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에는 “동물 말고도 식물, 사람, 신(神) 등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대체로 강자의 승리로 끝난다”(옮긴이 서문) 동물들이 나오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이솝우화라고 통칭하는 것에서 보듯 우화에는 동물들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과 같은 개념도 등장한다. 가급적 텍스트 인용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이솝 우화』의 ‘미리보기’(알라딘)가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라 첫 번째 우화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미리보기가 가능하다면 굳이 입력하지 않았을 것).   

좋은 것들은 허약한지라 나쁜 것들에 쫓겨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갈 수 있겠는지 제우스에게 물었다. 제우스가 좋은 것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에게 다가가되 한꺼번에 몰려가지 말고 하나씩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쁜 것들은 가까이 사는 까닭에 늘 사람들을 공격하지만, 좋은 것들은 하늘에서 하나씩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드문드문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001.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 전문


첫 번째 우화가 우화 하면 으레 떠올리는 동물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123번째 이야기도 이와 유사하다. 


제우스는 좋은 것들을 모두 항아리에 담은 뒤 어떤 사람에게 간수하라고 맡겼다. 호기심 많은 그 사람은 항아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어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모두 신들에게로 날아가버렸다. -<123.제우스와 좋은 것들이 든 항아리> 전문


인간의 호기심을 그 누가 말리겠는가? 우화에서는 호기심 때문에 나쁜 결과에 이르렀는데, 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 『수다에 관하여』(천병희 옮김)에는 인간의 호기심이 어떻게 작동되고, 나쁜 습관의 원인이 되는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편으로 이 호기심이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역설이다. 이쨌든 123번 우화는 ‘판도라의 항아리’[『신들의 계보』 관련 글은 올린 바 있다. 이 책 「일과 날」(47~105행)에서 언급]라는 신화 이전의 유사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천일의 유리1』 리뷰는 이미 썼고, 페이퍼는 『천일의 유리2』와 관련해서 쓰기로 한 것은 『천일의 유리2』는 ‘미리보기’(알라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2권을 1권에 이어 ‘나는 지혜의 고리다’라는 2월 13일 화요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권과 2권을 통틀어 모두 1,000꼭지의 에피소드가 한 페이지에 하나씩 소개된다. 그래서 ‘천일’이다. ‘미리보기’에 등장하는 화자들만 나열해도 한눈에 구성의 특이점을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이다’의 20일 동안의 □□은 다음과 같다. 지혜의 고리(2월 13일 화요일~) 민요, 스코프(Scope), 눈사람, 길가에 선 채 나누는 대화, 고드름, 관찰, 덧없는 세상, 에어즈 록, 거절, 향응, 흉내, 실의, 폐옥, 선망, 장갑, 귀향, 골격, 자만, 오토바이, 치와와, 색종이(~3월 6일 화요일)


마침 겨울인데, ‘눈사람’은 유쾌하고 ‘고드름’은 평범한 일상의 풍경에 감추어진 익살과 섬뜩한 뭔가를 담고 있다. 굳이 1,000일 동안의 1,000개의 에피소드를 나열한 것은 설화의 집성본인 『천일의 전설』이라는 유실된 페르시아 책에서 유래한 『천일야화 Book of the Thousand and One Nights』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천일의 유리’는 1,000개의 시선을 땀은 1,000개의 에피소드(우화들)를 통해 서사를 이어간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지에 위치한 마호로 마을의 언덕 위 외딴집에 살고 있는 소년 요이치의 짧은 생애”가 담긴, 소설이다. 속세를 벗어난 (공간) 배경이지만 ‘도시=퇴폐’와 같은 등식에 따른다면 “헛된 집착과 욕망의 포로가 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능력함”을 풍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어 번역본이나 영어 번역본을 거쳐 소개되는 과정에서 그런 ‘가위질’이 다반사가 되는 바람에 이솝은 오히려 딱딱하고 근엄한 도덕 교사로 변해버렸다. 서너 편 정도만 읽어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이솝의 모습이 그의 본디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솝 우화』, 옮긴이 서문 중에서 


왜 원전을 읽어야 하는지, 한 언어의 집인 콘텐츠를 다른 언어의 집으로 제대로 옮기는 일은 국가가 지원해야 할 사업이며, ‘천일의 유리’라는 콘텐츠는 거슬러 올라, 가령 '『이솝 우화』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환경이기에 가능했다고 하겠다. 왜 우리는 아직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없는가? 


“...나는 고양이만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도 구멍을 뚫을 수 있는 힘을 숨기고 있다. 그걸 잘 알고 있을 그가 아직은 더 살아야 한다는 말을 뱉자마자 벌렁 큰 대자로 드러누워, 당당하게 가슴을 내 쪽으로 향한다. ...” -나는 고드름이다, 2월 18일 일요일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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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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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일의 유리 1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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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리스 신화부터 비극와 희극, 플라톤의 대화편들까지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 읽기에 푹 빠져 지냈고, 이곳에 상당한 리뷰, 페이퍼 등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2년 반 가까이 훌쩍 지나갔다. 가끔 책을 사려고 이곳에 들렀을 뿐(지방의 오프 서점에서 원하는 책 구하기란 너무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다 최근에 『이솝우화』(천병희 옮김) 관련 리뷰 등을 읽게 되었고, 공감하는 바 있어 한 작가의 작품을 소환한다. 


일본 작가가 쓴 소설. 그러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독특한 구성 그렇다고 우화로 분류하기엔 좀 애매, 딱 이 정도였다. 책 표지를 보면 알겠는데 작가도 떠오르지 않고 작품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에야 3년 만에 겨우 공간을 확보하여 박스에 담겨 여기저기에 피로감을 준 애물단지 책 짐들을 겨우 푼 상태였기에, 두 권으로 엮인 이 책들을 직접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나절을 할애했지만 실패. 


막고 푼다고 이곳에서 ‘국내도서> 소설/시/희곡> 세계의 문학> 일본문학’이라는 분류에 따라 정확히는 번역 출간된 ‘일본소설’을 하나하나 검색하기 시작했다. 25권의 책이 한 묶음으로 모니터에 나타나는 검색을 얼마나 했을까? 국내도서로 번역 출간된 일본소설이 과연 몇 권이나 될까? 지루하고 단순한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문득 ‘유희’라는 단어가 그 책과 관련하여 떠올랐다, 유희(遊戲).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와 뭔 상관? 뭔가 연관이 있는 듯하기는 하지만 그간 검색에 할애한 시간이 아까워서 계속 막고 푸는 검색을 계속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책이 『천일의 유리1』과 『천일의 유리2』다. 원제 ‘千日の瑠璃’(1992년).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2007-04-04) 펴냄. 자주 나가는 책은 아닌 모양이다. 며칠 기다려야 함에도 이 작품을 구매하여 입수했다. 


지난해 봄, 난데없는 부음(訃音)을 수신했다. 서울 출장에서 돌아오는 KTX 안이었다. 약간의 ‘불법’을 감행하며 목적지를 광주로 변경했다. 해남에서 누군가를 만나 그이의 집에도 갔는데, 문득 그대가 생각이 나더라, 종가(宗家)의 후손이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확인차 전화했을 정도로 나와 닮은꼴이 많았던 형이었다. 


그해 여름, 그 형과 나는 그 형의 집(문화재)에서 특이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길이 5m 최대지름 3m인 계란(유선형) 모양 조형물을 대나무로 엮어 닭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장태’, 인근 동학혁명기념전시관에 전시될 소품을 만드는 일을 둘이서 하기로 한 것이었다. '장태'란 '닭장'인데 대나무로 엮은, 천적들로부터 닭들 보호하려고 왕대를 쪼개고 얇게 다듬어 타원형으로 엮은 일종의 닭 사육장이다. 


동학농민혁명 때 우리는 칼과 화살로 원군인 왜군들의 조총 방사에 맞서야 했다. 그 장태 안에 솜이불을 넣어 이것을 엄폐물로 삼아 굴리면서 전투를 했다. 그런 동학혁명전쟁의 상징인 장태를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그 형과 진행한 것이다. 


그렇게 전시품을 재현하는 며칠 동안 윤 형(‘윤’이라고 하자)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취중진담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그리 길지 않은 동안 에피소드는 적지 않았다. 그렇게 거기 머무는 동안 내가 그의 서재에서 간택하여 읽은 책이 『천일의 유리1』과 『천일의 유리2』다. 


문득 생각하자니 윤의 책장에서 읽는 책의 주인공이 어쩌면 윤과 비슷한지, 그렇게 읽던 책에 메모를 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그 집을 떠나면서 이 두 권을 책을 양해 없이 가져왔다. 그런데, 숱한 책 짐에도 없는 것을 보니, 누군가에게 그의 책을 빌려준 모양이다. 


1,000개의 시선 혹은 관점. 우화적인 너무나 우화적인 발상의 소설, 우화적이든 우회든 우의이든..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기술적으로는 시발점은 영화 <감시자들>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소년의 시선이고 관점이지만 1,000일의 1,000가지 관점이 에피소드인데 연결이 되어 한 편의 작품(소설)이 된다. 


빨간 우체통/윤재철


누구에게도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쯤은 있어

빨간 우체통 거기 서 있다


... (2연 생략) 


그래도 누구에게나

아직 받고 싶은

편지 한 통쯤은 있어

빨간 우체통 거기 서 있다. 


돌려줄 수도 돌려받을 수도 없게 된 이 책들, 그 주인공에게 조금 미안하고 화가 난다. 

지난해 봄 그 주인공이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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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계보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시오도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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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은 늘 힘겹고 비참하다. 인간에게도 그렇다. 이를 전제로 헤시오도스는 우리에게 교훈과 함께 경고한다. 인간들은 땀 흘려 농사짓고 배를 타고 장사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었다. 그 어느 날부터? '그 어느 날'에 대한 이야기다.

“헤시오도스는 그 원인을 인간들에 대한 신들의 시기심에서 찾는다. 인간들은 분수 이상으로 잘살고 싶어 하고, 그래서 신들이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는 것. 신들은 인간적 존재와 신적 존재의 차이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간들이 운명을 개선할 기회가 생기면 신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고통을 부과하여 그 ‘차이’를 유지한다. 이런 경향을 헤시오도스는 인류의 옹호자인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에서 발견한다. 

신들과 인간들이 재물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을 속여야 했다. 때문에 신들은 화가 나서 양식을 감춰버렸고, 인간들은 더욱 힘들게 양식을 구해야만 했다. 제우스는 불도 감춰버렸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들이 고도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벌로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가장 뻔뻔스럽고 교활하고 멋있게 치장한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갖은 악(惡)을 인간들에게 보낸다(<신들의 계보> 591~612행 참조).“ _『신들의 계보』 (천병희 옮김), <헤시오도스 작품의 이해> 중 정리.


신들의 시기심 발동, 인간 존재와 차이 유지하고 싶어

제우스가 이처럼 여자를 매력 있게 만든 것은 인간들이 "모두 자신의 재앙을 껴안으며 마음속으로 기뻐하게"(「일과 날」 58행) 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일과 날」에서 프로메테우스 관련 기술을, 90행까지는 「신들의 계보」를 따르는데, 이후부터는 독창적으로 전개한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인데, 정확한 번역은 '판도라의 항아리'다. 프로메테우스는 불(火光)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물하고 그 응징으로 제우스가 인간들에게 보낸 재앙이다. 이름난 절름발이 신(헤파이스토스)이 제우스의 계획에 따라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을 흙으로 빚은 것. 그런데 「신들의 계보」에서는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뿐 이름은 없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일과 날」(47~105행)에서야 등장한다. 판도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일과 날」은 자세하게 기술한다. 제우스의 명에 따라 헤파이스토스는 곧바로 '정숙한 처녀를 닮은 것을 흙에서 빚어냈고'(71행) 아테네는 그녀에게 허리띠를 두르며 치장해준다 등등.


'얌전한 처녀와도 같은 것'(신들의 계보)은 판도라(일과 날)

"……그러나 그녀의 가슴속에 아르고스의 살해자인 심부름꾼은/ 거짓말과 알랑대는 말과 교활한 기질을 만들었소./ 요란하게 천둥 치시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신들의 전령은/ 안에다 목소리를 넣고는 이 여자를 판도라라고 이름 지었으니/ 올륌포스의 집들에 사시는 모든 신들께서 빵을 먹고 사는/ 인간들에게 고통이 되도록 그녀에게 선물을 주셨던 것이오." -「일과 날」 77~82행

판도라가 신들이 인간(들)에게 준 선물이라면 그 판도라, ‘그녀에게 선물을’ 주었다는 것(82행). 따라서 선물의 주인은 판도라이므로 판도라가 개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녀에게 준 선물’이 그녀에게 부여한 여러 권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쨌든 제우스가 보낸 선물은 '상자'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항아리(pithos), '판도라의 항아리'(천병희의 번역)다.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된다. 제우스의 선물을 수령한 이가 에피메테우스다. 그의 형 프로메테우스는 지혜롭기에 사전에 제우스의 의중을 간파하고 어떤 선물도 받지 말라 당부하였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이름에 ‘사전에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가 답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형과는 대조적으로 동생은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에피메테우스)'이었다. 재앙을 당한 뒤에야 그런 줄 알게 되는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pithos), '판도라의 항아리'다.

이들 형제의 출생(「신들의 계보」 511행 전후 정리)은 이렇다. 복사뼈가 예쁜 오케아노스의 딸 클뤼메네와 이아페토스 사이에서 아틀라스(1,하늘을 떠받들고 있는)가 태어났다. 클뤼메네는 또한 거만한 메노이티오스와 '꾀 많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프로메테우스(2-1)와 '얼빠진 에피메테우스를'(2-2) 낳았다. 

복사뼈가 예쁜 오케아노스의 딸 클뤼메네 & 이아페토스→아틀라스(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클뤼메네 & 거만한 메노이티오스→프로메테우스(사전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사후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가 빵을 먹고 사는 인간들에게 끼친 최대의 재앙은 제우스의 선물, 판도라를 아내로 받아들였다.(<신들의 계보> 507행~514행) '머리가 잘 돌아가는' 프로메테우스가 속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제우스는 '얼빠진' 에피메테우스라는 틈새를 공략한다. 판도라는 '호기심'이 많았다. 본래 인간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처럼 판도라는 인간이 된 것이고, 그 항아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애를 태웠다. 집안 곳곳을 뒤져 항아리를 찾은 그녀는 마침내, 뚜껑을 열고야 만다.


"그러나 여자가 두 손으로 항아리의 큰 뚜껑을 들어 올려 그런 것들을/ 모두 내보내니, 인간들에게 그녀는 큰 근심을 안겨주었던 것이오./ 오직 희망만이 거기 부술 수 없는 집 안에, 항아리의 가장자리 아래 남고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는데,/ 그러기 전에 여자가 항아리의 뚜껑을 도로 놓았기 때문이오." -「일과 날」 94~98행


이와 관련하여 『이솝우화』 358편 중 제일 첫 번째 에피소드 <001.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들에게 좋은 일은 자주 생기지 않지만 나쁜 일은 날마다 일어나는 이유가 뭘까, 에 대한 해석이다. 


”좋은 것들은 허약한지라 나쁜 것들에 쫓겨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갈 수 있겠는지 제우스에게 물었다. 제우스가 좋은 것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에게 다가가되 한꺼번에 몰려가지 말고 하나씩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쁜 것들은 가까이 사는 까닭에 늘 사람들을 공격하지만, 좋은 것들은 하늘에서 하나씩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드문드문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판도라(인간들이) 어떤 이유로, 문제의 항아리를 가끔 열 때만, 인간들에게는 좋은 일이 가끔 생긴다는 것일까? 호기심에 따른 결과는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과 부정이 있는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호기심이 발현되어야만 좋은 결과도 낼 수 있다는 것일까?  


<판도라의 항아리와 노동의 탄생2>로 이어짐. 

[알라딘서재]판도라의 항아리와 노동의 탄생2 (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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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는 여인(궁녀)의 구강 구조까지 클로즈업을 하는 등 표음문자이자 '설형문자'인 한글의 창제원리를 디테일하게 소개한다.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을 영화를 통해 대중들이 알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 한 편의 영화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고, 사실이 그렇다. 천만관객 국내 영화가 너무 많아서인지, 이 영화의 관객이 채 100만을 넘지 못하는 현 상태가 아쉬운 이유다. [영화 <나랏말싸미>(THE KING'S LETTERS, 2018 제작, 2019.07.24 개봉, 954,800명(2019.08.31, 영진위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01. 말은 있는데 문자가 왜 없을까, 한글창제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주의(主義)는 프레임(frame)이 그렇듯, 맹목적일 때 고착화될 때 위험해진다.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고, 세월이 흘러 한때 사론이 정론으로 자리바꿈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主義)는 주의(注意)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이것만은 우리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세 가지 정도를 꼽으라면 그 첫째가 한글이다. 셋 중 하나로 조선후기에 시작된 민화(民畵)를 꼽기도 한다. 일본의 강점에 의해 조선이 근대화된 것이 아니라, 상인세력들의 급부상과 양반계급의 몰락 등 자발적인 근대화의 싹을 '민화'의 제작과 거래, 소유 등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광화문 한복판에 세종대왕상이 서 있는 것은 타당하다. 세종대왕이 주도한 한글창제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며, '민족주의'를 얘기할 때, 제1근거가 된다. 그런데, 왜 한글을 창제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결과적으로 애민(愛民)에 따른 훈민(訓民)의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의 4대 왕에 이르러 왜 갑자기 이런 사업이 추진된 것일까? 그 계기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거창한 이유가 아니고 (어쩌면 사소한) '호기심'의 발로라고 본다. 말은 있는데 왜 그 말을 기록할 문자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사소한 호기심은 문자혁명을 이룩했다.
조선창업 프로젝트를 주도한 정도전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 공정하게 경쟁하고 건강한 갈등이 있는 그런 나라를 꿈꾸었다. 한쪽으로 치우침으로써 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과는 다른 방식으로 왕권 강화책을 도모하는데, 창제한 한글은 결정적인 무기가 된다. 중앙집권의 강화, 민심을 왕정에 반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말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는 문자의 발명이었다. 특권(양반)층이 반발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한글 창제와 반포를 두고 왕권과 신권이 극렬하게 신경전을 벌인다. 이 영화에서도 세종대왕이 왜 한글을 창제할 생각을 하게 되는지, 그 출발이 '호기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에피소드(잘 기억나지 않는다)를 부각시켜야 했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하드웨어이건 소프트웨어이건 새로움 또는 새로운 것의 창조는 이 호기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불편함의 발견인데, 이 발견이 곧 호기심이고 호기심 때문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이 호기심을 억누르지 않고 그 궁금증을 풀었을 때, 발명품이 탄생한다. 한글의 탄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종대왕 제위 시에 현대의 과학에 힘입은 발명품처럼 그런 새로운 창안 품들이 속속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두루 감안할 때, 세종대왕은 호기심이 무척 많은, 그러나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실천적으로 결과물을 낸 과학자이자 언어 철학자가 된다. 이 영화의 영어명은 <THE KING'S LETTERS>다. 난독증도 아니고, 한글의 실체, 한글이 가진 힘을 제대로 홍보한 영화가 역사왜곡 논쟁의 거미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올해 아니 내년쯤의 한글날 TV영화로 방영하는 1순위 영화가 될 것인데, 새삼스럽게 불필요한 논쟁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호기심’에 대해 살핀다.

 

#2. ‘지혜 사랑’(철학) 원천은 호기심, 당대 현실에 대한 실망감에서 시작

"플라톤과 그를 따랐던 많은 철학자에 따르면,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철학의 원천은 호기심입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왜 전지전능한 신이 있는데도 악이 있는지, 무엇이 선을 선으로 만드는지 궁금해 합니다. 심지어 아이들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철학이 필요한 순간』(스벤 브링크만 지음, 다산초당) 29면
덴마크 사람. 철학 강연으로 유명하며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벤 브링크만의 ‘강의록’(책) 중 일부다. 철학은 우리가 1)지닌 개념을 검토하고, 2)더 명료하게 질문하고, 3)보다 더 정확하게 대답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철학이 호기심에서 시작된다는, 플라톤 철학의 출발점과는 좀 다른 관점이 있다. 현대 철학자 사이먼 클리츨리의 의견인데, 철학이 ‘실망감’에서 나왔다는 것. 우리 마음에 있는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는 실망감'이 정치철학에 대한 필요를 낳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열망을 낳았다는 것이다. 한편 크리츨리는 철학은 ‘신이 없다는 실망감’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폭력적이며 불공정한 세상'에서는 선이 끝끝내 승리할 때가 드물고, 악인이 행복하게 살기도 합니다."(앞의 책)
그렇다면 플라톤에서 전환점을 맞이하는 철학의 출발점이 '호기심'이란 것과, 현대 정치철학의 출발점이 '실망감'이라는 의견은 상호 충돌하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학교에서 배웠거나 인터넷에서 읽었거나 역사적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도 좋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크세노폰의 진솔한 회상에서 만나는 보다 진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떠올려도 좋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고, 그것을 억제할 수가 없어 아테네 시내를 어슬렁거린다. 그리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들, 권력을 쥔 정치가들,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예술가들을 만나 공개토론을 진행했다. 논쟁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인 양, 그의 분주한 행보는 호기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당대의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초기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철학자라면,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현실(정치를 포함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실망감'에서 (플라톤이) 철학하고 교육효과를 늘리려 집필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있었고, 당대에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소피스트(연설가들)들이 있었지만, 서양철학의 진정한 출발은 소크라테스-플라톤이라도 보는 데 이의는 없을 듯하다. 서양철학의 전통은 이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고, 때로는 동양의 사상과 교류했다. 철학자를 뜻하는 영어 'philosopher'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는 '지혜 사랑'을 직접 언급한다. 철학자들에게는 있지만 소피스트들에게는 없거나 결여되어 있는 것, 그 차이를 설명하면서다. 최근 발간된 『철학의 역사』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의견을 발견한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중시하는 지혜란 단지 어떤 대단한 인물이 참이라고 말해주었다는 이유로 믿는 게 아니라 논쟁하고 추론하고 질문하는 데에 바탕을 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지혜는 수많은 사실을 아는 것이나 어떤 일을 하는 법을 아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한계 등 우리 존재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한 것과 거의 흡사한 일을 하고 있다." -『철학의 역사』12~13면, 나이절 워버턴, 소소의책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거의 대부분이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당수는 자문자답, 대답하기 위해 스스로 하는 질문이다. 질문은 관심, 질문은 문득 고개를 쳐든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앞서 사이먼 클리츨리의 의견(철학은 실망감에서 출발한다)은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관점에서 아테네를 바라보았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기에 미워할 수도 있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아테네 정치가들(실력자들)이나 명망가들, 투표권을 가진 시민의 상당수에게 소크라테스는 존재 자체가 불편함이었다. 사형판결로 자명했고, 자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계의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앎, 과학의 출발점도 호기심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당대의 아테네 시민들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테네 시내를 배회하는 소크라테스를 불편하게 여겼을까? 호기심의 어두운 면이 있다.

 

#3. 수다에는 수다 자체 못지않은 큰 악덕이 따르는데, 호기심이다.

플루타르코스(기원후 50년 이전~120년 이후)의 철학에세이 「수다에 관하여」에서는 수다와 관련된 호기심의 실체가 드러난다. 수다에는 수다 자체 못지않은 큰 악덕이 따르는데, 호기심이란다. 수다쟁이는 (무엇이건) 말을 많이 할 수 있기 위해 많이 듣고 싶어 한다는 것, 세상사 이것저것, 근동의 장삼이사에 대해 필요 이상의 호기심을 갖고, 필요 이상의 호기심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 가짜뉴스가 판치는 작금의 세상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특히 자신의 수다에 새로운 소재를 공급하기 위해서 비밀스러운 또는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꼬치꼬치 캐묻고 돌아다닌다. 그들은 얼음을 손에 들 수 없으면서도 놓으려고 하지 않는 어린아이들과도 같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다쟁이는 남의 비밀을 가슴에 품지만, 그곳에 간직하지 못하면 마치 뱀에게 물리듯 그 비밀에 물리고 만다고. 동갈치나 독사는 새끼를 낳다가 터져 죽는다는데, 비밀도 입 밖에 나오면 누설자를 파멸케 하기 때문이다." -『수다에 관하여_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 12장 508c~d
앞서 수다쟁이는 "말을 많이 할 수 있기 위해 많이 듣고 싶어 한다"고 했다. 상대방의 의견을 귀를 기울이는 '경청'은 그 자체로는 훌륭한, 특히 현대의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미덕이다. 그런데, 말을 많이 하려고 듣는, 곧 정보수집 차원에서 ‘엿듣거나’ ‘캐묻는’ 경청은 지양되어야 하는데, 그 동력이 호기심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인용에서는 수다쟁이의 호기심보다는 비밀을 간직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폐단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과도한 호기심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사형된다. 이후 500년이 지난 기원후 100여 년 무렵, 플루타르코스는 수다 관련 글을 썼다. 그런데 이 저자는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그리스(아테네)의 황금시기에 쏟아진 저작들과 작품들도 두루 읽고, 사례를 수집하여 집필했음을 인용과 주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처럼 '섬김' 수준으로 보기보다는 그냥 당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호기심이 발동한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할 뿐 아니라 곳곳에서 이야기좌판을 펼치는 수다쟁이, 성가신 존재로 여겼던 것은 아닐까? 보통 사람들로서는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논리를 펼치는 것이며, 이것저것 관심사가 아닌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대화를 엿보았다면 그랬으리라. 소크라테스 자신이 '캐묻지 않은 삶을 살 가치가 없다'(<변론>)고 재판과정에서 당당히 밝혔다. 그간의 삶이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죽어 저세상에 가서도 이런 철학의 방법론을 고수할 생각이라고. 소크라테스의 수다는 제자 플라톤에 의해 정리되고 보완됨으로써, 서양철학의 아침 해, 둥근 해로 떠올랐음에도 말이다. 플루타르코스는 같은 책에서 '수다'라는 고질적인 병에서 벗어나는 처방을 한다. 여기에 거론되는 소크라테스를 보면, 소크라테스를 그렇고 그런 수다쟁이쯤으로 폄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호기심은 철학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50%의 확률로 잘못 그리고 과도하게 작동하면 수다쟁이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하는 등,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갖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허기나 갈증을 느끼지 않는데도 먹거나 마시도록 유혹하는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를 피하라고 권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수다쟁이는 가장 마음에 들거나 평소 지나치게 심취하는 화제는 조심해야 하며, 그런 화제에서는 밀려오는 말의 물결에 완강하게 저항해야 한다." -『수다에 관하여_플루타르코스의 윤리론집』 22장 513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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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세트 - 전7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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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온라인서점에 왔다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플라톤전집 '세트'가 나왔음을 알았다. 지난 4월 하순이던가, <플라톤전집2>와 <플라톤 전집7> 간행으로 사실상 플라톤전집이 완역(완간)되었고, 주요 일간지들에 실린 인터뷰를 읽고 소개한 기억에 있어 반가웠다. 하지만 전7권이나 되는 전집 세트가 발간되기까지 시일이 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세트 완간이 이뤄졌다. 그리고 문득, 앞서 기술한 경지정리가 한창인 겨울 들판의 논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체가 신규번역이거나(전집7), 수록된 8편 중 3편(에우튀프론/에우튀데모스/메넥세노스)이 신규번역인 전집2는 큰 고민없이 전집의 일부로 펴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2012년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향연> <파이돈> 등을 묶은 플라톤 대화편 첫 권을 출간한(플라톤전집1에 해당) 이후 신규 번역원고가 들어올 때마다 몇 편씩 묶어 간행된 천병희의 플라톤 대화편 단행본이 한두 권이 아니다. 거기다 양장본들이니 재고 부담도(반양장에 비해) 클 수밖에 없다. 완역을 했고, 마지막 번역까지 책으로 간행되어 플라톤전집을 완간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집 '세트'로 단장하는 일은 물심양면으로 겨울논들의 경지정리 못지 않은, 또 나름대로의 고민을 안은 '사업'이지 않았을까? 여느 때보다 출판시장이 위축된 사정을 감안하면 물심양면 더욱 그렇다. 천병희 선생의 플라톤 대화편들이 간행될 때마다 빠짐없이 구입해서 읽은 필자로서 '전집 세트' 제작 과정을 복기(復棋)하듯 살피는 것이다.

생각보다 일찍 전집 세트가 출간된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고민의 흔적을 엿본다. 물론 기존 독자들은 억울함이 없지 않다. 새롭게 장정된 전집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어렵게만 느끼던 플라톤의 대화편들 상당수를 천병희 선생님 덕분에, 출판사의 끊임없는 투자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제 새롭게 플라톤의 세계에 진입하는 한국어 독자들에게 전집 세트 발간은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독서의 모든 시작과 끝은 텍스트 자체의 독해(와 해독)에 있다. 신비평이 지향한 작품 자체에 집중하시오, 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텍스트 자체를 읽으면서 그 행간의 의미까지 읽을 수 있다면, 번역서에서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한겨레>인가 완간기념 인터뷰에서 “끝까지 읽도록 쉽게 번역하는데 공을 많이 들였죠.”(기사 제목)라고 번역가가 밝혔듯이, 천병희의 번역이 난해하기로 소문난 플라톤과 한국어 독자들이 친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얘기가 길어지고 있다. 다시 한 번 플라톤전집이 완역되어 세트로 제작된 일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주머니가 헐거운 독자들, 특히 청년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을까? 무엇보다 책의 장정이 고급스러워지고 두꺼워지면, 가격만이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 오류를 수정하거나, 표현을 더 다듬는 일이 더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테아이테토스>나 <향연>과 같이 반양장으로 저렴한 가격에 플라톤의 대화편들의 낱권들을 펴내는 일, 이 출판사의 푸른시원 시리즈도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계속 나왔으면 좋을 듯하다. 낱권들의 쇄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보다 매끄러운 번역으로 수정하는 일이 계속되고, 전집의 낱권들이 쇄를 거듭할 때에 반영되면 좋지 않을까, 반가움에 이런저런 생각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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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2 08: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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