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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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토너 앞에 놓인 장래는 밝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 P39

전쟁선포 후 처음 며칠 동안 스토너도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캠퍼스 내의 사람들 대부분을 사로잡은 혼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나 강사들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어도, 사실 그는 전쟁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쟁이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자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엄청난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쟁 때문에 대학의 일들이 중단된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의 내면에서 강렬한 애국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독일인들을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 P49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우리 학과에서 거의 3분의 1이 사라져버려서 말이야. 게다가 이 자리를 메울 사람을 찾을 희망도 없다네. 내가 화난 건 자네 때문이 아니야. .." 그는 스토너에게서 시선을 돌려 높은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그의 얼굴에 곧바로 떨어져서 주름살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눈 밑의 거뭇한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들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그가 병든 노인처럼 보였다. "나는 1860년에 태어났네. 반란의 전쟁(주로 북부 사람들이 남북전쟁을 부르던 이름))이 일어나기 직전이지. 물론 나는 그 전쟁의 기억이 없네. 너무 어렸으니까. 내 아버지도 내 기억 속에 없어. 전쟁 첫 해에 실로 전투에서 전사하셨거든." 그는 재빨리 스토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네. 전쟁은 단순히 수만 명, 수십 만 명의 청년들만 죽이는 게 아냐.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마음 속에서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뭔가가 죽어버린다네. 사람이 전쟁을 많이 겪고 나면 남는 건 짐승 같은 성질뿐ㄴ이야. 나나 자네 같은 사람들이 진흙탕 속에서 뽑아낸 그런 인간들 말일세."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학자에게 평생 구축하고자 했던 것을 파괴하라고 해서는 안 되네."

——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 P53

스토너는 이틀 동안 수업에 나가지 않고, 아는 사람들과 한 마디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내내 작은 바엥 틀어박혀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했다. 조용한 방과 책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바깥세상에서 멀게 들려오는 학생들의 고함소리, 벽돌로 포장된 길에서 따각따각 빠르게 마차가 달리는 소리, 시내에 열 대 남짓한 자동차의 단조로운 엔진소리 등이 아주 가끔씩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올 뿐이었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나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금요일에 매스터스와 핀치를 만나 자신은 독일군과 싸우러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 P55

고든이 이 질문에 대답한 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윌리엄의 아파트 앞에 차를 대기 직전에 고든 핀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지만, 아까 예배 중에 나는 계속 데이브 매스터스를 생각했네. 프랑스에서 죽은 데이브와 자기 책상에 앉아 죽은 채 이틀을 보낸 슬론. 두 사람의 죽음이 같은 종류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슬론하고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아마 좋은 사람이었겠지. 적어도 내가 듣기로는 그렇다고 했네.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교수를 물색하고, 새로운 학과장도 찾아봐야 해. 모든 게 그냥 이런 식으로 계속 돌고 도는 것만 같아. 도대체 이것이 다 뭔가 하는 생각이 드네."
"맞아." 윌리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고든 핀치에게 커다란 호감을 느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고든의 차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또 다른 한 부분이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천천히 그에게서 멀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 P128

"지난 1, 2주동안 아버지가 살이 많이 빠지셨다."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밭에 나가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내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나가버렸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야. 병이 너무 깊어서 제정신을 잃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던 거다. 의사말이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더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거라고."

어머니가 말하는 동안 스토너의 눈에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어머니도 이미 죽어버린 것 같았다. 어머니의 일부가 남편과 함께 저 상자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야 어머니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여윈 얼굴이 퀭하게 보였다. 피부가 늘어져서 가만히 있을 때조차 얇은 입술 사이로 치아 끝이 살짝 드러났다. 걸을 때는 무게도 힘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거실 밖으로 나가 어렸을 때 자신이 쓰던 방으로 가서 그 황량한 풍경 속에 서 있었다. 눈이 뜨겁고 건조했다.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 P151

윌리엄은 놀란 표정으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정말로 그렇게 믿는 거로군."
"당연하죠." 이디스가 말했다. "나는 그 아이 엄마예요."
스토너는 이디스가 방금 한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만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가 왠지 고요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를 증오하는군. 그렇지 않고, 이디스?"
"뭐라고요?" 그녀의 목소리에 깃든 놀라움은 진심이었다. "아, 윌리!" 그녀가 또렷란 소리로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소리 마세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은 내 남편인데요."
"아이를 이용하지 마시오." 그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요. 당신도 알 거요. 다른 건 뭐든 괜찮지만, 계속 그레이스를 이용한다면 내가…"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 P176

로맥스의 질문이 끝나고 홀랜드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스토너는 지금 훌륭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로맥스는 지나치게 나서지 않으면서 아주 매력적이고 유쾌하게 공연을 주관했다. 홀랜드가 질문을 던지는 동안 로맥스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우아한 척하며 몇 번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자신의 열정이 지나친 것을 사과하며, 홀랜드의 질문에 자신의 추측을 얹어 워커를 토론으로 이끌 때도 있었다. 그래서 마치 그가 실제로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질문의 문구를 다시 정리해서(항상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명하는 동안 원래의 질문 의도가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주 정교한 이론적 논쟁처럼 보이는 것에 워커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주로 그였다. 그는 계속 사과를 하면서 홀랜드의 질문을 자르고 자신이 직접 질문을 던져, 워커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동안 스토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핀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이 무거운 가면처럼 변해 있었다. 러더퍼드는 눈을 감고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홀랜드는 워커의 정중하지만 경멸 어린 태도와 로맥스의 열광적인 활기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토너는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과 분노와 슬픔이 점점 강렬해졌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바로볼 때 그들 중 누구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219

따스함과 애정, 오랜 친구를 향한 다정함과 존경심이 스토너의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그가 말했다. "물론, 알지, 고든. 내가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나?"
"좋았어." 핀치가 말했다. "한 가지 더 있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로맥스가 총장을 꽉 틀어쥐고 멋대로 휘두르고 있네. 그러니까 어쩌면 자네 생각보다 훨씬 더 심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자네는 그저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네. 그냥 전부 내 탓으로 돌려도 좋아. 내가 억지로 시켰다고 하게."
"지금 내 체면을 살리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세, 고든."
"그건 나도 알아." 핀치가 말했다. "내가 말실수를 했군. 그럼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게. 워커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그내, 나도 알지. 원칙이 중요하다는 것. 하지만, 자네가 생각해야 할 또 다른 원칙이 있네."
"원칙 때문이 아니야." 스토너가 말했다. "문제는 워커일세. 그 친구를 강의실에 풀어놓는 건 재앙이 될 거야.
——-중략

"고든, 데이브 매스터스가 엣날에 했던 말 기억하나?"
핀치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썹을 치떴다. "갑자기 데이브 매스터스 얘기는 왜?"
스토너는 맞은편 창밖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 셋이 함께 있을 때 그 친구가 뭐라고 했냐면… 대학이 소외된 자, 불구가 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라는 얘기를 했어. 하지만 그건 워커 같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지. 데이브라면 워커를….. 세상으로 보았을 걸세. 그러니까 그 친구를 허락할 수가 없어. 만약 우리가 허락한다면,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은 그 친구를 허락하지 않는 것뿐일세." - P235

"내 아주 솔직하게 말하겠네, 스토너." 로맥스가 말했다. 이제 분노가 잦아들어서 목소리가 차분하고 냉정했다. "내 생각에 자네는 교육자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닐세. 재능과 학식보다 편견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절대 안 되지. 내게 그럴 힘이 있다면 십중팔구 자네를 해고했을 걸세. 하지만 우리 둘 다 알다시피 내게는 그럴 힘이 없지. 우리는…. 자네는 종신교수 제도의 보호를 받고 있네. 나도 그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내가 위선을 떨 필요는 없네. 난 이제 무슨 일에서든 자네와 얽히는 건 사양일세. 절대로. 그렇지 않은 척 가식을 떨지도 않을 거야." - P248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 것 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분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 P252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 누구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문득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세상이 자신을 향해, 캐서린을 향해, 두 사람이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작은 방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세상을 지켜보면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지어 캐서린에게도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 P284

"장기적으로 내다봤을 때, 날 이 자리에 붙들어둔 것은 이디스도 아니고 심지어 그레이스도 아니오. 반드시 그레이스를 잃을 것이라는 사실도 아니지 당신이나 내가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추문 때문도 아니오, 우리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도 아니고, 어쩌면 사랑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도 아니오. 그저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 우리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알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도 세상의 일부인 거요. 그걸 알았어야 하는 건데.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뒤로 물러나서 그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래야 우리가….." - P303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므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 P309

전쟁이 벌어진 몇 해 동안은 시간이 흐릿하게 한데 뭉쳐서 흘러갔다. 스토너는 견디기 힘든 맹렬한 폭풍 속으르 지나갈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생각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데에만 고정시킨 채 그 시절을 겪어냈다. 하지만 단단한 인내심과 무신경함으로 하루를 보내고 몇 주를 보내면서도 그의 마음속은 격렬히 분열되어 있었다. 마음 한쪽은 매일 헛되이 스러지는 생명, 냉혹하게 마음과 정신을 강타하는 수많은 파괴와 죽음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러들었다. 이번에도 교수진이 고갈되었고, 강의실에서 젊은 청년들이 사라졌으며, 남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그 얼굴들에서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마음, 모질게 마모되어 사라지는 감정과 애정을 보았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 한구석은 그가 움츠리며 피한 그 학살을 향해 강렬히 끌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도 몰랐던 폭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그 일에 참여하기를 갈망했으며, 죽음의 맛과 쓰라린 파괴의 기쁨과 피의 느낌을 원했다. 그는 수치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또한 자신과 이 시대, 그리고 자신 같은 인간을 만들어낸 주변 상황에 쓰디 쓴 실망을 느꼈다. - P347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 P353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 P390

스토너의 삶은 행복하다. 우리들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끝까지 애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 작가 윌리엄스는 이 소설을 슬프다고 생각하는 독자의 반응에 오히려 놀랐다고 한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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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페이지 저자, 송섬별 역자 / 반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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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이 지닌 양가성을 다룬 소설 <마더 나이트>를 읽고 있었다. "우리는 우기가 흉내 내는 그 사람이 되므로, 어떤 사람을 흉내 낼지 신중히 골라야 한다."라고 보니것은 썼다. - P24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 사이에 수많은 잡음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이 정말 슬프다. 문득 발을 미끄러뜨리는 시커먼 바위가 솟아나 우리 둘을 아래로 넘어뜨린 거다. - P53

아버지를 용서하기는 그만큼 쉽지 않았다. "당장 토론토롤 가서 네 엉덩이를 걷어차 주마." 자기 자식이 보호를 필요로 했을 때, 자기 자식이 사랑을 필요로 했을 때, 그는 폭력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미성년자인 내가 겁도 없이 성인 남자와 인터넷으로 교류했다는 이유로 노여워했다. 그 순간에 내게 돌봄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 순간에 내게 안전과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영영 그런 것을 얻을 날은 없지 않을까? 아버지의 그 한마디 말은 그 남자의 위협보다, 그의 집착보다, 내 팔을 훑던 그의 손가락보다 내 몸속에 더욱 오래 머물렀다. - P89

"그럴 줄 알았어, 넌 동성애자잖아!"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렇게 반응했다.
마치 이런 노력을 애써 사소한 것으로 일축하고자 하는 듯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경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 경험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권력을 여기저기에 과시하고 다니면서,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그때의 나는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없었다. 나는 숙이고, 받아들이고, 그저 마음속에서 삭일 뿐이었다. - P109

내가 퀴어라는 것 때문에 벌을 받는 와중에도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대놓고 학대하면서도 보호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뒤틀린 체계에서 잔혹성은 보편적이며 평범하게 보이고, 이를 해소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도리어 이상해 보인다." 꼭 읽어 볼 만한 책인 세라 슐먼Sarah Schulman의 <끈끈한 유대감: 가족 내의 호모포비아와 그 결과>에 나오는 구절이다. - P163

로스엔젤레스의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거나 그들이 영영 읽지 않을 책을 사 주면 대체로 무시당하곤 했다. 자원 이용, 기후위기, 기후위기가 얼마나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지, 그것이 가장 취약한 이들부터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 대가는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클 것이라는 이야기, 얼마 남지 않은 사회의 붕괴와 그 속에서의 우리의 역할 같은 주제로 논의를 하려 들면 그들은 너무 드라마틱한 거 아니야? 하며 나를 향해 킥킥 웃었다.
대부분은 "너 오버하는 거 같아."라는 반응을 보였다.
"넌 레즈비언 히피야." 이렇게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면 난 답답했고,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으며, 관심과 공감을 얻지 못해 기운이 빠졌다. 부유함은 자격이 있다고 여기게 되는 마음을 부추키고, 자격을 얻으려면 무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독선적이며 타인을 재단하는 나의 성정은 로스엔젤레스에서 불필요한 소비를 하며 살아가는 나 자신의 죄책감을 경감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 P178

성장과 확장을 멈추고 싶지 않았고, 멈추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더욱 성장하려고 애썼고, 독선을 버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언제나 배워야 할 게 더 있었다. - P188

좋아, 이번에는 말하는 거야. 이번만큼은 내 목소리를 내는 거야.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왜 저한테 그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연습했다. 이것도 연기인가?
그러나 당연하게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온 힘을 다할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계단 위아래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 나면, 스니커즈를 채 벗기도 전에 등이 아프고, 불안해지고, 배 속에는 가스가 차고, 가슴 속에 벽돌을 품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본능적인 기부느 재단하는 눈길들. 그 기분은 여태 한 다짐을 낚아챈 뒤 린다가 크럼블에 넣는 피칸처럼 가루로 만들어버린다. 끈을 당겨 자동적인 반응만 되풀이하는 인형처럼, 진짜조차도 아니었다. 이제와 돌아보면 나는 린다에게 사랑받고 아버지를 흡족하게 하려고 내가 소진될 때까지 온 힘을 다했다. 아버지가 내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분명 내가 문제일 테니까, 또, 언젠가는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안전한 기분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나는 집에 발길을 끊게 됐다. - P223

세상은 우리가 트랜스가 아니라 정신병자라고 말한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내 신체를 훼손했다고, 나는 영영 여성일 것이라고 말하며 내 몸을 나치의 실험에 비유한다. 병에 시달리는 것은 트랜스가 아니라 이런 혐오를 길러내는 사회다. 배우이자 작가 젠 리처즈Jen Richards는 이렇게 표현한 적 있다.

10년 전에 트랜지션을 한 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건강하며, 친구와 가족들과의 관계도 좋아졌고, 더 나은, 더 참여하는 시민으로 살고, 그뿐 아니라 더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다가…… 모르는 사람들이 내 선택을 병적인 것이라 말하는 모습을 보면 초현실적인 기분이 든다. 내가 트랜스라는 걸 생각할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것은 나를 사회 정의에 더욱 공감하고 참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것 외에는 내 현재와 거의 관련이 없는, 내 과거에 관한 사실일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가? 어째서 나의 평화에 독설, 폭력, 보호가 필요한가? - P289

이 푸른색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색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된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속에 자리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의 여지 없이. - P327

자신의 존재가 끊임없이 논쟁과 부정의 대상이 되는 일은 우리를 고갈시키고 만다. - P385

자신의 진실을 묻고, 확인하고, 자신에게 그리고 나아가 세상에 말하는 일이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임을 그들도 알았으면 좋겠다.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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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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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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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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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접근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저거 염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쇼펜하우어는 묻는다. 정말로 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우리의 자존심을 카드놀이 하는 집단에게 내맡기는 것이 분별력 있는 일일까?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존중한다 해도 그 존중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일까?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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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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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존심 역시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우호적인 시선을 받고 싶은 강렬한 요구는 과거와 다름없이 우리 생각을 지배한다.

이성의 규칙에 따르면 주어진 결론은 타당성 있는 최초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일련의 논리적 사고를 거쳐 도출되었을 경우에만, 오직 그런 경우에만 참으로 간주된다.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167)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에 대하여 하는 말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며, 먼저 이성으로 그런 말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품위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좌우되지 않는다."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는가?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 마르쿠스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고 권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을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질책이 무조건 근거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가치 평가를 지적인 양심에 맡기는 것은 무조건적 사랑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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