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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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 가정을 갖고 싶다는 가난한 청소년들의 소망은 정상가족 프레임 밖에 있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반응이다. 이들은 정상가족을 지키지 못했어도 부모님에게 잘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다. 이것은 그 프레임 밖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험했고,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지켜준 존재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영성이 부모님께 더 잘해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도, 부모님이 힘들게 정상가족을 지켜서 주류질서로 돌아온 데 대한 감상인 셈이다. 그 마음은 아름답지만, 반대 편에서 멍들고 있을 많은 청소년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상가족’보다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더 얘기하고 관심을 모아야 한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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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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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견디는 게 삶의 힘

네 번째 만났을 때, 소희는 스물네 살이었다. 겉으로는 어느 대학생과 같아 보였다. 처음 봤던 열일곱 살 때보다 안정되어 있었고 자신의 길을 찾은 것 같았다. 또 지금껏 자신이 찾은 길로 열심히 매진해왔으니 이제 마무리만 잘 지으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속내는 달랐다. 여전히 관계 맺기가 어려웠고, 학교라는 환경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정신없이 바빠서 감정을 돌볼 수 없을 때는 몰랐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두려움과 불안이 스멀스멀 엄습했다. 소희는 스스로 "견디는 삶"이라고 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데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청소년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요. 이걸 극복해야 하는데 안 되니까, 나아가야 하는데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감정이 폭발할 때와 다시 잠잠할 때, 다시 폭발할 때, 이게 너무 들쭉날쭉하다 보니까 굉장히 힘들더라구요. 근데 다들 그래요. "너는 괜찮아졌다." "잘 살고 있다." "잘 사는 것 같다." 제가 저 스스로 굉장히 불안한 상황인데 다들 괜찮다니까 표현을 못 하고 있어요. 계속 견뎌내는 게 삶의 힘인 것 같아요. 포기하지 않고 이 힘듦을 견뎌내면서 묵묵히 살아가는 것. 포기하지 않게끔 다른 데서 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곳이 없어요. 저 스스로 힘을 내야 하는데 이제 지치더라고요.

소희가 대인관계에서 불안을 느끼는 또 하나의 원인에는 끝없는 죄책감과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환멸이 있었다. 가출과 동거를 반복하던 시절, 비행을 저지르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의 모습과 지금 대학생으로 변화한 자신의 모습에서 간극을 경험했고, 그 괴리감 속에서 자신이 가식적이라는 생각, 본래의 모습을 찾지 못하는 데서 오는 소외감 등을 느끼고 있었다 소희는 사회적 규범을 넘나들었던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단 이 문제는 소희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소희가 혼자서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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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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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상상을 하는 이유는) 실질적으로는 죽는 것보다 누가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게 더 크겠죠? 그런데 안 풀리더라구요. 그래서 아직도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답답할 때도 있고… 왜냐면 얘기는 어떻게 됐든 할 수 있잖아요? 근데 제가 갖고 있느느감정들까지는 전달이 안 되잖아요. 아, 나 힘들어 그것뿐이잖아요. 사람이 보통 다른 사람이 힘든 것보다 내가 힘든 게 더 크게 느껴지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얘기해도 별로… 더 우울해져요.

소희의 우울함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자신을 잡아주고 힘든 삶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절박함 속에 있었다. 소희는 친밀한 누군가와의 관계를 그리워하고 사람들이 무섭지만 끊임없이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했다. 그것은 다 자신이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그렇다고 했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삶


소희네 가족은 가난이 대물림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조부모의 가난과 병력이 부모의 양육 조건을 부실하게 해서 어머니는 교육과 돌봄이 결핍된 성장기를 보냈다. 그 결과 어머니는 학력과 노동 능력이라는 사회적 기반을 얻지 못했고 한부모가 되어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자녀들을 양육했다. 게다가 우울증까지 앓게 되면서 이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나 바람까지 약화되었다. 의지할만한 다른 가족도 없이 정신적,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만성적으로 빠졌다. 어머니는 소희에게 ‘신경을 안쓴’ 게 아니라 ‘신경을 쓸 수 없었’던 셈이다.
소희는 어머니의 취약성 때문에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하였다. 소희가 말한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삶"은 이런 교육과 돌봄의 공백 속에 위치한다. 사실, 소희에게 잡아줄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소희 어머니도 누구도 잡아주지 않는 외로운 삶이었다. 소의내 가족의 대를 이어온 가난은 전형적으로 환경에 의해 축적되어온 양상을 띤다.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고 볼 수 있고, 오히려 이 열악한 상황에서 어머니를 지탱하게 해 준 것은 소희와 소희 오빠였는지도 모른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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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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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체계는 가난한 청소년을 도와줄 수 있는 정보와 공간과 인력을 그나마 최소한으로라도 갖추고 있었다. 미국은 ‘학교사회복지’라는 시스템 속에 학교마다 전문인력을 필수적으로 배치하고 있고 유럽은 국가나 지역 공동체의 공적 기능으로 복지가 탄탄히 자리 잡혀 있었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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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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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취재를 보라.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해야 할 것을 한다.

직업상 할 만한 반성을 한 게 아니라, 성찰하지 않는 대중을 위한 일종의 대속 작업을 했다. - P4

왜 우리가 ‘타자의 고통’에 섣불리 공감하기보다 고통을 겪는 타자의 공간에 침범하는 걸 더 조심해야 하는지, 왜 우리의 얄팍한 이해력은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할 때’가 아니라 ‘다 아는 척할 때’ 더 나빠지는지. - P6

고통을 많이 볼수록 인간이라는 종을 잘 이해하게 될 거라 기대했다. 뭐든지 최대한 많이 보고 싶었다. 잘 본 뒤에, 잘 보여주면 된다는 원론만 알았다. 고통을 보는 일,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에 따라 붙는 여러 복잡한 감정이나 윤리적 고민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지 못했다. - P10

사건의 쟁점은 부모가 자녀들을 학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는가였다. 머리카락을 밀어버렸다는 건 아동학대의 정황을 드러내는 매우 강력한 증거로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검게 쪼그라들어 미라처럼 말라붙은 아이들, 그중에서도 바짝 밀린 머리는 대중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혹은 ‘보여줄 수 없는’ 고통처럼 보였다.

논의 끝에 우리는 시신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모자이크를 씌우기로 했다. 진상을 알린다는 명분이 있다고 할지언정 잔인한 장면을 적나라하게 공개해도 된다는 윤리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면, 많은 사람이 쉽사리 마음을 포갤 수 있도록 ‘매끈한 고통’으로 만드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학대의 실체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를 장면을 싹싹 지워나갔다.

흐릿한 빛깔만으로 아이들이 당한 아동학대와 상해치사의 끔찍함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이게 과연 맞는 걸까. 그러나 만일 원본 화면을 그대로 송출한다면, 그 이미지가 잔혹함 자체만을 소비하는 데서, 이미 죽어버린 아이들을 우리가 눈으로 한 번씩 더 죽이는 데서, 혹은 끔찍함 자체 때문에 눈을 돌리는 데서 더 나아갈 수 있을지 확신하기 쉽지 않았다. - P13

영상 각도를 토대로 상황을 복구하면, 누군가 바로 앞에서 죽어가고 소방당국과 의료진, 시민이 응급처치에 나서는 와중에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렌즈를 현장에 겨누고 녹화 버튼을 누르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10.29 참사 당시 촬영된 영상이 증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름 아닌 구경꾼들의 존재.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영상을 유포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일부 방송사가 이 현장 영상들을 뉴스에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단지 영상에 찍힌 모습의 참혹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지가 끔찍해 보인다는 것이 늘 그 장면을 볼 수 없는, 보면 안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영상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에는 피해자들의 초상권과 더불어 촬영자들의 태도가 큰 영향을 줬다고 본다. - P24

사고 현장에서 언론사들은 의료진이나 구급대원의 역할과는 확연히 다른,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역할을 맡고 있지 않은가? 기자의 카메라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경꾼’의 시선이라는 비난에서 간단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걸까? 기자들은 촬영자들이 직접 제보하지 않은 경우에도 영상을 다운로드하는 여러 기술을 활용하여 영상을 확보했다. 논란이 된 동영상들은 사고 초기에 여러 뉴스 채널을 통해 방송되었다. 영상에 대한 여론을 의식해 뒤늦게 사고 당시 영상들을 일제히 쓰지 않기로 한 국내 언론사들의 결정에 수긍하면서도, 일견 공범자가 손을 터는 듯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카메라’에 관한 오랜 공포가 있다. 찍고 있지만 상황을 냉담하게 기록할 뿐,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 카메라. 이 공포는 카메라를 꺼내들어 남의 절박한 고통을 보고 듣고 기록하고 생중계하는 순간부터 시작돼 편집하고 재구성한 뒤 널리 퍼뜨린 이후까지 이어진다. 공포의 근원은 이걸 찍어서 보여준 뒤에도 내가, 이걸 본 뒤에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못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 P28

고통의 중개인이 미디어든, 개인이든, 남의 고통을 궁금해하고 알아내는 일은 도움을 주고 해결해 주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정당화하기 힘들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했다는 죄의식은 대개 목격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다. - P32

숨가쁜 추모와 기간을 정한 애도를 하며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자못 엄숙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본 뒤 슬픔에만 머무르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하다. 구경하는 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본 뒤에는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고 우리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이 남아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선언은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정치가 가동되는 순간을 원천 봉쇄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지는 않을까? 하나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알려져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고, 슬픔은 많은 이유 중 하나이지 전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아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동료시민의 역할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거 이야기되어야 한다.

만일 슬픔에만 머물러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 역시 매우 명확해야 할 것이다. 정치와 슬픔은 공존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니다. 어떤 슬픔은 사회적 실패에서 오고, 공공영역의 오류를 해소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목격한 장면이 구경거리로 소비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 대화는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P34

인터넷에서 펼쳐지는 말의 향연은 당연히 충분치 않다. 그걸 알고 있으면 된다. 비평가 존 버거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인용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 - P37

데이팅 애플리케이션처럼 뉴스를 휙휙 넘기며 눈길을 끄는 뉴스에만 반응하는 것 역시 인터넷이 새로 발명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남의 고통을 전시하고 구경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통을 포르노처럼 소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오래된 윤리적 고민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는 오래전부터 ‘그렇다’는 것 하나뿐 아니었나. 디지털 환경이 ‘정말’ 바꿔놓은 게 무엇인지를 가려내려면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

고통의 포르노 운운하기 전에 인터넷이 불러온 진짜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는 죄책감의 총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죄책감과 무력감의 원천이 된다.

사람들은 숱한 플랫폼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제법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이 무겁다.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고, 온라인 포럼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참여하고, 소식을 퍼 나르고, 기부를 인증한다. 이런 행동의 동기는 고통을 봤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온다. 외면하고 있다는 수치심을 지우기 위해서거나, 온라인에 복제되어 있는 자아정체성에 도덕적 이미지를 더하기 위해서일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히 나을 것이라 믿는 바로 그 좋은 마음이다. - P47

우리가 이미 잘 알듯이, 온라인 대화는 단순히 온라인에서만 끝나는 가상 대화가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시내로 나가서 흑인 민권 활동가들의 팻말을 찢고 주먹으로 때렸다. 실제로 그들은 시내로 나가서 흑인 민권 활동가들의 팻말을 찢고 주먹으로 때렸다. 캡사이신이 함유된 곰스프레이를 사람에게 뿌렸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그 장면을 페이스북을 생중계했다. 가상과 현실은 상호작용하며 뒤엉켰다. 실시간 영상의 댓글창에는 응원이 가득했는데, 사람이 얻어맞고 있는 모습이 여과 없이 방송되었지만 폭행당하는 이들을 연민하는 반응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연민한 건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트럼프가, 그리고 지지자 집단이 가장 큰 고초를 겪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의견을 표현하며 시민적 자율성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었을까? 각자의 확증편향 안에서 모은 정보를 기반으로 한 선택적 연민과 나르시시즘의 끝은 폭력이었다.

디스토피아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정확히는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해졌다. 편향은 온라인에서 우리가 드러낸 자기 정체성과 취향의 결과물이다.

신자유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은 현대인의 자기계발적 태도, 무언가를 배우거나 교훈 삼고, 변화를 만들어 자기효능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 정도가 우리의 믿는 구석이 될 수 있을까. 극단과 극단을 부추기는 가짜뉴스가 그들만의 진실을 만들어가고 있는 가운데, 어떤 말들은 패셔너블하게만 쓰일 뿐 진정한 의미에선 불리지 않는 처지가 되어 우리를 기다린다.
진실과 사실, 연민과 공감, 이해와 대화, 정의와 윤리, 자유와 평등, 다양성과 협력, 저항과 투쟁, 고통과 연대가 그저 매력적인 상품이나 공허한 수식어로 전락하지 않도록, 우리가 막아설 수 있을까? - P53

흉악범의 얼굴이 공개되는 순간 관심은 한 명의 개인에게 쏠린다. 드물게 응집된 사회적 에너지가 이 사람이 누구이고, 어떻게 자라왔고, 어떤 학창생활을 보냈으며, 평소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파헤치는 데 소비되어 버린다.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한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데는, 일견 속시원한 구석이 있다. 실제 양형과 국민의 법 감정이 크게 어긋나는 경우에는 범죄자의 명예와 평판을 실추시키는 것만이 현실적인 해결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개인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 방향을 틀어야 한다. 범죄가 일어나도록 방조하는 사회 구조는 물론이거니와, 얼굴 공개라도 하지 않으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법 시스템을 가리켜야 한다. 믿지 못하는 대중보다도 범죄의 무게에 걸맞지 않게 가벼운 처벌을 일삼는 사법부가 더 큰 문제여서다. - P69

지금 일어나는 위험을 알리고, 경고하고, 서로가 안전하도록 다 함께 지켜보는 일은 공동체 사회에서 무척 중요한 기능이다. 공동선의 영역이기도 하다. 국영방송인 KBS가 재난방송 주간방송사를 맡아 악천후 보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방송과 신문이 날씨의 힘에 복종하듯 뉴스의 우선순위를 밀어 올리는 것도 안전을 위해서다. 그런데 궂은 날씨의 스펙터클이 선하고 아름다운 의도를 꽤 이상하게 오염시키거나, 비틀어버릴 때가 있다. 약자의 고난은 구경거리로 보여지고, 재난현장은 대상화되어 정치적 포토월로 전락한다.

예를 들면, 일가족이 생명을 잃은 반지하 침수 현장을 찾아간 대통령의 사진이 고통을 굽어살피는 지도자의 이미지인 양 홍보자료로 유포된다.


(2020년 코로나19가 막 유행하였을 때 학생들은 학교에 갈 수가 없었고 빈곤한 학생은 급식을 먹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보호자는 열악한 직업도 잃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들에게 교육청과 자치구는 라면 등의 식료품을 배포했다.
조희연 교육감은 11개 지역청을 순회하며 지역청당 2개 가구를 직접 방문하여 라면을 전달했고, 어느 가정을 방문할지는 각 지역청에서 섭외를 하였다.
당시 나는 00교육지원청으로 발령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육복지센터의 도움을 빌려 2명의 학생을 섭외할 수 있었다.
학생이 다니는 학교와 주소를 과장님께 전달했는데, 당시 과장님은 구글지도로 그 집의 외관을 검색했다. 그리고 건물이 깨끗해 보인다며, 외관이 열악한 가정으로 다시 섭외하라고 하였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지자체에서 지원한 임대주택이고 학생들의 가정이 어렵다고 반드시 허름한 집에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자들도 동행할텐데 학생들이 느낄 수치심도 고렿해야 한다며 설득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분은 그런 분이셨다.

우리 아이들은 다 쓰러져가거나 어딘가 부숴져가는 집에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교육감이 그런 집을 방문해서 라면을 전달해야만 홍보자료가 되는 것인가? 애당초 이런 이벤트 자체가 싫었지만. 많이 화나고 심한 충격으로 남았다.) - P79

끈적한 기름때가 배어 있는 오래된 문고기를 밀어 한 사람이 더 발을 딛기도 어려운 방에 몸을 디밀고, 상황이 좀 나아졌으면 해서 인터뷰를 나왔다고 설명하거나 그마저도 낯이 없어서 날씨나 더위 이야기부터 주워섬겼다. 그럴 때마다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게 뻔한데도, 혹은 느리게나마 변화가 오더라도 여기까지 닿지 못할 수 있는데도 그의 고통을 속속들이 보여달라고 하여 기록하고 알리는 일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무례하고 염치없는 일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챘다. - P82

"뉴스로 다룰 수야 있지. 끔찍한 재앙에 적응해 살아가는 인간의 회복탄력성에 대한 이야기론 가능하겠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최소한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는 정도야. 우리가 해결책을 발견한 게 아냐. ‘저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 당장 죽지는 않는 방법을 발견한 것 같아. 참 잘하고 있네’라고 외신들이 소개하는 꼴이야. 문제의 규모에 비해 게으르고 형편없는 대책들인데도 해결책이라니. 정말 부조리하지 않아? 기후 위기를 해결했어? 죽음을 정말 막아냈어? 이건 본질을 가리는 뉴스야."

방글라데신는 아시아의 빈곤한 국가 중 하나다. 개발을 위해 앞장서서 탄소를 배출한 나라가 아니다. 기후 위기에 대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제반시설을 갖추지 못한, 극도로 가난한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을 기후 위기의 샘플이자 해결책으로 소개하는 뉴스는 누구의 시선인가.

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 그들의 날씨가 우리의 날씨가 아니고 그들의 기후가 우리의 기후가 아니라며 무심히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의 문제를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뉴스는, 그리하여 태생적으로 근시안이다. 뉴스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라 인간을 닮았다. 보이는 걸 보이는 대로 보다가 자칫하면 주류의 식각을 답습한다. - P88

프리랜서 만화가로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공사 현장일까지 병해하고 있던 김 씨에게는 삶이 다 무너지는 것과 같은 사고였다. 손을 다쳤으니 꽤 오랜 기간 만화 일도 공사 일도 하기 어려워질 것이었다. 침애 곁에 앉아 한참을 들은 그의 사연이 안타까웠고 기사화하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봤지만 공사 현장에서 안전 조치나 뒤처리를 대단히 소홀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취재 데스크와 논의 끝에 매우 짧은 기사로만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 기사의 뉴스 가치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생긴 의아함이 오래 남았다. 오른손의 손가락들이 절단된 건 만화를 그리는 게 직업인 사고 당사자와 그의 가정에는 측량할 수 없는 고통이고 비극일 것인데, 사회적으로는 사고의 과정에서 특이점이 크지 않으니 기사의 가치가 높지 않다고 잘라 말해야 하는 기우뚱한 불균형에서 오는 갸웃함이었다.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통계는 이 기사 저 기사에 인용되며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숫자 속으로 진짜 이야기들을 빨아들여 감춰버리기도 한다. 산업재해가 흔하면 흔할수록 ‘끊이지 않는 산재’ 같은 제목을 단 기사를 계속해서 만들기도 새삼스러워진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이 침묵을 깨워 말의 영역으로 잘 데려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어떤 산업재해가 주로 뉴스로 옮겨지는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크고 이름 있는 기업에서 일어난 산업재해일수록, 그 기업이 솜씨 좋게 뉴스를 틀어막지만 않는다면 더 크게 주목받기 쉽다. 또 훼손된 신체로 대표되는 산업재해가 보여주기 용이하다는 점 때문에 뉴스로 더 쉽게 번역된다. 결국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고통일수록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질 수 있다는 순환 논리가 완성된다. - P93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특히 사진이나 영상매체를 활용하는 기자라면 ‘보이는 고통’을 만났을 때 기록하고 촬영해서 독자와 시청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본능을 억누르기 어렵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고통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지면과 하면에 잘 옮겨진 타인의 고통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몸이 훼손된 사람과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지만 병을 앓는 사람이 나란히 있다면 훼손된 몸의 부위 곁으로 카메라가 다가간다. 울고 있는 사람과 울고 있지 않ㅇ은 사람이 있다면 주로 울고 있는 쪽으로 카메라가 간다. 고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에서 자꾸만 누락이 생긴다. - P96

2022년부터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죽음의 되풀이를 멈추자며 시행됙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산업재해로 인명 피해가 날 경우 사업주나 경영자가 책임지도록 하는 법이다. 커다란 걸음을 내디딘 셈이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시행 첫 해,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 200여 건 중 재판에 넘겨진 것은 11건에 불과했다. 중대재해법 위반 첫 판결에서 법원은 원청 대표에 징역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판사는 "이 책임을 모두 피고인에게만 돌리는 것은 가혹하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는 "기업이 최대한 피해 입지 않도록 하겠다"며 그나마 있는 법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중대재해처벌법 집행이 이미 유예되어 왔던 50인 미만 사업장에 2년 더 법 적용을 유예하는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혐오가 뉴스가 되는 현상은 인터넷의 관심 끌기 문화와 결합해 주체할 수 없이 증폭했다. 이슈가 되니까 원래 있던 게 더 많이 보이는 것인지, 실제로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말은 할수록 번지는 것이라,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만 보이던 말은 곧 광장으로 나와 보수 유튜버가 몸에 두른 깃발에 적혔고, 국회 강연에 등장하더니, 결국 국회 한복판에서 우파 국회의원들의 입을 통해서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끈질긴 왜곡에 가느다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혐오는 새삼 징그럽고 놀라운 것이어서 지역 언론에서만 주로 제사 지내듯이’ 다뤄지던 5.18은 오랜만에 중앙 언론에 등판했다. 진실이 아니라 구정물 같은 혐오와 거짓이 끼얹어진 채, 5.18의 오늘이 여러 매체에 기록이 되었다.

고통이 진자처럼 흔들리며 역사의 영역과 뉴스의 영역을 오갈 수 있는 건 아픔이 다시 파헤쳐져서 상처가 덧나고 있을 때뿐일까? 5.18 혐오가 중앙 뉴스의 주목을 받을 때마다 궁금했다.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아득하게 멀어져 버린 아픔들은 누가, 언제, 얼마만큼, 어떤 방식으로 다뤄야 할까? 해결된 게 없어도 시간이 간다는 이유로 언론은, 사회는 국가 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가책을 잊을 수 있는 걸까?

피해자들이 죽어갔던 금람로 5.18 민주광장 한복판에는 2016년 ‘5.18 진상 규명’이라는 거대한 글씨가 구조물로 들어섰다. 어머니들은 40년 전에도, 지금도 울고 있는 모습으로 뉴스에 등장한다. 너무나도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그보다 전형적인 건 가해자의 행태이니, 적어도 피해자의 전형성을 견뎌야 할 책임이 언론에 있다고 믿기에 망설임 없이 그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 P108

화재의 원인을 지하의 습기와 가전제품 사용이 일으킨 누전으로 정리하는 건 좀 더 근본적인 원인에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 같았다.
아파트 지하에 사람이 살고 있다. 그 한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말끔히 청소되어 있는 아파트에서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실 전체에 깔려있는 구불구불한 배관 표면에 물이 맺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습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었다.
그러니까, 한여름에 전기장판을 틀어 불이 난 인과관계는 쉼터의 환경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

대안으로 언급된 지상의 작은 쉼터에 대한 뉴스가 그저 지방자치단체장의 뿌듯함만 부풀려 주고 끝나지 않길 바라며, 빛과 땅과 휴식이 조금은 더 공평하게 주어지길 바라며. - P116

할머니에 관한 뉴스는 이른바 ‘미담’이었다. 시시비비를 가리며 누구의 편인지를 끈질기게 캐묻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고 윤리의 도마 위에 올려 세밀히 썰어내는 일반적인 사회부 뉴스와는 달랐다. 뉴스를 만든 뒤에 여기저기서 공격이 들어올 만한 기사도 아니었다. 기억에 남는 취재였고, 할머니를 인터뷰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런데 묘하게도 몇 가지 의문이 마음 안에서 덜걱거렸다. 요점은 이 선행의 본질을 제대로 전달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녀가 소속된 계층에 대한 선입견 몇 가지로 헐겁게 스케치한 기사가 아닌지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할머니는 ‘더 가졌다면 더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담긴 진실성을 느낀 순간은 내게 충격으로 남아있다. 할머니의 기부의 본질 안에는 자신을 스쳐가는 돈을 쥐고 있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기본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어떤 계층에 속해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그녀의 ‘형편’을 보여주는 대신 그녀가 가진 기부의 철학에 대해 더 많이 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소수자들은 자주 집단으로 묶인다. 약자의 악행도 이런 점에서 조명을 받는다. 특히 일탈 행동을 했을 때 개인으로 바라봐지기보다 그 집단의 이름으로, 약자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호명된다. 이런 뉴스들은 자칫하면 약자들에 대한 잘못된 스테레오 타입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도 있고, 구조를 짚지 못하면 소수자 집단의 윤리나 도덕성에 지나친 책임을 묻게 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특혜에서 배제된 집단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악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약자라는 맥락 안에서 조명받곤 한다.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꾸만 약자의 일을 저 멀리 타자화하며,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인지적 게으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 P134

우크라이나전이 갓 일어났을 무렵 해넌이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에 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우리와 너무나도 닮았다. 바로 그 점이 이 일을 이렇게나 충격적이게 한다. 우크라이나는 유럽 국가다. 넷플릭스를 보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자유선거에 투표하고, 검열받지 않은 신문을 읽는다. 전쟁은 더 이상 빈곤하고 외딴 곳에 사는 이들에게만 찾아오지 않는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전략이라는 게 있었다면, 해넌의 전략은 ‘우리’의 연민을 응집하려는 것이었던 듯하다. ‘우리’와 닮은 사람들에게도 "빈곤하고 외딴 곳에 사는 이들"에게나 일어나는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니 충격적이라는 말은 뱃속에서 갓 끄집어낸 듯 정직하게 날것이라, 순식간에 그가 규정한 우리라는 틀 밖에 있는 사람을 배제하고 탈락시킨다. 계급 차별과 제국주의 가장 안쪽에서 나온 말이다.

소속된 국가와 문화권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방향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반대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전쟁터에서 만연한 참상의 증언을 주워 가해와 피해의 서사를 만드는 일에는 숱한 관점과 의도와 무의식에 스민 계산이 개입되곤 한다.

‘우리’와 닮은 것들을 옹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간단히 반대쪽으로 밀어내는 이런 발언은 거의 당연하다 싶게 나빠 보인다. 인권에 대해 말하며 편견과 배타주의를 끄집어 쓰는 당혹스러운 모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실패 사례들을 모아 비난하는 건 꽤 쉽고 단순하다. 그보다 복잡하지만 더 흥미로운 건, 닮음이라는 비유가 이상하리만큼 반복적으로 뉴스에 사용되는 이유와 이와 얽힌 연민의 작동 과정이다. - P142

우크라이나전에 관해 열린 긴급 강의에 우르르 몰려가 자리를 가득 채운 학생들이, 비슷한 시간에 열린 교내 흑인 공동체의 세션은 외면했다며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흑인 학생들이 겪고 있는 일상적 차별에 대해서 깊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마련된 자리였지만, "그다지도 정의를 부르짖는 저널리스트들이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에는 그토록 관심을 보이면서 정작 ‘당신 바로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일상적 고통에서는 고개를 돌린 셈"이라고 맹비난했다.

어쩌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경을 넘어 다른 대륙에서 일어나기에 충분히 거리를 유지하고 인권과 평화 이슈로만 볼 수 있어서, 작은 관심만으로 큰 윤리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에 더 신경쓴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 검열이 슬그머니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나와 더 닮은 고통을 들여다보기 위해 전쟁의 고통을 내버려두는 게 맞냐는 질문 앞에서는 막다른 길에 온 듯 멈춰서게 되었다.

개인을 잠시 내려두고 보편이라는 관점을 택하는, 그리고 닮음이라는 틀에서 훌쩍 벗어나 저 멀리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상상한다. 나 이상의 테두리를 감각하고, 나의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욱 큰 사회가 있음을 인지하고, 지구 공동체 안의 시민으로서, 인류의 일부로서 어떤 고통과 어떤 뉴스를 더 큰 ‘우리’의 우선순위로 놓고 해결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 밖으로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 모든 연민에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을 매달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대로를 아는 것. ‘나’를 중심으로 뉴스를 떠먹이려는 뉴스의 매개자들이 의도치 않게 왜곡하고 있을지도 모를,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시인이자 활동가였던 오드리 로드느느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울부짖는 곳에서, 우리는 이들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함께 읽고 서로 나누며, 그 말이 우리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 P150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굳어지면 주장해야 할 권리의 범위 역시 주류의 등쌀에 짓눌린 채 인식하게 되곤 한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공적 담론장 안으로 가져오고 여러 매체 앞에서 비슷한 말을 증언하는 노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며 지쳐가는 일이 대체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대한 논리 속에서 지나치게 쉽게 합리화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떨쳐내기 어려워서다.

기자들은 재현의 수위에 대해, 그러니까 디테일을 어디까지 공개해도 되는지, 이름을 밝혀도 되는지, 얼굴을 내보여도 괜찮은지까지를 단계적으로 피해자에게 묻게 된다. 그 모든 과정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에 정작 피해자 본인이 포함되지 못한 채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 P157

그날 수업에서 영상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지를 두고 달아올랐던 논쟁 끝에는 이런 질문들이 남았다. 고통을 언제 보여줘야 하고 언제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고통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하고 응시를 참아내야 하는가? 고통을 얼마나 보여주고, 또 가려야 하는가? 보여주기의 윤리와 보여주지 않기의 윤리는 누구를 지키는 것이며 누구를 위한, 향한 것인가?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받는 몸>에서 "때로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이 고통의 언어를 만들어내곤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보도록 하는 일이, 세상의 눈에 띄는 고통을 반복하고 늘리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하려면 당사자를 대신해 말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언어는 어떻게 쓰여야 할까.

나는 보여주기를 옹호한 쪽이었고, 마지막 편집본에 결국 그 영상을 넣었다. 반복적으로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 고통스러운 건 당연하지만, 한 이야기를 생산해 낼 때 시청자가 그 영상에 어느정도 노출된 사람인지 가늠하는 일이 늘 가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통을 보는 사람들의 고통보다도, 그 영상 안에 담긴 선연한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 더 어려워서였다. 한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 일, 고통을 겪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의 불편감부터 배려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반드시 게으른 결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영상을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하는 이유가 향하는 주어가 마음에 걸려서였다. - P167

이념의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홍콩의 상황은 독특하다. 홍콩을 취재하며 유명한 정치인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 광장에서, 거리에서 만난 다양한 ‘보통 홍콩 사람들’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던 이유는, 그들이 공동체로 연대해 더 나아갈 수 있는지, 그러니까 ‘공통의 언어’를 가졌는지 궁금해서이기도 했다. - P180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와 날씨는 지역 사회부와 서울 본사가 상시적으로 주고받는, 교환이 보장되고 약속된 분야다. 특히 ‘발생’인 경우에 그렇다.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말이다.
상황이 길게 이어지는 경우에는 보통은 다른 뉴스에 밀리고 만다. 뒷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사고 수습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 해결하는 데 몇 주, 몇 달, 길게는 몇 년씩 걸리는 남은 이야기들은 지역 뉴스에만 나온다. - P188

선별의 궤적은 전국의 뉴스 시청자들에게 그 지역의 생김을 전달하는 청사진으로 작용한다. 특정 뉴스를 제외한 지역 뉴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지역의 일부가 가려진 채로 전달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 P190

사실적인 묘사라는 외피 속에 지방대생의 부정적 특성을 강조하고 희화화 하면서도 정작 그런 특성을 야기하는 사회, 환경적 맥락은 감추는 방식의 차별적 시선, 이런 면에서 그의 논문은 웹툰 <복학왕>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 P196

2022년 12월, 국민의 힘 소속 최인호 관악구 의원은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안심귀갓길 전면 폐지"를 이뤄냈다며 유튜브 계정을 통해 홍보했다. "여성안심귀갓길 사업으로 남성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페미니즘 기반 정책을 뿌리째 뽑아버리겠다"며 선거에 나와 당선되었다.

정책 폐지가 성공했는지 여부보다 눈길을 끄는 건 구읭원의 주장 자체다. 그의 논지는 새롭거나 낯설지 않다. 남성이 ‘페미니즘으로 인해 차별을 받고 있는 피해자’라는 생각해서 출발한다. 이 논리 안에서 사실 관계와 무관하게 성차별은 없는 것으로 전제된다. ‘페미’들은 부당하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이기적인 여성들’이며, 그로 인해 남성들은 ’역차별의 희생자‘가 된다. 20대 대선 전후로 한껏 불붙은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페미니즘은 철학이나 이론이 아니며, 심지어 관점도 아니다. 이것을 세상을 몰라보게 바꿔놓은 정치 운동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성적, 경제적, 심리적, 신체적 종속을 끝내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묻는다. 그러곤 답한다. 우리도 모른다고, 한번 해본 다음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고. 영국의 젊은 철학자 아미아 스리니바산의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혐오라는 사람들은 ‘한국의 페미니즘은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성적, 경제적, 심리적, 신체적 종속을 끝내겠다는 상상은 자연스럽게 각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따라, 개인의 심리적, 신체적 종속 정도에 따라 그 실천적 방식이 다양할 것이다. 변질이라는 표현은, ‘본래’의 페미니즘이 옳고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한국의 맥락에서만큼은 오염됐다고 주장하며 반박을 원천 차단하려는 프레임이다. 사실에 기반한 밀착된 분석 이전에 병리적이라고 섣불리 단정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태도이다. - P199

기자의 고정관념이나 주장이 뒤섞여 편향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쪽은 누가 더 옳은지를 적극적으로 고르고 옹호하는 기사의 경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겉보기에 중립적인 듯한 기사들 역시 편향성의 덫에 빠지기 쉽다. 오랫동안 고쳐지지 못한 채 고여있는 사회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도할 것인지가 매우 의도적인 선택이며, 맥락이 있는 사건에서 맥락을 도려낸 채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공평한 비율’로 나열하는 건 실상 중립과 거리가 멀다. - P202

"성별 갈등은 청년 세대 남성이 피해를 경험하는 것으로 재의미화"되었는데 이는 "남성이면 무조건 비하하고 모욕하는 여성이라는 악한 주체를 만들어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나쁜 말’의 원래 주인이었던 자들이 누구인지는 쉽게 잊혔다.
미디어 오늘은 한 기사에서 "젠더 갈등은 계급 갈등, 인종 갈등처럼 사회 구조적 불평등의 개혁을 둘러싼 대립 관계"지만 "언론은 어떤 성별 집단이 단순히 싸우는 모양새만 취해도 ‘젠더 갈등’이라 칭"하고, "SNS상의 말싸움도, 한 커뮤니티가 특정 성별을 향해 비난 여론만 조성해도 젠더 갈등"이라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저항을 무효화하는 효과적인 방식은 억압된 자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저항이야말로 갈등의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교묘하게 맥락을 지우는 일이다. 언론은 갈등 상황을 ‘화해’가 필요하고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며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갈등의 효용은 매우 분명하다. 구조적인 오류를 수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회다. 억압의 맥락을 자른 보도는 억압을 재생산하고 기존 질서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곤 한다. - P206

고통과 상실을 겪어낸 한 사람이 잔해 속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접어들어 같은 이름의 다른 고통을 막을 수 있는 길을 가리킨다.
슬픔과 우울, 기억의 혼돈 속에서 그들은 뒷이야기를 쓰려 한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사적인 애도를 겪어내는 이들을 위해 사회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다. - P212

교사가 툭 떨어뜨리듯이 던진 말은, 떠올릴 때마다 속을 뒤집어 놓았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거나 ‘내가 하는 일은 좋은 일’이라는 헛된 환상 때문인가 싶었지만, 미욱한 환상을 버린 뒤에도 이 말이 주는 기묘한 서걱거림이 남았다. - P215

고통을 겪은 사람, 타인의 고통을 살피며 놀라워하고 싶은 사람, 남의 사정이 궁금해 엿보고 싶은 사람, 제 안전을 위한 거울로서 타인의 고통을 속속들이 따져보고 싶은 사람, 공감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 사회를 개선해야 하는 사람. 그들의 공모를 거쳐 뉴스의 수요층이 완성된다. - P217

슬라보예 지젝은 ‘시민적 삶의 표식인 서사화할 권리’에 대해 말한 호미 바바를 빌려 인간에게는 고통으르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내러티브를 정식화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고 했다. 많은 경우 언어와 기술, 자원은 동등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 자신의 고통을 더 잘 말할 수 있는 계층과 계급, 무리가 정해져 있게 마련이다. 고통을 잘 말한다는 건 그러니, 때론 부족한 자원을 두고 벌이는 각축전에서 우위를 점하게 하는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 P223

뉴스라는 텍스트는 무엇을 유도해야 할까. 기자는 사진과 영상, 글을 통해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나란하게 독해해 주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했고,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 사황인지 말이다. 감춤이 없어야 하고, 맥락을 읽어야 하고, 불편부당한 정보를 줘야 한다. 뉴스는 세계의 수수께끼들을 보여주지만, 모든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불완전한 매체다. 단순히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책임은 기자와 시청자 둘 다에게 쥐어져 있다.

난무하는 폭력이 이미지 않에서 무기력해지는 건 이미 시대의 기본값이 되었다. 여전히 더 센 것을 보여줘서라도 그 둔감함으로 자극하려는 세태가 이어지고 있다. 그 안에서 기자나 독자 둘 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단속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뉴스가 왜 만들어지고, 뉴스를 왜 보고 있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선. - P224

일상을 살아가면서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도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238

돌이켜보면 공감이라는 영역에 접어들기 전에 너무나 많은 장벽이 존재한다. 인종과 언어, 젠더, 계급과 같은 요소가 우리를 구분 짓는다. 이외에도 우리가 개인으로서, 이해집단으로서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은 수십억 갈래일 것이다. 한 사람의 고통으로 다른 사람을 안내하기 위해, 독자와 시청자를 공감과 연민이라는 지점에 데려가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일이 그래서 중요해진다. 이는 취재원과 기자가 서로의 피부에 갇힌 무수한 장벽을 뚫고 보편의 언어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 P250

걔는 참 독해, 아버지가 죽었는데 울지도 않아, 라는 말을 누군가 했다고 친구가 전해주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애도의 방식을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 P255

한 공동체가 슬퍼하기로 결정한 죽음을 들여다보면 그 사획가 욕망하는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생각하도록 주어의 영역을 확장해 준다. ‘무엇을 애도하는 사회인가’, ‘이 죽음은 애도할 만한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는 과정은, 적어도 그 사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게끔 한다. 기저에 깔려있던 문제에 대한 사회적 불만 위에 죽음과 상실이 하나의 예시로써 얹힌다. 단편적이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충분히 제시하는 그 사례로 인해, 어렴풋했던 문제는 사람들이 이입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가 된다.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게 한다.
애도는 이때 정치로 흐른다. 공적 애도 안에서 자주 가치를 다투는 씨름판이 벌어지고, 사회적 합의 과정이 힘겹게 겨루기를 펼치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사유하고 고쳐나가려는 시도 안에는 성실한 슬픔이 깔려있다. 이럴 때 사회적 애도를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며 사적인 영역에만 밀어 넣으려 하는 건, 개인의 애도 과정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 P259

시위로 이어지는 공적 애도의 진정성을 두고 매번 시비가 붙는 건, 사회의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도 보인다.
상실의 과정에서 인간은 기억을 재료로 애도를 이어간다.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논의하고 되새겨야 하는 공적 애도의 상황에서, 언론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대개 기억에 관한 것이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때의 애도는 문장으로 완성하고, 이음새를 잘 봉합해야 한다. 이야기는 구체적이수록 좋다. 죽은 이를 숫자로 남겨두지 말고 이름이나 얼굴이 등장할수록 좋다고 여겨진다. 왜 죽었고,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정연한 이야기가 필요해진다. 파편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외로운 사적 애도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은,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성분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여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 정도다. 공적 애도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자주 화두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260

답을 절대로 들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물을 때면 질문을 더욱 가다듬었다. 그 질문은, 사실상 질문부터 이어진 침묵까지가 답인 채로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질문에 대한 애호와 무엇을 물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어쩌면 가장 오랜 시간 내 두뇌를 지배해 온 감각인지도 모른다. - P265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상식의 외피가 변화하더라도, 사람들의 변화 안에서 영원히 움직이는 텍스트가 된다면 뉴스에 관한 책이라도 순식간에 낡아버리는 일만은 피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보면서.

그 움직임 안에서 우리가 정확한 질문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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