에 대한 얘기와 충무공의 당부가 있었을 것임. 후주는 1597년, <선조실록> 30년 7월 22일 기록 중 "경상우수사 배설과 옥포, 안골의 만호 등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많은 배들이 불에 타고 무수한 왜선은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고 소개한다.) [26일]정개산성 밑에 있는 송정 아래로 가서 황종사관 및 진주 목사와 함께 이야기했다(실질적인 대책회의로 보임. 도원수 권율의 뜻을 반영한) [29일]원수가 보낸 군사는 모두 말이 없고 활과 화살도 없어 쓸모가 없었다. 매우 한탄스러웠다. <8월> [2일]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3일]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4일]압록강원에 이르러 점심(압록은 보성강이 섬진강과 만나는 전남 곡성군 죽곡면 압록리), 오후에 고성고을 숙박. [6일]옥과 →[7일]곡성 강정(현 곡성 목사동면) →[8일]부유창(순천 주암면 창촌'을 거쳐 순천부 관사) →[9일]낙안→보성 조양창(보성면 조성리)까지 이동.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교서를 받은 이후(8월 3일) 충무공의 행보가 빨라진다, 우수영(전남 해남)으로 가면서 전투 준비를 하는 것. 무엇보다 12척의 전선을 인수하는 일이 급하다. 일단 보성군 조성면에 머무르며, 장계를 쓰고, 휘하의 장군들을 만나는 등 정비한다.

 

<8월> [12일]맑음. 장계의 초안을 잡았다. 그대로 묵었다. 거제 현령(안위)과 발포 만호(소계남)가 와서 만났다."(여기에서 '열두 척의 배' 관련 장계를 쓰기 시작, '삼도통제사'를 겸하는 직책을 수행 중이므로, 휘하의 장수들이 집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임) [13일]맑음. 거제 현령과 발포 만호가 와서 인사하고 돌아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5일]비가 계속 오가다 늦게 맑게 갰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8월 7일에 성첩한 공문이었다.(영의정 유성룡이 보냄, 곧바로 답장) [17일]맑음. 일찍 아침 식사 후에 곧장 장흥 백사정(白沙汀)에 이르렀다. 점심 후에 군영구미(軍營仇未)로 가니, 온 경내가 이미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백사정'은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로 추정, '군영구미'는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로 추정. 일설에 '군영구미'는 1457년 수군만호진을 설치했던 곳, 현재 보성군 회천면 진일리에 소재한 군학(群鶴)마을, '백사정'은 회천명 벽교리에 소재한 명교해수욕장 일대라고 함)
[18일]맑음. 회령포(會寧浦)에 갔더니, 수사 배설이 배 멀미를 핑계 대므로 만나지 않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충무공 이곳에서 배를 인수하여, 우수영으로 떠날 계획인 듯, '회령포'는 전남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이곳에서 열두 척의 배의 정비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칠천량 이후 한 달이 흘렀다. '회령포에서 시작된 열두척의 기적!'이라는 주제를 내거는 등 해마다 9~10월, 장흥 회진항에서는 관련 축제가 열린다, 작고한 이청준 작가, 작가 한강의 아버지로 젊은이들에게는 알려진 한승원 작가의 고향마을이다. 이청준 원작 소설과 영화 <천년학>의 배경이기도 하다)
[19일]맑음.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배설은 교서를 위하여 지영(祗迎)하여 절하지 않았다. 그 능멸하고 오만한 태도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그의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지영'은 공경하여 맞이한다는 뜻. 이날 비로소 충무공은 12척의 배를 인수한 것으로 보인다. 수사 배설의 머뭇거림이 심상치 않다. 왜 그러는 것일까? 차마 수하 장수를 욕보일 수는 없고, 그의 부하에게 곤장을 내리는 마음을 편찮아 보인다.)

 

회령포(장흥 회진)에서 한 달 만에 무사히 12척의 전선을 인수

이후 배설과 관련된 '부분' 위주로 살핀다. 전후 과정은 영화 <명량>를 떠올려도 좋고, 후반부는 오늘날 이름난 포구기행의 여행지들이기도 한데(낚시 프로그램에 얼마나 자주 나오나), 충무공이 항해한 동선에도 어떤 의미가 있다. 8월 27일, 해남 어란포에 머물 때다. 이미 12척의 배와 장수들이 이곳에 집결했고, 가끔 교전이 이루어진다.

 

<8월> [28일]맑음.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 않게 들어와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피하려고 하니, 경산 수사(배설)가 피하여 후퇴하려고 하였다. 나는 꼼짝 않고 있다가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지휘하며 뒤쫓게 하니, 적선들이 물러갔다. 갈두(葛頭)까지 쫓아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는 장도(獐島)에 옮겨 머물렀다. [29일]맑음. 아침에 벽파진(碧波津)으로 건너갔다.('벽파진'은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9월> [2일]맑음. 정자에 내려가 앉았는데, 포작 전세가 제주에서 와서 인사했다. 이날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벽파정은 최근에 복원되었다. 이렇게 충무공과 수사 배설과의 인연은 끝난다) [14일]맑았으나 북풍이 거세게 불었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서 말하기를(이 첩보에 따라, 먼저 우수영 부근으로 전령선을 보내 피란민들을 이동하게 한다) [15일]맑음. 밀물이 들었다. 여러 배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들어가 거기서 머물렀다. 밤에 꿈에 이상한 징조가 많았다. [16일]맑음.(명량해전 당일) ……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우리를 에워싸던 적선 서른 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고 했으니 물이 빠져 배를 대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건너편 포(浦)로 진을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당사도로 옮겨서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

 

해전 당일 도착한 ‘'당사도'는 전남 신안군 암태면 당사도(唐沙島)다. 8월 24일 회령포를 출발하여(마침내 수군의 지휘관으로 항해를 지휘한다), 해남 어란진에서 머물다가,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9월 15일 해전 하루 전에 해남 우수영으로 건너간다. 전투 준비가 벽파진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다만, 당일(9월 16일) 전투를 치르고, 곧장 신안군의 당사도까지 진을 물린다. 왜의 수군을 완파한 것은 아닐 것인데, 왜군들의 횡포(화풀이)는 오죽 했을까 싶다. 이후 <9월> [17일]여오을도(汝吾乙島:신안군 지도면 어의도) →[19일]칠산도(七山島:영광군 낙월면)→법성포 선창→홍룡곶(洪龍串:영광군 흥농읍 계마리), →[21일]고참도(古參島:부안군 위도면 위도) →[21일]고군산도(古群山島: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로 이동.

 

[해전 당일 신안군(당사도)까지 진을 물려, 왜군들의 횡포는 오죽 했을까?

이후 선유도에 며칠 머무르며, 대첩에 관한 장계를 작성하여 보낸다(27일). 10월 2일에는 아들 회가 고향으로 떠나고, 10월 3일 변산(邊山: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을 거쳐 법성포 선창에 이른다. 『난중일기』는 따로 요약할 것도 없이 길이도 짧고 문체도 간결하다. '난중(亂中)'인 상황에 쓴 일기이기에 그렇고, '9월 22일. 맑음'과 같이 날씨만 밝히고 끝맺은 날도 다수 있다. 이것을 '평화'라고 해야 할까? 병사들이 쉬어야 하고, 배들도 정비하고, 장계(보고서)도 써야 하니까, 특히, 9월 22일~25일, '맑음'이란 단어로 끝내는 일기에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많이 말하는 듯하다. 겨우 장례만 치르고(그것마저도 천행으로 '백의종군'의 길에서), 이후 그나마 고향 가까이(후방이긴 하지만) 항해한 데서는 아들 이순신의 죄책감과 회한이 느껴진다. 글머리에 인용한 충무공의 장계(이분의 「행록」)의 내용은 이러하다.

 

"임진년부터 5년, 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난중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유사시 보안 문제를 염두한 것처럼, 조심스럽다. 더구나 임금에게 보낸 장계를 일기에 수록할 수는 없는 일. '상유십이(尙有十二)'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 그리고 미신불사(微臣不死)다.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희망은 있다는 얘기다. 이제 비로소 영화 <명량>의 한 장면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저토록 몰염치한 임금한테 말입니까?"라고 재우쳐 묻는 아들 회에게 충무공은 대답한다.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쫓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임금이 아니고 말입니까?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잠시 고대 그리스로 가자. 펠론폰네소스전쟁 발발이 기정사실이 되었을 때,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 인들 앞에서 행한 연설이 있다. 그 유명한 전몰자를 위한 추도연설(전쟁사 Ⅱ권) 이전의 연설이다. 라케다이몬에서 온 마지막 사절단이 왔을 때다. 그들은 평화조약을 깬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는 명분을 쌓고 있다. 아테나이인들은 사절단을 물리고, 자기들끼리 대책을 논의하는데,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주목할 부분이 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은 집과 영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람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집과 영토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집과 영토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면, 여러분이 나가서 손수 여러분의 재산을 파괴함으로써 여러분이 재산 때문에 펠로폰네소스인들에게 복종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보여주라고 권하고 싶소."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 143장(5)

 

“집과 영토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집과 영토를 만든다.”

 

스파르테는 육군이 워낙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차하면 우리 자신을 섬 주민으로 여기고 "영토와 집은 포기하되" (우리 아테나이는 해군이 주력이므로) "바다와 도시는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겨우' 열두 척이 아니라 '천행으로' 남은 '열두 척'의 배를 오롯이 인수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충무공의 마음을 읽었다. 그러나 어찌 배의 많고 적음이 문제이겠나. 누가 어떻게 지휘하느냐에 따라, 곧 전쟁의 승패는 사람의 문제임을 충무공의 장계는 은근히 주장하고 있으며, ‘압박’하고 있다. '열두 척의 전선'을 인수하기까지 충무공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신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경남우수사 근황과 심기를 살핀다. 정유년 8월 19일. 회령포에서 배설에게서 배를 인수하고는, 임금이 내린 교서에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구실로, 그의 부하에게 곤장형을 내리는 충무공의 지시, 충무공의 마음에서 배설은 그날 그 순간 사라진, 죽은 목숨인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 만지듯, 배설의 심기관리하며 12척 전선을 인수하는 충무공

광화문 광장의 이충무공의 동상과 세종대왕상의 위치를 옮기는 문제로 의견대립을 하는 모양이다. 중지를 모아야 하리라. 다만, 당신들의 유지를 기리는 방법은 눈에 보이는 상징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충무공을 기리며 우선 추구할 것은 국가 안보다. 곧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갈등의 해결이 급선무인데, 이처럼 절호의 기회를 가로막는 남남갈등, 이를 부추김으로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일관하는 이들이 문제다. 두 분의 상징물이 어디에 있든, 한반도 냉전의 지속가능을 바라는 이들은 충무공의 유지를 거론할 자격이 없다. 이런 생각으로 『난중일기』를 일부나마 다시 읽었다. 속은 쓰리지만 겉으론 조심조심 백자 달항아리를 다루듯, 배설을 관리하며 열두 척의 배를 안전하게 인수하는 이충무공의 마음과 행보, 당면한 한반도 평화도 그렇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이어질 가제목 <서사시 『일리아스』 속 ‘열두 척의 배’들>에 대한 머리말을 쓰다가 길어진 글임을 다시 밝힙니다. 완성후 이 자리에 링크해놓을게요. <필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imeroad 2019-03-2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 지정, 크기 조절, 등으로 내용을 구분해야 하는 등,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일단 올립니다.
 
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시 일리아스]<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4)이란 특별한 이름의 영화가 있었다. 그런데 『일리아스』(이하 <일리아스>)에는 특별한, 세 번의  '아흐레'와 세 번의 '열두 번째 되는 날(아침)'이 등장한다. <일리아스>라는 작품 속 시간 이야기다. 무슨 얘기이신가, 하실 분들이 있을 것인데, 여러 번 읽다보니 문득 보이는 ‘발견’이랄까, 그런 규칙이 있는 듯하다. '아흐레(9)는 정수 기본 수 가운데 극수라는 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듯하고, 열두 번째(12) 되는 날은 문제가 해결되는 날이다. 다시 말해 아흐레 되는 날은 ‘슬픔’이든 ‘역병’이든 ‘시신훼손’이든 갈등이 극에 치닿는, 서사장르 구성의 '절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발견한 것들을 정리해본다. 

 

No01."열 이틀째 되는 날 다시 올륌포스로 돌아오실 것인즉"
테티스가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아가멤논의 교만(한 말과 행동) 때문에 촉발된 아들의 분노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그동안 너는 빨리 달리는 함선들 옆에 앉아 아카이오이족을

원망하며 전쟁에는 일절 관여하지 마라."(『일리아스』 1권: 421-422행)
회의장에도 전장에도 나가지 말고 함선들 옆에 꼭 붙어 있으라, 신신당부를 하는 것.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극에 이르렀을 때, 여신 아테네가 올룀포스에서 내려와 제지하지 않았다면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을 단칼에 베어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이란 대체 며칠을 얘기하는 것일까?

 

"제우스께서는 어제 나무랄 데 없는 아이티오페스족의 잔치에

참석코자 오케아노스로 가셨고, 다른 신들도 모두 따라갔다.

열 이틀째 되는 날 다시 올륌포스로 돌아오실 것인즉," (1권: 423-425행)

비로소 ‘그동안’을 가늠해볼 단서와 숫자가 등장한다. '어제' 제우스가 신들을 거느리고 올룀포스를 떠나, 12일 동안의  여행을 시작했다. 오늘은 제외하고, 내일부터 10일째 되는 날, 테티스는 제우스를 찾아가 청원하겠다고 한다. <일리아스>에서 처음 등장하는 '열 이틀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역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소집한 회의가 열렸는데, 역병에서 벗어날 길을 찾은 날이다. 역병이 발생한 지 아흐레는 이미 흘렀고, 오늘이 10일째 되는 날이다. 역병에서 벗어날 방법은 찾았지만, 회의를 주도하는 아킬레우스가 미운 아가멤논은 그에게서 브리세이스를 빼앗고, 분노가 촉발되는 바로 '그날'이다. 아폴론이 보낸 역병에서 더 이상 헤어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9일은 임계점으로 해석한다. 9는 기본수 가운데, 극수로 '무한', ‘영원’ 등을 상징한다. 역병이 그리스 군을 전멸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는 무시무시한 숫자인 것, 그런데 제우스는 하필 이날을 잡아 약속이라도 한 듯, 출장을 떠난 것이다. 오늘로부터 11일째 되는 날 아침 제우스는 돌아오고 테티스는 지체 없이 올룀포스에 올라, 아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청탁을 한다. 아킬레우스에게 '그동안'은 11일쯤이 된다. 또한 역병 발생시점부터 20일째 되는 날, 아킬레우스-테티스의 청원은 접수된다. 

 

No02."열두 번째 아침이 밝았건만 그의 살은 조금도 썩지 않았으며"
이제 <일리아스> 24권(몸값을 주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다)으로 가보자, 24권은 그 이야기 전개가 1권과 대칭 혹은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열두 번째 되는 날'이 24권에서도 등장한다. 앞서 22권에서 헥토르를 죽임으로써 절친의 복수를 하고, 23권에서 아킬레우스의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그는 절친을 추모하는 장례경기를 제안하고 주관한다. 그동안에도 헥토르 시신은 아킬레우스의 막사 부근에 방치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분노는 여진처럼 남아 헥토르의 시신을 욕보인다. 그것은 분노이고, 그리움 때문이다.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아킬레우스는, 새벽녘이 되면 갑자기 일어나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 뒤에 매달고 그의  무덤 주위를 세 바퀴씩 돌며 분을 삭인다.

 

"그러면 그는 날랜 말들에게 전차 밑에서 멍에를 얹고는/ 끌고 다니기 위해 헥토르를 전차 뒤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헥토르를 끌고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세 번/ 돌고 나서 다시 막사로 돌아와 쉬었고, 헥토르는 먼지 속에/ 엎드러져 길게 누워 있도록 내버려두었다."(24권: 14-18행)

'세 번'도 <일리아스>에서는 유의해서 살펴야 할 숫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 이와 같은 일을, 장례식 이튿날 새벽부터 열두 번째 날의 새벽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킬레우스가 하고 있다(12일의 기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 좀 더 살펴야).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발칵 뒤집힌 곳은 올룀포스다. 신들 대부분은 헤르메스를 보내 그의 시신을 빼내자는 주장하나 헤라와 포세이돈과 아테네는 완강하게 반대한다(이들은 그리스 군을 지원하는 대표 신들이다).

 

"그들에게는 신성한 일리오스와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죄 때문에 여전히 처음처럼 미웠으니,/ 그는 이들 여신들이 그의 농장을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 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찬양했던 것"(24권, 27-30행)

두 여신의 뒤끝도 상당하다. '파리스(=알렉산드로스)의 선택'(사과)에 대한 앙금이 여전하다. 헥토르는 파리스의 형인 것이다. 이제 트로이아를 지원하는 아폴론이 나서서 반대 의견을 개진한다.

 

"아킬레우스는 동정심도 수치심도 없는 자요. 수치심은/ 사람들에게 손해가 되기도 하지만 큰 이익이 되기도 하지요./ 생각건대,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이를테면 동복형제라든가 또는 아들을 잃었소./ 하지만 그들의 눈물과 슬픔에도 한계가 있었소."(24권: 44-48행)

갑론을박 중이지만 신들의 중론은 아킬레우스가 신들도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선(線)을 넘었다는 것. 그런데 신들은, (테티스가 왔을 때 제우스가 하는 말) "헥토르의 시신과 도시의 파괴자 아킬레우스를 둘러싸고/ 아흐레 동안 불사신들 사이에 시비"(24권 107-108행) 중이다. 여기서도 '아흐레'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임계점'으로 작동한다. 1권에서 역병에 휩쓸린 날들처럼. 아킬레우스가 짐승처럼 행동하는 시간들, '미친 날들'이기도 하다. 아킬레우스가 제 맘대로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는 날들이 '아흐레'라고 봐야 할 것이다. 헤라의 끈질긴 반대에도 제우스가 조율하는데, "아킬레우스 몰래 헥토르의 시신을 빼내는 일은 하지 않는" 조건으로 해결책을 낸다. 마침내 (1권에서와는 역순으로, 강대진,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을 참조하시라.) 제우스는 전령을 보내 테티스를 부르고, 이 여신을 통해 아들(아킬레우스)을 설득한다. 프리아모스가 장남(헥토로)의 시신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는데, 신들이 그리 진행되도록 손을 써놓은 것, 어쨌든 이 글에서는 12일이 중요하므로, 전령 헤르메스가 프리아모스를 안심시키는 다음을 보자.

 

"노인장! 그는 아직 개들이나 새들의 밥이 되지 않고/ 여전히 아킬레우스의 함선 옆 막사들 사이에/ 처음 쓰러진 그대로 누워 있소. 그가 누운 지 벌써/ 열두 번째 아침이 밝았건만 그의 살은 조금도 썩지 않았으며/ 전사자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꾀지 않았소./ 신성한 새벽이 다가올 무렵이면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전우의 무덤을 그를 끌고 사정없이 돌았지만 그를/ 손상시키지 못했소. 직접 가서 보시게 되면 놀라실 것이오."(24권: 411-418행)

어쨌든 이 시신훼손을 포함, 시신반환으로 사태가 일단락까지 소요된 시간은 열두 날이다. 열두 번째의 아침. 대체 왜 이런 것일까? <일리아스> 작품 속 시간은 또 한 번 12일을 만난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No03."열 이틀째 되는 날에는 양군이 전투를 개시해도 될 것"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면서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 왕에게 묻는다.

 

"고귀한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자면 며칠이나 걸리겠소?

그동안은 나 자신도 쉴 것이며 백성들도 붙들어두겠소"(24권:  657-658행)

뜻밖의 제안이다. 트로이아 군은 도성에 갇힌 상태라, 화장할 땔감을 구하려면 도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 프리아모스는 가능하다면 12일을 요청한다. 그들은 '아흐레' 동안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열흘째 되는 날 그를 땅에 묻고 백성들에게 조문객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열 하루째 되는 날 무덤을 만들어 줄 예정이다. 그리고 열 이틀째 되는 날에는 양군이 전투를 개시해도 될 것이라고.

 

"아흐레 동안 우리는 집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열흘째 되는 날 그를 땅에 묻고 백성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열하루째 되는 날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줄 것인즉,
열이틀째 되는 날 꼭 필요하다면 우리는 싸울 수 있을 것이오.”(
24권:664-667)

아킬레우스는 기꺼이 헥토르의 장례절차를 밟도록 12일 동안의 휴전을 약속한다. 여기서도 아흐레 동안 죽음을 슬퍼하겠단다. 대단한 애도, 헥토르를 영원히 추모하겠다는 뜻이 된다. <일리아스>에서 만나는 세 번째의 특별한 열 이틀째 되는 날이다.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24권 804행)

이 한 행은 <일리아스> 1~24권, 대단원의 막은 내린다. 특히, 세 번째의 열두 날은 제우스의 뜻이 아니다, 인간 아킬레우스가 연민과 배려가 12일의 장례 기간 허용이다. <일리아스>를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아킬레우스에 초점을 맞춰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하는 데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이제 <일리아스>의 날들을 정리하자. 본격적인 전투의 날들은 4일이다. 그 앞에 전투 이전, 그 뒤에 전후이후로 <일리아스>는 3분되는데, 흘렀거나 흐른 것으로 여기는 세 번의 12일은 36일, 4일간의 전투를 포함하면 40일. 앞서, 역병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린 작품 이전의 아흐레(9일)를 포함하면 대략 50여 일이 <일리아스>라는 작품 속 시간이다. 10년 전쟁에 비하면 참 짧다. 왜 그런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사례들을 좀 더 제시한 다음에 정리하기로 하자. <일리아스>에는 세 번씩의 특별한 '아흐레'와 열두 번째 되는 날 아침이 등장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9-03-24 2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숫자로 살펴보는 일리아스도 재미있군요.

아흐레, 열두 번째, 말고도 ‘아홉 해‘도 몇 차례 등장하는지 궁금합니다.
전쟁이 아홉 해 동안 교착 상태였던 데 대해서는 2권에서만 하더라도 두 차례나 언급되어 있더군요.

어느덧 위대한 제우스의 아홉 해가 흘러
선재는 썩고 밧줄은 풀어지고 말았소이다.
(제2권 134-135)

뱀이 참새 새끼 여덟 마리와 그 새끼들을 낳은
어미를 합쳐 모두 아홉 마리를 집어삼켰듯이,
우리도 아홉 해 동안 그곳에서 전역을 치를 것이나
열 번째 되는 해에는 길 넓은 도시를 함락하게 될 것이오.
(제2권 326-329)

timeroad 2019-03-25 08:3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숫자에 대해 동서양의 관념은 좀 다른 듯 하지만 닮은 점도 있는 듯하고요. 영국이 청나라에 홍콩의 조차기간을 99년으로 요구한 것은 긍정이면서 부정적인 두 의미를 다 가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취재는 되어 있으니 시간이 닿는대로 올릴게요. 감사합니다.

oren 2019-03-25 2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리아스』를 뒤적이다가 또 하나의 ‘아흐레‘를 발견했네요.
글라우코스와 디오메데스 사이의 무구 교환이 나오는 대목에서,
글라우코스가 자신의 출신 내력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이윽고 뤼키아와 크산토스의 흐름에 이르렀을 때
광대한 뤼키아의 왕이 그분을 진심으로 존중해주었소.
왕은 그분을 위하여 아흐레 동안 잔치를 벌이며 황소 아홉 마리를 잡았소.
그러나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열 번째 나타났을 때
왕은 자기 사위인 프로이토스로부터 무슨 표지를 가져왔느냐고
그분에게 묻고 그것을 보여달라고 했소.
(6권 172-177)

timeroad 2019-03-26 18:4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ransky 2019-05-11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옥균을 상해에서 살해한 자가 프랑스 유학자 홍종우였음은
명성왕후의 끈질긴 복수심의 끝판이었고
자객고영근 또한 면성왕후의 심복이었으니!

timeroad 2019-05-13 19:5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인류 최고의 최초의 고전이 분노와 복수의 이야기라는 것이 예사롭지 않지요? 꼭 막장드라마가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최근의 흥행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골조도 그렇지요.
 
수사학 / 시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럴 일을 당할 만하지 않은 사람이 치명적이거나 고통스러운 변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고통의 감정'.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clcos)'을 정의한다. 이어서『수사학』은 연민의 감정을 자세히 살핀다. 정의에서의 '변고'란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사람이 볼 때,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이 머지않아 당할 법한 그런 것이어야 한다. 다가올 일과 관련되어 있단 얘기다. "연민의 정을 느끼자면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이나 친구 중 한 명이 어떤 변고를, 그것도 우리가 연민에 관한 정의에서 말한 것과 같거나 그와 거의 비슷한 변고를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수사학> 2권 8장-연민, 16~19행) 필자는 이 책을 일종의 '감정사전' 또는 ‘감정교육’을 위한 교재라고 정의하는데, 저자는 어떤 것이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심적 상태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논의를 이어간다. 

 

『수사학』은 일종의 '감정사전' 또는 ‘감정교육’을 위한 교재

『13번째 증언』을 읽었다. 저자가 응한 인터뷰들과 관련 기사들도 읽었다. 책에 관한 간단한 리뷰를 올리다가, 윤지오 배우의 책과 인터뷰에서 느낀 어떤 감정이랄까, 그것을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까, 『수사학』몇 장을 읽어가면서 추적해보게 돠었다. 10년 동안 저자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동료배우(언니)에 대한 감정은 어떤 것일까? 책보다 인터뷰들을 먼저 보아서인지,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미안함'이었다. 책에는 죄책감, 자책감이란 단어도 보인다. 자신의 처지가 동료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는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 첫 실명 인터뷰(<故장자연 씨 동료의 최초 증언(윤지오)_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윤 배우는, 그 기획사에 소속되기 전에 ‘언니’와 몇 개월을 알고 지냈다고 했다. 윤 배우 부모님은 캐나다에 살고 있었고, 언니는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신 상태라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 윤 배우는, 자신은 위약금을 물고 기획사를 나온 상태였으나 "언니는 나오고 싶은 상태"였지만 "그럴 수 없어서 기획사를 나오기 위해 작성된 문건"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많은 뉴스들이 다루고 있으니, 이만큼만 언급하자.

 

『13번째 증언』과 인터뷰를 접하며 먼저 떠오른 말은 '미안함'

그런데, <수사학>을 살피는데, '미안함'이란 항목이 없다. 가장 근접한 감정들을(항목) 살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연민'이었다. <위키백과>는 연민(憐愍/憐憫)을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또한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마음’으로 소개한다. 국어사전은 연민(憐憫)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김’으로 유의어로, 동정(同情)을 소개한다. 같을 동[同]에 정 정[情]이다. 낯설고 새롭다. 명사 '동정'의 기본의미는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알아주거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란다. 이런 사전풀이를 앞세우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술과 비교핼 볼 필요는 느껴서다. 우리가 연민의 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안면은 있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야 한다.'는 것. 그럴 경우에는 우리 자신이 위험에 처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되기에 그렇단다. 연민을 느끼는 대상과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끔찍한 것(기억)은 가련(可憐)한 것과는 다르며, 때로는 연민과 ‘반대되는’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란다. 연민과 ‘반대되는’ 그 감정은 무엇일까?
끔찍한 것이 나의 문제로 다가오면 우리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한다. <수사학>에 따르면 10년을 마음감옥에서 보내고 있는 윤 배우가 언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곧 '연민'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비록 남남이지만 윤 배우가 언니의 비극에 ‘참전하고’ 있는 정도가 연민 그 이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책의 한 대목에 주목한다.
"죽음으로 말하려 했던 언니의 고통이 다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 기억들을 피하지 않고 다시 마주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13번째 증언』 244면
'다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그가 숱한 증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다. 비슷한 길을 걷는 이들 가운데 희생자가 다시는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잠재독자를 향하는 저자의 마음이야말로 ‘수사학’이 정의하는 연민에 가깝다. 

 

연민을 느끼는 대상과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수사학>에 따르면 연민에 가장 ‘대립되는’('반대되는'이 아니다) 것이 '분개(nemesan)'이다(같은 책, 2권 9장_분개). 그러데 이 감정도 예사롭지 않다. “부당하게 고통 받는 자들을 동정하고 연민하되 부당하게 번영하는 자들에게는 분개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도리라는 것.” 부당하게 ‘고통 받는’ 자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연민’이다. 그리고 부당하게 '번영하는' 자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분개다. 이렇게 연민과 분개는 대립각을 형성한다. 자신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 고통받을 것이 예상될 때 가지는, 연민보다 더욱 깊이 참전하는(반대 되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런데, <수사학>은 이번에도(‘분개’의 경우도) '어떤 불상사가 우리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이웃에게 일어나는 일 때문에 생긴다.'고, 분개라는 감정도 ‘부당하게 번영하는’ 상대와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단다. 이에 따르면 『13번째 증언』이나 인터뷰는 ‘분개하는’ 감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분개하게 하지만, 앞서 제기한 어떤 ‘미안함’과는 좀 다른 듯하다.

 

부당하게 '번영하는' 자들에게 가지는 감정이 분개,  연민과 대립각을 형성

오히려 저자가 겪은, 겪고 있는 그 감정은 두려움을 동반하고 있거나 아직도 두려움 그 자체로 보인다. '두려움'(수사학 2권 제5장)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임박한 위험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일종의 고통 또는 불안'이다. 세월이 약이라고는 하나,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정작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분개의 대상이 되오 있으며, 먼저 떠난 동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 친구를 제대로 배웅하기 위해 용기를 낸 자가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뭔가 한참 잘못되어 있다. 『일리아스』라는 서사시의 배경은 10년 전쟁(트로이아 전쟁)이다. 그러나 그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일반화하면 ‘인간의 분노’다. 전쟁 10년째에 이르러 ‘끝내’ 아킬레우스는 분노한다. ‘분노’란? <수사학>은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가 까닭 없이 명백하게 멸시당한 것을 두고 복수하고 싶어 하는, 고통이 뒤따르는 욕구'라고 정의한다. '복수'나 '고통이 따르는 욕구'가 생경하게 다가오는데, 차분히 생각하면 심오한 정의가 아닐 수 없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분노한다. 그러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헥토르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가멤논을 향한 분노를 거두어들인다. ‘자신의 친구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분노를 거두는 것. 『일리아스』는 이처럼 주제인 분노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친구의 복수’를 위해 곧바로 ‘자신의’ 분노를 거두어들이는 아킬레우스

<수사학>은 앞서의 정의에 입각하여, 만약 분노가 그런 것이라면, 분노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언제나 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일부)에게 화를 낼 것이며, 그 이유는(분노하는) '특정 개인이 분노하는 사람 자신이나 그의 친구를 해코지했거나 해코지하려 하기 때문'(이 책 2권 제2장-분노)이란다. 『일리아스』를 떠올리면 얼른 이해가 된다. 『13번째 증언』의 저자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어떤 미안함이고 자책감이고 회한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 감정을 정확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히는 과정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과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연민'과 '분개' 사이에 있을까? '두려움'과 '분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수사학』의 목차를 살펴보기시를. 이 가운데 몇몇 항목들을 살폈으나 저자가 고인에게 느끼고 있는, 그 아음 읽기는 실패한 것 같다. 다만 그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인간이 가진 감정을 섬세하게 파고든다. 이 책이 일종의 '감정사전'이면서 ‘감정교육’을 위한 교재라고 정의하는 이유다. 연민과 분개와 두려움과 분노를 각각 꼭지점으로 하는 사각형 내부에 한 점을 찍는다면 과연 어느 지점이 될까? 과연 이런 가상의 사각형 안에 한 점을 찍을 수는 있는 것일까?  책 『13번째 증언』과 저자의 인터뷰, 관련 기사들을 대하는 마음은 예사롭지 않다.  『13번째 증언』 저자가 책의 출간과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 우정이랄까. 그 아레테(arete)를 굳이 우리말 한 단어로 옮긴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닐는지.

 

*이 글은 『13번째 증언』이란 책과 인터뷰들을 보면서 착안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방점을 찍은, 필자의 '의견'이라, 해당 책과는 연동하지 않습니다. 이 책과 관련된 리뷰는 따로 올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필자 timeroad 드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번째 증언 - 2009년 3월 7일, 그 후 10년
윤지오 지음 / 가연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구매해놓고 한동안 펼치지 못했다. 저자의 인터뷰들과 관련 뉴스를 따라가기에 바빠서였을까? 뭔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짧게라도 밝혀야 할 것 같았는데, 그래도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읽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가 맞서 싸워야 했던 전쟁은 ‘오래된’ 것이었고, ‘고독한’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의 기록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 장자연 씨의 '동류배우' 윤지오 씨가 펴낸 에세이집 『13번째 증언-2009년 3월 7일, 그 후 10년』 얘기다. 실명과 얼굴을 드러낸 첫 인터뷰도 놀라웠지만, 한 유명배우와 민형사상의 손해배상소송을 겪으면서도 이 사건을 놓지 않았던 이상호 기자와 저자의 만남은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이상호 기자와의 인터뷰가 거듭 진행될수록 많이 밝아진 저자의 표정을 살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다룬 독자 리뷰를 찾아보았는데,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짧게 쓴 응원메시지는 많다. 이 사건이 가진 복잡성과 뭐라고 표현하기 쉽지 않은 미묘한 감정 때문이리라.

 

=『13번째 증언』의 저자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미안함이고 자책감이고 회한이라고, 그렇지만 그 감정을 정확히 뭐라고 끄집어낼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감정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수사학』을 읽으면서 '연민'일까, '분개'일까, '두려움'일까, '분노'일까? 살펴보았지만 딱 떨어지는 한마디는 찾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책의 출간으로 상기하게 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에는 '분노'가 따르고 있는 듯하다.

미란 기자가 고발뉴스(홈페이지)에 올린 이 책에 대한 글이 눈에 띈다. 어렵게 찾은 리뷰다.  

"그러나 여전히 장자연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윤지오 씨는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가해자들은 여전히 처벌받지 않은 채 잘 살아가고 있다."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 윤지오 ‘13번째 증언’>
[출처:]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17

 

=서양 고전을 주로 읽는 사람으로서, 그렇고 그런 비유를 함으로써 글을 맺어야 할 것 같다. 희랍어 아레테(arete)은 '미덕'으로, 번역가에 따라서는 '탁월함'이나 '훌륭함'으로 옮기기도 한다. 최근 발행된 플라톤 대화편 주석서 『고르기아스/메넥세노스/이온』(서광사, 2018.12.30.)에서 박종현 교수는, 「메넥세노스」편에서 아레테(arete)를 '용기'로 옮긴 까닭을 언급한다. 『펠로폰테소스 전쟁사』 Ⅱ권에 수록된 유명한 연설, '전몰자들을 위한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과 대비되는 소크라테스의 추도연설이 담긴 대화편이 「메넥세노스」다. 그런데 박종현은 전몰자들을 찬양하면서 언급되는 아레테(arete)를 '용기'로 옮기고 있는 것, 전쟁과 관련된 일반적인 언급이기에 'agathos'도 덩달아 '용감한' 또는 '용기 있는'으로 옮기게 된다는 주석도 있다.(「메넥세노스」 239d의 주24.) 이처럼『13번째 증언』의 저자가 책의 출간과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아레테(arete)를 굳이 번역해야 한다면, '용기'가 아닐는지. 그가 10년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그리고 편안하게 동료배우를 배웅할 수 있기를! 『13번째 증언』은 저자가 치르고 있는 10년 전쟁의 기록으로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을 참고하여, 서사시 『일리아스』의 배경, 트로이아 전쟁의 ‘속살’을 살핀다. 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이 전쟁을 왜 일어났을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는' 독자라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제1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나아가 '인간의 분노'인데, 10년 전쟁 가운데, 본격전투는 나흘(4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서사시는 당대의 거대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사시 『일리아스』의 배경, 트로이아 전쟁의 ‘속살’을 살핀다.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하 <전쟁사>> 1권에서 27년 전쟁(기원전 431~404)의 역사를 쓰는데,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 이전의 그리스 역사를 살핀다. 그리고 이 전쟁(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난 배경, 아니 '인간들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지'를 고찰한다.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만나는 트로이아 전쟁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 그렇게 긴 내용이 아니므로, 『일리아스』읽기 전후에 한 차례 읽는 것이 적잖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이 힘들다면, 지금 소개한 내용들만 살펴보 아도 윤곽을 잡을 수 있으리라.(아래 내용 정리에서 ‘아티케’는 아테나이로, 헬라스는 '그리스'로 보아도 될 것임. 인용은 <전쟁사>1권이며, 가령 출처 [1(3)]은 1권의 1장 2절이다.괄호 안은 필자의 설명이다.)

'땅이 기름진 곳일수록 주민이 자주 바뀌었다.'[1(3)] (그러나) '땅이 척박한 앗티케(아테나이인들이 사는) 지방에는 옛날부터 파쟁이 없었고, 늘 같은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1(4)] '전쟁이나 내분 때문에 나라에서 쫓겨난 자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자들이 헬라스의 다른 지방에서, 안정된 공동체인 아테나이로 망명하여 그곳 시민이 되었고, 그 결과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여 앗티케 땅으로는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아테나이는 이오니아 지방에까지 이주민을 내보내야 했다.'[1(6)] (그러나) '헬라스 공동체는 허약하기도 하고 서로 교류가 없던 까닭에 트로이아 전쟁 이전에는 어떤 종류의 집단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힘을 모아 트로이아 원정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전에 바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3(4)]

 

본격적으로 쓰기에 앞서 '인간들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지'를 고찰한다.

헬라스에서 최초로 함대를 창건한 사람은 미노스다. 그는 지금 헬라스 해(에게 해)라고 부르는 바다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퀴클라데스 군도(에게 해의 남쪽)를 정복하여 대부분의 섬에 처음으로 식민시를 세웠다. 그 과정에서 그는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통치자로 앉힌다. 그는 또 세수(稅收) 확보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해적을 퇴치하고자 했다. 트로이아 전쟁 이전이다. 식민(植民)의 역사가 이처럼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식민시', '세수 확보', '해적 퇴치'와 같은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당황스럽다.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리스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아테나이가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헬라스 전체보다는 '앗티케(아테나이)'의 역사처럼 다가온다(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사람이다).  당시 해적질은 오늘날 강도짓과 같은 불법(부정) 행위라기보다는 일종의 경제활동으로 취급되었다. 섬에 있는 도시든 육지에 있는 도시든 '장기간' '지속된' 해적질 때문에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야했다. 해적들은 자기들끼리도 약탈하고, 항해 여부와 상관없이 해안지대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을 약탈했다. <전쟁사>를 좀 더 읽어보자. 
 '옛날에는 헬라스인들과 대륙(아시아)의 해안지대나 여러 섬에 살던 비(非) 헬라스인들이 배를 타고 자주 왕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해적질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해적질은 유력자들이 주도했는데,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고 백성들 중 약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 …… 이것이 그들의 주된 생계수단이었다. 또한 이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영광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었다.'[5(1)] '…… 그리고 옛 시인들도 바다에서 상륙하는 자들에게 으레 "당신들은 해적이오?"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데, 이는 질문 받는 자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질문하는 자들은 그런 행위를 비난받아 마땅한 짓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5(2)] 

 

 '식민시', '세수확보', '해적퇴치'와 같은 용어들의 자연스러움이 당황스럽다. 

"당신들은 해적이오?"와 관련하여 『오뒷세이아』 3권 초입이 자주 거론된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오뒷세우스)의 생사 여부를 수소문하려고 트로이아 원정의 전우를 찾아 퓔로스를 갔을 때다. 네스토르(왕)가 식사를 대접한 후 나그네들은 누구냐고 텔레마코스 일행에게 묻는 대목이다.

 

"그대들은 뉘시며 어디서부터 습한 바닷길을 항해해 이리로/ 오셨소? 그대들은 장사를 하려는 것이오? 마치 해적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재앙을 안겨주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떠돌아다니듯이 말이오."  -『오뒷세이아』 3권 71~74행.

직업이 장사요? 해적이요? 네스토르는 경계하는 빛이 없을뿐더러 대수롭지 않게 묻고 있다.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째에 이른 시점이다(오뒷세우스가 집을 떠난 지 20년째). 다시 <전쟁사> 1권. 그리스인들이 트로이아 원정에 나서기까지의 얘기다. 식민시 개척과 보호와 관련 있는 진술이다. '그러나 미노스가 함대를 장악한 뒤로 해상교통이 활발해졌다. 그는 대부분의 섬에 식민시를 건설하고 악명 높은 해적들을 몰아냈다.'[8(2)] '그리하여 바닷가 주민은 부를 축적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약자들은 이익이 될 것 같아 강자들의 예속을 받아들였고, 강자들은 획득한 자본에 힘입어 작은 도시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다.'[8(3)] '이런 상태가 제법 오래 지속된 뒤에야 헬라스인들은 트로이아 원정길에 올랐다.'[8(4)]

 

직업이 장사요? 해적이요? 네스토르는 대수롭지 않게 묻고 있다.

앞서 살폈듯 척박한 땅(아티케)을 가진 아테나이인들은 곡물을 비롯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했다. 이런 물품들은 주로 헬레스폰토스해협(아시아 지역) 일원에서 왔는데, 배편을 이용했다. 헬레스폰토스해협은 바로 트로이아(트로아스)의 앞바다다. 일리아스』에는 트로아스가 얼마나 풍요로운 그리고 축복받은 땅인지 자세히 소개한다. 헬라스인들에게 트로이아는 한마디로 '탐나는', 원정할 가치가 충분한 나라였다. 또한 헬라스의 해양국가들은 헬레스폰토스해협 일대에 출몰하는 해적들을 소탕할 필요가 있다. 생필품 공급선이 안정화를 위해서다. 물론 '파리스의 선택'(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또 하나의 전쟁 원인을 살필 수 있다. 스파르테의 왕 메넬라오스(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동생)의 아내인 헬레네를 트로이아(파리스)로부터 되찾아오기 위한 ‘명예회복 전쟁’이다. 헬레네의 구혼자들이 스파르테의 왕 튄타레오스에게 맹세했다. 까닭에 그리스 주요 국가들의 왕들이 함선을 몰고 전사들을 거느리고 종군했다. 그러나 이는 전쟁의 명분일 수 있다. 일찍이 미노스가 일군 해상도시들의 '안전' 도모, 어쩌면 이 원정 자체가 일종의 생계활동은 아니었을까? 거기다가 앗티케는 인구가 너무 많았다. 약탈하는데 세운 공과 그것을 배분하는 동안 발생한 '불공정'이 전쟁 중에 일어난 또 하나의 전쟁이다. 


트로이아는 한마디로 '탐나는', 원정할 가치가 충분한 나라였다.

트로이아 전쟁은 왜 10년이나 지속되었을까? 그보다 10년 동안 어떻게 그리스연합군은 수성전(守城戰)에만 집중하는 트로이아와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원정군은 늘 불리하다. 특히, 그 많은 전사들의 식량과 전쟁물자들은 어떻게 조달했을까? 『일리아스』 9권에서 그들의 절절한 사정을 살필 수 있다. 아가멤논과 화해하라며 사절단으로 온 오뒷세우스에게 아킬레우스가 거세게 쏘아대는 말들이다.

 

"꼭 그처럼 나는 숱한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또 낮은 낮대로 피비린내 나는 숱한 날을 적군과/ 싸우며 보내기 일쑤였소. 그자들의 아내들을 위해서 말이오./ 사람이 사는 열두 도시를 나는 이미 함선들을 타고 가서 파괴했고,/ 또 육로로도 기름진 트로이아 도처에서 열한 도시를 파괴했소./ 그리고 그 모든 도시에서 값나가는 보물들을 수없이 노획해 와서/ 모두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에게 갖다 바치곤 했소." -『일리아스』 9권 : 325~331행)
배를 타고 열두 도시를 파괴했고, 육지에 있는 도시는 트로이아 성 하나만 남겨놓은(열한 도시를 파괴했다) 상태다. 『일리아스』 곳곳에는 '12(열두)'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전체’ 혹은 '모두'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헬레스폰토스해협을 낀 바다와 육지, 인근의 거의 모든 도시들을 초토화했다는 얘기다. 그동안 아킬레우스의 맡은 역할은 피비린내가 가득하며 처절하다. "마치 어미 새가 저는 고생을 하면서도 구할 수 있는/ 모든 먹이를 아직 깃털도 나지 않은 새끼들에게 갖다/ 먹이듯이,"(9권 323~325) 해적질을 하여 그리스연합군의 전쟁 자금과 군량을 확보했다. 그가 선봉장으로서 나선 보급투쟁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멤논은.. 그가 오뒷세우스에게 하는 말을 더 살펴보자.

 

"유독 나에게서만 마음에 맞는 여인을 빼앗아 가졌소. 그녀와 동침하며/ 재미나보라지! 하나 무엇 때문에 아르고스인들이 트로이아인들과/ 싸워야만 했던가? 무엇 때문에 아트레우스의 아들은 백성들을 모아/ 이곳으로 데려왔던가? 머릿결 고운 헬레네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필멸의 인간들 중에 아트레우스의 아들들만이/ 아내를 사랑한단 말이오? 천만에! 착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아내를 사랑하고 아끼는 법이며, 나 역시 비록/ 창으로 노획한 여인이긴 하지만 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소." -9권, 336~343행

브리세이스를 진심으로 사랑한 '내 아내'로 표현하는 것이 흥미롭다. 결국 메넬라오스의 아내(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전쟁 아니냐, 그의 형 아가멤논에게 날리는 직격탄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해묵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이 10년째인 점, 앞서 인용한 『오뒷세이아』가 10년 전쟁이 끝나고 다시 10년 후인 점을 고려한다. <전쟁사>의 기술을 따르면, 아킬레우스의 경제활동(해적 행위)은 『이솝우화』가 그러듯이 약육강식의 '정의'에 따른 공적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킬레우스의 어미 새 비유는 얼마나 그럴듯한가! 흔히 『오뒷세이아』를 한 편의 로비무비이며 '성장소설'로 이야기한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이 작품을 통해, 바다(항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식민지 개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펠로폰네소스전쟁은 그러한 제국주의의 욕망이 극대화된 시기를 대변한다. 그런데, 『오뒷세이아』이전에 씌어진 『일리아스』의 배경이 식민지 (개척)전쟁의 일환이며, 안정적인 식민시 운영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사> 1권 투퀴디데스의 진단에 따르면 그러하다.


『일리아스』의 배경은 식민지 (개척)전쟁의 일환, 식민시 운영과 관련되어

'호메로스의 증언이 믿을만한 것이라면'이라 전제하지만 <전쟁사> 1권 초반부에서 트로이아 전쟁 규모를 살피는 역사가의 시선은 예리하다. 원정군의 함선에 승선한 자들은 전사이면서 선원이어야 했다(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시에 선장도 선원들도 일정 급여를 주고 고용하였으며, 전사들의 역할은 따로 있다). 원정에 나서는 전사들 수를 최소한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갑판도 없이 옛날 해적선 모양으로 건조된 함선에 무구(武具)를 몽땅 싣고 난바다를 건너야 했으니까. 신들의 개입이 많을수록 인간의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을 많고 크다.

 

"그 이유는 인구(전사)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식량을 조달하기 힘들어 싸우는 동안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다고 예상되는 정도로 인원을 줄였던 것이다. 그들은 상륙 직후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도 모든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식량이 부족해 케르소네소스 반도에서는 농사를 지으며 해적질을 일삼은 것 같다." -<전쟁사> 1권 11(1)
케르소네소스 반도는 에게 해의 북동쪽 헤레스폰토스 해협을 끼고 있는 트라케의 반도이다. 에게 해와 흑해를 있는 프로폰티스 해(海) 입구에 있으며, 건너편 트로이스(트로이아)와 비좁은 해협을 끼고 마주보고 있다. 농사가 한두 달에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연합군들이 이처럼 분산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무려 10년째 계속되었던 것,  원정군이나 성에 갇힌 트로이아 군이나 이 전쟁은 '생존투쟁'이기도 했던 셈이다. 먹어야 싸울 수 있고, 먹여야 싸우게 할 수 있는 그런 전쟁이었음을 <전쟁사>의 저자는 예리하게 분석하는데, 27년 전쟁을 살피는(읽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 경제력은 예나지금이나 가장 든든한 전쟁의 조건이다. 또한 경제제재는 또 얼마나 ‘오래된’, 그들에게는 ‘확실한’ 전쟁무기인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imeroad 2019-03-2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팁1]해적의 역사는 참으로 오래 되었으며, 우리나라에도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조선시대, 남서해안은 ‘왜구들‘로 불리는 해적들로부터 자주 공격을 받았다. 때문에 ‘진도(珍島)‘‘는 조선시대에, 유사시 섬 전체의 주민들을 소개(疏開)시켰다. 오늘날의 ‘진도군청‘쯤에 해당하는 관청이 전남 해남군 대흥사 입구에 ‘임시관공서‘로 설치되기도 했다. 이 부분을 언젠가 소개할 날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