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겨울 딸과 함께 서해안의 구시포(해수욕장)에 가는 길이었다. '해가 넘어가는' 풍경이 좋아 제철이 아닌 때에도 주말이면 찾는 발길들이 상당한 포구다. 그즈음에 16년 만에 나온 『곽재구의 포구기행』(해냄, 2018) 개정판을 살피고 있었다. 이 책(초판)에 구시포를 다룬 글이 있다(<천천히, 파도를 밟으며, 아주 천천히…… -전북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이 책 때문에 구시포를 찾았다기보다는, 가까이에 구시포가 있어 찾아가는 길에 마침 개정판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인근 지리에 좀 익숙하다는 티를 내려고, "너, 상하면의 한자가 어떻게 되는지 아니?" 딸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글쎄!'다. 마침 상하면 소재지를 막 벗어난 군내버스가 상하중학교 앞을 지나 구시포 방면으로 달리고 있었다. "위 상(上)에 아래 하(下), 해서 상하(上下)야, 우리말로 '위아래' 면(面)." 여기까지였으면 좋았는데, 한 발 더 나간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 학교의 교가가 뭔지 알아? <위아래>야. 위아래, 위아래, 위위 아래~ 그 유명한 EXID(이엑스아이디)의 <위아래UP&DOWN>를 언급했으니, '아재' 소리를 들을 수밖에! 응원가라고 했으면 그나마 면(面이 섰을 텐데..

 

상하면(上下面) 상하중학교의 교가는 <위아래>?  

어쨌든 구시포가 있는 상하면은 행정구역 개편 전의 '상이면(上二面)'과 '하이면(下二面)'에서 앞 글자를 따 상하면(上下面)이 되었다. 상이면과 하이면에 이(二)라는 한자도 왜 그런지 궁금하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가 알기로는 충남 예산군 삽교읍, 충남 홍성군 홍북읍, 전남 영광군 홍농읍 등에 상하마을(上下里)이 있는데, 이들 한자도 상하(上下)다. 도시에는 상동이나 하동이 즐비하다.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라, 놓인 형상에 따라, 서울을 올라간다고 하듯이, 위와 아래로 구분하는(혹은 중간까지도), 상하는 지형상 자연스럽게 붙여지는 이름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상하면 소재지에서 6킬로미터쯤 733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면 구시포에 이른다. 개정판 ‘포구기행’ 해당 페이지를 확인한다. 포구기행의 작가가 이곳을 처음 찾은 계기도 이곳의 특이한 이름 때문인 듯하다. 주민들이 기억하는 구시포의 원이름은 '새나리불똥'이었단다. '새나리'는 갯가(바닷가)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불똥'은 '불뜸'에서 전이된 말인데, '뜸'은 우리말에서 자연부락을 의미한다. 작가는 구시포의 옛이름 새나리불똥을 '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 쯤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 포구 이름이 ‘구시포(九市浦)’로 바뀐다.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이라는 뜻이니 바뀐 이름의 의미 또한 낮은 것은 아니다.'라고 작가는 덧붙인다. 구시포의 바다가 백합조개가 무럭무럭 자라는 개펄바다인데다 조기들로 유명한 그 칠산바다가 아닌가?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
‘그렇다는 구나!’ 하고 이야기를 마칠 참인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 그럴까, 이름 곧 여기서는 지명, 그 지명은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이야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야기도 나눈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가에서 플라톤의 대화편 한 권을 꺼내 새롭게 이야기했다. ‘이름의 올바름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가진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다. 천병희의 번역은 『이온/크라튈로스』(숲, 2014년 10월)로 두 편이 묶여 있다.

 

“누가 맨 처음 이름들의 올바름에 관해 모른다면 나중 이름들의 올바름에 관해서도 알 수 없네. 나중 이름들은 그가 모르는 맨 처음 이름들로 설명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중 이름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분명 무엇보다도 맨 처음 이름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네.”-플라톤 『클라튈로스』 426a~b), 천병희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한 걸음 더 들어가려하면 복잡해지고 심오해지는 대화편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 무엇(사물이나 사람이나 이름의 대상)에 대해 그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일까? 책에서는 '입법자'라고 한다. 어쨌든 입법자는 어떤 기준으로 그것에  [그것]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가? 이 대화편 서두에서는 헤르모게네스는 '이름의 올바름은 합의와 동의에 의해 정해진다'는 규약주의를 주장한다. 그것을 [그것]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로 합의한 '약속'이란 얘기다. 반면에 크라튈로스는 '있는 것들 각각에는 이름의 올바름이 본래 자연적으로 있다.'(객관적으로)는 자연주의를 주장한다. 그것이 [그것]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 목(木)이나 물 수(水)와 같은 한자의 상형문자를 떠올리면 크라튈로스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한자의 갈래에는 상형문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혀의 모양에 따라 자음을 정하고(설형문자) 천지인(天地人)의 원리에 따라 기본 모음을 정한 한글의 경우는 어떠할 것인가?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먼저 헤르모게네스와 긴 토론을 한다. 인용한 부분은 둘의 대화가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인데, 앞선 대화들의 상당부분이 희랍어의 어원에 관한 고찰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나중 이름(현재 사용하는)은 맨 처음 이름(이전 이름)과의 연관 관계에서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2권 후반부 '함선목록'에서 읽기를 멈추는 것처럼,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희랍어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지루하고 시험에 든 것처럼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희랍어 고전을 좀 읽었다는 사람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신들과 영웅들의 이름이나 중요한 철학의 개념어들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어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사실 우리말에서도 쉽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앞서 포구기행의 지명 유래에 대한 추적을 예시한 것이다.)

 

맨 처음 이름들의 올바름에 따르는 나중 이름들의 올바름
플라톤은 궁극적으로 이데아(idea) 이론을 펼치기 위해 사물의 이름 이전의 사물 자체가 가진 본성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프레임을 벗어나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 일부를 이야기한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맨 처음 이름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가 나중 이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허튼소리일 뿐이라고 진술하고, 헤르모게네스의 동의를 구한다.
포구기행의 작가는 구시포가 왜 구시포인지, 이전 이름인  '새나리불똥'이 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인지, 나름대로 해석했다. 상하면의 구시포는 나중 이름(현재 이름이면서)인데, 그 처음 이름(이전 이름)은 '새나리불똥'이었다. 그렇다고 '새나리불똥'이 현재 구시포의 맨 처음 이름이었다고 할 수 없다. 현재 이름에 대한 이전 이름일 뿐이다. 다만 한자어가 아닌 고유한 우리말 지명인 점에서 처음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어쨌든 작가는 국토지리를 기본으로 인문지리와 거기에 시인의 상상력까지 가미하여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있다. 김춘수의 시에 따르자면 ‘구시포’가 비로소 구시포가 되는 셈이다(실제로 해당 지명이 왜 그 지명인지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구시포가 비로소 구시포가 되는 순간, 그러나 맨 처음 이름은?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논점은 여기에 있지 않다. 인용부분 대사의 앞에서 그는 얘기한다. "사물들이 자모와 음절을 통한 모방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걸세."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맨 처음 이름들의 참됨에 관한 한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물을 그 [사물]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언어이고, 언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져 있다. 자음과 모음은 결합하여 음절을 이루고, 한 음절이 한 사물의 이름이 되기도 하지만 음절과 음절의 결합으로 한 사물의 이름이 된다. 그 사물에 그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재료가 언어인데, 이를 모방이라고 표현한다. 사물이 가진 본질을 모방하는 수단이 언어인 것. 이렇게 언어로 된 그 [이름]은 사물을 대신한다. 곧 대치(代置)한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이고, 그것이 적절한지 그 원칙은 무엇인지 등 의문투성인데, 이 대화편의 주제다. 일단 우리는 그 이름(언어)에 의존해서 ‘구시포가 구시포인‘ 이유, 구시포가 구시포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언어의 한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인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접목시켜야 비로소 이해가 가고, 후반부 크라튈로스와의 대화에서 앞서 인용한 부분과 관련된 흥미로운 얘기를 꺼낸다. 그러나 논점은 조금 달라진다.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우리는 이름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으며, 어떤 훌륭한 일을 한다고 주장할 텐가?” 크라튈로스는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님, 이름들의 힘은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 사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사물도 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어요.” 이어지는 대화다. 잠시 따라가 보자.

 

이름들의 힘은 가르치는 것, "삼척동자도 알 수 있어요."
소크라테스: 크라튈로스. 자네 말은 아마도 누군가 이름의 본성을 안다면―이름의 본성이 사물의 본성일세― 사물은 이름을 닮은 만큼 사물도 알며, 서로 닮은 사물은 모두 같은 기술(技術)에 속한다는 뜻인 듯하네. 내 생각에 그래서 자네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사물도 안다고 주장하는 것 같네.
크라튈로스: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가 방금 말한 가르치는 방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보다 더 열등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는지. 아니면 그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기로 하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크라튈로스: 나는 다른 방법은 없고, 그것이 하나뿐이자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크라튈로스』(435d~436a), 천병희

소크라테스는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독단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배려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그것은 또한 사물을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해서. 사물의 이름을 발견한 사람은 사물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자네는 탐구와 발견은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하고, 배우는 것은 이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크라튈로스: 나는 탐구와 발견도 같은 수단에 의해 같은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확신해요.
소크라테스: 자, 크라튈로스. 우리는 이 점에 유의하세. 자네는 이름들을 길라잡이 삼아 그것들의 뜻을 뒤쫓으며 사물들을 탐구하는 사람은 속을 위험이 크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크라튈로스: 어째서 그렇지요?
소크라테스: 맨 처음 이름을 지은 사람은 분명 사물들의 본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이름들을 지었네. 그것이 우리의 주장일세. 그렇지 않은가?
크라튈로스: 네. 그래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데 그가 그에 근거해 이름을 짓는다면, 자네는 그를 길라잡이로 삼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속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
『크라튈로스』(436a~436b), 천병희

 

맨 처음 이름을 지은 자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크라튈로스의 이름의 올바름에 관한 자연주의 이론이 앞서 인용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소크라테스는 다음 인용에서 결정적으로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가진 한계를 지적한다. 아래 인용은 [판본A]와 [판본B]로 두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판본A]의 일부 내용이다. 그만큼 이 대화편의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얘기로 받아들인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말해보게. 최초의 입법자들이 맨 처음 이름을 지었을 때 이름 지은 사물들을 알고서 지었을까, 아니면 모르고 이름 지었을까?
크라튈로스: 나는 그들이 알고서 이름 지었다고 생각해요, 소크라테스님.
소크라테스: 여보게 크라튈로스, 아마도 모르고 이름 짓지는 않았을 걸세.
크라튈로스: 나도 그들이 모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소크라테스: 그런데 만약 이름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알 수 있다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 그러니까 이름을 알 수 있기 전,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알고 이름을 지었다거나 그들이 입법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크라튈로스』(437e~438b7)

 

이름을 통해서만 가르칠 수 있고, 탐구와 발견도 가능하다고 '믿는'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자가당착에 빠지는 부분이다. 인식론이니 존재론이니 하는 철학의 영역으로 대화편은 깊이를 더해간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클라튈로스의 주장은 외골수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이 되지만, 그만큼 보통의 삶에서 언어를 재료로 만들어진 이름(단어, 언어, 말)이 하는 역할은 크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필자도 한글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가벼운 얘기처럼 다가오던 『클라튈로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의 깊이를 더해갈수록 인식의 숲에서 헤매게 하는 묘한 대화편이다.

 

이름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알 수 있다면.. 크라튈로스의 자가당착

탐구와 발견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것도 이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고집을 부리는 클라튈로스, 그러나 우리는 상당 부분 이러한 이름을 통하여 책을 읽고 또한 글을 쓰며, 대화하고 있다. 이름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행, 그리고 이름 이전의 사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행은 좋은 기행수필 작가의 아름다운 여행과 다를 바 없다. '미법도彌法島. 처음 섬의 이름을 만났을 때 가슴이 뛰었지요. 미륵의 불법이 존재하는 섬.' 작가는 여정을 미법사로 정한 이유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이름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곽재구의 신新 포구기행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해냄, 2018년 7월) 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거제의 포구를 여행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욕지도 자부포에서」의 일부다. 이 글을 위해 이 책에서 작가가 여행한 곳의 지명과 관련된 언급들을 여러 군데 골라냈는데, (너무 길어지니 문제라) 그 중 하나 고르 것이 우연히도 이 책의 제목이 된 기행수필이다. 2018년 1월호 『전원생활』에 처음 소개되었다.


"1시간 15분 항해 끝에 욕지도에 이른다. 섬의 이름은 난해하고 철학적이다. 욕지慾知, ‘알기를 원한다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는 동안 곤궁한 생화두에 시달리지 않는 이가 있을 것인가. 왜 사는가. 왜 먹는가. 왜 걷는가. 그 이유를 알려줄 테니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은 이름. 사실 이 섬의 이름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선 ‘욕지 연화장 두미 문어 세존 慾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이라는 불가의 전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_『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354~355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ansky 2019-05-11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시포!
여기에 사진을 올리 수 없으니 그날의 광경을 못 다 이야기하네!
파도와 모래폭풍!

timeroad 2019-05-13 19:36   좋아요 0 | URL
정확히는 구시포해수욕장과 동호해수욕장 사이 명사십리해수욕장이겠지요. 얼마 전에 갔더니 명사십리의 그 고운 모래들을 헤집어놓아 속이 상했어요. 자연은 곧 복원을 하겠지만.. 감사합니다.
 

 

"스퀴타이족의 왕 스킬쿠로스는 아들 80명을 남기고 죽으면서 막대기 묶음을 가져오게 했다. 처음에 그는 아들들에게 막대기를 묶인 채로 꺾어보라고 했다. 아들들이 꺽지 못하자, 그는 막대기를 하나씩 집더니 남김없이 다 꺾어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들들이 화합하고 뭉치면 강하고 불패이지만, 분열하면 약하고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플루타르코스(46~120년)의 에세이 「수다에 관하여」의 한 대목(17장, 46면)이다. 국내 독자들에게 그는 <영웅전>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천병희는 <윤리론집>에서 엄선한 에세이 6편을 번역 소개함으로써(플루타르코스 윤리론집 『수다에 관하여』), <영웅전>에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역사적 한담과 일화, 도덕적 이야기 등 빛나는 문장들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플루타르코스의 내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앞서 수다의 증세를 진단한 다음, 16장부터는 이를 치료하기 위한 처방을 제시하고 있는데, 침묵에 대한 찬사에 이어 간결한 가르침이 어떤 힘을 가지는지 예시하시 위해 스퀴타이족(흑해 북쪽에 살던 기마유목민족)의 강력한 통치자 스킬쿠로스(기원전 2세기 말)의 유언을 소개한다. 「수다에 관하여」에 실린 6편의 에세이는 『그리스로마 에세이』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주석을 곧바로 확인하며 읽으려면 이 책으로 읽기를 권한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우화가 있어서 『이솝우화』를 펼친다. 역시 천병희의 번역(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이솝우화』)인데, 358편 중 86번째 우화, 「농부의 자식들이 반목하다」이다.

 

 

“농부의 자식들이 반목했다. 농부가 아무리 타일러도 말로는 자식들이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농부는 행동으로 설득하기로 결심하고 자식들에게 막대기를 한 묶음 가져오라고 했다. 자식들이 시키는 대로 하자 농부는 먼저 자식들에게 막대기들을 다발로 주며 꺾어보라고 했다. 자식들은 있는 힘을 다해도 꺾을 수 없었다. 농부는 이번에는 다발을 풀고 자식들에게 막대기를 하나씩 주었다. 자식들이 막대기를 쉽게 꺾자 농부가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도 뭉치면 적들에게 지지 않겠지만 반목하면 쉽게 꺾일 것이다.”

 

이 우화의 공식 교훈을 소개하자면, "화합이 더 우세한 동안에는 불화는 쉽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란다. 필자는 이 우화를 떠올릴 때마다 한자어 '협동(協同)'을 떠올리곤 한다. 특히, '협(協)'은 열십(十) 부수에 힘 력(力) 셋이 합해진 힘 합할 협(劦)이 결합된 문자로, '셋'이란 숫자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많은 힘을 뜻하는데 3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협동의 동(同)도 심오한 뜻이 담겨 있지만 협의(協議), 협력(協力), 협조(協調) 등에도 공히 협이 쓰이고 있다. 또한 협(協)의 동자(同字)가 부수가 심방변(忄)인 협(恊)이다.

 

 

'협(協)'은 열십(十) 부수에 힘 력(力) 셋이 합해진 힘 합할 협(劦)이 결합된 문자
그런가 하면 『이솝우화』에서는 또 한 사람의 특별한 농부를 만날 수 있다. 83번 우화 「농부와 아들들」인데, 이 농부의 자식교육은 앞서의 두 사례보다 더 과묵하며 동기부여에도 훌륭하다.  

 

어떤 농부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자 아들들이 농사일에 경험을 쌓기를 원했다. 그래서 농부는 아들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얘들아,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너희들은 내가 포도밭에다 감추어둔 것들을 남김없이 찾아내도록 해라.” 아들들은 포도밭 어딘가에 보물이 묻혀 있는 줄 알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포도밭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아들들은 보물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잘 갈아놓은 포도밭은 몇 배나 많은 결실을 맺었다.

 

오늘은 갑자기 작고한 H그룹의 회장의 빈소가 차려진 셋째날인 모양이다. 누가 문상을 왔다 갔다느니 그런 기사가 떠 있다. 고인이 유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모처럼 「수다에 관하여」를 읽다가 떠올랐다. 어느 집안에나 복잡한 사연은 있기 마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온 / 크라튈로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 부제는 '이름의 올바름에 관하여'인데, 주제를 잘 드러내 준다. 일부 학자들은 이 대화편의 주제를 '언어의 기원'에 대한 것으로 보는데, 이는 부수적인 논의거리일 따름이다. 이 대화편에서는 '이름'의 사례로 주로 고유명사와 일반명사를 예시하지만, 형용사들에, 심지어 동사들에 적용되기도 한다. 이제이북스 옮긴이들(『크라튈로스』,김인곤, 이기백, 2007)은 작품해설에서 때문에 '이름'을 외연이 넓은 '낱말'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이 대화편의 주제는 이름이 (1)'있는 것들' 각각에 자연적으로 있는가, 아니면 (2)합의나 관습에 의해서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크라튈로스는 '자연주의'(1)라 불리는 입장에 서고, 헤르모게네스는 ‘규약주의’(2)라 불리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를 풀어서 설명해보자.
또 하나의 원전번역 『이온/크라튈로스』(,천병희, 숲, 2014)의 책 정보에 따라 좀 더 풀어서 설명해보자, <크라튈로스>는 사물들의 이름이 어떻게 붙여지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물은 자연의 본성에 따라 저마다 올바른 이름이 본래 따로 정해져 있으며, 그에 맞지 않다면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크라튈로스의 견해다. 앞서 ‘자연주의’라 했다. 이와 달리 이름은 그 대상의 본질과 상관없이 사회적 합의와 관습으로 만들어진다, 헤르모게네스의 주장으로 앞서 '규약주의'라 불렀다.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일종의 약속이라는 얘기다.
말과 언어의 근간이 되는 이름(낱말)에 대해, 왜 그 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느냐와 관련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는 일이 처음부터 숨이 턱 막힌다. 이런 상반된 주장을 가진 크라튈로스와 헤르모게네스, 둘 사이에서 중재하거나 논박하면서 사물의 이름에 관한 철학을 다듬는 이가 소크라테스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왔다. 그런데 앞서 부제를 소개할 때 '이름의 올바름'이란 말부터가 불편했다. 그렇다고, '이름에 관하여'라고 할 수도 없으니, '올바름'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해야 한다. 자세한 해설을 수록한 이제이북스의 작품해설에는 이를 '어떤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 되게 해 주는 것(1)' 또한 올바른 이름을 판별하는 기준, 곧 '올바른 이름의 기준(2)'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이 대화편의 부제는 전자에 따르면 ''어떤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 되게 해주는 것에 관하여'가 된다. 언어에 관해 논한 최고(最古)의, 주용한 문헌들 중 하나답게 쉽지 않다. 어쨌든 앞서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의만이라도 볼 수 없다고 하였거니와 철학의 심오한 분야에까지 논의는 깊어지고 있다. 1)인식론적 문제, 2)존재론적 문제, 여기에 3)언어학의 문제까지 아우르는 플라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다, 이제이북스(작품해설)에는, 대화편 초반부에 소개되는 두 상반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먼저 크라튈로스의 견해다.
1)있는 것들 각각에는 이름의 올바름이 본래 자연적으로 있다.(객관적으로) 
2)이름은 사람들이 합의하고서 붙이는 것이 아니다.(규약주의가 아님)
3)이름의 올바름은 본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 사람과 이민족 사람 그들 모두에게 똑같은 것이다.(보편적으로)

이에 헤르모게네스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모두 부정한다.
1)이름의 올바름은 합의와 동의에 의해 정해진다.(자연주의가 아님) 
2)누군가가 어떤 것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 그것은 올바른 이름이다.
3)어떤 이름도 각각의 것에 본래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규칙과 관습에 의해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규약주의에 입각한 주장 중 2)번은 틀을 벗어난 것처럼 생각된다. '개인의 의지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는 입장'이 좀 그렇지 않은가! 자의(恣意)적인 이름붙이기까지 포함해야 한다니…….  그러나 이 대화편은 '자기 자신과의 합의'도 고려한다(435a), 곧 규약의 범위를 넓게 잡을 수도 있다고 하므로, 그렇게 틀인 주장이 아닐 수 있다. (천병희의 번역 해당 부분을 보자.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는 자네와 합의를 한 것이고, 이름이 올바름은 자네에게는 합의의 문제가 되었네.’ …… 관습은 닯은 이름들 뿐 아니라 닮지 않은 이름들도 사물들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으니까. 435a에서 소크라테스는 크라튈로스를 논박하고 있다. 논박 과정에서 크라튈로스가 헤르모게네스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크라튈로스의 견해를 지지하나, 헤르모게네스의 규약주의를 논박한 다음,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적 견해도 논박하여 이론을 정리해간다.
이제 훌쩍 건너뛰어, 거의 결론 부분을 살펴보자.

 

"소크라테스: 잠깐만! 잘 지어진 이름들은 이름 지어진 사물들을 닮았으며, 그래서 그런 사물들의 상(像)이라는 데에 우리는 누차 동의하지 않았나?
크라튈로스: 그랬지요.
소크라테스: 만약 이름들을 통해서도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 있고, 사물들 자체를 통해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도 있다면, 어느 쪽 배움이 더 훌륭하고 명료할까? 상(像)에서 상 자체가 훌륭한 모방물인지 배우고 그것이 모방하는 진리를 배우는 쪽인가, 아니면 진리에서 진리 자체를 배우고 진리의 상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배우는 쪽인가?
크라튈로스: 진리에서 배우는 것이 더 좋을 수밖에 없겠지요.
소크라테스: 사물들에 관해 어떤 방법으로 배우고 알아내야 하느냐는 어쩌면 나와 자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인 것 같네. 그러니 우리는 사물들을 통해 그렇게 하기보다는 사물들 자체를 통해 그렇게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걸세. 439a-b, 175~176, 천병희)"

 

앞서, 이 대화편은 3)언어학의 문제는 기본이고, 인식론적 문제, 존재론적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논의의 출발범에서와는 논점이 달라져 있을뿐더러 길이가 달라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사물(사태)을 무엇이라고 부르는 '이름'에 대한 논의에서 '상(像)에서 상 자체'란 말이 등장하고, '모방'을 거론한다. 때문에 이 대화편의 집필시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일단 대표적인 중기 대화편인 『국가』의 유명한 논의(동굴의 비유)를 떠올려보라.
이제이북스(작품해설)에 따르면, <크리튈로스는 중기 대화편의 측면뿐만 아니라 후기 대화편의 측면도 갖고 있는데, 세들리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 곧 "플라톤이 후기(말년)에 이 대화편의 초판을 수정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유력한 해석이란다. 이제 앞서 인용을 좀 더 살펴보자.

1)상(像)에서 상 자체가 훌륭한 모방물인지 배우고 그것이 모방하는 진리를 배우는 쪽인가,
2)아니면 진리에서 진리 자체를 배우고 진리의 상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배우는 쪽인가?

이에 앞선 선택지를 정리하면
1)만약 이름들을 통해서도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 있다.
2)사물들 자체를 통해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도 있다.

(아래) 1)과 2) 가운데, 어느 쪽 배움이 더 훌륭하고 명료할까?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 이 선택지를 부연한 것이 앞서 (위)1)과 2)로 정리한 것이다. '상(像)'은 곧 이름(낱말)을 말한다.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모방한 상(象)처럼, 사물(사태) 그 자체를 지시하고 그에 대입하는 이름이 있는 것.

"이름의 한계: 아무리 적절하고 적합하며 훌륭한 그에 걸맞은 이름(象)이라도

그 사물 자체를 오롯이 대치(代置)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로 읽혀"

A라는 사물의 생김새나 쓸모 등을 고려하여 그 [A]라는 이름을 붙였다. 누가 봐조 [A]라는 이름(을 통해)으로 사물 A를 떠올릴 수 있고, 사물 A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이러니러한 A라는 사물(사태, 현상)를 [A]라고 부르기로 하여 [A]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 규약주의척인 측면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위 인용(439a-b)을 달리 얘기하면(또 다른 비유를 하기가 좀 그렇지만)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는 불교의 『능엄경』의 유명한 비유가 떠오른다. 손가락 끝이 ‘이름’이고, ‘달’은 이름이 지칭하는 ‘사물 그 자체(진리 자체)’가 된다. 달을 보라는데 손가락 끝을 보고 달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아무리 적절하고 적합하며 훌륭한 그에 걸맞은 이름(象)이라고 해도 그 사물 자체를 오롯이 대치(代置)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로 읽힌다.
우선은 사물들의 이름이 어떻게 붙여지는지에 관한 두 견해, '자연주의(크라튈로스) VS '규약주의'(헤르모게네스)' 두 견해를 논박하는 소크라테스의 논박 과정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문학동네 시인선 117
곽재구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꽃이 만발한 감자밭, 순풍을 받고 달리는 범선, 아기를 낳고 난 뒤의 여인.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 광경이다', 이것은 에이레의 속담이다. '(이거) 왜이래!'가 아니고, 에이레다. 이 나라의 정식명칭은 아일랜드공화국(Repubilc of Ireland)으로, 게일어로 에이레(Eire)다. 수도는 더블린(Dublin). 에이레라고 할 때는 낯설더니 검색하자마자 '아일랜드'에 이어 '더블린'이 나타나고, 곧 익숙해진다. 대서양의 영국 서부에 아일랜드 해를 사이에 두고, 동북쪽 북아일랜드와 접하여 있는 도서국가로, 해안선의 길이는 1448㎞라고. ‘속담’이란 그 민족 그 국가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앞에 '세상에서'를 앞세우진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가 이러하다. 그리고 그것이 왜 그러한지 알려면 최소한 이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 정도는 참고해야 한다. 아이를 낳은 여인이야 어딘들 아름답지 않겠나. 이제 '감자(꽃)'와 '바다(범선)'가 남는데, 두 가지는 경제활동 곧 '풍요'와 관련 깊은 듯하다.

 

에이레의 속담에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 광경은 풍요..

필자는 농촌에서 자랐음에도 몇 년 전까지 감자꽃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풀꽃들의 이름과 생태를 좀 안다고 자부하였기에, 놀라운 발견이었다. 감자가 주식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은데, 아일랜드에서 감자는 주요 식량자원인 듯하다. 또한 해안선이 1448㎞라니 그들의 바다는 또한 '어장'이다. 식민지를 개척하든 해상무역을 하든 수산자원을 채취하든, 바다는 경제 활동의 주무대이니 어찌 순풍에 달리는 범선을 바라보는 마음이 흐뭇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쨌든 아일랜드의 속담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생산'과 관련되어 있다. 누구든 몇 가지를 손에 꼽는다면 그것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도 No1, No2, No3 순으로 꼽는다.

'세상에서 가장'은 지금 이야기하려는 이 시인, 곽재구 시인의 기행수필에서 자주 접하는 '어구'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창작동화집)을 오래 전에 펴낸 적도 있으니, 그렇고 그런 구절을 예시하지 않아도 되리라. 『와온 바다』(창비, 2012)에 이어 7년 만에 신작 시집을 펴내면서(『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2019. 1.)에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강은 흐르고/ 바람은 불고/ 새들은 노래한다

시인은 여섯 줄 가운데, 강과 바람과 새들에게 한 행씩 분양했다. 이 세 (개의) 행을 줄이면 '세계世界'가 된다. 그리고 세 행이 이어진다. 

인간인 나는 강을 따라 걷는다/ 지난 10년 내가 제일 잘한 일이다/ 시여, 푸른 용과 함께 날자

'2019년 1월 순천의 샛강 동천에서'에 쓴 시인의 말이다. 나는 곧 자아(自我)다. 10년(시간) 동안 가장 잘한 일이라는 평가가 담겨 있으며, 시업(詩業)의 정진을 스스로 응원한다. 시를 정의하여 '자아의 세계화'라고 하는데, 시인은 '시인의 말'에 으레 포함해야 할 항목들을 두루, 간명하게 시로 담았다.

 

한 행씩 분양받은 강과 바람과 새들은 '世界'가 된다

작년 여름에는 포구기행 후속편인 『신포구기행』을 낸 바 있고, 이 시집 출간에 이어 『곽재구의 포구기행』 개정판을 펴냈다(이번에는 출판사가 바뀌었다). 개정판 서문에서 세계 몇몇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 자신의 기행수필을 읽고 있는 독자들을 만났을 때의 소회가 담겨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제는 시인 본인도 '그러려니 한다는데', 시인은 시보다 기행수필(작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 바람에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글을 다른 기행수필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곽재구 시인께 "행복한 고민을 하고 계시네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시와 산문, 시인과 산문가의 경계가 적어도 곽재구 시인에게는 오래 전부터 의미 없다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다만 작가가 있을 뿐이라고. 유려한 문체의 그의 기행수필들은 어느 한 대목 시가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문 상태에 있다. 또한 그것이 시인이 가진 작가로서의 성취라고. 이번 시들 몇 편을 예를 들어 보자. 

이번 시집에서 필자가 주목한 시 가운데 하나가, <사이_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이다. (전문은 알라딘 <미리보기>에서 읽을 수 있다.)

 

사이_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

 

당신이 사랑한 사람과
당신이 미워한 사람 사이
눈이 나린다

(중략)
당신이 사랑한 사람과
당신이 미워한 사람 사이
자작나무는 자란다

(후략)

-시 <사이> 부분

이 시는 두 가지가 흥미로웠다. 하나는 시인이 7년 전에 펴낸 『와온 바다』에 수록된 한 편의 시와 연결되어 있달까, 느낌이 겹쳤다. <사랑이 없는 날>이다. 당시 필자는 그 시집 가운데 이 시가, 이  시 가운데 아래 구절이 가장 와 닿았다.
"생각한다/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시 <사랑이 없는 날> 일부.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가 어디에 있는 가게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문득 시 속에 등장하는 두 간판 '사이에'를 읽는 동안 나의 미간에는 눈물이 흘렀다. 시 <사이>는 <사랑이 없는 날>과 '사이에' 뭔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만 연관성이 있다, 할 수 있을까? 어딘지 모르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다른 하나는, <사이>를 읽는 동안 필자의 눈길은 시 본문보다는 부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에 대한 설명(주석)에 더 오래 머물렀다는 것. 눈덩이 세 개를 쌓아서 만드는 눈사람, 또 그렇게 하는 이유. 나는 오히려 이것을 시로 느꼈고, 와 닿았다.

 

"동그라미 셋이 나와 너, 우리를 상징하다니" 중에서 뒷 문장만 빼면 그대로 한 편의 시가 아니겠나.

 이 시집에 첫 번째 수록된 시, <길>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시를 일종의 <서시>로 보는데 곁에 있고, 함께 하니 좋은 것들이 나열된다.

무신론자의 종교/ 가을의 꽃향기/ 종탑의 아기 종에게 하늘의 음계를 알려주는 초승달/ 호숫가의 나무의자/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당신이 있어 세상이 참 좋았다 -시 <길> 전문

'시인이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번에도 주석이 필요하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대강 누군지는 알겠는데, 여행 중에 만난 새롭게 만난 그녀에 대해 또 한 편의 깨알 주석이 등장하는데,

 

곽재구 시인에겐 산문과 시의 경계가 따로 없다

한 편의 이야기 시다. 한 개의 물음표(?)는 (다른 시들이 그렇듯) 남기고 모든 마침표(.)들은 제거할 것, 그러면 한 편의 시다. 제목은 <속기사>쯤으로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속편'의 시와 본편의 시 <길>을 하나로 묶으면, '당신'이라는 단어로 초점이 맞춰진다. 당신이란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주석)를 말하는가? 다섯 가지 모두를 의인화하여 이르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소중한 누구에게 드리는 헌시인가? 열아홉 살에 스물다섯 살 연상인 남편과 살다가 16년 만에 혼자가 되었는데, 왜 재혼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 말이다. "내가 도스토옙프스키와 살았는데 다른 누구와 또 살 것인가?"  관련하여 세 번째로 언급할 시는 2부 첫 번째 <징검다리>다.

 

평생 강물의 노래를 들었으나
자신의 노래를 부른 적이 없는 이가 눈보라는 맞는다
피아노의 검은 건반이 하얀 눈보라 속에 묻힌다

-시 <징검다리> 전문

자신은 한 차례도 노래를 부른 적이 없고 평생 듣기만 한 (개천에 가로놓인) 징검다리는 ‘검은 건반’으로 그것을 둘러싼 이미 내린 눈은 ‘하얀 건반’으로, 눈보라가 거세지자 ‘검은 건반(디딤돌)’이 사라지는 정황이다.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여기에도 제목 '징검다리*'에 시인의 말이 붙어 있는데, 두 면에 걸쳐 긴 이야기다. 근황과 일상을 담은 한 편의 수필이다. 앞서 언급한 두 편가 ‘주석’이면서 주석만은 아닌, 두 편의 시를 각각 품고 있다면, 이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필자가 문득 주장했던 시와 산문의 경계를 오가는 실험인가? 앞서 시와 기행수필의 경계의 흐릿함에 대해 주장했거니와 이번 시집에서 특히 와 닿는 흐름은 시와 동시의 경계도 시인 곽재구에게는 따로 없다는 느낌이다(거론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달빛>이라는 시는 절묘하여,

 

누비 홑이불 배에 덮였다
까끌까끌하고 시원한
가을 물살 같은
징검다리 곁 물고기 몇 마리가 이리 와 함께 춤추자 말할 것 같은
그런 이쁜 꽃은 지금껏 보지 못했네
누비 홑이불 밖으로
두 발을 가만히 빼본 것은 생의 우연한 일
누군가 가만히 발바닥에
고운 자기 발바닥을 대보는 이가 있었다

-시 <달빛> 전문

누군가라닌 누구이지?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는 시의 제목 '달빛'이 가장 중요한 모티브다. 곧 달빛 때문에 생긴 발의 그림자를 떠올리는 순간 비로소 시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아주 쉬운 언어로 쓰여야 합니다. "

이례적으로 시집 끝에는 다른 누군가가 덧붙인 해설 대신 시인의 산문 한 편(<강은 노래하고 푸른 용은 춤추네>)이 실려 있다. 시인이 시업을 쌓기 시작한 계기와 현재,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최근에 모처럼 TV에 출연해 근간 작품들에 대해 얘기했다. 관련해서는 tbs교통방송 TV책방 북소리(3월 20일, 2019, <일상에 지친 당신에게 전하는 '포구에서 찾은 따뜻한 위로'> 곽재구 시인편)을 참고하시기를. 본 시집에 앞서 작년에 출간된 『신포구기행』은 월간 <전원생활>에 3년 동안(2016.1~2018.12.) 연재한 기행수필들 대부분을 한 권으로 엮은 것인데, 본 시집 출간까지 포함하여 지승호 작가의 인터뷰를 일부 소개한다. 3년간의 연재를 마무리하는 인터뷰다. 지승호 작가는 좋은 시는 뭐냐고 묻자 시인이 답한다.
“좋은 시는 아주 쉬운 언어로 쓰여야 합니다. 그런데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따뜻해야 하고 촉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때 어떤 것이 좋은 시인지 스스로 판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뭐냐 하면 눈물입니다. 울면서 쓴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나 시인이 눈물을 백 방울 흘리면서 써야 독자는 한두 방울 흘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을 다해서 쓴 작품을 보고 아침에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좋은 시인 거죠. 제가 쓴 것 중에 아끼는 작품이 있어요. ‘아기 참새 찌꾸’라는 동화를 쓰고 마침표를 찍는데 그 위에 눈물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잉크가 번지는데,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_월간 <전원생활> 2019년 1월호 곽재구 시인 인터뷰 <삶이란 자기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는 시합> 중에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imeroad 2019-03-3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로 소개한 주석들은, 이 책 (알라딘) 미리보기를 히시면 읽으실 수 있습니다. 시 전편과 함께.
 

'잠은 자연이 준 가장 값진 선물들 중 하나이고, 친구이자 보물이며, 마법사이자 나직이 위안을 주는 자이다.'(헤르만 헤세) 그러나 그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다.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새는 밤이라면 좋겠지만, 관련된 구절들을 모아보았다.

 "내 마음 속에 잠들어있는 네가/ 다시 나를 찾아와 나는 긴긴/ 밤을 잠 못들것 같아/ 창밖에 비가 내리면 우두커니/ 창가에 기대어 앉아"_가요, <잠 못 드는 밤에 비는 내리고>(김건모, 1992) 중에서

 

 "죽은 부인을 사랑한 만큼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나요?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그럼 어쩔거죠?
-매일 억지로 일어나 숨을 쉬며 살아가야 하겠죠. 그러다 언젠가는 혼자 일어나
눈 뜨는데 익숙하게 되겠죠. 숨쉬며 사는 것도 익숙하게 되고 추억도 잊어버리겠죠."

_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 1993)에서
"이 영화는 2016년 12월 28일 재개봉되었다. 손에 꼽히는 명대사들이다."

"장기간 지속되는 불면의 고통을 아는 자, 겨우 반시간 정도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운 자는 누구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하루도 불면의 밤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 더없이 순수한 영혼을 지닌 자연아일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 헤르만 헤세 『잠 못 이루는 밤』(홍성광, 현대문학)

 

 "자연과 사상과 방랑의 구도자 헤르만 헤세가 펼쳐 보이는 내면의 진솔한 고백, 『잠 못 이루는 밤』은 소설이 아니고 헤세가 생전에 남긴 (자전적) 에세이로, 모두 42편이 실려 있다."

 

『일리아스』(호메로스, 쳔벙희, 숲, 2015개정판)에도, 읽노라면 모두 잠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주인공들이 있다. 제우스(2권)와 아가멤논(10권)과 아킬레우스(24권)다. 세 인용의 공통점은 각 권 맨 첫부분이라는 것.  작품이나 저술에서 첫 문장은 중요하다. 첫 문장만 쓰면 작품 전체가 술술 풀린다는 고백을 듣곤 한다. 읽은 지 오래된 독자들도 인용 덕분에 이후 서사를 상기할 수 있기를!

 

#01.

"다른 신들과 전차(戰車)를 타고 싸우는 인간들은 밤새도록 잠을
잤으나 제우스는 어떻게 하면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높여주고
수많은 아카이오이족을 그들의 함선들 옆에서 도륙할 수 있을지
마음속으로 궁리하느라 단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에게
거짓 꿈을 보내는 것이 역시 상책인 것 같았다." 
-『일리아스』, 2권: 1~6행.
"어떻게 해야 테티스와의 약속대로 아킬레우스의 명예 회복을 위해 그리스연합군을

도륙할 수 있을까, 제우스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2권.아가멤논의 꿈_함선 목록."

 

#02.

 "전 아카이오이족의 다른 장수들은 모두 부드러운 잠에 제압되어
그들의 함선들 옆에서 밤새도록 잠을 잤으나, 백성들의 목자인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은 단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니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머릿결 고운 헤라의 남편이 번개를 내리치며
형언할 수 없이 큰비나 우박을 만들 때와 같이,
또는 들판 위에 하얗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나
고통을 가져다주는 전쟁의 큰 아가리를 만들 때와 같이,
꼭 그처럼 자주 아가멤논은 가슴속 심장 밑바닥으로부터
깊은 한숨을 쉬었고 그의 마음은 안에서 떨고 있었다." 
-『일리아스』, 10권: 1~10행.
"아킬레우스에게 보낸 사절단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가멤논은 고민 끝에 한밤에 회의를 소집하고, 10권.돌론의 정탐" 

 

#03.

"이윽고 경기도 끝나고 백성들은 각자 자신의 날랜 함선들로
돌아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저녁 식사와
달콤한 잠을 즐길 참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전우를 생각하며 울었고, 모든 것을 정복하는 잠도
그만은 붙잡지 못했다. 그는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파트로클로스의 남자다움과 고상한 용기를 그리워했다.
아아, 전사들의 전쟁과 고통스런 파도를 헤치며 그와 더불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고, 얼마나 많이 고생했던가!
그는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때로는 모로 누웠다가
때로는 바로 누웠다가 또 때로는 엎드리기도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바다의 기슭을 정처 없이 거닐었고, 새벽의 여신은
그가 모르게 바다와 해안 위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일리아스』, 24권: 1~13행.
"그리움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킬레우스, 새벽이면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무덤 주위를 세 바퀴씩 도는 짐승의 시간이 시작된다. 24권.몸값을 주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