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 - P6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 P12

사랑은 일종의 존중이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볼 수도 있겠다.

낮은 지위가 끼치는 영향은 물질적인 맥락에서만 볼 수 없다. 낮은 지위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들을 낳기 때문이다. - P16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람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 P22

속물이란 하나의 가치 척도를 지나치게 떠벌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만 탐내고 과시하는 사람만 속물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지식을 지나치게 과시하는 것도 속물이다. 매사에 속물이 되지 말자 - P31

속물은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따라서 언론의 분위기가 그들의 사고를 결정해버리는데, 그 수준은 위험할 정도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다 보면 결국은 두려움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우리 자신이 속물적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기도 힘들다. 이 병은 애초에 집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점차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 두드러지는 집단의 속물근성은 모든 사람을 사회적 야심의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런 야심을 못마땅해하다가도, 어느새 그것이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인 양 쫓아다니게 된다. - P34

서양 문명 2000년의 장점은 이제 익숙하다 무엇보다도 부, 식량, 과학 지식, 소비 물자, 신체적 안전, 기대 수명, 경제적 기회 등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상적인 물질적 발전은 서구의 보통 시민에게 지위로 인한 불안의 수준이 높아지게 만들었다. 즉 자리, 성취, 수입을 높고 걱정이 늘었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어떤 것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심리를 생각해보면 이런 박탈감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떤 것-예를 들어 부나 존중-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우리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만큼 가졌을 때, 또는 그보다 약간 거 가졌을 때만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 - P70

훌륭하고 똑똑하고, 유능한데도 왜 여전히 가난한가 하는 문제는 새로운 능력주의 시대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답을 해야 하는(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더 모질고 괴로운 문제가 되었다.

부와 가난의 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19세기의 사회진화론 철학보다 분명하게 표현한 사상은 없을 것이다.

사회진화론자들은 모든 인간이 처음에는 돈, 일자리, 존경이라는 빈약한 자원을 놓고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쟁에서 일부는 우위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부당한 이점이나 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뒤처진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생물학적 원리가 강해서 부자가 된 것이고, 빈자 역시 생물학적인 원리가 원했기 때문에 빈자가 된 것이다.

사회진화론의 관점에 직접 동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이 철학의 핵심적인 가정 하나는 지지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불필요하고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할 힘이 있다면, 하층 계급들을 지원하는 정치적 행동은 그저 실패에 보상을 해주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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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배기성 지음 / 왕의서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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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의 키워드는 오직 하나 ‘부동항’이었다. 겨울에 얼지 않아서 사시사철 무역이 활발한 항구를 얻기 위해 러시아는 영국과 거의 100년을 끌며 전쟁을 벌였다. - P186

소련은 당시 몰로토프 장관의 이름을 빌려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 계획을 세웠다.
마샬플랜은 서유럽에 공산주의를 막는 역할만 충실하게 해냈을 뿐 혼돈을 불러일으킨 판도라 상자 그 자체였던 셈이다. - P219

‘헌법은 임시정부의 정당성과 합법성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P222

참사에 대한 국가의 조처는 그렇게 돈 문제로 프레임을 전환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제주 4.3 사건의 총책임자는 이승만 대통령이요 지휘명령권자는 제임스 하우스만이며 사건의 성격은 공안조작사건이다.
몽양 여운형의 조선인민위원회는 1945년 8월 15일 당시 조선 한반도 내 모든 행정구역에 존재했다. 이 중,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암살 이후로도 남아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이 제주도의 조선인민위원회였다. 그들은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에 펄쩍 뛸 정도로 반대했다. - P245

다랑쉬 동굴의 학살 현장 등 중산간 지역의 제주도민들은 거의 모조리 숨졌다.
제주 4.3의 명칭을 무엇이라고 정해야 맞을까. 4.3이라고 하니 일의 출발점을 놓고 벌어진 사건으로 생각하기 쉽다. 1980년 5.18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정확하게 명칭이 있는데, 4.3은 어찌 된 영문인지 여러 부르는 말에도 아직 국가에서 명칭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이 사건이 무엇을 지향했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무엇을 함께 해서 이루고자 했지만, 실패한 사건이 열쇳말이다. 제주 4.3은 허리가 뚝 잘린 분단 정부가 아닌 ‘통일 정부’ 즉, 정상적인 한반도 정부를 위한 싸움이었다. - P257

아줌마 수십 명이 배의 벽면에 올라탄 채 "깡깡깡"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제게 뭣 하는 일인가 싶어서 보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아야, 저 사람들이 무얼 하는 사람들로 보이느냐?" 필자는 대뜸 "무엇인지 모르지만, 할머니 여기를 어서 나가요. 쇠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하고 쇠 냄새 때문에 죽을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할머니께서는 "그래, 쇳내, 그 쇳내를 잠시만 맡고 있어라. 이 사람들이 이 냄새를 맡는 이유가 있단다. 배가 들고 나면, 반듯시 배에는 바다 조류와 따개비가 달라붙어 칠을 다시 해줘야 하는데, 그때 저렇게 망치로 때려야만 따개비나 조류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서 새롭게 칠해주는 데에도 효과가 크데." - P264

당시 경찰은 일제 말기 총독부의 가혹한 조선 수탈을 대리한 악질 친일 앞잡이로 처벌은 고사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그대로 계승됐다.
해방 이후, 당시로선 급조된, ‘대한민국군’과는 당연히 사이가 좋지 못했다. 군에는 국외의 광복군, 독립군 출신들이 많아, 군경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 P271

전 국민에게 ‘빨갱이’라는 악의 집단을 하나 만들어 ‘사상 세뇌 교육’을 한다.
‘빨갱이’ 반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는 이 개념을 이승만은 이때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교육하며, ‘반공, 반공, 반공!’을 외치게 한다. 특히 이승만은 여순지역 빨갱이 지역이며, 이 지역이 전라도에 붙어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주입해 정말 불쾌한 지역감정을 만든다. 그게 바로 ‘전라도는 빨갱이’라는 희한한 논리였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동건의 애인 역이었던 고故 이은주가 가입만 하면, 좁쌀과 햅쌀을 한 말씩 준다는 말에 보도연맹 가입에 동의했다가 결국 총살당하는 장면에 이 비열함이 잘 표현돼 있다. - P274

6.25 전후로 미국은 빨갱이 색출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소련의 첩자가 분명히 우리 내부에 있을 것’이라는 매카시즘이 전 미국을 숨 가쁘게 조여오고 있을 때, 반대쪽 소련은 우주로 나아갔다. 이 극명한 대조로 전 미국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라는 반성의 물결이 휘몰아친다. 이것이 바로 ‘스푸트니크쇼크’다. - P316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 그것이 역사라는 틀 안에서 다듬어진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다시 강조한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역사를 민중의 편으로 다잡기 위해 노력한다. 가끔 기득권 카르텔이 민중의 의지를 꺾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면 또다시 깨시민의 노래를 부르며 전진한다. 이제, 깨시민의 역사를 붙잡기 위해 노력할 타이밍이다. 역사학자는 외친다. 민주주의는 어디 있느냐고?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으로 전진한다고!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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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계에서 한국의 근대를 어디로 잡을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론은 언제나 뜨거운 논란을 가져왔다. 지금도 ‘근대’라는 개념을 ‘중앙집권화’로 보느냐 ‘화폐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점으로 다투고 있다.

현대는 또 언제부터일까? 현대의 출발은 ‘헌법’이라는 체계 도입에 있다. 헌법은 시민민주주의라는 절대 명제를 이루는 기본 토대다.
완전한 선거를 통한 시민민주주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출범부터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어디까지나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출범부터다. 1919년 거국적인 3.1운동에서 독립선언서를 외쳤으니, 이에 합당ㅎㅎ한 독립된 정부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은 논리상 당연하다. 단, 직선제 혹은 간선제 선거를 거치지 않고 정부가 만들어져, 임시정부는 미완의 정부다. - P9

너무 많은 돈을 빌린 고종과 민비에게는 위민(爲民: 백성을 위함),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 정신 따위는 전혀 없었으므로, 이자와 원금을 일본에 갚아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런 백성들에게 가한 왕실 지배층의 폭력은 백성들 생존권을 위협했고, 마침내 그 불만이 폭발한다. 임오군란의 발생 원인은 이렇게 봐야 옳다.

임오군란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수도 한양에서 일어난 중앙군대의 반란이기 때문이다. - P23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의 1차 목적은 성공한 셈이다.
일본이 갑신정변에 대해 직접 대군을 파견해 나서지 않은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이때까지 그들은 청나라와의 전면전을 조금은 두려워했다고 봐야 한다. 리홍장이 직접 건조했던 청날라 ‘북양함대’의 존재 때문이다.

"청나라와 일본이 서로 조선에 출병할 일이 있으면 한쪽이 나오면 나머지 한쪽에 통보하고 간다"라는 내용으로 소개된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사건이 진정되면, 곧 철수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역사는 그 후 이렇게 진행된다.
조선국에 변란과 중대한 사건이 생기니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다.

동학농민은 한양진격을 포기한다. 외세가 들어온 것에 너무 놀라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이 두 외세를 물러가게 할 방법은, 저 톈진조약 마지막 부분, "사건이 진정되면 곧 철수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두 세력은 자진해서 철수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럴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청나라 세력은 "뭐 여기가 원래 우리 청나라 속국이야"라는 태도로 느긋했다. 동학농민군은 척양(斥洋: 서양을 배척함) 척왜(斥倭)를 외치며 이를 갈면서도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선택한 상황이었다. - P41

‘정한론征韓論’이다.
즉 우리가 섬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이룬 후, 한반도 다시 말해 조선을 치자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온갖 수모를 겪으며 고생 또 고생 영국, 러시아, 포르투칼, 네덜란드 등과 어떡하면 사탕수수 및 어패류를 평등하게 교역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행동에 옮겨왔다. 그들은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린 바쿠후에 계속 복종해야 할지 고민했다. ‘저 도쿠가와 바쿠후를 군사로 엎어버려야겠다. 그런 불평등조약에 절대로 따를 수 없다’같은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되었을 것이다.

도쿠가와 바쿠후를 몰아내자는 도막倒幕 세력, 천황을 중심으로 뭉쳐 외세를 쫓아내자는 존황양이-일본어 손노조이-파들이 일본에 속속들이 등장했다.

권력의 정점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계속 싸웠지만, 그들만의 기득권 카르텔인 한바쯔(사쯔마, 조슈, 히젠, 도사만의 권력 독점-자민당 160년 독재-)는 위세를 떨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 P43

조선 침략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처음이자 본래 목적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 P57

태후 정권의 부정부패로 포탄은 탄약이 아닌 나무 덩어리, 혹은 진흙 덩어리였다. - P63

그레이트 게임의 목적은 간단하다. 대륙에서 바다로 나오려고 애쓰는 러시아를 상상하면 된다. 부동항을 얻고자 사활을 거는 한쪽과 이를 저지하고 전 세계 제해권을 독점하려는 다른 한쪽, 영국 해양 세력 대 러시아 대륙 세력 간 힘 싸움이다. - P73

헤이그 밀사 사건에서 미국의 반체제 인사 호머 헐버트의 공로를 내세운다. 호머 헐버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사실상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어기고 조선에 대한 의리를 져버리며 실리만 챙겼다고 봤기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서도, 사실상 일본이나 미국보다는 조선을 위해서 살았다는 사실을 들어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필자는 위 주장에 뚜렷한 한계가 있다고 본다. 어떤 정책을 펼 때 실무자 혹은 후원자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전체를 주괂하며, 그 사람 없이는 아무 일도 되지 않았으리라고 판단하는 오류와 같기 때문이다. - P111

일본군을 조선에 소규모 군대만 남겨둔 채 거의 모두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로 집결했다. 조선에 남겨진 소규모 부대는 그대로 조선의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 관군에게 개틀링 기관총의 조작법과 크루제 야포의 조작법을 가르쳐줘 뤼순과 비슷한 2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학살한다. - P154

대영제국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를 확보해 극동에서는 직접 활약한다기보다 대리인을 찾아 러시아의 부동항 획득을 막는 데 주력했다. 일본이 선택된 이유다.

증오의 목표는 독일보다는 러시아였다. 랴오둥반도를 두고 일번을 벌일 태세였다.

일본을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다.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미국에 보내, 일본 채권을 팔아 전쟁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런데 아무도 일본 채권을 사려 하지 않았다. 다카하시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유대인 포그롬’, 즉 대박해 사전이 벌어지며 국면이 완전히 뒤집힌다. 세계 제일의 유대 자본 ‘로스차일드 가문’이 일본을 후원하고 나선 것이다.
몰도바의 유대인 학살은 재정러시아가 주도한 것이었다. 재정러시아에 깊은 증오심을 품게 된 로스차일드 패밀리는 일본 채권을 사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해서, 동유럽에서 러시아 군대를 극동의 일본쪽으로 움직이게 한다. 러시아에는 차관을 끊고 투자마저 중단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막대한 피해를 보며 상처뿐인 승리로 끝을 맺었다. - P156

조선은 그대로의 독립을 원치 않았다. 되찾을 것은 왕정조선보다 더 발전된 정치체인 민주공화제 조선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되찾아올 것은 바로 ‘대한민국’이었던 것이다.

기존의 조선 4색 당쟁 중 노론을 제외한 소론, 남인, 북인은 궤멸하다시피 됐다. 영남 남인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해 만 명이 상소를 올린다는 ‘만인소’ 등의 이벤트성 정치 행각을 계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19세기를 보낸 조선의 벼슬아치라면, 나라를 팔아먹는 행각에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들이 어떻게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었을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왕정 조선을 해체하고,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을 창조하는 데로 생각이 미치게 된다.

노론이 망치고 팔아먹은 국가에서 소론이 독립운동을 했으면, 대통령이 소론에서 나왔어야 했다는 것이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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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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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의 타고난 성품이 긍정적이고 강인한 면이 있었고 이것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성향이다. 이 가족을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와 지현을 함께 평가하며 그들의 긍정성과 강인함을 얘기했다. 여기에 더해서 가난하고 불우했지만 어머니, 동생과 똘똘뭉쳐서 서로를 돌봐주었던 결속감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전적인 얘기이고 교과서 같은 얘기이지만, 가족 내 결속이 여러 가지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 이런 외적인 조건 외에도 지현에게는 분명 다른 힘이 더 있었다. 나는 이를 ‘성찰하는 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수많은 청소년 인터뷰이 중에서 성공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난 친구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다. 성찰하는 힘은 인간이 사회적·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덕목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외적인 지식(예를 들어, 학력)과 외형적모습(예를 들어, 재산, 직장)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평가하면서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자기 욕망과 사회적 위치를 사고하고 판단하는 내면적 성숙도, 즉 성찰하는 힘에 대해서는 참 소홀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우리의 교육체계는 청소년에게 이 성찰하는 힘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교육과정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저 단어를 외우고 문제를 풀어서 시간 내에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내는 점수를 받아야 성공하는 교육체계를 ‘공정’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성공적으로 빈곤을 극복한 청년들은 이런 교육체계 안에서 성찰하는 힘을 기르고 자신의 가치체계를 만들어냈다. 성찰하는 힘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신의 시각과 신념을 구축했다. 이 빈곤 청소년들은 학업성취가 낮고 당장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지만 자신만의 단단한 핵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생존’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인식하면서 성찰하는 힘을 길러왔을 것이다.
이러한 힘은 짧은 기간 안에 만들어질 수 없고, 단순하고 안전한 삶의 궤적 안에서 형성되기 어렵다. 다양한 경험과 시도, 좌절, 고통, 성취 등의 단계를 거쳐야 서서히 쌓여가는 내면의 힘이 된다.

가난 때문에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없다는 것은 그냥 불편한 정도를 넘어, 사회적 개체로서 ‘나’의 위신과 존재가 부정당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자아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사회적 존재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끼고 자신의 욕구에 대해 둔감해진다. 흔히들 빈곤층은 왜 미래를 위해 저축하지 않고, 왜 절박한 순간에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왜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배치되는 선택을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가난하다는 것ㅇ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재화가 없음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고 사회적 존재가 일상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에 대처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한다. 즉, 생존 자체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합리적 판단을 하고 미래 지향적 사고를 할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래서 빈곤층이 전략적 사고나 내면의 강인한 힘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빈곤 정책을 고민할 때 단순한 경제적 지원이나 기회 제공을 넘어서서 다른 차원을 고려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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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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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을 창피해서 감추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지현의 태도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더욱이 지현 나이 또래의 친구들 중 빈곤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태도였을 것이다. 가난을 증명하는 글을 써서 장학금을 받는 일이 왜 부끄럽지 않은가. 왜 저렇게 당당하며 가난이 자신의 강점으로 둔갑하는가.
나는 지현이 긍정적으로 살아오며 빈곤을ㄹ 극복한 진짜 힘이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가난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상일 뿐이지, 내 잘못도 죄도 아니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지현은 간파하고 있었다. 다만 가난에 대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시선에 맞서 싸우는 일이 버거웠을 뿐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지현의 전략이 영리하고 훌륭했던 것은 세상의 편견과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해나갔다는 점이다. - P82

낙인감을 얘기할 때 고려해야 할 것:

우리 사회에는 현재 저소득층이나 소외계층을 도와주는 인프라가 다양하게 구축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한국사회의 공공영역 지출은 여전히 매우 적다. 저소득층이나 소외계층을 도와주는 대부분의 인프라는 종교시설, 개인 독지가에 의한 사회복지시설, 사회단체 등이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공공부문보다 민간부문이 많다 보니 ‘사회복지’는 보편적이고 제도적인 시스템이라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선별해서 ‘시혜적’ 시선을 담아 도와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구조는 빈곤층이 직접 ‘가난을 증명’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사회 풍토를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한 존재이다.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신과 자존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정체감)이 삶에 필수적인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이를 훼손하면서까지 경제적 도움을 얻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가난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 표현’과 ‘도움 요청’은 자칫 위신과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장하는 청소년의 경우에는 이러한 행위가 교우관계나 자아정체감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떤 계층, 어떤 연령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표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가 가난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특성도 한몫 거든다. 한국사회는 100년 가까운 근현대사 동안 독립과 내전, 산업 부흥을 겪어왔다. 국가라는 공적 시슽템이 약했기 때문에 그 격동기를 ‘가족-우리’라는 사적 공동체와 ‘우수한 인력 양성’으로 버텨온 내성이 있다. 덕분에 한국사회는 현재와 같은 경제대국으로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약자에 대한 공격, 과도한 경쟁체계, 승자독식에 관대한 사회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에서 ‘가난’은 사회적,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약한 개인의 문제이며, 개인이 게으르고 똑똑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한국의 사회복지 제도가 발달하지 못하고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이유가 여기에 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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