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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3.0, 내일을 위한 어제와의 대화
민은선 지음 / 라온북 / 2025년 1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패션은 아름다워 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됐다. 지금은 '우리'에서 '나'로 변한 썸원(someone)의 시대다. 달라진 인간의 욕망을 읽어내려면 사회와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읽어내야 한다.
이제는 소비자와 소통하는 시대다. 옛날에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면 됐는데 이제 디자이너에게는 마케터적인 소양, 인문학적인 시선이 필요해졌다. 패션업 종사자들은 모두 마켓 크리에이터가 돼야 한다. 소비자들의 욕망을 캐치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를 판매의 대상이 아닌 친구로 여겨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소비자는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찐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패션 3.0 내일을 위한 어제와의 대화>는 패션업의 어제를 통해 그 본질을 알아보고 패션업의 오늘과 내일을 전망하는 책이다. 왜 대화라고 했을까? 대화란 연결이다. 앞으로는 패션에도 소비자와의 대화가 필요해지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예측하자는 취지가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의 부록에는 한국 패션 50년의 연대기가 실려 있다.
패션 3.0
3.0이라는 용어는 웹 3.0에서 유래했다. 웹 3.0은 인터넷의 발전 단계를 구분하는 용어다. 데이터를 읽기만 하는 건 웹 1.0, 데이터를 읽고 쓸 수 있는 것이 웹 2.0, 그리고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사용자가 데이터와 디지털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 것이 웹 3.0이다.
패션 3.0의 특징은 디자이너와 생산자가 직접 고객과 소통하고 거래하는 탈 중앙화다.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옷을 디자인하거나 제작하는데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NFT 기술로 디지털 패션 아이템에 대한 소유권을 증명하고 거래하며, AI 기술로 소비자에게 개인 맞춤형 패션 추천 및 스타일링을 제안한다. 소비자가 패션 브랜드와 상호 작용하며 개인 맞춤형 패션 경험을 하는 것이 패션 3.0이다.
패션(Fashion)이란?
나는 나만의 개성이자 스타일이라고 본다. 저자는 여기에 철학과 콘셉트를 추가한다. 청바지와 흰 티 하나를 고집한다면 그 역시 나만의 패션이 될 수 있다. 가방 지갑 벨트 모자 장갑 시계 등은 패션 아이템이다. 요새는 텀블러까지 패션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패션=패션(passion)이다?
과거에는 이 말이 맞았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 시즌에 100개가 넘는 브랜드가 론칭될 정도로 열정과 에너지가 넘쳤다. 하지만 열정이 패션이라면 지금까지 존재해야 한다.
패션=비즈니스(Business)다?
이 등식이 성립했던 시기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패션 업은 자본과 조직을 가진 대기업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감성을 계수화하겠다던 삼성과 LF(LG 패션)는 글로벌은커녕 여전히 해외 브랜드 수입에 골몰하고 있다. 현재 패션 업은 정체 단계다.
결국 패션 업은 열정과 비즈니스가 공존할 때 성공할 수 있고, 이를 연결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래서 저자는 패션과 사랑에 빠진 열정적인 인재들이 연결돼 비즈니스를 할 때 비로소 유기체가 된다. 적어도 민감한 더듬이를 가지고 일과 일상의 구분 없이 일을 즐기며, 휴식 할 때도 이 민감함을 유지하는 그런 사람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다.
자기다움
이제는 나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만의 색깔로 한다. 세계 패션 바이어들이 트레이드쇼에서 바잉 하는 대신 인스타그램에서 발굴하는 비중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답게가 아니라 '나답게'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야 한다.
파리와 밀라노의 패션 매장들이 한국인 출입 금지 팻말을 매장 앞에 붙여 놓은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가 안목과 베끼는 손재주가 뛰어났다는 것이다. 지금도 짝퉁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짝퉁 많이 들고 다녔다. 즉 우리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선발주자)의 그림자를 보며 달려온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빠른 추격자)였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퍼스트 무버가 될 차례다.
이제는 나의 취향이 더 중요한 시대다. 1000명이 있다면 1000가지의 라이프스타일이 존재한다. 미니멀 라이프가 아닌 아예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도 있고, 유니클로 같은 가성비를 추구하거나 좋은 물건 하나를 구매하는 스타일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고객을 더 많이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이제 가격도 비싼 게 좋다는 이분법 시대는 끝났다.
나는 모든 물건은 퀄리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명품인데도 얼마 못 쓰고 테두리가 닳아버리는 가방도 있고, 중저가 브랜드인데도 오래오래 쓰는 가방도 있다. 10년 넘게 입어도 유행 타지 않는 디자인에 품질도 그대로인 명품 옷이 있는 반면, 금방 후줄근해지는 명품 옷도 있다. 그래서 나는 비싸고 퀄리티가 좋거나 싸고 퀄리티가 좋거나 늘 질리지 않고 오래가는 것을 선호한다.
브랜드 철학
철학이란 콘셉트의 정신적인 토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브랜드 철학 하면 등장하는 파타고니아의 철학은 자연사랑, 자연보호다. 심지어 우리 제품을 사지 말라고까지 외친다. 시작도 끝도 자연이다. 지속 가능한 원단 사용, 내구성 높은 제품, 소비 절제, 그린마케팅 등 직원들의 행동 양식까지 그 개념 아래 풀어간다. 이런 것을 브랜드 철학이라고 한다. 그럼 '시크한 감성을 바탕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은 철학인가? 아니다. 그냥 설명이다.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스텔라 매카트니, 스위스의 프라이탁, 어나더 투모로우, 못생겼지만 편한 신발이라는 뚝심 있는 철학으로 사랑받는 크록스, 비어있어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철학에 기반을 둔 무인양품, 해피 피플, 해피 플래닛을 모토로 한 오일릴리, 뮤지션과 패션 디자이너가 만나 음악과 패션을 결합한다는 의미로 탄생한 메종키츠네, 세상을 놀라게 하라는 철학을 지닌 젠틀몬스터 등 행동이 따르는 철학이 있어야 브랜드가 오래갈 수 있다.
패션 유통
옛날에는 옷을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이나 아울렛, 또는 시장에서 샀다. 나는 엄마랑 남대문 시장이나 터미널 지하상가를 많이 갔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 백화점에서 해온 역할을 온라인 플랫폼에서 대신한다. 나도 옷감과 사이즈를 확인하러 매장에 들리는 것 외에는 모두 온라인으로 구입한다. 해외 직구도 가능한 지금 세상은 모든 브랜드와 유통이 전 세계 소비자를 향해 일시에 경쟁하는 평평한 무한 경쟁의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
이랜드와, 베이직하우스, 코오롱 스포츠의 중국 진출 이야기, 도쿄 도라노몬 힐스, 베이크루즈, 스페인의 경험형 공간 망고틴, 키스(KITH), 10코르소코모 카페, 뉴욕 첼시의 편집숍 스토리, 온라인 럭셔리 패션 쇼핑몰 네타포르테의 남성판인 미스터 포터 등을 통한 콘텐츠와 브랜드 이야기도 재밌었다.
그중에서 어른들의 서점 다이칸야마의 츠타야(T-site)와 도쿄의 긴자식스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국내 백화점들은 MZ세대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했지만 막상 매출에 훨씬 더 영향력이 있는 시니어 고객을 위한 혁신이 없다. 이제는 실버 마켓, 시니어 마켓, 그레이 마켓, 골드 마켓이 아니라 Ageless의 A-마켓으로 새로운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에 따른 거대 시장을 노려야 한다.
패션 = 빌런 산업
패션이 지구를 가장 더럽히고 생명주기를 단축시키는 빌런 산업이라고 비판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염료는 한 해 4300만 톤의 화학물질이 발생하고,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천억 벌 이상의 의류 중 73%가 브랜드 가치 유지를 위해 소각, 매립된다. 패션 기업은 항공이나 해운 산업보다 온실가스 배출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한다.
이런 비판을 방어하기 위해 '지속 가능함'이라는 단어를 넣게 되었다. 지난 10여 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일 것이다. 각종 산업에서 이 단어만큼 자주 등장하는 단어도 없다. 패션산업에서도 이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거의 트라우마에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헌 옷을 가져오면 새 옷으로 교체해 주는 기업들도 늘어났다. 자사 재고 의류 소재를 활용해 리디자인 하고 다양한 패치 작업으로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중고 패션 플랫폼 기업들은 지속 가능성을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이며 환경오염을 대체할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저자는 재활용 소재로 만든 제품과 중고의류 리셀 시장이 과연 얼마나 지속 가능성에 기여했고 탄소 배출량을 줄였는지 그저 마음만 편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K 패션
K 팝, K 드라마와 영화 등 컬처 콘텐츠에서 시작한 K 붐이 뷰티에서 패션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 한큐백화점 우메다 본점에서 열린 마땡킴의 오사카 팝업스토어의 성공, 커다란 플라워 프린트로 히트친 마르디 메크르디, 널디, 무신사 등 모두 우리나라 브랜드다.
화장품과 패션 시장 중 어떤 시장이 더 규모가 클까? 둘 다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었다. 패션 시장 규모는 부티 시장의 6배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K 뷰티와 K 패션 두 시장이 서로 트렌드를 공유하며 공동 마케팅으로 소비자에게 통합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시너지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다. 세대 간의 단절이 아닌 연결, ODM 기업과 스몰 브랜드들을 이어 줄 AI 테크 기업과의 연계, 무대 뒤편으로 밀려나 있는 선배들과의 협력 등을 제안한다.
이제는 과거를 소화하고 더 발전시켜 축적과 연결의 역사를 새로 씀으로써 패션이 산업 경쟁력에서 국가 경쟁력이 되도록 나답게, 대한민국답게를 지향하며 힘을 합쳐 함께 가야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